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한국중세사

원의 간섭기의 고려 사회의 변화는?

작성자김정현|작성시간05.07.29|조회수1,793 목록 댓글 0
첫째, 지배층의 변화를 가져왔다. 원의 간섭기에는 이른바 권문 세족이 새로운 지배층이 되었다. 이들은 주로 원과의 인연으로 지배층이 된 친원파였는데 과거보다는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였다. 뿐만 아니라 도병마사를 개편하여 만든 도평의사사를 통해 최고 통치권을 장악하였고 경제적으로는 농장을 확대하여 광대한 토지를 독점하였다.
둘째, 성리학이 들어왔다. 성리학은 중국 송나라 때 주자가 완성한 학문으로 우주 만물의 근본적인 원리를 탐구하는 철학적 경향의 유학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원의 간섭기에 안향이 처음으로 소개하였다. 그 후 공민왕의 개혁 정치로 정계에 진출한 신진 사대부 계층이 성리학을 자신들의 이념으로 받아들여 당시 지배층이었던 권문세족 및 이들과 연결된 불교세력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였다. 조선 왕조의 개창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한 성리학은 이 때부터 불교 대신 우리나라 정신 문화의 중추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셋째, 고려의 건축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고려의 건축은 원래 주심포 양식이었는데 원의 영향을 받아 다(심)포 양식으로 바뀌었다. 주심포 양식이 단아하고 검소하게 보이는 반면 다포 양식을 화려하고 웅장한 느낌을 준다. 대표적인 주심포 양식 건축물로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등을 들 수 있고, 다포 양식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석왕사 웅진전을 들 수 있다. 다포 양식은 조선 시대에도 계승되었다.
넷째, 고려의 석탑도 원의 영향을 받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석탑이 경천사 10층 석탑이다. 이 탑은 조선시대 원각사지 10층 석탑의 원형이 되었다.
다섯째, 원으로부터 화약과 목면이 들어왔다. 최무선이 왜구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원에서 화약 만드는 법을 배워왔는데 정부에서도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화약과 대포를 만들어 왜구의 침략을 격퇴하는 데 크게 활용하였다. 또 문익점은 원에서 몰래 목화씨를 가져와 우리 민족의 의류 생활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여섯째, 농장이 더욱 확대되어 전시과가 붕괴되었다. 권문세족이 차지한 농장의 규모는 산천(산천)을 경계로 삼을 정도였다. 그 결과 위화도회군으로 정치 권력을 장악한 신진 사대부 세력이 권문세족의 토지를 박탈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사전(농장)을 혁파하고 과전법을 실시하였다.
일곱째, 조혼의 풍속이 생겨났다. 몽고가 고려에 강요한 공물 중에 고려의 여자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고려 사회의 지배층을 중심으로 몽고어가 널리 사용되었고 몽고식 이름을 쓰는 사람도 생겼다. 뿐만 아니라 몽고식 복장이나 음식이 유행하였는데, 이를 몽고풍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고려 사회의 본래 모습이 많이 훼손되기도 하였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