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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근세사

호락논쟁

작성자코난|작성시간04.12.24|조회수408 목록 댓글 0
조선 후기 노론(老論) 계통의 학자들 사이에서 사람과 사물의 성(性)이 같은가 다른가를 놓고 벌였던 논쟁(人物性同異)에 관한 명칭으로,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한 한원진(韓元震;1682~1751)의 견해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주로 호서(湖西:지금의 충청도 일대)지방에 거주하였고,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한 이간(李柬;1677~1727)의 견해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주로 낙하(洛下:지금의 서울 일대)지방에서 거주하였기 때문에 그들 간에 전개된 인물성동이론을 그들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하여 지칭한 것이 이른바 호락논쟁이다.

한편, 조선조 중기까지의 성리학자들의 주요 관심사가 된 것은 하늘과 사람의 관계였다. 그 결과 사람의 삶의 바탕이 되는 하늘의 이치를 근거로 하여 하늘과 사람이 본래 하나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는데, 이러한 논리에서 보면 동물이나 식물의 삶도 본질적으로 하늘의 이치를 바탕으로 하므로 역시 하늘과 하나라는 사실이 성립된다. 이러한 이론이 성립되면 관심의 대상이 저절로 사람과 동식물의 관계로 옮겨갈 수밖에 없다. 조선 후기에 인물성동이론이 활발하게 전개된 까닭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성리학에서는 원래 인간의 본성을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이에 따르면, 본연지성의 입장에서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존재가 되지만 기질지성의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각각 기질에 따라서 구별되는 존재로 파악된다. 그런데 이때 의문이 일어나는 것은 본연지성의 입장에서 볼 때 동물이나 식물까지도 모두 동일한 존재가 되는가 어떤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의문은 주로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 제기되었다. 1678년(숙종 4) 권상유(權尙游)가 주희의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에 있는 "혼연한 태극의 전체가 모든 물체에 각기 갖추어져 있지 않음이 없다"는 말에 의심을 품고 그의 형 권상하(權尙夏)에게 질문하였을 때, 권상하는 "이(理)를 말하면 온전하지 않음이 없으나 성(性)을 말하면 편벽된 것과 온전한 것이 있다"고 답하였다.
즉, 이 논쟁은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서 나와 서울지방의 학자들에게 파급되었다. 권상하의 제자들 사이에서 금수오상(禽獸五常)의 문제와 미발기질(未發氣質)의 문제를 놓고 토론이 벌어졌는데, 그 중 한원진(韓元震)과 이간(李柬) 사이에 견해차가 컸다. 결국 두 사람은 권상하에게 시비를 가려줄 것을 청했고, 권상하는 한원진의 학설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후에 논쟁이 더욱 확대되어 권상하의 제자 외에도 서울지방의 학자들도 논쟁에 가담해 호락논쟁으로 전개되었다. 권상하·한원진·윤봉구(尹鳳九) 등의 학설을 지지한 이들은 충청도에 살았고, 이간의 학설을 지지한 이들은 대부분 경기 지역에 살았다.

이 논쟁의 요점은 2가지이다. 하나는 '인성과 물성이 고른 것인가 치우친 것인가'(人物性偏全) 하는 문제로서 인물성 동이(同異)에 관한 것이고, 하나는 '미발의 심체(心體)가 선한가 또는 선악을 겸했는가(未發有氣質善惡)'에 관한 것이다.

먼저 인성과 물성이 같다고 한 낙론은 〈중용 中庸〉의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에 대한 주희(朱熹)의 주석 가운데 "사람과 사물이 제각기 타고난 이(理)를 따라서 건순오상(健順五常)의 덕이 되었다"는 말과 "사람과 사물의 성은 본래 같지 않을 수가 없다. 기품은 다름이 없을 수가 없다…… 성(性)은 같고 기(氣)는 다르다"고 한 것을 근거로 "물도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오상을 타고 났으나 기질에 치우쳐 있어 타고난 본성을 온전히 하지 못할 뿐이다. 따라서 치우친 것은 기질이지 본성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고 한 호론은 〈맹자〉 고자하(告子下)의 '생지위성'(生之謂性)에 대해 주희가 "이치로 말하면 인의예지를 타고남에 있어 물이 어찌 완전하게 다 얻을 수 있겠는가"라는 주석과 "만물의 일원(一原)을 말하자면 이는 같고 기는 다르다. 만물의 이체(異體)를 보면 기(理)는 서로 가까우나, 이(理)는 절대로 같지 않다…… 이(理)가 다른 것은 그 치우치고 온전함이 다르다는 것이다"는 말을 근거로 "물이 타고난 기는 치우쳐 완전하지 못하므로 부여받은 이도 치우쳤다"고 주장했다. 낙론은 '성동기이'(性同氣異)·'이동기이'(理同氣異)의 명제에 따라 사람과 사물의 성이 이는 같고 기(氣)는 다르다고 하고, 성즉리(性卽理)·이즉성(理卽性)이라 하여 성과 이는 같은 것이라고 했다. 맹자가 인성(人性)·우성(牛性)·마성(馬性)을 다르다고 한 것은 기질지성(氣質之性)을 말한 것이고, 주희가 주석한 '이에는 치우침과 온전함이 있다'(理有偏全)는 말도 분수(分殊)의 이로서 발동된 뒤의 기질지성을 말한 것이므로 사람과 사물의 본연지성(本然之性)은 같으며 기질지성은 다르다고 했다.

이처럼 호론은 '이절부동'(理節不同)·'이유편전'(理有偏全)의 명제에 따르면서, 이때의 이(理)는 일원의 이가 아닌 분수의 이(理)라고 보았다. 성(性)은 분수의 이이기 때문에 성즉리는 되나 이즉성은 안 되며, 따라서 성과 이의 뜻하는 바는 같지 않다고 했다. 그러므로 사람과 사물이 같은 것은 일원의 이이고 다른 것은 기뿐만 아니라 분수의 이인 성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용〉에서 말한 '천명지성'(天命之性)으로, 주희가 주석한 '각각 품부받았다'고 한 것은 본래 품부될 때 각각 다르게 성을 받았다는 뜻이라고 했다. 물론 이때의 성은 본연지성을 말하는 것이고, 주희가 말했던 성동기이는 초년의 학설일 뿐 정론(定論)이 아니라서 주희 자신이 이미 버린 학설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낙론과 호론은 각기 주희의 학설을 근거로 삼아 주희의 4가지 설 가운데 2가지씩을 자신들의 근거로 삼으면서, 나머지 2가지 설도 자신들의 설에 맞도록 해석하여 각자의 주장을 폈다. 다음으로 미발한 마음의 본체가 선한가 또는 선악이 함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서, 미발에도 마음의 본체는 본래부터 선하다고 주장한 낙론은 "기 중에 정묘한 것이 심(心)인데, 발하지 않았을 때 어찌 불선이 있겠는가. 사려(思慮)로 발했을 때야 비로소 선과 불선이 있게 된다"고 했다. 이에 반해 심체에 본래 선악이 있다고 주장한 호론은 "심은 기질이다. 기질은 청탁이 고르지 않으므로 심체에도 선악이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낙론은 주리적(主理的)·연역적(演繹的)으로, 호론은 주기적(主氣的)·귀납적(歸納的)으로 사고한 것이다.

또한 권상하의 문하에서 발단한 논쟁이 경기지방의 학자들에게 옮겨진 것은 경기의 학자들이 충청도 학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대체로 주리의 입장에 서는 낙론계 학자들은 성동(性同)을 주장했고, 주기의 입장에 서는 호론계 학자들은 성이(性異)를 주장했다. 김창흡(金昌翕)·이재(李縡) 등과 그들의 제자·동료들은 성동을 주장했으며, 이들의 학맥은 이현익(李顯益)·박필주·김원행(金元行)·김매순(金邁淳)·박성원(朴聖源)·송명흠(宋明欽)·임성주(任聖周)·오희상(吳熙常)·홍직필(洪直弼)에게 이어졌다. 이 가운데 임성주는 낙론과 호론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고 독창적인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기정진(奇正鎭)도 두 학설을 비판하고 이일분수(理一分殊)의 원칙을 재확인했다. 호락논쟁은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고 난 뒤의 사회혼란을 해결하는 데 이전의 성리학이나 주자학 체계로는 미흡하다는 생각에서 일어난 것으로 단순한 철학적 논쟁만은 아니었다. 이는 유교적 도덕의식의 강조·회복을 통해 당시 사회체제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양반지배층의 계급적 이해를 반영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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