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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말씀

네 검을 도로 집에 꽅으라(마태 26:47-56)

작성자바다해|작성시간26.06.16|조회수40 목록 댓글 0

 




주일 생명 말씀(2026.6.14)
말씀/ 마태 26:47-56, 고전 16:14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세상을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감정이 상하고 분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화가 나고 밉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혼내주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억울할 때는 죽이고 싶은 심정까지 일어납니다. “아, 그래서 살인이 일어나는가 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 처해 본 적이 없습니까? 중학교 때 자꾸 나를 괴롭히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나는 가난했고 학교에 와서 공부만 했는데... 좀 부자였던 그 친구가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는지 자꾸 시비를 걸었습니다. 얼마나 화가 나는지 주먹이 얼굴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옆에서 누가 보니 제 얼굴이 새 하야지더라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사고를 쳐서는 안 되겠다 싶어 손을 내리고 참았습니다. 잘 참았지요. 이성이 감정을 억눌러 사고를 못치게 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매일 양보만 하고 저주기만 하며 살 수 없습니다. 성경은 죄와 불의에 대해서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할 것을 이야기합니다. 때로는 싸워야 하고, 싸움에서는 이겨야 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옳다면 무조건 이겨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니면 지고도 류신의 ‘아 Q’ 처럼 정신승리를 하며 물러섭니더, 그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오래전 선교단체 시절 서울에 한 번씩 모임이 있어서 가면 가끔 선배 목자님 중에 무용담을 들려줍니다. 어떤 사람이 복음 역사를 방해하며 막무가네로 시비를 걸기에 엎어치기를 했더니만 꼬리를 빼고 도망가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당시는 들으면서 속이 후련하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그래서는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한번은 우리 교회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한 자매를 쫓아다니면 괴롭히는 어떤 형제가 있었습니다. 화가 나서 우리 안에 덩치도 있고 힘도 있는 목자에게 그 문제를 도와주라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괴롭히던 형제를 불러 몇 번 충고를 하고는 훅을 날렸습니다. 그 형제도 태권도를 하는 형제였지만 주먹을 쓰지 않았고 결국 주먹을 쓴 우리 형제가 계속 시달림을 받았습니다. 주먹으로 맞은 형제의 어머니가 쫓아와서 믿는 사람이 폭력을 썼다고 항의를 했던 것입니다. 당시만 해도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요즘은 큰 일납니다. 나중에 합의 해줘야하고 돈 다 물어줘야 합니다. 이것을 이용해서 일부러 맞는 사람도 있습니다. 감정의 싸움과 폭력은 절대 안 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더 더욱 그렇습니다.
에베소서 말씀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하였습니다. 혈과 육으로 악을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혈과 육으로 싸우면 악에 악을 더 쌓고 죄에 죄를 더 쌓을 뿐입니다. <코끼리 길들이기>라는 책이 있는데 여기에 보면 어떻게 분노의 마귀를 때려잡을 수 있는지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더럽다고 악하다고 감정으로 대하고 분으로 더하면 분노의 마귀는 더욱 커져 가고 나중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고, 반대로 온유함과 겸손과 사랑과 섬김으로 대하면 그 더럽고 악한 마귀가 점점 작아져서 소멸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참 감동있게 읽었습니다.
창세기에도 보면 야곱의 딸 디나 사건이 나옵니다.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다 숙곳에 이르러 세겜성에 머물다가 디나가 그곳 추장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을 당합니다. 그 오라비 레위와 시므온이 화가 나서 이스라엘의 수치를 제한다고 그곳에 가서 사람들을 속여 할례를 받게 하고는 칼로 살육을 자행합니다. 레위와 시므온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데 이방 땅에서 감정적으로 대한 것입니다. 결과가 어떠하였습니까? 야 야곱은 장차 일어날 일들로 복수극이 두려워서 더 이상 그 곳에 머물지 못하고 떠나게 됩니다. 문제는 이 감정적 사건으로 이해서 레위와 시므온이 저주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12 아들 축복기도 내용을 보면 이 때의 일이 고스란히 기록되고 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창세기 49:4-7). 근본 잘못은 세겜족에게 있었지만 감정으로 대한 결과 저주가 고스란히 자신들에게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본문 36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피땀 흘리는 기도가 필요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피곤하여 기도도 못하고 졸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기도로 영적 싸움에 승리하시고 일어나셨습니다.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제자들에게 오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고,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았습니다. 그때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보다 못해서 손에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이 제자가 누구겠습니까? 그 의협심이 많은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분노의 감정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존경하는 선생을 강도 잡는 것처럼 이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베드로의 행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52)
예수님은 베드로의 의협심을 조금도 칭찬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고 하시고, 검을 쓰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검은 혈기와 감정을 뜻합니다. 영적 싸움은 혈기와 감정으로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영적 싸움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사랑밖에 없습니다. 사랑도 감정이지만 그런데 유일하게 사랑은 이성에서 나오는 따듯한 감정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 아들을 죽인 공산당원을 아들로 삼은 일로 유명합니다. 감정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에게는 화가 없고, 분노가 없었겠습니까? 영화를 보니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자를 끌어내려서 오히려 용서를 하고 아들로 삼습니다. 그냥 두어도 원수를 값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수에게 똑같이 때리고 똑같이 해를 가하여 죽여서 원수를 갚지 않았습니다. 진정 원수 갚는 길은 살아 있는 채로 굴복시키는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아에 딴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의 변화! 무엇이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힘과 폭력은 불가능합니다. 이성에서 나온 사랑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53절에 보면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 자신도 감정대로 하신다면 얼마든지 똑같이 대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화가 나서 육신의 힘으로 할 것같으면 하나님께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들을 보내시게 하여 원수를 물리칠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열 두 영; 한 영(헬, 레기온)은 6000명의 군사) 그러나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의 손에 자신을 내맡기시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품으시고 용서로 저희의 죄를 덮으셨습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네가 그리스도냐 그리스도이면 너를 구원해보라고 비웃움, 온갖 조롱과 멸시를 당하셨고, 침 뱉음과 채찍을 맞으셨고, 마침내는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십자가 옆에 한 강도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를 찌른 로마 백부장의 마음에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몸에 바르려고 몰약 백근을 가지고 왔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신 예수님의 이성적 죽음 그 발 아래 앞에 수많은 영혼들이 엎드렸고 참회와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진정한 용서와 사랑 앞에 굴복하였습니다.
연약한 육신은 패배자가 될 수 있지만 이성에 순종하는 마음과 영혼은 멸망하지 않습니다. 지난 주 쿠어바디스 영화를 다시 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로마가 세계를 정복하였을 때 네로는 도시를 불태우고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원형경기장에서 짐승의 밥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시를 지어 노래를 하며 비웃으며 조롱하였습니다. 수많은 기독교들은 미치광이의 손에 무력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네로가 죽은 시체들을 보았을 때 그 시체들이 오히려 웃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은 무력이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검을 갖고 나온 자들에게 검으로 대하는 것은 큰 자의 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셨다고 베드로 전서 2:23은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베드로 전서 3:9에서도 베드로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습니다.
 
김구 선생이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한번은 어느 한국 청년이 권총을 품고 김구 선생을 암살하려다가 독립군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그 상황을 들은 김구 선생은 그 청년을 만나보겠다고 했습니다. 청년이 김구 선생 앞에 끌려왔을 때 김구 선생은 맨발로 뛰어나가서 그 청년을 부둥켜 안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한국 청년을 이곳에서 만나게 되니 기쁘고 감사하구려하며 자기를 향해 총을 겨누었던 그 청년을 용서했습니다. 후에 그 청년은 김구 선생을 위해서 일생을 바쳐 독립운동을 했다고 합니다.
무력을 무력으로 맞서면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그러나 누군가 한쪽에서 사랑으로 무력을 막으면 무력은 끝이 납니다. 무력을 막는 최대의 방패는 무력이 아니라 사랑임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감정으로 다가오고 힘으로 다가올 때 무력으로 대하면 실패합니다. 이겨도 상처만 남지 진정한 승리자가 되지 못합니다. 이성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싸워야 합니다. 그것만이 근본적으로 문제가 해결되고 이길 수 있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요즘 세계 뉴스에 가장 시끄러운 곳이 중동 호르무즈입니다. A.D 7세기 이전에 중동지역은 전부 기독교 국가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이슬람국가가 되었습니다. 사연을 들어보면 그 이유는 당시에 주로 로마의 기독교 지주들이 중동의 소작인들을 착취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중동지역에 땅의 80%를 지주가 가져가고 농민들은 20%만 받아 살아야 했습니다. 이에 분개하여 마호멧을 중심으로 농민 발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지역이 전부 이슬람 지역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1095년 서방세계는 다시 중동지역을 되찾기 위해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전쟁의 명분은 중동에 신앙과 성지순례의 자유를 안겨주라!’였습니다. 십자군은 군사적 힘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중동사람들을 악인으로 규정하며 그들을 죽였습니다. 화해의 조짐이 있었지만 당시 힘을 가지고 있었던 서방지도자들은 번번이 무력을 행사했습니다. 결국 11세기 말부터 13세기까지 8차에 걸쳐서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고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얻은 것은 없고, 무력충돌로 인한 양쪽 모두에게 희생만이 남았습니다. 아직도 그 옛날의 십자군 전쟁은 아랍세계 사람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십자군 전쟁 이후 중동과 서방세계는 지금까지 끊임없는 크고 작은 무력충돌을 해오고 있고, 지금도 전쟁과 테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미국이 9.11테러공격을 받았을 때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자리에서 부시 대통령은 연설을 하면서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이라크 전쟁을 십자군 전쟁이라고 말했습니다. 누가 이겼습니까? 결과 그 전쟁과 테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무력은 무력을 낳을 뿐입니다. 무력을 사용하는한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서 이 땅에서 영원히 끝나지 않습니다. 무력을 쓰면 결국 둘 다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아랍이 큰 전쟁을 일으키고 있을 때 타임지에 크게 커버에 실린 내용이 있었습니다. 어느 아랍 어머니의 세 아들이 전쟁에 나가서 죽었습니다. 세 아들의 시체가 함께 돌아왔습니다. 장례를 치를 때에 기자가 물어보았습니다. ‘얼마나 슬픕니까?’ 그 어머니는 눈물을 딱 거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열 네 살 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얘가 빨리 커야 전쟁에 나가겠는데……세 아들이 죽었으니까 다시 이 아들을 키워서 복수하겠다는 말입니다. 무력을 무력으로 맞서면 무력과 복수와 전쟁은 영원히 끝나지 않습니다.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은 말하기를 복수의 열망은 우리 자신에게 슬픔 말고는 아무것도 가져다 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검에 검을 쓰는 것은 주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는 힘들고 감정이 상해도 검을 도로 집에 꽃아 넣어야 합니다.
 
감정적인 싸움과 분노는 아무리 내가 옳아도 좋은 결과의 열매를 거두지 못합니다. 데카르트는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두가지 축이 있다고 했습니다. 감정과 이성입니다. 감정은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에너지라면 이성은 그 에너지가 향할 방향을 설정해주는 나침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기쁨, 슬픔, 분노, 사랑 같은 감정들이 있는데 이런 감정은 우리가 행동하도록 만들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감정이 있기에 사는 맛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 감정이 없으면 우리의 삶은 삶은 단조롭고 무미건조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감정들이 이성의 컨트롤을 받지 않고 앞으로만 나간다면 극단으로 치우게 될 것입니다. 그런 극단적인 행동에 브레이크를 걸고 먼저 합리적인 생각을 하고 그것이 맞는지, 필요한 행동인지, 따스한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고, 최선의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성입니다. 분노의 감정은 가장 빨리 주먹을 들게 하지만 이성은 냉철하게 판단하여 주먹을 내려놓고 용서와 화해를 하게 하여 좋은 열매를 맺게 한다는 것입니다.
감정이 앞서는 것은 결국 성숙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쇠 몽치를 들거 나타난 배신자 유다와 무리들을 감정으로 대하지 않으시고 주음 앞에 당당히 나아가신 예수님 그리고 자기 아들은 죽인 공산당을 대신 아들로 삼은 손양원 목사님. 자기를 죽이려 하였던 청년을 끌어안은 김구 선생의 행동은 이성이 앞선 성숙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성에 콘트롤 받는 사랑의 감정은 최고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는 참고 또 참아야 합니다. 악을 악으로 검을 검으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끝까지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사랑만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길입니다. 고전 16:14은 말합니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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