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는 예수가 물위로 걸어가기 500년 전 중도를 설법하였다.
아마 이 중도는 예수가 걸어갔던 물의 표면과 같은 상징을 즉, 현재에 살고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어느 신흥종교의 연구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에는 자기자신이 부활한 재림 예수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거의 100여명이 있다고 한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1%의 확률만 따져보아도 그 중의 한 명쯤은 진짜 예수가 있지나 않을까? 그리고 우리가 이 한명의 진짜 예수를 가려내기 위해서 이들을 모두 한강으로 초대해야만 하는 것일까? 왜냐하면 2000년 전의 예수는 물 위로 걸어갔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이 100여 명의 자칭 예수들을 모두 물위로 걸어가게 한다면 어쩌면 한 사람쯤은 빠져 죽지 않고 살아나오는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과연 예수는 물위로 걸어 갔을까? 성경에서의 이러한 비유는 마치 선(禪)의 공안과 같이 아름답다. 지금도 성경학자들 중에서는 예수가 물위로 걸어간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발을 물위에 올려놓고 가라앉지 않는 방법을 고집한다면 우리는 성경 속에 숨어있는 참뜻을 놓칠 것이다.
우리는 3차원 공간 속에서의 시제를 과거, 현재, 미래의 셋으로 나눈다. 그리고 성경 속에서 예수가 물위로 걸어갔다는 사실은 아마 예수가 과거에 영향을 받지 않고, 미래에 끌려가지 않은 내내 현재에 살았다는 하나의 우화적인 표현일 것이다.
붓다는 예수가 물위로 걸어가기 500년 전 중도를 설법하였다. 그러면 중도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중도는 글자 그대로 표현한다면 ‘가운데 길’로 풀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중도는 이쪽도 아닌, 저쪽도 아닌 항상 가운데 말뚝을 박고 살아야 한다는 뜻일까? 아마 이 중도는 예수가 걸어갔던 물의 표현과 같은 상징을 즉, 현재에 살고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인도인들은 형상이 없는 두 개의 신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쉬바이고 다른 하나는 샤크티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곡, 일본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는 음양역학에는 바로 이 쉬바와 샤크티의 상징이 포함되어 있다. 쉬바는 바로 이 양을, 그리고 샤크티는 이 음 에너지의 상징이다. 그리고 중도란 이 음과 양사이의 자유로운 흐름을 말한다. 이 음양에너지의 자유로운 흐름이 바로 예수가 걸어갔던 물의 표면이다.
그러면 붓다와 예수말고 물 위를 걸어가는 사람이 누가 또 있을까? 사실 모든 어른들은 어린아이 시절에 물 위를 걸어 갔었다. 그러나 아기가 성장함에 따라 아기의 마음속에 과거라는 퇴적물이 쌓이면서 아기는 중도의 균형을 잃고 물 속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영원한 미래의 급류에 휩쓸려 현재라는 순간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엄마의 등에 엎혀있는 아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모르지만 매우매우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한낮의 소나기처럼 앙앙 울다가 쨍쨍 내리 쪼이는 햇빛처럼 금방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방금 웃음짓는다. 그러나 벽덕스러운 아기에게 엄마는 ‘미친놈!’하고 말하지 않는다. 어린아이는 이 긍정과 부정의 양극사이를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어른이 어린아이처럼 금방 울었다 웃었다 한다면 실없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혀 결국에는 정신병원 신세를 져야할 것이다. 그리고 보면 어른들이 아기들처럼 행복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 음과 양 사이의 에너지 정체현상 때문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민주화 과정에서 군부가 가장 위험한 요소로 등장하는 것도 군인의 특징이 에너지를 양극사이로 왕래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쪽에 강력하게 고정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의 일화에는 깨달은 스승들이 매일같이 화를 내고, 소리지르고, 미친 사람처럼 웃다가 느닷없이 엉엉 우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그렇다면 왜 의식이 지고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선사들이 어린이들보다 더 엉뚱한 이런 행위를 저지르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에너지의 자유로운 흐름, 즉 중도 속에서 살았다는 이야기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중도! 중도란 과연 어떤 경험일까? 현대의 재즈 음악가와 같은 예술가들은 어느 한순간 물 속에 빠지지 않고 한 발자국 물위를 걸어간다. 재즈 음악가들은 그들의 경험을 이렇게 전한다. “우리가 흥이나서 연주할 때에는 사람도 악기도 모두 사라진다. 그때에는 내가 악기고 바로 악기가 나다. 나와 악기라는 경계가 사라지고 그냥 하나의 연주라는 흐름이 있을 뿐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들은 한순간의 음악 연주를 하였다기 보다 보리수나무 밑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중도! 중도는 때때로 어린아이들을 위한 이야기 책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어느 면으로 동화는 단순히 어린아이들의 재미를 위해 꾸민 이야기라기 보다는 무한한 상징을 담고 있는 종교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에게는 ‘신데렐라’라는 동화가 있다. 이 동화의 줄거리는 계모 밑에서 온갖 구박을 받으며 자란 소녀가 어느날 우연히 만난 요술할멈이 가져다 준 유리구두를 신고 왕궁의 무도회에서의 왕자님과 함께 황홀한 춤을 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신데렐라는 새벽 닭이 울기 전에 집으로 돌아와야만 한다. 왜냐하면 새벽 닭이 울면 요술이 풀리고 신데렐라는 다시 누더기 옷의 가엾은 소녀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바로 이 동화의 상징은 신데렐라가 다시 왕자님을 만나 잘 살았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닌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기쁨, 바로 그것을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신데렐라가 유리구두를 신고 춤을 추었던 왕궁에서의 황홀한 무도회… 바로 그 순간이 예수가 물 위를 걸어 갈 수 있었던 내면세계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예수는 내내 신데렐라의 구두를 신고 춤을 추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누군에겐가 기쁜 순간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물 위로 걸어가는 사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