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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말씀

위대한 질문(요한복음 14: 5-6)

작성자바다해|작성시간26.06.22|조회수63 목록 댓글 0

 




주일 생명 말씀(2026.6.21)
말씀/ 요한복음 14: 5-6
 
위대한 질문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여러분들이 잘 아시지만 '경영학보다는 소설에서 배워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은 문학 소설이 우리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 무게를 두고 쓴 책입니다. 과연 이런 소설 문학이 그렇게까지 읽을 가치가 있을까? 목회자에게도 필요하고, 또 사업을 경영하는 CEO들에게 필요할까? 한번 생각을 해보게 하는 책입니다. 책 표지 뒷면에 한국의 최고 경영자라 할 수 있는 호암 이병철씨의 한 마디가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경영에 관한 책에는 흥미를 느껴본 적이 별로 없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경영의 지엽보다 그 저류에 흐르는 기본적인 생각, 인간 마음가짐에 관한 것이다.” 최고 경영자가 왜 소설을 읽어야 하는가 권하는 말입니다. 사업이나 장사도 따지고 보면 그 방법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저류에 깔린 인간 마음가짐이라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나 도스트예프스키는 인류 역사에 최고의 문학가이고 이들의 작품은 문학사에 고전이 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작가들의 작품이 웬만한 목사님의 수많은 설교보다도 더 낫다고도 말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서 과연 그러한가 하고 저도 책 몇 권을 읽어보았습니다. 방대하기는 하지만 도스트에프스키의 대표작 카라마죠프가의 형제와 톨스토이의 안나까레니나를 읽었습니다. 노튼 출판사가 영국, 미국,호주의 유명한 작가 125명에게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문학작품 10권을 꼽아달라고 해서 순위를 정한 '톱 텐'이란 책이 있는데...,그 수 위에 톨스토이의 '안나까레니'1, '전쟁 과 평화.3위에 올라 있습니다. 톨스토이 사후 100년이 지났어도 사람들은 그를 최고의 작가, '안나까레니나'를 최고의 작품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평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19세기 러시아가 낳은 위대한 예술가 톨스토이. 그가 남긴 최고의 리얼리즘 소설 위선, 질투, 신념, 사랑 등 인간의 감정과 결혼, 계급, 종교 증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 구조에 대한 톨스토이의 모든 고민이 집약된 걸작이다. 다양한 인간의 성격 심리 묘사 인간관계, 사회 구조에 대한 이해를 주는데 소설이 그만큼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대상으로 물건을 파는 경영자가 인간 심리를 모르고 어떻게 장사를 할 수 있으며, 사람을 대상으로 설교하는 목사가 인간 심리를 모르고 어떻게 설교를 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인간의 깊은 이해가 필요하고, 사람들과 관계를 중시하는 사람일수록 소설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필요성에 대해서 스탠포드 경영학 박사 톰피터스는 자신이 소설을 읽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영학 서적들은 답을 제시한다 반면 대부분의 소설들은 위대한 질문들을 던 져준다. 그것이 내가 가르침을 얻기 위해 소설을 즐겨 읽는 이유 이다"
 
소설은 다양한 인간, 다양한 문화와 역사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삶의 문제 인생 문제, 사랑, 죽음, 구원에 대한 질문을 던짐으로 '나'라는 한 인간의 편협한 울타리를 뛰어넘어 이해력과 세계관을 키워가는데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원한다 해도 타임머신을 타고 먼 과거로 돌아갈 수 없고, 또 만나보고 싶다고 해서 옛 성인군자나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문학 소설은 내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다양한 세대 속으로 들어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나 자신을 성찰할 수 있습니다. 또 간접적으로 지켜보고 또는 질문을 듣고 던지면서 더 나은 '나' 로 극복 해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합니다. 답이 아니라 위대한 질문을 던져준다는 점에서 문학 소설이 아주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지난 주 명작 영화 '쿠오바디스' 잘 보셨지요? 명작 문학이 영화화 한 것인데 1950년대 판입니다. 그렇게 오래 전에 나온 영화지만 벤허 십계와 더불어 지금 보아도 아주 감명 있는 문학작품입니다. 20여년 전 로마에 갔을 때 권순만 선교사님의 안내로 소설의 배경이 된 이 장소 아삐아 가드에 직접 가보았습니다. 그리고 2년 원폴리캅 선교사님 안내로 독서트래킹 팀들과 함께 다시 가보았습니다.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베드로가 로마군의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을 떠나는 길에서 주님을 만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물론 소년의 목소리를 통해서 만나지만 베드로가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쿠오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질문에 대답하십니다. 나는 네가 버리고 떠나온 양들을 위해서 죽으로 다시 로마로 간다.” 베도로는 그 때 거기서 자신이 가야 할 곳은 어린양이 있는 로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즉시로 로마로 돌아가 거기서 거꾸로 매달려 순교합니다. 원형 경기장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전하는 그의 메시지 또한 아주 감동적이었습니다. 이런 소설을 읽다보면 나도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게 됩니다. '쿠오바디스도미네?' 그리고 질문도 듣습니다. '너도 가서 순교할 수 있는가?" 주여 주께서 아시나이다깊은 여윤이 남습니다. 그래서 좋은 소설을 읽고 좋은 영화를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하나 있는데 베드로가 주님께 물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답은 질문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지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이 가야할 길을 알았습니다. 로마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로마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것. 박해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양들을 위해서 박해의 현장으로 들어가는 것.
 
우리는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 반대로 살 때가 있습니다. 주님과 어긋난 길을 갈때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 물어야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러한 상황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바울 역시 사울이었을 때 어떻게 살았습니까? 하나님을 위한 열심히 산다고 하면서 교회를 핍박하였고, 예수님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러한 바울의 행동은 가시 채를 뒷 발질 한다고 하였습니다. 스스로는 잘 한다고 생각하였지만 거꾸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만 갈 것이 아니라 한번 썩 멈추어 서서 질문을 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잘 가고 있는가? 내가 지금 주님 뜻대로 살고 있는것인가? 이 일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 아니면 욕심과 탐욕을 기준으로 살고있지 않는지? 어떤 사람은 전혀 말을 안 하고 질문도 잘 안 하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의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데카르트는 한 번도 의심하지 않은 삶은 한번도 제대로 살아보지 않은 삶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르게 가고 있는지, 내 신앙이 바른지 의심을 해본다면 질문을 왜 안 하겠습니까?
인생살이는 길을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길을 가는 사람은 반드시 질문을 해야 하고, 아는 길도 물어야 합니다. 길의 성격은 계속 묻는 것입니다. 묻고 정확하게 알고 가야 헤메이지 않고 바르게 도착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길을 묻는 것은 단지 길을 아는 것만이 아닙니다. 길을 물으면서 우리는 대화를 하게 되고,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교제도 하고 그렇게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위암 사형 선고받고 독일에서 로마까지 걸어서 여행을 완주한 독일 사람 쿠루트 파이퍼 라는 사람은 6개월 동안 여행하면서 사람을 만난 것이 인생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보다 더 많았고, 더 많은 것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며 섬김고 섬김받을 줄 하는 삶에 대해서도 새롭게 배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은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길을 떠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때 아브람이 말씀을 좇아 순종했다고 나오는데 히브리서를 보면 그가 갈바를 알지 못하고 믿음으로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분명한 목적지를 모르고 떠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히 11:8) 그런데 왜 하나님은 한 번에 길을 다 가르쳐주시지 않았을까요? 질문을 유도하시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물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제도 하는 것입니다. 왜 한 번에 약도를 다 알려주시지 않으십니까? 다 이유가 있습니다. 묻고 답하는 것처럼 좋은 교제와 교육도 없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최고의 지혜자 소크라테스의 교육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문답법입니다. 질문하고 답하고 질문하고 답하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선생은 질문하는 학생을 아주 좋아합니다. 질문한다는 것은 호기심이 많고 배우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고, 또한 선생을 신뢰하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선생은 학생이 질문을 하면 복도에 서서라도 아주 정성껏 답변을 해줍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께 순간순간 물으면서 답도 얻으면서 믿음과 신뢰를 쌓고 친밀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묻고 답하며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때는 질문했는데 답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것도 답입니다. 아직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역시 믿어야 하고, 인내를 하며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하나님은 정확하게 답을 주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무엘 상을 보면 다윗이 불레셋과의 전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모든 불레셋 사람들이 다윗을 찾으러 올라왔습니다. 다윗이 듣고 대항하려 하였지만 이미 르바임 골짜기로 쳐들어왔습니다. 그때 다윗이 하나님께 묻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물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올라가리이까 주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역대상 14:10) 하나님은 즉시로 다윗에게 응답해주십니다. 올라가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다윗은 이에 바알브라심으로 올라가 거기서 그들을 쳤고, “하나님이 물을 쪼갬 같이 내 손으로 내 대적을 흩으셨다”고 말합니다. 완벽한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블레셋이 골짜기를 침공했습니다. 그러나 대승을 거두고도 다윗은 경험으로 싸웆 않고, 겸손히 하나님께 또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역시 또 응답을 주셨습니다. 이번에는 처음과 방법이 다릅니다. 섬세하게 뽕나무 숲 맞은 편으로 가서 기습작전으로 치도록 하셨니다(역대산 14: 14-15) 이에 다윗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쳐서 기브온에서부터 게셀까지 이르게 되었고, 다윗의 명성이 온 세상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든 이방 민족으로 그를 두려워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완벽한 무장을 사고 싸워도 패할 수 있고, 하나님이 싸우시면 이길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작전입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작전 명령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날마다 주님께 물으며 최고의 작전있는 삶을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묻고 질문하는 것은 싸움뿐 아니라 교육에 있어서도 아주 중요합니다. 한국 학생들은 암송과 단답형에 길들여져 있는데 나중에 보면 세계적인 인물이 안 나옵니다. 잘의 응답 토론을 통한 논리 사고가 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깊은 답은 깊은 질문에서 나온다는 것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좋은 질문이 없으면 좋은 답도 없습니다. 그래서 선진국형 좋은 교육은 틀려도 좋으니 질문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세계 0.1% 인구로 15%가 넘는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해 낸 유태인들은 자녀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오늘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니’라고 묻기 보다는 ‘오늘 학교에서 어떤 질문을 했니’라고 묻는다고 합니다.
 
여러분, 질문을 잘 하시나요? 잘 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런데 평상시는 아니더라도 질문하ㄹ대가 있습니다. 고난과 시련의 때입니다. '주님,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자녀들의 죄 성을 너무나 잘 아시는 주님께서 고난을 통해서라도 질문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질문들이 우리를 깊고 성숙한 신앙의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힘들고 어려울 때라도 질문을 자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질문의 유익함을 안다면 평상시 매일 매일 질문을 하며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문제를 떠나서 더 많은 것을 깨닫고 알고, 배움을 위해서 질문을 해야 합니다. 질문도 하지 않았는데 답이 주어지면 공부가 잘 안됩니다. 그리고 질문도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잘 합니다. 평상시 공부하지 않는 사람은 질문할 것이 없습니다. 책이라도 한권을 읽으면 질문이 쏟아집니다. 저도 새로운 책을 읽다 보면 질문할 것들이 생깁니다. 전에는 백가 사전을 뒤졌는데 요즘은 지미나이에게 묻습니다. 신가하게도 무엇이든지 친절하게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더 자세히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더 알려주겠다고 더 물어보라고 합니다. 아주 친절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좋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묻지 않고 배우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한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처럼 물어야 합니다. 그러면 삶이 새롭고 날마다 달라질 것입니다. 왜 옛님이 아이들이 나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셨습니까? 귀찮을 정도로 묻고 배우려하는 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모든 것을 묻습니다. ”아빠 하늘이 왜 파래? 아빠 물은 왜 투명해, 피는 왜 빨개?“ ”왜 우리는 일찍 자야되?“ 이런 질문들이 있기 때문에 발전하고 진보하는 것입니다. 질문을 해야 답이 있고, 질문하면서 대화도 하게 되고, 관계성도 맺어지게 되고 아주 좋습니다. 질문이 없으면 답도 없지만 사람과의 관계도 막히고 새로운 일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말이 없고 질문이 없는 사람들 보세요. 옆에 있어도 투명인간이 됩니다. 그리고 질문도 잘 해야 합니다. 단 답으로 하면 단 답이 옵니다. 생각하고 고민하고 깊이 있게 질문 하면 깊은 답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작은 일이라도 깊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습관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깊은 사고의 질문을 하고, 깊은 답을 얻고 원숙한 믿음에 이르러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로 질문은 위대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 중에 제일 의심 많은 자가 누구입니까? 사람들은 도마를 의심 많은 자로 지목합니다. 그런데 그런 도마의 장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제자들을 불러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1)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요한복음 14:1-4)
 
도대체 떠나신다니 어디로 가신다는 것이야? 속으로만 생각하지 아무도 질문을 하지 않고 근심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도마가 나서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답변의 말씀을 주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 14:6) 이 귀한 말씀이 얼마나 큰 힘과 위로가 되고,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이정표가 되었습니까! 도마가 질문했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친히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때 도마만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고 이야기했지만 도마는 죽어도 자기는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강한 의문을 품습니다. 여드레를 지나 예수님이 다시 그를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도마에에 답을 주셨습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한 20:27)
이 말씀도 의심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된 말씀입니까? 의심이 많은 도마는 뒤 늦게서야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고 고백을 하였지만 주님으로부터 이런 아주 귀한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의심되면 의심이 된다고 말하고, 의문이 들면 이것이 의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질문에는 옳고 그른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그것도 모르느냐고 절대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이 때도 도마에게 칠절하게 답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요한 20:28). 이런 의심 많았던 도마도 결국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 인도에서 순교를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비록 약하고 부족하고 또 의심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질문 할 수 있다면 염려할 것 없습니다. 주님은 언제든지 대답해주실 준비를 하시기 때문입니다.설령 당장 답이 내려지지 않아도 우리는 묻고 답을 기다리면서 주님을 바라보며 성숙한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 모두가 날마다 주께 묻고 답을 얻는 신앙인의 삶을 사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주일 생명 말씀(2026.6.14)
말씀/ 마태 26:47-56, 고전 16:14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세상을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감정이 상하고 분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화가 나고 밉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혼내주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억울할 때는 죽이고 싶은 심정까지 일어납니다. “아, 그래서 살인이 일어나는가 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 처해 본 적이 없습니까? 중학교 때 자꾸 나를 괴롭히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나는 가난했고 학교에 와서 공부만 했는데... 좀 부자였던 그 친구가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는지 자꾸 시비를 걸었습니다. 얼마나 화가 나는지 주먹이 얼굴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옆에서 누가 보니 제 얼굴이 새 하야지더라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사고를 쳐서는 안 되겠다 싶어 손을 내리고 참았습니다. 잘 참았지요. 이성이 감정을 억눌러 사고를 못치게 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매일 양보만 하고 저주기만 하며 살 수 없습니다. 성경은 죄와 불의에 대해서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할 것을 이야기합니다. 때로는 싸워야 하고, 싸움에서는 이겨야 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옳다면 무조건 이겨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니면 지고도 류신의 ‘아 Q’ 처럼 정신승리를 하며 물러섭니더, 그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오래전 선교단체 시절 서울에 한 번씩 모임이 있어서 가면 가끔 선배 목자님 중에 무용담을 들려줍니다. 어떤 사람이 복음 역사를 방해하며 막무가네로 시비를 걸기에 엎어치기를 했더니만 꼬리를 빼고 도망가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당시는 들으면서 속이 후련하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그래서는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한번은 우리 교회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한 자매를 쫓아다니면 괴롭히는 어떤 형제가 있었습니다. 화가 나서 우리 안에 덩치도 있고 힘도 있는 목자에게 그 문제를 도와주라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괴롭히던 형제를 불러 몇 번 충고를 하고는 훅을 날렸습니다. 그 형제도 태권도를 하는 형제였지만 주먹을 쓰지 않았고 결국 주먹을 쓴 우리 형제가 계속 시달림을 받았습니다. 주먹으로 맞은 형제의 어머니가 쫓아와서 믿는 사람이 폭력을 썼다고 항의를 했던 것입니다. 당시만 해도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요즘은 큰 일납니다. 나중에 합의 해줘야하고 돈 다 물어줘야 합니다. 이것을 이용해서 일부러 맞는 사람도 있습니다. 감정의 싸움과 폭력은 절대 안 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더 더욱 그렇습니다.
에베소서 말씀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하였습니다. 혈과 육으로 악을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혈과 육으로 싸우면 악에 악을 더 쌓고 죄에 죄를 더 쌓을 뿐입니다. <코끼리 길들이기>라는 책이 있는데 여기에 보면 어떻게 분노의 마귀를 때려잡을 수 있는지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더럽다고 악하다고 감정으로 대하고 분으로 더하면 분노의 마귀는 더욱 커져 가고 나중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고, 반대로 온유함과 겸손과 사랑과 섬김으로 대하면 그 더럽고 악한 마귀가 점점 작아져서 소멸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참 감동있게 읽었습니다.
창세기에도 보면 야곱의 딸 디나 사건이 나옵니다.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다 숙곳에 이르러 세겜성에 머물다가 디나가 그곳 추장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을 당합니다. 그 오라비 레위와 시므온이 화가 나서 이스라엘의 수치를 제한다고 그곳에 가서 사람들을 속여 할례를 받게 하고는 칼로 살육을 자행합니다. 레위와 시므온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데 이방 땅에서 감정적으로 대한 것입니다. 결과가 어떠하였습니까? 야 야곱은 장차 일어날 일들로 복수극이 두려워서 더 이상 그 곳에 머물지 못하고 떠나게 됩니다. 문제는 이 감정적 사건으로 이해서 레위와 시므온이 저주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12 아들 축복기도 내용을 보면 이 때의 일이 고스란히 기록되고 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창세기 49:4-7). 근본 잘못은 세겜족에게 있었지만 감정으로 대한 결과 저주가 고스란히 자신들에게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본문 36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피땀 흘리는 기도가 필요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피곤하여 기도도 못하고 졸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기도로 영적 싸움에 승리하시고 일어나셨습니다.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제자들에게 오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고,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았습니다. 그때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보다 못해서 손에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이 제자가 누구겠습니까? 그 의협심이 많은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분노의 감정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존경하는 선생을 강도 잡는 것처럼 이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베드로의 행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52)
예수님은 베드로의 의협심을 조금도 칭찬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고 하시고, 검을 쓰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검은 혈기와 감정을 뜻합니다. 영적 싸움은 혈기와 감정으로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영적 싸움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사랑밖에 없습니다. 사랑도 감정이지만 그런데 유일하게 사랑은 이성에서 나오는 따듯한 감정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 아들을 죽인 공산당원을 아들로 삼은 일로 유명합니다. 감정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에게는 화가 없고, 분노가 없었겠습니까? 영화를 보니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자를 끌어내려서 오히려 용서를 하고 아들로 삼습니다. 그냥 두어도 원수를 값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수에게 똑같이 때리고 똑같이 해를 가하여 죽여서 원수를 갚지 않았습니다. 진정 원수 갚는 길은 살아 있는 채로 굴복시키는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아에 딴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의 변화! 무엇이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힘과 폭력은 불가능합니다. 이성에서 나온 사랑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53절에 보면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십니다. “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 자신도 감정대로 하신다면 얼마든지 똑같이 대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화가 나서 육신의 힘으로 할 것같으면 하나님께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들을 보내시게 하여 원수를 물리칠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열 두 영; 한 영(헬, 레기온)은 6000명의 군사) 그러나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의 손에 자신을 내맡기시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품으시고 용서로 저희의 죄를 덮으셨습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네가 그리스도냐 그리스도이면 너를 구원해보라고 비웃움, 온갖 조롱과 멸시를 당하셨고, 침 뱉음과 채찍을 맞으셨고, 마침내는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십자가 옆에 한 강도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를 찌른 로마 백부장의 마음에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몸에 바르려고 몰약 백근을 가지고 왔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신 예수님의 이성적 죽음 그 발 아래 앞에 수많은 영혼들이 엎드렸고 참회와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진정한 용서와 사랑 앞에 굴복하였습니다.
연약한 육신은 패배자가 될 수 있지만 이성에 순종하는 마음과 영혼은 멸망하지 않습니다. 지난 주 쿠어바디스 영화를 다시 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로마가 세계를 정복하였을 때 네로는 도시를 불태우고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원형경기장에서 짐승의 밥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시를 지어 노래를 하며 비웃으며 조롱하였습니다. 수많은 기독교들은 미치광이의 손에 무력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네로가 죽은 시체들을 보았을 때 그 시체들이 오히려 웃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은 무력이 아닙니다. 사랑입니다검을 갖고 나온 자들에게 검으로 대하는 것은 큰 자의 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셨다고 베드로 전서 2:23은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베드로 전서 3:9에서도 베드로는 악을 악으로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습니다.
 
김구 선생이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한번은 어느 한국 청년이 권총을 품고 김구 선생을 암살하려다가 독립군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그 상황을 들은 김구 선생은 그 청년을 만나보겠다고 했습니다청년이 김구 선생 앞에 끌려왔을 때 김구 선생은 맨발로 뛰어나가서 그 청년을 부둥켜 안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내가 사랑하는 한국 청년을 이곳에서 만나게 되니 기쁘고 감사하구려하며 자기를 향해 총을 겨누었던 그 청년을 용서했습니다후에 그 청년은 김구 선생을 위해서 일생을 바쳐 독립운동을 했다고 합니다.
무력을 무력으로 맞서면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그러나 누군가 한쪽에서 사랑으로 무력을 막으면 무력은 끝이 납니다. 무력을 막는 최대의 방패는 무력이 아니라 사랑임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감정으로 다가오고 힘으로 다가올 때 무력으로 대하면 실패합니다. 이겨도 상처만 남지 진정한 승리자가 되지 못합니다. 이성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싸워야 합니다. 그것만이 근본적으로 문제가 해결되고 이길 수 있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요즘 세계 뉴스에 가장 시끄러운 곳이 중동 호르무즈입니다. A.D 7세기 이전에 중동지역은 전부 기독교 국가였다고 합니다그러나 지금은 모두 이슬람국가가 되었습니다사연을 들어보면 그 이유는 당시에 주로 로마의 기독교 지주들이 중동의 소작인들을 착취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중동지역에 땅의 80%를 지주가 가져가고 농민들은 20%만 받아 살아야 했습니다이에 분개하여 마호멧을 중심으로 농민 발란이 일어났습니다그래서 기독교지역이 전부 이슬람 지역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1095년 서방세계는 다시 중동지역을 되찾기 위해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습니다전쟁의 명분은 중동에 신앙과 성지순례의 자유를 안겨주라!’였습니다십자군은 군사적 힘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중동사람들을 악인으로 규정하며 그들을 죽였습니다화해의 조짐이 있었지만 당시 힘을 가지고 있었던 서방지도자들은 번번이 무력을 행사했습니다결국 11세기 말부터 13세기까지 8차에 걸쳐서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고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얻은 것은 없고무력충돌로 인한 양쪽 모두에게 희생만이 남았습니다아직도 그 옛날의 십자군 전쟁은 아랍세계 사람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십자군 전쟁 이후 중동과 서방세계는 지금까지 끊임없는 크고 작은 무력충돌을 해오고 있고지금도 전쟁과 테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미국이 9.11테러공격을 받았을 때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자리에서 부시 대통령은 연설을 하면서 전쟁을 선포했습니다이라크 전쟁을 십자군 전쟁이라고 말했습니다누가 이겼습니까결과 그 전쟁과 테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무력은 무력을 낳을 뿐입니다무력을 사용하는한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서 이 땅에서 영원히 끝나지 않습니다무력을 쓰면 결국 둘 다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이스라엘과 아랍이 큰 전쟁을 일으키고 있을 때 타임지에 크게 커버에 실린 내용이 있었습니다어느 아랍 어머니의 세 아들이 전쟁에 나가서 죽었습니다세 아들의 시체가 함께 돌아왔습니다장례를 치를 때에 기자가 물어보았습니다. ‘얼마나 슬픕니까?’ 그 어머니는 눈물을 딱 거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열 네 살 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얘가 빨리 커야 전쟁에 나가겠는데……’ 세 아들이 죽었으니까 다시 이 아들을 키워서 복수하겠다는 말입니다무력을 무력으로 맞서면 무력과 복수와 전쟁은 영원히 끝나지 않습니다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은 말하기를 복수의 열망은 우리 자신에게 슬픔 말고는 아무것도 가져다 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검에 검을 쓰는 것은 주님의 방법이 아닙니다우리는 힘들고 감정이 상해도 검을 도로 집에 꽃아 넣어야 합니다.
 
감정적인 싸움과 분노는 아무리 내가 옳아도 좋은 결과의 열매를 거두지 못합니다. 데카르트는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두가지 축이 있다고 했습니다. 감정과 이성입니다. 감정은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에너지라면 이성은 그 에너지가 향할 방향을 설정해주는 나침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기쁨, 슬픔, 분노, 사랑 같은 감정들이 있는데 이런 감정은 우리가 행동하도록 만들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감정이 있기에 사는 맛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 감정이 없으면 우리의 삶은 삶은 단조롭고 무미건조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감정들이 이성의 컨트롤을 받지 않고 앞으로만 나간다면 극단으로 치우게 될 것입니다. 그런 극단적인 행동에 브레이크를 걸고 먼저 합리적인 생각을 하고 그것이 맞는지, 필요한 행동인지, 따스한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고, 최선의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성입니다. 분노의 감정은 가장 빨리 주먹을 들게 하지만 이성은 냉철하게 판단하여 주먹을 내려놓고 용서와 화해를 하게 하여 좋은 열매를 맺게 한다는 것입니다.
감정이 앞서는 것은 결국 성숙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쇠 몽치를 들거 나타난 배신자 유다와 무리들을 감정으로 대하지 않으시고 주음 앞에 당당히 나아가신 예수님 그리고 자기 아들은 죽인 공산당을 대신 아들로 삼은 손양원 목사님. 자기를 죽이려 하였던 청년을 끌어안은 김구 선생의 행동은 이성이 앞선 성숙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성에 콘트롤 받는 사랑의 감정은 최고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는 참고 또 참아야 합니다. 악을 악으로 검을 검으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끝까지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사랑만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길입니다. 고전 16:14은 말합니다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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