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중봉조헌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수필 부문
- 김포신문
- 승인 2026.06.08 08:05
구다겸, 「여우재를 넘는 법」
여우재를 넘는 법
구다겸
“허이구야, 이런 얼빠진 놈.”
김포 여우재 설화를 처음 읽었을 때, 나도 모르게 혀를 찼다. 백 년 묵은 여우가 어여쁜 여인으로 둔갑해 어린 사내아이 입에 구슬을 넣었다 뺐다 하며 혼을 빼놓았다는 이야기. 아무리 어리다지만 여인의 치맛자락에 마음을 빼앗겨 넋 놓고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니, 어찌 그리 미련할까. 소년은 그 뒤로 매일 서당 가는 고갯길에 여우에게 붙들려 있었다.
놀라운 건 그 얼빠진 소년의 이름이다. 중봉 조헌 선생. 내게 ‘중봉’은 도서관 이름이고, 축제 이름이고, 동네 어디쯤 붙어 있는 익숙한 명칭이었다. 유학자이자 문인이며, 임진왜란의 참화 속에서 칼을 잡고 일어나 금산에서 칠백 의병과 함께 장렬히 순절한 인물이 아닌가. 유혹을 이기지 못해 샛길에서 헤매던 아이가 훗날 대의를 위해 목숨을 던진 사람이 되었다니. 위인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크게 휘청대며 제 길을 찾아가는 사람인지 모르겠다.
영웅들도 처음부터 큰길만 걷는 사람은 아니었다. 김유신에게는 천관녀의 집 앞에서 멈춰 선 밤들이 있었고, 오뒷세우스도 사이렌의 노래에 옴짝달싹 못하던 시간이 있었다. 중요한 것은 샛길에 발을 들이지 않았느냐가 아니라, 그곳에서 무엇을 보고 어떻게 돌아 나오느냐일 것이다. 유혹은 사람을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사람의 그릇을 시험한다. 흔들려 본 사람만이 자기 안의 약함을 알게 되고, 붙들려 본 사람만이 다시 걸어야 할 길의 방향을 배우지 않을까.
처음 여우를 만났을 때, 어린 조헌은 여우 구슬의 달콤함에 속절없이 당했다. 점점 병색이 짙어지는 제자를 보고 훈장은 말한다. “그 처녀는 사람이 아니라 여우다. 또 구슬을 네 입에 넣거든 입을 꽉 다문 채 달려오너라.” 나는 이 대목에서 멈칫했다. 중요한 건 구슬을 빼앗는 게 아니었다. 여우가 여우인 줄 알아보는 눈과 입을 벌리지 않으려는 의지였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여우가 구슬을 뺏으려 달려들자, 어린 조헌은 구슬을 꿀꺽 삼키고 만다. 훈장은 아까운 보배를 잃었다며, “이제 너는 땅의 이치는 환히 알지만, 하늘의 뜻은 모르게 될 것”이라고 한다. 자칫 구슬을 삼킨 덕에 신묘한 능력을 얻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그 말속에서 결핍을 보게 된다. 너무 급하게 제 안으로 들여보낸 힘, 그래서 한쪽은 환해졌으되 다른 한쪽은 끝내 어두워진 운명 같은 것. 또는 하늘의 뜻은 바꿀 수 없으니 주어진 삶 안에서 충실히 살라는 계시일지도.
여우 구슬은 세상 온갖 유혹의 압축된 형상이다. 달콤하고 매끄럽고, 잠깐 입안에 넣고만 있어도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 혀끝의 쾌락에 젖어 진기가 빠져나가는 줄도 모르고 넣고 빼기를 반복하게 만드는 요물. 그러나 중봉을 중봉답게 만든 것은 여우 구슬을 삼킨 일이 아니라, 그보다 먼저 있었을 ‘어떤 순간’이었을 것이다. 아름답고 달콤한 쾌락 뒤에 숨은 치명적 위험을 인지하고, 서당으로 돌아가려고 마음 먹었던 순간.
중봉은 유혹을 한 번도 보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유혹의 정체를 가장 가까이서 끝까지 들여다본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훗날 나라의 위태로움 앞에서 물러서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눈앞의 안락과 타협이라는 또 다른 여우 구슬을 뱉어내고, 더 크고 무거운 뜻을 삼킨 사람. 그는 한 사람의 선비에 그치지 않고, 시대의 선봉장으로 남았다. 하늘의 이치를 몰랐기에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으로서 할 바를 다 했다. 결핍으로 죽었으나, 역사 속에 영원히 살게 되었다.
나 역시 날마다 작은 여우재 하나쯤은 넘고 산다. 시시때대로 손바닥만 한 화면을 켜는 순간이 그렇다. ‘잠깐만 봐야지’, 숏츠로 시작했는데 어느새 본 영상으로 넘어가 있고, 공연장에 함께 있는 듯 프론트맨이 “소리 질러!” 하면 “예아압” 이러고 있다. 그마저도 끝까지 보지 못하고 밑에 달린 다른 영상들로 옮겨 다닌다. 금세 잊힐 얼굴, 자극적인 말들이 구슬처럼 입안에 들어온다. 배터리 경고가 뜬다. 화면이 어두워진다. 퀭한 여자 하나가 비친다. 식겁. 입안의 구슬에 정신 팔린 사이 정보는 많아졌지만, 정작 무엇을 믿고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모르고 있다는 자각에 뒤통수가 싸하다.
유혹을 이기는 일이란, 구슬을 삼키는 것처럼 대단한 무언가를 얻는 일이 아니라, 함부로 입을 벌리지 않는 일에 가까운 것 같다. 얼른 반응하지 않고, 금세 휩쓸리지 않고, 반짝이는 것을 봐도 곧장 제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는 일. 한 번쯤 멈춰 서서 이게 정말 내 것이 될 수 있는지, 아니면 내 기운만 빼앗아 갈 것인지를 살피는 일. 여우재 설화가 오래된 전설이면서도 낡지 않은 까닭은, 여우가 어여쁜 여인의 얼굴로만 오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때로 칭찬의 말로 오고, 때로는 편한 변명으로 오고, 때로는 말초를 자극하는 쾌락으로 온다. 그럴 때 필요한 건, 영리한 혀가 아니라 단단한 입이다.
그 얼빠진 소년이야말로 우리와 가장 가까운 얼굴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안개 낀 고개에서 발길을 멈춘다. 안되는 줄 알면서도 달콤한 것 앞에서 입술을 내준다. 중요한 것은 샛길에 들지 않는 재주가 아니라, 거기서 무엇을 알아보고 어떻게 돌아 나오느냐일 것이다. 중봉의 위대함도 그 대목에서 시작되었을지 모른다.
나 또한 크고 작은 여우재를 계속 지나며 살 것이다. 어떤 날은 구슬을 입안에서 오래 굴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중봉 선생의 어린 날 이야기에서 끝내 붙드는 것은, 여우가 여우인지 알아보고 구슬 문 입을 닫는 순간이다. 한 사람의 운명을 가르는 것은, 세상의 모든 이치를 얻는 일이 아니라 샛길의 안개 속에서도 큰길을 잊지 않고 돌아가려는 태도일 것이다.
구다겸 수필부문 우수상 당선자
당선 소감문
낯선 번호로 걸려 온 전화가 이토록 반가운 적이 있었을까요? 보험 가입 권유나, 정수기 필터 교체가 아닌, ‘중봉’, ‘당선’, ‘우수상’이란 단어가 들려오다니요! 최대한 담담한 척을 했으나, 마음속에서는 기쁨이 폭죽처럼 터지고 있었습니다.
십수 년 전 김포에 이사 와 ‘중봉’이란 말을 처음 들었습니다. 중봉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갔을 때지요. 그때는 그저 오래된 지명이겠거니 했어요. 그렇게 몇 해를 지내는 동안 자꾸 눈에 띄고 귀에 맴돌아 알게 되었어요. 대학자이자 외침에 맞선 명장의 이름이었다는 걸요. 그런 중봉 선생도 어릴 적에는 여우에 홀려 학업을 게을리했다지요. 그 이야기는 두고두고 제 마음에 고여 있었습니다. 비범하게 태어난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평범하게 태어나 비범해지는 것일 테니까요. 어린 조헌이 참 기특했습니다.
저도 기특한 어른이 되고 싶어, 여우재 이야기를 오래 마음에 품고 있었나 봅니다. 지지부진한 날들에 지치고 유혹에 흔들리는 평범한 어른이지만, 이번 당선 소식으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도 자신만의 여우재를 넘고 있을 많은 분들께 이 글이 작은 응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 글을 귀하게 읽어주신 심사위원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