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시의노래
1. 몰낙한 세 가문
K 아버지의 고향은 무안군 운남면이다
그 곳에서 십대를 부유하게 부친과 어머니 곁에서 삼형제는 잘 먹고 배우며 자랐다 그 지역의 부자 유지였지만 일제의 강경책에 못이겨 그 아버지가 돌아가기전 13세로 추정 한자를 깨우쳤고 아직어린 동생 둘을 거르리고 다녔으니 일본어도 곳 잘 했다 바닷가 마을 밀물과 설물이 어우어져 먹거리가 풍요로운 땅 밀물 새우 토화와 어리굴젓이 굴비와 생조기 찌게가 밥상에 놓였다 삼형제중 큰형만이 그 기억을 오랬동안 생생히 기억할 뿐이다
K 씨네 집은 삼대종가였는데 삼형제만 남기고 행방을 감춘 모친을 찾을 길도 막막해 H군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아담한 마을에 중앙길로 접어 들어가면 한적한곳에 자리한 큰초가가 눈에 들어와 거기서 겨울을 나기로 한다 이사짐도 거의 없어 정리할 것도 없다 그져 몸을 누울 곳만 있으면 누어 잤고 거지의 무리는 아니였으니 만족했다 K의 아버지가 맡이다 보니 동생들을 돌보며 여기저기 떠 돌다 정착을 한 마을이 y마을 이다
Kys의 어머니는 무남독여 외동으로 그녀 역시 부모님이 모두 그녀가 아홉살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친가 y마을은 다행히 일가 친척이 많아서 그럭저럭 살만했고 그녀 아버지가 남긴 유산이 있었지만 누군가가 가로챈다 14살이되어 34세인 20년차이 나는 남편k와 어린 아내가 만나 혼인을 한다 3년 후 1926년 큰아들 ys를 낳았다
4대 종손 ys는 작았지만 똘똘했다 세살때 부터 그 아비의 팔베개에서 천자문을 모두 통달 했고 다섯살 때 첫여동생을 열달살 때 둘쩨 여동생 열두살에 첫 남동생 열다섯에 돌째 남동생 열여덟에 셋째 남동생을 보고 구년이 흘려 막내 여동생을 끝으로 7남매의 맡이가 된다
ys는 열살에 서당을 갔는데 훈장님이 2단계 울려 소학과 논어를 배우게 했고 한글은 나중에 혼자 서 깨우첬다 15세부터는 생계 문제로 겨울에는 뗄감을 걱정해야했고 동생들 먹거리를 걱정하는 그는 열일곱살 나이 차이 밖에 않나는 어머니와 함께 하는 일들이 많았다 아버지와 함께 하는 일들은 어렵고 두려워서 실수도 잖아으며 손과 발로 버러먹는 일을 시켰고 목수일을 했던 아바지와는 달리 일찍 상업에 눈뜬 열 일곱에 ys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그 혼자 물장수를 하고 아버지가 제한을 거절하자 어머니를 설득 동의 하여 쌀장사를 했다 칠남매와 무탈히 지내다가 탈도 많고 철없는 식구들 더 늘었다 죽도 못먹던 형평인데 죽은 줄로만 알았던 윤씨집안 할머니까지 찾아 왔고 늙으막에 시력이 급격히 떨어져 눈 뜬장님이 되어온 시어머니를 돌보게 된 어머니가 가여워서 혼자 쌀을 팔았다 작은아버지네와 막내작은아버지네 가족까지 모두 껴안게 되었고 명이 짧았던지 못먹고 살아선지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난 그들을 대신하여 큰아버지인 k의 집에서 모두 살게 되면서 식구가 초가삼간 집 한 채에 17명으로 늘어서 먹고 자고 빨래도 산더미가 따로 없었다 모두 살기 힘듣 시기 였기에 멀건 미음죽도 먹거리가 없어 힘든 나날을 보냈다
Jse그녀 집안도 아버지 J씨는 성실하고 잘생긴 청년으로 전남 js에서 어마어마 하게 부잣집의 집사로 일을 했다 jse그녀의 어머니는 g씨의 막내 외동딸 이였다
g씨의 할아버지는 아들을 일제의 강제 진용을 막으려고 하루 아참에 그 많은 땅문서며 대궐같은 집문서를 강제로 빠앗기다싶이 잃게되어 집사로 있던 j씨에게 딸을 강제로 결혼 시키고 모두 죽는다
J씨는 아씨신분이였던 kang씨를 모시다싶이 하고 js에서 딸 셋에 아들 하나를 낳아 ma군으로 전쟁통에 피난을 온다 그후 다섯을 더낳아 모두 식구가 4남4녀 팔 남매가 되었다
1936년에 온살박로 태어난 돌째 딸을 아홉살되던 봄에 h교회 목사 부부가 딸이 없어 양육을 하고 싶다고 와서 데리고 간다 말이 수양딸이지 가족은 절대 될수 없었고 바르질을 배우며 교회 청소나 하고 아이를 돌보는 사람이 필요해서 데려온 것인데도 그녀는 그 곳이 좋았다 깨끗한 잠자리와 좋은 음식, 찬송가 소리, 풍금 소리가 들리는 곳
그렇게 십년을 점잖은 보모 밑에서 자란는 동안 그녀의 네살위에 언니가 열여섯살에 결혼을 하고 남편이 서울에서 사업을 한다고 혼자 떠났다 세달이 지나도록 오지 않아서 찾으러 갔지만 못 찾았다는 소식을 편지로만 전해 온다 그 나쁜 놈이 결혼을 해서 아이가 있는 유부남 이였다며 남편을 더이상 찾지 않는 다는 사연을 보낸다 서울에 눌러 앉아 여러 여관과 숙박시설을 돌아 다니며 청소와 빨래도 하고 잔 심부름도 하여
고생고생 하면서 사업을 시작 한다 돈을 모으고 모아 여관을 인수 받게 된다
jh여관의 여사장이 되어 1961년 전쟁이 끝나자 서울로 남은 6남와 부모님을 모두 상경시켜 d구 h동에 이사를 시킨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했다 히라손이와 이경제 김두한 한주먹 한다는 전국의 깡패 무리들의 싸움을 눈 앞에서 지켜 보았고 정치에 관심을 가신 사람들도 그녀의 여관에서 장기간 숙박을 했고 그녀는 여관을 두개더 인수하여 여관 사업가로 변신한다
그리고 종로 1가2가3가의 부녀회 회장도 10년 정도 하게 된다
197.80년대의 중앙정보부 사람들도 그녀의 여관에서 숙박을 했다
여장부 답게 잘 나갔다
1990년대 ㅈㅎ 여관을 팔고 말에 인천에 집과 수원 장안에 집을 사지만 가족이 없는 그녀는 인천 집을 팔아 홀연히 미국으로 여행 비자를 내서 떠났다가 돌아온다 돌아온 뒤에 그녀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막내 남동생 마저 죽는다 그녀는 완전히 혼자가 되어 돌째 여동생이 사는 h군으로 와서 노후를 보낸다
소설 까시의노래
2화 결혼과 아픈의 노래 멍애
새터를 잡아 냇가 건너에 집을 셋채를 짓고 이사를 한다 그 아버지의 처가 살이가 싫었을 거다
Ys는 늦은 나이에 결혼이라니 스물아홉에 그것도 열살어린 꽃다운 열아홉 순이를 만났다 그들은 H교회 목시님 어머니의 소개로 겨울에 만나 다음해 봄 음력 3월3일에 제비도 강남 갔다 돌아 오는 날 가족들과 이웃들이 모인 곳에서 냉수 한 사발 놓고 결혼을 올린다 그해 여름 그녀는 임신을 했고 결혼후 백일이 지난 시누이가 있었고 철없는 시동생들과 작은 시누이도 스물이 넘어서야 혼인을 헀지만 남편이 두어달 후에 입대를 해서 자주 와서 살림 살이를 나눠갔고 서로 부대끼며 시부모와 시누이 둘을 모셔야 했다 그해 가을 어느 날 남편이 군대 기피자로 한마디 말없이 강원도로 끌려갔다는 소식에 온 가족이 슬픔에 빠진다 한국 전쟁이 끝난 무렵이긴 해도 아직은 목숨이 위태로운터라 그녀는 시어머니와 매일 새벽 기도와 아침 정안수를 떠 놓고 기도를 하며 소식을 기다렸다 겨울이 다 되어서 편지에 무사 하다는 안부가 왔다
다음 해 아내 혼자 낳은 아들을 보러 휴가를 나왔으나 홍력의 열꽃으로 인해 죽어버린 아이를 차가운 땅속에 묻고 가슴 속에 묻고 다시 전선으로 간다 아이를 잃은 애엄마의 슬픔을 위로해 주지 못한 마음이 내내 가시지 않아서 편지를 보내 강원도 오게해 위로를 하고 내려보낸다 1959년 6월 복덩이 큰아들이 건강하게 태어났다 3년6개월 취사병으로 만기 제대 하면서 군대에서 상도 받고 꿈 해몽책도 한글로 만들어 와서 아내에게 선물로 준다 ys는 외가사람들이 많이 사는 큰동네를 좋아하여 냇가 건너가서 놀았다 씨름도 하면 힘쌘 동무들을 제치고 이겼고 머리가 좋아 꽈를 부려 이겼다고 자랑을 했다 촉기도 남달라서 투전판에서도 많이 재미를 보았다 어느날 잔치 집에 가서 떡이 맛이 있어 너무 많이 먹었다가 위장염에 걸렸다 속이 울렁거리고 쏙쓰림이 오랜동안 지속 되었다 몸이 아프니 심기가 날카로워졌고 사방 팔방으로 의원을 찾아 다닌다 그 와중애 아내가 딸을 낳았고 둘째 아들을 낳았는데 나무 허약하게 낳아았다
아내도 남편이 병으로 못먹으니 걱정이 되어 잘 먹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Ys는 생각끝에 혼자 의서를 구해서 어떻게든 약으로 구해 병을 이겨내려고 노력을 해서 나았다 그 해가 1966말티 막내 아들이 태아나는데 아내의 마음이 편안하고 잘 먹어서인지 정말 튼튼하고 건강해 보였다
집안 살림을 일으켜 보려고 남편과 합의를 해서 서울로 순이는 남매만 데리고 상경을 한다 서울에 미리 정책한 언니의 일을 돕다가 작은 장사를 시작하려고 왔으나 남겨놓은 아들 둘이 한 없이 그리워 내려가 데리고 올라 왔지만 언니의 여관 생활속에 아직 어린 아이들을 여자 혼자 돌보기가 쉽지 않았다 큰아들은 일곱에 초등학교에 보냈고 아홉살 3학년이 되었다 일곱살 둘째 딸아이는 서울에서 길일 잃어 버려 혼이 난 기억이있었다 두 아이들만 이라도 데려와서 다행스러원다 약골셋째 아들 다섯살과 젖땐 두살박이 넷째는 엄마 품안이 그리울 때였으나 돌보지 못했다
한달이 1년과 같고 1년이 10년같았다 어미의 마음이 편하자고 아들 둘 마져 데리고 서울로 올라 가지만 허약한 셋째와 아기 넷째는 물갈이 살사를 해서 몇일 후 다시 h군 본가 집으로 내려 보내며 할머니와 애들 아버지와 막내 고모가 돌보게 하고 순이는 서울에 올라가 꽃장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결혼을 하나 하나 시키고 분가를 시키고 셋이 남았다
2년이 흐르고 애들 할아버지가 79세1969년 겨울80을 열흘 앞두고 죽는다
맡며느리의 서울 생활은 그렇게 마무리 정리가 되고 돌아와 보니 남편k가 바람을 피워서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잘 정리를 했다 그리고 어느날 밤 꿈을 꿨는데 태몽인가 예지몽인가 돼지 다섯마리 중 한마리가 조금 작고 미성숙해 가여운 여운을 남긴 꿈 이였다
Ys는 결혼을 못시키 막내남동생은 1973년에 결혼을 시켰고 여동생 말순은 1975년에 봄 전파상을 차린 매제와 결혼을 시킨다 그리고
13년 정도 흘렸나보다 마지막남은 4촌 남동생 해외에서 온양어선을 타고 돈을 벌어 kys에게 보낸 동생을 결혼을 시켰다
바다 사나이인 그는 술을 좋아했고 맡겨놓는 돈을 달라고 했지만 그의 큰형이 대형트럭 운송 업에 종사하다가 큰 사고가 나서 고스란히 수술비로 주었다고 해도 술만 먹으면 술기운에 큰집형님을 믿고 맡겼다며 돈 내 놓으라고 고래 고래 소리 지르며 속을 뒤집어 놓고 술이 깨면 사과를 하러 왔다 이것이 반복 되는 일상이였다
Kys 미안해하고 안타가워서 그의 하소연을 들어 주었다
소설 까시의 노래
3화 k 진정한 가족의 노래 하모니
1971년의 복덩이
봄기운이 한참 물올릴 때 3남 2녀중 막내가 태어났다
1970년 가을에 옛 외가집을 사서 이사를 한 Ys의 삶. 44세의 나이에 늦둥이를 얻어 매우 건강한 막내 딸아이를 받게 된다 어머니도 어디다녀 오신다하여 보낸는데 갑작스러운 산고가 시작되었다 그헣게 치열하게 열심히 태어난 아기를 받아 안아 본 경험이 없던 그는 아이에게 양수와 태반을 제거한후 거꾸로 세워 들고 엉덩이를 살살 두드려 첫울음 소리가 나도록 유도 해야하는데 처음인지라 하지않고 너무 건강하게 태어나 고개와 허리를 받쳐세웟다 아이 엄마는 산고에 지쳐 잠을 잤고 k어머니가 그 아이를 받았다면
세울일도 없었고 그냥 엄마 옆에 잠만 잘잤을 아기는 3일후 밤부터 많이 울었고 열도 많이 났다 아이 낳은 집에 금줄도 없어고 사람들이 유난히 많이 왔다 갔다고 했다 열병의 전염성이 감염 된 것도 있었겠다 생각한 k는 너무 우는 아이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고 엄마와 함께 그냥 두고 보다가 젓먹이 아이는 엄마가 약을 먹어 수유를 통해 열을 내닐수 있다고 생각하고 실험 삼아 해 본다
그렇게 열은 내렸고 울음도 잣아 들어기에 안심을 했고 어머니 말에
우는 아이도 있고 늦된 아이도 있더라 해서 백일이 지났고 첫돌이 되서야 어딘가 잘 못됨을 느껴다 그 때만 해도 보릿고개가 여전했고 k의 어린 아이들과 동생네 가족들도 큰집이라 자주 왕래가 있었다 12세 큰아들은 으젓하고 말이 거의 없어고 서울교육을 받아서인지 거만한 느낌을 주었다
고모들 사이에서 이미지가 틀에 막혀있던 둘째 딸아이는 늘 혼자였다 서울에서는 오빠와 단둘이라 오빠가 많이 챙겨주었고 이뻐해 주었으나 여기서 그런 일을 하기엔 남동생둘을 거리리기도 벅찼고 사촌 형제도 많아 거슬리는 나날이었다 공부만 열심히 하기로 마음 먹었다 여동생 챙겨줄 여유가 없었고 여동생이 8세때 입학식은 했으나 홍력으로 1년 늦게 서야 입학을 다시하게 되고 몸이 약골 이어서 늘 피곤해 했다
작게 태어나 약해 빠진 남동생은 왜 저리 말라서 늘 엄마와 아버지 손을 탔던가
막내가 아이거 다섯살 이지만 둘째형을 오히려 챙겨주고 잘 따렸다
K씨 부인 순이는 늘 외로운 딸을 항상 챙기지 못해 늘 미안한 마음이 있다
K의 큰아들은 맡이란 책임감이 무거웠던지 고등학교를 마친 뒤 육군 사관학교를 지원하지만 키가 작아 면접에서 떨어지자 삼사관 학교에 지원해 합격 몇년후 육군항공에 편입학해 비행기 정비 장교로써 소리만 듣고도 고장난 곳을 알고 고쳐서 인정을 받아 군인으로 소신을 가지고 생활을 하고 결혼도 해서 딸 아들을 둔다 대학에가고 싶어 따로 공부를 해서 건국대학교 경영을 하고 군인 가족이라 이사를 자주해서 집에서 먼 거리를 명절 마다 와서 아바지께 손녀 손자 재롱을 보여 주었고 화목한 분위기를 이끌기 위해 노력 해 왔다 두 아이들도 잘 컸다
17년후 군복무 20년만에 제대를 한다
음식 장사와 휴게소 사업도 하며 지내다 글런대로 직업도 우연히 생겼고 육군본부에서도 근무를 했고 아이들이 장성하여 미국에서 살고있다 아이들이 아이를 낳았고 손주들 재롱에 미국땅을 밝으며 살아갈 것이다
큰딸은 늘 기가 죽어 혼자였고 어머니는 순이는 딸아이를 잘 돌봐 줄 형편도 못되 괴로웠다 그 때는 소작 논농사며 밭농사에 새벽에 나가 일을 하고 수많은 음식을 그때 그때 해서 먹어야 했기 때문이었고 빨래도 수없이 나와 늘 손빨래로 했고 마르지도 않아서 자주 갈아 입을 옷도 없었다 그 때는 다 그렇게 살았다지만 큰 딸은 마음을 감추고 없는 아이처럼 사춘기를 보냈고 고모들 틈에서 인정 받기란 힘든 일이었다 순이는 늘 기도했다 큰 딸이 무탈하게 사춘기를 넘기고 총명한 여인이 되기를 바랬다 깔끔한 성격에 빨래도 한번 않맡기는 딸이였고 밥도 굶는 날이 많았다 가슴으로 안아 주지 못하고 언제나 내 쳐 버린 아이는 공부는 그런대로 열심히 해 놓았던가 보다 20대 초에 서울에서 신문사도 들었 갔고 여러 곳에 이력서를 내서 합격해 경험을 싸았다 다니던 직장을 그 만두고 광주로 내려와 남동생들과 함깨 늦으막이 대학문을 두두려 전문대 에 유아교육학을 하고 국공립유원
선생님이 되어 결혼했으나 생활이 원만하지 않아 이혼을 하고 혼자서 두딸을 잘 키워 모두 출가 시키고 멋진 원감 선생님으로 몇년전 퇴직했다 참 어럽게 삶을 산것 같다는 느낌에 서글프지만 다시는 오지 않은 경험을 몸소 해 왔다 다를 동생들의 귀감이 된다
K의 아들 둘쩨로 약골로 태어나 사고도 잣았고 죽을 고비를 두번이나 남긴다 경운기 사고로 머리를 크게 다쳐 입학도 미루게 되 아홉살에 늦은 입학을 한 그는 공부에 목숨을 걸었고 정말 열심히 해서 초등1학년 말부터 성적우수 상을 중3때까지 쭉 받는다 전교 1등 우등생의 대열로 들어선다 몸이 약해서 그때는 공부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고 실토를 했다 아버지와 친척 동네 사람들이며 학교에서 칭찬해 주는 것에 저절로 신나게 공부만 열심히 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이의할머니와 자취를 하였고 광주Dd 고등학교를 전교 12등으로 들어가 전교 2등까지 한다 1980년의 5워 그들을 거기 있었다 매일 채루탄이 허늘에 퍼져 코가 얼얼 했고 무장한 군인일들이 인정 사정 없이 시위하는 시민과 학생들을 잡아 무자비하게 학살한 것을 할머니는 보셨다 손주가 걱정되고 자신의 신변도 보호하기 위해 밤을 새워 몰래 광주에서 나주까지 걸어서 70대 할머니가 아무도 몰래 빠쪄 나오다 아침쯤 군인들에게 들키지만 말을 잘 해서 다른 곳으로 줄행낭을 쳐 나주 조카 집에서 잠시 쉬다가 함평에 도착하고 집까지 걸어와서 보니 손주가 미리 와있어 안심 했다 그때 이야기를 종종 하시며 전쟁을 세변치렸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감기에 걸린 줄 알았으나 코에 문제가 생겨 큰 수술을 받게 되며 2학년 2학기 너무 중요한시기에 가로 막히고 서울대를 바라보던 꿈은 허무하게 무너져 내려 전남에서 최고 대학에
경영학과에 입학하고 4년 내내 장학생으로 졸업전 취업기회도 많았으나 행정고시를 준비하지만 번번히 낙방을 하고 결혼할 나이도 지나고 학원 강사가 되어 일하고 책도 여러편 펴내고 무슨생각을 하는지 여태 혼자다
보릿고개를 생각 하게한 셋째 아들은 그냥 평원하게 욕심이 많아 형들이 다 잘 해줘서 다행이라 여기며 누나와 아픈 동생을 잘 챙겨주는 상 남자였다 아버지 k가 끝까지 마음 속으로 이뻐하고 참 사랑을 마음으로 준 아들이다
그는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아지만 책을 많이 읽었고 시쓰기도 곧 잘 했으며 감성 깊은 문학 소년 작가가 되었어야 했는데 유일하게 이공계로 택해서 대학도전 3수끝에 한의대가려다 점수가 않나와서 포기 하고 여수 국립대 컴퓨터 공학 전공을 하고 수석 졸업후 조교로 있다가 집으로 와 공무원 시험에 도전 한다 3년후 근로 복지 공단에 최종합격 소식에 k는 아버지로써 최고로 기분이 좋아 동네 잔치를 원없이 벌릴수 있어 기뻐 했고 서울 여의도 생활을 삼남매가 같이 2년간 하게한다 결혼도 무남독녀를 만나 욕심대로 잘 살고 남매를 낳아 서울내에 중위급 대학에다닌다 그는 본사근무만 하고 있으며 산업제혜과의 총책임자로 여러 국가에 출장을 다니며 바쁜 퇴직을 앞두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보내고 있다
소설 까시의 노래
4화 목에 걸린 가시노래
K 집안이 부유해 짐은 막내 딸이 태어나고 부터 잘 풀렸다
밭 한평 논한평도 없던 그 시절 한이 맺혀 논만 28마지기 샀고 벼농사만 지어 쌀장사도 그만해도 먹고 살기 편하게 되어 집도 그 아이 열살이 되어 쓰러져간 초가 집이 한옥 기와에 이층 집을 지으려 했으나 꿈이 무산 되어 버리고 만다 그냥 한옥이지만 다락을 넣어 지었다!
1980년대는 그렇게 쌀 밥 힘으로 다가왔다
막내 딸 아이가 골격은 튼튼했으나 자라면서 말라만 갔고 늦된다고 여겼지만 세돌이 되어서야 걸었고 오른손이 봅시 불편함을 알게 되 었다 말도 어든하게 하고 앉혀 놓으면 문어 처럼 쓰르르 기어 다닐것만 같아서 병원에 대려갔더니 뇌성마비라고 알게 되었지만 아무런 치료도 약도 없다는 소리에 가슴이 무너졌다
음식물도 제대로 씹지 못하니 잘 소화가 될리 없었고 말라만 갔다 그렇다고 이 아이만 붙들고 있기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방치하다 싶이 먹을 수 있는 것으로만 먹였고 나이가 먹으면서 차차 건강해 지기를 기도했다
제대로 걷는 것은 아니 였지만 날이 해가 가고 더욱 명석해진 머리로 동네 사람들과 가족 친척들의 인기들 독차지 하고 일곱살 겨울 할아버지 제섯날 많은 사라들 속에서 자신을 똑바로 보고는 눈물을 머금고 한쪽 구석에
박혀 있는 것을 찾아낸 엄마는 가만히 다가와 묻는다 아이는 눈물을그냥 흐르며 왜 자신만 다르냐고 왜 자신을 낳았냐고 바로 죽으라고 냅두지그랬냐고 낳기 전에 배꼽 수술을 하지 힘들게 왜 낳았냐고 했다 이런 말을 다 듣고 아이 엄마는 아이를 업고 아무도
몰래 집을 나와 한적한 냇가로 간다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말라 비틀어지고 아픈 내 어린아이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들었으니 냇가에
가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몹시 추웠던 밤에 모녀가 죽을 각오로 냇가에 횅량한 바람은 눈이 날릴것 같은 그날 정말 소중한 말을 해 준다 엄마는 너를 낳아서 정말 좋았다 한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런데 넌 엄마가 낳으려 생각하지도 않았지 배속에 네가 있는 줄도 몰랐어 잘 먹어서 배가 나오는 줄 알았는데 태동이 느껴져서야 알았단다 그리고 너는 엄마 꿈에 너를 하느님이 주실거라
약속을 하신것 같아 엄마가 결혼전에 교회에서 자랐단다
하시면 아이를 진정 시켰다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말거라 그리고 너를 키운건 이 엄마가 이니라 너 할머니다 기우러진 너의 몸을 옆으로 업어 키우신 할머니 공로를 어찌 갚을 것인지를 생각해야지 여기서 이렇게 죽으면 아무도 몰라서 좋겠지만 이 엄마만 죽으면 되다며 한샇고 자심만 물로 가까이 다가갔다 같이 죽자고 왔는데 같이 살자며 이이는 소리를 치며 울었다
그때 아이는 하느님을 믿었던 그녀를 알았고 밝고 똑똑한 아이가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힘이 없는 몸이 걱정이었다 여덟살 그때 이미 한글 숫자는 깨우쳤으나 자꾸만 거꾸로 써지는 글자가 문제 였다 힘이 없는 오른 손 보다 힘이 있는 왼손으로 글자를 썼으니 마음대로 될리가 아버지도 매일 놀렸다 오른손으로 쓰라고 좀처럼 쓰이지 않안다 왼손으로 오른손 잡이의 글을 잘 쓴다 것이 여간 힘든 일이었다 끝없이 연습 했고 드디어고쳐 졌다 글자도 이쁘고 반듯해 졌다
열살에 1981년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열심히 공부를 했으나 채육 시간이 괴물 느껴졌다 여전히 다리에 힘이 없었고 엄마가 아침 시간이 더욱 바빠졌다 아이를 업고 학교에 대려다주고 k이는 신경도쓰지 않는 것 같아도 아이에게 늘 칭찬은 아끼지 않았다 유교적 아버지의 모습의 소유자 훈장님 같은 아버지였다 3학년이 되었고 그런대로 잘 걷게 되었지마 돌뿌리에 걸려 넘어지기 일수여서 무룹 팔꿈지 손바닦까지 매일 피와 상처와 흉터가 가득이었다 그 때만 해도 운동선수 들이나 아대며 무룹 보호대를 했지 일반 가정에서는 볼 수 없었다 가격도 너무 비싸서 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열심히 하라는 경려의 상도 받아와서 아버지께 용돈도 받았다 학교가는 도중에 놀림도 많이 교실안에서 은근히 따돌림을 받았고 왕따도 받았지만 선생님의 도움으로 잘 넘겼다 그 무렵 겨올 방학 때 외할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어머니와 셋째 오빠랑 다섯살때 이후 처음 기차를 탔다 슬퍼해야하는데 오빠와 아이는 신기해 했고 장난을 치며 즐거운 여행을 했다 엄마의 슬픈 모습은 기억에 오랫동안 남겼다 서울 흑석동 중앙 대학교 연극반 교실이 있는 뒤골목에 큰 기와 집이 한눈에 들어 오고 마중나온 이모와 삼춘들이 그들을 반기며 이야기를 나눴다 눈이 많이 내려 아이와 오빠는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도 만들었다
그리고 4학년때 동시쓰기 수업에서 쓴 동시가 교실복도에 걸렸다 제목은 시냇물 무엇보다 학교 선생님들이 잘 썼다 칭찬해 주셨다 그후로 아이는 시를 많이 일었고 김소월시집을 막내 오빠에게 선물도 받았다 아이의곁에는 늘 육촌언니와 육촌동생 사촌동생들이 가방을 들어 주었고 놀리려대는 아이들을 물리쳐주었고 넘어졌을때 이르켜 주었고 든든한 백이었다 6학년 졸업식에는 온 친척분들이 졸업식에 참석하여 축하와 격려를 해 주었다
중학교에 입학한 소녀는 영어시간이 즐거웠고 담임샌생님의 수학시간도 머 그리 싫진 않았다 영어 시간과 숙제는 아주 성실히 잘 해 선생님께 아주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고 국어도 썩 잘하는편인데 시험이 문제였고 아는 문제를 놓혀서 아쉬워 했다
주어진 시간이 짧아 초초해 못 푼 문제가 점점 늘어 갔다 중학교는 다른 초등학교의 학생이 모이는 곳
왕따와 은따가 소녀를 짓눌러 오기 시작했고 감수성이 한 참 무르 읶이 시를 엄청 썼다 그 시들은 비밀 일기장에 넘겼다 와따 보다는 석적이 문제 였다 국어와 영어는 지문을 읽어야 푸는데 시간이 늘 부족했고 수학과 과학 풀이 과정이 연산 점수에 포함 되어서 점수가나오는데 소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였을 깨닭아 학교를 그만두었다 1학년 2학기를 마치고 특수학교로 옴겼지만 적응이 안되 자퇴는 아니였지만 병과로 학교에서 졸업장을 받도록 해주었다 몸도 마음도 사춘기를 혹독하게 치렸다 학교를 그만두고 홀가하게 미술 학원 6개월 그 무렴 타자기는 첫째 작은 아버지가 사주셔서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전자 타지학원을 다릴까 하다가 컴퓨터 학원을다녔고 1년을 다녔다 피아노는 이론을 배우려고 초등학교 동창이
엣 모교 앞에서 하는데 거기에서 배웠다 그러는 사이 다리에 힘이 생겨 걷는 데는 지장 없게 되어다 돌뿌리나 다른 것에 걸리거나 잡자기 밀치지 않는 이상 넘어지지 않는 다리가 되었다
그 소녀의 10대 끝이나고 20대 되었다
1990년대 중후반쯤 친할머니도 급성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손님도 많았고 슬픔도 컸다 할머니으
와 추억이 많은 동네다보니 온 동네가 추모 분위기 였다 장례는 집에서 치렸는데 화려한 상여꽃이 눈부시게 빛나고 "이제가면 언제볼까"로 하는 상여노래가 온 동네를 슬프게 했다 할머니 손과 바꾸자던 손녀를 두고 연기 처럼 하늘로 퍼져 다시는 불 수 없었다
그녀는 돈 모을 궁리를 하지만 뽀족한 수가 없었다
그때 아버지 심부름을 다니며 접심 값도 모으고 명절때 친척들이 주는 것도 모으고 시내버스 값도 모아서 저축을 했다 그때만해도 이자 율이 연14% 여서 장기 복리 까지하면 돈모이는 재미가 솔솔 했다
버스도 엄마부축 없이 혼자서 타고 건강도 많이 좋아 광주시내를 걸어 다녔다 영여공부는 조금씩 해두었고 컴퓨터를 구입해서 시도 써 두고 컴퓨터 자격증시험도 도전했으나 점수 미달로 실패를 거듭해 할 수 있는것으로만 만족해야만 했다
서울에 직장을 구한 막내 오빠와 생활도 했다 함평 집에서 기차타고 총 일곱시간이 소요되는 거리였다
기차 안에서 먹고 점심을 집에서 싸가서 먹거나 가차안 식당칸에서 사먹고 지하철을 타고 저녁이 다되서 당산동 반지하 방한칸으로 들어 갔다 머리가 긴 애띤 얼굴의 그녀는 스믈일곱이였다 결혼을 해야 할 나이에 오빠 밥을 해 주러 서울에 왔고 오빠 결혼 전까지 함평과 서울을 오가며 이모내가 종로 3가 피카디리 됫골목에서 쪽방을 여러개 운영하고있어 오빠가 집에 없는 낮시간에 한번씩 갔고 대학로 거리도 혼자 다녔다 지호철은 승차권도 장애인 노약자 무료여서 걷는 다는 것이 처음 행운으로 여겨졌다 오빠가 결혼을 했고 더이상 서울은 갈 일이 없었다
1998년 함평에 내려온 그녀는 매일 컴퓨터로 아버지의 동네 문서작성만 일을 하며 용돈을 받아 간식을 사머고 생필품을 겨우 사면서 지냈다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대학도 졸업해 직장에 다니며 연애도하고 결혼 할 나이에 그녀 집안에서 동네일이나 하는 것이 안되 보여는지 돌째 오빠와 막내 오빠가 내려와 하이텔도 설치해 주고 검정고시 보라고 책도 주문해 주고 서울로 간다
고입 고졸 시헙 공부는 열심히 했으나 자꾸만 떨어지고 수학이 필수라서 열심히 해도 모르는 풀이 과정이 많았다
하이텔 채팅도 검정고시 공부를 같이 하는 사람들 모임은 없었고 그냥 수다 방이 많아서 실망스러웠다 방을 찾다 보니 "장애인과 함께하는 세상"이란 방이 눈에 들어와 잠시 눈팅하다 나와서 공부하고 그러기를 일년 이나 했다
그 사이 아버지가 뇌경색 초기 단계가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다 할머니가 있을 때는 엄청 까다로웠던 식습관도 대충 드시는 식성으로 탈바꿈 되어 어머니는 편해졌다 전기 요금 많이 나온다고 잔소리를 했고 밤부터 새벽까지 불켜고 잠안자고 공부한다고 꾸중이셨다 그 무렵 그녀는 분격적으로 연애를 목표로 채팅하고 있었다 번개팅도 했고 직접 만나러 서울도 갔다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순수하게 만나서 이야기하고 불편함을 서로 덜어주는 만남 이어서 참 좋은 느끼을 받고 돌아와서 두번째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시험을봤지만 3점 차이로 아깝게 좌절을 하고
채팅 연애도 증단을 해야 했다
맞선도 다섯차례나 봤다 아버지 재산을 노리고 멀정한 남자가 장애인인 그녀 같은 여자를 만나러 온 사람을 보니 한심스러웠다
아버지 병이 약하되어 둘째오빠가 내려왔고 약과 운동요법으로 조금 효과를 보여서 6개월만에 다시 오빠가 올라가자 그녀는 채팅을 다시 시작하고 천생연분 그를 오라고 한다
1999년 늦가을 그렇게 만나서 듬해 해인 2000년 밀래니엄 3월의 눈부신 신랑 신부가 되었다
결혼후에 검정고시 고졸에 합격을 한다
2005년 그녀의 아버지 kys가 환후 끝에 죽음을 맞는다 파란만장한 일생을79세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고 지금 오십대의 그와 그녀는 사랑스러운 딸램이와 늠늠한 아들의 대학 생활을 응원하며 잘 늙어가는 중이다 잘 익은 과일이 맛이 있듯이 또 다른 까시의노래 이야기를 준비하며 보낸다
시시때때로 그 때와 순이 그녀를 그리움에 사무쳐하면서 사진만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