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말씀(2026.6.7.) 말씀/ 마태복음 9:10-11 현실에 뿌리 내린 신앙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오늘은 ’현실에 뿌리내린 영성‘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신앙의 영성이 깊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성경을 백 번 천 번 많이 읽는 것, 기도를 하루에 다섯, 여섯, 일곱 시간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교회에 자주 와서 열심히 봉사하고 전도하는 것을 말할까요? 정말 훌륭하고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으로 실천 되어지지 않는 삶이라면 그것은 영성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명의 말씀이라도 세상의 빛이요 소금으로 나타내져야 생명입니다. 지식으로 머물러있는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이 빛이요 소금이라고 하신 것은 영성은 결국 세상의 삶 속에 있다는 것을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영성의 특징은 성장하고 자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시절부터 선생들 사이에서 묻기도 하고 듣기도 하시며 지혜와 키가 자라가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영성 있는 신앙인이 되려면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하고, 열심히 배우며 성장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특히 지도자가 되려느 사람은 더욱 그렇습니다. 본히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손에 성경, 한 손에 신문‘. 하나님과 세상. 삶과 배움에도 균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지식만 아니라 마음을 넓혀서 한 손에 ’인문 고전 철학‘을 들고 세상을 알고 그 속에 실천할 때 우리는 영성 깊은 신앙인이 되리라 믿습니다. 그동안 기독교인들에게 평생 강조되는 중요한 교리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 오직 하나님의 말씀, 오직 하나님 사랑이었습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교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좋은 것도 한 쪽에 매달리고 치우치면 좁고 편협한 사고와 생각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밝은 빛만을 쳐다보면 눈이 멀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한 번쯤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나의 신앙이 정말 옳은지 지금 잘 가고 있는지 한번은 의심해보아야 합니다. 깊은 영성이란 과연 높은 곳에만 있는 것인지? 낮은 곳에는 없는지? 높은 산일수록 골이 깊은 것처럼 영성 역시 낮은 곳에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산과 계곡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리고 양면성입니다. 하늘과 땅,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 나라와 세상,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가지를 함께 지향하며 이해하는 것이 영성 접근에 올바른 방법이라고 봅니다.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 나라만 바라보며 산다고 한다면 최고의 신앙같지만 반쪽에 치우친 좁고 편협한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광대하신 하나님 만유의 주되신 하나님, 우주적인 하나님을 모시어 들이려면 하늘과 땅 빛과 어두움, 양 측면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 45장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사 45:7) 이사야가 하나님에 대해서 뭐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이 어둠도 지으셨다고? 그렇습니다. 빛과 어둠, 평안과 환란,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넘어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과거 기독교 역사를 볼 때 오직 하나님의 영광, 말씀의 절대 무오, 교황의 무오설을 주장하며 신앙의 절대 권위를 외치며 사람을 함부로 대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중세가 가장 타락하였고, 편협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녀사냥을 당해 죽었습니다. 기독교 사고가 너무 좁고 편협해서 오히려 세상을 감당하지 못하고 부패해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과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이태리 중심으로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인간 중심의 사고, 고전의 재발견. 프랑스어로 부흥, 재탄생이란 뜻입니다. 물론 르네상스 인문주의도 그것에 치우치면 문제가 됩니다. 자칫 균형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균형을 잃으면 무엇이든지 문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신.인의 모습으로 우리를 만나주셨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같은 모양으로 오셔서 하나님 사랑뿐 아니라 이웃 사랑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신성과 인성으로 두 가지를 다 보고 배울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균형있는 신앙을 갖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알기를 원한다면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부터 배워야 합니다. 저 높은 하늘을 소망하며 살려면 이 땅의 낮는 곳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가난하고 병든 자들 속에, 옥에 갇힌 자들 속에,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돌아보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함으로 우리는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 땅 바다 대 자연 속으로 들어가 보면 어디든지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이 온 우주에 가득합니다. 이런 아름답고 광대한 자연 속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주변의 형제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람이든 자연이든 모든 만물을 사랑함으로써 만유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주님은 원수마저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함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먹고 마시는 것도 일상의 일도 소흘이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금욕과 영적인 것만 강조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데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육과 영을 이원론적으로 나눌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과 죄인들과 먹고 마시셨습니다. 죄인들과 떡을 떼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기 전에 갈릴리 바닷가에서 비취 파티를 여시고 생선과 떡을 구워 섬기실 때 그곳에 놀라운 사랑의 고백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피로 구원받은 영혼뿐 아니라 육체도 소중히 관리해야 합니다. 그것이 영성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길입니다. 육체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 영혼뿐 아니라 육체도 깨끗하게 건강하게 관리해서 주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하고 깨끗한 몸으로 하나님을 더 잘 섬길 수 있습니다. 정기적인 건강검진도 받아야 합니다. 제가 몸이 아프게 된다면 어떻게 매일 새벽 4시부터 일어나 말씀 역사를 섬길 수 있습니까? 어떻게 밤늦게까지 독서모임을 인도하고, 주일예배를 섬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이들수록 더욱 건강을 위해 노력하고 있고, 매일 일 만보 걷기 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하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세상 역시 썩어질 것이라고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 빠져서는 안 되지만 사랑하고, 잘 가꾸어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위해서 세상적인 것을 구분하고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 먹고 마시는 육체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는 세속적 생각과 가치관과 사고와 탐욕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바울은 육체를 쳐 복종시켜야 한다고 하였지만 그것은 단지 육체에 대한 학대가 아니라 쾌락과 죄의 본능을 쫓는 육체의 소욕을 가리킵니다. 영성은 결코 좁고 편협하지 않습니다. 영성은 하나님과 사람. 영과 육. 빛과 어둠, 하늘과 땅! 온 우주를 다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다 품어야 우주교회이고, 우주적인 신앙입니다. 저는 처음에는 기도 많이 하고, 금식을 많이 하고, 세상을 버리는 것이 영성인 줄로 생각했습니다. 가족들 정과 욕심을 끊고자 하였습니다. 제주에 있으면서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맡겨야 한다고 할머니 상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영성은 이런 것이 아니구나 깨닫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오래전에 유진피터슨이 쓴 <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이란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저에게 신앙이 관념이 아니라는 것, 삶의 영성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었고, 교회 안에서의 하나님만이 아닌 온 세상 우주의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데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사고의 각도를 바꿀 수 있었습니다. 이 분은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였습니다. 밖에서 사촌 형의 관심과 사람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나중에 교회로 들어왔다고 하였습니다. ”아, 우주의 하나님이라면 밖에서도 만날 수 있는 것이구나.“ 그리고 성경 속의 제사장을 생각할 때는 늘 섬김받는 교회 목사님이 떠오르기보다. 삶의 현장 푸주간에서 고기를 썰며 어려운 이웃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섬기시던 푸주간 아버지가 더 생각이 났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영성이 있는 것 같은 교회에 영성이 없고, 영성이 없는 것 같은 세상에 영성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충격적이었습니다. ”맞아, 모든 인간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있고, 모든 자연 속에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이 들어있다면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신 것이고,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야.“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을 핑계치 못할 것이라는 로마서 말씀도 생각났습니다. 나도 모르게 형성된 과거의 신앙 규범이나 틀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수요일 수예배 대신 수요 독서모임이라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깨달음의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얼마든지 독서모임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형식이 아닌 내용이고 진정성입니다. 주 안에서 큐티를 나누고, 책을 읽고 서로 배우며 은혜를 나누고 그러면서 전인적으로 성장해가는 이 모임이 진정 ’실용 예배‘가 아니겠습니까? 처음에 저는 크게 기대를 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독서를 하면서 구체적 지체들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도 보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성경 주석, 신학 책에만 매달렸지만 세상 인문 고전에 실린 그 모든 지식들도 영적인 것과 연결 되어지고 있으며, 구체적인 신앙생활에 아주 도움이 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쟁과 평화, 레미제라블, 니체는 나체다, 데미안, 데카르트 이런 책들도 영적인 시각으로 읽고 배울 때 한편의 거대한 설교들이 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연결입니다. 성경과 인문고전, 내용과 그것을 담는 그릇, 배움과 실천. 연결될 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어떻게 보면 진짜 보약입니다. 잠언에 ’좋은 말은 양약‘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잠언16:24)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들어가야 치유의 역사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아무 때나 아무런 검사도 없이 환자에게 투여할 수 없습니다. 약이 환자의 몸에 들어가서 효력을 발생하려면 먼저 약이 몸에 맞아야 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합니다. 약을 투여하기 전에 여러 가지 신체 반응 검사가 필요합니다. 같은 병자라도 환자에 따라서 분량과 처방이 다릅니다. 중환자의 경우는 수술을 미루고 체력을 보완하는 일을 먼저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미루고 기다리는 것도 모무 치료과정입니다. 양약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도 우리가 인문고전 독서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삐뚤어진 생각 사고를 확장시키고, 좁아진 혈관을 뚫어 피 순환이 잘 되어 약이 효과적으로 스며들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곁에 두고 읽는 니체나, 장자나,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이런 책들이 우리의 사유의 시선을 넓히고 확장시키며 삶의 실천 능력을 키우는 힘이 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생명뿐 아니라 우리가 얻은 생명이 넓고 좋은 그릇 안에서 효력을 발휘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다메석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후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 동안 성령으로부터 훈련을 받은 후 고백하기를 자기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사도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3:12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깨닫고 보니 자기는 죄인 중의 괴수였습니다.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사도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간절하였고, 얼마나 겸손했는지 모릅니다. 그는 언제나 멈추지 않고 배우고 성장하며 자신을 그리스도를 담을 수 있는 최고의 그릇으로 빚어갔습니다. 이름도 사울에서 바울로 바뀌었습니다(사울은 큰 자, 바울 작은자).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서도 끊임없이 더 배우고 성장하고자 하는 열망이 그를 이렇게 겸손의 그릇으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의 영성은 낮아짐의 영성, 겸손의 영성이었습니다. 또 한분 저는 아시스의 성자 성프란시스를 아주 좋아합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만인이 알아주는 깊은 영성가였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겸손한지... 언제나 자신은 죄인이고 부족한 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영성은 삶과 분리된 적이 없습니다. 한번은 형제들과 금식을 하고 있었는데 한 형제가 금식 중에 너무 배가고파서 밥을 먹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낙담을 하였습니다. ”나는 주의 길을 갈 자격이 없다. 나같은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것을 안 성프란시스는 자기도 바로 금식을 끊고 밥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형제에게 가서 낙심하지 말도록 위로하였습니다. 자기 스승도 금식을 깨고 밥을 먹었다는 것을 알고는 큰 힘을 얻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게 진짜 영성이라고 무릎을 쳤습니다. ”깊은 금식 기도가 영성이 아니라 밥을 먹고 연약한 형제와 함께 하며 힘을 주고 사랑으로 일으키는 저 행위가 바로 더 깊은 영성이다.“ 제가 처음 신앙생활 할 때는 세상에서 내 믿음의 가장 큰 줄 알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고 생각했습니다. 목표도 순복음 교회처럼 큰 교회를 하는 것이고 외형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가면 갈수록 내 믿음이 작고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만 사랑한다고 하였지만 그 사랑마저 너무 적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도 품기가 어려운 인격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해야하지? 배우지 않으면 더 이상 클 수 없고 지금 한계에 갇힐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들은 것이 책이었습니다. 먼저 내 그릇을 넓히는 것, 책을 읽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내 좁은 생각 속에 주님을 모시고, 내 편협한 생각 속에 말씀을, 믿음과 사랑을 담을 수 없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사고와 가치관이 좁고 편협하다면 우리가 믿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베드로가 자신은 주님을 안 버린다고 죽는데 까지 따라간다고 큰 소리 쳤지만는 게집 종 앞에서 세 번이나 분하고 나중에 제일 먼저 도망을 갈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더욱 큰 믿음의 사람이 되고 싶다면 주님 앞에서 모르는 자가 되고, 연약하고 부족한 자임을 먼저 인식하고 아는 바를 삶 속에서 실천 해 봄으로서 내 신앙의 영성을 입증 해 보여야 합니다. 관념의 높은 이상에서 삶의 현실이란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시지 않았습니까? 빌립보서 2:6-10절을 보십시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높고 거룩하신 주님은 스스로 죄인처럼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하늘 높은 분이 땅 끝까지 낮아지셨습니다. 그리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들 모두가 이렇게 믿음의 경륜이 더해질수록 더 모르는 자가 되고, 더 약한 자가 되고, 더 부족한 자가 되고, 삶의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서 참 예수님을 닮아가는 깊은 영성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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