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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 유래

一網打盡(일망타진)

작성자김전호|작성시간14.10.25|조회수44 목록 댓글 0

一網打盡(일망타진)

(一 : 한 일. 網 : 그물 망. 打 : 칠 타. 盡 : 다할 진)

-한 번 그물을 쳐서 고기를 다 잡는다.

-어떤 무리를 한꺼번에 모조리 다 잡음을 이르는 말.

(유) 一擧網盡(일거망진)


이 성어는 「송사(宋史)」 인종기(仁宗紀)에서 유래한다.

일망타진(一網打盡)이라는 말은 「동헌필록(東軒筆錄)」, 「제동야어(齊東野語)」, 「강휴복전(江休復傳)」, 「송사(宋史)」 범순인전(范純仁傳)등에도 보인다.


북송(北宋) 때 인종(仁宗 : 北宋 제4대 황제, 在位 1022년 - 1063년, 名 趙禎, 初名 受益, 1010-1063)은 안팎으로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인물이다.

안으로는 문치주의(文治主義)를 지향하여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는 등 ‘경력(慶曆 : 仁宗의 연호)의 치(治)’라 하여 성군(聖君)으로 높이 평가받았다.

특히 지식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하였는데, 「자치통감(自治通鑑)」의 사마광(司馬光 : 1019년 - 1086년),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구양수(歐陽脩 : 1007년 - 1072년), 시인 소동파(蘇東坡 : 1037년 - 1101년) 등 걸출한 인물들이 이 시기에 배출되어 사대부 문화의 꽃을 활짝 피웠다.

그러나 밖으로는 국방을 소홀히 한 탓에 북쪽에서는 거란(契丹)이 세운 요(遼)나라에, 남쪽에서는 탕구트족의 서하(西夏)에 잇달아 침략당하는 등 불리한 조약을 맺어 막대한 전쟁 보상금까지 지불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망타진(一網打盡)이라는 말을 처음 한 사람은 어사중승(御史中丞 : 檢察官)이었던 왕공진(王拱辰)이다.

반대파들을 모두 옥에 잡아 가둔 후에 그가, “내가 한 그물로 다 잡아 버렸다.”고 한 말이다.


이 사건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인종(仁宗)의 첫 황후는 곽씨(郭氏)였다. 곽(郭) 황후는 인종(仁宗)의 생모였던 신비 이씨(宸妃 李氏 : 진종의 후궁이었다)를 장의황후(章懿皇后)로 추존할 때, 적모(嫡母)였던 장헌황후 유씨(章獻皇后 劉氏)의 섭정기에 총애를 받았던 재상들을 좌천시켰다. 여기에는 여이간(呂夷簡, 978년 - 1043년)이라는 재상도 포함 되어 있었다.

이에 여이간(呂夷簡)은 곽(郭) 황후가 인종(仁宗)에게 자신을 좌천시킬 것을 권유했다는 사실을 알고, 환관 염문응(閻文應)과 함꼐 곽(郭) 황후를 제거하기로 모의했다.

우선 여이간(呂夷簡)은 자신이 장의황후(章懿皇后)의 장례를 위해 애쓴 사실을 인종(仁宗)에게 부각시켰는데, 그 공로로 다시 재상의 자리에 복귀할 수 있었다. 여이간(呂夷簡)은 권력을 다시 잡게 되자 염문응(閻文應)과 더욱 밀착해서 곽(郭) 황후를 제거하는 일을 추진했다.

당시 인종(仁宗)이 가장 총애하던 후궁 두 명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양미인(楊美人)이고, 또 다른 사람은 상미인(尙美人)이었다. 한번은 곽(郭) 황후가 인종(仁宗) 앞에서 상미인(尙美人)을 나무랐는데, 상미인(尙美人)은 인종(仁宗)만 믿고서 곽(郭) 황후에게 몇 마디 대꾸를 했다.

곽(郭) 황후는 쫓아가서 손을 날렸는데, 실수로 인종(仁宗)의 목을 때려서 손자국이 생기고, 상처가 크게 났다.

염문응(閻文應)은 당(唐)나라때 고종(高宗)이 왕씨(王氏)를 폐하고, 측천무후(則天武后)를 세웠던 고사를 들먹이며 그 때 재상이었던 이적(李勣)이 말했던 말을 상기시켰다.

"황후 폐립은 본래 폐하의 가정 일이기 때문에 조정의 대신들은 간섭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목에 난 상처는 대신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니, 재상 여이간(呂夷簡)만을 불러서 그가 대표로 확인하도록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재상이 이의가 없다면 다른 대신들도 굳이 만류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마침내 인종(仁宗)은 황후폐립을 공론에 붙였고 대부분의 대신들은 인종(仁宗)과 여이간(呂夷簡)의 뜻에 영합하였으나, 어사대 간관(諫官)이었던 범중엄(范仲淹 : 990년 - 1053년)은 그의 직책상 경망하게 황후를 폐할 것이 아니라고 인종(仁宗)에게 극간하였다.

그러나 여이간(呂夷簡)은 범중엄(范仲淹)을 지방관으로 좌천시켰고, 범중엄(范仲淹)에 동조하는 간관들을 범중엄(范仲淹)의 도당으로 낙인찍어 모조리 탄압하고 좌천시켜버리는 등의 횡포를 저질렀다. 여이간(呂夷簡)의 농간에 의해 인종(仁宗)은 어쨌든 곽(郭) 황후를 폐할 수 있었다.

이에 반대한 범중엄(范仲淹) 등은 좌천되었고, 그 후 여이간(呂夷簡)이 재상에서 물러나고 하송(夏竦)이 추밀사에 임명되었지만, 구양수(歐陽修) 등이 반대하여 하송(夏竦)을 해임하고, 인종(仁宗)은 청렴결백하고 강직하기로 이름난 두연(杜衍 : 978년 - 1057년)을 재상으로 발탁하였다.

당시 인종(仁宗)은 신하들과 상의하지 않고 조서(詔書)를 내리는 경우가 잦았다. 이를 내강(內降)이라 한다.

두연(杜衍)은 내강(內降)의 관행이 도리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여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조서가 십여 통 쌓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되돌려 보내곤 했다.

그때마다 인종(仁宗)은 자신의 생각과 권위가 묵살되는 것 같아 내심 불쾌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두연(杜衍)의 강직한 성품은 주위 사람들에게 원한을 살 정도로 비극적 결과를 가져왔다.

사위 소순흠(蘇舜欽 : 1008년 -1048년)이 공금을 사사롭게 쓴 사실이 발각되었다. 비록 관행처럼 사소한 일이라 하나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

어사대부(御使大夫) 왕공진(王拱辰)이 사건을 조사했는데, 평소 두연(杜衍)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그는 소순흠(蘇舜欽)을 엄히 문초했다. 이참에 두연(杜衍)과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잡아다가 공범으로 몰아 가뒀다.

재상 두연(杜衍)에게 보고하기를, “제가 일망타진 했습니다.”고 하는데, 두연(杜衍)은 왕공진(王拱辰)의 처사가 못마땅했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두연(杜衍)은 재상자리에 오른 지 겨우 70일 만에 불명예스럽게 쫓겨나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송사(宋史)」‘문원전(文苑傳)·소순흠(蘇舜欽)’에 나온다.

「범중엄(范仲淹)은 소순흠(蘇舜欽)이 재능 있음을 알고 천거했고, 황제는 그를 불러다 면접을 하고 집현교리(集賢校理), 감진주원(監進奏院)의 직책을 주었다. 순흠(舜欽)은 재상 두연(杜衍)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두연(杜衍)은 당시 범중엄(范仲淹), 부필(富弼) 등과 함께 정부에 있으면서 명망 있는 인사들을 기용하여 모든 일을 개혁하려고 노력했다.

어사중승(御史中丞) 왕공진(王拱辰) 등은 이런 일들을 불편하게 여겼다. 얼마 후 진주원(進奏院)의 제사가 있자 소순흠(蘇舜欽)은 우반전직(右班殿直) 유손(劉巽) 등과 함께 고지를 판 공금으로 기녀를 불러 가무를 벌이고 저녁에는 손님들을 대접했다. 왕공진(王拱辰)은 이를 조사하여 진상을 알아냈고, 그의 휘하 어주순(魚周詢) 등을 시켜 탄핵을 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두연(杜衍)을 흔들어 대기 위함이었다. 이 일은 개봉부로 하달되어 다스려지게 되었고, 소순흠(蘇舜欽)과 유손(劉巽) 등은 모두 자도(自盜)죄로 제명되었다. 그리고 잔치에 참석했던 자들은 모두 지명도가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이에 연좌되어 사방으로 축출된 자가 40여 명이나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지나치게 박하다고 여겼지만, 왕공진(王拱辰) 등은 스스로 기뻐하며 말했다.

“내 일거에 다 그물질을 했다.”

(范仲淹薦其才, 召試, 爲集賢校理, 監進奏院. 舜欽娶宰相杜衍女, 衍時與仲淹, 富弼在政府, 多引用一時聞人, 欲更張庶事. 御史中丞王拱辰等不便其所爲. 會進奏院祠神, 舜欽與右班殿直劉巽輒用鬻故紙公錢召妓樂, 間夕會賓客. 拱辰廉得之, 諷其屬魚周詢等劾奏, 因欲搖動衍. 事下開封府劾治, 於是舜欽與巽俱坐自盜除名, 同時會者皆知名士, 因緣得罪逐出四方者十餘人. 世以爲過薄, 而拱辰等方自喜曰, 吾一擧網盡矣.)」


이 이야기에서 나오는 ‘일거망진(一擧網盡)’에서 ‘일망타진(一網打盡)’이 나왔는데, 이 성어는 송(宋)나라 위태(魏泰)의 「동헌필록(東軒筆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제(待制) 유원유(劉元瑜)가 소순흠(蘇舜欽)을 탄핵하자 연좌된 자가 심히 많았으며, 이와 동시에 인재들이 거의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유원유(劉元瑜)가 재상을 보고 말했다.

“제가 상공을 위해 한 번의 그물질로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잡았습니다.”(劉待制元瑜旣彈蘇舜欽, 而連坐者甚衆, 同時俊彦爲之一空. 劉見宰相曰, 聊爲相公一網打盡.)」


※ 出典 : 「宋史(송사)」 仁宗紀(인종기)

                  北宋(북송) 魏泰(위태) 著, 「東軒筆錄(동헌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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