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가 우리나라 서단에 큰 피해를 입혔다.]에 대하여
11월 30일 각협 연수회에 참석하였다가 [한국 근.현대 서예사]라는 책을 선물 받았다. 책을 읽으면서 두 번째 단락에 접어들어 갑자기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이 책을 손에서 떼지 못하고 다 읽게 되었다. -책을 잡아 한 번에 다 읽은 책은 근래 처음이다. 참으로 저자는 글 쓰는 재주가 있는 분이고 다 읽고 나서도 독자로 하여금 무언가를 생각하게 하는 능력이 있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충격을 받은 책의 내용과 그에 대한 소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1. 책의 내용-본문 24쪽
[그(추사)는 원교서론(圓嶠書論)에 대한 가혹한 비판을 함으로써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있던 우리서단에 너무 큰 피해를 입혔다. 그가 무명의 서예가였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너무 영향력을 휘두르는 태두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적에 못지않게 과오도 크다. 그의 영향이 오늘까지도 미치고 있음을 생각하면 오늘의 서단도 그의 피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 책의 내용1에 대한 소견
이 구절이 책을 단번에 끝까지 읽게 한 이유이다. 혹시라도 뒤에 이 구절에 대한 설명이나 우리 서단에 피해를 주었다는 구체적 사실이나, 각주 등의 인용이나, 부수적인 설명이 있을 것으로 믿었지만 전근대 몇몇 서예가들이 추사 선생의 후학이라던가 추종자라는 식의 언급외에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위에 언급한 원교서론은 이광사(李匡師 1705-1777)선생이 왕희지(王羲之)와 위부인(衛夫人)의 서도의 바른 뜻을 밝혀 이를 본받자는 의미의 서도 강의록으로 필결(筆訣) 또는 서결(書訣)이라는 서론(書論)을 말한다. 따라서 원교는 조선성리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동국진체(東國眞體)라고 불리는 서체를 형식과 이론으로 집대성하였으나 이는 오히려 고려부터 조선초까지 전해온 전통적인 서법이나 서도를 부정하고 중국의 서도 특히 왕희지와 관련된 서법을 연계하여 소개한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원교필결을 본 추사 선생은 이 필결의 내용에 고증되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을 비판하여 서원교필결후(書圓嶠筆訣後-阮堂全集 卷六)라는 서평을 내었다. 그 내용 중에는 원교선생이[우리 동쪽나라는 고려 말 이래로 모두 언필(偃筆-붓을 뉘어쓰는 것)로 써서, 먹빛이 엷고 거칠게 되어 획이 모두 치우치고 메말라서 완전치 못하다.]라고 한 부분에 대하여 추사선생이[그것은 운필(運筆)의 문제가 아니고 묵법(墨法)의 문제라고 평하고 다시 고려 말 이래로 조선 건국초기에 이르기 까지 이군해(李君侅), 공부(孔俯), 강희안(姜希顔), 성달생(成達生) 같은 이름난 분들은 용이 오르고 봉황새가 나르듯이 글씨를 잘 쓰지 못한 사람이 없거늘 어찌 한 삐침 한 점의 언필이 있었겠는가.]고 하였다. 이는 언필로 썼다며 폄하한 고려 말 이래 서도인들을 예로 들며 어찌 그 뛰어난 글씨들을 언필로 썼겠는가고 반문한 내용이다. [또한 숭례문(崇禮門)이나 흥인지문(興仁之門), 홍화문(弘化門), 대성전(大成殿)의 편액(篇額)과 같은 것들이 어찌 언필(偃筆)로 쓸 수 있는 것들이겠는가. 그 이른바 언필이라한 것은 어떤 사람의 글씨를 가리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반박하였다. (참고로 1983년5월8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김응현씨의 [필법과 묵법을 함께 연구하지 아니한 우리의 서법을 개탄한 추사는 고려 말 이후 붓을 눕혀서 썼기 때문에 모두 편고(偏枯)하여 졌다고 지적, 이는 필성(筆性)을 제대로 찾지 못한 까닭이라 하였다.]고 쓴 것은 추사의[서원교필결후]의 본문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옮긴 소치이다. 위 지적은 추사가 한 것이 아니고 원교가 그의 서론에서 언필을 지적한 것이고 추사는 언필로 썼다는 것을 비판하여 언필이 아니라고 반박한 것이다. 참으로 웃지 못 할 오역이다.) 추사 선생 서평의 다른 내용들은 거의 중국서도가들에 관한 내용이다. 원교선생이 결구(結構)와 관련한 내용 중 왕희지와 대비하여 구양순, 안진경의 결구를 비판하며, [자세히 우군(왕희지)의 여러 서첩에 맞추어 보면 내 말이 근본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동쪽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루해서 고증도 못하고 다만 필진도(筆陣圖)도 변별할 줄도 모르므로 우군의 여러 서첩도 모두 다 고증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내 말이 근본이 있는 것을 증명이나 할 수 있겠는가.]고 한 말에 대해 추사선생이 이를 두고 [원교가 필진도로 결구법칙을 만들어 왕희지 서를 예로 들었는데 왕희지의 서첩은 진본이 아니거늘 무엇으로 우군의 여러 서첩 보았다는 것인가. -진본이 아님을 많은 사례를 들어 설명 ]고 반문하고 다시 원교선생의[한(漢나라)의 예서는 예기비(禮器碑)를 최고로 삼고 곽비(郭碑)로 끝나는데 후세에 홀연 수선비(受禪碑)를 예기비와 아우르니 공화비(孔和碑), 공주비(孔宙碑), 형방(衡方)의 여러 비들이 수선비에 미치지 못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데 대하여 [수선비는 위나라 예서로 당나라 예서의 발단을 열고 있는데 어찌 예기비와 같이 두며 공화, 공우비 위에 둘 수 있겠는가.]고 반박하였다. 끝 부분에 원교선생의 천품(天稟)을 인정하면서 고금의 법서의 좋은 것을 볼 수 없었고 올바른 대가에게 배우지 못하였기에 정도를 벗어났음을 안타까워하며 다음과 같이 맺고 있다. [만약 선본(善本)을 볼 수 있게 하고 정도(正道)가 있는 곳에 나아가 강희안선생을 배우게 하였다면 그 천품으로 어찌 여기에 국한 하였을 뿐이었겠는가.] 이것이 원교선생을 비판하였다는 추사선생의 [서원교필결후]의 주요 내용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추사가 원교서론(圓嶠書論)에 대한 가혹한 비판을 함으로써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있던 우리서단에 너무 큰 피해를 입혔다.]는 말은 [원교서론]이나 추사의 [서원교서론후]를 읽어 보지도 않고,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 비판이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던 우리서단에 피해를 입혔다는 매도적 결론을 내린 것은 참으로 본말이 전도된 무식함의 발로로 밖에 이해할 수 없다. 원교는 기존의 고려 말로 부터 조선초기의 서도(주로 중국의 송설체(松雪體))에 대해 부정적이고 몰상식한 식견을 피력하였으며, 중국의 왕희지 서법에 대해 사대적인 추종과 찬양으로 일관하였는바 추사는 이를 세세하고 정확한 자료와 근거를 들어 반박하였기에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던]이란 말은 쓸 만한 근거가 없다. 원교가 [서체가 메마르고 완전치 못하다.]고 언급한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는 신라시대부터 이어져온 구양순체가 사라지고 조맹부의 송설체가 성행하던 시기였으며, 그 후 추사, 원교시대에는 진체(晋體)인 종요, 왕희지서체가 성행하였다. 원교는 중국의 조맹부의 송설체를 쓴 조선 서도가들의 서법을 비판하고 고루하다는 등 매도하였으며, 중국의 왕희지서풍을 추앙하여 그 뜻을 기리는 취지의 서론을 써서 중국의 영향(松雪體)을 비판하고, 다른 중국의 영향(晋體)을 추종하였는데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려 몸부림 쳤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추사는 원교의 우리나라 서도의 매도를 조목조목 비판하여 우리나라 서도가 훌륭함을 역설하고 원교가 인용한 진체 서법의 문제점을 정확한 근거를 들어 반박하였는바 추사 비판서의 어디에도 중국의 서법을 강요하거나 중국의 영향을 추종하는 내용이 없다. 끝에서는 강희안선생을 배웠으면 원교가 더욱 훌륭한 글을 썼을 것이라고 피력하는 등 우리나라 서도를 옹호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본말의 전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가 무명의 서예가였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너무 영향력을 휘두르는 태두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적에 못지않게 과오도 크다.]
추사가 서단에 무슨 큰 영향력을 휘둘렀다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는 늦은 3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참판까지 오르긴 했지만 계속된 당파싸움의 와중에 휘말려 55세에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64세에 귀경하였으나 이후로도 계속된 파벌싸움으로 정치적인 영향력을 잃었다. 이것이 추사가 실학의 학문연구에 몰두하고 금석문과 고증학을 연구하여 서도에 매진하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태두라면 실학을 바탕으로 한 실사구시적인 학문 사상체계를 정립하였는바 개화사상을 추종한 정치인들이 이를 수용하여 격변기 조선말기의 정치사상적인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된 것을 말한다면 혹 모르겠다. 추사는 제주도 유배 시 59세 되던 해에 청나라에서 책을 선물 받고 세한도 자제문에서 [세상은 물밀듯이 권력 이익만을 추종하는데 이와 같이 심력을 기울여 얻은 것을 권력가에게 돌리지 않고 해외의 한 초췌하고 고고(枯槁)한 사람에게 보낸단 말인가.]라고 썼다. 본인 스스로를 초췌하고 말라비틀어진 늙은이로 묘사하고 있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를 않았다는 말이다. 또 [내 글씨가 아직 옹졸하고 고루하여 20년 동안 갈림길을 헤매고 있다.]고하며 자신의 솜씨를 낮추고 있다. 또 [나는 지인이 글씨를 써달라고 하면 그것이 부담이 된다.]고도 하였다. 이를 보면 영향력을 휘두른 태두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추사는 실학사상을 이어받아 실사구시론을 펼쳐 학예일치(學藝一致)를 주장하는 그의 고증학적인 학풍을 견지하였고, 사대부들에게도 이치나 논리에 거스리면 비판을 가하였으며, 중인계급들이라도 재능이 출중하면 크게 칭찬하고 교류하는 등 격식을 두지 않았거니와 영향력을 휘둘렀다는 말은 가당하지 않다. 북학파의 거두인 박제가(중인계급)를 스승으로 모시지 않았는가. 원교가 중인계급임을 들어 가혹하게 비판하였다는 것은 맞지않는 말이다. 사대부들로부터 서도의 이단아로 취급을 받은 예로 추사는[세간에서 내 글씨가 기괴(奇怪)하다고 한다.]고 피력하였다. 그 후에 중국에서 해동공자로 추사를 칭송하고 그의 작품을 고가에 사가고 하면서 추사선생이 재조명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태두]였다 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본다.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 태두]라면 모르겠다. 뒤이어 [그의 영향이 오늘까지도 미치고 있음을 생각하면 오늘의 서단도 그의 피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망발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서단의 원로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물어보자. 현재 서예계가 이 꼴이 된 것이 추사선생의 피해 때문인가. 아니면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그 처절한 법고창신의 독창성을 인정하고 추앙하기까지 하는 추사선생을 시기질투하고 매도하며 이러한 말도 안 되는 글로 사람을 피곤하고 울분케하는 기존의 서예인 들의 잘못 때문인가.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에게 반문해보길 바란다. 2005년의 국회청문회에서 서예인구가 김영삼대통령 재임때 8백만이던 것이 2천년대초에는 3백5십만명도 안된다고 집계하였다. 그러면 이것도 추사선생의 잘못이라고 하겠는가. 도제형식의 추잡하고 부정한 서예교습과 지극히 편파적인 파벌싸움, 각종 공모전등의 비리 부정 등이 서예인의 등을 돌린 것은 아닌가. 추사선생이 중국의 서법을 섭렵했지만 그에 종속됨 없이 동양이 인정하는 중국과 같지 않은 법고창신의 서풍을 창안하였는바 이를 들어 내어 가르치고 그 정신을 계승시켰다면 우리나라 서단이 이 꼴이 되었겠는가. 책의 저자 글대로 근 현대에 들어서서 추사선생의 추종자들이 서예계에 있었다고 치자. 그런데 어찌하여 추사진적이나 작품들은 일본이나 중국에 다 빼앗겼는가. 어찌하여 동양제일의 추사서체를 이어갈려는 노력이 없는가. 작금의 서예 공모전에 추사서체가 발을 부치지 못하고 있다. 원로에게 물어봐도 묵묵무답이다. [추사체는 훌륭한 집과 같아서 범인이 손을 대면 훼손될까하여 공모하지 않는다?] 설명이 참 가관이다. 참으로 토착된 중국풍의 사대주의적인 서예계, 문파인가 뭔가하는 파벌싸움에 절어든 서예계, 남이 잘하는 것을 못보는 서예계, 서예인이 준 피해가 아니고, 이 모든 것을 부정하고 예리한 통찰로 동양의 서도 역사를 일별하고 철저하게 고증학과 금석문학을 연구하여 묵묵히 처절한 법고창신으로 이룬 추사서예세계가 오늘날의 서단에 피해를 주었다니 참으로 가소롭다. 오늘날의 서단이 추사의 피해자가 아니고 추사선생이 오늘날 서단의 피해자일 뿐이다.
-1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