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전4:1-18절) 영적 교훈 2-118. 아이들이 인격적으로 자라는데 있어서 밑그림이라는 것은 아주 종요합니다. 즉 아이들은 자라면서 이미 그려진 밑그림 위에 나중에 색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의 인격에 처음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 바로 부모의 가정교육인 것입니다.
만일 집안에서 부모의 가정교육 자체가 잘 되어 있지 못하다면, 그 위에 아무리 좋은 대학을 나오고, 외국 유학을 갔다 오는 등, 좋은 색칠을 한다고 해도 결코 좋은 그림이 만들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집안에서 부모의 가정교육은 두 가지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는 부모의 분명한 가치관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거짓말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거나, 남에게 물질적인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등의 분명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을 때, 자녀들은 그것을 본받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부모의 행동을 통해서 자식이 본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엄마를 때린다거나, 혹은 바람을 피워서 엉뚱한 짓을 할 때,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지만, 자식은 또 그것도 따라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부모가 아이들의 인생 밑그림을 잘못 그려서 아이들의 인생 그림 전체를 망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구를 통해서 어떤 가르침을 받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이것은 아름다운 신앙의 그림을 완성시켜 나가는데,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신앙의 밑그림을 그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이 좀 희미해 질까봐 다시 한 번 강조를 해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려준 아름다운 신앙의 밑그림인 것입니다.
Ⅰ.깨끗한 신앙생활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즉 내가 이렇게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는 것에 관해,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고,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즉 남들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에 도덕적이지 않거나, 나쁜 행동은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유혹이나, 죄에 빠지는 위선적인 행동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책을 보면 제목이‘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입니까? 라는 책도 있습니다. 곧 남들이 볼 때의 행동과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의 행동이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아무도 나를 모를 것 같은 낯선 곳을 가거나, 외국 같은데 가면, 마음에 유혹이 들어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4:1절)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사도 바울은 두 가지를 가르쳤습니다. 하나는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내가 행할 마땅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는 소극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우리 크리스천 행동의 마지노선이 어디까지인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과연 내가 목사로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타당한 것일까? 내가 장로나 집사로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하는 것을 숙고(熟考)해 보자는 것입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여주인의 유혹을 받았을 때,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지만 ‘어떻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이 큰 죄를 지을 수 있겠느냐? 면서 그 여자를 뿌리쳐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유혹에 넘어가거나, 죄에 빠지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바른 위상을 놓쳐버렸을 때입니다.
즉 자기 비하(卑下)나 비참한 자존감에 빠졌을 때, 사탄은 우리를 넘어지게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놓친다면, 우리는 모든 복(福)들을 다 포기하고,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삼손이 무엇 때문에 드릴라라는 여자의 유혹에 넘어 갔겠습니까?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특별한 자인지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다윗이 무엇 때문에 밧세바라는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게 되었을까?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존귀한 자인지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너무나 세상 일로 인해 분주한 것도 좋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꾸만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아름다운 자인지, 얼마나 존귀한 자인지, 자꾸만 확인을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죄(罪)를 짓지 않는 것으로 충분치 않고, 더 적극적으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지? 생각하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려고할 때, 죄(罪)는 아니지만, 그 일을 하는 동기는 여러 가지일 수도 있습니다. 즉 나를 나타내고 싶은 동기도 있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동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최선의 선택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성령이 오시면, 우리는 생각하는 것이 변하게 됩니다. 그 전에는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나의 유익이 되는 기준으로 생각을 했는데, 성령이 오시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즉‘이 일은 내 신앙에 얼마나 유익이 될까? 또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을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라는 것을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런 쪽으로 자꾸만 자기 자신을 발전시켜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는 것들을 멀리하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의 믿음은 독수리처럼 위를 향하여 올라가게 됩니다.
특히 사도 바울은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가장 중요한 명령이 무엇인지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2-5절)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행복이나, 성공이 아니라,*거룩*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로마 시대에 사람들의 최고의 행복은 쾌락에 있다고 주장하는 에피쿠로스학파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요즘으로 치면 *웰빙족*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로마 근교에 아주 훌륭한 별장을 지어놓고, 한 끼에만 수천만 원씩 하는 식사를 하면서 인생을 즐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성적인 순결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때, 어느 쪽을 선택해야 내가 성공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느냐? 를 먼저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항상 어느 쪽이 내가 거룩하게 되는 길이냐? 를 생각해야 합니다. 곧 음란(淫亂)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 음란(淫亂)은 모든 형태의 음란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아내를 대해서 결혼생활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당시 이방인들의 생활이 어떠했는지, 사도 바울은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색욕(色慾)*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이것은 육체의 쾌락이 삶의 중요한 목적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마땅히 부정해야 하고, 멀리 해야 하는 죄악 된 행동들인 것입니다.
7-8절)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사람들이 많이 속는 것은 자신의 감정은 순수하고, 정직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 대하여 느끼는 사랑의 감정도 순수하고, 정직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타락할 때, 가장 많이 타락한 것은 생각과 감정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십자가에 의식적으로 못을 박아야 합니다. 우리의 감정은 물과 같아서 물고에 따라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정상적인 사랑을 해야 하고, 비정상적인 방향으로 사랑의 감정이 흐르지 않도록 물고를 트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거룩한 생활을 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가장 타락하기 쉬운 것은 남녀 관계입니다. 그 다음에는 돈이고, 그 다음에는 명예심입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이런 것들을 피하는 길을 택해야 합니다.
특히 자기 아내를 저버리는 자는 자신에게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비정상적인 사랑의 결과가 얼마나 비참하고, 끔찍한지 잘 알아야 합니다. 절대로 이것은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추악(醜惡)하고, 더러운 것이며, 결국은 가장 비참해지는 것이 비정상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무조건 결혼한 사람은 자기 정욕을 언제나 십자가에 못 박고 죽을 때까지 결혼한 한 사람만 사랑하도록 의식적으로 노력을 해야 합니다.
Ⅱ.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일단 결혼생활에 깨끗하면, 가장 중요한 것은 성공한 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다른 크리스천과의 관계도 좋은 관계에서 함께 성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의 분수를 넘어서지 않는 것입니다. 6절)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
9절)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형제를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받게 됩니다.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 것보다 다른 성도들을 사랑하는 것에 더 우선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가 하나님의 가르침을 제쳐놓고, 형제를 사랑하게 되면, 반드시 인간적인 사랑에 빠지게 되고, 인간적인 사랑은 좋지 못한 부착용을 낳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너무나 잘해주는 것을 사랑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너무 잘해주는 것은 오히려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홀로 설 수 있는 기회를 가로막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가장 잘 하는 것은 각자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게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뒤로 빠져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여기서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너무나 지나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세상 적으로‘적당하다’는 말이 좀 무성의한 말로 사용될 때가 많지만, 신앙적으로는‘적당하게’하는 것이 지나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이 아주 좋은 것입니다. 특히 형제를 사랑할 때,‘분수를 넘어서’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분수(分數)*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행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의욕이 너무 지나쳐서 다른 사람을 나의 사람으로 만들어야 사랑하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적인 욕심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그 사람 나름대로 행복할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인정해주고, 내버려두는 것이 진정 형제를 사랑하는 출발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산(山)에서 예쁜 새를 보면, 반드시 잡아서 내 새로 만들어 내 집에 가두어 두어야 행복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 새는 결코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새를 놓아주어야 하고, 자기 마음대로 날아갈 수 있게 해 주어야합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사랑의 출발점은 다른 사람을 그 사람으로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청소년들이 자라면서 부모의 간섭에 반항하면서 뭐라고 합니까?‘제발 나를 간섭하지 말고 내버려두어 달라’고 합니다. 이것은 자기를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을 해 달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 법위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나름대로 행복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사랑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 남에게 손을 벌리거나, 오해를 받지 않도록 열심히 자기 손으로 일을 해야 합니다. 11-12절)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어떤 사람은 신앙이 좋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경제적으로 피해를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아무리 좋은 관계라 하더라도 오래 갈 수가 없습니다.
물론 초대교회 때, 즉 부흥이 일어났을 때,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자기 재물이나 집을 내어놓아서 서로 도왔던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인들은 내 것이나 네 것 없이 남의 물건을 함부로 써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허황된 생각에 빠져서 일을 하지 않고, 궁핍한 것은 결코 보기에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너무 이상주의적인 사람들은 노동을 천시(賤視)해서 일을 하지 않고, 은혜만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은 신성한 것이고, 반드시 땀을 흘릴 때, 사는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 이렇게 할 때, 외인(外人)들에 대해서도 단정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단정한 것’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도 떳떳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마땅히 자기가 해야 할 일도 하지 않으면서 광신적(狂信的)으로 믿으려고 할 때, 전도의 문을 막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다른 사람들에게 광신주의자로 보여서는 안 됩니다. 아주 단정하고 궁핍함 없이 정상적이면서도 매력적으로 보일 때, 불신자들은 하나님도 그런 분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Ⅲ.죽은 자들에 대한 자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이 바로 장례식입니다. 장례식(葬禮式)을 해 보면, 어떤 사람은 죽은 자들에게 죽어도 ‘절을 하겠다.’고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곡(哭)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목탁을 두드리는 곳도 있는가 하면, 찬송을 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든 사회나 문화마다 죽은 자에 대한 생각이 다 다릅니다. 사실 가장 사랑하는 가족이 죽었을 때, 이 영원한 이별이 너무나도 슬픈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까지 해 오던 풍습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어떤 사람은 죽은 사람은 귀신이 되어서 돌아다닌다. 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죽으면, 먼데로 간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의 운명에 대하여 가장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는 곳은 성경뿐입니다.
13절)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성경은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죽은 자들은‘자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자는 자라고 하는 것은 얼마든지 깨어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다가 죽은 사람은 다시 깨어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처럼 다시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보면‘소망 없는 다른 이’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지 않고, 죽은 사람은 소망이 없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를 믿고 죽은 자는. 자는 것이지만, 예수를 믿지 않고 죽은 사람은 그야말로 죽은 것입니다. 그는 다시 깨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지 않고, 죽은 자는 소망(所望)이 없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슬퍼할 수 있지만, 예수 믿다가 죽은 사람은 물론 이별 자체는 슬프지만, 너무 슬퍼할 일은 아닌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이 살아있는 자들보다 훨씬 더 복된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죽은 자들은 잔다고 해서 계속 무의식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육체를 벗고,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천국에서 영광 가운데서 주님을 만나고 먼저간 성도들과 함께 축복(祝福)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잔다’고 하는 이유는 육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육체는 없지만, 훨씬 더 자유로운 상태에서 천국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죽는 것이 결코 비참한 것이 아닙니다. 죽는 순간 천사들의 손에 이끌려서 영광의 나라로 곧바로 옮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유익은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고 살아있는 성도와 교제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아는 옛날 성도들은 죽기 전에 마치 어린아이들이 소풍을 가기 전처럼, 흥분해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아직 영적(靈的)인 전투(戰鬪)를 할 수가 있습니다. 죽으면, 이 영적(靈的)인 전투(戰鬪)는 쉬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비유를 들면, 군인들이 전투(戰鬪)를 하러 갈 때에는 군화 끈을 잡아매지만, 전투를 끝내고 돌아오면, 군화 끈을 풀고, 편히 쉬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아직까지 싸우는 것이 좋고,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직 죽음의 결과를 잘 몰라서 그렇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상태의 이동에 불과합니다. 즉 전에는 육신의 상태에서 주님을 섬겼는데, 이제는 이 육신을 벗고 더 가까이에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우리가 늘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성도들이 육신의 상태와 영광의 상태로 나뉘어져 있지만, 하나가 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부활의 때인 것입니다.
이때는 모든 믿지 않는 자들은 영원한 지옥 심판(審判)을 받을 때입니다. 이 순간이 되면, 먼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다시 재림(再臨)을 하시게 되는데, 천사장의 호령과 나팔 소리와 함께 공중에서 재림을 하시게 됩니다. 이때 천사가 무엇이라고 호령을 하겠습니까?‘모든 사람들아. 모두 나와서 어린양의 심판을 받으라.’고 소리를 칠 것입니다. 이때 죽은 성도들이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에 오게 됩니다. 그때 죽은 성도들은 모두 변화된 몸을 입고, 부활을 하게 됩니다.
16-7절)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여기서 죽은 자들이 일어날 때, 반드시 자기가 죽었던 무덤에서 살아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변화된 육체(19세)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 육체는 영원히 죽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고, 영광스러운 육체가 됩니다. 그때 살아남은 자도 거의 동시에 변화되어 공중에 올라가서 주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휴거(休居)’라는 말을 하면서 이때 올라가지 못하면, 칠년 대 환란을 겪은 후에 순교한 자들만 2차로 휴거한다고 했는데, 2차 휴거는 없습니다. 단번에 모든 것이 다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주님과 함께 언제나 동행하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과 함께 동행했기 때문에 낮 설지 않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이해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우리의 삶이 참으로 영광스럽고, 자신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딤전4:7-8절)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결국 기독교 신앙은 죽음까지 선한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 미신(迷信)이나 의식주(衣食住)의 문제나 사랑하는 자녀나 부모의 죽음에 너무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소망(所望)을 가지게 됩니다.
먼저 예수 믿고 죽은 자녀나 부모는 비참하게 죽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맡겨 드린 것이기에 우리는 그 날에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올바른 교훈이 우리의 신앙을 균형 있게 하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참으로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부활의 신앙을 갖고 주님만 섬기며, 거룩하게 사는 복(福)된 생애(生涯)가 되 시길 바랍니다. 찬송가 177장 *오랫동안 고대하던* 정직과 성실로 진리의 복음을 전하는 다음카페 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카톡선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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