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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서신

거대한 깨달음, 거지(巨智) -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만 변한다

작성자김경근|작성시간26.06.08|조회수36 목록 댓글 0

1. 개과천선이 어려운 이유 -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개과천선(改過遷善)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지난 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사람이 되다’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어떻게 개과천선 될 수 있을까? 자기가 우주의 중심이고 옳다고 생각하는 존재가 어떻게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칠 수 있을까? 이것은 극적인 변화이다.

 

사람은 잘 안 변한다고 한다. 이 말은 얼마나 사람이 개과천선할 수 없는 존재인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겉은 변한 것 같아 보이지만 그 속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다시 전과 같아진다.

이는 담배를 끊었다가 다시 피게 되는 것과는 다른.. 근원적 존재의 문제다.

 

인간은 내면에 굳어진 자아를 평생 간직하며 살다가 결국 죽음에 이른다.

그러므로 개과천선이라는 것은 극적이고 드문 변화다.

 

예전에 집 욕실 벽에 환풍기가 먼지로 막혀 곰팡이가 생겼다.

순식간에 욕실 벽 전체에 곰팡이가 생겼다. 닦아내도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최후의 방법으로 페인트를 사서 벽에 덧입혔다. 그러니 욕실 벽이 깨끗해졌다. 그 후 수년이 지났다.

다시 환풍기에 먼지가 끼고 습해지면서 곰팡이가 다시 벽에 돋아났다. 곰팡이가 다시 벽에 생긴 것이다.

이것이 인간존재의 죄성이 아닐까? 페인트 칠을 할 때는 깨끗해진 것 같은데, 다시 살아나는 곰팡이 같은..

 

사람은 스스로 굳이 개과천선할 이유를 못 느낀다. 

살인자나 강간범이나 아주 중죄를 지은 경우, 그것에 대한 뉘우침을 스스로 조금 느낀다.(없기도 하고 핑계나 변명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일반 사람은 그런 살인이나 강간, 폭행 등의 중죄를 짓거나 나쁜 짓을 하지 않고 평생을 산다.

교도소에 들어갈 만한 죄를 짓지 않기에 개과천선이라는 말도 인생에서 낯설다. 그건 살인자에게나 해당된다..

 

개관천선이 어려운 이유는 자신이 죄인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단테의 신곡에는 천국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에도 들어가지 못한 자들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선을 위해서도, 악을 위해서도 결단하지 않고, 평생 자기 이익만 좇으며 옳고 그름 사이에서 중립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들은 선을 행한 적도 없지만, 악을 행하지도 않았기에 개과천선할 이유가 없다. 굳이 변화의 필요를 느낄 수 없다. 단테는 그들이 있을 곳은 지옥의 문턱이며, ‘비겁자들’이라고 했다.

 

2. 거지(巨智), 크게 깨달은 사람. 고 이중표 목사

 

지금은 고인이 되신 한신 교회에 이중표 목사의 호는 ‘거지’다. 그래서 그분을 가리켜 ‘거지 이중표 목사’라고 한다. 거지는 우리가 아는 구걸하는 사람이다. 그 거지(巨智)라는 호에는 그런 의미도 있다. 거지처럼 겸손한 삶을 살자란 말이다.

 

불교에서 수도승들에게 음식을 받아 오도록 절에서 마을로 보낸다. 탁발을 보내는 이유가 두 가지라고 한다.

하나는 탁발을 통해서 수도승이 겸손을 배우게 하고, 다른 하나는 탁발을 통해서 시주 하는 자들이 공덕을 얻게 하려고 한다. 탁발 거지가 되는 것은 겸손의 훈련이다.   

 

고 이중표 목사의 호가 거지라는 것은 그 낮아짐 의미보다, ‘크게 깨달았다’ 라는 의미다.

클 ‘거’(巨)자에 지혜 ‘지’(智)를 사용하여 거지(巨智)라고 한다. 

 

그는 십자가 고난을 크게 깨달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죽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크게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아호를 ‘크게 깨달았다’고 하여 ‘거지’라고 지었다. 그 깨달음은 그를 평생 청빈과 겸손으로 또 십자가의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으로 살게 했다.  

 

3. 눈물로 변하지 않는다. 오직 십자가를 통과해야만 변한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다. 그는 예수님을 사랑했고 그를 충성되이 따랐다. 예수께서 십자가 죽음을 예고했을 때 그는 다른 사람은 다 버릴지라도 자신만을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하지만 주님이 십자가 못 박히기 바로 전날, 심문받고 무력하게 있는 예수의 모습을 볼 때, 두려움이 생겼다.

그로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다. 세 번째 부인할 때는 두려워서 저주하며 부인하기까지 한다.

 

닭이 울 때 자신의 배신과 죄를 깨닫고 통곡한다.

하지만 그의 통곡의 깨달음은 온전한 변화를 준 깨달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랑하는 선생, 메시아로 기대와 소망을 걸었던 예수를 배반한 자신에 대한 질책과 자책, 인간적이며 회한과 애정과 슬픔의 깨달음이었다. 통곡을 했다고 변화되지 않았다. 그 눈물 후 베드로는 갈릴리 어부로 다시 돌아가버렸다.

 

눈물이 사람을 깨닫게 하진 못한다. 눈물은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도 하지 못한다. 거듭나게 하지 못한다.

 

거듭남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 거듭남은 지식이나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십자가를 통과해야 하는 깨달음이다. 

십자가 죽음의 예수와 연합할 때 알게 된다. 

보게 된다. 만지게 된다. 느끼게 된다. 믿게 된다.

 

4. 십자가의 예수를 만나고, 죽음을 통과한 사울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갈2:20) 했다.

 

바울의 깨달음은 십자가에서 죽는 연합을 통해서 이뤄진 것이다.

그로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이 여겼다. 

죽은 자에겐 소유는 아무 소용이 없다. 죽으면 모든 것이 필요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는 말은 너무나 명쾌히 이해가 된다.

 

그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에 어떤 것에도 그에겐 자랑할 것이 없었다. 죽음 앞에선 학력도 명예도, 미모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십자가를 경험한 자는 자신을 나타내거나 주장하지 않고 겸손한 줄 믿는다.

말만 죽었다 하는 자는 여전히 집착한다. 돈, 명예, 인기, 관계, 등등.. 그는 죽지 않은 것이다. 죽으면 아무 것도 소용이 없다.

 

사울은 다메섹 사건 후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했다(행9:9).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

음식은 40일을 굶을 수 있다. 하지만 물은 사흘을 마시지 못하면 죽는다.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는 의미는 그가 생사의 고비에 다달았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를 만난 후 죽음을 경험한 것이다.

 

나는 생각하기에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난 후 자신이 그리스도인을 핍박한 심각한 자책과 두려움으로 식음을 전폐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만히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런 종류의 고통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들었다.

 

사울이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는데, 그것은 죽음까지 갔다는 것이다. 그는 주님을 만남으로 진정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대면한 자는 죽는다고 했다. 그래서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는 하나님을 본 이유로 죽을 것이라고 두려워했다(삿13:22). 

사울의 경험은 죽음의 고통과 공포와 절망이었을 것이다. 

실명되고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다메섹의 체험으로 그는 죽은 것이다. 주께서 아나니아를 그에게 보내지 않았다면 그는 정말 죽고 말았을 것이다. 아나니아가 사울을 찾아간 안수한 것은 죽음의 문턱을 넘어가는 찰라에 손을 잡은 마지막 골든 타임이었던 것이다. 사울은 그 죽음의 문턱에 선 것 같은 절망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는 십자가의 예수를 만난 후, 육신의 죽음 체험(물론 영적)은 그를 깨닫게 했다. 완전히 그를 변화시켰다.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되었다. 

죽고 다시 산 것이다. 

이것이 그의 체험적 신앙이요 다메섹에서의 깨달음이었다

거지의 은혜였다

율법의 선행, 노력, 수고, 고행에 따른 제한적 깨달음이 아닌,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죽음에 이른 무제한적 위로부터의 깨달음이다.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눅20:18). 완전히 가루가 된 깨달음이다.

 

그 거대한 깨달음, 거지(巨智)가운데 사람이 변화된다. 거듭난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그 큰 깨달음은 고통과 고난이 동반된다. 깨달음은 죽음처럼 고난 가운데서 얻는 것이다.

 

깨달음은 축복이다. 상급이다. 훈장이며 면류관이다. 상급은 수고 없이 이뤄지지 않는다.

대속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희생을 통해서 이뤄지지 않았나?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영적인 변화와 상급은 거저 이뤄지지 않는다. 

 

십자가를 통과한 깨달음을 통해서 우리는 변화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계시록의 일곱 교회에 대한 주님의 말씀도 인내와 헌신과 희생을 요구하는 것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

 

5.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4:1~2)

 

나는 이 본문을 읽으면 마음에 많이 와 닿았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다. 육체의 고난은 십자가에서의 고난이다. 우리가 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주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이미 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가 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같은 고난은 받은 자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를 상기시키며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입어라 한다. 

 

영어 성경에서는 ‘갑옷을 입으라’는 표현을 ‘동일한 고난을 당한 태도같이 무장하라’고 적혀있다. 즉 주님의 고난을 우리가 동일하게 체험했고, 또 그렇게 믿어라는 것이다. 무장하듯 단단히 믿으라 한다.

십자가 고난을 통과한 자에게 죄가 그치는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육체의 고난은 사람을 깨닫게 한다. 병든 사람이 건강한 사람보다 나은 이유는 병든 자는 깨닫기 때문이다.

고난은 사람을 겸손하게 하며 자신을 직시하게 한다. 회개하게 한다. 성찰하게 한다. 몰랐던 것을 깨닫게 한다.

 

생사를 가르는 수술대에 올라가기 전..

소리치든 사람이 조용해진다. 아내에게, 남편에게, 감사를 표하고 다정해진다. 자녀들에게 용서를 빈다.

 

죽음의 고난 앞에서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돈, 집, 자동차, 명예, 인기, 권력이 허망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죽음의 문턱 앞에서 욕심이 없다. 내려놓는다. 

 

왜 악착같이 집착했던 것을 내려 놓을까? 깨달았기 때문이다. 알게 되었다. 그것이 허무한 것이라는 것을..

 

일본의 대표적인 기독교 작가인 미우라 아야코라는 꽃다운 나이 24살 때에 병이 얻었다. 그로 13년 동안 누워서 지내야만 했다. 직장암, 파킨슨 병, 척추 결핵을 겪어야만 했다. 그녀의 육체적 고난은 그녀를 진정한 변화를 일으켰고,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갖게 했다. 그녀가 쓴 ‘빙점’이라는 소설은 고난이 얼마나 한 사람을 고귀하게 만드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녀는 유언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질병으로 내가 잃은 것은 건강일 뿐입니다. 그 대신 신앙과 생명을 얻었습니다.’

 

고난이라는 광야를 지난 자는 그 후로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한다. 그러므로 고난은 새로운 변화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6. 고난의 은혜와 축복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고난을 당한다. 상실, 실패, 좌절, 가난, 질병, 죽음 등..

생로병사(生老病死)라고 하지 않나?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 태어나서 늙고 죽는 과정 속에 병이라는 것이 엄연히 존재한다.

육체의 고난이 있다.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고난의 상징이다.

십자가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고뇌와 슬픔과 두려움과 공포를 총괄한다.

그 십자가를 이미 주님께서 다 지셨다.

그러므로 누구든 고난 속에 있는 자는 예수 안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것은 슬픔과 저주가 아니라 주님과 연합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는 은혜의 시작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고난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받아드려야 한다.

고난을 두려워하기에 피하고 도망치고 원망하고 괴로워하고 노예가 되기 보다, 고난을 통해 십자의 예수와 연합되어, 육체의 정욕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을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자가 되라고 한다.

 

우리 가운데는 아픈 자들이 많다. 병든 자들도 있다. 우리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무서워하고 공포에 빠진다.

 

어떻게 할 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고난에 대하는 태도는 조급함이나 두려움이나 패닉이 아니다. 우리가 고난에 대하는 태도는 완전함에 대한 소망이다. 고난은 우리를 정결하게 하고 변화시킨다. 더 이상 정욕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살게 한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낫게 한다는 말씀을 붙들고 기도해야 한다.

 

나는 병으로 많은 고난을 당한 사람이다. 병에 다시 걸리는 것이 두렵다. 입원하고 아프고 짐이 되는 것이 두렵다. 하지만 그런 고난을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깨닫게 되고, 육신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거룩한 삶에 대한 안내를 받게 됨에 감사한다.

 

7. 고난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와 만난 고난이 사람을 변화시킨다 

 

기억해야 할 것은 고난이 모든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유대의 왕 중에 히스기야가 있다. 그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 눈물로 기도한 왕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생명을 15년 더 연장하여 주셨다. 죽음에서 살아난 히스기야는 큰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하지만 히스기야의 인생은 그가 병으로 죽기 전까지의 이전과 병에서 구원을 얻어 산 이후의 기간은 확연한 차이가 있다. 병에 걸리기 전까지는 히스기야는 유대왕 중에 다윗 이후에 가장 경건한 왕으로 평가되고 또한 이스라엘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한 왕이었다.(왕하 18:5).

 

그는 병에 걸리기 전에는 종교개혁을 통해 성전을 회복하고 유월절을 다시 시작하고 산당을 파괴했다.

하지만 병에 걸려 생명을 연장 받은 후에는 성경은 다른 모습을 전한다.

 

히스기야를 죽음의 문턱까지 간 자였다. 그는 그 자리에서 은혜를 받아 생명을 연장 받았으나, 이후의 그 삶에 대한 큰 깨달음은 없었던 것 같다. 바벨론에서 온 사신들에게 왕궁의 보고와 무기고를 다 보여줬다. 이는 교만이었고 실수였다. 생명 연장 후 태어난 아들 므낫세는 유다 왕 중에 가장 잔인하고 하나님의 대적한 왕이었다.

 

히스기야가 생명을 연장 받은 후에, 정욕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육체의 때를 살지 못한 것 같다. 병 나음과 육체의 고난에서의 해방이 모두에게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 아니다.

 

고난이 진정한 유익이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연합할 때만이 그렇다.

그때 고난은 정욕을 죽이는 요인이 되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남은 육신의 삶을 살게 하는 변화를 이룬다.

 

큰 깨달음, 거지가 되는 것이다. 성경은 고난 받은 것이 내게 유익이라 그로 인해 주의 율례를 배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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