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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의 정전법은 아주 이상적인 제도이다. 토지의 경리(經理)가 한 번 바로잡히면 만사가 제대로 되어 백성은 일정한 직업을 갖게 되고 군사 행정에서는 도피자를 찾는 폐단이 없어지며 귀천·상하가 모두 자기 직책을 갖게 될 것이므로 민심이 안정되고 풍속이 도타워질 것이다. (중략)
농부 한 사람당 1경(頃)의 토지를 받고 법에 따라 조세를 내며, 매 4경마다 군인 1명을 내게 한다. 사(士)로서 처음 학교에 입학한 자는 2경의 토지를 받고 내사(內司)에 들어간 자는 4경을 받되 병역을 면제한다. 현직 관료는 9품부터 7품까지 6경, 그리고 정2품은 12경으로 조금씩 더 준다. 그러나 모두 병역 의무는 면제하며 현직에 근무할 때는 녹을 별도로 받는다. 퇴직하였을 때에는 받은 토지로 생계를 유지한다. (중략) 토지를 받은 자가 사망하면 토지를 국가에 반납하되, 대부(大夫)와 사(士)는 사후 3년 후 반납하고 군(軍)과 민(民)은 사후 100일 후에 반납하고 그 자손이 물려받을 수 있는 자는 당연히 그 토지를 받고 남은 토지는 타인이 받게 한다.
<반계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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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을 통해서 다음의 사실들을 알 수 있다.
첫째, 첫 번째 줄에서 유형원의 균전론은 중국 주나라의 정전법(井田法)에 영향받았음을 알 수 있다. 정전법이란 8가구를 한 단위로 묶어 우물 정자의 형태로 나누어 지급한 제도였는데 우물 정자 모양 중 가운데의 토지는 공동경작지였다. 따라서 정전법에는 원시 공동체 사회의 전통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었음을 보여 준다.
둘째, 토지의 재분배를 주장하기는 했지만 관리, 선비, 농민 등에게 차등적으로 토지를 재분배할 것을 주장하였다(4~6줄).
셋째, 자영농 육성을 바탕으로 농병일치로의 환원을 목적으로 하였다(4줄). 이것은 자영농을 육성해야만 농병 일치로 환원할 수 있으며 농병일치로 돌아가야만 군역 대신 군포를 납부하는 군역의 폐단도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넷째, 토지 국유제를 원칙으로 하였다(8-10줄). 이는 대토지 사유화가 다시 대두할 위험성을 없애기 위함이었다.
이 외에도 유형원은 사농 일치의 교육제도를 확립해 성리학적 신분 질서의 모순을 해결할 것을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