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선생님은 나의 멘토다. 내가 당신을 멘토로 의지하는 줄 그분은 모른다. 멘토와 멘티는 돈독한 유대관계로 서로 생각을 나눠야 하지만 나는 그를 일방적으로 존경하고 있는 셈이다.
선생님과는 문학 등단 동기다. 어느새 만난 지 20여 년이 훌쩍 지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여전히 다른 것을 기웃대고 선생님은 올곧게 글로 한우물만 파셨다. 풀 한 포기 하늘 한번 바라보는 것도 글과 연결 고리를 묶었고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글에 부끄럽지 않다.
꽃 사진을 찍으러 같이 갔다. 어떻게 해야 잘 찍을까 이리저리 재고 있으면 어느새 찰칵 찍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 요 녀석 봐라. 입을 뾰족하게 내민 것이 귀여워 죽겠네. 춥지 않니. 상처가 났네. 너도 힘들겠다.
날씨에 따라 꽃들이 더울까 추울까, 비 맞을까 봐, 자식 걱정하듯 다독여주는 모습을 보노라면 때론 더럭 겁이 나곤 한다. 저런 마음을 지녀야 하는데 그렇게 살지 못하는 내 실체가 탄로가 날까 봐서이다. 선생님의 말씀과 행동을 흉내는 낼 수 있지만, 심성은 따라 할 수가 없다. 꽃뿐이랴. 인연 닿은 모든 것을 대하는 마음이 지극하다. 지극한 마음에서 나오는 글은 지극할 수밖에 없다.
선생님을 멘토로 모시는 까닭은 이보다 더한데 있다. 매사가 철저한 게 본받을 점이다. 맵고 끊음이 분명하다. 옳고 그름의 판단이 명확하다.
특히 글에 관한 한 더욱 매섭다. 토씨 하나 문장 하나를 허투루 썼다간 두 번 다시 안 볼 듯 야단을 맞는다. 처음엔 서운하고 자존심도 상해 곁에 가기를 주저한 적도 있으나 그것은 내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매를 맞을수록 자신 있게 글을 내놓을 수 있었고 매 맞은 후에야 정신이 차려지는 때도 있었다.
최근엔 글을 한 달 멀리하면 글은 일 년을 도망간다. 도망간 글을 잡아오기가 쉽지 않으니 글 쓰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말씀을 예사로 들었다가 전전긍긍하고 있다. 시골로 내려와 전원생활을 시작할 때는 글을 쓰겠다고 호기 있게 장담을 했었다. 그러나 몸에 익지 않은 시골 일에 적응하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손님맞이 하랴, 풀과 씨름하다 보면 하루해가 언제 넘어가는지 모른다.
조금은 한가한 겨울, 밖으로 나다니는 시간보다 책을 읽고 시집을 뒤적이고 사색을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마음을 추스르고 글을 잡으려고 하니 대체 엮이질 않는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따끔한 질책을 듣고 싶어서다.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말로 떠들면 수다로 끝나지만 글은 사유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준다. 수다로 귀한 시간을 써 버리는 걸 용납 않는 나의 멘토에게 다가가는 일은 글 밖에 없다. 소소한 일상에서 삶의 지혜와 철학적인 영감을 나눌 수 있으려면 글로 대들어야 한다. 그래야 상대를 해 준다.
몇 십리는 도망간 글을 잡아오려니 힘이 든다. 매 한 대 따끔하게 맞을 준비를 하니 언 강물 위에 맨발로 서 있는 것처럼 정신이 번쩍 난다. <옮겨온 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