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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자 의식

작성자토봉|작성시간26.06.09|조회수19 목록 댓글 0

관찰자 의식

정 성 천

중국 불교 중 하나인 선종(禪宗) 전래에 유명한 일화가 있다. 불교 경전과 노장사상에 심취해 봤으나 진정한 깨달음을 얻지 못했던 ‘신광’(후에 ‘달마대사’로부터 ‘혜가’라는 법명을 받음)이 520년경 숭산 소림사에서 면벽수행 중인 ‘달마대사’를 찾아간다. ‘혜가’는 ‘달마’의 수행처 문 앞에서 폭설 속에 밤을 꼬박 새우며 법을 구했으나 ‘달마’는 처음에는 침묵으로 응답하다가 날이 새자 그의 진심을 시험하려고 이렇게 말한다. “작은 뜻으로는 큰 법을 얻을 수가 없다.”

 

이 말에 ‘혜가’는 왼팔을 스스로 잘라 밤새 내린 백설 위에 붉은 피를 뿌리며 ‘달마’ 앞에 진심을 보인다. “훌륭하구나. 부처와 보살은 몸과 목숨에 집착하지 않는 법이다.” 이렇게 말하며 ‘달마’는 그의 구도심을 인정한다. 그러자 ‘혜가’는 “제 마음이 불안하니 편안하게 해주십시오.”라고 법을 청한다. 이에 ‘달마’는 “불안한 그 마음을 가져오너라.”라고 설하니 ‘혜가’는 잠시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아무리 찾아도 그 마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이에 ‘달마’가 답하기를 “찾을 수 없다면 이미 편안해진 것이다.” 그 순간 ‘혜가’는 마음의 본래 성품을 깨닫고 큰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해서 중국의 선종 불교가 초대 ‘달마대사’에서 2대 ‘혜가’로 전수되고 6조 ‘혜능’까지 그 법 맥을 이어간다.

 

‘혜가’가 “마음을 찾을 수 없다”라고 말한 것은 단순히 불안을 억누르거나 회피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불안이라는 감정이 실체가 없음을 알아차린 것으로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내면에 마음을 관찰하는 주체가 따로 있다는 자각은 불교에서 흔히 ‘알아차림(사띠)’ 즉 한자어 번역으로는 ‘관(觀)’의 상태로 언급된다. 초기 불교 경전인 ‘잡아함경’ 권 12에서 “觀心心行,知心有欲,知心無欲;知心有瞋,知心無瞋;知心有癡,知心無癡。”( 마음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욕망이 있는지 없는지, 성냄이 있는지 없는지, 어리석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차리라. ) 인간 괴로움의 삼독(三毒)인 탐,진,치(貪,瞋,癡)를 다루는 방법으로 ‘관찰자 의식’으로 마음을 바라볼 것을 주문한다.

 

고려 중기(12세기 후반~13세기 초) 활동했던 우리나라 ‘보조 지눌(普照知訥, 1158~1210)’ 대사도 송광사에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주도하며 이렇게 말했다. “唯觀心一法 摠攝諸行 名爲省要”( 오로지 마음을 관찰하는 그 한 가지의 법이 모든 수행을 포괄하며 가장 요긴하다.) 라고 ‘觀’을 말하며 수행의 핵심은 마음을 억누르거나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혜심’은 ‘지눌’의 제자로, 스승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마음을 관찰하는 것, 바로 그것이 수행이니라.”라는 관심론(觀心論)을 저술했으며 그는 제자들에게 “마음을 찾으려 하면 찾을 수 없고, 다만 관찰할 뿐이다”라고 가르쳤다.

 

물리학이 발전함에 따라 고전 물리학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현대 물리학의 한 분야인 양자역학의 이중슬릿 실험에서 일어났다. 전자가 파동인지 입자인지를 알아보는 실험에서 관찰하지 않을 때는 파동처럼 행동하여 간섭무늬를 만드나 경로를 측정하는 관찰 행위가 개입되는 순간 입자처럼 행동하며 간섭무늬를 소멸시킨다. 즉 ‘관찰자 의식’이 실험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 는 의미이다. 지금은 더 나아가 일련의 학자들은 뇌 속 미세소관(microtubules)에서 양자 중첩이 형성되고 중력에 의해 붕괴할 때 인간 의식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아직 과학이 밝혀내지 못한 인간 의식을 단순한 뇌 활동이 아니라 양자적 과정과 직결되어 있으며 ‘관찰자 의식’이 현실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이는 2,500년 전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진리 즉 자기 마음을 바라보는 ‘관찰자 의식’이 마음에 일어나는 부정적인 요소(분노, 절망, 슬픔, 회한, 짜증, 시기, 질투, 우울 등)를 아무런 부작용도 없이 소멸시켜 평온한 마음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 는 사실을 첨단 현대과학인 양자역학이 증명하고 있는 셈이 된다.

 

현대 심리학에서도 ‘관찰자 의식’은 마음 챙김(mindfulness)과 메타인지(meta-cognition)의 핵심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단순한 ‘자기 인식’이 아니라 자신을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는 능력으로, 이를 꾸준히 훈련하면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힘을 키울 수 있어 평온한 마음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현대 심리치료에서도 ‘생각과 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즉 ‘관찰자 의식’을 길러 인지 왜곡을 줄이고 감정 조절을 돕는 핵심 기법으로 활용된다. 특히 인지행동치료(CBT), 마음 챙김 기반 치료(MBCT), 수용전념치료(ACT)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요즘 서구 선진국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교회에 대한 신뢰 저하와 함께, 자기 성찰과 정신적 웰빙을 중시하는 사회적 경향성과 맞물려 집단 신앙을 강조하는 제도권 교회 활동보다도 개인 영성을 강조하는 명상 활동이 더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서유럽에서는 교회의 신자 수가 줄어들어 역사 깊은 교회 건물이 카페나 술집, 식당 등으로 변모되는 속도가 가속화되고 있는 반면에 온갖 명상 센터는 우후죽순으로 많이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많은 종류의 명상들이 있겠으나 모든 명상의 요체는 ‘관찰자 의식’을 자기 내면에서 찾아내어 그 자리에 익숙해지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명상은 생각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일어나는 과정을 관찰하는 것이다. 요즘 명상 훈련은 호흡·신체·일상의 마음 경험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연습으로, 전통적 수행법과 현대 뇌과학적 루틴이 결합해 실용적 효과를 입증하고 있다.

 

일찍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한국 불교의 선(禪)을 미국인들에게 소개하고 가르치신 숭산 스님이 주장한 모든 분별 이전의 ‘모름’의 상태 즉 생각 이전의 ‘청정한 본성 자리’ 그리고 보조 지눌 대사가 말했던 ‘모든 분별 경험을 초월한 본래의 청정한 앎’의 상태 즉 비어 있으면서도 또렷한 자각 상태인 공적 영지(空寂 靈知)의 자리, 또한 현대 서양 철학·심리학·교육학에 큰 영향을 끼쳤으나 특정 종교나 철학 체계에 속하지 않고 ‘진리는 길 없는 땅(Truth is a pathless land)’이라는 선언으로 서양 영성 지도자들 사이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지두 크리슈나무르티(Jiddu Krishnamurti)’가 주장한 ‘내면의 관찰과 주의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행복’ 등은 모두가 같은 ‘관찰자 의식’을 가리키고 있다. 고 생각된다.

 

모든 경험의 근원은 하나의 의식이며 진정한 행복은 외부 성취나 소유가 아니고 내면의 의식 자체가 행복과 평화의 근원이다. ‘판단 없는 관찰’과 ‘현재 순간의 알아차림’은 ‘관찰자 의식’을 실행하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생각과 감정은 ‘나’가 아니라 단지 지나가는 에너지이며, 이를 관찰할 때 의식 수준은 부정적인 짜증이나 두려움에서 사랑·평화로 도약한다. 지금 바로 이 순간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느낌, 생각, 감정 등을 제때 판단 없이 바라보고 알아차릴 수 있다면 자기 자신에게는 내적 평화와 행복을, 주위 사람들에게는 공감과 안정감을 제공하는 ‘심리적 촉매제’가 될 뿐만 아니라 궁극적 깨달음을 위해 일상생활 속에서도 할 수 있는 훌륭한 수행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모든 순간이 자기 성장을 위한 수행의 시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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