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대종회 카페에서 "한선제"라고 검색하여 보십시오.
1. 내가 올린 두 개의 글
( https://cafe.daum.net/kimsungna/M5jP/15?svc=cafeapi )
2. 한림공 파보에 있는 고 나진 회장이 올린 같은 내용의 글
( https://cafe.daum.net/kimsungna/M3Ym/6?svc=cafeapi )
3. 심공 나정호 종인이 '금성나씨 대종회보'에 이 내용에 대하여 올린글
( https://cafe.daum.net/kimsungna/M1re/16 )
우리 금성나씨의 역년은 최소 2050년 ~ 최대 2140년에 이릅니다.
⭕우리 금성나씨가 신라 효공왕 대에 사성 금성나씨 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효공왕은 재위기간이 897년~912년 입니다.
나주라는 명칭은 918년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이후 940년에 이르러 바뀐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아직 나주라는 명칭이 있지도 않는데 어떻게 효공왕이 나주나씨라고 사성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마한을 고운 최치원은 고구려라고 하였습니다.
이 기록은 삼국사기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BC23년 부터 BC48년 까지 재임함 한 선제 시대에 고구려에 속한 마한에 온 3형제의 후손이 우리 금성나씨입니다.
⭕그렇다면 AD857년에 작고한 최치원의 장인 나업 공은 누구이겠습니까?
나업 공은 지강공 이래 발라현이었다가 AD 757년(경덕왕 16)에 금성군(錦山郡, 혹은 錦城郡)으로 이름이 바뀐 발라현에 세거하던 지강공의 후손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경주최씨 보다 금성나씨가 더 오래된 성씨인 것은 분명합니다.
⭕나덕부 3형제가 마한에 온 기록은 분명히
❶ 금성나씨 최초 족보인 가정보에 실려 있고,
❷ 나중헌 족장이 모신 1946년 병술보에 실려 있으며,
❸ 한림공 파보에도 명확히 실려 있는
나덕부 3형제가 마한에 오다는 기록을 근로로 볼 때 우리 금성나씨는 한선제 치세인 BC23년 ~ BC48년에 고구려 땅인 마한에 온 것이 분명하며..
이때로 부터 역년을 환산하면 우리 금성나씨는 최소 한선제 때 부터 최대 경덕왕 때에 이를 것이므로 2050년 ~ 2140년에 이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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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내용은 인터넷을 검색하다 발견한 회원대장군 나유에 대하여 올린글에 금성나씨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있어 퍼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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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나씨 나유(羅裕) 할아버지
난아별 ・ 2024. 3. 17. 16:16
羅聰禮-恩浩-含憲-成佐-廷胥-國英-仁謙-孝全-得璜-裕-壻 洪戎-澍-徵-尙溥-智 -敬孫(文科)-潤德(文科)-壻 李遠-光軫(文科)-壻 朴惺-壻 黃中允(文科)-壻 鄭基德 -壻 李誠哲-壻 金鏞-尙質-綽-之翼-是瑚-翰儒-昶敎-濟渤-芝同(=제 할머니)
羅聰禮-恩浩-含憲-成佐-廷胥-國英-仁謙-孝全-得璜-允-天富-壻 李君常-壻 權嗣宗 -壻 鄭易(文科)-壻 孝寧大君(李補)-誼城君(宷)-壻 姜子平(文科)-詗-永叔-滸 -壻 申壽民-壻 金富倫-坽(文貞公,文科)-輝斗-鏞-尙質-綽-之翼-是瑚-翰儒 -昶敎-濟渤-芝同(=제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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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열전 나유[ 羅裕 ]
고려사열전 나유[ 羅裕 ]
나유(羅裕)는 나주(羅州 :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 사람으로 삼한공신(三韓功臣)·대광(大匡) 나총례(羅聰禮)의 10세손이었다. 부친 나득황(羅得璜)은 백성들을 착취한 재물로 최항(崔沆)에게 아첨해 장흥부사(長興副使)가 되었다.
최항의 농장(農莊)1)이 임피현(臨陂縣 : 지금의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에 있었던 연고로 그를 전라도 안찰사(按察使)로 올려 주었다가 뒤에 다시 제주부사(濟州副使)로 삼았다. 앞서 제주(濟州 : 지금의 제주도)의 수령으로 있던 송소(宋佋)가 뇌물을 받았다가 파면되었는데, 나득황이 부임하자 사람들은, “제주가 옛날에는 작은 도둑을 겪다가 지금은 큰 도적을 만났네.”라고 한탄했다. 나득황은 나중에 형부상서(刑部尙書)까지 지냈다.
나유는 부친의 공훈으로 경선점녹사(慶仙店錄事)가 되었는데 임연(林衍)이 개인적인 원한으로 나유의 장인인 조문주(趙文柱)2)를 살해한 후 이혼을 강요했으나 나유는 의리를 지켜 거절하였다. 거듭 승진해 장군이 되자 원수 김방경을 따라 진도(珍島 : 지금의 전라남도 진도군)에서 삼별초(三別抄)를 토벌해 공을 세웠다. 당시 조정 관리의 처들이 적에게 많이 잡혀가는 바람에 관리들이 대개 다시 새 장가를 들었는데 적이 평정되자 그 처들 가운데 간혹 돌아온 여인들이 있었으나 모두 버림을 받았다. 나유도 이미 새 처를 맞아들였지만 제일 먼저 적진 속으로 들어가서 옛 처를 찾아 돌아와서 다시 처음처럼 부부가 되니 듣는 사람들이 의인이라 여겼다.
김방경이 탐라(耽羅)를 토벌할 때 나유는 다시 대장군으로 종군하였다. 선봉을 거느리고 먼저 해안에 상륙해 많은 적군을 죽이고 사로잡았기 때문에, 경략사(經略使)는 사로잡은 남녀 두 명을 상으로 주고 황제에게 보고해 중통보초(中統寶鈔)3)를 내려주게 했다. 다시 김방경과 원나라 장수 쿠둔[忽敦] 등을 따라 일본을 정벌하여 응양군(鷹揚軍) 대호군(大護軍)으로 승진했는데, 황제는 금패(金牌)를 내려주고 무덕장군(武德將軍) 관고려군천호(管高麗軍千戶)로 임명해 전공을 포상했다.
충렬왕 때 합포(合浦 :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시)의 지휘관으로 나갔는데, 의례에 밝다하여 특별히 불러들여 팔관회(八關會)4)의 의례를 맡겼다. 얼마 후에 지신사(知申事)로 승진하고 부지밀직사사로 올랐다. 왕이 나얀대왕[乃顔大王]을 친히 정벌하겠다고 주청하자 황제는 나유에게 호두패를 내려주고 중익부만호(中翼副萬戶)로 임명했다. 회군한 후 일등공신으로 책봉하고 「공신녹권(功臣錄券)」과 밭 1백 결(結), 노비 스무 명을 내려주었으며 명위장군(明威將軍)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황제는 쌍주금패(雙珠金牌)를 내려주었다.
나얀대왕의 일당인 카다안[哈丹]의 아들 라오데이[老的]가 평양(平壤)을 노략질한 후 강도(江都 :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를 공격하려 하자 왕은 나유에게 방어를 맡겼다. 나유가 해안을 따라 험로를 넘어 평양에서 적과 마주치자 카라[哈刺]·셍게[桑哥] 등 두 적장을 죽이니 적이 궤멸되었다. 연기현(燕岐縣 : 지금의 충청남도 연기군)에서 다시 싸워 적을 대패시키자 패잔병들은 여진(女眞)지역으로 달아났다. 왕은 다시 나유를 교주도(交州道)로 보내어 그들을 추격해 체포하게 했다. 노적이 죽전(竹田 : 지금의 황해북도 서흥군)을 넘어 다시 평양으로 퇴각하자 나유는 배에서 내려 육로로 추격하려 했다.
현문혁(玄文奕)5)이 고지와 저지가 둘러 있는 지형적 특성상 복병이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으나 나유가 듣지 않았는데 전투대형도 만들기 전에 적이 대거 공격해 왔다. 나유는 군사를 후퇴시켜 겨우 배에 올랐으나 낭장(郞將) 이무(李茂)6) 등 수십 명이 미처 승선하지 못하자 현문혁이 배 위에 선 채로 소리쳤다.
“이무야! 힘껏 싸워 큰 공을 세우면 나라에서 상을 내릴 게다. 적의 포로가 되어 처자를 죽게 만들지 말고 힘껏 싸워라.”
이무 등이 독산(獨山)으로 달아나자 적장이 업수히 여겨 말에서 내려 의자에 앉은 채로 군사를 분산시켜 산을 에워 오르게 하면서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댔다. 이무가 나무에 바짝 붙어 서 있다가 날이 저물고 허기가 심해지자 주머니 속의 말린 식량을 꺼내 씹으면서 군사들에게 소리쳤다.
“사내라면 사지에 몸을 던져 살 길을 찾아야 하는 법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활을 당겨 왼쪽으로 쏘아 적장의 목구멍을 꿰뚫어 그 자리에서 꺼꾸러뜨리자 적이 절로 혼란에 빠졌다. 이무 등이 함성을 지르며 육박전을 벌여 무수한 적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이후 나유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재임 중 원나라에 하정사(賀正使)로 가자 황제가 삼주호부(三珠虎符)·옥대(玉帶)·은정(銀錠) 및 활과 화살, 검(劒), 안장 얹은 말 등을 내려주고 회원(懷遠) 대장군(大將軍)으로 임명하였다. 충렬왕 18년(1292)에 죽었다. 나유는 용맹이 출중하고 의례에 밝았으며 송사(訟事)를 잘 처리하였다. 어려움이 닥쳐도 두려워하지 않고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 아들은 나익희(羅益禧)다.
각주
1 최항의 농장 : 최항의 전장(田莊)은 당시의 임시수도 강화경(江華京)을 비롯하여 경상도지역의 진주(晉州)·단성(丹城)·남해(南海)·하동(河東) 및 전라도지역의 화순(和順)·승주(昇州)·보성(寶城)·강진(康津)·진도(珍島)·임피(臨陂) 등지에 광대하게 분포되어 있었다.
하현강, 「고려식읍고」 『역사학보』 26, 1965.
민현구, 「월남사지진각국사비의 음기에 대한 일고찰」 『진단학보』 36, 1973.
허흥식, 「1262년 상서도관첩의 분석(하)」 『한국학보』 29, 1982.
김당택, 『고려무인정권연구』, 새문사, 1987.
2 조문주(?~1269) : 조오(趙璈)와 동일 인물이며, 본관은 배천(白川)이다. 고종~원종 때 견룡행수(牽龍行首)·내시(內侍) 대장군(大將軍)·동지추밀원사·병부상서 등을 역임하였다. 이 집안은 선대가 백주(白州 : 지금의 황해남도 배천군)지역의 향리 출신이었으나, 조문주 때부터 중앙의 고위관직을 역임하면서 성장하였다. 고종 45년(1258) 3월 무인집정 최의(崔竩)를 제거한 무오정변(戊午政變)에 참여하여 보좌공신이 되었고,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최의를 제거한 사실과 함께 출륙환도(出陸還都)할 예정임을 알렸으며, 원나라로부터 만호(萬戶) 벼슬을 받았다. 원종 9년(1268) 12월에는 임연(林衍)과 함께 무진정변(戊辰政變)에 적극 관여하여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공로가 인정되어 출신지 백주(白州)가 지복흥군사(知復興郡事)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6월 임연이 원종을 폐위시키고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을 세우려 하자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원종 복위 직후인 같은 해 12월에는 장군 김문비(金文庇)·윤수(尹秀)와 함께 임연을 제거하려다가 김문비의 밀고로 아들 후벽장군(後壁將軍) 조윤번(趙允璠) 및 사위 비서랑(秘書郞) 장호(張顥) 등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고려사절요』 권42, 원종 10년 12월.
김용선 편, 「나익희(羅益禧) 묘지명」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2001.
허흥식, 「1262년 상서도관첩의 분석(상)」 『한국학보』 27, 1982, 25쪽.
김광철, 『고려후기세족층연구』, 동아대출판부, 1991, 84~85쪽 및 [나주나씨 세계도].
최영호, 「13세기중엽 조문주의 활동과 정치적 성향」 『한국중세사연구』 16, 2004.
3 중통보초 : 원간섭기에 유입되어 사용된 원나라 지폐 가운데 한 종류이다. 원나라의 보초는 충렬왕 2년(1276)에 이미 유입되었으며, 같은 왕 13년(1287)에는 그 사용이 강제되었다. 고려에서 사용된 보초는 지원보초(至元寶鈔)와 중통보초(中統寶鈔)가 있었으며, 지원보초 1관은 중통보초 5관의 가치로 통용되었다. 전함 건조비 등의 명목으로 유입된 보초는 국왕과 관료들 사이의 증답(贈答), 왕이나 승려 등의 원나라 왕래 비용, 군사비 조달, 연희 비용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고, 왕실을 비롯한 지배층 사이에 확산되어 고려 경제에 큰 변화를 초래하였다. 보초의 통용은 고려의 물자 유출과 물가 폭등을 초래하였으며, 고려가 원나라의 유통경제에 종속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이능식, 「여말선초의 화폐제도」 『진단학보』 16, 1949, 154쪽.
한국은행 발권부, 『한국화폐사』, 1966, 15~16쪽.
장동익, 『고려후기외교사연구』, 일조각, 1994, 139쪽.
김동철, 「상업과 화폐」 『한국사』 권19, 1996, 412~413쪽.
위은숙, 『고려후기농업경제연구』, 혜안, 1998, 201~202쪽.
4 팔관회 : 팔재회(八齋會)·팔관재회(八關齋會)라고도 하며,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의 기복과 추복, 토속신의 제사, 국가의 태평과 왕실의 안녕 등을 기원한 불교의례를 말한다. 팔관회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93, 열전6, 최승로전(崔承老傳) 참조.
5 현문혁(?~?) : 원종~충렬왕 때 역적방호장군(逆賊防護將軍) 등을 역임한 무신관료이다. 임연(林衍)이 원종을 폐위하고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을 즉위시킨 원종 10년(1269) 10월에 최탄(崔坦)·한신(韓愼)의 반란에 대비하였으며, 이듬해 삼별초 항쟁군에게 점령된 강화경(江華京)에서 가족과 함께 탈출하다가 부인과 자식은 죽었다. 이듬해 10월에 부인은 열녀로 표창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121, 열전34, 열녀, 현문혁처전(玄文奕妻傳) 참조.
6 이무(?~?) : 충렬왕~충선왕 때 낭장·장군·상호군을 역임한 무신관료이다. 충렬왕 때에는 고려로 침입한 카다안[哈丹]의 군사를 격퇴하는 전공을 세우고 두 차례에 걸쳐 원나라에 가서 새매와 매를 받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충선왕에게 궁인(宮人) 무비(無比)의 일당으로 지목되어 유배되었다.
○ 羅裕, 羅州人, 三韓功臣大匡 聰禮十世孫也. 父得璜, 剝民聚斂, 諂事崔沆, 爲長興副使. 沆農莊在臨陂, 以故陞爲全羅按察使, 後又爲濟州副使. 前此, 宋佋守濟州, 坐贓免, 得璜至, 人語曰, “濟州昔經小盜, 今遇大賊.” 官至刑部尙書.
裕以蔭調慶仙店錄事, 林衍挾私憾, 殺裕舅趙文柱, 脅裕離婚, 裕以義拒之. 累遷至將軍, 從元帥 金方慶, 討三別抄于珍島, 有功. 時, 朝士妻多陷賊, 率改娶, 及賊平, 妻或有還者, 皆弃之. 裕亦已娶新妻, 先入賊中, 得舊室還, 復爲夫婦如初, 聞者義之.
方慶討耽羅, 裕又以大將軍從軍. 將前鋒, 先下岸, 殺獲甚衆. 經略使賞以所獲男女二口, 奏帝賜中統寶鈔. 又從方慶與元將忽敦等, 征日本, 遷鷹揚軍大護軍, 帝賜金牌, 授武德將軍·管高麗軍千戶, 以賞軍功. 忠烈時, 出鎭合浦, 以知禮特召還, 掌八關會儀. 俄遷知申事, 進副知密直司事. 王之請親征乃顔也, 賜裕虎頭牌, 爲中翼副萬戶. 及班師, 策爲一等功臣, 賜錄券, 田一百結, 臧獲二十口, 授明威將軍. 帝賜雙珠金牌.
乃顔黨哈丹子老的, 鈔掠平壤, 將攻江都, 王命裕禦之. 裕沿海踰險, 遇賊于平壤, 斬哈刺·桑哥二賊將, 賊潰. 又戰于燕岐, 大敗之, 餘衆遁走女眞地. 王又遣裕于交州道, 追捕之. 老的踰竹田, 復趣平壤, 裕將舍舟而陸, 玄文奕言, “原隰回互, 恐有伏.” 裕不聽, 未成列, 賊大至. 裕麾軍退, 僅得登舟, 郞將 李茂等數十人不及登. 文奕立舟上呼曰, “茂勉之! 能立奇功, 國有賞. 孰與委身逆虜, 妻子爲僇乎?” 茂等走獨山, 賊將輕之, 下馬據胡床, 分其衆, 環山而登, 飛矢如雨. 茂偎樹立, 日晩飢甚, 啗囊中乾餱, 謂軍士曰, “男兒當死中求生, 毋恐!” 關弓左射, 中賊將喉, 應弦而倒, 賊自亂. 茂等大呼迫擊, 斬獲無筭. 以知密直司事, 如元賀正, 帝賜三珠虎符·玉帶·銀錠·弓矢·劒·鞍馬, 授懷遠大將軍. 十八年卒. 裕, 勇悍出衆, 習禮儀, 明斷獄訟. 臨難不懼, 屢立邊功. 子益禧.
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 고려사열전 나유[ 羅裕 ]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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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열전 나유(羅裕) 부 나익희(羅益禧)
고려사열전 나유(羅裕) 부 나익희(羅益禧)
나익희(羅益禧)1)는 열일곱 살에 원나라로부터 금부(金符)2)를 받고 상천호(上千戶)로 임명되었다. 뒤에 부친의 관작을 물려받아 관군상만호(管軍上萬戶)가 되어 삼주호부(三珠虎符)를 패용했으며 충렬왕 말년에는 신호위(神號衛) 호군(謢軍)으로 임명되었다.
충선왕이 즐겨 새로운 법률을 만들어내자 나익희가 여러 차례 반대하는 글을 올리고 때로는 직언으로 왕에게 충고했지만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파직되었다가 10년 뒤에야 검교상호군(檢校上謢軍)이 되었으며 이후 세 차례 승진해 상의평리(商議評理)가 되고 금성군(錦城君)에 봉해졌다. 한때 계림윤(雞林尹)을 지냈으며 세 번이나 합포(合浦 :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시)의 군대를 지휘했는데 청렴하고 부지런하며 자애롭다는 평판이 났다. 나이 쉰일곱이 되자 아들에게 전래의 관작을 물려준 후 17년 동안 한거했다. 그러나 그 때에도 백성들의 생활이 즐거운지 고통스러운지, 인재의 등용과 출척은 어떠한지를 항상 고민하여 뒷짐을 진채 얼굴을 찡그리고 홀로 뜰을 거니는 것이 남모를 근심이 있는 것 같았다.
충목왕 초에 다시 첨의참리(僉議叅理)가 되었는데, 몸이 매우 야위었고 귀도 잘 들리지 않았으나 일단 일에 임하면 조금의 게으름도 없이 열심히 처리했다. 하루는 판삼사사(判三司事) 이제현(李齊賢)더러,
“임금께서 어린 관계로 정사를 재상들에게 맡겼는데, 정권을 맡아 책임을 진 사람들이 과거의 전철3)을 교훈으로 삼으려 하지 않소. 나는 물러나서 그들과 함께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지 않으려는데 공은 어떻게 생각하오?”
라고 물었다. 이제현이 감사하며,
“제가 두세 가지 정책을 가지고 정권 잡은 사람들을 깨우쳐보았으나 아직 시행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용퇴하지 못함을 늘 부끄럽게 생각했으니 어찌 공의 말씀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고 응낙했다. 그로부터 열흘 쯤 뒤에 병으로 죽었다. 나익희는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혔기 때문에 글을 읽을 겨를이 없었으나 변함없는 지조로 절의를 숭상했으며 사람들과 다투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모친이 유산을 분배하면서 따로 노비 마흔 명을 주자,
“제가 딸 다섯에 외동아들인데 어찌 구차히 재산을 따로 더 얻어 자식에게 고루 은혜를 베푸시는 그 덕에 누를 끼쳐서야 되겠습니까?”
하고 사양하니 모친이 의로운 말이라 여겨 그대로 따랐다. 시호를 양절(良節)이라 했으며, 아들은 나영걸(羅英傑)4)이다.
각주
1 나익희(?~1344) : 모친은 임연(林衍)과 함께 무진정변(戊辰政變)에 적극 관여하여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된 배천 조씨 조문주(趙文柱)의 딸이다. 상천호(上千戶)·신호위호군(神虎衛護軍)·상의평리(商議評理)·첨의참리(僉議參理) 등을 역임하였다.
판도첨의사사였던 황려 민씨 민지(閔漬)의 딸과 혼인하여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동지밀직사사 나영걸(羅英傑)이며, 딸은 첨의평리를 역임한 전주 최씨 최문도(崔文度)에게 시집갔다.
김용선 편, 「나익희 묘지명」·「최문도 묘지명」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2001.
2 금부 : 금호부(金虎符)라고도 하며, 금(金)으로 만들거나 금칠을 하여 만든 나무패로 원나라에서 만호(萬戶)·천호(千戶) 등의 군직(軍職)을 임명하면서 해당 관료들에게 상징물로 내려주던 금패(金牌)를 말한다.
3 전철 : 충혜왕 복위 4년(1343) 11월 충혜왕이 고룡보(高龍普) 등에게 체포되어 원나라로 압송되었다가 함차(檻車 : 죄수를 가두어 싣고 가는 수레)에 실려 게양현(揭陽縣 : 지금의 중국 광둥성[廣東省])으로 유배를 가는 도중 이듬해 정월 악양현(岳陽縣 : 지금의 중국 후난성[湖南省])에서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104, 열전17, 김주정(金周鼎) 부 김석견전(金石堅傳) 참조.
4 나영걸(?~?) : 충혜왕대에 만호(萬戶)·압령관(押領官)·응양군(鷹揚軍) 상장군(上將軍)·판밀직사사 등을 역임하였다. 공민왕 1년(1352) 조일신의 변란 때 조일신의 친당으로서 판밀직사사가 되었으나, 조일신이 죽임을 당하자 정을보(鄭乙輔) 등과 함께 하옥되기도 하였다. 같은 왕 3년(1354) 원나라에서 고우(高郵)의 적 장사성(張士誠)을 토벌할 때 유탁(柳濯)·염제신(廉悌臣) 등과 함께 참가하였으며, 그 전공으로 금성군(錦城君)으로 봉해졌다.
『고려사절요』 권26, 공민왕 원년 9월 및 10월.
김용선 편, 「원충(元忠) 묘지명」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2001.
○ 益禧, 年十七, 受元命, 帶金符, 爲上千戶. 後襲爵, 拜管軍上萬戶, 帶三珠虎符. 忠烈末, 授神虎衛護軍. 忠宣好立新法, 益禧多所封駁, 或撼以危言, 不爲動. 遂落職, 經十年, 乃除檢校上護軍, 三遷爲商議評理, 封錦城君.
嘗尹雞林, 三鎭合浦, 以廉勤慈惠稱. 年五十七, 授其子世爵, 閑居者又十七年, 每念民生休戚, 人材用捨, 負手蹙鼻, 獨行園庭, 若有隱憂. 忠穆初, 復爲僉議叅理, 貌甚癯重聽, 然臨事慷慨, 不小懈. 一日, 語判三司事 李齊賢曰, “吾君幼, 委政宰相, 彼負且乘者, 不誡覆轍. 吾其引避, 毋俱爲十手所指, 公當如何?” 齊賢謝曰, “僕嘗以二三策, 曉執政, 未見施行. 常愧不能勇退, 敢不從公言?” 居十餘日, 病卒.
益禧, 幼習武藝, 不暇讀書, 而性耿介, 慕節義, 恥與人爭. 母嘗分財, 別遺臧獲四十口, 辭曰, “以一男居五女閒, 烏忍苟得, 以累鳲鳩之仁?” 母義而從之. 謚良節, 子英傑.
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 고려사열전 나유(羅裕) 부 나익희(羅益禧)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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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나씨 문적과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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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띄어쓰기와 오자 탈자를 교정하고, 틀린 용어를 바로 잡았으며,
나. 내용이 중복되는 것은 가능한 한 생략토록 하고,
다. 번역내용이 현저히 잘못된 것은 고치거나 바꾸었으며,
라. 13번 이하 선조님의 사적은 역사, 족보, 지장록, 등의 기록과 합치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15세 이상으로 한정 하고,
마. 금성 나 씨 사요의 내용과 순서를 기준으로 여러 내용들을 종합절충 하면서,
바. 더러 남의 글을 고친 사실은 전체문중의 체면을 위해 불가피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선의로 해석해 주시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적자로 표시된 부분은 검토 후 삭제되어야 할 것임. 내용을 고친 부분은 밑줄로 표시 함)
금성나씨의 문적과 사적
1.금성나씨 가문유래(錦城羅氏 家門由來)
중국 고대 축융(祝融)의 후예로 알려진 금성 나 씨는 기원전 759년(주나라 무왕 때)에 광정공(匡正公)이 공을 세워 나국(羅國)에 봉해짐으로서 나라 이름을 따서 성(姓)으로 삼은 것이 나 씨(羅氏)가 되었다.
『금성나씨대동보(錦城羅氏大同譜)』에 의하면 축융의 후손 주공(珠公)이 한고조(漢高祖)때 나라에 공을 세우고 예장군(豫章君)에 봉해져서 예장 나 씨(豫章羅氏)가 되었다.
당(唐) 태종(太宗)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나지강공(羅至强公)이 조정의 고구려 정벌론을 반대하고 우리나라(발라현=나주)에 망명한 후 신라국 좌승상(左丞相)에 이르렀으며 그 후에 십 여대가 대대로 나주지방에서 거주하였다. 그러나 윗대의 소목계통(昭穆系統)이 명확하지 않아 후삼국(後三國) 통일 때 공을 세운 삼한벽상공신(三韓璧上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이신 나총례(羅聰禮)를 시조(始祖)로 한다.
나주시 문평 소재 경모사(景慕祠)에서 시조로부터 15세조까지 91위(位)를 봉안(奉安) 매년 양력 5월 첫째 일요일에 금성 나 씨 모두가 향사(享祀)에 참배(參拜)한다.
고려사 열전편(烈傳篇)을 비롯하여 모든 문헌에 나주 나 씨(羅州羅氏) 시조(始祖)는 나총례(羅聰禮)라 되어 있고, 모든 인물이 나주인(羅州人)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본래 나주인(羅州人)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조조(英祖朝), 무신(戊申:1728)년에 무신흉변(戊申凶變)의 혐의(嫌疑)를 벗기 위하여 변의문(辨疑文)을 내고 금성 나 씨(錦城羅氏)로 이관(移貫)하여 금성 나 씨(錦城羅氏)라 부르게 되었다. [변의문] “나주의 나 씨는 두 종족이 있으니, 나부 공을 시조로 삼는 나 씨는 본래 여황을 본관으로 쓰던 사람들이요, 여황이 나주에 혁속 되었기 때문에 나주로 본관을 바꾼 것이며, 우리 나 씨는 네 분의 금성군이 계셨기에 금성을 본관으로 하는 것이니, 실로 내력이 같지 않으면서 같은 본관을 쓰며 혼동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다.” 본관이 나주였다가 금성으로 옮겨진 실증은 숙종43년(1717) 이전부터 영조5년(1729)까지 나주로 납적(納籍)했고, 영조8년(1732)부터 영조32년(1756)까지는 거평(居平)으로 납적하고 영조35년(1759)부터는 금성으로 납적하였다.
금성나씨는 고려 개국시 한강의 양천허씨(陽川許氏) 금강의 전의이씨(全義李氏) 가문과 더불어 영산강 유역을 대표하는 성씨(姓氏)로 자리하였다.
2007년 4월 일 한국족보학연구소장 양권승(梁權承)
(변의문 번역을 알기 쉽게 수정함)
(※나성원류와 가문유래(羅姓源流, 家門由來)...중복된 내용이 많아 생략)
2.금성나씨 성향비문(錦城羅氏 姓鄕 碑文)
나성(羅姓)은 본시 축융(祝融)의 후예로 광정공(匡正公)이 나국(羅國)에 봉해지면서 득성하게 되었고, 한고조 때 주공(珠公)이 예장 땅 영주가 되면서 예장 나 씨(豫章羅氏)라 하니 중국에서는 예장 나 씨 일본이다.
당태종 때 상서좌복야로 있던 나지강공(羅至强公)이 고구려 정벌의 모이를 반대하고 망명길에 올라 황해를 건너 발라현 지금 나주에 박주 하였다. 그 후 신라조정에 출사하여 좌승상(左丞相)에 오르고 자손들은 나주를 중심으로 포거하게 되었는데 효광왕 때에 이르러 사관(賜貫) 나주 나 씨(羅州羅氏)라 하였다.
그러나 소목계통(昭穆係統)을 밝히기 어려워 연대 계승이 소명한 때로부터 위시조(爲始祖) 기일세(起一世)하니 삼한공신 대광 금성부원군 휘 총례(聰禮)이시다. 근안컨대 고려사열전에 "대장군 나유(羅裕)는 나주인(羅州人)이니 삼한공신 대광 총례의 십세손야(十世孫也)"라 하였다. 연고로 동방나성의 시조는 휘 총례이니 제족 중 소위 안정(安定) 군위(軍威) 수성(壽城) 비안(比安)등의 나 씨가 개출어나주(皆出於羅州)하여 분관(分貫)하였다.
오족(吾族)은 여초로부터 규조가 대대로 빛나서 칠대광(七大匡) 이상서(二尙書) 사부원군(四府院君)과 육봉군(六封君)을 받은 근역의 명문벌족으로 특히 의종 때 도첨의를 지낸 금성부원군 6세(六世) 국영(國英)은 말년에 정중부의 난을 피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나주)하여 스스로 호장(戶長)이 되셨고, 슬하에 대호군 인겸(仁謙)과 상장군 수겸(守謙) 형제를 두니 대호군 인겸을 이은 9세조(九世祖) 득황(得璜)은 방호사에 이어 형부상서에 오르고 아들 금성군 유(裕)는 황명회원대장군이요. 아들 익희(益禧)는 첨의참리 금성군으로 시호가 양절(良節)인데 충목왕 때 금서 신아동(新芽洞=文平)으로 이거하였고 서해도 안렴사를 지낸 13세 문규(文奎)는 문장과 행위가 한 세상의 으뜸으로 봉강사를 세워 제향하고 있다.
상장군 수겸을 이은 10세조 인송(仁松)은 한림학사로 시호가 문절(文節)이고 충렬왕 때 도첨의를 지낸 순(珣)은 금성부원군이요 고려말 예문관제학을 지낸 불사이군의 수절신 15세 계종(繼從)은 동학사 삼은각에 배향되고 죽헌사를 세워 제향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불사이군의 종훈을 지켜 영채된 듯 하였으나 성종11년 경자시에 10명이 나주골에서 합격한 경사를 노래한 금성별곡(錦城別曲) 5장 중에 나환흥(羅渙興) 나경원(羅慶源) 형제 무고하고 나진문(羅振文) 나처광(羅處光) 시기가풍(始起家風)하며 나현(羅顯) 나빈(羅贇) 사촌형제 공등연방(共登蓮榜)하니 경기하여(景幾何如)로다 하였다. 이어 중종 때 대과에 세 번 장원하고 호당을 거쳐 대사헌(大司憲)에 오른 송제공 세찬(世纘)은 을사명현으로 시호가 희민인데 건송제사향(建松齊祠享)하고 임진왜란때 거북선을 만들어 매해전에서 공훈을 세운 체암공 대용(大用)은 경기수사에 오른 선무공신으로 건소충사향(建昭忠祠享)하고 정유재란 때에 협천군수 청류공 적(迪)은 거의토적(擧義討賊)한 의병대장으로 일문삼절(一門三節)이다.
이와 같이 현조들의 관(貫)이 사승과 공과문적에 모두 나주인이라 하였고 또 과방록에도 송제공을 위시하여 창주공 무송(茂松) 구화공 무춘(茂春) 간암공 충좌(忠佐)등이 역시 나주 나 씨로 기록되어 행세하여 왔으나 영조4년(1728) 이인좌의 반란과 동왕6년 경술 흉변에 소조(所祖)를 달리하는 나씨와 일주동관(一州同貫)으로 인한 혼효의 혐의를 피하기 위해 영조23년 정묘수보시(1747) 변의문(辨疑文)을 부치고 나주의 고호가 금성이고 또 시조가 금성부원군이신 고로 이관금성하고 현재에 이르렀으나 이관당시 나주와 격조했던 각처에 산재한 제족 중에는 지금 금성으로 수보는 하되 호적에는 의연이 나주로 되어있어 유감지사라 아니 할 수 없다.
우리 씨족은 조기이래 자손들이 번연현달하여 36여세에 그 수 5만 여에 이르고 제제다사(濟濟多士)로 인물이 연면부래하여 문과 59명, 무과 96명, 생진과 음사 570명이며 특히 경술국치 이후 항일독립투쟁한 3.1운동민족 대표 나인협(羅仁協)과 나용환(羅龍煥)이 있고 의열단의 나석주(羅錫鑄) 의사와 광복군의 나월환(羅月煥) 장군 등이 있다.
그 외 각 방면에 현저한 학행훈업(學行勳業)을 매거하기 어려워 개략만을 서술하는 바이다.
(소재지 나주시 성향공원)
(내용 중 타자 입력 등의 착오로 보이는 단어들을 수정 정리함)
단기 4324(서기 1991)년 9월 15일
34세 갑주(甲柱) 짓고, 전주후인 이학용(李學庸) 쓰고, 금성나씨성향비건립위원회 세움
3.금성나씨사요 - 경모사 묘정 비문(景慕祠 廟庭 碑文)
나주의 옛 이름 금성은 고려때 삼한공신 대광(大匡) 금성부원군 휘 총례(聰禮)를 시조로 우리 나씨의 성향이다.
본래 나 씨는 중국 축융 씨의 후예로 예장 땅에 살아서 예장 나 씨라 하는데 당태종 때 지강공이 고구려 정벌을 반대하고 동쪽나라의 나주 땅에 건너와 십 여세가 신라에 벼슬하였으나 소목을 가르기 어려워서 고려개국공신인 휘 총례를 일세조로 하니 우리의 시조이시다.
6세조에 이르러 벽상삼중대관 도첨의 금성부원군 휘 국영(國英)은 백관의 우두머리였으나 명종이 수선하자 나주호장을 자청하고 대호군 휘 인겸(仁謙)과 금성부원군 휘 수겸(守謙) 형제를 두었고 8세 휘 효전(孝全)은 예부상서, 9세 휘 득황(得璜)은 사공상서, 10세 회원대장군 휘 유(裕)는 지밀사사이고, 휘 윤(允)의 초휘는 인(認)인데 첨의정승이고 휘 인송(仁松)은 한립학사로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11세 금성군 휘 익희(益禧)는 시호가 양절(良節)인데 이곳 문평에 오셨고 휘 순(珣)은 금성부원군이고 휘 천부(川富)는 신호위대장군이요 안정백 휘 천서(川瑞)는 안정(安定)으로 적라백 휘 문서(文瑞)는 군위(軍威)라. 분관(分貫)하고 12세 금성군 휘 영걸(英傑)은 문명이 높고 외방정벌에 공이 컸으며 13세 명경박사 휘 문규(文奎)는 서해도 안렴사를 지냈는데 서해민이 선정에 보답하여 영당(影堂)에 모셨고, 14세 예부시랑 휘 순(純)의 초휘는 위(緯)인데 이태조의 예의파서에도 불취하고 한림학사 휘 봉(奉)과 그리고 15세 충순당 휘 흥유(興儒)와 예문관 제학 휘 계종(繼從)과 더불어 이군(二君)을 섬기지 않은 수절신(守節臣)들이었다. 휘 중호(仲浩)는 통례문봉례이고 휘 광우(光佑)는 중순대부 충주목사로서 수성파(壽城派)의 중조요 휘 명우(明佑)는 홍문관교리이고 휘 중귀(仲貴)는 정순대부이니 현조를 두루 기술(記述)하기 어렵다.
오호라! 15세에 이르도록 송와(松窩) 선조 아니고는 봉영을 모두 실수(失守)했으니 한탄이 막심할 따름이다.
이제나마 후손들이 헌성을 모아 시조의 단(壇)을 설하고 경모사와 숭의문 금서제, 여충헌을 건립하여 시조이하 15세까지 91위(位)를 봉안하고 세일제(歲一祭)로 조두(俎豆)하게 되니 후손은 보본추원하고 만세에 번연하라. 여기 비(碑)를 세우다.
단기 4332(서기 1999)년 11월 일
금성나씨대종회(錦城羅氏大宗會) 세움 34세 맹헌(孟獻) 찬병서(撰幷書)
4.경모사 봉안 선조록(景慕祠 奉安 先祖錄)
시조 1세 휘 총례 삼한공신 대광 금성부원군 (始祖一世 諱 聰禮 三韓功臣 大匡 錦城府院君)
2 세조 휘 은고 자헌대부 금산군 (二 世祖 諱 恩誥 資憲大夫 錦山君)
3 세조 휘 함헌 교위직장 대광 (三 世祖 諱 含憲 校尉直長 大匡)
4 세조 휘 성좌 삼중대광 예빈경대호군 (四 世祖 諱 成佐 三重大匡 禮賓卿大護軍)
5 세조 휘 정서 삼중대광 나성군 (五 世祖 諱 廷胥 三重大匡 羅城君)
6 세조 휘 국영 삼중대광 금성부원군 (六 世祖 諱 國英 三重大匡 錦城府院君)
6 세조 휘 언 서경유수 ( 六 世祖 諱 彦 西京留守)
6 세조 휘 ○○ 정사 (六 世祖 諱 ○○ 政事)
7 세조 휘 인겸 검교대호군 (七 世祖 諱 仁謙 檢校大護軍)
7 세조 휘 수겸 상장군 금성부원군 (七 世祖 諱 守謙 上將軍 錦城府院君)
8 세조 휘 효전 황태중대부 예부상서, 배 나주 손씨 (八 世祖 諱 孝全 皇太中大夫 禮部尙書, 配 羅州 孫氏)
8 세조 휘 선 정의대부 (八 世 祖 諱 宣 正義大夫)
8 세조 휘 극효 정원장군 중랑장 (八 世 祖 諱 克孝 定遠將軍 中郞將)
9 세조 휘 국충 (九 世 祖 諱 鞠忠)
9 세조 휘 응화 (九 世 祖 諱 應和)
9 세조 휘 득황 황금자광록대부 사공상서, 배 나주 정씨
(九 世祖 諱 得璜 皇金紫光錄大夫 司空尙書, 配 羅州 鄭氏)
9 세조 휘 문현 삼중대광 (九 世 祖 諱 文玄 三重大匡)
9 세조 휘 문일, 배 양씨九 世 祖 諱 紋逸, 配 梁氏
10 세조 휘 성 직장, 배 정부인 조씨(十 世 祖 諱 成 直長, 配 貞夫人 趙氏)
10 세조 휘 유 회원대장군 밀직사사, 배 군부인 백천 조씨
(十 世祖 諱 裕 懷遠大將軍 密直司事, 配 郡夫人 白川 趙氏)
10 세조 휘 윤 동경유수 첨의정승, 배 정경부인 안동 김씨
(十 世祖 諱 允 東京留守 僉議政丞, 配 貞敬夫人 安東 金氏)
10 세조 휘 종수 첨의중찬(十 世 祖 諱 宗綏 僉議中贊)
10 세조 휘 철준 봉익대부(十 世 祖 諱 哲準 奉翊大夫)
10 세조 휘 장명 봉순대부, 배 정부인 복주 권씨
(十 世祖 諱 長命 奉順大夫, 配 貞夫人 福州 權氏)
10 세조 휘 인송 통의대부 함림원시강학사 시호 문절공, 배 정부인 수원 이씨
(十 世祖 諱 仁松 通義大夫 翰林院侍講學士 諡號 文節公, 配 貞夫人 水原 李氏)
10 세조 휘 익희 금성군 시호 양절공, 배 여흥 민씨
(十 世祖 諱 益禧 錦城君 諡號 良節公, 配 驪興 閔氏)
11 세조 휘 천부 호위대장군, 배 청주 곽씨(十一世祖 諱 天富 虎衛大將軍, 配 淸州 郭氏)
11 세조 휘 천서 문하시중 안정백, 배 동복 오씨
(十一世祖 諱 天瑞 門下侍中 安定伯, 配 同福 吳氏)
11 세조 휘 원서 시중 상산백 (十一世祖 諱 元瑞 侍中 商山伯)
11 세조 휘 문서 시중 적라백 (十一世祖 諱 文瑞 時中 赤羅伯)
11 세조 휘 정서 검교정승 (十一世祖 諱 正瑞 檢校政丞)
11 세조 휘 지열 경주부윤 (十一世祖 諱 旨說 慶州府尹)
11 세조 휘 언 밀직부호군 (十一世祖 諱 彦 密直副護軍)
11 세조 휘 순 도첨의 금성부원군, 배 해주 오씨 (十一世祖 諱 珣 都僉議 錦性府院君, 配 海州 吳氏)
12 세조 휘 영결 봉익대부 금성군, 배 원주 원씨 (十一世祖 諱 英傑 奉翊大夫 錦城君, 配 原州 元氏)
12 세조 휘 준걸 나성군 (十二世祖 諱 俊傑 羅城君)
12 세조 휘 열걸 봉익대부 (十二世祖 諱 烈傑 奉翊大夫)
12 세조 휘 포 통의대부 상호군 (十二世祖 諱 泡 通議大夫 上護軍)
12 세조 휘 종 조산대부 감찰어사 (十二世祖 諱 淙 朝散大夫 監察御使)
12 세조 휘 득방 종사랑 직장, 배 인동 장씨(十二世祖 諱 得逄 從仕郞 直長, 配 仁同 張氏)
13 세조 휘 문규 명경박사 안렴사, 배 군부인 협천 이씨
(十三世祖 諱 文奎 明經博士 按廉使, 配 郡夫人 陜川 李氏)
13 세조 휘 구규 승사랑 해평군사, 배 숙부인 함양 박씨
(十三世祖 諱 龜奎 承仕郞 海平郡事, 配 淑夫人 咸陽 朴氏)
13 세조 휘 천규 봉순대부 (十三世祖 諱 天奎 奉順大夫)
13 세조 휘 원 개성참군 (十三世祖 諱 元 開城參軍)
13 세조 휘 윤, 배 밀양 박씨 (十三世祖 諱 綸, 配 密陽 朴氏)
13 세조 휘 개 전법사 봉직랑, 배 창녕 조씨
(十三世祖 諱 凱 典法司 奉直郞, 配 昌寧 曺氏)
13 세조 휘 덕중 평양부사록 참봉, 배 경주 이씨
(十三世祖 諱 德中 平壤府司錄 參奉, 配 慶州 李氏)
13 세조 휘 이, 배 고흥 신씨十三世祖 諱 頤, 配 高興 申氏
14 세조 휘 순 봉상대부 예부시랑 증판서, 배 이씨, 배 윤씨
十四世祖 諱 純 奉常大夫 禮部侍郞 贈判書, 配 李氏, 配 尹氏
14 세조 휘 연 문하시중 (十四世祖 諱 珚 門下侍中)
14 세조 휘 신 병조정랑 (十四世祖 諱 臣 兵曺正郞)
14 세조 휘 봉 한림직학사 (十四世祖 諱 奉 翰林直學士)
14 세조 휘 신 중추부녹사 (十四世祖 諱 信 中樞府錄事)
14 세조 휘 경 통례, 배 파평 윤씨 (十四世祖 諱 經 通禮, 配 波平 尹氏)
14 세조 휘 낙 밀직부호군 (十四世祖 諱 絡 密直副護軍)
14 세조 휘 문 봉정대부 사헌부감찰 (十四世祖 諱 紋 奉正大夫 司憲府監察)
14 세조 휘 서, 배 제주 양씨 (十四世祖 諱 緖, 配 濟州 梁氏)
14 세조 휘 귀생 (十四世祖 諱 貴生)
14 세조 휘 조 감찰어사, 배 하동 정씨(十四世祖 諱 組 監察御使, 配 河東 鄭氏)
14 세조 휘 직 봉선대부 밀직부사, 배 함안군부인 안동 김씨
(十四世祖 諱 織 奉善大夫 密直副使, 配 咸安郡夫人 安東 金氏)
14 세조 휘 서 직장 (十四世祖 諱 緖 直長)
14 세조 휘 선 현령 (十四世祖 諱 線 顯令)
14 세조 휘 제도 (十四世祖 諱 制道)
14 세조 휘 섬 (十四世祖 諱 纖)
14 세조 휘 증 (十四世祖 諱 繒)
15 세조 휘 중호 선무랑 통례문 봉례, 배 안인 박씨, 배 안인 윤씨
(十五世祖 諱 仲浩 宣務郞 通禮門 奉禮, 配 安人 朴氏, 配 安人 尹氏)
15 세조 휘 광우 중현대부 충주목사, 배 숙부인 벽진 이씨
(十五世祖 諱 光佑 中顯大夫 忠州牧使, 配 淑夫人 碧珍 李氏)
15 세조 휘 명우 홍문관교리 병조판서, 배 안동 김씨(十五世祖 諱 明佑 弘門觀校理 兵曹判書, 配 安東 金氏)
15 세조 휘 중귀 정순대부 한성판윤, 배 정부인 경주 이씨
(十五世祖 諱 仲貴 正順大夫 漢城判尹, 配 貞夫人 慶州 李氏)
15 세조 휘 사고 중직대부 형조판서, 배 정부인 충주 유씨
(十五世祖 諱 師古 中直大夫 刑曹判書, 配 貞夫人 忠州 劉氏)
15 세조 휘 중징 봉정대부 사헌부감찰 (十五世祖 諱 中徵 奉政大夫 司憲府監察)
15 세조 휘 욱 진사 (十五世祖 諱 郁 進士)
15 세조 휘 희 생원 호장 (十五世祖 諱 熙 生員 戶長)
15 세조 휘 중문 군수 (十五世祖 諱 中文 郡守)
15 세조 휘 중산 주서 (十五世祖 諱 仲山 駐書)
15 세조 휘 중립 봉사 (十五世祖 諱 仲立 奉事)
15 세조 휘 중원, 배 이천 서씨 (十五世祖 諱 仲元, 配 利川 徐氏)
15 세조 휘 흥유 판전사 지리박사 (十五世祖 諱 興儒 判典事 地理博士)
15 세조 휘 계유 판관 (十五世祖 諱 啓儒 判官)
15 세조 휘 천강 (十五世祖 諱 天綱)
15 세조 휘 천산 권지승사랑 통례문봉례十五世祖 諱 天산 權知承仕郞 通禮門奉禮
15 세조 휘 천통 (十五世祖 諱 天統)
15 세조 휘 온 선위장군, 배 숙부인 함평 이씨 (十五世祖 諱 縕 宣衛將軍, 配 淑夫人 咸平 李氏)
15 세조 휘 소 (十五世祖 諱 素)
15 세조 휘 석강 (十五世祖 諱 石綱)
15 세조 휘 석견 (十五世祖 諱 石堅)
15 세조 휘 계종 예문관 제학, 배 군부인 한산 이씨(十五世祖 諱 繼從 藝文館 提學, 配 郡夫人 韓山 李氏)
15 세조 휘 구동 판전의사 (十五世祖 諱 龜東 判典儀司)
15 세조 휘 인주 호조전서 (十五世祖 諱 仁柱 戶曹典書)
15 세조 휘 도 (十五世祖 諱 縚)
15 세조 휘 언 생원 (十五世祖 諱 언 生員)
5.대광 나총례(大匡 羅聰禮) 선생 봉안문(奉安文)
오호(嗚呼) 선생이시여! 엎드려 생각하니 삼한이 분열하여 견훤(甄萱)이 신라를 독란함에, 인민은 분격하여 그 원성이 하늘을 찔렀도다. 드디어 왕태조(王太祖)가 의기(義旗)를 들어 남쪽으로 내려가니, 선생은 나주의 영주(領主)로서 태조를 쫓아 성전(聖戰)을 도왔도다. 드디어 하늘이 열리고 땅이 열려서, 삼한통합(三韓統合)의 경사가 크게 일어났도다.
현릉은 선생을 특별히 포창하여 삼한공신(三韓功臣)을 책봉(策封)하고 대광(大匡)을 제수(除授)하였도다. 그 수훈을 생각하면 어찌 천양(闡揚)을 늦추리요? 후세의 의로운 성예(姓裔)들 그 천양이 없음을 근심하도다. 이에 숭의제사의 의론이 제발하야, 고려대묘(高麗大廟)의 창건을 선포하도다. 천만예손은 의리를 같이하여 출연을 아끼지 않았으며, 정부기관은 취지에 찬동하여 보조금을 협찬하였도다. 드디어 통일대전이 파주동천(坡州洞天)에 울연하니, 지금 송악산(松嶽山) 푸른빛이 한강(漢江)과 어울려 협화하는 도다.
오백년의 충공(忠功)을 모두 배사(配祀)하니 승국의 역사가 이에 찬연하고, 전각이 사위에 장엄하니 군신(君臣)의 거동이 여재양양하도다. 위로는 하늘의 원기를 지행하고, 아래로는 산하의 정기를 갊었도다. 태양이 하늘에 빛남이여! 그 공훈(功勳)은 천추에 불멸할 것이요, 천신이 충령을 보우하심이여! 향화는 만세에 이어지리로다. 드디어 고려선양회 유사는 고례를 쫓아 정결한 예제(醴齊)를 갖추어 감히 존령을 개국실(開國室)에 봉안(奉安)하고, 태묘(太廟)의 전례에 준하여 공경(恭敬)히 청작(淸酌)을 영전(靈前)에 바치나이다. 바라옵건대 영령(英靈)이시여! 이에 강림(降臨)하사 영원(永遠)히 이에 명인(明禋)을 흠향(歆饗)하소서.
고려역사선양회(高麗歷史宣揚會)
6.예문관제학 죽헌 나계종 선생 봉안문 (藝文館提學 竹軒 羅繼從 先生 奉安文)
오호(嗚呼) 선생이시여! 일찍이 문사가 정박하여 현능께서 경서(經書)를 내려 총애하시고, 궁전에 재변이 일어나자 왕실의 안녕을 빌어 천경록(天經錄)을 찬진하셨도다. 계종(繼從)은 곧 현능의 사명(賜名)이요, 선조의 위열을 쫓으라는 뜻이로다. 어찌 모진 운명은 성왕(聖王)의 웅도를 꺾어버렸는가? 저 간악한 역신이 그 성체(聖體)를 시해(弑害)하였도다. 이내 선생은 벼슬을 버리고 송천(松川)으로 돌아가시고 어느새 조정에는 역도들로 충일하였도다.
마침내 정포은(鄭圃隱)이 선죽교(善竹橋)에서 순절(殉節)하고, 드디어 사직은 이시중(李侍中)에게 돌아가도다. 몸은 초옥에 의지하나 성충의 기품은 오직 결연하고, 마음은 청송(靑松)을 향하니 고절(孤節)의 풍채(風采)는 오히려 안락(安樂)하시 도다.
이태조(李太祖)가 문생(門生)으로 하여금 선생을 불렀더니, 다만 왕 씨의 세상에서 죽지 못한 것을 한(恨)하시 도다. 이제 고려의 사직이 바뀐 지 이미 육백년이 지났으나, 오직 승국충현(勝國忠賢)은 유식(侑食)할 곳을 겨를 치 못하였도다. 이는 오로지 국가의 결전이요, 또한 실로 천만운잉(千萬雲仍)의 자한(齎恨)이로다. 하늘의 뜻은 기다림에 있고, 사람의 마음은 막기 어렵도다. 이에 고려선양회의 주관으로 드디어 황도남방(皇都南方)에 저 익연(翼然)한 통일대전(統一大殿)을 열었도다. 천만성손(千萬姓孫)은 의를 들어 이에 헌성(獻誠)하고, 정부기관은 충을 쫓아 이에 협찬하였도다. 드디어 유사(有司)는 고례(古禮)를 쫓아 감히 존영(尊靈)을 정절실(靖節室)에 봉안(奉安)하고, 정결히 예제(醴齊)를 갖추어 선생의 영전(靈前)에 천향(薦饗)하나이다. 바라옵건대 불매(不昧)하신 영령(英靈)이시여! 이에 강림하사 영원히 이에 편안하옵소서.
(잘못된 한자와 틀린 용어를 정정함, 醴齊는 周禮의 五齊의 일종으로 淸酌과 같은 용도로 쓰는 축문용어, 飮饗이라는 용어는 없는 단어이며, 薦新은 時祭에 새 곡식을 올릴 때 쓰는 용어이니 薦饗이 정당할 듯.)
고려역사선양회(高麗歷史宣揚會)
7.회원대장군 휘유 사적(懷遠大將軍 諱裕 史籍) (10世祖)
(麗史列傳)
나유(羅裕) 는 나주 사람이요 삼한공신이며 대광(大匡)인 총례(聰禮)의 십 세손이 된다. 아버지 득황(得璜)은 장흥부사로 전라안찰사가 되었다가 후에 제주 부사가 되었으며 벼슬이 병부상서에 이르렀다. 공이 음직으로 경선점 녹사(慶仙店錄事)로 있을 적에, 임연(林衍)이 사감으로 공의 장인 조문주를 죽이고 공을 협박하여 이혼시키려 했지만 공은 의리를 들어 결연히 거절하였다.
여러 번 벼슬을 옮겨 장군이 되고, 김방경원수와 함께 진도에서 삼별초 토벌에 공을 세웠다. 당시 조정 관료들의 가족은 많은 수가 적당의 포로가 되었음으로 모두가 다시 결혼을 하였고 난리가 끝난 다음 다시 돌아오는 이가 있어도 모두 버리는 실정이었다. 공 또한 새로 결혼을 하였지만, 적중에 들어가 옛 부인을 찾아 돌아와서는 다시 전처럼 부부가 되었으니 듣는 이가 모두 의롭게 여겼다.
김방경이 탐라의 삼별초를 토벌할 적에는 공이 대장군으로 종군, 선봉을 맡아 남보다 먼저 상륙하여 많은 적을 무찌르고 사로잡았다. 경략사(經略使)가 사로잡은 남녀 2구로 사실을 상주하니 원나라에서도 중통보초(中統寶鈔,중국화폐)를 하사하였다. 또 김방경 및 원나라 홀돈(忽敦)등과 함께 일본을 정벌하고 응양군 대호군(鷹揚軍 大護軍)이 되었으며, 원나라는 금패를 하사하고 무덕장군 관고려군천호(武德將軍 管高麗軍千戶)를 주어 군공을 포상했다.
충렬왕 시절 합포(合浦)를 맡아 다스릴 때에는 예법에 밝다하여 특별히 소환되어 팔관회의 의식을 주관하고, 이어 지신사(知申事,都承旨)가 되고 부지밀직사사에 승진하였으며, 내안(乃顔)에 대한 친정을 청하여 호두패(虎頭牌)를 하사 받고 중익부만호(中翼副萬戶)가 되었으며, 정벌을 끝내고 돌아오자 일등공신에 책정하고 철권에 이름이 오르고, 밭 일백 결, 노비 20구를 하사하고 명위장군의 직을 수여하였으며, 원나라는 쌍주금패를 하사 하였다.
내안의 잔당인 합단의 아들 노적(老的)이 평양에서 노략질을 하고 강화도까지 공략하려들자 왕이 방어를 명했다. 공은 바다를 건너고 험한 봉우리를 넘어서 평양에서 적을 맞아 합랄(哈剌) 상가(桑哥) 두 적장을 베니 적도들은 궤멸되고 또 연기(燕岐) 싸움에서도 적을 대파했다. 잔당들이 여진 땅을 향해 패주하자,
왕이 또 공을 교주도에 보내 추포케 하고, 노적은 죽전을 넘어 다시 평양으로 달아났다. 공이 배에서 내려 상륙을 기도하자, 부장 현문혁(玄文奕)이 이곳은 언덕과 골짜기가 어우러져 복병이 두렵다 간했지만 듣지 않았다. 대열을 갖추기도 전에 적의 대병이 몰려오니, 공은 전군을 지휘하여 겨우 배에 올랐으나 낭장 이무(李茂)등 수 십 인이 미처 오르지 못했다. 현문혁이 배위에서 외쳤다. “이무는 힘을 다해 싸우라! 큰 공을 세운다면 나라에서 상을 내릴 것이니, 오랑캐의 포로가 되어 처자가 도륙되는 일과는 어느 것이 좋겠는가.”
이무와 군사들이 외딴 달아나자 적장은 이들을 깔보고 말에서 내려 호상에 걸터앉아, 무리를 나누어 산을 포위공격 하니 화살이 비 오듯이 날아 이무 등은 일어서기가 두려울 지경이었다. 날이 저물자 휴대용 비상식량으로 요기를 하고 군사들에게 큰 소리로 “사나이가 사지에서 살길을 찾는데 두려울 것이 무엇이냐.” 외치며 활을 당겨 적장의 목을 쏘아 맞추니 쏘는 족족 적군은 쓰러지고 적진이 크게 어지러워졌다. 크게 소리치며 다그쳐 공격하여 무수히 적을 도륙하고 사로잡았다.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원나라에 가서 신년을 하례하니 황제는 삼주호부, 옥대, 은정, 활과 화살, 칼과 안장 등을 하사하고 회원대장군(회원대장군)의 관직을 수여하였다. 충렬왕 18년에 졸하니, 공은 날래고 씩씩함이 뛰어났으며, 예법에 익숙하고 옥사의 판결이 명확했고, 전쟁에 임해서도 두려움이 없어 국경방어에 많은 군공을 세웠다. 아들은 익희(益禧)이다.
(묘표의 번역은 고칠 곳이 매우 많으며, 한편 개인이 지은 사사로운 글보다는 공식역사기록인 여사열전을 싣는 것이 옳다고 여겨 바꾸어 실었음)
8.광정대부 첨의참리 상호군 묘명 (匡靖大夫 僉議參理 上護軍 墓銘) (11世祖)
지정(至正) 4년 갑신(1344년) 9월 기축 일에 광정대부 첨의참리 나공이 졸하다. 왕이 유사에게 명하여 뇌사를 지어 조문하고 양절이라 시호를 내려 11월 경인 일에 송림현 약사원 북쪽에 예장하니 공의 휘는 익희(益禧), 관은 나주이며 삼한공신 대광 휘 총례의 11세손이다. (이하 가족상항 생략)
장군의 가정에서 성장한 공은 어려서부터 무예를 연마하고 독서할 틈이 많지 않았으되 천성이 도량이 넓고 지조가 굳었다. 어머니가 가산을 분배하면서 노비 40구를 별도로 주자, 한 사나이가 다섯 여인 사이에 살면서 구차하게 나머지를 더 얻어 어찌 길러주신 은혜에 누를 끼치겠습니까? 하고 사양하니 어머니께서 옳다 여기고 허락하였다. 17세에 천자로부터 금부관대(金符冠帶)의 직급과 상천호(上千戶)의 직첩을 받고, 부친이신 회원대장군이 졸하신 뒤에 상만호직급인 호덕장군(虎德將軍)과 삼주호부관대(三珠虎符冠帶)를 이어받았다.
충렬왕 말년에는 신호위호군(神虎衛護軍)이 되어 금인(金印)과 자수(紫繡)를 하사받고 첨의중사를 겸임하였다. 충선왕이 구폐를 통렬히 개혁할 적에 모든 관료들이 퇴출되고 낭관 중에 오직 공만 남게 되었으며, 당시는 모든 관리들이 명령만 받으면 이에 못 미칠까 두려워하며, 받들어 시행하던 시기였으나 공은 법을 지켜 많은 반대의견을 올리니 권신들이 못마땅하게 여겨서 험한 말로 참견을 하는데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다가 마침내 관직을 잃게 된다. 10년 만에 다시 검교상호군(檢校上護軍)에 제수 되고, 또 7년 만에 감문위상호군으로 옮기고, 또 천우위가 되어 중문사(中門使)를 겸하다가 좌상시(左常侍)를 제수 받았다. 세 번을 옮겨 광정대부 상의평리가 되고 금성군에 봉해지니 나이 57세가 되어서 아들에게 작위를 물려주었다.
또 17년을 지내면서 매양 백성들의 안위와 인재등용에 마음을 쓰며, 뒷짐 지고 근심어린 얼굴로 정원을 배회하는 모습은 마치 남모르는 근심을 가득품은 것 같았다. 일찍이 한번 계림을, 그리고 세 번 합포를 다스릴 때에는 청렴하고 자혜로워서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칭송해 마지않는다. 금상이 왕위를 계승하여 다시 첨의참리로 등용하니 세상에서 말하는 이른바 다섯 번 고을을 맡아 다스였다는 것이리라. 몸은 여위고 청력도 나빠졌으나 정사를 논의할 적에는 의기가 넘쳐 조금도 개을리 함이 없었다.
하루는 판삼사사(判三司事) 이제현(李齊賢)에게 이렇게 말씀했다. “우리군주가 어려서 재상들에게 정사를 위임하니, 저 분수에 넘치는 일을 맡은 사람들이 잘못된 전철을 경계할 줄 모르니, 나는 상피관계에 있으니 관여할 수 없지만, 모두가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게 되지는 말아야할 일이니, 공은 마땅히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재현이 사죄하며 대답했다. “두 새 가지 계책을 집정자에게 말했으나 아직 시행되지 않아 항상 용퇴하지 못 한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어찌 공의 말씀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열흘쯤 뒤에 공이 병으로 물러난다는 말씀을 듣고, 전부터 계획했던 일을 하라는 것으로 알았더니, 슬프다! 어찌 끝내 일어나시지 못하게 될 줄이야. 서둘러 달려가 조문 하고 나오는데 아들과 사위가 따라오며 글을 부탁한다. 사양할 수 없는 일이라 다음날 글을 올려 묘갈명을 삼도록 함으로써, 생전과 사후에서 모두 공의 말씀을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고자한다.
명문은 다음과 같다.
자혜로운 관리이며 염치 아는 장군이라 爲官慈惠 爲將廉恥
의리를 따를 뿐 권세와 이익 두렵지 않아 惟義之求 不怵勢利
타고난 성품이며 배워서 되는 것 아니지만 由稟受能 匪學而致
갈고 닦았으면 여기에 그치지 않았을 걸 鏃而羽之 入不此止
나는 누구인가 만년에 참된 벗이라 여겨주시니 顧余何人 晩辱知己
공이 가셨다고 그 말씀을 저버릴까 敢負一言 而謂公死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 짓고 금성 나 씨 대종회 문헌위원 번역하다.
(글 지은이 이제현은 고려 말의 명재상이다)
(본 번역 글은 고칠 부분이 너무 많아 전부를 고쳐 실었음)
9.송와선생신도비명(松窩先生神道碑銘) (13世祖)
(송와선생은 안렴사공 휘 문규, 13세 중시조이시며 탄방 도선산에 모셔있다.)
선생의 휘는 문규(文奎)요 초휘(初諱)는 극종(克綜)이며, 호(號)는 송와(松窩)다. 나씨의 세계(世系)가 나주에서 나왔는데 삼한벽상일등공신 삼중대광보국으로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에 봉작된 휘 총례(聰禮)를 시조로 하였다.
그 뒤 6대가 대광(大匡)이였고 휘 국영(國英)에 이르러서는 고려 의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도첨의(都僉議)에 이르렀고 좌명 공훈으로 금성부원군에 봉작되었다. 명종 즉위 후 벼슬을 아니 하고 나주에서 청백한 생활을 하니 세상에서 공의 참삶을 칭송하였다. 공의 5대조 효전(孝全)은 황명 태중대부 예부상서 지도성사요, 고조의 휘는 득황(得璜)이며 황명 금자광록 대부 사공상서 판호부사로 벼슬을 마치고 증조 휘 유(裕)는 용맹과 지략이 뛰어나더니 여섯 번이나 정란훈(靖亂勳)을 세워 철권(鐵券)에 이름이 오르고 인각(麟閣)에 화상이 그려졌으며 조부의 휘는 익희요 호는 경재 또는 퇴우재요 시호는 양절이며 합포를 세 번 맡아 다스리고 계림부윤을 한 번 하였으며 금성군(錦城君)에 봉작되었다. 아버지의 휘는 영걸(英傑)이요 호는 월포(月浦)이며 밀직부사상호군(密直副使上護軍)이다. 명장(名將)으로 연경(燕京)에 들어가 장사성(張士誠)의 난을 평정하고 돌아와 금성군에 봉해졌다.
어머니는 원주원씨로 정승을 지낸 충(忠)의 따님이다. 공(公)은 1312년(충성왕4)에 나주 문평 오륜동에서 출생하였고, 어려서부터 덕기(德器)와 재예(才藝)가 뛰어나, 소년기에 벌써 경서와 역사를 두루 꾀뚫고 성리학의 공부 또한 깊었다. 재주와 행실이 탁월하다 하여 지방유지의 추천을 받아 충선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문규(文奎)로 개명했다. 신사년에 명경박사(明經搏士)에 올랐고 충정왕 신묘년에 행직으로 통례원 지후를 지냈으며, 1352년(공민왕1)에 서해도 안렴사로 제수되어 지내는 곳 마다 교화를 베풀었더니 어린이와 백발노인이 그 수례에 와서 칭송하였다. 그 후 신호위 보승랑장이 되었고 계사년에 판도관이 되어 치화(治化)가 크게 행함으로 저정(朝廷) 출입증인 비어대를 하사 받았다. 갑오년에 영주지사로서 학교를 세워 유풍(儒風)을 크게 떨쳤더니 국왕을 접견할 수 있는 비표인 자금어대를 하사 받았다. 가장(家狀)을 상고해 보면 공은 문무의 재주를 겸비하고서도 자취를 감추고 재주를 숨기면서 충숙왕과 충혜왕을 폐위하고 복귀 시키는 당에 불참했으며 높은 관직을 사양하고 낮은 관직에 있었으며 내직을 사양하고 외직에 있었기에 마침내 현직에 등용되지 못하여 직위가 덕망에 걸맞지 못 하였으니 애석하기 짝이 없다.
1355년(공민왕4) 3월 1일에 별세하니 그 나이 44세요 나주 거평면 탄방 천마봉 아래 오좌로 된 언덕에 예장하였다. 배위는 협천 군부인 이 씨이니 판사 음(蔭)의 따님이요 묘는 합장하였다.
공양왕 경오년(1390)에 남방 선비들이 나주읍 서쪽 삼십 리 되는 곳, 무학봉 아래에 사우(祠宇)를 건립하였고 제봉산 아래 오륜촌에 영당(影堂)을 지어 춘추로 제향을 받은 지가 삼백여년이 되었다. 그러나 임진년 병화로 소실되었고 아직도 중건하지 못하였다.
공이 5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순(純)은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시랑인데 부모님 상을 당해 3년을 시묘살이 하고 상복을 벗은 후로는 인근에 있는 바위 위에 올라 선고를 회상하곤 했더니 세상 사람들이 그 바위를 망사암이라 하였다. 차남 인(珚)은 시중이요, 삼남신(臣)은 병조정랑이며, 사남 봉(奉)은 문과 한림이요, 오남 신(信)은 중추녹사이다. 두 딸은 하동 정영흥(鄭永興)과 창령 성수항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중호(仲浩)는 태종 때 문과로 봉례요. 광우(光佑)는 문과로 충주목사요, 명우(明佑)는 진사이며 중귀(仲貴)는 장방(長房)소생이요, 중징(仲徵)은 감찰이니 중방소생이며 욱(郁)은 진사요, 희(熙)는 삼방소생이요, 중문과 중산은 문과주서이고 중위와 함양 박팽수의 아내는 사방의 소생이다.
아! 공의 명성과 덕망이 당시에 빛났고 복음이 후손에게 내리어 한강 남쪽 천리에 자손이 곳곳에 번창하여 현관으로 입적하였고 초야에서 행적이 드러난 사람의 숫자가 천백이나 되어, 항상 길을 지나는 사람들이 어른의 유적을 가리키며 부러워하고 찬탄하니 마땅히 신도비에 새겨 영원히 밝게 보일 것이로다.
공의 후손 기종(基宗)이 문로(門老)의 명으로 나에게 명(銘)을 청하기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가장(家狀)에 의거 위와 같이 찬술하니 명문은 다음과 같다.
세상에 영원토록 전하는 것 덕행과 공훈이니
아름다운 공의 훈덕은 바른 도리로 임금을 섬겼으며,
분열을 바라 외세를 업고 되놈 조정에서 왕을 욕보여도
우뚝하게 기울지 않아 결백하고 아름다웠다네.
한직을 맴돌고 외직에 머물렀기에
대를 이은 높은 가문 직위가 덕행에 걸맞지 않았으나
기르고 쌓은 여파 길이 흘러 천 백 을 헤아리니
빛나는 후손 업적 천마봉에 어렸도다.
높은 절개 생각하니 울창한 소나무 같아
육백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묘소에 공훈을 새기나니
이 산소의 봉분은 영원히 이어 지리
계해(癸亥) 1923년 월 일
(글 지은이 홍순형은 조선말의 문신으로 예조판서 성균관대사성 숭록대부 의정부 참정을 지낸 명사이다.)
전숭록대부(前崇錄大夫) 의정부찬정 겸(議政府贊政) 당성(唐城) 홍순형(洪淳馨) 찬.
(번역 내용의 일부 자구 수정)
10.죽헌 나선생 기적비문(竹軒 羅先生 紀績碑文) (15世祖)
우리는 고려말 충절의 표본이요 동방이학의 조종이라 할 수 있는 정포은(鄭圃隱)선생등 3은과 이문회우로 도의지교하고 학행일여로 입절사의(立節死義)의 근본을 같이한 불사이군의 수절신 금성 나죽헌선생(羅竹軒先生)에 대한 행적을 여기에 밝혀두려 한다.
선생의 자는 술선(述先)이요 휘는 계종(繼從), 초휘는 계도(啓道)이며 호는 송은(松隱) 또는 죽헌(竹軒)이라 하였다.
시조는 휘 총례(聰禮)로 삼한공신 대광 금성부원군이시다. 조기 이래 규조가 대대로 빛나서 근역의 명문벌족으로 특히 의종 때 도첨의를 지낸 6세 휘 국영(國英)은 금성부원군에 봉해졌고, 사 대를 내려와 한림학사 휘 인송(仁松)은 문장과 절행이 한세상의 으뜸으로 시호가 문절(文節)이며, 문절공의 아드님 휘 순(珣)은 충열왕 때 영도첨의를 지내고 금성부원군에 봉해졌으니 바로 선생의 고조이시다.
고(考)의 휘는 직(織)이요 사제(思齊)는 그 호인데 벼슬이 선공부령에 이르렀고 비(妣)는 안동 김재댁(金在宅)의 따님으로 현숙하셨다.
선생은 충숙왕기묘(1339)년 3월 9일에 고양군 송천에서 탄생하니 첨품이 고명하고 재예가 뛰어나 6세에 소학을 암송할 수 있었고 충효와 우애를 근본으로 경전과 성리학 탐구에 정진하니 왕께서 영명(令名)을 듣고 4서6경(四書六經) 각 한질씩을 하사하였다.
선생은 15세 되던 봄 문효공 한산 이곡(李穀)의 따님과 혼례를 맺고 공민왕9년에 국자감(國子監)에 들어가 공부하고 이듬해 전시(殿試)에 장원(壯元)한 후 청현(淸顯)의 요직을 두루 거쳐 동왕23년 정순대부(正順大夫)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에 제수 되었다. 때에 왕께서 경은 선조 문절공(文節公)의 선지를 이어서 그 위열을 따르라는 뜻을 취하여 이름을 계종(繼從)이라 하사(下賜)하였다.
그러나 국운은 동년 가을 왕이 시해되고 위주가 왕위를 승습하니 환로(宦路)에 뜻을 버리고 소명에 불응하니 은율(殷栗)에 유배되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공양왕2년 귀양에서 풀려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에 다시 제수되어도 거듭 사양하고 조정의 간신들을 규탄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에 간당들은 임심년 초에 무인 최형도(崔衡道)를 시켜 선생의 별제를 방화하여 고금서적을 불태우고 또 사관 이견을 사주하여 사승에 소재된 선생의 상소문과 제현들과 문답한 기록들을 칼로 베어내니 사책이 모두 결파 되었다.
후일에 선생은 “내 서적을 잘라내고 내 집을 불태우니, 반평생 경영한 일 허사가 되었구나, 바깥세상 거품 같은 명성 아까울 것 없지만, 고향에 내려와도 굳은 마음 남은 것 다행이라네.”하고 시를 읊었다.
역사의 장은 역성혁명으로 1391년 4월에 동지 정포은의 순절에 이어 7월에 고려왕조가 망하니 이태조는 누차 선생을 소명하고 양촌 권근(權近)을 보내 새 왕조 섬기기를 간청하나 사절한 후 가솔들을 이끌고 나주 석간동에 내려와 청검한 은거생활로 죽헌거사(竹軒居士)라 하였다.
태종2년에 진사 김원이(金元履)가 찾아와 말하되 "오늘날 조정을 통하지 않는 선비는 문정이 냉락(冷落)하여 자손이 영체될까 두렵습니다." 하니 선생이 이르되 "입신양명(立身揚名)을 구하려면 이도 또한 좋은 기회이지만 선세의 훈공이 어떠하며 선조(先朝)의 은우가 어떠함을 잊었단 말인가! 자손의 흥체는 기수(氣數)에 있는 것 천명을 따름이요 어찌 사욕을 하랴 나는 능히 두 마음을 품고 이록(利祿)을 구할 수 없도다." 하였다.
여사한 충절의 의지와 청검한 절조는 당세의 많은 사람이 숭앙하는 바였으나 태종 을미(1415)년 1월 9일 77세의 천수를 누리고 기세하니 나주 동북 자산(紫山)의 언덕에 예장 모셨다.
선생은 슬하에 4남을 두니 장자 백훈(伯勳)은 유교(遺敎)에 따라 고향 송천(松川)으로 가고 차자 숙훈(叔勳)은 조몰하니 손(孫)이 우필(禹弼)이요 3남 중훈(仲勳)은 석간거사(石澗居士)라 호하고 4남 계훈(系勳)은 자산(紫山)에 거주하였다.
아! 위대하도다. 성리의 미묘함을 강하고 오륜의 실행으로 세도를 밝혔으며 벼슬을 위조(僞朝)에서 버려 오욕을 씻고 위세(危世)에 상소 올려 강어에 굴하지 않고 왕조 바뀌어도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수절 그 충의는 천추에 빛나리라.
영락16년 무술 고려종사랑 문하주서(高麗從仕郞 門下注書) 길재(吉再) 짓고
금성나씨대종회(錦城羅氏大宗會) 문헌위원 번역
1993년 3월 일 죽헌 나계종 선생 기념사업회 세움
(번역내용 일부자구 수정)
11.송재선생 행장(松齋先生行狀) (19世祖)
송재선생 나공의 휘는 세찬, 자는 비승이다. 나 씨의 관향은 금성이니 시조 휘 총례는 삼한벽상삼중대광 금성부원군이요, 그 뒤 11대 동안에 높은 관직이 줄을 이었으며, 휘 문규에 이르러 서해도 안렴사가 되어 자금어대를 하사 받았으며 문장과 방정한 품행이 세상에서 으뜸갔으니 이 분이 공의 6대조 이다. 증조의 휘는 계(繼)이니 사복시정을 증직 받았고, 조부의 휘는 은제(殷制)이니 학행으로 장성현감에 제수 받아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에 행장이 세 필의 말에도 차지 않았다하여 세상이 삼마대부라 칭하고 조정에서는 그 청백을 기록하여 좌승지를 증직하였고, 아버지의 휘는 빈(彬)이니 성균 생원으로 이조참판을 증직 받았고 일찍이 벼슬길을 버리고 후진을 가르쳤으며 대궐에 여러 차례 강력한 상소를 올려 세상에 이름이 드러났다. 어머니는 증정부인 해평 윤 씨이니 찰방 노겸의 따님이다.
홍치 무오년 5월 21일에 나주 거평 남산 마을에서 공이 출생하니 뛰어나게 총명하여 기량이 크고 넓으며, 가난했으나 독서를 즐겨 항상 새벽까지 불을 밝혀 경서와 사서를 두로 꿰뚫었음으로 문장이 아름다웠다. 가정 을유 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무자 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나주와 황주의 훈도를 역임했다. 갑오년에 성균관 학유를 거쳐 예문관 검열이 되고 병신년에 중시에 장원하여 봉교에 승진했다. 그 때는 김안로가 권세를 잡아 방자함이 날로 심하였으나 모두가 두려워서 입을 닫고 감히 어찌하지 못하는 형편이었지만, 공의 국가정책을 논하는 대책 내용에는 김안로의 군왕을 가벼이 여기는 마음을 통박하고 사슴을 말이라 우기는 간신배라는 말까지 들어있었다.
그리하여 김안로가 앙심을 품게 되고 조정을 모함 한다 무고하여 하옥 고문하니 다리가 부러지고 뼈가 으스러졌다. 공은 부서진 뼈를 주머니에 주어 담으면서 부모가 주신 몸을 버릴 수 없다 말하고, 드디어 옷을 찢어 혈서로 “위에 요순과 같은 임금이 있으나 아래에는 후직(后稷)과 설(契)과 같은 신하는 없구나, 나라 위한 정성어린 마음 백일하에 비출 뿐이다.” 하고 적어 상소하니 특별히 용서하여 고성에 위리안치 했다. 유배 중에는 먹을 것이 없어 자주 조석을 걸렀으나 개의치 않고 날마다 성현의 책을 읽으며, 가사를 지어 대궐을 바라보며 눈물지었다.
상감이 몰래 내시를 시켜 생사를 정탐 하였더니 “근사록(近思錄) 등의 서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벽에는 충, 신, 두 글자를 크게 써서 붙어 놓고 있었습니다.” 하는 보고를 받고 크게 뉘우쳤다. 무술년에 김안로가 패사하자 봉교로 다시 불러 편전에서 인대하며 어사주를 내려 후회하는 뜻을 보였다. 이 해에 다시 탁영시(擢英試)에 장원하고 이로부터 두 해 사이에 예조와 병조의 정랑과 좌랑, 홍문관의 수찬 교리 응교와 전한, 예문관 응교, 사헌부의 지평 장령 집의, 사간원 헌납, 시강원의 문학 필선과 보덕, 의정부의 검상 사인, 성균관의 사예, 그리고 사옹 사복 종부 상의 등 여려 곳의 正을 지냈다. 때로 퇴계 하서 두 선생 및 임금호 형수와 정임당 유길등 여러분과 같이 호당에서 글을 읽었으니 당대의 최고 인물로 뽑힌 분들이다.
갑진 년에 이조참의에 특진하였다가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고 관례대로 좌승지에 오른 담음 성균관 대사성으로 전직되었다. 을사년에 판결사를 거쳐 가선대부의 직급으로 승격하고 대사간에 제수 되었다. 이때는 중종과 인종 두 임금이 연이어 승하하고 명종은 어려서, 간신 윤원형 등이 고상한 말로 선동하여 착한 선비들을 함정에 빠뜨리니 재앙이 다가오는 기미를 예측할 길이 없는 시기였으나, 공은 수렴청정 하는 대비 전에 나아가서는 자못 구원하고 해명하는 말을 올렸고, 상소를 올리면서는 백인걸 유희춘 정황 등의 원통함을 변명하였으니 간당들이 미워하여 드디어 대사간직을 교체해 버렸다.
병오 년에 대사헌에 승진되어 전과 같은 내용을 거듭 상주하다가 얼마 아니 되어 파직되고 한성우윤이 되었다. 이기(李芑) 등이, 일찍이 공이 충순당(忠順堂)에서 대윤 축출논의에 입시했음으로 훈적에 기록하려 하자 공이 굳게 사양하여 따르지 않았고, 이기 등은 자기들과 뜻이 다름을 미워하여 조정에서 용납 못하도록 배척하였다. 정미 년에 한성좌윤이 되고, 그 해 여름에 성절사로 연경에 다녀와서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가 무신년에 다시 한성우윤이 되었다. 당시 조정에서 인종은 재위기간이 일 년이 넘지 않아 문소전(文昭殿)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의론을 하고 있었음으로, 공은 이 의론이 불가함을 상소하여 통박하다가 전주부윤으로 강등되었다.
전주에서 백성을 다스리는 여가에 문교를 힘써 일으키니 온 경내가 윤택하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다시 간사한 말은 거침이 없고 나라일은 날로 그릇되니 공은 근심과 분함으로 병을 얻어 신해 년 6월 14일에 별세하셨다. 부고가 대궐에 전해지자 애도하며 제사와 부의가 의례절차에 따라 행해졌다. 그해 모월 모일에 거평 송림 묘좌 언덕에 장사하고 그 후 백오십여 년 만에 호남 인사들이 그 고을에 사우를 지어 제사하였다.
부인 담양 전씨는 오른편에 부장되었는데 원종공신 세균의 따님이다. 3남 5녀를 낳으니, 장남 척은 현감이요, 차남 협은 증공조참의 이고, 삼남 열은 참봉이며, 사위는 사인 김경덕, 김천추, 부사 유몽정, 찰방 이황종, 증참의 유렴이다. 손자 덕윤 덕민과 사인 노상문, 찰방 이홍종의 처는 장남소생이고. 증공조참판 덕전 덕령 덕함은 차남소생이며. 현감 덕원, 진사 덕기, 진사 덕립, 참봉 덕종 덕부 덕심과, 군수 김충수, 주부 유수민의 처는 삼남소생이다. 유몽정의 네 아들은 형, 허, 양, 면,이요. 두 사위는 양종우, 이진이요. 이황종의 사위는 박지충이요. 유렴의 아들은 경중 신중이며, 사위는 현감 이태남, 나덕준 이오. 내외 증손과 현손은 모두 기록하지 못한다.
공의 효성은 타고난 것이어서 겨우 나이 열둘에 어버이 섬기는 도리를 알아 몸소 고기를 잡아 맛있는 음식으로 공양하였으며 부모상을 당하여서는 시묘를 살아 내용과 형식을 갖춤이 지극하였고, 종족에게 화목하고 고을과 이웃에게 믿음이 있었다. 옳고 그름의 분변이 심히 밝아 사람을 응대할 때는 화기애애하였음으로 한 번 얼굴을 바라보면 좋은 술을 마심과 같았다. 그의 문장은 심히 고상하여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음으로, 허튼 말이 없고 모두가 경전에서 나온 말들이었다.
조카를 훈계한 글을 보면 진렬(陳烈) 선생이 조용히 앉아 구심공부 하는 것과 주자가 과거준비 할 때 독서하던 방법을 들어 훈계하였는데 줄줄이 이어지는 수백마디가 모두 성인의 법규를 벗어나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을 보면 그 분이 일생을 힘써온 실상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런 까닭으로 조정에서 임금을 섬김에는 한결 같이 충과 신을 으뜸으로 하고, 일을 당하면 거리낌 없이 말하여 회피하지 아니하니, 정직한 기풍은 불의를 다스림에 두드러지고, 굳세고 큰 기상은 혹독한 형장에서도 좌절되지 않아, 국화처럼 굳은 절개를 보전하여 세상의 이름난 신하가 되었으니, 평일의 수양이 깊고 크지 아니하고서야 능히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오직 봉성군의 일 한 가지는 후세에 뒷말이 없을 수 없으나 그러나 이것 또한 현자는 모든 것을 갖추기를 바라는 역사의 뜻이 아니겠는가.
중종이 자주 문정왕후에게 이 사람은 나라의 큰일을 맡길만하다 말하며 맘에 두어 잊지 않았기 때문에 을사사화에도 문정왕후가 선왕의 유지를 생각해서 차마 중죄를 가하지 않았다는 말을 나도 들은 적이 있으니 당시 군신간의 의기투합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하겠다. 백성을 다스림에는 항상 청백하고 인자하여 가는 곳마다 떠난 후에도 백성들이 칭송하여 잊지 않았으며, 서해를 순무할 때에는 백성들이 초상을 그려 제사하고, 세상을 떠나는 날에는 전주의 모든 남녀노소가 눈물 흘리며 울부짖기를 어린아이가 어미 잃은 것처럼 하였으니, 이것은 아마도 신의를 베풀지 않아도 백성이 신임하고 슬픔을 베풀지 않아도 백성이 슬퍼하는 것이라 하겠다.
공이 저술한 시문은 거의 없어지고 다만 가정에 소장된 약간의 시편이 남아 있어 그 중에 병백부(病柏賦) 한 편이 세상에 회자되어 굴원과 송옥의 유운이 남아 있다 칭송되고 있다. 임오년에 공의 6대손 중강이 멀리 나를 찾아와, 우리 선조의 빛나는 덕행과 사업이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살아질 수 없는 일인데도, 덕행을 드러내는 글을 아직 마련하지 못 했으니 실로 후손들의 죄입니다. 원컨대 한 말씀을 얻어 후손들에게 보이고 싶다는 말을 했다.
아! 세대가 멀어 문헌으로는 고증할 길이 없고, 고루한 식견만으로 어찌 선현을 논평하여 영원히 보전하는 글을 지을 수 있겠는가. 여러 차례 사양해도 뜻을 이룰 수 없어, 당시 여러 현인들이 칭송한 바로 헤아려 보고자 한다. 지지당(知止堂) 송공 흠(宋公欽)은 군자답다 허여하고, 하서선생(河西先生)은 아름다운 덕행으로 추앙하고, 유미암(柳眉巖) 희춘(希春)은 위기를 당하여 견고함이 돌과 같다 하고, 소양곡(蘇陽谷) 세양(世讓)은 금기사항 다루기를 꺼려하지 않으니 명예와 절개가 빛났다 말했으며, 승대(承對) 하는 날은 의리가 중하고 목숨이 가벼우며, 비방이 많아도 거리낌 없이 말하는 날에 명성이 높았다는 말은 참찬 채공 세영(蔡公世英)의 시구이다. 가계와 이력은 오히려 가승이 남아있어 상고할 수 있기에 삼가 사실을 간추려 위와 같이 차례로 적어 지식과 덕행을 가춘 이가 참고할 날을 기다린다.
한수재 권상하 (寒水齋 權尙夏)짓다.
(權尙夏. 좌의정을 지낸 우암 송시열의 수제자로, 기호학파의 정통을 계승한 학자.)
(忠順堂 入對. 명종 을사년에 충순당에서 열린 어전회의에 입대한 일이며,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소윤 윤원형이 대윤 윤임을 몰아내기 위한 회의였다.)
(鳳城君 獄事. 을사년에 봉성군을 왕위에 올리려 했다는 죄목으로 윤임이 몰락하고, 이듬해인 명종2년에 양재역 벽서사건이 발생하여 봉성군도 처형된 옥사.)
(본 국역은 정묘보에 실린 원문을 기준으로 번역한 것임)
(신도비명의 번역은 한문 투가 너무 많아 어렵고, 글의 내용이나 지은이의 지명도를 생각할 때 행장이 훨씬 적합하다 생각되어 바꾸어 실었음)
12.체암 나장군 기적비문(遞菴 羅將軍 紀績碑文) (21世祖)
우리는 누구나 임진란을 모르는 이가 없고 임진란이라면 충무공과 거북선은 연상하게 되면서도 정작 거북선 제작에 큰 공로를 세운 나대용장군을 아는 이는 적으므로 여기서 장군의 사적을 밝혀두려 한다.
장군의 자는 시망(時望), 호는 체암(遞菴) 본관은 금성, 삼한공신 총례(聰禮)의 후손으로서 부친은 항(亢) 모친은 광산김씨인데 고향 나주는 고려 태조의 해군격전지였고 또 고려말 정지(鄭地)장군의 태생지니더니 그로부터 1세기반이 지나 명종11년 서기 1556년 7월 29일 장군이 그 전통의 고장에서 태어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젊어서는 학문을 닦았으나 20세에 이르러 깨달은바 있어 계연히 붓을 던지고서 무예방면으로 전환하여 28세에 무과(武科)에 올랐으나 미관말직에서 허덕이다가 왜란이 일어나기 전년 장차 국난이 있을 것을 알고 또 충무공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소식을 듣고 종제 치용(致用)과 함께 충무공을 찾아가니 때에 나이 36세였는데 충무공에게 있어서는 장군과 같이 문무기술을 겸전한 동지(同志)를 만난 것은 여간 특이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장군이 거북선 감조군관(監造軍官)으로 실질적인 기술자였음은 왕조실록과 충무전서와 나주읍지 등에 밝히 적혔고 또 전술전략에도 능숙하여 제1차 옥포승첩 때는 발포가장(鉢浦假將)으로서 적선 두 척을 깨뜨려 1등공을 세우고 제2차 사천전에서는 충무공과 함께 적탄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용전하여 장병들로 하여금 감탄케 했고 계사년 3월 여수 본영에서 송시랑 응창(應昌)의 패문을 가지고와 충무공에게 보고하는 중책을 수행하기도 했다. 계사년 윤11월 3일 복병장이 되어 적장 조승감의 부하 탐정병 망고질지(亡古叱之)를 사로잡은 일도 있거니와 이 같은 전공으로 강진현감(康津縣監)에 임명되었고 이어 금구(金溝) 능성(綾城) 고성(固城)등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정유년 2월 충무공이 모함으로 잡혀 올라와 옥에 갇히자 동지들과 함께 옥문 밖에서 억울함을 통곡하였고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충무공을 따라가 전선을 거북선으로 개장하여 명량해전의 승첩을 거두었으며 마지막 무술년 11월 노량해전에서는 충무공과 종제 치용(致用)이 순국함으로 통곡하기를 마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에 장군은 순찰사 한효순의 군관이 되어 창선(鎗船)이라 이름한 배 25척을 새로 만들었고 광해군 때에 곤양군수를 지내고 남해현감(南海縣監)이 되어서는 해추선(海鰌船)이라는 쾌속정을 고안해 내기도 했으며 그러한 공로로 경기수사(京畿水使)에 승진되었지만 전쟁 때의 탄환 상처를 다시 앓아 그 이듬해 세상을 여의니 때는 광해군 4년 서기 1612년 1월 29일 향년 57세요 나주군 문평면 마전동에 예장 모셨다.
부인(夫人)은 군수 응문(應文)의 따님 이천 서 씨요, 2남 1여를 끼치니 장남은 원(源)이요 차남은 연(淵)이요 여서는 김종도(金宗道)이며 그로부터 2세기 반이 지나 철종 십년 서기 1859년에 이르러 호남유림들이 장군의 공적을 잊지 못하여 옛날 인종 때의 곧은 선비 송제 나세찬(羅世纘)선생의 사우에 장군을 배향함으로써 숭모하는 뜻을 표했지마는 그 뒤 백여년이 지나가는 동안 이름과 행적이 숨겨지고 위에서 내린 삼지창과 청룡도마저 잃어버린 오늘이라 다시금 여러 문헌에 의하여 장군의 사적을 정확히 새로 밝히고 그것을 돌에 새겨 영원히 전하는 것이다.
장군은 실로 충무공(忠武公)의 직속부하요. 동지(同志)요. 거북선 제작의 최고 공로자이며 구국분전한 용장(勇將)이요 기술자라 장군의 위대한 역사적 공적을 찬양하고 기념하고 숭앙(崇仰)한다는 것은 우리 민족으로서 자랑스런 일이거니와 그보다는 오히려 과거를 과거로만 흘러 보내지 아니하고 역사를 오늘에 되살려 우리 몸속에 배게 함으로써 민족의 영광스런 오랜 전통을 바로 세우고 보다 더 튼튼하게 하고 빛나게 하는 데에 더 큰 뜻이 있는 것이니 누구나 여기에 이르러서는 옷깃 여미어 장군(將軍)을 추모(追慕)하고 다시 그의 구국정신을 체득하게 될 것이다.
장군몰후 363년 서기 1975년 3월 1일
후학 이은상(李殷相) 짓고, 후학 신호렬(辛鎬烈) 쓰고, 체암 나대용장군 기념사업회 세움
13. 시조 휘 총례(始祖 諱 聰禮) 사적
삼한공신 대광 금성부원군 휘 총례(聰禮)는 우리 나 씨의 시조이신 기일세조(起一世祖)이시다.
시조의 처음 이름은 종례(宗禮)로 어려서부터 자품이 웅위(雄偉)하고 영용다지(英勇多智)하여 학문과 무용이 뛰어났다. 신라말엽 나주지방의 호족으로 나주성주(羅州城主)가 되어 있을 때 후삼국의 형세가 그 미래를 가름 할 수 없을 즈음, 후백제왕 견훤(甄萱)은 남도의 곡창지대인 영산강 유역과 제화조달이 편리한 서해안 일대를 장악하고자 그 요충인 나주성(羅州城)을 수차 공격하여 왔으나 성주 나총례의 지휘 하에 군.관,민이 일체가 되어 성을 굳게 지켜 후백제의 공세를 번번이 물리쳤다.
때에 중부 태봉(泰封)에서는 후백제와의 대결에서 정기대감 왕건장군(王建將軍)을 남방경락의 선봉으로 내세워 출전시켰다.
그 무렵 나주성주 휘 총례는 단약한 진세로 호시탐탐하는 견훤을 힘겹게 견제하던 터에 제왕(帝王)의 인덕을 지닌 왕건장군의 남하를 기뻐하고 전쟁 없이 성문을 열어 환영할 뿐 아니라 상좌를 양보하고 적극 보필하여 장차 고려창업의 기틀을 마련하는 초석이 되게 하였다. 918년 왕건이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의 추대로 왕위(王位)에 오르니, 마침내 후삼국통일에 유공한 휘 총례는 강궁진 김한충 청명 등과 더불어 삼한일등공신(三韓一等功臣)에 봉해지고 혜종원년(943)에 북변방어와 이듬해 왕규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고 정종2년에는 박수경과 더불어 내란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문종8년(1054)에 이르러 삼중대광보국 금성부원군에 추증되었다. 근안컨대 고려사열전에 "대장군 나유(羅裕)는 나주인(羅州人)인데 삼한공신 대광 나총례의 10세손야(十世孫也)라 하였고, 익재 이제현(李齊賢)이 찬한 나익희(羅益禧) 묘갈문에도 모두 삼한일등공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 시조의 혁혁한 역사적 공적과 그 숭고한 얼을 기리기 위해 고려통일대전 개국실(高麗統一大殿開國室)에 배향하고 나주시 문평 무학산록(舞鶴山麓) 용트림 하는 혈처(穴處)에 단(壇)을 설(設)하여 예배하는 곳으로 삼고 경모사에 위폐를 봉안 시조이하 90위(位)와 더불어 세일제(歲一祭)로 숭선보본(崇先報本)의 추모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14. 육 세조 휘 국영(六世祖 諱國英) 사적
공은 나주인 나성군 정서(羅城君廷胥)의 아들이며 문장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세 차례 예부의 책임을 맡았고 세상에서 사랑을 받는 인물이었으며, 지위가 모든 신료의 으뜸이요 공훈이 당세에 빛났으되 청렴하고 품위 있으며 자상하고 공손하여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인품이었다.
무신들에게도 존경을 받았으므로 정중부등이 문신을 학살하는 난리를 만나, 공 또한 최유청과 서공아의 집에서 난을 당하였으되 순검들이 호위하여주어 참화를 면 할 수 있었다.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권이 바뀐 조정에서는 벼슬을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스스로 나주호장을 자원하였다. 동국사략에 실려 있다.
나주시 문평면 경모사(景慕祠)에 봉안(奉安)하다
15. 구 세조 휘 득황(九世祖 諱得璜) 사적
° 원종 원년(宋 景定9년)에 판예빈성사 나득황은 제주부사가 되다.(동국사략에 실려 있음)
° 원종 원년 경신에 제주부사 나득황은 본주방호사를 겸하다.
(주: 제주는 바다의 요충지이다. 송나라 상인과 왜인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기 때문에 특별히 방호사를 두고 득황으로 하여금 겸임케 하다. 여사제강에 실려 있다.)
° 원종 9년 무진에 사공(司空) 나득황이 졸하다.
(주: 득황은 나주인 도첨의 국영의 증손이다. 외모가 아름답고 훤칠하며 지략이 많아 국경방어에 공이 많았고 관직에 임해서는 정도를 지켜 세상의 존경을 받았으며, 호는 낙헌(樂軒)이다. 여사제강에 실려 있다.)
나주시 문평면 경모사(景慕祠)에 봉안(奉安)하다
16. 십 세조 휘 유(十世祖 諱 裕) 사적
° 원종 10년 기사에 세자 심이(후에 충렬왕이 된다) 몽고에 가는 행차에 나 유를 종관從官으로 삼다.(동국사략에 실려 있다)
° 원종 13년 임신 6월에 장군 나 유를 보내 탐라를 토벌하다.
(주: 당시에 적병이 출몰하여 노략질이 날로 심해가니 바다에 인접한 고을들이 매우 시끄러웠다. 조정에서 나 유를 파견하여 군사를 모아 토벌케 하니 유는 득황의 아들이다. 여사제강에 실리다.)
° 원종 15년 갑술에 도독사 김방경이 원나라 도원수 홀돈 등과 함께 왜국을 토벌하면서 나유와 박보에게 병마사를 맡기다. 동국사략에 실리다.)
(중간 생략 7.여사 열전 참조)
° 세조 병자년에 집현전 제학 양성지(梁誠之)가 24 가지 마땅히 시행할 사안을 상주하였다. 그 8 번째 항목이 역대의 군왕과 재상들의 제사에 관한 일이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신이 살펴본 바에 의하면, 명나라는 사직(司職)이 역대군왕과 재상들의 제사를 관장하며 소를 잡아 바치는 큰제사로 성대하게 거행하고 있습니다. 우리조정에서는 역대군왕을 그 나라의 도읍했던 곳에서 나누어 지내되, 더러는 마땅히 제사할 분이 빠지고 더러는 대신의 배향이 없기도 하니, 법도에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바라옵건대 매년봄가을에 동대문 밖에서 합동으로 제사하되, 전조선왕 단군, 후조선왕 기자, 신라시조와 태종 및 문무왕, 고구려시조와 영양왕, 백제시조, 고려태조 성종 현종 그리고 충렬왕등, 12 위, 그리고 신라의 김유신 김윤문, 고구려의 을지문덕, 백제의 흑치상지와 근래에 결정한 고려의 배향할 대신 16인중, 한희유와 나유(哈丹의 난 방어에 유공), 최영과 정지(외구 방어에 유공), 등을 배향할 것을 상주 하나이다” 이와 같이 상주하여 윤허 받았다. (문양공 눌제집에 나온다. 눌재 양성지는 조선조에서 가장 많은 정책을 입안한 신료이며, 정조가 친히 서문을 지어 문집을 발간해 준 명신이다.)
나주시 문평면 경모사(景慕祠)에 봉안(奉安)하다
17. 십 세조 휘 인송(十世祖 諱仁松) 사적
° 충렬왕 18년 임진에 한림 나인송이 졸하다.
(주: 인송은 문장과 절행으로 세상에 이름이 드러났으며, 원종이 그 이름 지은 뜻을 축하하며 유지를 내려 말하기를 “인은 만 가지 선의 근원이며, 송은 모든 초목의 으뜸이니, 경은 마땅히 이 뜻을 자손에게 전하고 나라와 함께 고락을 같이 하라.” 하고 시호를 문절로 내렸다. 여사제강에 실리다.)
나주시 문평면 경모사(景慕祠)에 봉안(奉安)하다
18. 십일 세조 휘 익희(十一世祖 諱益禧) 사적
° 충혜왕 5년 갑신 9월에 첨의정승 금성군 나익희가 졸하다. 시호를 양절이라 내리다.
익희는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혀 독서할 틈이 없었으나 유학에도 능했으며, 절개가 굳고 절의를 숭상하여 남과 소송하고 다투는 일을 치욕으로 여겼다. 일찍이 한 번 계림을 다스리고 세 번 합포를 다스렸는데 청렴하고 근면하며 자혜로워 남녁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여사제강에 실리다. 8. 상호군 묘명 참조.
나주시 문평면 경모사(景慕祠)에 봉안(奉安)하다
19. 십일 세조 휘 순(十一世祖 諱 珣) 사적
충렬왕 경진(1280) 5월에 국자감시(國子監試)에 장원하고 한림원(翰林院) 직원(直院)에 제수되어 충근한 직무 수행으로 누차 포상을 받고 승진을 거듭하여 국자감 학사(學士)를 거쳐 국학박사(國學博士)에 이르렀다. 동왕 을유(1285) 5월 시(詩)와 부(賦)로 문신(文臣)들에게 실시한 전시(殿試)에 으뜸으로 뽑히고 황패(黃牌)를 하사(下賜)받는 영광을 누렸다.
원(元)나라와 연합하여 동정(東征 : 일본정벌)을 준비할 때 삼도순문사(三道巡問使)가 되어 군량미를 조달하고 각종 무기들을 점검할 때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으므로 이에 힘입어 민심이 평안하였다.
동왕 병자년에 보문각 직학사(直學士) 겸 사관원(史館院) 수찬관(修撰官)에 이르렀고 얼마 후 첨의부(僉議府)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어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에 제수되어 정승의 반열에서 서정(庶政)쇄신에 노력하였으나 무인시대 권신(權臣)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혼세(混世)를 한탄하면서 노쇠를 핑계 삼아 치사(致仕)한 후 산림에서 은거생활을 하고 있었다.
충숙왕 무진(1328)에 다시 사림시독좌간의대부(詞林侍讀左諫議大夫)를 제수하고 사관수찬관지제고(史館修撰官知制誥)에 보하자, 공이 사은숙배하고 나아가니 왕이 매우 기뻐하였다 공은 왕의 두터운 신임과 총애를 받으면서 충성으로 보필하여 많은 사람들의 선망을 받았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생을 마치시니 춘추 69세였다. 부음이 들리자 왕이 매우 슬퍼하여 3일간 조회를 하지 아니하고 제물을 하사하며 제관을 보내 장례를 도와주고 증 영도첨의(領都僉議) 정사공신(政社功臣)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에 추봉(追封)하였다.
부인은 해주오씨(海州吳氏)로서 군부인(郡夫人)이니 이부시랑(吏部侍郞) 천상(天祥)의 따님이시다. 아들은 득방(得逢)인데 전의시(典議寺) 직장(直長)이였다.
오늘날 공의 충근한 열과 위업을 기리기 위해 경모사(景慕祠)에 배향하고 있다.
20. 십이 세조 휘 영걸(十二世祖 諱英傑) 사적
호는 월포(月浦), 성품이 강직하고 청백하며, 문장과 덕행이 당대 제일이라 당시의 외교문서 등 많은 글들이 공의 손에서 나왔다. 충숙왕 4년에 등과하여 경흥부사가 되고 변경이 시끄러운 때를 당하여 많은 공을 새웠다. 동왕 17년에 전라도 순문사가 되고, 충혜왕 후4년 계미년에 봉익대부 밀직상호군이 되었으며,
왕이 원나라에 잡혀가는 때를 당하여서는 상락군 김영돈(上洛君 金永暾)등과 함께 글을 올려 왕의 사면을 호소했지만 원나라는 오히려 왕을 연경에서 2만 리 떨어진 땅으로 유배하였다. 공민왕 갑오년에 장수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원나라 연경에 가서 장사성의 난을 토벌하고 큰 공을 세워 개선하자 왕이 친히 영접하여 잔치를 베풀고 금성군에 봉했다. 여사제강에 실려 있다.
을미년에 왕과 함께 원에 가서 신년을 하례하고 돌아와 후한 상을 받았으며, 동년 10월에 글을 올려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고 왕은 역대군왕의 필독서인 서경의 무일편(무일편)의 사경을 명하고 공으로 하여금 관장케 했다. 이를 완성하여 바치자 칭찬하여 마지않고 모든 대신들에게 반포하였다. 경자년에 졸하고 묘는 실전하여 전하지 못한다.
부인은 원주 원 씨 찬성사 충의 따님이다. 공은 남양군 홍 주, 남양후 홍언박, 문정공 성여완과 함께 도의로써 교유한 사실이 양파산장 동류록(陽坡山庄 同類錄)에 기록되어있다. 공의 문집이 있었으나 병화로 소실되었고, 다만 절구 몇 편이 남아 동국풍아에 실려 전해오고 있다.
21. 십삼 세조 휘 문규(十三世祖 諱文奎) 사적
° 공민왕 을미년 3월에 안렴사이며 자금어대를 하사받은 나문규가 졸하다.
공은 금성군 영걸의 아들이다. 박식하여 경전과 역사서의 오묘한 이치를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고 문장이 아름다우며 행실이 독실하여 당세의 선비들의 으뜸이었다. 일찍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서 정사를 처결함에 이르러서는 큰물을 터놓은 듯 시원하였으며, 관직을 맡아서는 시폐를 제거하여 나라와 백성을 이롭게 하는 일을 소임으로 여겼다. 충숙왕을 폐하고 충혜왕이 등극하는 때를 당하여서는 당파에 끼어들지 않기로 결심하고 높은 자리를 사양하고 낮은 곳에 거하며, 내직을 사양하고 외직을 희망하니 세상이 모두 부러워했다. 여사제강에 실리다. (9.신도비명 참조)
22. 십사 세조 휘 순(十四世祖 諱純) 사적 1337~1399
공(公)의 처음 이름은 위(緯)이며, 고려 충숙왕 복위 6년(1337)에 나주 문평에서 출생하였다. 공민왕 20년(1371) 문과에 급제하여 명경박사(明經博士)후 조봉랑(朝奉郞) 선공령(繕工令)을 지내시고 순(純)으로 이름을 바꿔 봉상대부군기소윤(奉常大夫軍器少尹), 예부시랑(禮部侍郞=차관)을 지냈으며, 선친의 상을 당한 후 수시로 마을 앞에 있는 암반(岩盤)에 올라 멀리 부친(父親)의 산소를 바라보며 배곡(拜哭)하기를 불피풍우(비바람 가리지 않고)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 바위를 망사암(望思岩)이라 하였는데 현재 나주시 문평면 쌍정마을에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
고려 우왕 10년(1384)엔 포은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명나라 사신으로 갔는데 당시 고려가 명나라와 불편한 관계에 있어 조정의 문무백관들이 모두 두려워서 감히 사신으로 가는 것을 꺼려하였으나 공은 포은 정몽주와 함께 청하기를 "신하로써 임금을 위한 일에 무엇을 못 하리요" 하고 부사(副使)를 자청하여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니 왕이 중책에 발탁하였다.
임신년에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고, 동년 7월에 공양왕을 호종하여 원주에 이르렀을 때 왕이 폐위되고 공양군이 되어 간성으로 이송되니, 공은 원주에 머물러 두문자정하고 수절불사(守節不仕)하였다. 조선 태조가 예의판서(禮儀判書)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망국의 신하로써 절의(節義)를 지키시다 정종 1년(1399) 슬하에 4 남을 두고 별세하시다. 1418년에 태종이 판서를 증직하다.
부인 이 씨는 중호(仲浩), 중귀(仲貴), 두 아들을 낳고, 부인 윤 씨는 광우(光佑), 명우(明佑), 두 아들을 낳았는데 공이 수성에서 관직에 계실 때 광우는 수성에 살게 되었고, 명우는 공을 따라 원주에 갔으므로 후손이 원주에 살고 있다.
경모사(景慕祠)에 배향(配享)하였으며 매년 5월에 선대조(先代祖)와 함께 모든 후손들이 모여 추모한다.
23. 십사 세조 휘 봉(十四世祖 諱奉) 사적 1349~1409
공(公)의 휘는 봉(奉)이요, 자는 천휴(天休)이며 호는 남은(南隱) 또는 호은(湖隱)이다. 고려말 충절(忠節) 한림공(翰林公)이라 이른다. 고조는 휘 유(裕=회원대장군)이며, 증조는 휘 익희(益禧=양절공)이며, 조부는 휘 영걸(英傑=금성군)이요, 아버지는 휘 문규(文奎=서해도 안렴사)와 어머니(합천이씨) 슬하에서 장형인 휘 순(純=고려시랑), 둘째 형인 휘 연(고려 문하시중), 셋째 형인 휘 신(臣=병조정랑)에 이어 1349년에 출생하였고 아우로 휘 신(信=중추부록사)이 있다.
공(公)의 성품이 화평하고 문장 탐구에 탁월했으며 또한 풍체도 우람해 신언서판(身言書判)이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고 성장했으며 지방추천으로 1372년(공민왕21)에 국자감 시험에 6위로 합격하였으며 1378년에는 문과에 급제 한 후 한림(翰林)을 역임했다. 그러나 고려말 조정이 혼탁하니 탄식(歎息) 속에 소일하다 1392년(공양왕4) 고려왕조가 멸망하고 이성계 일파의 역성혁명 왕조가 시작되자 공께서 그들에게 가로되 "나라가 망했으니 신하도 따라 없어져야 하나 나라 위해 죽지 못했으니 황폐한 곳에 숨어 사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면서 이듬해인 1393년에 가족과 함께 한주(韓州=한산) 서쪽 산성동에 은거하면서 후생들을 양성하고 틈틈이 고려 왕도를 바라보며 망국의 한을 눈물과 함께 하였더니, 옷소매가 눈물로 젖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태조(李太祖)가 수차례 소명(召命)하였으나 표면으로는 신병을 빙자했으나, 내심으로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으로 끝내 불응하다가 1409년 슬하에 욱, 희(郁, 熙) 두 아들을 두고 겸손과 검소를 유훈으로 남기고 별세하시니 후세인들이 생전의 은거처 이름을 따 남은암(南隱岩)이라 하였으며, 개성 왕씨 문중사초(王氏 門中史草)에 충.열.수절신(忠.烈.守節臣)으로 충순당(忠順堂) 죽헌공(竹軒公) 안천군 천서(安川君 天瑞)와 함께 남은공(南隱公)을 적고 있다. 묘소를 실전하였기에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에 단비(壇碑)를 세웠으며 나주시 문평면 경모사(景慕祠)에 배향하다.
24. 십오 세조 휘 흥유(十五世祖 諱興儒) 사적
고려 공민왕 때의 무신. 본관은 나주. 호는 중순당(中順堂). 휘 익희(益禧)의 현손.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하였으나, 여러 번 과거에 떨어진 뒤 향리에서 학교를 열고 후진을 기르는 데 힘썼다. 공민왕 때 중랑장으로 영전도감판관(影殿都監判官)이 되어 공사감독을 잘하여 예의총랑(禮儀摠郎)이 되었다.
또 왕명으로 목반룡(木蟠龍)을 만들어 전문(殿門)장식을 감독하였는데 그 기교가 뛰어나 칭찬을 받았고, 이어 사농소경(司農少卿)에 올랐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지도를 만들고 여러 왕조의 흥망과 국토의 변천, 연혁을 서술하여 바쳤다. 특히, 고사에 밝아 왕의 측근에서 이야기를 잘하여 총애를 받았다.
1375년(우왕 1)에 다시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가 되어 일본과 화친할 것을 진언하고 통신사를 자청하여 일본에 가서 왜구의 출몰을 금지할 것을 직접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의 정벌 이후 백 여 년 동안 국교가 끊어져 있었기 때문에 간첩으로 의심하고 구속하였다. 마침내 중 양유(良柔)의 주선으로 석방되고 고려와는 다시 국교를 맺게 되었다. 고려사에 실려 있으며, 저서로는 《중순당집 中順堂集》이 있다.
현재 경모사(景慕祠)에 배향(配享)하여 향사하고 있다.
25. 십오 세조 휘계종(十五世祖 諱繼從) 사적 1339~1415
공(公)의 휘는 계종(繼從) 초휘는 계도(啓道)이고 자는 술선(述先)이며 호는 송은(松隱) 또는 죽헌(竹軒)이라 하다.
고려 충숙왕8년(1339년) 3월 9일에 경기도 고양군 송천동에서 아버지 휘 직(織)과 어머니 안동김씨(함안군부인) 사이에 출생하시다.
공의 아버지는 충정왕 때 선대부 선공부령(善大夫 繕工副令)을 역임하였고 고조는 휘 순(珣)으로 금성부원군이시다. 5대조는 문절공 나인송(羅仁松)이시며, 8대조는 금성부원군 수겸(羅守謙)이시다.
(중간 생략, 10.기적비문 참조)
야은은 자신과 같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키며 혹독한 정치적 박해를 받으며 지병(持病)에 고통을 겪고 있는 14세 연상을 스승 죽헌 나계종(竹軒 羅繼從)님을 문병차 찾아가 월여(月餘)를 묵으면서 그의 강직한 지조를 "봉위죽헌선생(奉爲竹軒先生)"의 시(詩)를 읊으셨다. 1415년(태종15) 1월, 수(壽) 77세를 일기로 별세하시니 유학자(儒學者) 야은(野隱) 길재(吉再)선생이 추모의 글을 썼다.
나주 세지에 죽헌사(竹軒祠)와 충남 동학사 삼은각(三隱閣)에 정포은, 이목은, 길야은, 이도은, 류금은 선생과 함께 배향하였고, 문평 봉강사, 경모사, 파주 소재 고려통일대전에 배향하였다.
저서로 죽헌유집 2권은 보존되어 있으나 야사통회(野史通會) 20권은 불행이도 소실되었다.
※ 공의 죽헌유집(竹軒遺集)은 후일 한글로 번역 출판할 계획이다.
26. 십오 세조 휘광우(十五世祖 諱光佑) 사적
공(公)의 휘는 광우(光佑)이다. 시조 휘 총례(금성부원군) 로부터 15세손이며 조부는 휘 문규(文奎 = 서해도 안렴사)요 아버지는 휘 순(純 = 고려시랑)이시다. 형으로 중호(仲浩 = 통례문봉례)가 있고 둘째가 공(公)이며 아우로는 명우(明佑 = 홍문관교리)와 중귀(仲貴 = 증.한성판윤)가 있어 4형제이다.
학덕(學德)이 풍부했고, 수성(壽城 = 대구)도사(都事)와 충주목사(忠州牧使)를 역임하였는데 공의 재임 지역에서는 송사가 없어 백성들이 평안했다. 공을 수성파(壽成派) 파조(派祖로 하여 공의 후예들은 양산 대구 등 경상도 지역에 거주.)
27. 십오 세조 휘중귀(十五世祖 諱仲貴) 사적 1385~1452
공(公)의 휘는 중귀(仲貴)요 호는 송도(松都) 또는 송운(松雲)이라 하였고, 정순대부(正順大夫)요 송도공파조(松都公派祖)이다.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이신 휘 총례(聰禮)를 시조(始祖)로 그의 15세손이며 회원대장군 휘 유(懷遠大將軍 諱 裕)는 5대조이시고, 양절공, 금성군 휘 익희(良節公, 錦城君 諱 益禧)는 고조(高祖)이시며 금성군 휘 영걸(錦城君 諱 英傑)은 증조(曾祖)요. 안렴사 휘 문규(按廉使 諱 文奎)는 조부(祖父)이시며 시랑 증판서 휘 순(侍郞 贈判書 諱 純)이 공(公)의 아버지이시다. 공의 형으로 중호(仲浩), 광우(光佑), 명우(明佑) 다음 막내로 1385년(고려 우왕11)에 출생하였으며, 7세때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정몽주(鄭夢周)가 피살되고 고려왕조(高麗王祖)가 무너지자 아버지는 고려 충절로써 강경한 언행(言行)으로 정변(政變)을 탄식 하셨다. 조선 태조가 공을 회유코자 예의판서(禮儀判書)로 소환했으나 불취(不就)하면서 끊임없는 회유를 완강히 거절한 환경에서 공(公)은 고려문벌(高麗門閥)의 긍지(矜持)를 굽히지 않고 어렵게 학예(學藝)를 닦던 중 14세 때 아버지를 잃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충효, 겸손, 검소, 우애하고, 지조가 있어 행위가 투철하자 조정(朝廷)에서 이를 가상(嘉尙)히 여겨 돈영부도정(敦寧府都正)을 거쳐 정순대부(正順大夫)로 명하였으며, 선대(先代)의 공훈, 충효, 학덕을 인정하여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증직(贈職)하다.
공(公)이 1452년(문종2)에 송도에서 배위 경주이씨(配位 慶州李氏)와 아들 진사 호(進士 鎬), 자부 전주이씨(子婦 全州李氏), 손자 처광, 처휘, 경운(處光處輝, 慶雲)이 지켜본 가운데 "충효와 우애 잘 하고, 신의를 지키며 교만하지 말라" 는 유훈(遺訓)을 남기고 별세(別世)하시다.
묘(墓)는 실전하였으나 나주시 토계동 금영제(錦榮齊)에 봉안(奉安)하고 인근에 설단(設壇)하였으며, 나주시 문평면 경모사(景慕祠)에 배향(配享)하다.
출처: 금성 나 씨 대종회 | 금성나씨 문적과 사적 - Daum 카페
금성나씨 문적과 사적
※가. 띄어쓰기와 오자 탈자를 교정하고, 틀린 용어를 바로 잡았으며, 나. 내용이 중복되는 것은 가능한 한 생략토록 하고, 다. 번역내용이 현저히 잘못된 것은 고치거나 바꾸었으며, 라. 13번 이하 선조님의 사적은 역사, 족보, 지장록, 등의 기록과 합치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15세 이상으로 한정 하고, 마. 금성 나 씨 사요의 내용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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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 계비 효정왕후(孝定王后)와 남양홍씨(南陽洪氏)
1. 왕비가의 가계
(1) 왕비의 가계와 역사
남양홍씨는 당태종이 고구려에 파견한 여덟 명의 학사(學士) 중의 한 사람인 홍천하(洪天河)의 후손이라고 전한다. 홍천하는 돈황에서 태어났으며, 휘주(徽州) 사람이다. 643년 당 태종이 여덟 명의 학사를 고구려에 파견하였는데, 이 중 하나가 홍천하이다. 홍천하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도착한 곳이 당성(唐城)이다. 고려 후기의 문인인 백문보는 “홍씨는 고구려에서부터 왔다고 하는데, 그 선조는 해동으로 온 여덟 학사 중의 하나이다. 남양에 거주하면서 본관을 삼았다.”고 하였으니, 남양을 본관으로 한 내력을 알 수 있다.
남양은 지금의 경기도 수원시(水原市)와 화성군(華城郡) 일원을 포함한 지역의 옛 지명으로 고구려에 당항성(唐項城)이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는 당은군(唐恩郡)으로 고치고, 쌍부(雙阜)·정송(貞松)·안양(安陽) 등을 관할하였다. 고려시대 이후로 수원, 인천 등의 관할로 있었다.
남양홍씨는 당홍(唐洪)과 토홍(土洪)으로 구분되고 있는데, 당홍은 고려 태조를 보필하여 왕위에 추대하는 일에 공로가 있어 광익효절헌양정난홍제분용양채보예경제공신(匡翼效節獻襄定難弘濟奮庸亮采保乂經濟功臣)이 되었으며 벼슬이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가 된 홍은열(洪殷悅)을 시조로 하고 있으며, 토홍은 그보다 훨씬 뒤인 고려 고종 때 금오위별장(金吾衛別將)을 지낸 홍선행(洪先幸)을 시조로 하고 있다. 남양홍씨는 당홍계가 대부분이다. 홍은열은 홍수하의 11세손으로 알려져 있다.
남양홍씨 당홍의 세계는 홍은열을 시조로 2세는 홍동주(洪東周), 홍흔방(洪忻方)이며, 홍동주는 홍의(洪毅), 홍척(洪陟), 홍란(洪蘭), 홍칠빈(洪七彬)을 낳았다. 이 중 홍란이 파조가 되어 재신공파로 갈라졌고, 홍의의 아들 홍호(洪灝), 홍첨(洪沾), 홍복(洪澓), 지종(智宗), 원창(元暢) 중에서 홍복은 예사공파(禮史公派)의 파조가 되었다. 그리고 6세 홍후(洪厚)에서 중랑장파가 갈라지고, 13세에 이르러 홍주(洪澍)를 파조로 하는 남양군파와 홍언박(洪彦博)을 파조로 하는 문정공파 등 13개 파로 갈라져 모두 16파조로 나뉘어져 이어지고 있다.
(2) 왕비가의 주요인물과 사적
홍관(洪灌)
홍관은 자를 무당(無黨)이라 하였으며, 고려 중기의 문인이다. 남양홍씨 시조인 홍은열의 5세손으로 아버지는 중산대부 군기감사 홍덕승(洪德升)이며, 어머니는 대녕군부인(大寧郡夫人) 해주최씨이다. 효정왕후의 26대조 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1102년(숙종 7) 사관(史館)의 직사관(直史館)으로서 왕명으로 신축된 집상전(集祥殿: 왕의 정전)의 편액을 썼다. 신라의 김생(金生)의 필법을 본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회경전(會慶殿) 병풍에 『서경』의 「무일편(無逸篇)」도 썼다고 전하며, 『해동역사(海東繹史)』에는 보문각(寶文閣)·청연각(淸讌閣)·보전화루(寶殿畵樓)의 편액도 그의 글씨라 한다.
1111년(예종 6) 2월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고 이듬해는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되었다. 1113년 8월 예부상서(禮部尙書)로서 요(遼)에 정사(正使)가 되어 부사(副使)인 형부시랑(刑部侍郞) 김의원(金義元)과 함께 다녀왔다. 1114년 12월 문덕전학사(文德殿學士)가 되고 1116년 7월 청연각학사, 1118년 정월 보문각학사가 되었으며, 청연각에서 『순전(舜典)』을 시강(侍講)하였다. 예종의 명으로 이궤(李軌)·허지기(許之奇)·박승중(朴昇中)·김부일(金富佾)·윤해(尹諧) 등 학사와 함께 삼한 이래의 사적을 모아 『편년통재속편(編年通載續編)』을 찬진하였다. 1116년 2월 국자좨주(國子祭酒)로서 국자감시(國子監試)의 시관(試官)이 되어 유승단(柳升旦) 등 99인을 뽑았고, 1123년(인종 1)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 임유문(林有文)과 함께 진사를 취하여 변순부(卞純夫) 등 30인을 급제시켰다.
1126년(인종 4) 수사공상서좌복야(守司空尙書左僕射)가 되었는데 이자겸(李資謙)의 난을 당하여 도성(都城)에서 직숙(直宿)하다가 변고를 듣고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다 하였는데 내 어찌 스스로 편안히 있겠는가!”라고 하고 서화문(西華門)으로 가서 문을 두드리고 들여 놓아 주기를 청하였더니 안에서 줄을 넘겨 끌어올려 갔다. 이리하여 궁으로 들어가서 왕의 곁에 있게 되었으나 궁궐에 불이 번지고 이자겸이 왕을 협박하여 연덕궁(延德宮)으로 나갈 때 홍관은 늙고 병든 몸이었으므로 걸어갈 수 없었다. 뒤떨어져서 서화문 밖에 다다랐을 때 척준경(拓俊京)에게 살해당하였다.
난리가 평정되자 그의 아들과 사위에게 작(爵) 1급(級)을 주었다. 홍관에게는 충절로 죽었다는 이유로 그에게 추성보국공신삼중대광개부의동삼사수태위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판예부사상주국(推誠報國功臣三重大匡開府儀同三司守太尉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禮部事上柱國)을 추증하였으며, 충평(忠平)이란 시호를 주었다.
○ 洪灌字無黨唐城郡人 登第歷御史中丞文德寶文二學士睿宗嘗覽編年通載命灌撰集三韓以來事跡以進又與李軌許之奇朴昇中金富脩尹諧等論辨陰陽書 仁宗朝拜守司空尙書左僕射 李資謙之亂灌直宿都省聞變歎曰 主辱臣死吾可自安 詣西華門叩扉請入自內縋上之遂入侍王側及宮闕連燒資謙逼王出御延德宮灌老病不能步在後至西華門外爲拓俊京所害 亂定賜子壻爵一級 灌力學善書效新羅金生筆法後以死節贈推誠報國功臣三重大匡開府儀同三司守太尉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禮部事上柱國謚忠平.
『고려사』 제121권, 「열전」 제34, 〈충의〉
홍규(洪奎)
홍규는 1242년(고종 29)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문계(文系), 호는 수재(壽齋)이다. 인종 때 추성보국공신(推誠報國功臣)에 봉해진 홍관(洪灌)의 5세손으로,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홍진(洪縉)의 아들이며, 부인은 광주김씨(光州金氏)로 참지정사(參知政事) 연(練)의 딸이다. 효정왕후의 21대조이다.
원종 때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으며, 매부인 임유무(林惟茂)의 집정기에는 송송례(宋松禮)와 함께 자문역할을 하였다. 1270년(원종 11) 원나라에 있던 왕이 귀환할 때 임유무가 왕을 배척하고 항전태세를 갖추자, 왕의 밀령을 받아 송송례 등과 함께 삼별초(三別抄)를 동원하여 권신 임유무를 죽였다. 이어 세자(충렬왕)를 수종하여 원경(元京)에 갔는데 원제(元帝)의 명으로 고려 1품직에 올랐으며, 원의 좌부승선(左副丞宣)의 직을 받았다. 귀국해서는 국정의 문란을 혐오하여 사직하였다가 다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다. 또 사퇴하니 이때 40세가 못 되었다.
뒤에 충렬왕과 공주가 양가(良家)의 여자를 징발하여 원나라에 보낼 때, 딸이 그 대상이 되자 이를 기피한 죄로 해도에 귀양갔다. 결국 두 딸이 모두 원나라에 뽑혀가고 가산이 적몰되었는데, 중찬(中贊) 김방경(金方慶)과 그의 종형 홍자번(洪子蕃) 등이 전일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사실로 면죄를 간청하여 가산이 반환되고 곧 풀려나, 이듬해 첨의시랑찬성사 판전리사사(僉議侍郞贊成事判前理司事)로 치사하였다.
뒤에 중찬을 더하고 이어서 판삼사사 수사도 영경령궁사(判三司事守司徒領景靈宮事)가 되었다. 충선왕이 즉위하자 익성군(益城君)에 봉해지고, 또 첨의정승 익성군 지익성부사(僉議政丞益城君知益城府事)에 올랐다.
1316년 추성진력안정공신(推誠陳力安定功臣)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 상의첨의도감사(商議僉議都監事)에 이르러 죽었다. 시호는 광정(匡定)이다. 아들 중대광 판삼사사 홍융(洪戎) 외에 5녀를 두었는데 그 중 3녀 순화원비(順和院妃)는 충선왕비(忠宣王妃)가 되었고, 5녀 명덕왕후(明德王后)는 충숙왕비(忠肅王妃)가 되었다. 명덕왕후는 충혜왕(忠惠王)과 공민왕(恭愍王)의 어머니이다.
○洪奎初名文系南陽人父縉同知樞密院事奎性恬淡寡欲倜儻不覊 元宗朝拜御史中丞林衍死子惟茂繼執權奎惟茂姊夫也惟茂每事議於奎及宋松禮奎松禮面從心常憤惋王還自元惟茂欲拒之中外洶洶王遣李汾成密諭奎曰 卿累葉衣冠當揆義度勢以利社稷無忝祖父 奎再拜謂汾成曰 明日待我府門外 卽與松禮謀集三別抄諭以大義擒惟茂斬于市遂謁王行宮從世子如元帝賜錦袍鞍馬以旌其功令授本國一品職 於是拜左副承宣見國事日非同僚又阿意苟容恥與並列辭免陞樞密院副使又辭不就時年未四十. 忠烈與公主選良家女將獻帝奎女亦在選中賂權貴未得免謂韓謝奇曰 吾欲剪女髮如何 謝奇曰 恐禍及公 奎不聽遂剪 公主聞之大怒囚奎酷刑籍其家又囚其女訊之女曰 我自剪父實不知 公主令捽地以鐵鞭亂箠身無完肌終不伏 宰相言 奎有大功於國不可以微罪置重典 中贊金方慶亦扶病請之不聽流海島 未幾洪子藩力請命還家産 然怒未解以其女賜元使阿古大踰年召還加僉議侍郞贊成事判典理司事致仕王賜敎曰 賊臣林衍操權柄動搖王室旋被天誅其子惟茂襲權構亂 朕自上朝奉父王與官軍到鴨綠先勑百官出迎舊都惟茂結黨養士規拒王師 卿奮忠義不顧死生與宋松禮金之氐剪除逆黨易如反掌社稷再定實萬世帶礪之功也 父王擢任喉舌又置帷幄卿皆固辭屛居田墅二十餘年朕懷舊績命有司圖形壁上賜以鐵券仍給田民然功大賞微常以慊然授卿判事卿請老彌切姑許懸車今又請避祿位予不敢不勉從 且循上國賞功臣故事雖有大犯當悉原免宥及後世子孫 後加中贊致仕尋判三司事守司徒領景靈宮事 忠宣初封益城君又加僉議政丞益城君知益城府事 忠肅三年 以推誠陳力定安功臣南陽府院君商議僉議都監事卒謚匡定 子戎女一卽明德太后.
『고려사』 제106권, 「열전」 제19.
홍융(洪戎)
홍융은 고려 충숙왕 때의 문신으로 호는 낙헌(樂軒)이다. 첨의중찬(僉議中贊) 홍규(洪奎)의 아들이다. 효정왕후의 20대조이다.
1316년(충숙왕 3) 삼사사(三司使)가 되어 왕이 사냥을 즐기므로 자주 수행하였다. 밀직 나유(羅裕)의 딸과 혼인하여 세 아들을 낳고, 만호 황원길(黃元吉)의 딸과 재혼하였으나 자색이 뛰어나 항상 방안에 두고 친척이라도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충혜왕은 홍규의 딸 명덕태후(明德太后)의 소생이므로 홍융에게는 조카가 되는데, 홍융이 죽은 뒤 내수(內豎) 최화상(崔和尙)이 황씨가 절색이라고 칭찬하자 충혜왕이 밤중에 그 집에 가서 사음(私淫)하고 금은기채백(金銀器綵帛) 등을 주었다 한다.
홍융이 처음에 밀직 나유(羅裕)의 딸과 결혼하여 홍주(澍), 홍언박(彦博), 홍언유(彦猷)의 세 아들을 낳았으며 황씨는 두 아들을 낳았는데 하나는 홍언수(彦脩)이고 하나는 그 이름이 역사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 戎忠肅時拜三司使繼室以萬戶黃元吉之女有姿色戎常閉閨房雖親戚不許相見戎於忠惠爲舅戎卒內竪崔和尙譽黃氏美忠惠夜至其家私焉賜金銀器綵帛紵布米豆黃氏亦邀王宴其家 王餌熱藥所幸婦人多淋疾黃氏亦得是疾王命醫僧福山治之 戎先娵密直羅裕之女生三子澍彦博彦猷黃氏生二子一彦脩一史失其名 澍官至僉議商議三司右使南陽君忠惠後三年 卒日沈醉不以産業名利介意 彦博自有傳 彦猷重大匡南陽君 彦脩檢校叅知門下府事.
『고려사』 제106권, 「열전」 제19.
홍징(洪徵)
홍징은 초명이 사조(師祖)였으며, 삼중대광 첨의상의삼사좌사 남양군 홍주(洪澍)의 아들이다. 부인은 곡성군부인 서원염씨로 당시의 권신 염흥방(廉興邦)의 매제이다. 효정왕후의 19대조이다.
1377년(우왕 3) 서해도 각지를 휩쓰는 왜구를 원수 양백익(梁伯益)이 막아내지 못하자, 밀직부사로서 이성계(李成桂)·임견미(林堅味)·변안열(邊安烈) 등과 함께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출전하였으며, 뒤에 당산군(唐山君)에 봉해졌다.
1384년 북방에 변보(邊報)가 있자 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동북면에 파견되어 사태를 정탐하였고, 이듬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동북면부원수가 되어 원수 심덕부(沈德符)와 함께 홍원 등지에서 왜구와 싸웠다.
1387년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서 한양부에 파견되어 중흥산성(中興山城)의 형세를 살피기도 하였으나, 1388년(우왕 14) 권세를 누리던 염흥방·임견미 등이 처형당하자 염흥방의 족당이라는 이유로 그들과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홍경손(洪敬孫)
홍경손은 1409년(태종 9) 7월에 태어났으며, 자는 길보(吉甫), 호는 우국재(友菊齋)이다. 아버지는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 홍지(洪智)이며, 어머니는 고려 왕족인 수연대군(壽延大君) 왕규(王珪)의 딸이다. 효정왕후의 15대조이다.
1435년(세종 17) 사마시에 합격하고 1439년 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에 보임되고, 이후 승문원의 저작·박사를 역임하였다. 1443년 남부령(南部令)을 거쳐 교리·감찰 등을 지냈다. 1445년 금구현령으로 나갔다가 1450년(문종 즉위) 삼군진무겸승문원교리(三軍鎭撫兼承文院校理), 1452년(단종 즉위) 경상도도사를 거쳐 1453년 형조정랑이 되어 악공(樂工) 독두이(禿豆伊)의 강도사건을 가벼이 다루었다고 추국되었으나 용서받았다. 1455년(세조 1) 성균관사예가 되고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수원부사로 나갔다가 1461년 장령·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1472년(성종 3) 첨지중추부사 겸 동지성균관사에 발탁되고, 1478년 “오랫동안 성균관에 거하였으나 성취한 바가 없다.”는 비난을 받고 사직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인물이 출중하고 문학이 뛰어나 중용하자는 논의도 있었으나 왕씨의 외손이므로 용납되지 못하고, 한직(閑職)과 무직(武職)으로 일관하다가 1481년(성종 12) 8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충음시고(蟲吟詩稿)』, 『우국재집』이 있다.
홍계정(洪係貞)
홍계정은 1471년(성종 2) 12월 14일 태어났으며, 자는 숙간(叔幹)이다. 아버지는 봉상시부정(奉常寺副正) 홍윤덕(洪潤德)이며, 어머니는 신송주(申松舟)의 딸이다. 효정왕후의 13대조이다.
1498년(연산군 4) 사마시에 합격한 뒤 성균관에 다니면서 명성을 떨치다가, 1513년(중종 8)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승문원의 부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 등 한림과 사관직을 두루 역임하다가 드디어 예문관대교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1514년(중종 9) 12월 13일 44세로 죽었으므로 그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말았다. 후에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祖考通仕郞。藝文館待敎兼春秋館記事官。贈資憲大夫, 吏曹判書兼知經筵成均館春秋館義禁府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洪公行狀。〉
先祖考諱係貞。字叔幹。洪氏係南陽。其先佐麗太祖。爲經濟功臣三重大匡太師者曰悅。十一世而匡定公奎。當元宗朝。誅逆賊林惟茂。而迎乘輿。錄安社功。圖形于壁。終麗朝無世不顯。入本朝。司宰監直長智。卽曾祖。祖諱敬孫。以能詩名。官僉知中樞兼同知成均館事。考諱閏德。奉常寺副正。贈吏曹參議。妣靑松府使申松舟女。乃高靈大族。正德辛卯十二月十四日生公。受庭訓大有進。戊午。中司馬。出入泮宮。名譽藹蔚。累擧而屈。心不屈。讀書三十年。不自苦。外家事而不顧。至癸酉。捷文科。補權知承文院副正字。明年。拜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旋陞待敎。未幾卒。時甲戌十二月十三日。年四十四才。而其進晩進。而其逝遽。人惜之。當未第。有族弟贅宰相家。謂公曰。吾兄抱才而屈。年衰家且貧。吾將白婦翁官之。兄其肯不。公艴然曰。吾豈甘於人之官之者歟。娶彦陽金氏。麗朝名相就礪之後。同福縣監期壽之女。生二男一女。長曰某。以文章剛直大有聲。卒官黃海道觀察使。贈議政府領議政。季曰春年。江原道觀察使。女壻申汝忱。爲尙書院判官。議政生男三女二。男天民。司諫院大司諫。逸民。平康縣監。聖民則吾。爲判中樞府事。女長適燕岐縣監邊愷。季爲幼學宋尙仁妻。江原觀察生一男。曰挺民。側室亦有男二。祖考之逝。諸孤幼。二十九年而吾父按西海。朝廷贈我祖考嘉善禮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事, 藝文館提學。越四十九年。以不肖孫聖民忝崇班。又贈資憲吏曹判書兼知經筵, 成均館, 春秋館, 義禁府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旣沒而陞秩再。子若孫貂蟬相望。抑我祖欨躬燾後。責報於天而得之者歟。聖民後祖考二十三年而生。吾生久吾父之逝亦久。遹追旣往。邈不可悉。旁取傳聞。且見羹墻。骨酸意短。掩泣以形之。小延其跡。有揭于後云。
『拙翁集』 卷9, 「慕遠錄」
홍춘경(洪春卿)
홍춘경은 1497년(연산군 3) 11월 6일 태어났으며, 자는 명중(明仲), 호는 석벽(石壁)이다. 대교 홍계정(洪係貞)의 아들이다. 효정왕후의 12대조이다.
1522년(중종 17) 사마를 거쳐, 152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저작·정자를 지내고, 1536년 문과중시에 장원하여 사성·보덕·집의를 거쳐 예조참의에 올랐다. 1541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좌승지·한성부우윤·이조참의를 지내고, 1545년(인종 1) 중종의 지문(誌文)을 짓기도 하였다.
1548년(명종 3) 3월 7일 세상을 떠났다. 후에 보조공신(補祚功臣) 의정부영의정 남녕부원군(南寧府院君)에 증직되었다.
성품이 강직하여 권세에 굽히지 않았고, 또한 권세가의 집을 찾은 일이 없었다 한다. 글씨에 뛰어나 김생체(金生體)에 능하였다.
〈王考贈領議政南寧府院君府君墓碣〉
公諱春卿。字明仲。號石壁。南陽人。麗祖功臣大師悅之後。曾祖諱敬孫。守同知成均館事。祖諱閏德。奉常寺副正。考諱係貞。藝文館待敎。妣貞夫人彥陽金氏。以弘治丁巳生。中壬午司馬。登戊子文科。魁丙申重試。官止觀察使。得年五十二。歷職弘文館則自正字,修撰至應敎。侍講院則自司書文學至輔德。承政院則自注書至都承旨。禮兵曹。俱以佐郞至參議。諫院則司諫憲府則執義。政府曹則檢詳。工,吏曹則參議。又湖堂賜暇。藝文應敎,佐儐詔使。是文華極選。公皆膺焉。而龔翰林用卿。大加稱賞。一時榮之。公性孝友剛方。淸羸若不勝衣。見義輒奮不顧。屢厄於權奸。幸而得濟。爲文章。不蹈近轍。高古拔俗。非三代兩漢之書。未嘗讀。筆法遒勁。前娶李氏。固城君孟友之女。後娶金氏。學生演之女。男三女二。皆李氏出也。長曰天民。都承旨。次逸民。燕岐縣監。季聖民。大提學益城君。女長適縣監邊愷。次適學生宋尙仁。承旨男。曰瑞龍。金山郡守。曰瑞鳳。禮曹判書。女適學生南格。燕岐男。曰永弼。進士。曰永禧,永壽。學生。女長適忠義衛朴德男。次適忠義衛李澄。側室有二男。永順。生員。永孚。郡守。益城男。曰瑞翼。參議。女適參判金時獻。側室有一男。瑞翰。進士。瑞龍有一子。命顯。別提。瑞鳳有一子。命一。進士。永弼有二子。命元。觀察使。命亨。承旨。永禧有三子。長曰命達。餘幼。瑞翼有二子。命耇。承旨。命夏。生員。公之議政。以益城之再策勳。官一品。推恩有是贈。夫人之貞敬。亦視公爵焉。
『鶴谷集』 卷8, 「墓碣銘」
홍처후(洪處厚)
홍처후는 1599년(선조 32) 11월 10일 태어났으며, 자는 덕재(德載), 호는 성암(醒菴)이다. 경기도관찰사 홍명원(洪命元)의 아들이며, 효정왕후의 8대조이다.
1616년(광해군 8) 진사시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참봉·세자익위사세마·의금부도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29년(인조 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이 된 뒤 승문원부정자 등을 거쳐, 1633년 정언이 되어 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와 상소하여 화친을 주장하는 최명길(崔鳴吉)을 탄핵하였다가 제천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652년(효종 3) 수찬, 이듬해 교리, 1655년 의주부윤, 1659년(현종 즉위) 경기도관찰사, 1661년 호조참의, 다음해 동부승지를 거쳐 병조의 참지·참의를 지내고, 1665년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우승지를 거쳐 1669년 함경도관찰사, 1673년 경기도관찰사·공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673년(현종 14) 8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효종의 특별한 신임을 받았으며, 후일 영의정 에 증직되고, 시호를 충장(忠莊)이라 하였다.
〈京畿監司洪公神道碑銘 幷序〉
醒菴洪公。余嘗接其言貌。知其渾厚莊重。可大受人也。及聞市南兪公棨評論一世人物。謂公如洪鐘之音。不可以徵羽論。意謂斯可以一言蔽之矣。及聞公沒。甚恨世之不能盡其用也。今因公遺胤獲見公狀文。益知市南之言不誣也。洪氏自麗朝大師悅。世有大官。本朝敬孫以能詩名。高祖春卿觀察使。曾祖逸 民縣監。祖永弼進士。是生公之考諱命元。實爲宣廟朝名臣。官止京畿觀察使。贈議政府贊成。妣尹氏。僉樞民俊之女。甚有壼彝。有五子。公其長也。諱處厚。字德載。自幼沈毅有度。笑語不苟。先進稱以國器。芳年隨侍贊成公任所。目不近佳冶。鄭大憲賜湖賢其女擇對。公在其甥館。屈首受學。藝學日進。十八成進士。廿三坐一字眚。失謁聖第。仁廟乙丑去贊成公喪。卽除爲齋郞。又爲洗馬,別坐,金吾郞,別檢等職。多不就。己巳。捷庭試丙科。選入槐院。嘗攝戴史筆。有一二宰臣論事上前。語多重複。且欠倫脊。公書不 住筆。文暢而序。蓋他人所不能也。選爲藝文館檢閱。遭承重喪旣闋。自侍講院說書。復入翰苑。爲待敎,奉敎。陞司書。以嫌辭。歷數官兼三字銜。爲司諫院正言。擧劾不避宗戚。累爲宮僚。隨事啓迪。多所薰陶。時朝夕將入銓郞。公爲親養求外曰。豈可以榮次。易一日之養。遂爲康津縣監。有內奴豪橫杖殺之。因棄歸。事將不測。上特原之。爲兵曹佐郞。事有難決。長官輒以委公。公談笑剖決。長官請勿他遷。故十閱月後。始移正言。時虜人僭帝改國號。主和者請於國書。書其新號。且謂機密事。不可使承旨史官與聞。公奮筆爭 之曰。我旣稱其僭號。則是我與其僭也。且君相謀猷。皆出於光明正大。則有何所隱諱。而乃欲閉藏掩匿。必欲行其胸臆乎。雖古之大奸慝所爲。亦不過此。因請重究其人。上震怒。批辭極嚴。公又引避而無所撓屈。上愈怒。翌日黜補堤川縣監。虜至。公下令士民無得輕動。且選壯勇爲備禦計。時虜騎充斥。列邑無不奔潰。而堤獨晏然。洪公茂績督運至縣。嘉歎不已。洪公又以運餉爲憂。公招集人民。以誠開諭。且厚其餱糧。民歡趨之卽輸累百斛穀於使營。時避亂士夫取食於公者。動以百數。公盡心存恤。全活甚衆。有 無賴子假胡服劫略者。公收捕斬之。亂已。曩時持論諸臣被罪者十人。公亦在其中。被門黜屛居湖西。未幾蒙宥。不敢入京。轉入深峽。卜居三山之五臺下。後四年。始有敍命。銓曹注擬。大臣尉薦者數矣。又三年而後。始除兵曹正郞。判書李公時白白上言。洪某識慮過人。曉達兵家。以故久不他遷。求外得醴泉郡守。未幾治績著聞。考績常爲一道最。上特賜表裏以褒之。有修隙者因事構誣。坐謫淸安縣。翌年蒙赦。優游鄕里者。又七年。諸公爲理冤狀。始拜弘文館修撰。至校理。間爲侍講院弼善。出入兩筵。論辨義 理。甚得講官體。歷應敎,執義。遂陞拜義州府尹。民俗皆茅屋。數有火患。公用唐韋丹故事以導民。自是民多瓦屋。而邑絶火憂。公前後爲邑。不爲姑息近名。而必爲久遠計者。皆類此。入爲承旨。旋拜慶尙監司。民有骨肉訟者。必先治其罪然後聽其曲直。俗爲一變。歲値凶歉。盡心區畫。民無捐瘠。聞大夫人有疾。乞歸侍蒙允。以臺臣言。未能卽歸。憂吉。由禮曹參議。出爲廣州府尹。朝廷追記嶺績。復以爲監司。里閭相慶。御史褒其荒政。以故三歲不得遞。復入爲戶曹參議。與長官協議。務塞奸竇。宿弊如洗。由是調度告裕。遞復 拜。又歷數官。出爲全羅咸鏡兩道監司。卒觀察畿輔則癸丑四月也。其間周流出入者十餘官。而皆稱其職。一爲行人。往來燕山。公久有退休計。適値山陵役。不敢辭畿輔命。以大臣言。遞拜西樞。其八月。年七十五。而卒于其二十八日。訃聞。祭賻如儀。公雖資性寬厚。而大節偉然雖當倉卒。言色愈定。人未嘗見其有窘束也。贊成公疾㞃。割指進血。以大夫人惸然在疚。未嘗須臾離側。處弟妹間。恩義冞篤。公旣內行純茂。而推以事君。務以忠愛存心。恥於沽直。經筵諷議。不專守章句之說。誠意感動。累蒙霽威。孝宗 大王知公最深。常引置近密。然棘棘不阿。與人寡合。以故常在用舍間。莅郡奠藩。事出名上。其德惠所及。愈遲而愈久。故民受賜者。或不庸焉。又所在專意於興學化民。其氷檗之節。畏人之知。類非窶夫俗人之所窺也。蓋公在家在邦。不但無怨。小大咸宜。而惟公質厚量宏。濟以謙德不效人切切求名。故終無赫赫聲。此尤其所以爲大而世不能知也。鄭夫人貞靜莊重。克齊公德。六親無不稱頌。世之富貴驕惰。卒亡其家者。皆夫人之罪人也。先公沒二十七日。而享年後公三歲。同葬積城庚龍洞酉坐之原。去先兆五里而 近。四男受河,受湸,受渙,受瀗。伯季皆文科。仲叔皆進士。伯官止掌令。與叔皆先沒。五女適任渻,韓聖佑,朴斗望,金儁相,李山輝。韓與金皆文科。朴與李皆蔭仕。伯房男禹錫。女適尹廷龍。仲房男禹瑞。女適安相一。次未行。叔房男禹圭。二女適黃霨,崔淑。曰禹略,禹沱。其側出也。季房三男一女。長禹齊。餘皆幼。內外曾玄摠六十餘人。公文筆亦絶異。而與公所矜細行。皆爲大者所掩焉。其理然矣。余旣敍其始末而歎曰。市南眞知公哉。如使公叔文子觀乎國朝之九原。則必知其所與歸矣。其不盡其用。實關時運。豈人力所與哉。 銘曰。穎銳便儇。世所賢兮。身榮位躋。公不然兮。刻勵皎潔。喜切切兮。事集名騰。公不屑兮。氣厚力完。居之安兮。嶽峙而亘。撼之難兮。事親以誠。恥孝名兮。接人克忠。澹無情兮。出以事君。値群分兮。秉心平正。不吐呑兮。丙子之歲。虜僭帝兮。人皆怯怯。垣衍計兮。公入文字。澹菴義兮。敗實和誤。義曷故兮。罪則歸公。是謂倒兮。嚴霜七年。心浩然兮。澗有淸泚。山有田兮。而我深哀。極忡忡兮。聖主思公。期棟隆兮。周流宂秩。或近密兮。觀風二南。于北臬兮。畿父之政。愈肅靖兮。近親近 臣。麤氣屛兮。薄違訖功。可登庸兮。斂而藏之。此幽宮兮。牲碑雖豐。頌難容兮。公不喜諛。我詞公兮。
『宋子大全』 卷167, 「碑」
〈觀察使洪公墓表〉
公諱處厚。字德載。號醒菴。南陽人。高麗太師悅之後。高祖春卿。觀察使贈議政。曾祖逸民。縣監贈參贊。祖永弼。進士贈參判。考命元。京畿觀察使贈贊成。妣坡平尹氏。僉樞民俊女。以萬曆己亥十一月十日生公。丙辰進士。己巳文科。內則由槐院,翰苑。歷春坊,玉堂,兩司,承旨,戶禮兵刑曹參議,判決事,工曹參判。外則歷堤川,康津,醴泉,義州,廣州,水原,安邊七邑宰。嶺南,湖南,關北,京畿觀察。而嶺則再按。癸丑八月二十八日卒。壽七十五。配贈貞敬夫人光州鄭氏。判書賜湖女。先公二十六日卒。合窆于積城治南庚龍洞坐酉之原。有四男。受河。掌令。受湸。府使。受渙。進士。受瀗。行吏曹判書。女壻士人任渻,參判韓聖佑,司議朴斗望,參議金儁相,郡守李山輝。掌令男。禹錫。府使男。禹瑞。校理。進士男。禹圭。縣令。判書男。禹齊。都事。禹諧,禹集。韓男配義。正郞。配道,配文。朴男文興,道興。金男。廷煥,廷爀。李男。涉,涵縣監。溭,潝。禹錫繼子。啓迪。校理。禹圭男。啓迪,啓道。禹瑞男。啓欽,啓鉉。禹齊男。啓九。禹諧男。啓百。禹集一男。內外曾玄摠百餘人。後以判書公貴。贈公贊成。公重厚有大節。初入臺。以斥和見黜。累年而起廢。居內持正不苟合。從外著庸。卒未究厥施。以遺慶于後。詩曰。豈弟君子。神所勞矣。不其信歟。判書公礱石將表墓而未果。諸孤就加鐫刻以豎焉。尤齋宋公作神道之銘。紀述備矣。玆撮其大略。以識于表陰。
『睡谷先生集』 卷12, 「墓表」
홍계적(洪啓迪)
홍계적은 1680년(숙종 6) 10월 20일 태어났으며, 자는 혜백(惠伯), 호는 수허재(守虛齋)이다. 이조참판 홍우석(洪禹錫)의 아들이다. 생부는 홍우규(洪禹圭)로 홍우석과는 사촌간이다. 효정왕후의 5대조이다.
1702년(숙종 28) 진사가 되고 이듬해 성균관유생 180인과 함께 박세당(朴世堂)을 성토하는 소(疏)를 올렸다. 같은해 이경석(李景奭)의 손자인 하성(廈成)으로부터 소척(疏斥)을 받았고, 6월 태학생으로서 박세당의 『사변록(思辨錄)』과 이경석의 비문을 수입한 뒤 태워 없애도록 상소하여 시행시켰다.
170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곧이어 검열이 되었다. 1712년 정언이 되고 이듬해 윤세수(尹世綏)의 소를 소척하였고, 같은 해 궁중의 주악·유희가 지나친 것에 대하여 상소하여 숙종으로부터 호피(虎皮)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이어 수찬이 된 뒤, 부교리가 되었다. 1715년 사서를 거쳐, 이어 헌납이 되었다.
1716년 태인현감이 되고, 같은 해 다시 서용되어 이조좌랑이 된 뒤 윤선거(尹宣擧)의 문집에 대하여 비판하고 상소하였으며, 곧 이조정랑이 되었다. 1717년 전라좌도어사가 되어 무능한 지방관리들을 파직시키게 하였다. 같은 해 응교가 되고, 세자(뒤의 경종)에게 거경진학지요(居敬進學之要)를 가르쳤고, 1718년 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경상감사가 되었으나 전날 세수부실(稅收不實)의 문책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대사성으로 복직하고, 곧 부제학이 되었다. 곧 이어 이조참의가 되고, 1720년 호조참의가 되었다가 1721년(경종 1) 대사헌이 되어 노론의 선봉으로 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하여 소론과 대립하였다. 같은해 강화유수가 되고, 경종의 세제대리청정 교시를 철회하도록 하는 조신회의에 승지로 참석하였다. 같은 해 부제학이 되어 이정신(李正臣)의 소를 소척하였는데, 12월에 이 소척이 불측지심(不測之心)에서 나왔다고 하여 흑산도에 안치되었고, 이듬해 노론 4대신의 당인이라는 죄목으로 서울로 압송되어 심문과 형벌을 받도록 윤성지(尹聖持)에 의하여 위협받고 갇히게 되었다.
1722년(경종 2) 최석항(崔錫恒)에 의하여 중형에 처하도록 주청되어 10월 20일 옥중에서 죽었다. 저서로는 『수허재유고』가 있다. 영조의 즉위 후 정호(鄭澔)의 주청으로 신원되었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의간(毅簡)으로, 뒤에 충간(忠簡)으로 개시되었다.
〈大司憲洪公神道碑〉
庚子肅宗大王薨。嗣王有疾無嗣。國勢岌嶪。洪公啓迪素慷慨有大節。嘗謂其弟啓道曰。方今國無儲貳。而羣下各自爲心。恐他日有國家者。非吾先王之骨肉也。吾與其生而無補於時。無若死而爲國。蓋有疏請建儲之意。而正言李廷熽之疏已上矣。公時爲大司憲。與諸宰中夜入對。承慈殿諺敎於上前。冊今上爲王世弟。賊臣柳鳳輝首進一疏。斥建儲諸臣以爲無人臣禮。公同諸公請設鞫正法。後爲都承旨。自代理命下後。一番人章奏交於公車。駭機叵測。人人無不惴恐。而公獨當虓怒决裂之勢。處之各得其當。嶷然有山嶽之重。朝著恃公以爲安。而羣凶切齒。宦侍側目。必欲先去公而後已。公之大禍實自此始。君子哀之。公南陽人。字惠伯。洪出自麗太師殷悅。代有聞人。入本朝。有友菊齋諱敬孫,石壁諱春卿。至諱命元號海峰。諱處厚號醒菴。兩世俱京畿觀察使。公之高祖若曾祖也。祖諱受河。司憲府掌令。公以縣令諱禹圭之子。出後其從父諱禹錫。贈吏曹參判。進士諱受渙。卽縣令公之考。而於醒菴公爲第三子也。縣令公娶完山李氏監司時萬之孫進士仲麟之女。公以肅宗庚申生。參判公已歿。宗祀久無主。公年十歲。出爲參判公後。所後母朴夫人敎誨甚嚴。公或有過輒笞之。公則自折枝以進之。深受其罪。辭氣益和婉。又不令李夫人知之。長者咸嘆異之。自幼聰穎絶倫。及長益用力於文詞。有奇氣。不逐俗尙。才名藉甚。壬午中進士壯元。時朴世堂改朱子四書註釋。又於故相李景奭碑。詆誣尤菴先生。公倡率館學多士。上疏論之。肅廟取覽其所著文字。亟命投火。仍削黜世堂。士論快之。戊子泮試。公對策居第二。上特命賜第。蓋異恩也。直赴同年式年殿試。隷槐院。薦爲藝文館檢閱。陞待敎奉敎。間爲侍講院說書兼說書。辛卯陞成均館典籍兵曹佐郞。壬辰除司諫院正言。上疏論王子奴犯禁而法官畏忌不治之罪。癸巳上尊號後。持平金有慶以謟諛成風。譏斥廷臣。大司諫尹世綏劾之。公上疏言有慶抗論不諱。非有憂愛激切之忱。能如是乎。世綏抉摘語句。勒加壞亂朝廷之目。縱不能自進忠言。何忍構成罪案至於此哉。宜譴罷世綏。以明其枉直也。復上疏曰。禁掖之中。有歌呼之聲聞於外庭。不瑕有乖於古聖人放鄭聲之戒乎。臣未知所設者何戲。奏伎者何人。殿下亦果臨視否乎。自今宮婢之出入闕庭。聲樂之蕩人心志者。痛加斥絶。則庶可以肅內外而遠邪▣矣。上優批嘉納。且賜臯比以奬之。三月選入玉堂。爲副修撰副校理兼南學敎授知製敎。縣令公在盈德任所遘疾。公乞暇往覲。仍丁憂。邑有戶賻之例。而公辭不受。旣吉拜副修撰兼侍講院司書,中學敎授漢學敎授。時上候違豫。藥院請姑勿捧章疏。以便調攝。校理宋成明斥以壅遏言路。掌令韓以原以不憂君父之病。劾成明。公與同僚箚論成明託於憂憫國事。圖售傾軋之計。以原不諒天理人情之所同得。直驅人於忘君父之科。請並罷其職。以副修撰爲便養乞外。得泰仁。未及赴。而以經幄乏人。復還玉堂。尹拯門徒崔錫文上疏出其師辛酉擬書。仍以醜詆尤菴。公就其疏。逐條陳辨甚痛快。又以玉堂柳鳳輝,鄭栻上箚請罷權文純公職。以爲觀其氣勢。便一己巳戕賢之黨也。焚坑之慘。將在目前。國之危亡。不啻兆現。可勝痛哉。請正其罪。上批切責。正言宋眞明劾公以恐動君上。請罷職不叙。卽允之。是秋上始覺悟。大定是非。仍下特叙之命。除副校理。疏批有追悔語。除吏曹佐郞陞正郞。又拜副修撰。上親題掖隷訴牒。已而責政院不擧行。公與同僚上箚。言掖隷何等賤微。狀牒何等猥瑣。而殿下乃屈如天之尊。親賜題旨。褻君明虧國體。至斯而極矣。今日之弊。不患掖隷之見陵。惟患國法之不可行。從今以往。此輩有罪無罪。一付有司。以示宮府一體之意。上嘉納之。丁酉上將有溫泉之行。公與宮僚疏請王世子隨駕。爲御史于湖南。採訪民瘼。條奏甚悉。廟堂多所採施。還拜校理。又拜北評事。未赴。拜校理兼文學。冬陞應敎兼輔德。修撰洪萬遇上疏論李相頤命獨對時事。並詆權文純公。上命罷萬遇職。公率同僚上箚。請嚴加懲討。上從之。萬遇遂削黜。公又乞外爲楊州牧使。以上官有嫌褫。正言成震齡劾正大臣奏語之失。被掌令金萬胄駁論。公以司諫劾罷萬胄職。戊戌用端懿嬪魂宮都廳勞進通政階。直拜司諫院大司諫。旋自罷免。叙拜禮曹參議。己亥爲慶尙道觀察使。坐庠官時微眚罷。叙拜成均館大司成。屢典課試。鑑識孔明。自是再爲副提學,大司成,刑曹參議。三爲承旨四爲吏曹參議一爲戶曹參議。間除伊川府使。又被留不出外。差承文院副提調。庚子景廟新卽位。趙重遇者受凶孼唆囑疏請加張氏位號。公以承旨方移疾。聞卽詣院。手草陳啓曰重遇疏以母以子貴爲言。而敢曰先大王陟降之靈。必不咈於今日之擧。又敢曰先大王微意存於其間。此豈今日臣子所敢發口者哉。伏惟先朝處分。不啻嚴截。頃年以御史書爵號。特加譴罰。且以咸一海上書中書其爵號。有絶痛之敎。聖意所在。昭如日星。今於仙寢未冷之日。已有此陰邪輩嘗試之計。矯誣先旨。無所忌憚。若不痛懲則恐有歉於遵先之孝矣。請加重究。上從之。重遇乃遠配。後竟杖斃。八月擢拜江華府留守。辛丑夏入爲司憲府大司憲。差實錄廳備邊司堂上。遞拜大司成兼同知義禁府事。復拜大司憲。公慨然以正風俗振綱紀爲己任。數坐府按事。風聞逮治。無不如法。都下震肅。姦猾屛息。同三司請討鳳輝。或求對或伏閤。日再三啓。皆公手草。言甚激切。仍論趙泰耈護逆之罪。請先削黜。以長寧殿改建勞。進嘉義拜都承旨。製進王世弟嬪竹冊文。十月執義趙聖復上疏。請令世弟參聽講確於裁决之間。是夜下敎。使世弟聽政。入直承旨玉堂先入對。請還收。左參贊崔錫恒先至請對。遂中寢。大臣諸臣追至闕下。聞已還寢皆退去。戶曹參判趙泰億又趁明入對。請罪當日三司及諸大臣。公備陳其事狀。辨斥甚嚴。泰億始退。俄而復命依前敎擧行。大小諸臣。亟求入對而不能得。遂庭籲累日。而天聽逾漠然。韓世良,朴泰恒等相繼投疏。捏誣諸臣。公啓曰備忘之下。在於深更。大臣諸臣。驚惶奔走。將欲請對。錫恒不待齊會。徑先入侍。及成命反汗之後。無所事於入侍。遂皆相率而退。今乃勒歸諸臣於袖手傍觀之科。必欲因此盡逐。誠可痛駭。而世良之疏則天無二日地無二王。陰移天位。國人疑惑等說。看來毛骨俱竦。爲人臣子。何敢以此等語。萌於心發諸口哉。此兩疏不可循例捧入。仰請睿裁。上無發落。公再啓曰。世良等罪惡。實王法所難貸。神人所共憤。殿下於鳳輝。尙靳肆市之戮。賊臣之增氣。未必不由於此。而若不亟降嚴鞫之命。快正王法。則竊恐倫彝斁絶。國家之亡。迫在呼吸。俄以世良疏捧入。罷公職。院僚請繳還而仍之。公以此時不可言小嫌。仍就職。又因權珪疏。啓曰珪疏謂皇天祖宗。必欲亂亡我國家耶。何爲而有此擧也。設令春宮黽勉承命。國家何至於亂亡耶。其爲悖逆。莫甚於此。請設鞫嚴問。不從。以親養復爲楊州牧使。時議難其出。因事以褫之。十一月拜副提學。以李㙫疏中語多熒惑。上疏論之。略曰殿下聖度睿量。海嶽崇深。有非羣下所敢妄揣。而嘗試之言。猶且日進而未已者何哉。錫恒之請對也。門鑰幷下則人輒以爲聖意有在。庭籲諸臣日請入對而終不許入。泰耈之赴闕。引見徑下則人輒以爲上心有待。大臣請對。輒有書入之敎則人輒以爲情志不孚。君臣之間。日以否隔。噫嘻此何景色也。自上誠有以畢燭忠佞之分。毋爲欺眩誣捏之言所撓。則實國家之幸也。先是別諭下泰耈。公以臺啓方張。稟而寢之。泰耈又自宣仁門潛入求對。却之而不爲稟。都承旨李正臣上疏論其時事。持公甚急。公以疏痛辨之。褫拜工曹參判。十二月移兵曹參判。俄而一鏡等七賊之疏入。若上變然。一夜之間。朝著斥逐殆盡。首以公再三陳疏。窺予淺深。栫棘于黑山島。公被命卽行。無幾微見色。朴夫人與李夫人俱年高在堂。公爲之慰解備至。有一子生纔周歲。不顧而去曰。此時東宮恐難保全。何暇念我私也。時羣凶挾奧援益逞凶圖。王世弟至欲出閤辭位。慈殿下諺敎。明言宦妾交亂之罪。羣凶白請直誅尙儉等。以滅其口。壬寅三月。王世弟冊封報至。虎龍變書又在其翌日。誣獄大起。意在陷害儲宮。故家世族。鮮有免者。獨於公仇嫉最甚。而卒無以禍之。公姓名適出於趙松之招。蓋松方以銀貨偸竊被鞫。以公御史時以波市坪事。謂渠可殺。而凶徒捏合糚撰。歸之於目下事。以濟其必殺之心。權益寬始陳疏。趙鎭禧繼發啓。公遂被逮。島民至聚哭而送之。及置對。以沮遏備旨。阻搪大臣。添於問目中。掌令韓在垣疏請直正王法。錫恒白請酌處。而承旨李明彥等尼之。屢被拷掠。竟以十月二十日。卒於獄中。是日卽公之初度也。嗚呼。天下之寃。無大於莫須有三字。而此則殆有甚焉。方是獄之起也。國人以公及吾仲父歸樂公生死。謂可判其虛實。而終則俱不能出獄門。於是尤决知爲誣獄云。十一月權窆于積城先壠之側。今上乙巳。幽枉畢伸。命復公官而賜祭。又因大臣言贈吏曹判書。後上於筵中敎曰。寃死人中某尤慘酷矣。仍命給朴夫人月廩。錄用子孫。又官其弟。公長身玉立。風度凝遠。和而不流。介而不激。聲色貨利。廓然不留情。孝友出於天性。奉侍兩慈於一室之內。家世淸貧。朝夕之供。或不能繼。而甘旨則未嘗闕也。與弟啓道。相愛甚至。輒共臥起。以至尋常服用。無不與之同。談論之間。意見或不合。啓道氣高不能下。則公必屈而從之曰。然矣然矣。又不許其異居焉。於內外宗黨。曲有恩義。雖鄕曲疎逖。必呼之以輩行。待之以誠欵。以是歸者益衆。而應之益無倦色。平居峭然若不可犯。而與人言則洞開心腑。傾倒無餘。正色立朝。力持風裁。遇事論列。不計利害。如水臨壑。當下便下。視世之依違趨避者。若將浼焉。辛丑秋冬之間。見時事罔極。憂傷之意。溢於色辭。或深夜彷徨不寐。或悄然獨坐哦詩。人莫測其意。客有勸公退者曰。大廈將傾。非一木之可支。公胡不去。公不答。顧其弟曰。客言何如。曰兄之去。若在朝家無事之日可。在今日則不可。安則進而食君之祿。危則退而自保其身。焉有是哉。公曰爾言是也。仇敵溢世。明知刀鋸鼎鑊之在前。而視之若無者。惟一於義理而已。又勉國舅以保護儲嗣。蓋亦人所難言也。嘗憇汾津村舍。顧謂傍人曰。卽此亦足以容我膝矣。因仰屋歔欷不已。雖以身許國。而意未嘗不在於退也。公少喜讀莊馬。老而好看朱子書。玩繹不輟。有詩文若干卷藏于家。公凡再娶。元配靑松沈氏。監役壽堅女。無育。後夫人星州李氏。忠肅公尙吉之後。縣監世玉女。柔嘉有梱則。禍故以後。卽歸鄕廬。窮約益甚。而養老奉先。一如公在時。辛亥終。享年五十二。有一男二女。男疇海。女長適申晦文科。次適黃仁儉而夭。疇海二男皆幼。余與公生而同年。從幼時以小字相識。長而同硏。又後先登朝。而隱顯殊塗。公蓋羨余之早退。家人有傳道其語者。余則苟免於禍。閱歷百變。於世支離。每念臣子無愛身自佚之理。尤悔徒積。昔也公羨我。而今則我慙公矣。疇海來請大碑之文。攬涕而爲之叙。系以銘。銘曰。噫公在朝。一鶚橫秋。彼觀於外。文彩風流。屬歲辛壬。天運艱難。強此艱彼。一心如丹。大水無津。砥柱孤峙。破屋禦寇。寇來無止。口瘏尾譙。其鳴不已。願爲一死。先王骨肉。酷禍攸始。豫建之策。黑海當前。有呱莫恤。劫火燒原。麟鳳亦罹。北寺之寃。今古同悲。羣小相賀。善類籲天。桎梏正命。又何疑焉。荒原化碧。烈氣成虹。故人作詩。以詔無窮。
『陶菴先生集』 卷29, 「神道碑」
〈大司憲贈吏曹判書洪公墓誌銘〉
悲夫。國家辛壬之禍慘矣。士大夫血染金木。孰非寃死者。而大司憲洪公啓廸惠伯又最寃。閭巷童孺飮泣而哀其事。必先數公曰。洪公洪公。嗚呼。天固不可欺。人亦可以誣歟。公素峻正剛果。赴義如嗜欲。少時甞率泮士。疏論朴世堂著思辨錄背朱子。撰李景奭碑詆宋尤庵。肅宗命火其書罪其人。旣登第在玉堂。見尹拯門徒崔錫文出拯擬書誣尤庵。遂逐段辨析。洞闢其情狀。並及柳鳳輝等駁論權文純之罪。卒被拯黨宋眞明劾罷。盖積忤一隊人久矣。景宗初爲承旨。有趙重遇者乘機投匭。請加張氏位號。張氏爲景廟私親。而肅廟賜死。故兇黨嗾重遇探試之。公方在告。卽起赴院。手草論啓。極言先王所以嚴處分。重遇所以矯誣甞試者。重遇由是杖斃。士論快之。然側目者已紛然矣。時景廟有疾。且無嗣。國勢危疑。士林洶惧。今上在私邸。中外屬望於儲貳。而異議又螮蝀之。事盖有難言者。辛丑秋。臺臣李廷熽始疏請建儲。公爲大司憲。與大臣諸臣卽日入對。夜奉慈敎。冊今上爲世弟。賊臣柳鳳輝懷忿恚。投疏詆廷臣。旨意凶悖。上始命賓廳議其罪。公與諸公對曰。當鞫問。上可之。旋入趙泰耈疏。改遠竄。公率三司伏閤。日再三爭之。又論泰耈庇護逆臣。請削黜。並不許。自是駭機日熾。國事日乖。公忼慨奮發。義形於色。橫身死生之地。左右枝拄。惟以世道爲己任。士流亦恃爲宗主。倚之若砥柱。而兇黨之內外糾結者。皆視公血讎。必欲先去之。此公遘禍之始也。十月。執義趙聖復疏請世弟侍側參决。上遽命代理。命下。夜已深。朝士未及會。崔錫恒得禁直者飛報。獨先詣入對。請收還得旨。比羣公來會。命已寢。遂退去。兇黨因此藉口。欲執退廷臣。趙泰億盛氣入上前。請其罪。公以都承旨折之曰。此傾陷之說也。方夜倉卒。勢未及來會。諸臣無可罪。泰億色遂沮。已上又下敎申命代理。大臣率百僚庭爭累日。猶未得。朴泰恒,韓世良,權珪等交章。語多陰悖。公在院。一一附奏論罪。其論世良曰。天無二日。陰移天位等說。便同變書。論珪曰。珪謂皇天祖宗。必欲亂亡我國家。悖逆莫甚。並宜鞫問。不從。間有命以捧入世良疏。罷公職。院僚繳奏其不然。返其命。上甞有別諭下泰耈。公謂泰耈方被劾禀還之。及是泰耈冒臺彈。猝入宣仁門求對。公却之曰。有臺劾者不可入。俄有中使命引對。諸大臣亦同入。遂封還代理之敎。事又寢。公後因李㙫李正臣疏。並論辨之。仍及君違曰。錫恒之請對。門鑰並下。泰耈之赴闕。引見徑下。人以爲上心有待。庭籲諸臣連日請對而不許。賓廳引對。每有後日來待之命。人以爲聖意厭薄。噫嘻此何景色也。又曰。被論大臣。猝入求對。是不以禮進身也。殿下直令入侍。是不以禮引接也。天若有私覆。日月若有私照。此可知安危之判。十二月。賊鏡等疏遽上。朝臣逬逐。時事大變。特命公栫棘黑山島。以再三陳疏。窺上淺深爲罪。黨人最惡公。故公首被罪。無何逆儉締妖婢。謀危東宮。事覺伏誅。翌年三月。虎龍又上變。大張誣獄。入者無一脫。適鞫囚趙松以竊銀貨被訊。牘背引公名。盖公爲御史。聞松前監波市坪漁稅。多封已。每言松可殺。松畏之故欲藉此自白曰。洪公每言市坪事可殺。何敢更爲此事乎。市坪事。本不干鞫獄。而羣小只欲禍公。雀躍而文致之曰。此指竊貨事也。權益寬,趙鎭禧迭請訊治。迺逮公。島民多有涕送者。旣逮。始以沮遏批旨阻擋大臣添入問案。盖所怒實在此也。錫恒陽若緩其論。而衆議又格之。遂屢被拷掠。竟卒于獄。公生卒皆同日。是十月二十日也。嗚呼寃矣。天下寧有是耶。此公遘禍之終也。公以孤忠直道。爲宗社爲東宮。赤身當鏑。而虺蜴之所吹毒。又專在公一人。公其免范滂陽球之禍歟。日月高臨。鬼神旁列。在公又何恨也。乙巳。今上旣嗣位。命復官賜祭。贈吏曹判書。上曰。洪某死甚酷。官廩其老母。錄用其子孫。弟啓道亦以公故授官。公始窆積城先兆側。己酉。移同岡向午原。洪氏出南陽。自太師殷悅。世爲顯閥。本朝觀察使春卿號石壁。公高祖諱命元。號海峯。曾祖諱處厚。號醒庵。父子俱按圻輔。醒庵公子進士受渙。生縣令諱禹圭。聘全州李氏。監司時萬之孫。進士仲麟女。庚申生公。卜歲。出主醒庵公祀。以掌令贈承旨受河。贈參判禹錫。爲大父若父所後。妣朴氏參奉世耈女也。公幼穎異。朴夫人敎課又嚴。公或自折枝受笞。少不失和婉。及長。文詞奇拔淸遒。不爲鄙俗語。聲聞大宣。魁壬午進士。戊子泮試對策。居第二。肅宗特賜第。旣薦入翰苑。陞至奉敎。又遷侍講院說書兼說書。歷數官爲正言。癸巳。選拜弘文舘修撰,副校理,南學敎授。乙未憂吉。遍華踐。玉署自副修撰。至應敎。胄筵自兼司書。至兼輔德。間移吏曹佐郞,正郞,司諫院獻納司諫。兼校書校理,漢學敎授。奉命廉察湖南。出佐北幕。不赴。戊戌。端懿嬪喪。敦事魂宮。例陞通政。直拜大司諫。歷戶禮刑參議。三入喉院。四入天曹。爲大司成副提學者再。後由亞卿。又屢授別兼承文副提調。庚子。擢江華府留守。辛丑。入爲大司憲遆復拜。歷兵工曹參判。兼史局備局金吾堂上。甞撰進世弟嬪竹冊文。錄長寧殿改建勩。進嘉義。外授泰仁縣,伊川府,慶尙道觀察使。皆未赴。泰仁以講筵無人內移。再得楊州。初因上官有嫌遆。後以朝議重其出亦遆。大憲時。甞赴衙視事。糾治其敗俗者。豪猾斂避。京師爲肅然。在三司。每盡言不諱。意在激揚匡格。肅宗旣受羣臣上號。持平金有慶疏言諂諛成風。諫官尹世綏劾之。公爲正言疏曰。縱不能自進忠言。豈忍罪言者。世綏宜可罷。又因禁中有歌呼聲陳戒曰。非禮之樂。人主不當聽。丘史出入者。聲樂流蕩者。並宜斥遠。上降奬諭。命賜臯比。上甞親題掖隷訴牒。責政院擧行。公箚陳其褻君明虧國體。仍請一付有司。以示宮府一體。修撰時也。正言成震齡論大臣。被掌令金萬胄劾遆。公啓請罷萬胄伸震齡之論。司諫時也。公白而長身。風儀秀出。淸坐靜嘿。如不可犯。而及其情款輸瀉。有使人歆服。居家孝友。奉二夫人。一室懽愉。甘毳無不備。一弟惟啓道。自幼傳服同案。終不忍分居。其他細行。皆在家牒。而余所喜公者。公淸澹寡慾。孤直無累。言不苟循。事不辭難。病世之回媚臠卷者。唾猶泥滓。雖利害交互。衆夫疑懾。而勇如湍赴。快如刃下。神志無少撓。傳所稱臨大節而不可奪者。殆近之歟。公少喜讀外書奇文。晩好朱子書。斂華就實。其遺稿所存。只若干編。初配靑松沈氏。監役壽堅女。不育。再聘星州李氏。縣監世玉女。賢有婦道。遭禍後。奉先養姑。力課孤兒。不隳公成法。擧一男二女。公赴謫。男堇二歲。公歎曰。東宮且難保。遑恤我私。遂不顧而去。但命曰名疇海。今乞銘者是也。女適申晦。次適黃仁儉。早歿。申黃俱文科。疇海二男幼。申女適李瑓。余與公同年生。少而同業。仕又同僚也。出處相將。義視弟兄。自哭公亡。孑然無當世志。而放廢田里。窮老不死。奮筆而誌公墓。涕不知其流落也。公自辛丑秋。或夜起彷徨。悄坐吟詩。若有所思者。豈公身已許國。不可决退。而大禍當前。自有所隱傷歟。詩云不自我先。不自我後。善士無命。每與世禍相盪。嗚呼。士之死生。豈爲其一身哉。余故歷叙公禍事始終。竊附史傳之義。盖曰公死可悲。而世道尤可悲云。銘曰。侃侃洪公。遭世陂險。狂流獨障。直絲不颭。消長任運。逝肎義貶。黑山冥冥。鯨鱷之投。投之不足。不殺不休。驅以桎梏。文彼虗無。彼蒼者天。公有何辜。儲闈有犯。公討其凶。北門有入。公攔其鋒。公以是死。死守天衷。公應不昧。宛其精爽。歸拜稽首。肅廟在上。斯義自靖。彼兇罔極。百世有昭。我筆如戟。
『圃巖集』 卷20, 「墓誌」
(3) 부원군
홍재룡(洪在龍)
홍재룡은 1794년(정조 18) 10월 13일 태어났으며, 자는 경견(景見), 호는 운전(雲田)이다. 공조판서 홍기섭(洪耆燮)의 아들이다.
1835년(헌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대호군이 되고, 1839년에 한림소시(翰林召試)에서 선발된 뒤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그 뒤 동부승지·대사성, 병조·이조의 참판, 금위대장 등을 역임하였다.
1844년 딸이 헌종의 계비 명헌왕후(明憲王后)로 책봉되자, 익풍부원군(益豊府院君)에 봉하여졌으며 영돈령부사에 올랐다. 이어 어영대장·총융사·훈련대장을 번갈아 지냈으며, 1849년에 실록청지사를 겸하여 『헌종실록』의 편찬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1856년(철종 7) 화성유수로 잠시 머무르다가 다시 총융사·훈련대장을 역임하였고, 1862년 광주유수(廣州留守)가 되었다.
1863년(철종 14) 1월 4일 세상을 떠났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묘는 양근군 중면 용진벌리(龍津筏里) 묘좌에 있다. 부인은 연창부부인(延昌府夫人) 죽산안씨로 판서 안광직(安光直)의 딸이다.
〈益豊府院君洪公 在龍 諡狀〉
公諱在龍。字景見。自號雲田。洪氏之籍于南陽。自高麗太師諱殷悅始。入本朝。石壁公諱春卿。海峯公諱命元。醒巖公諱處厚。俱以詞學節義。取重於世。守虛齋公諱啓迪。嘗以知申事。折斥賊相宣仁闖入狀。㝡中媢嫉機刹。首及於禍。是爲三宰臣之一。後伸雪。錄其忠。賜諡忠簡。於公爲高祖。生諱疇泳。用錄孤恩。蔭仕主簿。通外臺。茹慟自靖。贈吏判祭酒。生諱秉寀。蔭仕縣監。有隱德。世推長厚君子。贈左贊成。是生今判書名耆燮。妣德水張氏。大司諫至冕女。以純祖甲戌生公。幼有異質。不妄嬉笑。未及成童。母夫人見背。無它晜弟姊妹。㷀孑已甚。判書公憐之。不加課督。而公能自成立。擢乙未增廣文科。公家自搆壬寅禍來。汔未之振。識者疑於天道。於是。始驗其厚積而發也。分隷槐院。戊戌。薦入史局。拜藝文館檢閱。在堂后。常獨處一室。泊如也。一承宣目之曰。名官年少。類多隨逐謞謔。某獨不爾。其中必有守。堪大受乎。庚子。陞六品。仍帶別兼春秋,文臣,兼宣傳官。歷司諫院正言,成均館典籍,兵曹正郞。壬寅。除北評事。考試一以至公。北方人士咸誦之。癸卯。還授司憲府持平。參弘文錄。爲修撰,副校理。間兼禁衛從事官,備邊郞。甲辰。復拜兵曹正郞。四月。憲宗冊繼妃。今我王大妃殿下。寔膺德選。旣行再揀。特授公同副承旨。移大司成。旋擢吏曹參判,兵曹判書,兼帶同成均,同經筵,知春秋,知義禁事。九月。授禁衛大將。冊禮成。進公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事。封益豊府院君。乙巳。移訓鍊大將,提擧籌司,槐院,活人,尙方,惠民,舟橋等局。丁未䟽解戎務。數年之間。時事或有難言者。公益斂跡。畏約自守。己酉。特授御營大將。時上候違豫已屢月。六月。以公別入直。上問益豊來未。連促者數四。旣而大漸。嗚呼痛哉。七月。復移訓局。庚戌。遞拜揔戎使。壬子。拜御將。旋移訓局兼知實錄事。宗正太僕提擧。丙辰。以特旨。拜水原府留守。居留雖與內職比。以國舅兼帶。實異數也。公懇謝不許。戊午。入拜揔戎使。移訓局。旋換御將。庚申。又換禁將。未幾䟽遆。間兼司饔,氷庫提擧。壬戌。又以特旨。拜廣州府留守。公自春夏。微示憊。至是。上將幸南漢山城。策應絿急。力疾視事。旣還而委劇。竟以癸亥正月。卒于寢。享年五十。疾甚。上命太醫。持藥物往視。訃聞。震悼。下敎曰。御醫之回。雖知證候之沈篤。貞亮愷悌之資。意謂永享天年。今見逝單。愴衋曷喩。仍賜東園副器。喪葬照例優它。成服日。遣承旨致祭。禮葬。雖以遺意。不敢秪受。而隱卒崇終之典極矣。以是年三月。窆于楊根西終面木旺里芙蓉堂坐卯之原。配竹山安氏。行判書諱光直之女。封延昌府夫人。有一女一男。女卽我明憲淑敬睿仁王大妃殿下也。男奭鍾。文科前都承旨。側出一男幼。女爲經歷元世昌妻。承旨娶縣監金宇鉉女。生一男幼。公性恬簡安重。挈將符殆二十年。克練克愼。將佐服其公。卒伍飮其仁。推及諸務。一遵繩尺。擧無過當。處家和易。事判書公。竭力忠養。旣戚聯內屋。起居承奉進止。誠敬匪懈。若夫土木園池之工。盖嘗有之矣。而寓心也。非役心也。故旣成而有求之者。輒許不少恡也。嗚呼。公儒素起家。謙約謹畏。委蛇處順。操術有常。恩遇有始有卒。逮夫今上嗣服。屢畀肘腋之任。寵祿哀榮。世無與兩。詩曰。惟其有之。是以似之。公之所自致然也。公始疾時。慮判書公之過憂。戒家人勿以動靖白。比革。自傷不克終孝。噓唏流涕。絶可悲也。判書公以公行治本末。屬安府使膺壽氏爲狀。委余以東里子産之役曰。將以是冀幸壹惠。庶幾少慰我王大妃殿下無涯之孝思也。遂掇其事行之大者。繤次如右以復之。
『心庵遺稿』 卷27, 「諡狀」
〈관련 문헌〉
2. 왕비의 생애
(1) 출생과 혼인
효정왕후는 1831(순조 31) 정월 22일 사시(巳時)에 조부 헌간공(獻簡公) 홍기섭(洪耆燮)의 임소(任所) 함열(咸悅)에서 탄생하였다. 이보다 앞서 헌간공이 일찍이 꿈을 꾸었는데, 현원로군(玄元老君)이라는 신인(神人)이 집에 내려와서 말하기를, ‘이 집에 마땅히 상서(祥瑞)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더니, 얼마 후에 왕후가 태어났다.
왕후는 나서부터 어질고 효성스럽고 총명하고 슬기로웠으며 덕스러운 품성은 천성(天成)이었다. 어려서부터 예의를 스스로 차릴 줄 알았고 행동거지가 어른처럼 의젓하였다. 부모를 섬기고 웃어른을 공경하는 것이 모두 규범에 들어맞았기 때문에 집안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1843년(헌종 9) 8월 25일 헌종의 정비 효현왕후(孝顯王后)가 죽고, 12월 경릉(景陵)에 장사하였다. 다음해인 1844년 9월 10일 순조비 순원왕후(純元王后)가 대왕대비로 있으면서 대호군 홍재룡의 딸을 간택하였으며, 10월 21일에 헌종의 계비로 책봉되었다.
(2) 궁중의 삶
왕비로 책봉되어서 비로소 『소학(小學)』을 배웠는데 보자마자 단번에 외웠을 뿐 아니라 한 부(部)를 써서 깊숙이 간직해 두기까지 하고서도 전혀 모르는 체하였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적었다. 그러나 왕비가 평생 가슴에 새겨 넣은 것은 대체로 여기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대왕대비 순원왕후와 왕대비 신정왕후를 받들어 섬기는 데 성의와 효성을 다하여서 안부를 묻고 봉양하는 일을 더없이 공경스럽게 하고서도 늘 다하지 못한 것같이 하였으며 아무리 두렵고 난처한 마당에서도 한결같이 극진한 정성을 가지고 쾌히 받들었다. 1877년(고종 14) 여름 신정황후(神貞皇后)가 설사병으로 인하여 오래 누웠을 때 시탕(侍湯)하여 올리고 음식을 맛보는 일을 반드시 직접 하면서 남을 시키지 않았으며 달포가 지나도록 옷도 벗지 않고 눈도 붙이지 않았다.
1857년(철종 8) 순조비 순원왕후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예의에 지나칠 정도로 가슴을 치며 울었다. 선대(先代)를 받드는 데 더더욱 지성을 다하였으며 진전(眞殿)에 올리는 음식을 3년 동안 주관하면서 반드시 직접 제물을 다루었고 언제 한 번이라도 남을 시켜 대신하게 한 적이 없었다.
효정왕후는 1849년 6월 헌종이 세상을 떠난 후부터 근심과 걱정에 싸여 얼굴에 슬픈 기색이 돌았고 그 이후로는 말과 웃음이 없었다. 헌종에게서 은총을 받은 궁인은 더욱더 남달리 사랑하는 동시에 남겨 두고 보살폈으니, 대체로 전대(前代)의 후비(后妃)들에게서는 드문 것이었다. 순원왕후가 이러한 말을 듣고서 극구 칭찬하기를, ‘어질고 어진 중궁(中宮)이로다. 태사(太姒)라도 이보다 더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평생 검소하게 지내는 것을 편히 여기고 늘 옷감으로는 우리나라에서 나는 명주와 비단을 썼을 뿐이었다. 비록 써야 할 물건일지라도 반드시 절약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턱없이 낭비하여 나라의 비용에 손해를 주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으며, 흉년이 들면 백성들의 식량난을 걱정하면서 음식의 가짓수를 줄였다. 효정왕후는 또한 너그럽고 아량이 있어 늙고 젊은 궁인들과 아침저녁으로 가까이 모시는 궁인들에게 한 번도 큰소리로 욕을 하지 않았고 성난 기색도 보이지 않았으며 오직 언제나 옳은 것만을 보여 주었다. 겨울날 위사(衛士)가 추위에 떨고 있으면 매번 죽을 먹였다.
개구리나 개미와 같은 미물이 혹 지게문을 넘어 들어와도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경계하였고, 봄날이 한창일 때 혹 참새 새끼가 처마 끝에서 떨어지면 시아(侍娥)를 시켜 잘 보살피고 먹이고 길들여 깃이 다 자란 다음에야 날려보내도록 하였다. 한 포기의 풀, 한 떨기의 꽃도 함부로 꺾지 말도록 하였으며 화분의 꽃과 뜨락의 나무들은 제 마음대로 무성하게 자라도록 두었고 물을 주고 북돋아 주면서 생장하는 이치를 관찰했으니, 이것은 그의 어진 마음이 밖으로 발현된 것이었다.
건강이 나빠져 오랫동안 앓을 때에도 평소처럼 날마다 머리 단장을 하고 세수를 하였으며 속옷 바람으로 사람을 맞은 적이 없었다. 승하(昇遐)하시던 날에는 궁인에게 명하여 침상에 부축하여 앉히도록 했는데, 그 침상은 바로 고종황제가 올린 것이었다. 다른 요 자리는 다 치우고 꼭 이 침상에서 정히 생을 마쳤으니 왕후의 그윽한 뜻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예의의 발현이다.
(3) 죽음과 애도
1903년 겨울 고종이 명년(明年)이 효정왕후가 간택(揀擇)된지 6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에 국조(國朝)의 고사(故事)를 상고하여 존호(尊號)를 올리겠다는 것을 청하였으나 왕후는 겸손하게 굳이 사양하였다. 1904년 정월 초하룻날 온 나라에 선포하고 축하하려고 했는데, 효정왕후가 정월초부터 조금 앓기 시작하여 열흘이 지나 점점 심해져 11월 15일 을미일(양력 1월 2일)에 경운궁(慶運宮)의 수인당(壽仁堂)에서 세상을 떠났다. 춘추(春秋)는 73세였다.
여러 신하들이 효정(孝貞)이라는 시호를 올렸으니, 5종(五宗)을 편안하게 하였다는 뜻에서 효(孝)라 하고 순수한 덕행을 잃지 않았다는 뜻에서 정(貞)이라고 하였다. 휘호(徽號)는 ‘자온공안(慈溫恭安)’이며 전호(殿號)는 ‘효혜(孝惠)’이다. 1904 정월 29일 무신일(양력 3월 15일)에 경릉(景陵)에 합장(合葬)하여 한 능에 따로 안치한다.
〈효정왕후의 행장〉
大行太后姓洪氏。 高麗功臣三重太師殷悅, 始籍南陽, 簪組蟬聯不絶。 及本朝, 有曰春卿, 觀察使贈領議政南寧府院君。 三傳而諱命元, 觀察使贈左贊成。 贊成生諱處厚, 觀察使贈領議政, 諡忠莊。 俱以文章、節義著於世。 忠莊之曾孫諱啓迪, 大司憲贈吏曹判書, 諡忠簡, 與李忠肅晩成、金忠愍雲澤, 同壬寅禍, 世稱三宰臣, 於后爲五世祖。 高祖諱疇泳, 主簿贈祭酒; 曾祖諱秉宷, 縣監贈左贊成; 祖諱耆燮, 輔國贈領議政, 諡獻簡。 考諱在龍, 領敦寧府事益豐府院君贈領議政, 諡翼獻。 配延昌府夫人竹山安氏, 判書光直女。 后以純祖辛卯正月二十二日巳時, 誕生于祖考獻簡公咸悅任所。 先是, 獻簡公嘗夢, 神人稱玄元老君, 降于第曰: “是家當有禎祥。” 已而后誕焉。 后生而仁孝聰睿, 德性天成, 自在髫齔, 亦知以禮自持, 儼若成人, 事親敬長, 動合規度, 家人咸異之。 及膺德選, 始授《小學》, 覽輒成誦, 又手寫一部而深藏之, 退然若無能者, 知者鮮矣。 然后之一生所服膺者, 則蓋根柢於此。 承事兩慈殿, 誠孝兩盡, 問寢執養, 洞洞屬屬, 常若不勝。 雖當恐懼艱處之際, 一以至誠委曲, 承奉愉愉如也。 丁丑夏, 神貞皇后患泄痢彌留, 侍湯、嘗膳必親, 無使不解帶、不交睫者, 浹月。 東朝念其焦勞, 命之退, 雖不得已黽勉還寢所, 然猶彷徨佇立, 未敢安坐。 所使宮人問知動靜者, 相續於殿陛。 及復膳然後亦復初, 慶忭之悃, 溢於色辭, 不勝歡祝, 宮中莫不感歎。 逮夫丁巳, 純元聖母賓天, 后號擗踰禮。 及遭庚寅巨創, 后已滿六旬, 哀毁隕絶, 筋力澟然, 而殯殿祭奠, 罕不親臨, 四朔如一日, 三年之內, 哀慕如一。 侍側者初謂制中適然, 旣而制盡猶然, 終身慟靡逮, 宮中又莫不感歎。 尤盡誠於奉先, 管饋食于眞殿者, 垂三紀, 必躬執蘋藻, 終不一令人代之。 庚子, 眞殿災, 后大驚慟, 寢膳俱廢, 歷累日不能自釋, 皇上力勉强慰, 始得安。 后自己酉大喪後, 煢煢銜恤, 其容有戚, 時然後言笑不見。 矧惟覃逮下之恩, 慶嬪出居本宮時, 或入闕起居, 及其辭退, 不禁依戀之懷, 揮涕而送之, 雖果饌之微, 每分而送饋。 宮人之承恩先王者, 尤眷愛而拊存之, 蓋前代后妃之所罕有也。 初, 慶嬪之入宮朝見也, 后顔色愈和, 從容謂左右曰: “慶嬪姿儀幽閒, 德容充美, 使國家螽斯繩繩, 本支繁衍, 吾復何憂?” 純元聖母聞而亟稱之曰: “賢哉, 中宮也! 賢哉, 中宮也! 太姒無以加之。” 庚寅以後, 惟我皇上, 瞻依無所, 孝思靡至, 后諄諄然, 以宗社生民之託, 寬譬而慰勉之, 辭意懇摯。 每蚤夜送侍者, 必探知上候安否何如, 若聞聖體微愆天和, 則耿耿憂念, 進膳爲減, 至聞復常節, 然後乃喜。 皇上亦以所事神貞聖母之誠移于后, 凡所以致其敬奉者, 無所不用其極, 眷眷篤至。 后每感歎曰: “歷代帝王能重統緖, 而尊其嫂, 未有盛於皇上也。” 明成皇后, 亦以我皇上所以事之者事之, 一心靡懈。 后每侍神貞聖母, 輒稱揚其淑德懿行, 思媚嗣徽, 聖母時時傾聽而頷之。 皇太子來謁, 則見其睿質夙就動止循禮, 必接語款款, 喜形于色。 常以親屬之榮顯爲懼, 每誦明德馬后濯龍之語而戒之曰: “吾甚愧此矣。” 自壬甲以來, 屢經變亂, 雖在顚沛急遽之際, 嚴於禮法, 本屬之非堂親者, 未嘗賜對。 平生安於儉約, 常時衣襨, 惟土産紬帛而已。 雖應用之物, 必使撙節曰: “無使濫費致損國用。” 値歲不熟, 則軫民生之艱食, 爲之減膳。 后又寬裕有容, 宮人之自少至老, 朝夕昵侍者, 未嘗聆訶叱之辭, 亦未嘗覩恚慍之色, 惟其以時發見者, 皆當其可。 冬月衛士之呼寒者, 每餰之。 雖螻蟻微物, 或有入戶者, 戒勿妄害; 方春, 雀雛或墜簷端, 使侍娥護飼馴養, 待羽翮旣成, 然後放之; 一草一花之類, 勿令妄折, 盆花庭柯, 一任其叢茂, 培之漑之, 以觀發生之理: 此其仁端之發於外者也。 及夫違豫沈綿之中, 猶日梳洗如常, 未嘗以褻衣接人。 至昇遐之日, 命宮人扶坐于臥床, 床卽皇上所獻也。 捨他褥席, 必正終于是床, 有足以仰揣后之微意也: 此其發於禮義者也。 冬, 皇上以明年卽后膺揀舊甲, 援國朝故事, 請進尊號, 后撝謙固辭。 乃於明年月正元日, 將行告布稱賀。 而后自月初, 微有不豫, 彌旬漸㞃, 至十一月十五日乙未, 禮陟于慶運宮之壽仁堂。 春秋七十有三。 群臣上諡號曰孝定: 五宗安之曰‘孝’, 純行不爽曰‘定’。 徽號曰慈溫恭安, 殿號曰孝惠。 用明年甲辰正月二十九日戊申, 祔于景陵, 同塋異封。 我皇上陛下, 爰降御製行錄, 命臣以狀德之文。 臣惶懼不敢辭, 則謹就行錄纂次, 而敍之如右。 竊伏念坤道亦可以一言而盡也, 則坤之六二曰“直方”。 大文言曰: “直, 其正也; 方, 其義也。 君子敬以直內, 義以方外, 敬義立而德不孤。” 以是狀后之德之純, 其或庶幾乎! 兩慈殿止慈之眷, 由於后根天之賦, 則臣以是恭知后之盡於誠敬也。 臣又以純元聖母擬后於太姒而亟稱之者仰推, 則后之利物以知義者, 亦可以見矣。 好生之德, 普洽於禽蟲草卉, 而命戒不出於內廷, 恩澤不及於私家, 則所謂“德盛逢原”者也。 嗚呼媺哉!
〈효정왕후의 지문〉
誌文曰:我憲宗體健繼極中正光大至聖廣德弘運章化經文緯武明仁哲孝大王繼妃, 有疾不豫, 以癸卯十一月十五日辰時, 昇遐于慶運宮之壽仁堂。 春秋七十三。 臣伏奉幽誌製述之命, 仍下御撰行錄。 若曰: 大行明憲太后, 姓洪氏, 系出南陽。 以高麗功臣三重太師殷悅爲鼻祖, 簪組蟬聯, 勳業烜爀。 入本朝, 有觀察使贈領議政南寧府院君春卿。 三傳而有觀察使贈左贊成命元, 贊成生觀察使贈領議政諡忠莊處厚, 兩世俱以文章、節義著於世。 忠莊曾孫大司憲贈吏曹判書諡忠簡啓迪, 辛、壬罹慘禍, 義理、忠節備載史策, 蒙不祧之典, 於太后爲五世祖。 高祖, 蔭主簿贈祭酒疇泳; 曾祖, 縣監贈左贊成秉宷; 祖, 蔭兼工曹判書贈領議政諡獻簡耆燮。 父, 領敦寧府事益豐府院君贈領議政諡翼獻在龍。 母, 延昌府夫人安氏, 判書光直之女。 純祖辛卯正月二十二日巳時, 誕后于咸悅縣之官舍。 獻簡夢有神人來言曰: “我, 玄元老君也。 君家當有禎祥。” 太后果以是日誕降。 太后天賦仁厚聰明, 自髫齔時, 動止端正, 簡言語, 律身以禮, 未嘗作嬉戲, 儼如成人, 姆妾輩敬憚之。 雖提携在傍與之昵處, 而不敢慢褻也。 太后孝思純至, 事親盡怡愉之色, 每先意將順。 而父母有疾恙, 瀹藥、煮糜, 必坐視其熾炭, 濾汁、滫瀡之供, 必侍立而省之。 察其所嗜, 以時易膳, 恐其屢嘗而不甘也。 承上接下, 和敬俱至, 姻戚之踈遠, 而藹然若一室。 及膺德選入別宮, 始受《小學》, 讀數過, 輒成誦, 自後亦不復常親縹緗。 事純元、神貞兩東朝, 誠孝懇至。 問寢執養, 夙宵靡懈, 雖當悚息難處之際, 一以至誠委曲, 承奉申申如也。 丁巳, 純元聖后賓天, 慟霣靡逮, 至制闋, 而悲戚之意, 常見於容色。 丁丑夏, 神貞聖母患洩痢彌留, 太后憂形於色, 和衣徹明, 浹月不交睫。 東朝念其勞瘁, 命之退休, 則不敢有違, 黽勉還寢, 而彷徨佇立, 不忍遽歸。 旣歸, 使宮人密候動靜, 絡繹于殿陛。 及平復, 始乃進常膳, 歡喜不自勝, 六宮咸感歎焉。 庚寅, 聖母崩, 號擗霣絶, 左右遑遑。 孝慕殿旣撤, 而居恒悲痛, 衫袖之間, 淚痕不乾, 蓋終身而慕矣。 尤篤於追遠、奉先之節, 馨香禋祀, 必殫誠敬。 每於眞殿茶禮, 粔粻果餌之品, 必親自審視, 致其蠲潔, 不使人攝之, 三紀之間, 始終畫一。 庚子, 眞殿災, 太后大驚慟, 歷屢日始進膳。 太后常以戚畹之榮顯爲憂, 疏近親屬有希恩澤者, 輒擧濯龍故事以戒之。 每有除拜, 太后曰: “曲庇之恩, 固所感激。 而若輩之叨霑洪私、濫竊華膴, 實非其幸也。 還用兢惕于吾心。” 又崇尙儉約, 燕服用土産紬紵, 而綺紈曾未有襯身, 一切侈靡玩好之物, 不令近前。 時常所進應用, 亦必務使撙節, 衣襨渝, 則澣之曰: “工女之銖積寸累, 辛苦而得, 不可浪費。” 丁未, 慶嬪之入宮朝見也, 太后顔色愈和, 顧謂近侍曰: “慶嬪姿稟充美, 德容幽閒, 將使國家麟趾、螽斯之慶, 本支百世蕃衍昌熾。 玆豈非大幸歟? 吾復何憂?” 純元聖母聞而稱之曰: “有是哉, 中宮之賢也! 太姒無以加之。” 近歲慶嬪出居本宮, 時節慶賀之外, 或以時入闕起居, 太后歡欣道故, 至日昃不倦, 及其辭退, 不禁依戀之懷, 揮涕而送之。 遇有異饌及果餌之甘, 雖偏提小盒, 必分而餽焉。 宮人之嘗承恩於先王者, 至老白首而眷愛撫存, 愈繾綣於平昔。 此皆太后之盛德, 而歷代壼範之所罕比也。 自壬午之後, 屢經危難, 倉皇顚沛, 左右皆失措, 而太后雍容無遽色。 尤嚴於禮法, 本屬之非堂親者, 不許入對。 御下和易, 而宮人有過失, 徐曉以汝不當若是而已, 宮人皆感和相戒, 無敢欺瞞。 或有誤觸器物虧缺者, 自首服罪, 遂置不問, 亟令易以新者。 螻蟻蟲豸之有入戶者, 勿令傷害, 順其性而導之使出; 春月有雀雛墜階除, 命侍娥飼馴之, 視控于屋簷則放之。 宮娃或有折花作劇者, 戒之曰: “凡動植之類, 皆蒙天地好生之仁, 煦濡長養, 與人一也, 豈可使天折而不得全其天乎?” 冬月祁寒, 衛士立風雪中, 憫其苦, 賜以熱粥; 値歲不熟, 每減膳, 勿使珍錯旁羅曰: “窮蔀艱食, 困於桂玉, 菜色遍於閭里, 如聞其呻吟之聲。 方丈之羞, 吾獨安於心乎?” 自己酉大喪以後, 未嘗啓齒而笑, 燕居或終日恭默, 非中夜寢睡時, 未或偏倚隱几。 及疾寢革, 將大漸之日, 猶親自梳洗, 不御褻衣。 命宮人屛去褥席, 扶坐臥床曰: “此當宁所進也。 吾將終于此床, 以無忘至誠相愛之德矣。” 嗚呼! 太后之德之仁, 可以參天地、贊化育矣。 孝敬盡於事親, 誠禮篤於奉先。 正始逮下, 內治是成, 仁民愛物, 陰功誕敷。 猗歟盛矣! 採取私邸錄入言行及宮中所聞覩者, 撰次如右, 豈足爲形容摹畫於萬一哉? 嗚呼! 后於甲辰, 冊封王妃; 哲宗卽位, 進號大妃。 二年辛亥, 上尊號曰明憲; 四年癸丑, 加上尊號曰淑敬; 八年丁巳, 進號王大妃。 十年己未, 加上尊號曰睿仁; 十四年癸亥, 加上尊號曰正穆。 今皇帝三年丙寅, 加上尊號曰弘聖; 同年, 加上尊號曰章純; 十年癸酉, 加上尊號曰貞徽。 二十五年戊子, 加上尊號曰莊昭; 二十七年庚寅, 加上尊號曰端禧; 同年, 加上尊號曰粹顯; 二十九年壬辰, 加上尊號曰懿獻。 光武元年丁酉, 進號太后; 四年庚子, 加上尊號曰康綏; 六年壬寅, 加上尊號曰裕寧。 至是, 上尊號曰孝定, 徽號曰慈溫恭安, 殿號曰孝惠。 山陵卜於景陵, 同原祔左, 甲辰正月二十九日戊申, 葬禮也。 臣學蔑識謏, 凡於文字之事, 雖尋常小記, 未嘗有與議。 況惟我太后之德之仁, 媲隆於古昔, 未有盛焉? 哲範芳猷, 嘉謨懿行, 可書之竹帛、鐫之琬琰, 垂諸後世, 取法於閨壼者, 有不勝載。 以臣固陋, 顧何足以摹畫萬一、形容髣髴? 而玄隧之文, 又至愼至重, 果何如也? 雕鏤之役, 日字已迫, 臣有未暇言辭, 而及擎讀御撰, 雲漢昭回, 典誥渾噩, 至矣盡矣! 臣無容贊一辭, 又何敢點竄而有所損益也哉? 嗚呼!【議政李根命製。】
〈효정왕후의 애책문〉
維光武七年歲次癸卯十一月辛巳朔十五日乙未, 皇㛮明憲淑敬睿仁正穆弘聖章純貞徽莊昭端禧粹顯懿獻康綏裕寧慈溫恭安孝定王后, 昇遐于慶運宮之壽仁堂。 移殯于興德殿, 越明年甲辰正月庚辰朔二十九日戊申, 將祔左于景陵, 禮也。 騩馭旣駕, 龍輴將啓; 彩仗臨門, 黼翣列陛。 萬姓爲之雨泣, 百靈紛其星馳, 離紫禁之靜肅, 指靑郊之逶迤。 惟我皇上陛下, 恫長秋之永閟, 慨厚夜之不暘, 爰命下臣, 恭薦哀章。 其辭曰: “沙麓儲慶, 載誕咸衙。 忠簡世閥, 翼獻名家。 吉夢維何, 玄元告祥, 天姿貞靜, 性度慈良。 自在齠齔, 其儀不忒, 不煩姆訓, 自合《女則》。 文定俔妹, 陟于壼位。 仰體思齊, 徽音克嗣, 純元曰: ‘嘉邁古哲妃。’ 神貞違豫, 宵不解衣, 愉悅彌敦, 晨昏問寢。 維庚遘災, 銜慟廢飮; 有侐眞殿, 芬苾時升, 潔我蘋蘩, 三紀是承。 昔我明成, 禮敬交孚, 妯娌之間, 和氣涵濡。 亦我皇儲, 誠切母事, 接以款語, 慈愛彌摯。 慶嬪入謁, 和顔以視, 眷顧依戀, 至老不弭。 戒在濯龍, 言不及私, 聲不出壼, 化已普施。 恐損國財, 衣止土産; 爲念民飢, 盤減玉饌。 曁于微物, 均霑恩雨, 花旣培根, 鷇亦養羽。 克勤克儉, 是以有譽, 猗歟厥美, 史不勝書。 惟天報德, 壽考且寧, 籌添海屋, 輝增婺星。 寶齡彌邵, 酌以大斗, 何以頌之, 如山如阜。 鴻號揄揚, 厖禧來成, 曷云形容, 粗效微誠。 顧惟否德, 受賜也多, 實深輔翼, 匪直雍和。 歲回舟梁, 稱慶則宜, 表裏是將, 月正爲期。 光于邦家, 用申天休, 宮娥素柰, 胡上簪頭? 仙馭遽陟, 白雲之鄕, 凡我臣民, 實如妣喪。 留靈辰而不得, 挽祥車而末由。 草木凄其含悲, 風雪慘而助愁, 嗚呼哀哉! 天道莫質, 神理難諶, 竚藥院之奏效, 奉菆殿之諱音。 瞻玉欄而何及? 詠芳徽於無窮。 驚寶婺之淪輝, 恨厚載之收功, 嗚呼哀哉! 桂欞兮寂寞, 椒塗兮淒涼。 鷖幌捲兮風瑟瑟, 鳳紼拂兮月蒼蒼。 將何處而命夙駕, 異平時之引朝儀。 輓歌齊唱兮聲嗚咽, 欲發未發兮故遲遲, 嗚呼哀哉! 菀彼景寢, 爰占吉地, 鳳舞兮龍飛, 神所慳兮鬼所秘。 佳氣兮鬱蔥, 先寢兮孔邇, 澗毛兮馨香, 四時兮簠簋。 思先君而以勖, 矧同兆於珠邱, 宛鍾鼓之以樂, 儼衣冠之共遊。 豈幽明之有間? 庶精爽之無憾! 雲鄕邈兮金支縹緲, 託哀辭而興感。 嗚呼哀哉! 時序代謝, 聖凡同轍, 雖逝光之莫駐, 乃遺芳之彌烈。 諒摹畫之難盡, 奉琬琰而陳詞。 夫奚但於略伸情禮? 永千秋而有辭! 嗚呼哀哉!” 【領敦寧沈舜澤製】
『高宗實錄』 44卷, 41年 3月 15日(陽曆)
3. 유적과 유물
(1) 왕비 - 경릉(景陵)
경릉은 조선 제24대 왕인 헌종과 정비 효현왕후 김씨와 계비 효정왕후 홍씨의 능이다.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세 개의 봉분을 가진 왕릉이다. 1843년(헌종 9) 16세로 승하한 효현왕후 김씨의 능을 이 자리에 조성하였고, 능호를 경릉으로 올렸다. 그로부터 6년 후 1849년 헌종이 승하하자 효현왕후 김씨의 우측에 모셨다. 1904년에는 73세로 승하한 헌종 계비 효정왕후 홍씨를 효현왕후 김씨의 좌측에 안장하였다.
경릉은 병풍석 없이 난간석으로 세 능침을 이었으며 각 능침 앞에 혼유석을 따로 놓고 문석인, 무석인과 기타의 석물은 단릉과 쌍릉처럼 동일하게 조영했다. 문무인석의 얼굴은 가는 선으로 조각해 전체적으로는 다소 평면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눈꺼풀과 눈동자 등은 섬세하게 표현함으로써 입체감을 더했다. 특히 문무석인의 입술을 모두 얇게 조각한 부분과 마치 화가 난 듯 묘사하고 있다. 무인석의 갑옷 묘사가 상당히 장식적이고 투구 앞의 마크가 태극 모양을 한 것이 눈길을 끈다.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른바 동구릉의 하나이다.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다.
(2) 부원군
1. 묘의 위치
헌종 계비 효정왕후(孝定王后)의 아버지 홍재룡(洪在龍, 1814―1863) 묘는 본래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 산37-1번지에 있었다. 옛 지명으로 양근(楊根) 서중면(西中面) 중면벌리(中面筏里)이다. 이 곳으로 가려면 중부고속도로 하남 요금소에서 나와 팔당대교를 건너서 양평 방향으로 내려간다. 양수리를 지나서 양수로 나와서 다시 우회전해서 부용리로 가는 지방도로를 타고 해당 번지수를 찾는다. 이 곳은 홍재룡의 방손이 1970년에 홍재룡의 묘지를 동래정씨 정창손 후손들에게 팔아넘겼고, 묘는 파헤쳐졌고 석물은 매몰되었다고 한다. 이 묘지는 세종―성종대까지 관직을 지낸 동래정씨 영의정 정창손(鄭昌孫) 후손에게 팔려나갔다. 홍재룡 묘터에 정창손 묘가 들어섰다.
익풍부원군 홍재룡 묘를 찾아가기 앞서 사전 조사를 하던 중에 종친회 관계자를 통해서 후손과 통화할 수 있었다. 홍재룡 묘는 양평 부용리에 있었으나, 현 종손 홍세기(洪世基, 1957년생, 남양주 거주)씨가 어렸을 때(1970년) 종손의 5촌숙 또는 재종형이 묘지를 동래정씨 정창손 가로 팔아 넘겼다고 한다. 홍세기씨는 나이가 어렸도 당시 나이 많은 친척이나 누이들이 소식을 듣고 양주(楊州) 월곡(月谷)에 있었던 홍재룡의 아버지 홍기섭(洪耆燮, 1781―1866)과 홍재룡의 자,손,증손의 묘를 옮겼다고 증언하였다. 옮긴 곳은 남양주 와부읍 월문리였다. 근래 서울·춘천 고속도로 공사로 인해 묘를 고속도로 위쪽으로 다시 이장하였다고 하였다.
한편, 조사자들은 두 번째 이장한 곳을 먼저 시행하고 그 다음주에 원래 묘가 있었던 양평을 찾아가는 방식을 취하였다. 양평 부용리에 거주하는 현지 주민에게 물었더니, 1970년에 홍재룡 묘가 동래정씨에게 팔려나간 일을 떠올리면서 증언해 주었다. 홍재룡 묘가 있었던 지점은 지금 정창손 묘가 들어선 곳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사례는 2010-2011년도 부원군 가문 묘 조사에서도 몇 차례 발견되었다. 위선 관념이 엷어지고 조상 전래의 묘가 재산적 수단으로 생각하여 타인에게 팔아넘기거나 이장하여 원래 있던 묘지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몰지각한 행위이다.
2. 홍재룡의 부 홍기섭(洪耆燮) 직계 묘 기술
(1) 익풍부원군 홍재룡 본래 묘(墓)터
헌종 계비 효정왕후 홍재룡 묘가 있었던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이다. 홍재룡의 아버지 홍기섭(洪耆燮)은 묘가 양주(楊州) 월곡(月谷)에 있었다. 1970년 이전한 남양주 와부읍 월문리로 옮길 때 족보상으로 아버지와 아들 묘가 각각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을 한 군데로 모은 것인데, 관련 사정이 자세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조선 왕조에 들어서서 홍지(洪智)가 양주 남면 상수리(湘水里)가 묻힌 이후 홍재룡의 조부 홍병채(洪秉寀) 대까지 세대묘를 형성해 왔다.
[사진1] 홍재룡 묘터(鄭昌孫 묘)
[사진2] 鄭昌孫 묘 뒷모습
홍재룡 이하 묘지를 차지한 동래정씨 정창손 묘는 본래 서울 방이동(芳夷洞)에 있었다. 도시 계획이 이루어지면서 교외로 이장하게 된 것이다. 현지에서 면담한 마을 주민은 부원군 묘가 있었으며 묘를 파헤칠 때 광이 컸다고 증언하였다. 성종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되는 정창손 묘가 원형을 얼마나 유지하고 있는가를 조사해야 알겠지만, 외형상으로 묘표가 특이하였다. 키가 작았고 반원을 띤 문양에 꽃잎 모양이었다. 석양·향로석·상석·혼유석이나 봉분 호석은 새로이 갖추어진 것이었다.
정창손 묘는 산등성이에 만들어진 묘역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지점처럼 보였다. 외관상 묘지로서 안정된 자세를 취하여 대대로 묘가 들어설 터는 아니고 등성이에 반반한 땅을 만들어 묘소를 만들고 묘소마다 제법 거리를 두고 있었다. 산림이 있었던 곳에서 나무를 베어내고 잡초를 제거한 다음 잔디를 옮겨심은 산등성이 같이 보였다.
(2) 남양주시 와부읍 월문리 홍기섭(洪耆燮) 직계 묘
1970년에 남양주 와부읍 월문리로 이장한 홍재룡의 아버지 홍기섭(洪耆燮)→ 손자 홍종석(洪鍾奭)→자 홍순형(洪淳馨)→계자 홍인표(洪麟杓) 묘는 근래 서울·춘천 고속도로 공사로 인해 다시 한번 옮겼다고 한다. 묘는 마을에서 고속도로 밑으로 다니는 길을 찾아서 들어올 수 있었고 2010년 11월 하순경에 터잡이 공사를 하고 있어서 묘지로 들어가는 길이 순탄하지 않았다. 난간같은 계단을 올라서 산자락 말미에 남양홍씨 가 묘가 있었다. 바로 서울·춘천 고속도로가 내려다 보이며 고속도로 공사 지점의 한계선 바로 위쪽에 묘를 조성한 것으로 보였다.
[사진3] 남양주 洪耆燮가 묘역
족보에 따르면, 홍재룡 묘는 양평 부용리에 있었고 아버지 공조판서 홍기섭과 아들·손자·증손 묘는 모두 양주 월곡에 있었다. 그러므로 헌종 계비의 친정 아버지 홍재룡 묘는 왕의 장인이었기 때문에 따로 길지를 잡아서 양평에 정해진 것이고 홍기섭 이하의 묘는 홍재룡 묘지가 팔려나가고 광이 훼손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옮기게 된 것으로 짐작된다.
[사진4] 洪在龍 부 洪耆燮 묘
[사진5] 피장자 모르는 묘
홍재룡의 아버지 홍기섭 묘는 서울·춘천 고속도로 윗편 산자락 묘역에서 가장 윗자리에 있다. 석물로는 망주석, 향로석, 상석, 혼유석, 묘표가 갖추어져 있다. 묘표는 증손 홍순형(洪淳馨, 1857―1934)이 검교직제학으로 있었던 1893년(고종 30)에 짓고 글씨를 쓴 것이다. 홍기섭 묘는 부인 덕수장씨와 합장한 것이고 그 옆에 피장자를 모르는 묘에 요즈음에 만든 향로석·상석이 있다. 아마도 익풍부원군 홍재룡의 위를 가설하여 만든 묘가 아닐까 한다.
[사진6] 洪在龍의 아들 洪鍾奭 묘
홍재룡의 아들 예조판서 홍종석(洪鍾奭, 1836―1870) 묘는 조부 홍기섭 묘 다음 열에 있다. 망주석, 묘표가 있고 새로 만든 향로석·상석·혼유석이 있다. 아들 의정부찬정 홍순형(洪淳馨, 1857―1934)가 짓고 글씨를 썼다.
[사진7] 洪在龍의 손자 洪淳馨 묘
홍재룡의 증손 홍순형(洪淳馨) 묘는 요즘 만든 석물로 갖추고 있었다. 1995년에 족종(族從) 홍종범(洪鍾凡)이 국한문으로 짓고 성균관전의 족종 홍영길(洪永吉)이 글씨를 썼다. 홍재룡의 현손 홍인표(洪麟杓, 1893―1925), 5대손 홍성주(洪性周, 1922―1995) 묘까지 있다.
3. 익풍부원군 홍재룡(洪在龍)의 시장(諡狀)
익풍부원군 홍재룡의 신도비는 제작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족보에도 기록이 없고 『열성왕비세보(列聖王妃世譜)』에도 홍재룡 시장만 있고 신도비문은 실려 있지 않다. 고전번역원 web-db를 인용하였다. 시장은 조두순(趙斗淳)이 지었다.
益豊府院君洪公在龍 諡狀(趙斗淳, 『心庵遺稿』 소재)
公諱在龍。字景見。自號雲田。洪氏之籍于南陽。自高麗太師諱殷悅始。入本朝。石壁公諱春卿。海峯公諱命元。醒巖公諱處厚。俱以詞學節義。取重於世。守虛齋公諱啓迪。嘗以知申事。折斥賊相宣仁闖入狀。㝡中媢嫉機刹。首及於禍。是爲三宰臣之一。後伸雪。錄其忠。賜諡忠簡。於公爲高祖。生諱疇泳。用錄孤恩。蔭仕主簿。通外臺。茹慟自靖。贈吏判祭酒。生諱秉寀。蔭仕縣監。有隱德。世推長厚君子。贈左贊成。是生今判書名耆燮。妣德水張氏。大司諫至冕女。以純祖甲戌生公。幼有異質。不妄嬉笑。未及成童。母夫人見背。無它晜弟姊妹。㷀孑已甚。判書公憐之。不加課督。而公能自成立。擢乙未增廣文科。公家自搆壬寅禍來。汔未之振。識者疑於天道。於是。始驗其厚積而發也。分隷槐院。戊戌。薦入史局。拜藝文館檢閱。在堂后。常獨處一室。泊如也。一承宣目之曰。名官年少。類多隨逐謞謔。某獨不爾。其中必有守。堪大受乎。庚子。陞六品。仍帶別兼春秋,文臣,兼宣傳官。歷司諫院正言,成均館典籍,兵曹正郞。壬寅。除北評事。考試一以至公。北方人士咸誦之。癸卯。還授司憲府持平。參弘文錄。爲修撰,副校理。間兼禁衛從事官,備邊郞。甲辰。復拜兵曹正郞。四月。憲宗冊繼妃。今我王大妃殿下。寔膺德選。旣行再揀。特授公同副承旨。移大司成。旋擢吏曹參判,兵曹判書,兼帶同成均,同經筵,知春秋,知義禁事。九月。授禁衛大將。冊禮成。進公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事。封益豊府院君。乙巳。移訓鍊大將,提擧籌司,槐院,活人,尙方,惠民,舟橋等局。丁未䟽解戎務。數年之間。時事或有難言者。公益斂跡。畏約自守。己酉。特授御營大將。時上候違豫已屢月。六月。以公別入直。上問益豊來未。連促者數四。旣而大漸。嗚呼痛哉。七月。復移訓局。庚戌。遞拜揔戎使。壬子。拜御將。旋移訓局兼知實錄事。宗正太僕提擧。丙辰。以特旨。拜水原府留守。居留雖與內職比。以國舅兼帶。實異數也。公懇謝不許。戊午。入拜揔戎使。移訓局。旋換御將。庚申。又換禁將。未幾䟽遆。間兼司饔,氷庫提擧。壬戌。又以特旨。拜廣州府留守。公自春夏。微示憊。至是。上將幸南漢山城。策應絿急。力疾視事。旣還而委劇。竟以癸亥正月。卒于寢。享年五十。疾甚。上命太醫。持藥物往視。訃聞。震悼。下敎曰。御醫之回。雖知證候之沈篤。貞亮愷悌之資。意謂永享天年。今見逝單。愴衋曷喩。仍賜東園副器。喪葬照例優它。成服日。遣承旨致祭。禮葬。雖以遺意。不敢秪受。而隱卒崇終之典極矣。以是年三月。窆于楊根西終面木旺里芙蓉堂坐卯之原。配竹山安氏。行判書諱光直之女。封延昌府夫人。有一女一男。女卽我明憲淑敬睿仁王大妃殿下也。男奭鍾。文科前都承旨。側出一男幼。女爲經歷元世昌妻。承旨娶縣監金宇鉉女。生一男幼。公性恬簡安重。挈將符殆二十年。克練克愼。將佐服其公。卒伍飮其仁。推及諸務。一遵繩尺。擧無過當。處家和易。事判書公。竭力忠養。旣戚聯內屋。起居承奉進止。誠敬匪懈。若夫土木園池之工。盖嘗有之矣。而寓心也。非役心也。故旣成而有求之者。輒許不少恡也。嗚呼。公儒素起家。謙約謹畏。委蛇處順。操術有常。恩遇有始有卒。逮夫今上嗣服。屢畀肘腋之任。寵祿哀榮。世無與兩。詩曰。惟其有之。是以似之。公之所自致然也。公始疾時。慮判書公之過憂。戒家人勿以動靖白。比革。自傷不克終孝。噓唏流涕。絶可悲也。判書公以公行治本末。屬安府使膺壽氏爲狀。委余以東里子産之役曰。將以是冀幸壹惠。庶幾少慰我王大妃殿下無涯之孝思也。遂掇其事行之大者。繤次如右以復之。
[참고]
한국고전번역원 web-db.
『열성왕비세보』4권, 한국학중앙연구원 국학진흥연구사업, 2008.
『남양홍씨남양군파세보』전14권, 남양홍씨남양군파대종중회, 회상사, 2003.
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 헌종 계비 효정왕후(孝定王后)와 남양홍씨(南陽洪氏) - Daum 카페
헌종 계비 효정왕후(孝定王后)와 남양홍씨(南陽洪氏)
헌종 계비 효정왕후(孝定王后)와 남양홍씨(南陽洪氏)1. 왕비가의 가계(1) 왕비의 가계와 역사남양홍씨는 당태종이 고구려에 파견한 여덟 명의 학사(學士) 중의 한 사람인 홍천하(洪天河)의 후손이라고 전한다. 홍천하는 돈황에서 태어났으며, 휘주(徽州) 사람이다. 643년 당 태종이 여덟 명의 학사를 고구려에 파견하였는데, 이 중 하나가 홍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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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열전 홍규[ 洪奎 ] /부 홍융(洪戎)
고려사열전 홍규[ 洪奎 ]
홍규(洪奎)1)는 처음 이름이 홍문계(洪文系)로 남양(南陽 :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 사람이며 부친 홍진(洪縉)2)은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를 지냈다.
홍규는 성품이 담박하고 욕심이 적었으며 뜻이 커서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았다. 원종 때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다. 임연(林衍)이 죽자 아들 임유무(林惟茂)가 뒤를 이어 집권했는데, 홍규가 그의 매부였기 때문에 임유무는 매사를 홍규 및 송송례(宋松禮)3)와 의논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면전에서는 복종하는 듯했으나, 내심으로는 늘 분개해 마지않았다.
왕이 원나라에서 환국하는 것을 임유무가 저지하려 해 나라 안팎이 흉흉해지자 왕은 이분성(李汾成)4)을 은밀히 홍규에게 보냈다. 이분성이 “경은 누대의 명문[衣冠]5)이니 의리를 생각하고 형세를 헤아려서 사직을 이롭게 하고 조상들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왕의 말을 전하자, 홍규가 재배한 후 내일 자신을 부(府)의 문밖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바로 송송례와 함께 계획을 세운 다음 삼별초(三別抄)를 모아 대의로 설득하고 임유무를 체포하게 해 큰 거리에서 목을 베었다.6) 이어 왕을 행궁(行宮)에서 알현하고 세자를 호종해 원나라에 가니 황제가 금포(錦袍)와 안마(鞍馬)를 내려주어 공을 표창하였으며 고려 조정에 명해 1품직으로 임명하게 했다. 이에 따라 좌부승선(左副承宣)이 되었으나 국사가 나날이 글러가고 동료들도 아첨질이나 일삼자 그는 그들과 함께 조정에 있는 것을 수치로 여겨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 버렸다. 왕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올려 주었으나 거듭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으니 당시 나이는 마흔이 못 되었다.
충렬왕과 공주가 황제에게 바치려고 양가 집 딸을 뽑을 때 홍규의 딸도 뽑혔는데, 권세 있고 벼슬 높은 자에게 뇌물을 주어도 모면할 길이 없었다. 이에 한사기(韓謝奇)7)더러 딸의 머리를 깎아 비구니로 만들면 어떻겠냐고 의논하자, 화가 홍규에게 미칠 것이라고 만류했다. 홍규가 듣지 않고 딸의 머리를 깎아 버리자 그 말을 들은 공주가 대노해 홍규를 가두고 가혹한 형벌을 가했으며 가산까지 몰수했다. 또 그의 딸을 가두고 국문하자 딸은 자기 스스로 머리를 깎았을 뿐 부친은 정말 모른다고 진술했다. 공주가 땅바닥에 끌어내려 쇠 채찍으로 마구 때리게 해 만신창이가 되었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재상들이 홍규는 나라에 큰 공을 세웠으니 작은 죄를 무거운 형벌로 다스려서는 안 된다고 건의했고 중찬(中贊) 김방경(金方慶)도 병든 몸을 이끌고 나와 간청했으나 들어주지 않고 바닷섬으로 유배보냈다. 얼마 뒤 홍자번(洪子藩)이 극력 청해 가산은 돌려주게 하였으나 노여움이 아직 풀리지 않아 그의 딸을 원나라 사신 아쿠타이[阿古大]8)에게 넘겨버렸다.
해를 넘기고 소환해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로 올려 더하고 벼슬을 마치게 하며 왕이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역적 임연이 정권을 잡고 왕실을 뒤흔들다가 도리어 천벌을 받아 죽자 이어 그의 아들 임유무가 권력을 이어 받아 반란을 꾸몄다. 짐이 원나라로부터 부왕(父王)을 모시고 원나라 군대와 함께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러 먼저 백관들로 하여금 옛 도읍으로 출영하라고 분부했다. 그러나 임유무는 자기 패거리를 모으고 군사를 훈련시켜 황제의 군대에 대항하려고 계략을 꾸몄다. 이에 경이 충의를 떨쳐 목숨을 돌보지 않고 송송례·김지저(金之氐)9)와 함께 역적의 무리들을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쉽게 제거함으로써 사직이 다시 안정되었으니 참으로 영원토록 잊지 못할 공로라 할 것이다.
부왕께서 경을 발탁하여 후설(喉舌)10)의 관직을 맡기고 또한 측근에 두려 했으나 경은 모두 굳게 사양하고 스무 해 넘게 시골에서 숨어 살았다. 짐이 옛 공적을 생각하여 해당 관청에 명하여 공신각에 초상을 안치하게 하고 철권(鐵券)11)을 내려주었으며 덧붙여 전민(田民)도 지급했다. 그러나 공은 큰데 상은 적은 것이 늘 마음에 걸려 경을 판사(判事)로 임명하였으나, 경이 나이를 이유로 간절히 사직을 청하기에 임시로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허락한 바 있다. 지금 다시 녹봉과 지위를 사양하겠다고 청하니 내가 억지로나마 허락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원나라에서 공신을 포상하는 전례에 따라 경이 비록 큰 잘못을 범하더라도 마땅히 모두 용서할 것이며, 후대 자손도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뒤에 중찬(中贊)으로 올려 벼슬을 마치게 했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판삼사사(判三司事)·수사도(守司徒)·영경령궁사(領景靈宮事)로 임명했다. 충선왕 초에 익성군(益城君)으로 봉해졌고 또한 첨의정승(僉議政丞)·익성군(益城君)·지익성부사(知益城府事)로 올랐다. 충숙왕 3년(1316)에 추성진력정안공신(推誠陳力定安功臣)·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상의첨의도감사(商議僉議都監事)를 지내다 죽으니 시호를 광정(匡定)이라고 하였다. 아들은 홍융(洪戎)이며, 딸12) 가운데 하나가 바로 명덕태후(明德太后)다.
각주
1 홍규(?~1316) : 본관이 남양(南陽)으로 인종대 충신 좌복야 홍관(洪灌)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동지추밀원사를 역임한 홍진(洪縉), 어머니는 철원 최씨 최황(崔貺)의 딸이다. 임연의 사위이기도 했던 그는 원종 11년(1270) 5월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재임시 송송례와 함께 임유무(林惟茂)를 체포·처단함으로써 무인정권의 종식과 왕정복고를 달성하였다. 충렬왕 초에는 정계에서 은퇴하였으나, 충렬왕 말~충선왕 때에는 판삼사사·첨의정승(僉議政丞)을 지냈다. 딸이 충선왕비 순화원비(順和院妃)와 충숙왕비 명덕태후(明德太后)가 되는 등 왕비를 배출하였고, 문화 유씨·해주 최씨·광주 김씨·철원 최씨 등 문벌과 혼인관계를 맺었다. 그의 가계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121, 열전34, 충의, 홍관전(洪灌傳) 참조.
김광철, 『고려후기세족층연구』, 동아대출판부, 1991, 70쪽.
2 홍진(?~?) : 고종~원종 때 중서사인(中書舍人)·간의대부(諫議大夫)·상서우복야 등을 역임한 관료이다. 고종 37년(1250) 2월에는 추밀원부사 최자(崔滋)와 함께 몽고에 다녀왔으며, 같은 왕 45년(1258)에는 동지공거로서 지공거 최자(崔滋)와 함께 과거를 주관하여 장한문(張漢文)·허공(許珙)·설공검(薛公儉) 등을 선발했다.
박용운, 『고려시대 음서제와 과거제연구』, 일지사, 1990, 418쪽.
3 송송례(?~1289) : 본관은 여산(礪山)으로, 아버지는 지문하성사로 추봉된 송희식(宋希植)이다. 원종 11년(1270) 직문하성사(直門下省事)로서 홍규와 함께 권신 임연(林衍)의 아들 임유무(林惟茂)를 죽여 왕정을 복고시켰다. 이후 상장군·충청도 지휘사·추밀원부사를 역임하면서 사신으로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원종 14년에는 원나라에 책봉사(冊封使)로 파견되었다. 같은 왕 15년에는 일본정벌을 준비하기 위해 추밀원부사 기온(奇蘊), 상장군 김광원(金光遠) 등과 함께 정동군(征東軍)을 추가로 징발하였다. 뒤에 중찬(中贊)으로 치사한 후 충렬왕 15년(1289)에 사망하였다.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지추밀원사를 역임한 배천 조씨 조유정(趙惟挺)의 딸과 혼인하여 상장군 송염(宋琰)과 중찬(中贊) 송분(宋玢) 등을 두었다. 이 가계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125, 열전38, 간신, 송분전(宋玢傳) 참조.
4 이분성(1240~1278) : 본관은 염주(鹽州)이며, 이습(李槢)의 처음 이름이다. 이분성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123, 열전36, 폐행, 이분희(李汾禧) 부 이습전(李槢傳) 참조.
5 의관 : 문벌이 좋은 집안을 말한다. 『후한서』 권46, 열전36, 곽궁전(郭躬傳)에는 “곽궁은 자가 중손으로 영천 양적 사람이다. 집안은 대대로 명문이었다(郭躬字仲孫 潁川陽翟人也 家世衣冠).”고 하였다.
6 베었다 : 원종 11년(1270) 5월 어사중승(御史中丞) 홍규(洪奎)와 직문하성사(直門下省事) 송송례(宋松禮) 등이 국왕의 밀명을 받고 임유무(林惟茂)를 체포·처단하여 무인정권의 종식과 왕정복고·개경환도(開京還都)를 이룬 경오정변(庚午政變)을 말한다. 몽고와의 강화에 따른 여몽전쟁의 종식은 왕실의 위상 강화와 무인정권의 약화를 예고했던 것으로, 이 때 홍규·송송례 등이 국왕 원종과 연결되어 임유무를 제거함으로써 무신난 이후 1세기 만에 왕정복고를 이룰 수 있었다.
성봉현, 「임연정권에 관한 연구」 『호서사학』 16, 1988.
정수아, 「무인정권의 붕괴와 그 역사적 성격」 『한국사』 18, 국사편찬위원회, 1993, 119~121쪽.
7 한사기(?~?) :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중찬(中贊)을 지낸 한강(韓康)의 아들로, 충렬왕 때 도교서승(都校署丞)·간의대부(諫議大夫)·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 등을 역임한 문신관료이다. 뚤루게[禿魯花]가 되어 원나라에 숙위(宿衛)하러 갈 때 가족을 이끌고 들어갔다. 원간섭기 세족으로 성장한 평강 채씨 채인규(蔡仁揆)의 둘째 딸과 결혼하였다. 이 가계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107, 열전20, 한강전(韓康傳) 참조.
김용선 편, 「채인규(蔡仁揆) 묘지명」·「한수(韓脩) 묘지명」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2001.
8 아쿠타이 : 원 성종 말 좌승상이었던 아쿠타이[阿忽台]로, 홍규 묘지명에는 그의 사위 ‘阿高歹’로 표기되어 있다. 그는 원 성종 연간에 지추밀원사·좌승상을 역임하였고, 성종 사후 제위계승 분쟁에서 성종비 불루간[卜魯罕] 황후와 연계하여 세조의 손자 안서왕(安西王) 아난다[阿難答]를 옹립하려다 우승상 카라카순[哈剌哈孫]의 지원을 받은 무종·인종 형제에게 패배하여 처형되었다.
스기야마 마사아키, 임대희 외 역, 『몽골세계제국』, 신서원, 1999, 318~319쪽.
9 김지저(?~?) : 원종~충렬왕 때 장군·대장군을 지낸 무신관료이다. 원종 11년(1270) 5월 경오정변(庚午政變) 때에는 송송례(宋松禮)·홍문계(洪文系)·송분(宋玢) 등과 함께 임유무(林惟茂)를 제거하여 무신정권을 종식시키고 왕정복고를 이루었으며, 강화도(江華島)에 파견되어 출륙환도(出陸還都)를 반대하는 삼별초를 해체시켰다. 충렬왕 7년(1281) 12월에는 임유무를 처단한 공로를 인정받아 포상을 받았다.
10 후설 : 왕의 말을 아래에 전하고 아래의 말을 왕에게 전하는 관직으로 왕명을 출납하는 승지(承旨)의 관직을 비유한 말이다. 『시경』, 대아(大雅)편, 증민(烝民)에는 “왕명을 출납하네 왕의 목이며 혀로다(出納王命 王之喉舌).”라고하고, 그 전(傳)에는 “후설은 6관의 장이다(喉舌 冢宰也).”고 하였다.
11 철권 : 국왕이 공신에게 내려주던 쇠로 만든 패(牌)이다. 이 패의 표면에는 공신의 이력과 은수(恩數)를 새기고 그 공을 기록하며, 안쪽에는 면죄(免罪)나 감록(減祿)을 새겨 나중에 화를 면하게 하였다. 그 글자는 모두 금으로 새기고 두 개로 나누어 왼쪽은 공신에게 주고, 오른쪽은 내부(內府)에 보관하여 후일의 징표로 삼았다. 『사기(史記)』에는 “공신과 절부를 쪼개어 맹세를 하고 붉게 쓴 글씨와 철권은 금 상자와 돌 상자에 넣어 그것을 종묘에 저장한다(與功臣剖符作誓 丹書鐵券 金匱石室 藏之宗廟).”고 하였다.
12 딸 : 홍규(洪奎)는 임연(林衍)의 딸 진천 임씨(鎭川林氏)와 혼인한 후, 뒤에 찬성사를 지낸 광주 김씨 김련(金鍊)의 딸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과 혼인하였다. 김씨 부인은 아들 홍융(洪戎)과 딸 다섯을 낳았는데, 맏딸은 원나라 좌승상(左丞相) 아쿠타이에게, 둘째 딸은 도첨의찬성사를 역임한 청주 정씨 정해(鄭瑎)에게, 넷째 딸 남양군부인(南陽郡夫人)은 찬성사를 지낸 원주 원씨 원충(元忠)에게 각각 시집갔으며, 셋째 딸은 충선왕의 순화원비(順和院妃)이고, 막내 딸은 충숙왕의 덕비(德妃) 곧 명덕태후(明德太后)이다.
김용선 편, 「홍규 묘지명」·「홍규 처 김씨 묘지명」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2001.
○洪奎, 初名文系, 南陽人, 父縉 同知樞密院事. 奎性恬淡寡欲, 倜儻不覊. 元宗朝, 拜御史中丞. 林衍死, 子惟茂繼執權, 奎·惟茂姉夫也, 惟茂每事議於奎及宋松禮. 奎·松禮面從, 心常憤惋. 王還自元, 惟茂欲拒之, 中外洶洶. 王遣李汾成, 密諭奎曰, “卿累葉衣冠, 當揆義度勢, 以利社稷, 無忝祖父.” 奎再拜謂汾成曰, “明日待我府門外.” 卽與松禮謀, 集三別抄, 諭以大義, 擒惟茂, 斬于市. 遂謁王行宮, 從世子如元, 帝賜錦袍鞍馬, 以旌其功, 令授本國一品職. 於是, 拜左副承宣, 見國事日非, 同僚又阿意苟容, 恥與並列, 辭免. 陞樞密院副使, 又辭不就, 時年未四十.
忠烈與公主, 選良家女, 將獻帝, 奎女亦在選中, 賂權貴, 未得免. 謂韓謝奇曰, “吾欲剪女髮, 如何?” 謝奇曰, “恐禍及公.” 奎不聽遂剪, 公主聞之大怒, 囚奎酷刑, 籍其家. 又囚其女訊之, 女曰, “我自剪, 父實不知.” 公主令捽地, 以鐵鞭亂箠, 身無完肌, 終不伏. 宰相言, “奎有大功於國, 不可以微罪置重典.” 中贊 金方慶, 亦扶病請之, 不聽流海島. 未幾, 洪子藩力請, 命還家産, 然怒未解, 以其女賜元使阿古大. 踰年召還, 加僉議侍郞贊成事·判典理司事致仕.
王賜敎曰, “賊臣林衍操權柄, 動搖王室, 旋被天誅, 其子惟茂, 襲權構亂. 朕自上朝, 奉父王與官軍到鴨綠, 先勑百官, 出迎舊都. 惟茂結黨養士, 規拒王師. 卿奮忠義, 不顧死生, 與宋松禮·金之氐, 剪除逆黨, 易如反掌, 社稷再定, 實萬世帶礪之功也. 父王擢任喉舌, 又置帷幄, 卿皆固辭, 屛居田墅二十餘年. 朕懷舊績, 命有司, 圖形壁上, 賜以鐵券, 仍給田民. 然功大賞微, 常以慊然, 授卿判事, 卿請老彌切, 姑許懸車. 今又請避祿位, 予不敢不勉從, 且循上國賞功臣故事, 雖有大犯, 當悉原免, 宥及後世子孫.” 後加中贊致仕, 尋判三司事·守司徒·領景靈宮事. 忠宣初, 封益城君, 又加僉議政丞·益城君·知益城府事. 忠肅三年, 以推誠陳力定安功臣·南陽府院君·商議僉議都監事卒, 謚匡定. 子戎, 女一, 卽明德太后.
홍규(洪奎) 부 홍융(洪戎)
홍융(洪戎)은 충숙왕 때 삼사사(三司使)를 지냈다. 만호(萬戶) 황원길(黃元吉)1)의 딸을 후실로 삼았는데, 그 용모가 빼어났기 때문에 홍융은 항상 규방(奎房)을 굳게 닫아 둔 채 친척이라도 서로 만나지 못하게 했다. 홍융은 충혜왕의 외삼촌이었는데 홍융이 죽은 후 환관 최화상(崔和尙)2)이 황씨(黃氏)의 미모를 추켜세우자 충혜왕이 밤에 그 집으로 가서 정을 통한 후 금은 그릇, 채색 비단, 모시베 및 쌀과 콩을 내려주었고 황씨도 왕을 초청해 자기 집에서 잔치를 열곤 했다.
왕이 열약(熱藥)을 복용한 관계로 그와 정을 통한 여인들은 임질에 많이 걸렸다. 황씨도 이 병에 걸리자 왕은 의술에 능한 승려 복산(福山)을 시켜 치료하게 하였다. 홍융의 먼저 부인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나유(羅裕)의 딸로 세 아들을 낳았으니 홍주(洪澍)·홍언박(洪彦博)·홍언유(洪彦猷)이며, 황씨가 두 아들을 낳으니 하나는 홍언수(洪彦脩)이고 하나는 기록에 그 이름이 나와 있지 않다.
홍주는 첨의상의(僉議商議)·삼사우사(三司右使)·남양군(南陽君)까지 지내다가 충혜왕 후3년(1342)에 죽었는데, 날마다 술에 골아 떨어져 살림살이나 명예나 이익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홍언박은 따로 전기가 있다. 홍언유는 중대광(重大匡)·남양군(南陽君)까지 올랐으며, 홍언수는 검교참지문하부사(檢校叅知門下府事)를 지냈다.
각주
1 황원길(?~?) : 충렬왕 유모의 아들로, 내시낭장(內侍郞將)·삼사우사(三司右使)·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만호(萬戶)를 역임하였다. 딸은 판삼삼사(判三司事)를 지낸 남양 홍씨 홍융(洪戎)의 후처가 되었다.
2 최화상(?~1352) : 충목왕 즉위년(1344) 5월 원나라 조정에 의해 충혜왕의 폐행(嬖幸)으로 지목되어 유배되었다가 뒤에 풀려났다. 공민왕 원년(1352) 9월에는 정천기(鄭天起) 등과 함께 조일신(趙日新)의 당여가 되어 기원(奇轅) 등을 죽였으나 다음 달에 도리어 조일신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최화상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131, 열전44, 반역, 조일신전(趙日新傳) 참조.
○戎, 忠肅時, 拜三司使. 繼室以萬戶 黃元吉之女, 有姿色, 戎常閉閨房, 雖親戚不許相見. 戎於忠惠爲舅, 戎卒, 內竪崔和尙譽黃氏美, 忠惠夜至其家, 私焉. 賜金銀器·綵帛·紵布·米豆, 黃氏亦邀王宴其家. 王餌熱藥, 所幸婦人多淋疾, 黃氏亦得是疾, 王命醫僧福山治之. 戎先娵密直 羅裕之女, 生三子澍·彦博·彦猷. 黃氏生二子, 一彦脩, 一史失其名. 澍, 官至僉議商議·三司右使·南陽君, 忠惠後三年卒, 日沈醉, 不以産業名利介意. 彦博, 自有傳. 彦猷, 重大匡·南陽君. 彦脩, 檢校叅知門下府事.
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 고려사열전 홍규[ 洪奎 ] /부 홍융(洪戎)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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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열전 홍언박[洪彦博] /부 홍사우(洪師禹) /부 유연(柳淵)
고려사열전 홍언박[洪彦博]
홍언박(洪彦博)1)은 자가 중용(仲容)으로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 홍규(洪奎)의 손자다.
젊어서 독서를 좋아했고 글을 잘 지었다. 충숙왕 17년(1330) 과거에 급제하니2)왕이 내구(內廐)의 말 한 필을 하사하였다. 충목왕 4년(1348)에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임명되었다가 얼마 뒤에 지신사(知申事)로 승진했다. 공민왕 원년(1351)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가 되었고 추성양절좌리공신(推誠亮節佐理功臣)의 호를 하사받았으며 남양군(南陽君)으로 봉해졌다. 당시 육시(六寺) 판사(判事)의 직계(職階)를 봉익(奉翊)으로3)정하였는데, 성랑(省郞)이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왕이 노하여 우사의(右司議) 송천봉(宋天鳳)을 가두고 죄를 주려 하자 홍언박이 홍빈(洪彬)과 함께 구해준 결과 죄를 면할 수 있었다. 3년(1354)에 좌정승(左政丞)으로 임명되었다가 우정승(右政丞)으로 옮겼으며 단성양절보리안사공신(端城亮節輔理安社功臣)의 호를 더하고 곧이어 남양후(南陽侯)로 봉하였다. 기철을 제거한 후 일등공신으로 기록되었으며 10년(1361)에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홍건적이 수도 가까이 밀어닥치자 대부분이 피난하자고 했지만, 홍언박만은 “선왕이 이룩한 터전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하며 왕에게 스스로 백성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얼마 뒤 서경의 아군이 패했다는4)보고가 올라오자 왕은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고 홍언박도 호종했다. 이듬해 개경을 수복하였는데, 승리를 거두게 만든 방책 가운데는 홍언박이 수립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뒤에 판밀직사(判密直事) 송경(宋卿)5)이 홍언박을 이렇게 비판했다.
“백성들이 오래전부터 공께서 다시 재상이 되기를 바랐는데, 지금 수상이 된 마당에 어찌 한 가지 일도 여망에 부응하지 못하십니까? 지난해 종묘사직이 적의 손에 떨어지고 주상께서는 피난을 떠나 천하의 비웃음을 받은 것은 공이 진작 대책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공의 아들이 부(府)의 병권을 장악하고 사위는 헌사(憲司)의 장이 되어 부귀가 이미 지극한데 어찌 나라 일을 걱정하지 않으십니까?”
홍언박이 그 말을 듣고 불쾌하게 여긴 나머지 송경을 파면시켰는데, 당시 홍언박의 사위 유연(柳淵)이 감찰대부(監察大夫)로 있었기에 송경이 그렇게 말한 것이다.
행궁에서 구할 수 있는 금은이 너무 적은데 비해 왕의 씀씀이는 절제가 없자, 홍언박이 왕에게 “내탕의 저축이 너무 적으니 개경에 있을 때 쓰시던 것보다 더욱 절약해 쓰셔야 합니다.”라고 충고했다. 왕이 한참 바라다보기만 할 뿐 대꾸하지 않자, 홍언박은 물러나와 “간언을 따르지 않으시니 어찌 이리도 자만하여 남의 말을 듣지 않으시는가?”라고 한탄했다. 이제현이 그 말을 듣더니 “내가 재상으로 있을 때도 매양 그런 식으로 하셨으니 그때마다 내가 주상을 애석히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토로했다. 왕이 강화(江華 :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로 천도하려고 개태사(開泰寺)6)의 태조 진전(眞殿)에서 점을 쳐보라고 지시하자 인심이 흉흉해졌다. 태후 홍씨(洪氏)는 홍언박의 고모였는데, 홍언박을 불러놓고,
“너는 외척의 큰 집안 출신으로 지위가 총재이니 조야의 촉망을 한 몸에 모으고 있다. 지금 임금께서 천도하려고 하지만 나라 사람들이 모두 원치 않는데 너는 어찌 중지하라고 간하지 않는가?”
라고 꾸짖었다. 홍언박이 왕에게 그 말을 보고하자 왕이,
“나는 천도를 결정한 것이 아니라 그저 길흉을 알아보려고 한 것뿐이다. 점을 쳐본 결과 불길하였다.”
고 변명하니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당시 홍건적이 다시 온다는 유언비어가 떠돌아 군사를 지휘할 주장(主將)을 선발하기로 의논이 모아졌는데, 홍언박은 국사에 관심이 없다하여 배제하고 좌정승(左政丞) 유탁(柳濯)을 도통사(都統使)로 삼았다.
홍언박과 유숙(柳淑)이 함께 과거를 주관하게 되자 재추들이 잔치를 성대히 열어 그들을 위로하였다. 홍언박은 공을 세운 외척이자 수상이며, 유숙은 왕의 측근에서 총애받는 받는 신하였으므로, 당장 피난을 가야 할 경황없는 때에도 신하들이 이처럼 그들을 우대했던 것이다. 12년(1363)에 왕이 환도를 미루면서 출발하지 않자 홍언박이,
“떠날 준비가 이미 끝났는데 만약 이 시기를 놓치면 농사와 일에 지장을 주어 백성이 그 피해를 받을 것입니다.”
라고 간언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남쪽으로 피난한 뒤로 제사 의식이 무너지고 누락되었으며 초하루와 보름에 지내는 공자(孔子)의 제사도 폐지되었다. 성균관과 12도에서 석전(釋奠)을 다시 거행하자고 청하였으나, 홍언박은 안팎으로 일이 많다는 이유로 묻어버렸다.
흥왕사(興王寺)의 변란7)때 아들 홍사범(洪師範)8)이 사람을 보내어 피신하라고 급히 알려왔다. 그러나 아직 이른 시간이라 홍언박은 첩과 함께 누워 있다가 그 소식을 듣더니 태연자약하게 “먹지 않고 국난을 해결할 수는 없지.” 하며 죽을 쑤게 하였다. 적도가 일당을 홍언박의 처소로 달려가게 하자 문객이 급히 “역적들이 곧 쳐들어 올 텐데 아직도 일어나지 않으십니까?”라고 재촉했다. 잠시 후 적도들이 당도해 “나와서 황제의 명을 맞이하라.”고 소리치자 집안 사람이 “역적들이 문에 있으니 빨리 피하셔야 합니다.”라고 알렸다. 그러나 홍언박은 “내가 그들을 만나 반란을 일으킨 연유를 물어보겠다.”고 하며 끝내 피하지 않았다. 아들과 처가 피하라고 채근해도 “수상된 몸으로 어찌 죽음을 피하는 자가 있겠느냐?”라고 거절했다. 천천히 의관을 차려입고 방문을 나서며 “너희들은 역적주제에 어찌하여 황제의 말씀을 사칭하느냐?”고 꾸짖자 적이 난도질해 피가 서까래까지 튀었다. 이때 그의 나이 쉰다섯이었다. 흥왕사에 있던 적도들이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모두 만세를 불렀다. 뒤에 시호를 문정(文正)이라 하고 예를 갖춰 장사지냈다.
아들은 홍사보(洪師普)·홍사범·홍사우(洪師禹)·홍사원(洪師瑗)이다. 홍사보는 관직이 판각문사(判閣門事)에 이르렀는데, 아들 홍관(洪寬)이 왕을 시역했기 때문에 그도 함께 처형되었다. 홍사범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명나라 수도에 가서 촉(蜀)을 평정한 것9)을 축하하고 돌아오던 길에 바다 가운데 있는 허산(許山)에 이르러 태풍을 만나 익사하였다. 공민왕이 애도하고 특별히 시호를 하사하였다.
각주
1 홍언박(1309~1363) :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증조는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홍진(洪縉)이고 조부는 정승(政丞) 홍규(洪奎)이며 조모는 광주 김씨 참지정사(參知政事) 김련(金鍊)의 딸이다.
아버지는 판삼사사(判三司事) 홍융(洪戎)이고 어머니는 나주 나씨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나유(羅裕)의 딸이다.
홍융은 모두 4남 5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삼사우사 홍주(洪澍), 2남은 홍언박, 3남은 밀직부사(密直副使) 홍언유(洪彦猷), 4남은 홍언수(洪彦脩)이다.
홍언박은 안동 권씨 찬성사(贊成事) 권준(權準)의 딸과 결혼하여 4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판각문사(判閣門事) 홍사보(洪師普), 2남은 지밀직사사 홍사범(洪師範), 3남은 도순문사(都巡問使) 홍사우(洪師禹), 4남은 전서(典書) 홍사원(洪師瑗)이었으며 딸은 진주 유씨 찬성사 유연(柳淵)에게 시집갔다.
김용선 편, 「권준(權準) 묘지명(墓誌銘)」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2001.
김광철, 『고려후기세족층연구』, 동아대출판부, 1991.
2 급제하니 : 홍언박은 충숙왕 17년 10월 순흥 부원군(順興府院君) 안문개(安文凱)를 지공거로, 우대언(右代言) 이담(李湛)을 동지공거로 하여 송천봉(宋天鳳)·정운경(鄭云敬) 등과 함께 과거에 급제하였다.
『고려사』 권73, 지27, 선거, 과목, 선장(選場).
『양촌집(陽村集)』 권35, 동현사략(東賢事略), 시중 홍언박.
3 봉익으로 : 공민왕 5년 반원개혁 이후 단행된 관제개혁 이전까지는 충선왕 2년에 정비된 문산계를 활용하였는데 봉익은 그 중 종2품에 해당한다.
박용운, 『고려시대관계·관직연구』, 고려대출판부, 1997, 70쪽.
4 서병이 패했다는 : 공민왕 10년 10월 홍건적이 10만 대군으로 다시 침입하자 고려에서는 추밀원부사 이방실(李芳實)을 서북면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로 삼고 동지추밀원사 이여경(李餘慶)을 보내어 자비령(慈悲嶺)에 목책을 세우게 했다. 또 안우(安祐)를 상원수로, 김득배(金得培)를 도명마사로 삼아 홍건적을 방비하게 하였다. 그해 11월에 안우와 이방실은 홍건적을 패퇴시키기도 하였으나 이후 안주싸움에서 대패하여 마침내 자비령 방어선이 무너지게 되었다. 서병의 패배는 이 때의 패전을 말한다.
나종우, 「홍건적과 왜구」 『한국사』 20, 국사편찬위원회, 1994.
5 송경(?~?) : 자세한 세계는 확인할 수 없으나 공민왕 14년(1365)에 연안부원군으로 책봉되었다는 사실로 보아 본관은 연안일 가능성이 높다. 공민왕대 주로 활약하였으며 관직은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6 개태사 : 태조 23년(940) 후삼국을 통일한 직후 후백제 사람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연산현(連山縣 :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에 창건한 화엄종 계열의 왕실 진전(眞殿)사원이다. 봉은사(奉恩寺)·봉업사(奉業寺)와 함께 태조의 진전이 설치되었으며, 태조의 옷 한 벌 및 옥대 1요(腰)도 보관하였다. 태조는 이 사원의 낙성 때 화엄법회에서 친히 소문(疏文)을 짓기도 하였다. 국가 중대사가 있으면 태조의 영전에서 그 길흉을 점치기도 하였는데, 공민왕 11년(1362)에는 첨의평리(僉議評理) 이인복(李仁復)을 개태사에 보내 강화천도 여부에 대해 점치게 한 바 있다. 숙종의 넷째 아들 원명국사(圓明國師) 징엄(澄儼)이 주지하였고 정각승통(正覺僧統) 영소(靈炤)가 강주(講主)하였다. 오교 도승통(五敎都僧統) 수기(守其)와 법형제이자 내도량(內道場)의 전주(殿主)로 강화경판 『고려대장경』 각성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승통(僧統) 천기(天其)도 이 사원의 주지를 지냈다. 고종 5년(1218)에는 『범서총지집(梵書摠持集)』이 이 사원에서 개판되었으며, 현재 『고려대장경』의 「보유판목록(補遺板目錄)」에 포함되어 있는 균여(均如) 저술의 『석화엄지귀장원통초(釋華嚴旨歸章圓通鈔)』 2권·『석화엄교분기원통초(釋華嚴敎分記圓通鈔)』 10권의 저본도 이 사원에서 수집되었다. 한편 세종 때에는 현재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천호산(天護山)으로 그 위치를 옮겼으며, 당시는 법상종(法相宗) 사원이었다.
한국불교전서편찬위원회 편, 『한국불교전서』 4책, 동국대출판부, 1982.
허흥식, 『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1986, 15·74~75·202쪽.
오경섭,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연구」 『서지학연구』 창간호, 1986.
최영호, 「13세기 강화경판 『고려대장경』의 각성사업과 해인사」 『한국중세사연구』 13, 2002.
7 흥왕사의 변란 : 공민왕은 홍건적이 다시 침입하자 10년(1361) 11월 복주(福州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로 피난갔다가 1년 3개월만인 왕 12년(1363) 2월에 환도할 때 흥왕사를 어궁(御宮)으로 정하여 머물러 있었는데 윤3월 초하루에 김용(金鏞)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흥왕사의 변’이라 한다. 이때 반란군에 의해 홍언박이 죽임을 당하였으나, 최영(崔塋) 등이 반란을 진압하였다. 흥왕사(興王寺)는 지금의 개성직할시 개풍군 덕적산 남쪽 기슭에 있었던 고려시대의 대표적 사찰이며, 고려 문종의 원찰(願刹)로 문종 21년(1067) 정월에 낙성하였다.
8 홍사범 : 홍언박의 둘째아들로 공민왕 3년 좌부대언(左副代言)이 되었으며 병부와 이부의 상서를 거쳐 관직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이르렀다. 아들은 홍서(洪恕)와 홍연(洪涓)이었다.
김광철, 『고려후기세족층연구』, 동아대출판부, 1991.
9 촉을 평정한 것 : 명나라 홍무(洪武) 4년(공민왕 20, 1371) 쓰촨[四川]의 군웅(群雄) 명승(明昇)을 평정한 것을 말한다. 명승의 아버지는 명옥진(明玉珍)으로 수주(隨州 : 지금의 후뻬이성[湖北省])에서 태어났으나 원래는 북방유목민이었다. 원에 대항하여 북방에서 반란을 일으킨 서수휘(徐壽輝)의 휘하에서 여러 차례 군공을 세워 지정 17년 공민왕 6년(1357)에 농촉행성우승(隴蜀行省右丞)에 임명된 후 지정 20년에 스스로 농촉왕이 되었다. 지정 26년 명옥진이 사망하자 아들 명승이 왕위를 이었으나 5년 만에 주원장에게 패배하여 고려로 보내졌다. 고려로 온 명승은 공민왕 22년(1373) 총랑(摠) 윤희종(尹希宗)의 딸에게 장가든 후, 조선 태조 3년(1394)에 죽었다.
『명사(明史)』 권123, 열전19, 명옥진(明玉珍).
○洪彦博, 字仲容, 南陽府院君 奎之孫. 少好讀書, 善屬文. 忠肅十七年登第, 王賜廐馬一匹. 忠穆四年, 授密直提學, 俄遷知申事. 恭愍元年, 拜僉議贊成事, 賜推誠亮節佐理功臣號, 封南陽君. 時定六寺判事階奉翊, 省郞不署依牒. 王怒囚右司議 宋天鳳, 將罪之, 彦博與洪彬, 營救得免. 三年, 拜左政丞, 遷右政丞, 加端誠亮節輔理安社功臣號, 尋封南陽侯.
錄誅奇轍功爲一等, 十年, 改門下侍中. 紅賊逼京城, 衆議欲避之, 彦博獨以爲, “先王基緖, 不可隳也.” 勸王自將與民効死. 俄而西兵告敗, 王南幸, 彦博從之. 明年收復京城, 制勝方略, 多彦博指畵. 判密直事 宋卿, 言於彦博曰, “蒼生望公復相久矣, 今爲首相, 何無一事協輿望乎? 去歲播遷, 宗社陷賊, 主上蒙塵, 取天下笑, 公之不早圖也. 今公子握府兵, 壻長憲司, 富貴已極, 何不憂國家?” 彦博憚之罷卿. 時彦博壻柳淵爲監察大夫故, 卿云然. 行宮所需金銀乏少, 王之用度無節, 彦博白曰, “內帑之儲何如? 在都時經費, 宜加裁省.” 王熟視不應, 彦博退曰, “言不見從, 是何訑訑也?” 李齊賢聞之曰, “吾爲相時, 每言事若此, 吾未嘗不爲王惜也.”
王欲遷都江華, 命卜於開泰寺 太祖眞殿, 人民洶洶. 太后洪氏, 彦博姑也, 面責彦博曰, “爾以外戚巨室, 位冡宰, 中外之望咸屬焉. 今王欲遷都, 而國人皆不欲, 爾盍諫止之?” 彦博以告於王, 王曰, “予非決遷, 欲知吉凶耳. 卜果不吉.” 國人大悅. 時訛言紅賊復來, 議選大帥, 以彦博不恤國事, 命左政丞 柳濯爲都統使. 彦博與柳淑, 同掌貢擧, 宰樞盛設筵以慰. 彦博勳戚首相, 淑帷幄寵臣, 雖當播越之時, 群臣所以傾待者如此. 十二年, 王將還都, 遷延不發, 彦博曰, “供頓已備, 若淹此期, 防農害事, 民受其弊.” 王從之. 南遷後, 祀典隳缺, 文宣王朔望奠亦廢. 成均十二徒, 請復行, 彦博以中外多事寢之,
興王之變, 子師範遣人走報, 令避之. 時尙早, 彦博方與妾臥, 聞之自若曰, “不可不食而赴難.” 令作粥. 賊遣其黨, 趣彦博所舍, 門客急告曰, “賊將至而猶不起耶?” 俄而賊至曰, “出迎帝命.” 家人報曰, “賊在門, 宜速避.” 彦博曰, “吾見賊, 問其故.” 終不避. 子及妻勸避, 猶不肯曰, “安有爲首相而逃死者乎?” 徐整衣冠, 出戶曰, “爾乃賊也, 何稱帝旨?” 賊斮之, 血濺屋椽. 年五十五. 賊在興王者聞之, 皆呼萬歲. 贈謚文正, 以禮葬之. 子師普·師範·師禹·師瑗. 師普官至判閣門事, 以子寬弑逆被誅. 師範 知密直司事, 如京師賀平蜀, 還至海中許山, 遭風溺死. 恭愍悼之, 特賜謚.
홍언박(洪彦博) 부 홍사우(洪師禹)
홍사우(洪師禹)는 공민왕 때 경상도의 도순문사(都巡問使)로 있으면서 합포(合浦 :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시)를 진무하였다. 청렴하고 신중하게 스스로를 단속하여 향리와 백성들로 부터 존경을 받았다. 왜적이 구산현(龜山縣 : 지금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및 경상남도 진해시 인근) 삼일포(三日浦)를 노략질하자 홍사우가 가서 공격하니 적은 궤멸되어 달아났다. 승세를 타고 힘차게 공격하자 적이 산으로 올라갔는데, 홍사우가 군사를 지휘하여 사면에서 공격해 2백여 명의 목을 베었다.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천여 명이었으며, 포로가 되었던 10명도 탈환해 왔고 노획한 무기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뒤에 전라도의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되었는데, 아들 홍륜(洪倫)이 왕을 시역하자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어 국문한 다음 곤장을 때리고 먼 고을로 유배보냈다. 곧이어 최인철(崔仁哲)을 합주(陜州 :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로 보내어 홍사우와 아들 홍이(洪彛)를 교살형에 처하게 하였다. 형을 당할 때 홍이가 울면서 최인철에게 “나를 죽이고 우리 아버지를 풀어 주시오.”라고 호소하니 홍사우는 “나는 이미 늙었으니 늙은 나를 죽이고 내 아들을 풀어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리고는 “내가 과거 왜적을 그리도 많이 죽였는데 그 공은 어디 있는가?”라고 탄식한 후 부자가 서로 붙들고 죽으니 사람들이 다들 불쌍히 여겼으며 전라·경상도의 백성들 가운데는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홍사원(洪師瑗)은 전서(典書)를 지냈다.
○ 師禹, 恭愍時, 爲慶尙道都巡問使, 鎭合浦. 淸謹自守, 吏民畏愛. 倭寇龜山縣三日浦, 師禹往擊之, 賊潰走. 乘勝奮擊, 賊登山, 師禹麾兵四面攻之, 斬獲二百餘. 溺水死者以千數, 奪被虜者十人, 兵仗不可勝紀. 後爲全羅道都巡問使, 以子倫弑逆, 遣人鞫之, 杖流遠州. 尋遣崔仁哲, 縊殺師禹及子彝于陜州. 當刑彝泣謂仁哲曰, “請誅彝, 釋吾父.” 師禹曰, “吾已老矣, 願誅老夫, 釋吾子.” 仍歎曰, “吾嘗斬獲倭賊甚多, 功何在耶?” 父子相携而死, 人皆惜之, 全羅·慶尙之民, 至有流涕者. 師瑗 典書.
홍언박(洪彦博) 부 유연(柳淵)
유연(柳淵)1)은 진주(晋州 :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시) 사람으로, 삼사좌사(三司左使)를 지낸 유지정(柳之淀)의 아들이다. 공평하고 청렴하며 재주가 있다고 일컬어졌다. 또 맡은 일은 반드시 신중하게 처리하였고 벼슬에 올라서는 직무를 잘 감당했다. 여러 차례 장수로 임명되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큰 신뢰를 받았다. 우왕 2년(1376)에 찬성사상의(贊成事商議)를 지내다 마흔 아홉 살로 죽으니, 조야에서 모두 슬퍼했고 시호를 정정(貞靖)이라 하였다. 아들은 유용생(柳龍生)2)이다.
각주
1 유연(1328~1376) : 진주 유씨(晋州柳氏)로 증조는 군부총랑(軍簿摠郞)을 지낸 유부(柳榑)이며 조부는 유우(柳玗)이다. 아버지는 삼사좌사 유지정(柳之淀)이고 어머니는 안동김씨 김승용(金承用)의 딸이다. 유지정은 모두 4남 6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유손(柳巽), 2남은 출가하여 승려가 되어 원유(元乳)라 하였다. 3남은 유연, 4남은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유원(柳源)이었다. 유원은 홍언박의 딸과 결혼하여 유용생을 낳았고 유용생은 공암허씨 허완(許完)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조선이 건국된 후 관직이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이수건, 『한국중세사회사연구』, 일조각, 1984, 310~311쪽.
김광철, 『고려후기세족층연구』, 동아대출판부, 1991, 85~86쪽.
2 유용생(?~1434) : 그의 외가가 공민왕의 외척이었으므로 어려서 왕궁에서 자랐으며 일찍부터 관직에 나아가 공양왕대에 관직이 밀직 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다. 조선 태종 때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경상도 도절제사(慶尙道都節制使)로 있을 때 왜구를 소탕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후 공조와 형조 판서,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역임하였으나 형조판서로 재직할 당시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 형제 사건관련자를 엄하게 국문하지 않았다고 하여 대간에게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柳淵, 晋州人, 三司左使之淀子也. 以公廉才幹稱. 執事必恪, 居官稱職. 屢爲將帥, 頗得衆心. 辛禑二年, 以贊成事·商議卒, 年四十九, 中外惜之, 謚貞靖. 子龍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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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손(洪敬孫)
총론
[1409년(태종9)∼1481년(성종12) = 73세]. 조선 초기 세종~세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길보(吉甫), 호는 우국재(友菊齋)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인데,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사재감(司宰監) 직장(直長) 홍지(洪智)이고, 어머니 개성왕씨(開城王氏)는 고려 왕실 수연대군(壽延大君) 왕규(王珪)의 딸이다. 고려 전법(典法) 좌랑(佐郞) 홍상부(洪尙溥)의 손자이고, 당성군(唐城君) 홍징(洪徵)의 증손자이다.
세종~단종 시대 활동
1435년(세종17) 사마시에 합격하고, 1439년(세종21) 31세로 친시(親試) 문과에 병과 급제하였다.
승문원에 들어가서 정자 · 저작 · 박사로 승진하였다. 1443년(세종25) 남부령(南部令)을 거쳐 승문원 교리로 옮겼다가, 사헌부 감찰 등을 지냈다. 1445년(세종27) 2월 금구현령(金溝縣令)으로 나갔다가, 1450년(세종32) 삼군진무(三軍鎭撫)가 되어 승문원 교리를 겸임하였다. 1452년(문종2)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로 나갔다가, 1453년(단종1) 형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그때 악공(樂工) 독두이(禿豆伊)의 강도 사건을 다루면서 범인을 가볍게 처벌하는 바람에 파직되었다.
세조~성종 시대 활동
1455년(세조1) 성균관 사예가 되면서 장령을 겸임하였는데,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나자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훈되었다. 다음해에는 수원부사(水原府使)로 나갔다. 1461년(세조7) 의금부 진무(鎭撫)가 되었다가, 얼마 후 사온서 영으로 옮겼다. 사헌부의 감찰과 장령을 거쳐 의금부 판사로 승진하였다. 1472년(성종3)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품하여 중추부 첨지사에 임명되고 성균관 동지사를 겸임하였다. 그의 인물이 출중하고 문학이 뛰어나 그를 중용(重用)하자는 논의도 있었으나, 고려 왕씨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중용되지 못하였다. 1481년(성종12) 8월 12일 병으로 돌아가니, 향년이 73세였다.
저서로 『충음시고(蟲吟詩稿)』가 있고, 문집으로 『우국재집(友菊齋集)』이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홍경손은 재능이 남보다 매우 뛰어났으나 고려 왕씨(王氏)의 외손이라고 하여 용납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현직(顯職)에 오르지 못하고, 낮은 서반직(西班職)에 오래 머물렀다. 집정자가 그를 보고 “고사(故事)에 밝고 박식하며 단아하고 정력(精力)이 있으니 앞으로 크게 써야 한다.”라고 칭찬하였으나, 끝내 두터운 조정의 장벽 때문에 실천하지 못하였다. 벼슬길이 가로막혀서 행로의 어려움을 한탄하는 그의 시(詩)가 『동문선(東文選)』과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몇 편 실려 있다. 만년에는 조정의 의논이 관대해져서, 의금부 판사로 승진하였고, 중추부 첨지사에 임명되어 성균관 동지사를 오랫동안 겸임하였다.
성종이 유신(儒臣) 이석형(李石亨) · 홍경손 등에게 명하여 『대학연의집략(大學衍義輯略)』을 편찬하게 하였는데, 그들이 찬집(纂輯)한 것을 보고 편찬자들에게 각각 내구마(內廐馬)를 1필씩을 상으로 내려주었다. 홍경손은 하사받은 백마(白馬)를 항상 자랑스럽게 타고 다녔다. 만년에 성균관에서 유생들을 가르칠 때는 사예 임수겸(林守謙)과 함께 백마를 타고 광화문 앞을 지나다녔다고 한다.(『용재총화(慵齋叢話)』 권6)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상수역(湘水驛) 북쪽 선영에 있는데, 그가 죽은 지 1백여 년 뒤에 그의 현손 홍성민(洪聖民)이 묘표를 지었다.(『졸옹집(拙翁集)』 권9) 부인 풍산김씨(豐山金氏)는 사헌부 감찰 김계학(金繼學)의 딸로 자녀는 3남 1녀가 있다.
장남 홍윤온(洪閏溫)은 호군(護軍)을, 차남 홍윤선(洪閏善)은 장사랑(將仕郞)을, 3남 홍윤덕(洪閏德)은 봉상시 부정을 지냈다. 장녀는 현령 신성종(愼成終)의 처가 되었다.
홍윤덕의 아들 홍계정(洪係貞) · 손자 홍춘경(洪春卿)까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홍춘경의 자손 중에서 경파(京派)에서만 상신(相臣) 5명, 대제학 2명과 20여 명의 판서를 배출하여, 남양홍씨 당홍의 중심이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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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덕(洪閏德)
총론
[1454년(단종2)∼1505년(연산군11) = 52세]. 조선 전기 성종~연산군 시대 활동한 문신. 자는 희부(熙夫)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으로 당홍(唐洪)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중추부 첨지사 홍경손(洪敬孫)이고, 어머니 풍산김씨(豊山金氏)는 김계학(金繼學)의 딸이다. 사재감 직장 홍지(洪智)의 손자이고, 찬성 홍경주(洪景舟)의 7촌이다.
성종~연산군 시대 활동
1472년(성종3) 19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20년 동안 대과(大科)에 급제하지 못하다가, 1492년(성종23) 39세로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 급제하였다.
교서관(校書館) 부정자에 보임되었다가 봉상시 참봉, 홍문관 저작, 성균관 박사를 거쳐 1496년(연산군2) 봉상시 주부로 승진하였다. 1497년(연산군3)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가, 예조 좌랑으로 옮겼다. 1498년(연산군4) 사간원 헌납으로 승진하였으나, 1년 만에 언사(言事)로 인하여 면직되었다. 이후 성균관 전적, 직강, 사재감 첨정을 역임하고 종부시 첨정으로 옮겨 춘추관(春秋館) 편수관(編修官)을 겸임하였다. 1502년(연산군8) 모친상을 당하여, 3년 상을 마치고 봉상시 첨정에 임명되었다가, 승문원 교감(校勘)을 거쳐 봉상시 부정로 승진하였다. 1505년(연산군11) 2월 19일 병으로 돌아가니, 향년이 52세였다.
성품
홍윤덕은 성품이 단아하고 바르며 온화하여, 사람들에게 은의(恩意)가 있었다고 한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적성(積城) 상수역(湘水驛) 북쪽 송산리(松山里) 선영에 있는데, 부인과 합장하였다. 증손자 졸옹(拙翁) 홍성민(洪聖民)이 지은 행장(行狀)이 남아 있다.(『졸옹집(拙翁集)』 권9) 죽은 뒤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부인 고령신씨(高靈申氏)는 안동부사(安東府使) 신송주(申松舟)의 딸이고, 공조 참판 신장(申檣)의 손녀이다.
자녀는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예문관 대교 홍계정(洪係貞)이고, 딸은 생원 이원(李遠)의 처가 되었다. 손자 홍춘경(洪春卿)은 황해도관찰사를 지냈고, 홍춘년(洪春年)은 강원도관찰사를 지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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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암(大菴) 박성(朴惺) -달성 구지
박성(朴惺) 1549(명종 4)∼1606(선조 39). 조선 중기의 학자·의사(義士).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덕응(德凝), 호는 대암(大菴).
박성림(朴成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 박순(朴純)이고, 아버지는 생원 박사눌(朴思訥)이며, 어머니는 관찰사 김연(金緣)의 딸이다. 배신(裵紳)에게 수학하고, 정구(鄭逑)를 사사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참모로 종사했고, 정유재란 때 조목(趙穆)과 상의해 의병을 일으켜서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막하에 들어갔다. 그 뒤 주왕산성(周王山城)의 대장으로 활약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세자사부(世子師傅)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뒤에 사포서사포(司圃署司圃)가 되었다가 공조좌랑을 지내고, 안음현감(安陰縣監)이 되었다.
전쟁 때는 명나라 군사를 접응하고 장정(壯丁)을 동원해 군인에 충당하며 보급 물자를 수송하고 병기를 수리하는 등 공적이 많았다. 뒤에 박성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권력을 잡자 벼슬을 사퇴하고, 청송(靑松)의 주왕산 아래 은거하였다.
조정에서 공적을 가상하게 여겨 공조정랑·익위사위수(翊衛司衛率)과 임천(林川)·영천(永川)·익산(益山) 등의 군수·통례원상례(通禮院相禮)·청송부사 등에 임명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심정기(誠心正己)의 학문을 추구했으며, 과거시험에 뜻을 버리고 공맹(孔孟)의 글을 읽었다.
만년에는 더욱 『논어(論語)』를 좋아해 거처하는 집에 학안재(學顔齋)의 현판을 걸어놓고 동료(東寮)를 사물(四勿), 서료(西寮)를 박약(博約)이라 부르고 그 안에서 글을 읽었다. 글을 배우러 오는 이에게는 먼저 『소학(小學)』을 가르쳐서 사람이 되는 길을 깨닫게 하였다.
처음 정인홍(鄭仁弘)과 교류해 사이가 좋았으나 정인홍이 대사헌이 되어 자기 마음대로 일을 처결하는 것을 보고 못마땅해 하였다.
더군다나 정인홍이 『남명집(南冥集)』의 발문에서 이황(李滉)을 배척한 어구를 보고 “세상에 선정(先正)을 욕하는 군자를 본 일이 없다.”라 하고 절교하였다.
또한, 김성일의 참모가 되었을 때 적세가 사나워져서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박성이 김성일에게 이곳을 지키지 못하면 경상 우도(慶尙右道)를 보전할 수 없는데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묻자, 김성일은 “봉강(封疆)의 책임을 맡은 신하는 봉강에서 죽을 뿐이다. 그대는 이곳을 버리고 도망가라.”라고 했으나 끝내 떠나지 않았다.
김성일이 역질에 걸렸을 때 다른 막료들은 모두 피했으나 박성은 끝내 옆에서 간호하는 등 의리를 지켰다.
교우는 수우당 최영경(崔永慶)· 동강 김우옹(金宇顒)· 여헌 장현광(張顯光)· 송암 권호문(權好文) 등으로 서로 내왕하며 학문을 연마하였다.
저서로는 『대암집(大菴集)』이 있다.
대암(大庵) 박공(朴公)의 행장 여헌 장현광 찬
공(公)은 밀양 박씨(密陽朴氏)이니, 이름은 성(惺)이고 자는 덕응(德凝)이며 호는 대암(大庵)이다.
8대조 휘 중미(中美)는 고려조에 밀직군(密直君)에 봉해졌으며, 밀직의 아들 휘 희()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화령부소윤(和寧府少尹)이었는데 현풍 곽씨(玄風郭氏)에게 장가들고 인하여 현풍에 거주하니, 곧 고을의 서쪽인 솔례촌(率禮村)이다.
고조(高祖)인 휘 장손(長孫)은 승의랑(承議郞) 서부 주부(西部主簿)인데 휘 성림(成林)을 낳으니 선교랑(宣敎郞)이었고, 선교랑이 휘 순(純)을 낳으니 통덕랑(通德郞)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었고, 감찰이 휘 사눌(思訥)을 낳으니 성균 생원(成均生員)인바, 곧 공의 선고(先考)이다. 생원은 성품이 후덕하고 질박하며 형제간에 우애하고 친족간에 화목하였는데, 나이 33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지나치게 슬퍼하다가 훼손하여 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하였다. 광산 김씨(光山金氏)로 가선대부(嘉善大夫) 관찰사(觀察使) 휘 연(緣)의 따님에게 장가드니, 바로 공의 선비(先妣)이다.
김씨는 실로 효성스러운 덕이 있었는데 과부가 되자 남편의 상복을 9년간 입으니, 사람들이 그 정렬(貞烈)에 탄복하였다.
공은 가정(嘉靖) 기유년(1549,명종4) 7월 초하루에 태어났는바, 태어날 때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었다. 5세에 책을 읽었는데 나아가고 물러가며 절하고 무릎 꿇기를 성인(成人)과 같이 하였다. 아홉 살에 생원공(生員公)이 별세하자, 상을 잘 지키며 슬퍼하여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선부인(先夫人)이 하루는 공에게 말씀하기를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에는 네가 기이한 재주가 있다고 말씀하였는데 지금은 모두 끝장이다.” 하니, 공은 마침내 배울 것을 청하여 스승을 찾아가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대대로 물려오는 가업(家業)이 풍요로워 어렸을 때에는 먹고 입는 것을 반드시 가렸으나 학문에 뜻을 둔 뒤부터는 옛날 습관을 완전히 탈피하여 한결같이 담박함에 취미를 두었다.
공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마땅히 하는 사업이 있어야 하니, 어찌 하루하루 날을 보내어 초목과 똑같이 썩겠는가.” 하고는 더욱 학문에 향하는 뜻을 돈독히 하였다.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여 모일 때에 합격한 차례로 좌석을 앉혔으나 공은 마침내 맨 말석으로 물러가 앉았다.
기사년(1569,선조2) 낙천(洛川) 배신(裵紳)을 찾아가 《대학(大學)》을 배우니, 낙천은 공의 어묵(語默)과 동정(動靜)이 보통 사람과 다름을 보고는 일어나 공경하며 말씀하기를 “한훤당(寒暄堂)이 나신 고을에 다시 훌륭한 사람이 있다.” 하였다.
공은 한강(寒岡) 정 선생(鄭先生)이 올바른 학문에 종사한다는 말을 듣고는 마침내 종유(從遊)하여 학문을 강론하고 의심나는 것을 질문하여 크게 경계하고 깨우침이 있었다. 공은 과거 공부가 사람의 마음을 파괴함을 두려워하여 모친상을 벗은 뒤에는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임오년(1582,선조15) 추천에 의하여 참봉(參奉)에 제수되기를 세 차례 하였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으며, 기축년(1589,선조22)에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신묘년(1591,선조24) 사포(司圃)에 제수되자 처음으로 사은하고 봉직하였는데 한 달이 넘어 공조 좌랑(工曹佐郞)으로 전직(轉職)하였다.
임진년(1592,선조25) 봄에 병으로 사직하는 글을 올리고 남쪽으로 돌아왔으며, 4월에 이산 현감(尼山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6월에 의병(義兵)을 일으킨 공로가 있다 하여 공조 정랑(工曹正郞)으로 승진하여 초유진(招諭陣)에서 종사하니, 초유사(招諭使)는 곧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었다.
계사년(1593,선조26) 가을 안음 현감(安陰縣監)에 제수되었는데 부임한지 14개월 만에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병신년(1569,선조29) 봄에 형조 정랑에 제수되고 겨울에 위솔(衛率)에 제수되었다. 무술년(1598,선조31) 경력(經歷)에 제수되고 기해년(1599,선조32) 봄에 또다시 위솔에 제수되었다가 곧바로 익위(翊衛)에 제수되었다. 경자년 봄에 익찬(翊贊)에 제수되고 신축년(1601,선조34) 봄에 임천 군수(林川郡守)에 제수되었으며, 임인년(1602,선조35) 봄에 형조와 공조의 정랑에 제수된 것이 세 번이었다. 여름에는 통례원 상례(通禮院相禮)에 제수되고 겨울에는 영천 군수(永川郡守)에 제수되었다. 계묘년(1603,선조36) 봄에 군자감 부정(軍資監副正)에 제수되고 가을에 청송 부사(靑松府使)에 제수되었으며, 갑진년(1604,선조37) 봄에 또다시 공조 정랑에 제수되고 을사년(1605,선조38) 겨울에 익산 군수(益山郡守)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공은 병신년(1596,선조29) 봄으로부터 가솔(家率)을 이끌고 청송(靑松)의 주왕산(周王山) 아래로 들어가 비록 여러 번 관직을 제수하는 명이 있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병오년(1606,선조39) 가을 선비(先妣)의 기일(忌日)을 만나 보통 때보다 갑절이나 슬프게 통곡하다가 열이 치솟고 머리에 종기가 나서 10월 4일에 이르러 별세하니, 향년이 58세였다. 관(棺)을 받들어 현풍(玄風)으로 돌아왔다가 다음 해인 정미년(1607,선조40) 봄에 유명(遺命)에 따라 송림(松林)의 묘좌 유향(卯坐酉向)의 언덕에 장례하니, 곧 선영의 아래였다.
공은 여주 이씨(驪州李氏)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인 광진(光軫)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으나 일찍 죽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7대조가 같은 집안인 사신(士愼)의 셋째 아들을 양자(養子)로 삼으니, 이름을 민수(敏修)라 하였다. 2녀가 있는데 장녀는 군수 이의활(李宜活)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급제(及第) 황중윤(黃中允)에게 출가하였으며, 측실(側室)의 딸은 김예립(金禮立)에게 출가하였다.
민수는 먼저는 참의(參議) 이윤우(李潤雨)의 딸에게 장가들어 자녀를 각각 하나씩 두었으니, 아들은 동형(東衡)이며 딸은 허무(許{k武%山})에게 출가하였다. 뒤에 다시 곽재기(郭再祺)의 딸에게 장가들어 자녀를 각각 하나씩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이 군수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환(皖)은 참봉이며 장녀는 곽위국(郭衛國)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검열(檢閱) 정심(鄭杺)에게 출가하였다.
황중윤은 2녀를 두었는데 장녀는 학유(學諭) 조정융(曺挺融)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정기덕(鄭基德)에게 출가하였다.
동형은 참봉 이각(李瑴)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는데 어리다.
공이 호(號)를 대암(大庵)이라고 한 것은 몸을 돌이켜 스스로 생각해 봄에 기질(氣質)이 크지 못하다 하여 기질을 키우기 위한 것이었으며, 또 정명도(程明道)의 “한 가지 선(善)으로 이름을 이루고자 하지 않는다.”는 뜻을 취하여 스스로 힘쓴 것이었다. 공은 새벽마다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하고 관을 쓰고 의복을 입은 다음 자친(慈親)에게 문안하고 가묘(家廟)에 뵈었으며, 그러한 뒤에는 고요히 앉아 책을 읽고, 일이 있으면 대응하고 사물이 오면 접할 뿐이었다.
공의 문하에 이르는 선비들은 혹 말하기를 “공은 《소학(小學)》을 읽어 그치지 않는다.” 하고 혹은 “사서(四書)를 애독한다.” 하며, 혹은 《시경(詩經)》과 《서경(書經)》과 《예기(禮記)》를 종일토록 외고 읽는다.” 하고 혹은 “항상 염락관민(濂洛關閩)의 책을 본다.” 하였다.
공은 말씀하기를 “책을 읽어도 마음에 터득하는 실제가 없으면 비록 만 권의 책을 다 읽은들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하였으니, 학문을 좋아하고 공부를 쌓음이 이와 같았다. 말년에는 《논어(論語)》를 매우 좋아하였으니, 그 내용이 친절하고 화평하여 딴 책에 비할 바가 아님을 음미한 때문이 아니겠는가.
청송(靑松)에 있을 때에는 시냇가에 초당(草堂)을 짓고 현판(懸板)을 학안재(學顔齋)라 하였으며, 동쪽 행랑은 사물(四勿)이라 이름하고 서쪽 행랑은 박약(博約)이라 이름하고는 항상 그 가운데에서 《논어》를 보았다.
공은 일찍 부친을 여의고 오직 모부인(母夫人)을 섬기기를 20년 동안 하였는데, 자식이 되어 직분에 마땅히 하여야 할 것과 힘이 미칠 수 있는 일과 성인(聖人)이 남기신 가르침과 예경(禮經)에 기재된 것을 반드시 스스로 다 한 뒤에 그만두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살아서 섬기고 죽어서 장례하기를 모두 예(禮)에 맞게 하여 정성을 쓰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공은 소견이 미치는 것이면 힘써 행하지 않음이 없어 일찍이 눈으로 보고 행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혹 의심스러운 것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아는 자에게 질문하여 의심스러운 것이 있으면서 질문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이미 질문하여 경정(更定)하였으면 또 일찍이 정성을 다해 실천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이와 같고서 남은 한이 있겠는가. 당시에 보고 들은 자들이 감동하지 않음이 없었던 것은 참으로 이 때문이었다.
공은 가묘(家廟)를 새로 경영하고 제기(祭器)를 마련해서 옛날 제도를 강구하여 한결같이 고례(古禮)의 의식을 따랐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옛날 예를 지금에 다시 행할 수 있음을 보게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곧바로 왜란(倭亂)이 일어나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 멀리 우거하여 머무는 가운데에서도 모름지기 신주(神主)를 받드는 장소를 만들고 반드시 제사에 올리는 도구를 장만하여 어느 곳에서든 어느 때든 떳떳이 행하는 예를 폐하지 않았다.
평소 자매(姊妹)들을 시집보낼 적에 화목하고 사랑하는 정을 다하였으며, 혹 대처하기 어려운 일에도 여유 있게 처리하여 얼굴이나 말에 나타나지 않았다. 집에 서모(庶母)가 있었는데 요사함을 측량할 수 없었고 또 패려(悖戾)하여 형언할 수 없는 서제(庶弟)가 있었으나 또한 어루만지고 편안히 하는 마땅함을 잃지 아니하여 태도를 고쳐 일생을 마치게 하였으며 그 자손들이 지금까지도 온전히 보전되고 있으니, 이는 모두 공이 은혜로 구휼한 것이었다.
집에 거처할 때에는 내외의 자리를 바르게 하고 남녀의 구별을 엄격하게 하여, 비록 유리(流離)하여 우거(寓居)하는 즈음에 있더라도 토실(土室)을 달리하여 나누어 거처하였으니, 이는 가범(家範)의 한 부분이다.
친척이 비록 소원하고 천하더라도 은혜와 예를 곡진히 가(加)하였으며, 시골과 마을에서 사람들을 응접할 때에 공손하고 삼감이 간곡하고 지극하였다. 그러나 엄숙함으로 몸을 갖고 의논이 준엄하였으므로 행실이 나쁜 자들이 두려워하고 피하였으며, 횡역(橫逆)이 비록 이르더라도 마음을 화평하게 갖고 기운을 온화하게 하여 분수에 따라 적응하였으므로 도리를 거스르는 자들도 공손함을 다하였다.
왜적(倭賊)이 갑자기 쳐들어오던 날에 공은 비슬산(琵瑟山)에 있었는데 반드시 창의(唱義)하여 거사(擧事)하려 하였으나 잠깐 사이에 사세가 바뀌어 이미 스스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공은 정인홍(鄭仁弘)이 합천(陜川)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송암(松庵) 김면(金沔)이 고령(高靈)에서 떨쳐 일어나고 곽계수(郭季綏 계수는 곽재우(郭再祐)의 자)가 의령(宜寧)에서 기병(起兵)을 하고 곽양정(郭養靜 양정은 곽준(郭䞭)의 자)이 송암(松菴 김면의 호)의 진영에서 종사한다는 말을 들었다.
공은 이분들을 찾아가 함께 일을 하여야겠다 하고는 마침내 가솔(家率)을 이끌고 강을 건너가 군량을 조도(調度)하는 것을 자임하고는 혈성(血誠)으로 곡식을 모집하여 군량을 공급함으로써 자못 여유가 있게 하였다. 이 때 김 초유사(金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을 가리킴)가 처음 우도(右道)에 이르러 곧바로 의병의 진영(陣營)으로 와서 기뻐하는 한편 울며 말하기를 “종묘 사직을 보존함을 이로부터 기약할 수 있다.”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공에게 참모(參謀)가 되어 줄 것을 청하니, 공은 이를 쾌히 승낙하고 죽음으로 보답할 것을 기약하였다.
공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과 우현(牛峴)을 지킬 것을 의논하였는데, 공은 학봉에게 이르기를 “이 곳을 만약 지키지 못하면 낙동강 서쪽 지역을 보전할 수 없으니, 나라를 회복할 기반을 잃게 됩니다. 만일 불행한 일이 있으면 어떻게 대처하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학봉은 “국경을 맡은 신하는 마땅히 국경을 지키다가 죽어야 하니, 나는 참으로 죽음을 다하여 지켜야 한다. 그러나 공은 이미 맡은 벼슬이 없으니,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공은 웃으며 말씀하기를 “백이(伯夷)와 노중련(魯仲連)이 무슨 벼슬이 있었습니까. 더구나 나는 초유사(招諭使)와 사생(死生)을 함께하기로 약속하였으니, 차마 숲 사이로 도망하여 구차히 살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학봉은 용모를 고치고 말씀하기를 “좋은 말씀이다.”라고 칭찬하였다.
학봉이 염병에 전염되자, 손님들과 동료들이 모두 피하였으나 공은 홀로 시종(始終) 구호(救護)하고 약을 써서 정성이 지극하였다. 학봉은 공의 손을 잡고 말씀하기를 “내 진실로 군의 충신(忠信)이 이에 이를 줄을 알았다.” 하였다.
정유년(1597,선조30)에 왜구(倭寇)가 다시 쳐들어오니, 상공(相公)인 이원익(李元翼)이 체찰사(體察使)로 있으면서 공을 불러 참모를 삼았다. 공은 말씀하기를 “전에 초유사를 도왔지만 끝내 보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몸이 나라의 은혜를 받았으니, 어찌 감히 구차히 살 계책을 하겠습니까.” 하니, 이 상공(李相公)은 공을 대하기를 매우 경건히 하여 말할 때마다 반드시 선생이라고 칭하였다.
공은 안음현(安陰縣)에서 잠시 시험한 뒤로는 세도(世道)를 어찌할 수 없음을 더욱 징험하였다. 그리하여 궁벽한 지역으로 은둔하고 또 병을 깊이 앓고 있었으므로 비록 여러 차례 은혜로운 명령을 입었으나 취임하지 아니하여 장차 세상을 잊을 듯이 여겼다. 그러나 나라를 걱정하는 한 생각은 일찍이 마음속에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정유년(1597,선조30) 여름에 충분(忠憤)이 스스로 격해짐을 견디지 못하여 마침내 열여섯 가지의 일을 조목조목 열거하여 상소하니, 그 내용은 대의(大義)를 밝혀 화의(和議)를 끊고 군주가 몸소 정토(征討)를 가하여 원수인 적을 섬멸하며, 잘못을 과감히 고쳐 하늘의 견책에 보답하고 백성의 아픔을 구휼하여 인심을 거두며, 사부(師傅)를 가려 동궁(東宮)을 보필하고 대신(大臣)을 공경하여 회복(恢復)을 위임하며, 훌륭한 장수를 선발하여 군무(軍務)를 맡기고 간쟁(諫爭)을 받아들여 언로(言路)를 열어 놓으며, 좋아하고 싫어함을 바르게 하여 어진 자와 간사한 자를 구별하고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여 기강(紀綱)을 세우며, 절의(節義)를 표창하여 강상(綱常)을 세우고 염치를 숭상하여 탐욕스러움을 개혁하며, 상벌(賞罰)을 분명히 하여 중외(中外)를 장려하고 군법(軍法)을 엄하게 시행하여 장병들을 정돈하며, 인서(仁恕)를 확대하여 억울한 옥사를 살피고 쓸데없는 비용을 줄여 군수(軍需)를 넉넉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모두 당시 마땅히 힘써야 할 급선무로 간장(肝腸)을 도려내고 혈성(血誠)을 짜내어 올린 말씀이었는데, 끝내 체념하여 거행하지 못하였으니, 어찌하겠는가.
공은 언제나 국세(國勢)가 떨치지 못하고 조정의 선비들이 당파로 분열됨을 한탄하여 일찍이 서글퍼하고 한탄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소인배들이 권력을 독단(獨斷)하고 무함(誣陷)으로 옥사를 만들어 올바른 선비들을 해치고 죽인 일을 언급하게 되면 말소리가 격앙되어 노기가 얼굴빛에 나타나곤 하였으며, 혹 국상(國喪)을 만나면 상복(喪服)을 지어 입고 서쪽을 향하여 통곡하였으니, 이는 모두 나라를 걱정하는 충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함은 사람의 떳떳한 성품이나 좋아하고 미워함의 올바름을 얻는 자는 드물다. 그러므로 공은 일찍이 여기에 경계와 삼감을 가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배우는 자들을 권면할 때에는 말씀하기를 “만약 먼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지 않는다면 선한 마음을 흥기시킬 수 없다.” 하였으며, 배우는 자들을 경계할 때에는 말씀하기를 “남의 과실과 악행을 말하기 좋아하다가 후환을 어찌하겠는가.” 하였으니, 이는 모두 좋아하고 미워함의 올바름으로 인도한 것이었다.
공은 학문에 유념하였으며 말년에 더욱 힘썼다. 그리하여 항상 기질을 변화하며 몸소 행하고 마음에 얻는 것을 대요(大要)로 삼았다. 이는 온화하고 유순함에 뜻을 두면 혹 풀어지고 느슨한 데로 흐를까 염려되고, 강하고 굳센 데에 뜻을 두면 혹 조급하고 고집스러움에 치우칠까 우려되므로, 강유(剛柔)와 화의(和毅)의 중도(中道)를 얻는 데에 힘쓴 것이니, 이것이 공이 공력(功力)을 쓴 부분이었다. 그러므로 군자들은 공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소인들은 공을 두려워하고 꺼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공은 처음 발단(發端)하여 학문을 향하는 공부는 낙천(洛川)에게서 시작하였고, 감발(感發)하여 흥기(興起)한 기틀은 한강(寒岡)에게서 얻은 것이 깊었다. 그러므로 공은 말씀하기를 “나는 한강에게 은혜를 받은 것이 실로 많으니, 마땅히 스승과 벗의 중간으로 대하겠다.” 하고 형을 섬기는 예로 섬겼다.
동강(東岡) 김공(金公)과 송암(松庵) 김공(金公)을 가장 사랑하고 사모하였으며, 존재(存齋)와 양정(養靜)은 뜻이 같고 마을이 같으니, 참으로 도의로써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마음의 벗이었다.
정인홍(鄭仁弘)에 이르러서는 평소부터 종유(從遊)하였고 또 의병의 진영에서 함께 일하여 애당초 서로 좋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항상 그의 병통이 고질이 될까 우려하였다. 그리고 노망하여 잘못 들어감에 이르러서는 긴 편지로 타이르고 꾸짖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끝내 잘못을 깨닫지 못하였으므로 절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저는 과연 악이 크고 죄가 쌓여 공이 별세한 뒤에 스스로 실패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공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이에 이르러 징험되었다.
사람들이 혹 문도(門徒)를 모아 가르칠 것을 권하면 공은 말씀하기를 “나는 사람을 가르칠 만한 학문이 없으며, 또 내가 보니 지금 세상에 혹 문인들이 선량(善良)하지 못하여 남의 비방을 부르고 자신의 누(累)를 야기(惹起)하는 자가 있으니, 이러한 무리가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 하였다.
또 저서(著書)를 권하는 자가 있으면 공은 말씀하기를 “내 문장을 잘하지 못하니, 어찌 감히 글을 짓겠는가. 또 예로부터 성현의 은미한 말씀과 깊은 뜻을 주자(周子), 장자(張子), 정자(程子), 주자(朱子)가 설명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배우는 자가 만일 글귀마다 일일이 행한다면 백년 안에 날마다 쓰기에 겨를이 없을 것이다. 어찌 저서할 필요가 있겠는가. 사람들이 ‘송유(宋儒)가 나온 뒤에 굳이 저서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말하니, 이 또한 한 방법이다.”하였으니, 이 역시 공의 착실(着實)한 부분이다.
공이 별세한 지가 이제 27년이 되었다. 중간에 국가가 완전히 안정되지 못하여, 장례할 때에 구덩이 가운데에 지석(誌石)을 쓰지 못하였고 또 봉분(封墳)의 앞에 비명(碑銘)을 세울 겨를이 없었다.
이제 공의 아들이 당시 문인(門人)과 제군(諸君)들이 기술한 언행록(言行錄)의 각 편(篇)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 주고 여러 말을 모아 한 편의 문자를 만들어 후일의 계책으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나 또한 공과 깊은 친분이 있는 자이니, 어찌 감히 늙었다 하여 사양하겠는가. 마침내 제군의 기록을 가지고 그 대략을 뽑아 모았다.
나는 이로 인하여 추억해 보니, 공이 청부(靑鳧)에 우거하고 있을 때에 나 또한 한두 친구들에게 부탁하여 연계(連溪)의 마을집에 임시로 우거하고 있었다. 이 때 서로 왕래하기가 편리하였으므로 여러 번 공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으며, 혹은 산자락으로 나아가고 혹은 교외나 수석(水石)이 좋은 사이에서 술잔을 잡고 달을 맞이하며 돌에 기대어 물을 구경하다가 혹 날이 저물어 함께 베개를 베고 자다가 흩어진 것이 모두 몇 번이었던가.
지금에 이르러 영원히 한스러운 것은 이미 한 곳에 살며 함께 거처하자는 약속을 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으며, 말질(末疾)이 있다는 말을 듣고도 손을 잡고 영결하지 못하였으니, 지금 흠모하고 생각함에 어떻게 마음을 가누겠는가.
아! 보통 사람들의 병통은 선(善)을 반드시 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내 그대로 하지 못하고, 불선(不善)을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내 안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모두 하류(下流)로 돌아감을 면치 못하여 위로 향하는 사업을 보기가 드물다.
그런데 공의 지개(志槪)로 말하면 한결같이 독실함에 뜻을 두었으니, 어찌 선을 듣고서 그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불선을 알고도 혹 고치기를 인색하게 함이 있겠는가. 애석하게도 말년에 병에 걸려 겨우 요절(夭折)이 아닌 나이를 지나 갑자기 별세하였으니, 이 때문에 그의 뜻과 사업이 처음 기대한 것과 같지 못하다. 선인(善人)에게 복을 내리는 하늘의 뜻이 과연 이와 같단 말인가.
[주D-001]염락관민(濂洛關閩) : 염은 염계(濂溪), 락은 낙양(洛陽), 관은 관중(關中), 민은 민중(閩中)을 가리킨다. 염계 주돈이(周敦頤)는 염계에, 명도(明道) 정호(程顥)는 낙양에, 횡거(橫渠) 장재(張載)는 관중에, 회암(晦菴) 주희(朱熹)는 민중에 살았으므로 이들을 통틀어 이렇게 칭한 것이다.
[주D-002]학안재(學顔齋) : 학안재는 안연(顔淵)을 배우는 집이라는 뜻이다.
[주D-003]사물(四勿) : 사물은 네 가지 하지 말라는 것으로, 곧 “예(禮)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동하지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는 것을 가리키는바, 공자(孔子)는 인(仁)을 묻는 안연에게 사욕(私欲)을 이겨 예로 돌아갈 것[克己復禮]을 강조하고 그 조목으로 이 네 가지를 행할 것을 당부하였다. 《論語 顔淵》
[주D-004]박약(博約) : 박약은 박문(博文), 약례(約禮)의 줄임말로, 안연은 일찍이 “부자(夫子)께서는 차근차근 사람을 잘 유인하여 나로 하여금 글을 넓게 배우고 예로 묶게 하였다.[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고 하였다. 《論語 子罕》
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 대암(大菴) 박성(朴惺) -달성 구지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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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이씨(驪州李氏) - 밀양
여주이씨(驪州李氏) - 밀양
영천 선원마을에 세거한 함계처사(涵溪處士) 정석달(鄭碩達)의 증손(曾孫)으로 정하택(鄭夏澤)이 있다. 정하택(鄭夏澤)의 장인은 함평현감을 지낸 여주이씨 이병덕(李秉德)이다.
그리고 정하택(鄭夏澤)의 손자로 정유병(鄭裕秉)이 있다. 정유병(鄭裕秉)의 장인은 정조 7년 문과 급제하여 대사간을 지낸 여주이씨 이정덕(李鼎德)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伯父, 큰아버지)인 이정태(李鼎泰)의 양자로 들어간 이시상(李蓍祥)이다.
정하택(鄭夏澤)의 장인과 정유병(鄭裕秉)의 장인은 같은 여주이씨이기는 하나, 정하택(鄭夏澤)의 장인은 밀양의 여주이씨(교위공파 → 문절공파 → 밀양파)이고, 정유병(鄭裕秉)의 장인은 경주의 여주이씨(경주파 → 회재 이언적의 후손)로 중시조를 달리한다.
여주이씨 밀양 입향조는 충순위(忠順衛) 이사필(李師弼, 1460년경~1510년경)이다. 이사필(李師弼)은 양녕대군의 외손자인 이증석(李曾碩)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밀양의 재지사족(在地士族)이자 재력가(財力家)인 유자공(柳子恭)의 무남독녀와 혼인하였다. 1500년경 연산군의 폭정을 피해 서울에서 처향(妻鄕)인 밀양으로 내려와 뿌리를 내렸고, 이후 처가(妻家)의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아 밀양에서 정착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 그런 연유로, 밀양의 여주이씨는 입향조 이사필(李師弼)의 장인 유자공(柳子恭)의 제사를 외손봉사(外孫奉祀)하고 있다.
이사필(李師弼)은 2명의 아들을 두었으니, 장남 이원(李遠)은 연산군 7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차남 이태(李迨)는 종중 5년 문과(대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 종3품) 벼슬을 지냈다. 밀양시 용평동에 이태(李迨)가 지은 월연정(月淵亭)이 있다. 그리고 이원(李遠)의 장남 이광로(李光輅)는 중종 26년 진사시와 생원시에 모두 합격하였고, 차남 이광진(李光軫)은 명종 1년 문과(대과)에 급제하여 좌부승지(左副承旨, 정3품) 벼슬을 지냈다. 밀양시 활성동에 이광진(李光軫)이 지은 금시당(今是堂)이 있다. 이광진(李光軫)의 두 아들인 이경홍(李慶弘, 선조 3년 생원시 합격)과 이경승(李慶承, 선조 21년 진사시 합격)은 임진왜란 당시 밀양에서 창의(倡義)하여 곽재우의 휘하에 들어가 활동하다 전사(戰死)하였다.
이들의 연이은 중앙정계 진출과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활동은 밀양 여주이씨의 지위를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주이씨 밀양 입향조 이사필(李師弼)의 후손 중에서, 문과(대과, 소과 포함)에 급제한 사람은 11명이고, 무과에 급제한 사람은 10명이며, 음직(蔭職)과 증직(贈職)을 받은 사람은 24명이다.
여주이씨 밀양 입향조 이사필(李師弼)의 차남 이태(李迨)는 이원량(李元亮, 중종 29년 진사시 합격)을 낳고, 이원량은 이경옥[李慶沃, 사복시정(司僕寺正, 정3품) 역임]을 낳고, 이경옥은 이유[李瑜, 증호조참의(贈戶曹參議)]을 낳고, 이유는 이장화[李長華, 증호조참판(贈戶曹參判)]을 낳고, 이장화는 이만전[李萬全,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종2품) 역임]을 낳고, 이만전은 이지관[李之觀, 증호조참판(贈戶曹參判)]을 낳고, 이지관은 이홍(李泓, 의금부도사, 철산부사, 전라도수사 역임)을 낳고, 이홍은 이병덕(李秉德, 함평현감 역임)을 낳았다.
이병덕(李秉德, 함평현감 역임)의 부인은 순천박씨(順天朴氏) 박성연(朴聖淵)의 따님으로 박팽년의 후손이다. 이병덕은 슬하에 1남 5녀를 두니, 아들은 이양섭[李良燮, 장사랑(將仕郞)]이고, 사위는 신의(申嶷), 최발(崔潑), 정하택(鄭夏澤), 최경한(崔景翰), 손영교(孫英敎)이다. 이병덕의 셋째 사위인 정하택(鄭夏澤)의 부친은 정일릉(鄭一錂), 조부는 정중보(鄭重簠), 증조는 함계처사(涵溪處士) 정석달(鄭碩達)이다.
[출처] 여주이씨(驪州李氏) - 밀양|작성자 변호사 정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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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중윤黃中允 1577 ~ 1648 묘갈명 김도화
승정원 좌부승지 동명 황공의 묘갈명[承政院左副承旨東溟黃公墓碣銘] 서문 병기
공의 휘는 중윤中允, 자는 도광道光, 성은 황씨黃氏이니, 해월海月 선생 여일汝一의 아들이다. 조부 응증應澄은 호가 창주滄洲이고 장례원 판결사에 추증되었다. 증조 우瑀는 성주 목사를 지냈고, 고조 보곤輔坤은 생원을 지냈다. 고려의 문하시랑 충절공忠節公 단瑞이 그 현조顯祖이다. 모친은 의성 김씨義城金氏이니 귀봉龜峯 선생 김수일金守一의 따님이다.
공은 만력萬曆 정축년(1577) 5월 모일에 천전리川前里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기골이 남달라 외숙 운천雲川 선생이 편지를 부쳐 축하하였다. 겨우 배우기 시작할 무렵 한 번 들으면 잊지 않자 창주공滄洲公이 기뻐하며 “우리 집안에 독서하는 종자가 끊어지지 않았구나.”라고 하였다. 15세에는 사서삼경을 두루 읽어 문장이 크게 진보하자, 부친이 손수 주자의 「경재잠敬齋箴」 및 범난계范蘭溪의 「심잠心箴」을 써 주며 “잊거나 폐하지 말거라.”라고 하였다.
임진년(1592)에 호전虎田에서 왜란을 피할 적에 당시 나이가 16세였다. 마침 흩어져 있던 적군에게 붙잡혔는데, 낯빛 하나 변하지 않자 왜군 장수가 기이하게 여겼다. 얼마 뒤, 부친을 모시고 곡대鵠臺를 유람하였는데, 이때 아계鵝溪 이 상공李相公이 앉은 자리에서 운을 부르며 시를 짓도록 하였다. 공이 주저하지 않고
하늘이 시인을 도와 바닷가에 보내고 天相詩翁到海山
풍백에게 봄추위 빚지 못하게 했네 不敎風伯釀春寒
곡대의 승경을 일찍이 아셨는지요 鵠臺形勝曾知否
드넓은 동해가 눈앞에 보인답니다 萬里扶桑眼底看
라고 하자, 아계 상공이 놀라 감탄하였다.
병신년(1596)에 대암大庵 선생 박공朴公의 문하에 장가들면서 가르침을 받았는데, 대암 선생이 시를 지어 격려하고, 선공에게 편지를 보내어 “아드님을 훈도할 때 덕행을 먼저하고 문예를 뒤로하길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경자년(1600)에 한강寒岡 선생을 찾아가 뵙고, 몇 달을 강독하고 질정하며, 여러 번 칭찬을 받았다.
임임년(1602)에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몸이 여윌 정도로 몹시 슬퍼하였다.
을사년(1605)에 성균관에 올라 생원과 진사에 모두 입격하여 명예가 크게 떨쳐졌다.
정미년(1607)에 영천永川 임소에 가서 부친을 모셨다. 이때 여헌旅軒 장 선생張先生이 방문하여 부친과 함께 여러 날을 강론하였는데, 공이 곁에서 질문을 드리니 대부분 남들이 미치지 못할 바였다.
경술년(1610) 여름에 가야伽倻의 정인홍鄭仁弘이 회재晦齋와 퇴계退溪 두 선생의 문묘 배향을 배척하자 성균관의 유생들이 돌아가며 변무소를 올렸는데, 공 또한 부친의 분부로 소수疏首 최경영崔景英 공을 따라 대궐문 앞에 엎드려 소를 올렸으나 주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재차 소를 올릴 적에는 공이 소수가 되어 스스로 소를 지었는데, 그 내용이 절실하고 곧았으니, “정론正論이 막혀있고 사설邪說이 횡행하니, 전하의 나라가 또한 위태롭지 않겠습니까.”라는 것이 그 대강이다.
신해년(1611)에 또 변무소의 소수로서 대궐에 엎드려 두 통의 소를 잇따라 올렸는데, 광해군이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단양丹陽에 이르러 더위에 시달린 내용의 시를 지어 회포를 쏟아냈다.
임자년(1612) 가을에 비로소 급제하여 갑인년(1614)에 예빈시 직장에 제수되었고, 2월에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다. 이때 역적 박응서朴應犀가 무고하여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위하자는 논의를 하자, 공은 즉시 사직소를 올리고 돌아왔다.
을묘년(1615) 8월에 춘추관 편수관에 제수되어 선조실록을 편찬하였다. 9월에 부친의 병 때문에 사직소를 올리고 돌아왔다. 10월에 또 선조실록을 편찬하는 일로 불려갔다.
병진년(1616)에 옥사가 또 크게 일어났으나 공은 실록의 일 때문에 돌아오지 못하였다. 얼마 뒤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자 곧장 소를 올려 대비에게 효도를 다할 것을 청하였으니, 그 대략은 “전하께서 하루에 세 번 문안하는 예를 폐지하고 위세로 만백성의 마음을 억누르려 하시니, 비방하는 소리가 자자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날마다 효경을 열람하시어 우러러 순임금을 본받으소서.”라는 내용이었다. 광해군이 크게 노하여 서둘러 파면시키라는 명령을 내림에 공이 그날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드디어 울진蔚珍 산속에 들어가 밭을 사서 농사를 지으며 날마다 시와 술로 스스로 즐겼다.
정사년(1617)에 흉악한 의논이 다시 일어나 대신 박승종朴承宗 등이 백관을 이끌고 폐모론을 주청하여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당시에 선공이 동래東萊에서 체직되어 돌아옴에 조정에서 공조 참의로 불렀는데 여러 번 재촉해도 부임하지 않자, 간사한 무리들이 으르렁대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9월에 공을 사간원 헌납에 제수하여 마음을 떠보려 하자, 공이 마지못해 사은숙배하였으나 또 부친의 병을 핑계로 사직소를 올리고 돌아왔다. 계속해서 병조 좌랑과 정랑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기미년(1619)에 또 이전의 직책으로 재촉하여 불렀다. 이때 북방의 소란이 몹시 긴박하여 명나라 조정이 군대 파견을 요청한 상황이었기에 공은 “지금은 사직소를 올려 일신의 안위를 꾀할 때가 아니다.”라고 하고, 왕명을 듣자마자 곧바로 나아갔다. 5월에 재자관齎咨官으로 요동遼東에 갔다가 7월에 복명하였다. 9월에 성균관 직강에 임명되었다가 곧이어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
경신년(1620)에 통정대부에 오르고,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뒤에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되어 불려나갔다. 4월에 명나라에 가는 주문특사奏聞特使로 차출하여 위유慰諭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공을 차출하여 연위사延慰使로 삼았다가 또 다시 주문사奏聞使로 삼아 길을 곱절로 빨리 달려가게 하였다. 5월에 북경에 도착하니, 월사月沙 이공李公이 먼저 진주사陳奏使로 옥하관玉河館에 있었다. 함께 사신의 임무를 의논하고, 드디어 주문奏文을 홍려시鴻臚寺에 올렸다. 또 자문咨文을 예부禮部와 병부兵部에 올렸는데, 모두 사리에 어긋난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하였다. 마침 또 황제(신종神宗)가 세상을 떠나 사신의 임무를 수행할 겨를이 없다가 9월에서야 복명하였다.
신유년(1621)에 동부승지로 불려갔다. 얼마 뒤 승정원 우부승지로 옮겼다가 좌부승지 겸 지제교에 임명되었다. 8월에 용천 부사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겨울에 호인胡人이 철기병 수천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와 곧장 선천宣川을 무찌르고 명나라 진영을 덮쳤는데, 기세가 마치 회오리바람 같았다.
광해군이 비변사의 대신 심해수沈海壽와 박승종朴承宗 등에게 정당政堂에 모여서 의논하게 하였다. 공이 해방 승지該房承旨로 참여하였는데, 대신들이 내놓는 의견이 회유하는 계책에 지나지 않았다. 이튿날 비변사가 차관을 파견하여 정탐할 계획을 세우라고 청하였으나 머뭇거리는 사이에 적의 기세가 더욱 거세졌다. 공이 한漢나라와 당唐나라의 역사를 끌어대어 “안으로는 전쟁할 대비를 하고 밖으로는 회유할 계책을 하여 우선 눈앞의 다급한 상황을 늦추는 것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라고 아뢰었다. 비답이 비변사에 내려오자 박승종이 큰 소리로 ”황 아무개는 강화를 주장한다.“라고 외쳤으니, 이는 기쁨을 표출한 것이다.
이튿날 공이 사직소를 올리고 돌아오자, 선공이 “너의 계청은 참으로 이른바 ‘임금이 활쏘기를 좋아하면 신하가 깍지와 활팔찌를 낀다.’는 것이다. 조정의 논의에 ’기미羈縻‘라는 것은 주상의 뜻에서 나온 것이나 오히려 여론을 두려워하여 은근히 허물을 남에게 떠넘기려 하고 있으니, 이것이 박승종이 큰소리로 외친 까닭이다. 훗날 틀림없이 구실거리가 될 것이니, 내 너를 위해 두려워하노라.”라고 하였다.
임술년(1622)에 부친이 세상을 떠남에 예제를 지키는 것이 이전과 같았다.
계해년(1623)에 인조가 반정한 뒤, 대비를 폐위하고 후금에 붙좇은 죄를 가장 먼저 들어 차례차례 죽이거나 유배 보냈는데, 한 달쯤 지나 사헌부와 사간원이 공이 해방 승지로 있으면서 아뢴 바를 화의를 선창한 일로 몰아 해남海南에 위리안치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공은 가묘와 궤연에 곡하고서 하직하고, 들어가 어머니를 위로한 다음 그날로 길을 나섰다.
운악雲岳 이공李公이 무명[木段]을 주며 전별하고, 백주白洲 이공李公이 어사御史로 와서 안부를 묻고 호송하는 아전에게 타일러 잘 호송케 하였다. 도착해서는 문을 닫고 조용하게 지내며 독서를 일삼았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공이 늘 찾아와서 토론하고, 또 자신의 종제 선진善進과 선일善一을 보내어 수업하게 하였다.
을축년(1625)에 주상이 그 억울함을 살펴 내지로 옮길 것을 명하였다. 경오년(1630)에 동계桐溪가 소장을 올려 죄가 가벼운데 벌이 무거운 자를 용서해줄 것을 청하였는데, 공의 이름 또한 그 가운데 있었다. 계유년(1633)에 비로소 특별 사면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갑술년(1634)에 신원하여 직첩을 돌려주었다. 을해년(1635)에 선공의 유지를 따라 수월당水月堂을 짓고, 날마다 그 가운데서 조용히 지내며 서사書史를 음미하니 유유자적하는 정취가 있었다.
정축년(1637)에 남한산성을 내려왔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을 견디지 못하여 드디어 산사와 산골 집 사이를 떠돌며 살았다. 내제內弟 표은瓢隱 선생이 틈을 내어 따르며 함께 비통한 심회를 달랬다. 무자년(1648) 3월 모일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72세였다. 평해군平海郡 북쪽 묵방동墨坊洞 동남향 언덕에 장사하였다.
부인은 밀양 박씨密陽朴氏 박성朴惺의 따님이니, 박성은 바로 대암大菴이다. 아들을 보지 못해서 중제仲弟 중헌中憲의 아들 석래石來를 후사로 삼았고, 두 딸은 군수 조정융曹挺融과 참봉 정기덕鄭基德에게 시집갔다.
석래의 두 아들은 규圭와 기基이고, 네 딸은 호군護軍 이후재李厚載, 서한진徐翰振·정석규鄭錫圭·박태후朴泰厚에게 시집갔다.
규의 세 아들은 세중世重·세항世恒·세태世泰이고, 두 딸은 손명걸孫命杰과 동지중추부사 권대성權大成에게 시집갔다. 기의 두 아들은 세장世鏘과 세종世鍾이고, 딸 하나는 박시점朴時漸에게 시집갔다. 현손 이하는 많아서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은 뛰어난 자질로 원대한 뜻을 품어 어려서는 해월의 가정에서 교화를 받고, 자라서는 대암의 문하에서 훈도를 받아 견문이 날로 넓어지고 실천이 날로 독실해졌다. 또 일찍이 사수泗水와 입암立巖의 사이를 왕래하며 질정하여 일상의 도리에서부터 출처의 의리를 분변하는 데 이르기까지 깊이 궁구하고 자세히 분석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눈앞에 온전한 소가 없었다고 할 만하다.
사수(泗水)와 입암(立巖) : 사수는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가 강학하던 곳이고, 입암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이 강학하던 곳이다.
이런 까닭으로 어버이를 섬길 때는 뜻과 몸의 봉양을 극진히 하였고, 아우를 사랑할 때는 형제의 정을 다하였으며, 선조를 받들 때는 성의가 정중하였고, 집안을 다스릴 때는 화기가 감돌았다. 몸가짐은 얇은 얼음을 밟듯 엄중하였고, 자제 교육은 지초와 난초를 기르듯 순수하였다. 게다가 후진을 장려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아 재주에 따라 돈독히 하여 훌륭하게 볼만한 점이 있었다. 비록 그 아름다운 자질이 진실로 남다르나 사우와 학문의 힘을 또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아! 세상에 남의 아름다운 일을 이루어 주기를 즐거워하지 않는 자가 매번 광해군의 부름을 나가서 받든 것과 승지로서 앞서서 회유[羈縻] 계책으로 아뢴 것을 구실로 삼으니, 아 심하도다!
만약 공이 주상의 명령에 주저했다면 남몰래 해치려는 화가 병든 어버이에게 미쳤을 것이니, 자식이 되어 마땅히 어떻게 이 상황에 대처해야 했겠는가. 게다가 광해군의 조정에서 벼슬한 선배가 또한 많은데, 어째서 유독 공에게만 의문을 갖는가.
한편 ‘효도를 다하소서.’라고 한 저 한 편의 소는 그 말이 완곡하긴 하나 대의가 분명하니, 또한 공의 뜻을 보기 충분하다. ‘기미羈縻’ 두 자는 실로 광해군의 뜻인데, 대신들이 비위를 맞추고 온 조정이 부화뇌동한 것이다. 그렇다면 공이 비록 기미의 계책에 대해 말을 말았더라도 그칠 수 있었겠는가. 공은 그저 기미를 살피지 않고 먼저 말했을 뿐이다. 이 때문에 간신의 큰소리와 참소꾼의 떠들어대는 소리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동계桐溪 선생(정온鄭蘊)의 용서하라고 한 계청은 한결같이 공정한 데서 나왔고, 성상께서도 깊이 헤아려 석방하라는 은전을 곧장 내렸다. 벌을 받은 공의 한이 그제야 천하에 드러날 수 있었으니, 오히려 무엇을 한탄하랴.
공의 후손 아무아무 등이 그 족자族子 만영萬榮, 국영國榮을 시켜 유사遺事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갈명을 청하였다. 내 공의 뜻이 묻혀서 드러나지 않을까 상심하여 드디어 그 개략을 모아 명銘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이름난 아버지의 아들이자 名父之子
큰 학자의 제자이네 宗儒之弟
품행은 충효를 완비하고 行全忠孝
학문은 덕예를 아울렀네 學兼德藝
근본이 이와 같으니 有本如是
어딘들 마땅하지 않으랴 何用不宜
위험을 무릅쓰고 사신으로 가고 涉險專對
인륜을 부지하려 계문을 올렸네 扶倫有啓
저들은 어떤 사람이기에 彼何人斯
참언을 잘 꾸며냈는가 貝錦成斐
파리가 흰 구슬을 더럽힌 것이고 蠅點白璧
구슬이 사발을 벗어난 것이라네 丸失歐臾
큰 현인의 한마디 말씀은 大賢一言
저울대처럼 오차가 없었네 權衡不差
천심을 감동시켜 돌리고 感回天心
나라의 무고를 씻었네 消融邦誣
돌아와 초가집에 누우니 㱕臥衡茅
만사가 한탄스러울 만하네 萬事堪噫
풍천에 대한 슬픔 깊어 慟深風泉
산야를 이리저리 방랑하였네 迹散山野
편안히 돌아가 쉬니 居然反息
묵방의 언덕이네 墨坊之峙
내 이 빗돌에 새겨 我銘玆石
공론을 게시하노라 揭示公議
承政院左副承旨東溟黃公墓碣銘 幷序
公諱中允字道光姓黃氏。海月先生諱汝一之子也。大父曰應澄號滄洲贈判决事。曾祖曰瑀星州牧使。高祖曰輔坤生員。高麗門下侍郞忠節公諱瑞其顯祖也。妣義城金氏。龜峯先生諱守一女也。公以萬曆丁丑五月某日。生于川前外第。骨相異凡。內舅雲川先生寄書賀之。甫就學。聞輒不忘。滄洲公喜曰吾家文種不絶矣。及舞象之歲。遍讀四子三經。詞藝驟進。先公手書朱子敬齋箴及范蘭溪心箴以與之曰勿忘勿廢也。壬辰避寇亂于虎田。時年十六矣。適爲散賊所執。神色自若。老酋異之。旣而陪先公游鵠臺。時鵝溪李相公在座。呼韻命賦。公卽對曰天相詩翁到海山。不敎風伯釀春寒。鵠臺形勝曾知否。萬里扶桑眼底看。鵝相驚歎。丙申聘于大庵先生朴公之門。因受業。大庵以詩勖之。因寄書先公曰訓迪賢郞。願先德行而後文藝也。庚子往拜寒岡先生。數朔講質。屢蒙奬詡。壬寅遭內艱。哀毁過制。乙巳陞上庠。生進俱中。名譽大振。丁未往侍先公于永川任所。時旅軒張先生見過。與先公連日講討。公在傍質難。多諸人所不及。庚戌夏倻弘詆斥晦退兩先生從祀。館學儒生交章辨誣。公亦以親命從疏首崔公景英伏閤不允。及再疏公爲疏首自製疏。疏辭切直。其略曰正論杜塞。邪說橫流。殿下之國。不亦危乎云云。辛亥又以辨誣疏首伏閤。連上二疏。廢主終不納。歸到丹陽。作病暑詩以瀉懷。壬子秋始釋褐。
甲寅除直長。二月拜典籍。時逆竪朴應犀誣告。至有殺大君廢大妃之論。公卽呈辭㱕。乙卯八月。授春秋館編修官。修宣廟實錄。九月以親病呈㱕。十月又以實錄事召還。丙辰獄事又大起。公以實錄事不得㱕。俄拜正言。卽上疏請盡孝於大妃。其略曰殿下欲廢三朝之禮。威抑萬民之情。物議囂囂。伏願聖睿日覽孝經。仰法大舜云云。廢主大怒。亟施罷黜之典。公卽日㱕鄕。遂入蔚珍山中。買田課農。日以詩酒自娛。丁巳兇論復起。大臣朴承宗等率百官廷請錮廢西宮。時先公自東萊解歸。有工議之召。屢促不赴。奸黨方齗齗不已。九月除公獻納。將試之也。公僶俛就肅。又以親病呈歸。連授佐郞正郞皆不赴。己未又以前職促召。時北騷甚緊。天朝徵兵。公曰此非控辭自便之時也。聞命卽就。五月以賷咨官赴遼東。七月復命。九月拜直講。連拜持平。庚申陞通政除僉樞。俄拜同副承旨召還。四月差天朝奏聞特使慰諭。未幾又差公爲延慰使。又改爲奏聞使。倍道馳往。五月達皇京。月沙李公先以陳奏使在玉河館。相與議使事。遂呈奏文于鴻臚寺。又呈咨文于禮部及兵部。俱以事體乖當持之。適又皇帝賓天。使事無暇。至九月復命。辛酉以同副承旨召還。俄遷右副承旨兼三字銜。八月除龍川府使辭不赴。冬胡人以鐵騎數千渡江。直擣宣川。襲破天將留陣。勢若飄風。廢主使備局大臣沈海壽,朴承宗等會議政堂。公以該房承旨入參。大臣所陳。不過羈縻之計也。翌日備局請遣差官爲偵探計。而因循之間。賊勢益急。公引漢唐已事啓之曰內爲守戰之備。外爲羈縻之策。以姑緩目前之急。亦未爲不得也。及啓下備局。朴承宗大唱曰黃某主和。葢喜之也。
翌日公呈辭㱕。先公曰汝之啓。眞所謂君好發而臣决拾者也。廟議羈縻。出於主意。而猶以公議爲懼。隱然欲㱕咎於人。此承宗之所以大唱也。他日必爲藉口之的。吾爲汝懼也。壬戌遭先公喪。守制如前。癸亥仁廟改玉。首擧廢妃附虜之罪。次第誅竄。後月餘。兩司以公政院所啓爲和議倡。有海南安置之命。公哭辭家廟及几筵。入慰大夫人。卽日登程。雲岳李公以木段贐行。白洲李公明漢以御史來問。勅邏吏善護。及到杜門潛處。讀書爲事。孤山尹公善道常來訪論討。又遣其從弟善進,善一受學。乙丑自上察其寃。命量移內地。庚午桐溪上疏請流配人罪輕罰重者分揀。公名亦在其中。癸酉始蒙特宥還鄕。甲戌蕩滌。還授職帖。乙亥追先公遺志。築水月堂。日靜處其中。玩究書史。翛然有自適之趣。丁丑聞南漢下城之報。悲憤不自勝。遂流寓於山寺峽舍之間。居無定處。內弟瓢隱先生乘暇相從。共舒悲懷。戊子三月某甲以疾終。享年七十二。葬于郡北墨坊洞負辛之原。配密陽朴氏惺之女。卽大菴也。無子。以仲弟中憲子石來爲嗣。二女郡守曺挺融,參奉鄭基德其婿也。石來二男圭,基。四女李厚載護軍,徐翰振,鄭錫圭,朴泰厚。圭三男世重,世恒,世泰。二女孫命杰,權大成同樞。基二男世鏘,世鍾。一女朴時漸。玄孫以下多不盡錄。嗚呼。公以英邁之姿。有遠大之志。幼而染襲於海月之庭。長而薰炙於大菴之門。聞見日博。踐履日篤。而又嘗往來就正於泗水立巖之間。自夫日用彝倫之常。以至出處義利之辨。靡不深究而細析。可謂目下無全牛矣。是以其事親也極其志體之養。友弟也盡其天顯之情。其奉先也誠意顒若。其御家也和氣薰然。律身之嚴。如履薄冰。敎子之純。如養芝蘭。尤以奬率後進爲己任。因材而篤之。蔚然有可觀。雖其才質之美。固異於人。而師友學問之力。又焉可誣也。嗚呼。世之不樂成人之美者。每以廢朝之出膺召命。院啓之先陳羈縻爲口實。噫其甚矣。向使公低徊於召命則陰中之禍將及於病親。爲人子者。當如何而處此也。况先輩之仕於廢朝者亦多。何獨於公而疑之乎。且夫盡孝一疏。其辭雖婉而大義昭然。則亦足以見公之志矣。羈縻二字。實廢主之意也。大臣承旨滿朝和附。則公雖勿言羈縻之計。其可已乎。公特不察機關而先發之耳。所以奸臣之大唱。讒口之囂囂。至於如是。然桐溪先生分揀之請。一出於公正。而天日下燭。渙霈旋降。則公之飮墨之恨。始可以白於天下矣。尙何恨哉。公之裔孫某某等。使其族子萬榮,國榮持遺事請銘於不佞。不佞竊傷夫公之志壹鬱而不章。遂最其槩而爲之銘。銘曰。
名父之子。宗儒之弟。行全忠孝。學兼德藝。有本如是。何用不宜。涉險專對。扶倫有啓。彼何人斯。貝錦成斐。蠅點白璧。丸失歐臾。大賢一言。權衡不差。感回天心。消融邦誣。㱕臥衡茅。萬事堪噫。慟深風泉。迹散山野。居然反息。墨坊之峙。我銘玆石。揭示公議。
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 황중윤黃中允 1577 ~ 1648 묘갈명 김도화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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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鄭佺 행장 -이현일
정전鄭佺 행장 이현일
송오(松塢) 정공(鄭公)의 행장
공의 휘는 전(佺)이고, 자는 수보(壽甫)이며, 일찍이 자호를 송오(松塢)라 하였고,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선대에 휘 극경(克卿)이 고려조에서 중랑장(中郞將)을 지냈고, 이때부터 대대로 저명한 사람이 있었다.
증조는 휘가 언보(彦輔)인데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였고, 조부는 휘가 두(枓)인데 사섬시 직장(司贍寺直長)을 지냈고 사후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추증되었다. 고는 휘가 사성(士誠)인데 양구 현감(楊口縣監)을 지냈다. 영양 남씨(英陽南氏)에게 장가들어 융경(隆慶) 기사년(1569, 선조2) 윤6월 갑자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효성스럽고 삼가서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조모 권씨(權氏)가 그 지성스럽고 민첩함을 가상히 여겨 일찍이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이 아이는 뒷날 반드시 수립할 바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9세에 능히 칠언시를 지었는데 의취(意趣)가 범상치 않아서 당시의 선배들에게 칭찬받았다. 양구공이 일찍이 퇴도(退陶) 선생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으니, 공의 학문은 이미 가학(家學)을 물려받은 것이고, 또 일찍이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과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두 선생 및 구백담(具柏潭 구봉령(具鳳齡)) 선생에게 나아가 질문하여 여러 경서(經書)와 자서(子書)의 구두와 음의(音義)의 바름을 얻었다.
학봉 선생이 일찍이 그 학문이 정밀하고 넓음을 감탄하였고, 서애 선생 또한 그 문장이 정밀하고 핍진하여 법도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만력 임진년에 일본이 병란을 일으키자 근시재(近始齋) 김공 해(金公垓)가 그때 의병장이 되어 공을 불러서 서기(書記)를 맡게 하였다.
이때 공의 집이 난을 피하여 깊은 산골로 들어갔는데, 역병에 걸렸기 때문에 공이 부득이 달려가서 구호하였다. 집안의 대소 인원이 역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공만 홀로 무사하니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공은 형제간에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는데, 아우 신(伸)이 일찍이 무함을 받아 변원(邊遠)에 정배되자 공이 천리를 멀다 않고 조정에 소원(訴寃)하여 풀려나게 되었다. 매부(妹夫)가 역질에 걸려 죽자 친척이 아무도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는데, 공이 즉시 달려가서 직접 염(殮)을 하여 입관(入棺)하였고, 누이를 데려다 가까이 두고서 조석으로 위로하고 음식을 보내서 구기(拘忌) 때문에 두려워하여 피하지 않았다. 아우들을 대할 때에는 화락하게 하였고, 붕우가 오면 권면하고 독려하여 또한 조금도 느슨하지 않았다. 공이 비록 부모의 명으로 과거 공부를 하기는 했지만 급급하게 벼슬하려는 뜻은 없었다.
신축년(1601, 선조34)에 상사생이 되었고, 그 후에 누차 응시하여 급제하지 못했으나 또한 개의치 않았다. 광해(光海)의 정사가 어지러워지자 공이 더 이상 벼슬할 뜻을 두지 않았다. 인조가 반정한 뒤에 천거한 사람이 있어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두문불출하여 한결같이 독서하고 뜻을 구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하루 종일 단정히 앉아서 경훈(經訓)에 침잠하였고, 특히 주자의 글을 읽기를 좋아하여 침식을 잊기까지 하였으며, 그에게 배우는 문생(門生)과 자제들에게 대부분 이것으로 가르쳐서 권면하였다. 공이 사문(師門)의 가르침을 독실히 믿고 삼가 지켰고, 문의(文義)를 강설하는 것도 모두 명백하고 친절하여 당시 여러 장로(長老)들이 경의(經義)를 잘 말하는 자를 일컬을 때 모두들 ‘정군(鄭君), 정군’ 하였다.
71세에 병에 걸려 오랫동안 앓았으나 정신이 흐려지지 않았고, 병이 위독해지자 홀연히 꿈속에서 말하는 것처럼 중얼거리기를, “때는 장차 한밤중이 되어 가는데, 사방을 돌아보매 적막하구나. 천지의 조화를 따라 떠나니, 예로부터 이와 같았네.” 하였다. 말을 마치고 나서 운명하니, 기묘년(1639, 인조17) 1월 2일이었다. 그해 3월 모일에 안동부(安東府) 북쪽 모향의 언덕에 장사 지냈는데, 현감공의 묘에서 몇 보 옆이었다.
부인은 오씨(吳氏)인데, 현감 언의(彦毅)의 증손녀이고, 진사 수영(守盈)의 손녀이며, 내자시 정(內資寺正) 순(漘)의 따님이다.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이름이 기덕(基德)이고, 차남은 기적(基績)이며, 딸들은 모두 시집가서 사인(士人)의 아내가 되었으니, 권극억(權克嶷), 이부일(李傅逸)이 그 사위들이다.
기덕이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이 횡(鐄)이다. 딸이 다섯인데, 장녀는 사인 이근한(李根漢)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현감 이성철(李誠哲)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사인 김교령(金喬齡)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사인 금취규(琴聚奎)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사인 유세천(柳世千)에게 시집갔다.
기적이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이름이 선(鍹), 륜(錀), 창(錩)이고, 딸은 사인 이지종(李之宗)에게 시집갔다. 증손은 남자가 14명이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온아(溫雅)하여 평생에 빨리 말을 하거나 급한 기색을 지은 적이 없었고, 일찍이 사우(師友)들 사이에서 절차탁마하는 도움을 받아 학문이 증진되어 우뚝하게 일찍 성취되었다.
약포(藥圃 정탁(鄭琢)) 정 상공(鄭相公)이 현감공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둘째의 경술(經術)과 사장(詞章)은 집안의 명성을 크게 떨치기에 충분하다.” 하였다. 만년에 재기(才器)가 노성(老成)하고 조용하고 화평해서 남과 거스르는 일이 없으니, 어진 사람이건 어리석은 사람이건 모두들 사랑하고 사모하며 존경하였다.
계암(溪巖) 김공 령(金公坽)이 맑고 엄하며 엄숙하고 장중해서 남을 인정하는 일이 적었는데, 일찍이 이르기를, “공은 부드러우면서도 법도가 있고, 남들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시속에 빠지지 않으며, 곤궁에 빠져도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니, 참으로 가인(可人)이다.” 하였다. 공의 종부제(從父弟) 칙(侙)이 문장과 감식안(鑑識眼)이 있었는데 그 또한 공의 경학(經學)과 고상한 지조는 옛사람에 부끄럽지 않다고 칭찬하였다.
집안에서는 항상 분수에 따라 검약하였고, 식량이 자주 떨어졌으나 태연하게 마음을 쓰지 않았으며, 세속의 명리(名利)와 영화(榮華)에 대해서는 더욱 담담하였다. 공은 시문(詩文) 짓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비록 지었더라도 곧 원고를 버려서 남들에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에 전해지지 않는다.
내가 궁벽한 시골에서 후대에 태어났기 때문에 생전에 공을 뵙지는 못했지만, 공의 둘째 사위 처사공이 바로 나의 종부형(從父兄)인데 평소에 입이 마르도록 공을 칭찬하였기 때문에 내가 어려서부터 공의 훌륭한 문장과 행의(行誼)에 대해 익히 들었다.
지난번에 공의 손자 선(鍹)이 공의 행사를 나에게 주면서 행장을 짓게 하고 장차 대가에게 지문(誌文)을 구하려고 하였다. 내가 능력이 못 된다고 거절했으나 거듭 청하여 마지않기에 마침내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선이 논찬한 것에 의거하여 우선 위와 같이 기록하니, 입언(立言)할 군자는 참고하기 바란다. 삼가 쓴다.
ⓒ 한국고전번역원 | 홍기은 (역) | 2005
松塢鄭公行狀
公諱佺。字壽甫。嘗自號松塢。其先淸州人。上世有諱a128_490d克卿。爲高麗中郞將。自是連世有聞人。曾祖諱彥輔。成均進士。祖諱枓。司贍寺直長。卒。贈漢城府右尹。考諱士誠。楊口縣監。娶英陽南氏。以隆慶己巳閏六月甲子生公。幼孝謹異凡兒。祖母權氏嘉其勤敏。嘗撫其背曰。此兒他日必有所立矣。年九歲。能作七字句詩。思致不凡。爲一時先輩所稱賞。楊口公嘗從退陶先生。親承講畫。公之學。旣受之家庭。又嘗就質於鶴峯,西厓兩先生及具栢潭先生之門。得諸經子書句讀音義之正。鶴峯先生嘗歎其學問精博。西厓先生亦稱其文精切有法度。萬曆壬辰。日難作。近始齋a128_491a金公垓時爲義兵將。辟公掌書記。公家方避亂深峽中。罹癘疫之患。公不得已奔往救護。家中大小無不染逮。獨公卒無事。人皆異之。公於同氣。友愛甚篤。弟伸嘗爲人所搆陷。編配邊遠地。公不遠千里。訴冤于朝。事得釋。妹之夫遘癘而死。親戚莫敢近。公卽馳赴之。躬親棺斂。迎妹置近地。朝夕問遺。不以拘忌。有所畏避。遇諸弟怡怡。若朋友至。勸勉程督。亦不少饒。公雖以親命業程文。無汲汲進取意。辛丑。補上舍生。其後屢擧不中第。亦不介意。光海政亂。公不復有當世念。及仁祖改玉。有薦者。除禁府都事。不就。杜門却a128_491b掃。一以讀書求志爲事。端坐竟日。沈潛經訓。尤喜讀朱子書。至忘寢食。門生子弟之受學者。率以此擧似而勉進之。公於師門指誨。篤信而謹守之。至講說文義。亦皆明白親切。一時諸丈老稱善談經義者皆曰。鄭君鄭君。年七十一。寢疾彌留。精爽不亂。疾旣病。忽沈吟如夢中語曰。時夜將半。四顧寂寥。乘化歸盡。終古如斯。言訖而終。己卯正月二日也。是年三月某日。葬安東府北某向之原。在縣監公墓側若干步。夫人吳氏。縣監彥毅之曾孫。進士守盈之孫。內資寺正漘之女。有子男二人女二人。男長曰基德。次基績。女皆a128_491c嫁爲士人妻。壻曰權克嶷,李傅逸。基德有一男曰鐄。女五人。長適士人李根漢。次適縣監李誠哲。次適士人金喬齡。次適士人琴聚奎。次適士人柳世千。基績有三男一女。男鍹,錀,錩。女適士人李之宗。曾孫男凡十四人。公資稟溫雅。平生無疾言遽色。嘗周旋師友間。得切磋之助。學問開益。卓然早成。藥圃鄭相公貽書縣監公曰。二郞經術詞章。足以大振家聲。及其晩節。才器老成。從容和易。與物無忤。人無賢愚。莫不愛慕而尊敬之。溪巖金公坽淸嚴峻整。於人少許可。嘗謂公柔而有制。和而不流。窮厄不能動其心。信可人a128_491d也。及公之從父弟侙有文章藻鑑。亦稱公經學雅操。無愧古人云。其居家。常任分守約。雖簞瓢屢空。曠然不以爲意。於世俗名利芬華。尤泊如也。公不喜作詩文。雖有作。輒棄稿不示人。以故不傳於世。玄逸窮鄕晩出。雖未能及公之世。而公之第二壻處士公。卽玄逸之從父兄。每平居歎述公不離口。玄逸自兒幼時。習聞公文章行誼之盛。迺者公之孫鍹。以公行事授玄逸序次。將求誌於作者。玄逸謝不能。而其請不已。遂不敢辭。謹就鍹所論撰。第錄如右。惟立言之君子有以財之。
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 정전鄭佺 행장 -이현일 - Daum 카페
정전鄭佺 행장 -이현일
정전鄭佺 행장 이현일 송오(松塢) 정공(鄭公)의 행장 공의 휘는 전(佺)이고, 자는 수보(壽甫)이며, 일찍이 자호를 송오(松塢)라 하였고,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선대에 휘 극경(克卿)이 고려조에서 중랑장(中郞將)을 지냈고, 이때부터 대대로 저명한 사람이 있었다. 증조는 휘가 언보(彦輔)인데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였고, 조부는 휘가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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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 통훈대부한성부판관 중사공 휘 성철 묘갈지 通訓大夫漢城府判官 仲思公 諱 誠哲 墓碣識
| 墓 碣 識 古溪文集卷之六 |
| 公諱誠哲字仲思其先眞城人眞城之李自高麗密 |
| 直使諱碩世有勳封德望六傳至退陶文純公諱滉 |
| 始大顯焉於公爲高祖曾祖諱寯軍器寺僉正祖諱 |
| 安道司醞署直長號蒙齋考諱嶷 社稷署參奉妣 |
| 昌寧成氏牧使 贈判書諱安義之女以 天啓辛 |
| 酉生公 崇禎丙子遭叅奉公喪 孝宗戊戌 除 |
| 稷陵叅奉乙亥遷禮賓寺別提施拜山陰縣監自筮 |
| 仕來僅三朔餘盖伯氏參奉公早世公攝宗事因大 |
| 臣 筵奏有此異數也居官淸愼儉約邑人士立碑 |
| 以頌之甲辰秩滿歸丙午遭成氏喪公常懷終鮮繼 |
| 罹巨創哀痛踰節戊申 除軍資監主簿己酉陞漢 |
| 城府判官是年五月以忌疾卒於亰享年四十有九 |
| 葬于馬陟洞亥坐原配淸州鄭氏將仕郞諱基德女 |
| 義禁府都事諱佺孫生於 天啓甲子卒於 孝廟 |
| 乙巳葬同塋生三男曰杲郡守系參奉公后曰楶叅 |
| 奉曰宲隠德不仕三女長朴震相次金鏞次柳後甲 |
| 側室二男曰椉曰桃郡守一男曰守謙縣令參奉三 |
| 男曰守泰曰守大曰守仁生員三女金天鐸次安命 |
| 駿次朴廷燮處士二男曰守淵翊衛司翊贊曰守澤 |
| 一女 生員權莘椉有守温守五守伯守眞四子桃有 |
| 守正守英守遠守章四子曾玄以下不盡錄嗚呼今 |
| 距公殆數百年顧不肖何敢狀公萬一謹就知縣公 |
| 世胤所撰遺事叅以家庭記聞風儀秀朗望之儼然 |
| 言議峻正聽者敬之雖異己者不敢惎居鄕忠厚而 |
| 絶無厓異之行莅民兼謹而兼施嚴明之政其處族 |
| 也敦睦而惠恤又以禮法綂紀一門此可以見公之 |
| 大致矣若使公克有壽其施諸家國赫赫有可觀而 |
| 聖眷方隆蔭道伊始五朔亰兆千里輿櫬由是志 |
| 業未著事實未備今略舉鄕系履歷以表隧道實爲 |
| 後孫無窮之恨云 |
| 六代孫 通政大夫 行承政院同副承旨 彙寧 謹識 |
| 묘 갈 지 |
| 公의 諱는 성철이요, 字는 중사인데, 그 선조는 眞城人이다. |
| 진성이씨는 고려 밀직사 諱 석碩으로부터 대대로 나라에 훈봉勳封과 덕망이 있었고 |
| 6대를 내려와서 퇴도 문순공 諱 황滉에 이르러 크게 세상에 나타났으며, |
| 바로 公의 高祖이시다. |
| 曾祖의 諱는 준寯이니 군기시 첨정이요, |
| 祖의 諱는 안도安道이니 사온서 직장이요, 號는 몽재蒙齋이시다. |
| 考의 諱는 의嶷요, 사직서 참봉이시며, |
| 어머니는 창녕성씨 목사 증판서 안의의 따님이다. |
| 천계 신유년(1621. 光海君13)에 나셔서 |
| 숭정 병자년(1636. 仁祖14)에 參奉公의 喪을 당하시고 |
| 효종 무술년에 직능참봉을 제수 받았으며, |
| 을해년에 예빈시 별제로 옮겼다가 다시 산음현감으로 배수하였다. |
| 벼슬길에 나선지 겨우 석달이 지나 伯氏 參奉公이 早世하시니 |
| 公이 宗事를 섭행攝行히시게 되었다. |
| 이 사실을 大臣들이 경연에 주달하였다. |
| 이러한 일은 아주 드문 일이다. |
| 벼슬살이가 청렴하고, 근신하고, 검약하여 고을 사람들이 비를 세워 칭송하였는데 |
| 甲辰年에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셨다. |
| 丙午年에 어머니 成氏 喪을 당하였다. |
| 公은 늘 끝까지 효도 못한 회포가 마음 깊이 크게 걸리어 애통한 마음이 도에 넘칠 정도였다. |
| 무신년에 군자감 주부를 제수하였고, 기유년에 한성부 판관에 승진 되었는데 |
| 이 해(1669. 顯宗10) 5月에 忌疾로 서울에서 돌아 가시니, 享年 49세셨다. |
| 葬地는 마척동 해좌의 언덕에 있다. |
| 配位는 청주정씨 장사랑 諱 기덕의 따님이요, 의금부도사 諱 전의 孫女이신데 |
| 천계 갑자년(인조 2년)에 나시어 |
| 효종 을사년(현종 6년)에 卒하시니 同塋에 合葬하였다. |
| 5남을 두었으니 고는 군수로서 參奉公의 後系요, 절은 참봉이요, |
| 실은 숨은 德이 있어 벼슬하지 않았고, 승과 도이다. |
| 3녀는 박진상, 김용, 유후갑에게 출가하였다. |
| 군수가 1남을 두니 수겸으로 현령이요, |
| 참봉이 3남을 두니 수태, 수대, 수인은 생원이요 |
| 3녀는 김천탁, 안명준, 박정섭에게 출가하였다. |
| 처사가 2남을 두니 수연은 익위사익찬이요, 수택이다. |
| 1녀는 생원 권신에게 출가하였다. |
| 승은 수온, 수오, 수백, 수진의 4남이 있고 |
| 도는 수정, 수영, 수원, 수장의 4남이 있다. |
| 曾玄孫 以下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
| 아아! 公이 떠난신지 거의 수백년이 지난 이제 이 불초후손이 |
| 어찌 감히 公의 행장을 만분의 일인들 말할 수 있겠는가 마는 |
| 삼가 知縣公 世胤이 지으신 遺事와 가정에 기록한 서적과 |
| 전문한 것을 참고하면 風度가 준수하고 밝았으며 바라보면 儼然하고, |
| 언론이 峻嚴하고 정대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공경을 받았고, |
| 비록 자기의사와 달라도 감히 해롭게 하지 않으셨다. |
| 鄕里에 계실때 충실하고 溫厚하여 사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조금도 하지 않았으며 |
| 백성을 다스릴 때는 청렴하고 근신하였으나 엄정하고 명쾌하였다. |
| 일가간에 있어서는 돈독과 혜휼惠恤의 情을 두었고 |
| 또 일문을 통솔하였으니 |
| 이에 가히 公의 능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 만약 公이 壽를 더 하셨다면 집과 나라에 세운 공적이 赫赫할 것이다. |
| 임금의 은총이 바야흐로 두텁고 蔭官의 길이 시작되어 |
| 다섯달 서울 살이와 천리운구千里運柩로서 뜻과 사업을 펴지 못하였으므로 |
| 그에 대한 사실의 기록이 갖추어 지지 않았다. |
| 이제 鄕里에서 擧하시던 리역履歷을 대략들어 墓道에 表하니 |
| 실로 후손된 자로서 무궁한 恨이라 아니할 수 없다. |
| 6대손 통정대부 행승정원동부승지 휘령 근지 |
출처: 진성이씨 우포파 | 11세 통훈대부한성부판관 중사공 휘 성철 묘갈지 通訓大夫漢城府判官 仲思公 諱 誠哲 墓碣識 - Daum 카페
11세 통훈대부한성부판관 중사공 휘 성철 묘갈지 通訓大夫漢城府判官 仲思公 諱 誠哲 墓碣識
墓 碣 識 古溪文集卷之六 公諱誠哲字仲思其先眞城人眞城之李自高麗密 直使諱碩世有勳封德望六傳至退陶文純公諱滉 始大顯焉於公爲高祖曾祖諱寯軍器寺僉正祖諱 安道司醞署直長號蒙齋考諱嶷 社稷署參奉妣 昌寧成氏牧使 贈判書諱安義之女以 天啓辛 酉生公 崇禎丙子遭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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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유재 김용 金鏞공의 가장[六有齋公家狀]
육유재공의 가장[六有齋公家狀]
공의 휘는 용鏞, 자는 명구鳴久이다. 김씨金氏는 본래 신라 왕자新羅
王子 흥광興光의 후손으로 고려 시대에 서로 이어서 경상을 지냈는데
우리 조선 조정에 들어와서는 천리天利가 밀직사를 지냈다.
5세를 지나 부륜富倫에 이르러서는 벼슬이 현감이었다.
도산陶山 이 선생李先生(이황李滉)에게 배웠는데 사문이 애중하였다.
호가 설월당雪月堂이다.
대부大父는 영坽이니 벼슬이 사간이었다.
인조 때에 풍절과 독행으로 이름나 세상에서 계암 선생溪巖先生이라 일컫는다.
지금 임금의 조정에서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는데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휘두輝斗는 진사로 고상한 행실이 있었다.
호는 남간南澗인데 하계霞溪 권유權愈114가 이른바 ‘지조
가 능히 가법을 이었다.’고 한 분이다. 이 어른이 진주 강씨晉州姜氏에게
장가갔는데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 계실繼室은 영해 신씨寧海申氏로 제용
감 부정濟用監副正 신건申楗의 따님이다. 대명大明 영력永曆 정유년(1657)
모월 모일에 공을 오천리烏川里 집에서 낳으니 어려서부터 지극한 성품
이 있었다. 정훈庭訓이 또 엄정하여 젊어서부터 과년한 자제가 없었다.
갑인년(1674)에 남간 공이 세상을 떠났는데, 위독해지자 단지斷指하여
입에 피를 흘러 넣고 초상이 나자 상례의 절차를 엄히 지켜 오직 예의를
따르니, 이때 공의 나이가 아직 스물이 되기 전이라 보는 사람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그 후 한 번 소과에 응시하였으나 입격하지 못하자
드디어 결단하여 과업을 버리고 날마다 고요한 곳에 거처하여 독서하였
다. 우리 영종 임자년(1732) 1월 5일에 육유재六有齋에서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76세였다. 8월 임오壬午에 안동부安東府 북쪽 동막산東幕山에 장
사 지냈다가 뒤에 예안禮安 현동玄洞 유향酉向의 언덕으로 옮겨 모시니
실은 할머니 홍 부인 묘소 앞이었다.
아, 공은 세상에 기구하게 나서 끝내 깊이 가려진 곳에서 늙어 세상에
베푼 것을 논할 만한 것이 없다. 유독 집안에 거처하며 일삼아 행한
것이 날마다 볼만한 것이었을 뿐이다. 어버이를 모심에는 모부인 받들
기에 마음을 다하였다. 양가養家가 본래부터 가난하였지만 맛있는 음식
올리기를 거른 적이 없었고 또한 그 장만하는 어려움을 모르게 하였다.
아침저녁으로 드리는 문안이나 추위와 더위에 거처를 적절하게 해드리
는 일은 내칙內則을 따르고 항상 기쁜 안색과 유순한 용모를 지었으므로
종족이 모두 “어버이 모시는 일은 아무개처럼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본가 어머니의 상례 때에도 이전의 상처럼 정성을 다하여 몇 리나 떨어
진 묘소를 한겨울 추위나 장마철의 더위에도 거르지 않고 매일 곡하며
성묘하였다.
자신을 단속함에는 비루하고 사리에 어긋난 말을 멀리하고 게으르거
나 거만한 습관을 몸에 베풀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한
다음 종일토록 공경하는 태도를 지켜 홀로 한가히 지내는 곳에서도 엄
격한 스승을 모시고 있는 것처럼 하였다. 집안에 거처할 때는 부부夫婦
가 손님처럼 서로 공경하여 50년을 해로하면서도 규방에서 한결같이
예법을 지켰다. 유인이 세상을 떠난 때에 병이 위독하자 공이 들어가
진찰하고 나와 “내 일찍이 발을 본 적이 없었거든, 지금은 발이 드러나
있는데도 수습할 줄 모르니 장차 돌아가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는데,
그 이튿날 과연 슬픈 일을 당하였다. 향리에 거처할 때는 자신의 본분을
지키고 세리勢利를 멀리하였으며 다른 사람의 선행을 칭찬할 뿐 그 허물
을 말하기를 꺼렸다. 대체로 자신의 지조를 엄격히 지켜서 조금이라도
남에게 오욕汚辱을 당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러나 남들에 대해서는 경계나 간격을 두지 않고 오로지 정성으로
대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종족과 향당이 모두 공경하여 따랐다. 위급한
사람을 도와줄 때는 의리를 중시하고 재물을 가볍게 여겨 가난을 핑계
로 인색하게 처신하지 않았다. 일찍이 둘째 아들을 영천에 보내어 노복
을 추쇄하여 흉년을 견딜 계획을 세운 적이 있었다. 그 길에 공의 질녀姪女
가 사는 곳을 찾아보게 하였다. 질녀의 생활이 몹시 곤궁하여 아들이
곧 실어 온 것을 남김없이 주어버렸다. 돌아온 후에 공이 “돌아오는
길에 아무개 질녀를 만나 보았느냐?”라고 물으니, 아들이 대답하기를
“만났는데 금방이라도 굶어서 죽을 지경이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실은 물건을 주지 그랬느냐.”라고 하니 “주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자들이 범가范家의 의장義庄115도 이보다 낫지는 않았을 것이
라 하였다. 학문을 할 때는 일정한 방에 정좌하고 정신을 집중하여 강습하였는
데, 돌아가시던 날 아침까지도 송독을 그치지 않았다. 경서와 사서 및
모든 성리서性理書에 무르익어 관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심경心經
과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에 대해서는 더욱 독실하게 공력을 기울였다.
일찍이 지은 시에,
수시로 맑은 정신을 불러 깨우는 것은 時時喚起惺惺主
일없이 선정에 들려 해서가 아니라네 不是空空入定禪
라고 하고, 또
저울 눈금 쌓여야 큰 것을 이루듯이 銖銖寸寸能成大
점점이 흐르는 물 오래되면 채워지리 點點涓涓久乃充
라고 한 곳이 있으니, 스스로 즐거워한 경지를 알 수가 있다.
거처하던 초당草堂에 육유재六有齋라고 편액하니 횡거橫渠 장 선생張先生
의 ‘낮에는 일을 행하고 밤에는 터득하며 쉴 때도 양성하고 잠깐 사이에
도 존심한다.’고 한 뜻이다.116 병이 위독하자 손으로 서안의 책을 쓰다
듬으며 시중드는 자에게 감실에 올려두게 하였다. 그리고 여러 아들들
에게 “내가 젊었을 때 미련하고 노둔하였다. 아버님이 일찍이 훈계하시
기를 ‘네 형은 재주가 있었지만 요절하였다. 네가 만약 배움에 힘써서
우리 집에 글을 읽는 사람이 끊어지지 않을 수 있게 한다면 내가 눈을
감을 수 있다.’ 하신 적이 있으므로 못난 내가 감히 하루도 잊지 못하였
다. 지금 아무 이룬 것은 없지만 또한 지하로 돌아가 뵐 수가 있다.”라고
하였다. 대개 공의 집안이 대대로 이어온 가법에는 본래 연원淵源이 있었지만
이미 남간공의 유훈을 제대로 유념한 데다 계부 송파공松坡公에게서
전습傳習하여 마침내 속학俗學 이외에도 해야 할 일이 있음을 알았다.
개석介石의 자질117에 더욱 갈고 닦는 공부를 더하고 빙벽氷蘗의 지조118
에 치밀한 노력을 거듭하여 만년에 이르러서는 공부가 더욱 나아지고
덕이 더욱 높아져 외모에 나타난 것이 엄밀하면서도 신중하고 간이하면
서도 온화하여 동시대의 붕우들이 초당옹草堂翁이라 부르면서 자字를
부르지 않았다. 문인 여선겸呂善謙은 현감 여명주呂命周119의 아들로 일
찍이 공의 모습을 손수 그리고 직접 찬贊을 달았는데,
온화하고도 씩씩한 모습 和而莊
그 덕성이 드러나네 狀厥德
엄숙하게 바라보나니 肅然瞻
사특함이 절로 사라지네 邪自却
라고 하니, 공이 비록 가난한 집에서 늙었지만 덕의 광휘光輝가 사방에
도달하여 남들을 감복시킴이 이와 같았다. 가법이 본래 엄정하기로 선
세부터 영남에서 유명하였거니와 공에 이르러 더욱 조심하여 쇠퇴하지
않게 하였으므로 문정이 엄숙하고 방정하였다. 삼종질三從姪 아무개가
일찍이 그 집에서 아들을 안고 있었는데 공이 멀리서 보고 불러 꾸짖으
니 그 사람이 두렵고 부끄럽게 여겨 감히 다시는 그러지 못하였다.
문장은 두텁게 쌓은 공부가 발로하여 혼연渾然하고 순숙純熟하였고,
시 또한 전아典雅하고 충담沖澹하여 조탁하여 꾸미기를 일삼지 않아도
이치가 저절로 이루어졌다. 벗이었던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이 일찍
이 “초당은 노둔하였지만 학문에 힘써 문장을 이루었으니, 재주 있는
사람이 미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약간의 책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유인孺人 진성 이씨眞城李氏는 판관 이성철李誠哲의 따님이니, 바로 퇴계
선생退溪先生의 5세손으로 아들 넷과 딸 둘을 낳았다. 아들로 장남 상학
尙學은 생원인데 행의로 향리의 중망을 받았으나 공보다 먼저 죽었다.
차남은 상질尙質인데 역시 공보다 먼저 죽고 그다음은 상문尙文인데 출
계하였다. 그다음은 상덕尙德으로 또한 출계하였는데 수직壽職으로 벼슬
이 동지중추부사이다. 딸은 사인 안서준安瑞駿·김서조金瑞朝에게 시집갔
다. 손자는 9인은 아무개 아무개 등이다.
아, 공이 세상을 떠난 지 지금 70여 년이 되니 언행이 날로 잊혀간다.
하루는 공의 여러 후손이 나에게 부탁하기를 “증조부의 학문 덕행은
마땅히 칭술해야 합니다. 그런데 못난 우리로서는 칭술하지 못하여 이
름이 인몰湮沒될까 두렵습니다. 장차 덕을 아는 입언 군자에게 묘갈문을
맡겨 후세에 전하게 하려 하니 그대가 가장家狀을 편차編次해 주십시오.”
라고 하였는데, 내가 공에 대하여 당형제의 후손이 되므로 감히 사양하
지 못하였다.
이에 공의 아들 생원공生員公이 손수 기록한 글과 공의 유고 및 지구
知舊들의 만사와 제문을 근거하여 대략 위와 같이 배열하였다. 어찌 감
히 조금이라도 근거 없이 지어내어 옳지 못한 죄를 범하겠는가. 후세의
공의는 선배 중 당대의 명류名流로서 공을 애도한 만사에 혹
즐겁고 편안히 여긴 바는 한 바가지 물 所樂安瓢飮
가까운 일상에 뜻을 붙여 공부하였네 工夫着近思
라고 하거나 혹
누가 능히 후학의 스승이 되랴 誰能師後學
경서를 읽는 분 다시 없으니 無復讀遺經
라고 하거나 혹
영남 인사 중 으뜸이었네 山南人士首
라고 하거나 혹
요금 소리 천년토록 남은 음률 고르리 瑶絃千載按餘音
라고 한 말 등에서 공의 덕행을 징험할 수 있을 것이다. 당대에 공을
안 사람의 공평한 칭송이 이미 이와 같았다면, 이것을 역사에 붙이더라
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오직 공의 중체重體를 받든 자손이 대를 이어 요절하고 다소의 문적이
보전되지 못한 까닭에 기술한 말이 너무 소략함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 어찌 나중이라도 붓을 잡을 대가의 채택에 대비가 되랴
六有齋公家狀
公諱鏞。字鳴久。金氏本新羅王子興光之後也。在勝 國。代相承爲宰輔。入我朝。有諱天利。密直使。歷五
世。至諱富倫。官知縣。學于陶山李先生。爲師門所重。 號雪月堂。大父諱坽。官司諫。以風節獨行。名于仁 祖世。世稱溪巖先生。今上朝贈大冡宰。謚文貞 公。諱輝斗。進士。有高行。號南澗。權霞溪。所謂志操克 承家者也。聘晉州姜氏。不育。繼室寧海申氏。濟用副 正楗之女也。以大明永曆丁酉某月某日。生公于烏 川里第。幼有至性。庭訓又嚴。自少未嘗有子弟過。歲 甲寅。南澗公卒。其危劇。血指以灌之。旣喪。喪節嚴謹。 惟禮儀是遵。時。公年末及冠。見者皆奇之。其後一試 南宮不遇。遂决去之。日靜居讀書。我英宗壬子正月五日。考終于六有齋。享年七十有六。其年八月壬 午。葬于安東府北東幕山。後移奉于禮安之玄洞酉 坐之原。實祖妣洪夫人墓前也。嗚乎。公畸於世。卒老 於豊蔀之下。施之于世。無可論矣。獨居家事爲。日可 見者而己。其事親也。奉母夫人忠養。家素貧而瀡 未嘗闕。亦不使知其備之艱也。定省温凊。循內則。常 愉色婉容。宗族咸曰事親若某者可也。及後喪。自致 如前喪。墓距數里許。日哭省。祈寒雨暑不廢。其律身 也。鄙倍之言。遠於辭氣。惰慢之習。不設身體。朝起盥 櫛。終日欽欽。雖幽獨之中。有若嚴師在前。其居家也。夫婦相敬如賔。偕老五十年。閨門之中。一以禮。孺人 臨終病篤。公入診之。出曰吾未嘗見其足。今露而不 知收。將不歸乎。其翌。果遭慽。其居鄕也。守吾拙而㥘 於利勢。揚人善而耻言其過。凡厲自持。耻一點受汚 於人。而待人則不畦不畛。惟悃愊是以。是故。宗族鄕 黨。皆敬服。其急人也。重義輕財。不以貧窶而有所恡。 嘗送第二子榮川。斥臧獲。欲爲荒歲計。道過公從姪 女所。窘甚。遂傾所載與之。及返。公問歸路見某姪女 乎。曰見之。溝壑將面前矣。公曰何不與所載物乎。曰 與之。聞者以爲范家無以過之。其爲學也。靜坐一室。專意講習。逮觀化之朝。不撤誦讀。若經若史。若性理 諸書。無不淹貫。而於心經 朱子書節要。用工尤篤。嘗 有詩。曰時時喚起惺惺主。不是空空入定禪。又曰銖 銖寸寸能成大。點點涓涓久乃充。其所自樂者。可知 也。所居草堂。顔以六有。橫渠 張子。爲得養存之義也。 疾旣革。手撫案上書。命侍者。庋諸龕。語諸子。曰吾少 也。椎魯先君。嘗戒之。曰汝兄才而夭。汝苟力學。吾家 讀書種子。得以不絶。吾之目可瞑。不肖不敢一日忘。今 雖無成。亦可以歸拜地下。盖公家世裘飱。自有淵源。 而旣克念南澗公遺戒。又傳習於季父松坡公。乃於俗學之外。知有合做底事。介石之姿而加以磨礱之 工。氷蘗之操而重以銖寸之㓛。至其晚年。業益進而 德益卲。見於外者。嚴慄而謹慤。簡易而和粹。一時諸 友。皆皆呼草堂翁而不字也。門人呂善謙。邑宰命周 子也。嘗手寫公直係以贊。曰和而莊。狀厥德。肅然瞻。 邪自却。公雖窮老蓬蓽。而德輝之旁達而服人。如此。 家法自先世素嚴。聞於山南。至公又競競無替。門庭 斬斬焉。三從姪某。嘗抱子于其堂。公遥見而召責之。 其人惶愧不敢復之。文章積厚而發。渾然純熟。詩亦 典雅冲澹。不事藻繪而理自到。友人權蒼雪 斗經。嘗謂草堂鈍而力學以文。非才子可及。今有若干卷。藏 于家。孺人眞城李氏。判官 誠哲之女。寔退溪先生五 世孫。擧四男。長尙學。生員。以行義。重於鄕。先公歿。次 尙質。亦先公歿。次尙文出後。次尙德出後。以壽。官同 中樞。二女。士人安瑞駿 金瑞朝也。孫男九人。曰云云。 噫。公之下世。今七十餘年。言行日以翳然。一日。公之 諸孫。命是瓚。曰曾大父學行。宜有述也。不肖等。名湮 沒而不稱懼焉。將謁文于知德立言君子。俾傳于後。 爾其編次家狀。是瓚於公。爲堂兄弟之後。不敢辭。謹 依公之子生員公所手錄。又據公遺稿及知舊輓誄。畧加排列。如右。何敢一毫杜撰。以犯不韙之罪㦲。後 世公議。徵諸先輩一時名勝之輓公者。或云所樂安 瓢飮。工夫着近思。或云誰能師後學。無復讀遺經。或 云山南人士首。或云瑶絃千載按餘音。當世知公者 之公誦。己如此。是可以得附靑雲而無愧也㦲。惟是 承公重者。連世夭折。文蹟多少不保。所以記述者。不 免太疎畧。惡足以備秉筆之採擇㦲。
114 권유(權愈, 1633∼1704):자는 퇴보(退甫), 호는 하계(霞溪),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665년 문과에 급제하여 청요직을 지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한 후
대사간·대제학이 되고 지경연사에 올랐지만, 1694년 갑술옥사로 서인이 정권을 장악한
후에 유배되었다. 고문에 밝았고, 청빈하다는 평을 들었다.
인경왕후지(仁敬王后誌) 를 저술하고 조선의 역대 임금의 저술인 열성어제(列聖御製) 편찬에 참여하였다.
115 범가(范家)의 의장(義庄):범가는 송나라 오현(吳縣) 사람 범중엄(范仲淹, 989∼
1052)의 집안을 말한다. 범중엄이 참지정사(參知政事)의 벼슬에 오르자 자신의 봉급
을 덜어 전택(田宅)을 마련한 후 오현 일가의 대소사에 경비를 대도록 하였는데, 이것
을 의장(義庄)이라 하였다.
116 횡거(橫渠)……뜻이다:횡거는 북송의 철학자 장재(張載, 1020∼1077)의 호로, 자는
자후(子厚)이다. 장재의 정몽(正蒙) 「유덕(有德)」에서 일상생활에서 노력해야 할 여
섯 가지 일로 “말에는 교훈이 있고, 동작에는 법도가 있고, 낮에는 하는 일이 있어야
하고, 밤에는 터득한 바가 있어야 하고, 숨 쉬는 사이에도 양성(養性)하는 공부가 있어
야 하고, 잠깐 사이에도 존심(存心)하는 공부가 있어야 한다.[言有敎 動有法 晝有爲
宵有得 息有養 瞬有存]”라고 하였다.
117 개석(介石)의 자질:돌처럼 확고부동한 자질이다. 주역 「예괘(豫卦)·육이(六二)」에서
“돌처럼 견고해서 하루가 다하기를 기다리지 않으니, 정하고 길하다. 절조가 돌과 같으
니 어찌 하루가 다하기를 기다리겠는가.
이를 통해서 군자가 결단하는 것을 알 수 있다. [介于石 不終日 貞吉 介如石焉 寧用終日 斷可知矣]”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118 빙벽(氷蘗)의 지조:얼음물을 마시고 소태나무를 씹는다는 뜻으로, 온갖 고난을 감내하
며 절조를 지키는 것을 비유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다. 당(唐)나라 백거이(白居易)의 「삼년위자사(三年爲刺史)」 시에서 “삼 년 세월 동안 자사로 있으면서, 얼음물 마시고
소태를 씹었노라.[三年爲刺史 飮氷復食蘗]”라고 한 데서 나왔다.(白樂天詩集 卷1)
119 여명주(呂命周, 1689∼?):자는 사신(士新),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1714년 진사시
에 입격하였고, 정릉 참봉(靖陵參奉)·종묘 부봉사·호조 좌랑 등을 거쳐 예안 현감(禮安
縣監)을 지냈다. 지방관을 지낼 때 선정으로 이름이 있었다. 김천(金泉) 구성에 살았다.
256 ∙ 일일재선생문집 2
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 육유재 김용 金鏞공의 가장[六有齋公家狀] - Daum 카페
육유재 김용 金鏞공의 가장[六有齋公家狀]
육유재공의 가장[六有齋公家狀]공의 휘는 용鏞, 자는 명구鳴久이다. 김씨金氏는 본래 신라 왕자新羅 王子 흥광興光의 후손으로 고려 시대에 서로 이어서 경상을 지냈는데 우리 조선 조정에 들어와서는 천리天利가 밀직사를 지냈다. 5세를 지나 부륜富倫에 이르러서는 벼슬이 현감이었다. 도산陶山 이 선생李先生(이황李 滉)에게 배웠는데 사문이 애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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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세(世) | 영 | 子 坽(영) 字는 자준(子峻)이니 세칭(世稱) 계암선생(溪巖先生)이요 선조(宣祖)丁丑一五七七年閏八月十三日에 生하고 광해(光海)壬子一六一二年에 문과(文科)에 올라 무오(戊午)年에 주서(注書)로 있다가 시정(時政)이 문란(紊亂)함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귀향(歸鄕)하였다 후(後)에 인조(仁祖)가 개옥(改玉)하매 제일(第一) 먼저 지평(持平)을 제수(除授)받고 소명(召命)이 연이어 칠차(七次)나 헌납(獻納)을 팔차(八次)나 사간(司諫)을 제수(除授)하였으나 칭병(稱病)하고 불취(不就)하니 문간공(文簡公)인 정온(鄭蘊)이 탄(嘆)하여 말하기를 우리 왕조의 계암공(溪巖公)은 무왕시절(武王時節)의 백이(伯夷)와 같다 하였다 병자란(丙子亂)에는 가재(家財)를 털어 군비(軍備)를 보조(補助)하고 이후(以後)로 한(恨)을 품고 서(西)쪽을 향(向)하여 앉아본 일이 없었으며 존조록(尊周錄)에 척화(斥和) 제일등(第一等)으로 재록(載錄)되었고 신사(辛巳)年三月二十一日에 卒하니 享年六十五歲요 백봉서원(白峯書院)에 향사(享祀)하다 숙종(肅宗)께서 교서(敎書)를 내리되 지절지확(志節之確)과 풍절지고(風節之高)가 위사림긍식(爲士林矜式)이라 하고 도승지(都承旨)의 증직(贈職)을 내렸으며 영조(英祖)께서 그 지절(志節)을 가상(嘉尙)히 여겨 은(殷)나라 삼인(三人)에 비(比)하였고 정조(正祖)께서 김계암(金溪巖)의 사실(事實)이 심(甚)히 탁연(卓然)하니 후손(後孫)을 녹용(錄用)하라는 교지(敎旨)를 내렸으며 순조(純祖)癸酉一八一三年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兼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추증(追贈)하고 갑술(甲戌)年에 문정공(文貞公)의 시호(諡號)가 내리니 도덕박문(道德朴聞)에 말하기를 문(文)이요 청백수절(淸白守節)에 이르기를 정(貞)이라 하였다 문집(文集) 삼책(三冊) 육권(六卷)이 세상(世上)에 퍼졌으며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서문(序文)을 찬(撰)하고 세마(洗馬) 이광정(李光庭)이 행장(行狀)을 지었으며 묘안동군(安東郡) 와룡면(臥龍面) 나소동(羅所洞) 한천(寒泉) 간좌(艮坐)요 제학(提學)인 권유(權愈)가 갈문(碣文)을 지었고 판서(判書)인 한치응(韓致應)이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지었다 配정부인남양홍씨(貞夫人楠洪氏)이니 父는 정자(正字)인 사제(思濟)요 祖는 좌랑(佐郞)인 인수(仁壽)이며 外祖는 부사직(副司直)인 파평윤전(坡平尹銓)이고 忌는 九月五日이요 묘오천(烏川) 현동(玄洞) 유좌(酉坐)이다 _ |
| 세(世) | 이 름 | 족 보 등 재 내 용 |
| 24 세(世) | 휘두 | 子 輝斗(휘두) 初名은 휘장(輝章)이며 字는 남로(南老)요 號는 남간(南澗)이며 갑인(甲寅)年生이요 경자(庚子)年에 진사(進士)하고 지절(志節)이 청고(淸高)하였으며 갑인(甲寅)年四月六日에 卒하니 묘정곡(井谷) 임좌(壬坐)이다 配진주강씨(晉州姜氏)이니 父는 도사(都事)인 윤조(胤祖)요 祖는 응교(應敎)인 덕서(德瑞)이며 忌는 二月三十日이고 묘정곡(井谷) 임좌(壬坐)이다 配영해신씨(寧海申氏)이니 父는 부정(副正)인 건(楗)이요 祖는 증참판(贈叅判)인 예남(禮男)이며 曾祖는 목사(牧使)인 언(漹)이요 外祖는 진성이경춘(眞城李慶春)이며 忌는 十一月二十八日이요 묘방잠(芳岑) 계좌(癸坐)이다 __ |
| 세(世) | 이 름 | 족 보 등 재 내 용 |
| 25 세(世) | 용 | 子 鏞(용) 字는 명구(鳴九)요 효종(孝宗)丁酉一六五七年生이며 호독서(好讀書)하여 학행(學行)으로 당시(當時)의 중망(重望)에 올라 시인(時人)이 초당(草堂)이라 칭(稱)하였고 임자(壬子)年正月五日에 卒하니 유고(遺稿)가 있으며 묘조비묘하(祖妣墓下) 유좌(酉坐)이다 配진성이씨(眞城李氏)이니 父는 판관(判官)인 성철(誠哲)이요 祖는 참봉(叅奉)인 억(嶷)이며 外祖는 청주정기덕(淸州鄭基德)이요 忌는 五月七日이며 묘합폄(合窆)이다 |
李碩(生員,密直副使)-子脩(松安君,判典儀寺事)-云侯(司僕寺正)-禎(府使)-繼陽(老松亭,進士)
-埴(進士)-滉(退溪)-寯(僉正)-安道(蒙齋)-嶷(參奉)-誠哲(判官)-壻 金鏞(= 제 할머니의 8대조부)
| 세(世) | 이 름 | 족 보 등 재 내 용 |
| 26 세(世) | 상질 | 子 尙質(상질) 字는 중문(仲文)이요 숙종(肅宗)甲子一六八四年生이며 무신(戊申)年에 卒하고 配풍산김씨(豊山金氏)이니 父는 천수(天壽)요 配봉화금씨(奉化琴氏)이니 父는 홍임(弘任)이요 묘이전(梨田)이다 |
| 세(世) | 이 름 | 족 보 등 재 내 용 |
| 27 세(世) | 작 | 子 綽(작) 字는 관부(寬夫)요 숙종(肅宗)庚寅一七一○年生이며 묘한천(寒泉) 오좌(午坐)요 配청주정씨(淸州鄭氏)이니 父는 운흥(雲興)이요 묘동원(同原)이며 配상산윤씨(商山尹氏)이니 父는 신주(愼周)요 묘현동(玄洞) 경좌(庚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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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세(世) | 지익 | 子 之翼(지익) 字는 자보(子保)요 병진(丙辰)年生이며 配진성이씨(眞城李氏)이니 父는 유룡(猶龍)이요 묘영산(靈山)이다 |
李碩(生員,密直副使)-子脩(松安君,判典儀寺事)-云侯(司僕寺正)-禎(府使)-繼陽(老松亭,進士)
-埴(進士)-瀣(溫溪,貞愍公)-寗(漫浪,進士)-有道(三栢堂)-崶(進士)-彬漢-再章(通德郞)
-猶龍-壻 金之翼(제 할머니의 5대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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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세(世) | 시호 | 子 是瑚(시호) 配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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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세(世) | 한유 | 子 翰儒(한유) 字는 용강(龍江)이요 忌는 三月四日이니 묘영덕(盈德) 마항(馬項) 수암동(水岩洞) 자좌(子坐)이다 配여산송씨(礪山宋氏)이니 父는 병철(炳喆)이요 忌는 三月五日이니 묘쌍분(雙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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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세(世) | 창교 | ▶子 昶敎(창교) 字는彦明이요忌는七月九日이니○墓는水岩洞子坐다○配는冶城金氏니父는台鎭이요忌는二月二十七日이니○墓는棄仕里茂羅谷乾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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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세(世) | 제발 | ▶子 濟渤(제발) 字는致深이요戊戌生이며忌는五月十二日이니○墓는茂羅谷辛坐다○配는慶州孫氏니己酉生이며忌는十月十五日이니○墓는同原子坐다 |
| 세(世) | 이 름 | 안 동 권 씨 족 보 등 재 내 용 |
| 33 세(世) | 지동 | ▶女 芝同(지동) 배 광산光山 김지동金芝同은 제발濟渤의 딸이고 고종23년 1886년에 나서 1955년 (음) 9월23일에 70세로 졸했으며 묘墓는 안동시 풍산읍 막곡리 용등곡龍登谷에 병좌丙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