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사령(死靈)
…… 활자(活字)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벗이여
그대의 말을 고개 숙이고 듣는 것이
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
마음에 들지 않어라.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어라.
이 황혼(黃昏)도 저 돌벽 아래 잡초(雜草)도
담장의 푸른 페인트 빛도
저 고요함도 이 고요함도.
그대의 정의도 우리들의 섬세(纖細)도
행동(行動)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郊外)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어라.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시집 ꡔ달나라의 장난ꡕ, 1959)
<사령>은 처음부터 ‘……’으로 하여 무언가 할 말을 생략하고 시작함으로서 호기심을 일으키는 시이다. 이 시는 지금껏 자유를 말한 시로 이해되어 왔으며, 활자(벗)이 말하는 자유를 듣고 시인 자신의 무기력함을 반성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석되어 왔다. 이러한 해석은 부분적으로 옳다. 그러나 실제 시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는 거리가 있다. <사령>은 불의에 대하여 온몸으로 항거하는 행위는 없고 말로만 간간히 자유를 말하는 모든 것과 머리 속으로만 자유를 생각하는 자신과 침묵을 지키는 모든 것에 대하여 비판하는 시이다. 이제 이러한 내용을 시를 통하여 밝혀보기로 한다.
<사령>의 첫 부분에 제시된 ‘……’이 없어도 시는 무난하게 자신이 할 말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김수영은 왜 이 시의 첫 부분에 ‘……’을 제시하면서 시를 시작했을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 무언가를 전하기 위하여 쓴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전하고 있는 것인가? 확정 질 수는 없지만 시의 내용을 생각하면 그 답이 나오리라 생각된다. 그 답을 추측해 보기로 한다.
첫 번째 가능성은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는 한 두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표시할 때 사용한다. 이 시에서도 그러하다면 ‘……’ 안에는 한 두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내용이 있을 것이고 그 내용을 시에 넣는다면 시의 균형이 파괴되어 형식미를 잃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의 균형을 잡기 위해 생략할 수 있다. 두 번째 가능성은 ‘……’들어갈 내용이 길지는 않으나 공식적으로 밝힐 수 없는 내용일 수도 있다. 즉 구체화시켰을 때 문제를 야기할 내용이라면 ‘……’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 번째 가능성은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가능성을 모두 포함하면서 또 다른 내용을 상상하게 하는 상징으로서 ‘……’을 사용했을 가능성이다.
첫 번째 가능성으로 유추를 하면 ‘……’에 들어갈 내용은 활자가 자유를 말하는 사회적 상황의 총체와 활자가 자유를 간간히라도 말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낸 실제적 또는 심리적 투쟁의 과정이 될 것이다. 4연의 ‘욕된 교외’는 이러한 가능성을 높여준다. ‘욕된 교외’가 지니고 있는 총체적인 상황이나 ‘욕된 교외’가 형성된 과정은 한 두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욕된’ 상황에서 ‘자유’를 말하는 것은 보통의 용기를 가지고서는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용기를 갖게 된 투쟁의 과정이 ‘……’으로 축약되어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겠다.
두 번째 가능성은 시에서 서정적 자아가 비판하는 대상을 살펴봄으로서 유추할 수 있다. 3연에서 서정적 자아는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을 살펴보면 말하고 있다. 이 ‘모두’에는 나와 활자와 황혼, 잡초, 푸른 페인트, 고요함, 활자(그대)의 정의, 우리들의(활자와 나) 섬세, 어제, 오늘, 내일을 포함하고 있다.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 그리고 시간적인 것까지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제까지의 연구에서 긍정적인 존재로 해석된 ‘활자(벗, 그대)’가 실제 시에서는 부정적인 존재로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4연에서 분명히 ‘그대(활자, 벗)의 정의’가 마음에 . 또한 너와 나로 이루어진 ‘우리들의 섬세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 시에서는 활자는 벗이고 벗은 그대로 지칭되고 있다. 벗과 그대의 원관념을 활자로 보면 벗과 그대라는 표현은 활자를 의인화하여 표현한 것일 뿐이다. 과연 그럴까? 여기서 활자는 단순한 글자가 아니라 누군가가 써서 인쇄매체로 표현된 ‘글’을 의미한다. 1연의 ‘…… 활자(活字)는 반짝거리면서’가 5연에서 ‘그대는 반짝거리면서’으로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 ‘…… 활자(活字)’가 ‘그대’와 같은 위치에 쓰여 있다는 것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대’가 지니고 있는 내포가 ‘활자(글)+……’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대’는 ‘활자’ 곧 ‘글’과 ‘글’을 쓴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다. ‘활자’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 사람들은 한 두 사람이 아닐 것이고 이들을 구체적으로 짚어서 시를 쓴다면, 그것도 그들의 ‘정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쓴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 시키는 어려운 일이다. 설혹 그렇게 썼다 해도 이 시가 지닌 함축미는 축소될 것이다.
세 번째 가능성은 ‘……’을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민주화에 대한 투쟁과정과 자유를 간간히 말하는 인물들을 포함하고 그 외로 시적인 요소를 강화시키기 위한 상징으로 보는 것이다. ‘……’을 상징으로 보면 시의 함축미가 풍부해지는 효과가 있다. ‘……’은 문법적인 기호이므로 상징으로 보는 입장은 약간의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가 지니는 의미는 상징과 비슷하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이 어느 것이 ‘……’이 지닌 의미로 적합한지 명확한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다. 세 가지 모두 논리적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세 번째 가능성이 논란의 여지를 비교적 가장 무난하게 비겨갈 수 있다. 그러나 논란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은 두 번째 가능성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활자(活字)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 주체는 ‘활자’이나 그 내용의 핵심은 ‘자유’이고 이 자유를 활자를 통하여 말하는 사람은 어떤 이이다. ‘활자’를 다른 연에서 ‘벗, 그대’라고 표현한 점은 서정적 자아가 ‘활자’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활자’를 쓴 사람을 생각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서정적 자아는 활자를 읽으면서 활자를 통하여 자유를 말하고 있는 사람의 정의를 듣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을 ‘벗’이라 하고 있다. ‘벗’은 가까운 아주 가까운 존재이다. 아주 가까운 존재, 나름대로는 정의롭게 살면서 ‘자유’에 대하여 아무런 말조차 하지 않고 있는 서정적 자아에게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는 반성의 계기를 주고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벗’은 소중한 존재이다. 그러나 서정적 자아의 기준에는 ‘행동이 죽음에서 나오는’ 존재가 아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존재이다. 대립되는 두가지 감정이 야기하는 미묘한 감정과 그 대상을 직접 서술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여러 가지 점을 고려하여 ‘……’으로 나타냄으로서 시의 함축적인 효과와 호기심을 유발하는 효과를 더불어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결과로 독특한 시형식을 지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사령>은 전부 5연으로 이루어진 자유시이다. 논의의 편의를 위하여 1연을 제시한다.
…… 활자(活字)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활자는 반짝거리면서’ 동시에 ‘자유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5연의 ‘그대는 반짝거리면서’에서도 보인다. ‘반짝거리’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단순히 활자의 상태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앞에서 ‘활자’가 ‘자유’를 내용으로 하는 글임을 알았다. 그렇다면 글의 내용이 ‘반짝거리’는 것이다. 이를 의인화하여 표현한 것이라고 할 때 ‘반짝거리’는 것은 ‘자랑스러움 또는 자부심을 지니고서’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 ’의 의미를 추정하면서 ‘…… ’에 활자(글)를 쓴 사람이 이 포함되어 있음을 말하였다. 그러므로 ‘…… 활자(活字)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글을 쓴 사람이 스스로에 대한 자랑스러움 또는 자부심을 지니고서서 간간히 자유를 말하고 있다로 풀이된다. 이 시의 공간적 배경은 4연에서 ‘욕된 교외’로 설정되어 있다. 이 ‘욕된 교외’는 자유를 향한 ‘행동이 죽음과 연결되는 곳’이다. 이러한 살벌한 배경에서 ‘자유’를 말하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있어야만 되는 행위이다. 이러한 행위를 하는 존재는 충분히 자신에 대한 ‘자랑스러움 또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며 당연히 자랑스러운 존재이다. 그러한 존재가 자유를 말하는 것을 듣고(읽고) 서정적 화자는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는 반성을 한다.
벗이여
그대의 말을 고개 숙이고 듣는 것이
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
마음에 들지 않어라.
2연에서는 ‘벗’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1연에 의하면 ‘벗’은 ‘활자’이다. ‘그대의 말을 고개 숙이고 듣는 것’은 고개를 숙이고 활자를 읽는 서정적 자아의 모습을 서술한 것이다. ‘벗’은 ‘자유’에 대하여 말하고 나는 그 ‘자유’에 대하여 들으면서(읽으면서) 자신을 반성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그러나 3연 4연의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어라.’를 유의하면 그러한 모습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2연의 1행은 생략하여도 시상 전개에는 무리가 없다. 그렇다면 ‘벗이여’라고 굳이 한 행을 더한 것은 무슨 뜻일까? ‘벗이여’ 서정적 자아도 ‘벗’처럼 ‘간간히 자유를 말하’지는 않지만 ‘벗’처럼 ‘자유’를 생각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활자’로 표현된 ‘자유’를 향하여 또는 ‘자유’에 대하여 쓴 저자를 ‘벗’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벗’이 ‘자유’에 대하여 말할 때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듣고 있는 서정적 자아의 모습을 스스로 객관화시켜서 ‘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라고 추측하고 있다. 4행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어라.’라는 명령형 어미 ‘-어라’를 사용하여 자신의 추측이 틀림없음을 스스로 확신시키고 있다. 4행은 벗의 마음에 대한 확신에 찬 추측이면서 동시에 3연에서 자신도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서술을 이끌어 내고 있다.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어라.
이 황혼(黃昏)도 저 돌벽 아래 잡초(雜草)도
담장의 푸른 페인트 빛도
저 고요함도 이 고요함도.
그대의 정의도 우리들의 섬세(纖細)도
행동(行動)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郊外)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어라.
3연과 4연은 ‘마음에 들지 않’는 원인과 그 대상들을 나열한 연이므로 함께 다루도록 하겠다. 3연 1행은 2연 4행과 이어져서 이해된다. 그래서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어라.’라고 말하는 주체가 ‘벗, 그대’인 것처럼 느끼게 된다. 그리고 2연에서 ‘벗’이 서정적 자아를 마음에 들지 않아하는 추측에 대한 이유도 알 수 있게 된다. ‘저 고요함도 이 고요함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벗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서정적 자아가 지키고 있는 침묵- 고요함이 마음에 들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4연 1행에서는 ‘그대의 정의도 우리들의 섬세(纖細)도’ ‘마음에 들지 않어라’ 대상에 들어 있다. 상대편을 ‘그대’라고 지칭할 수 있는 것은 1인칭 외에는 없다. 따라서 4연에 나열된 대상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은 서정적 자아일 수밖에 없다.
2연이 ‘벗’의 마음이고 4연이 서정적 자아의 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3연은 누구의 마음일까? 3연에 나열된 대상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은 ‘그대’일 수도 있고 서정적 자아일 수도 있다. 또는 ‘그대’와 서정적 자아가 ‘마음에 들지 않어’ 하는 공통부분일 수도 있다. 시의 흐름으로 볼 때는 공통적인 인식의 공통적인 부분일 가능성이 있다. ‘고요함’을 마음에 들지 않아하는 인물은 우선적으로 ‘그대’일 것이나 서정적 화자도 ‘이 욕된 교외(郊外)에서’ ‘행동’이 아닌 침묵의 ‘고요함’을 마음에 들지 않아하는 것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황혼, 돌벽 아래 잡초(雜草), 담장의 푸른 페인트 빛, 저 고요함, 이 고요함(3연), 그대의 정의, 우리들의 섬세, 어제, 오늘, 내일(4연)’이다. 이 중에서 ‘그대의 정의’는 ‘활자, 벗, 그대’가 말하는 ‘자유’이다. 그렇다면 서정적 자아는 ‘자유’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자유’는 ‘행동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에서’ 간절히 바라고 있는 목표이다. 그렇다면 서정적 자아는 ‘그대의 정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을까. 그 이유는 1연과 5연에 나와 있다. ‘자유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간간히’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간히’ 말하는 것은 ‘우리들의 섬세’에서 비롯되고 있다. ‘섬세’는 작은 부분에도 주의를 기울이는 조심스러움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벗’과 서정적 자아이다. ‘우리’는 ‘섬세’하게 조심해서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욕된 교외’에서 살고 있다. 서정적 자아는 ‘벗’보다도 더 ‘섬세’하게 ‘자유’에 대하여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 ‘욕된 교외’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행동’이다. 그것도 단순한 행동이 아닌 죽음을 각오한 행동이다. 이러한 행동만이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 이렇기 때문에 ‘활자’로 말하는 ‘자유’는 행동도 아닌 것이다. ‘우리의 섬세’함도 이 곳에는 행동이 아닌 것이다. 이 ‘욕된 교외’에서는 ‘죽음에서 나오는 행동’만이, 죽음을 각오한 행동에서 나오는 만이, ‘자유’를 향한 죽음만이 필요한 곳이다. 따라서 ‘간간히 자유를 말 하’는 것으로는 서정적 화자가 인정할 만한 행동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서정적 자아는 ‘활자(그대, 벗)’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 ‘욕된’ 상태가 없어지지 않는 한 어제(‘욕된’ 상태에 있었던 시간)도 오늘(‘욕된’ 상태에 있는 시간)도 내일(’욕된 상태에 있을 시간)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5연에서는 1연 1행에 쓰인 ‘…… 활자’의 위치에 ‘그대’가 위치하고 있다. 문장 위치로 보면 이 두 항목은 동일한 대상을 달리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서로 다른 대상에 의한 동일한 행위일 가능성이 있다. ‘자유’를 말하는 것은 ‘활자’로 인쇄된 글과 ‘벗’인 ‘그대’가 각각 다른 곳에서 서정적 자아에게 ‘자유’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활자’로 인쇄된 글은 서정적 자아가 다른 이들이 ‘자유’에 대하여 쓴 글을 읽으며 자신에 대한 반성을 하고 있는 것이고, ‘벗’인 ‘그대’는 서정적 자아와 이야기하며 ‘자유’를 말하며 침묵하는 서정적 자아의 태도에 불만의 기색을 나타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이 둘은 서로 다르나 ‘자유’를 말한다는 점과 서정적 자아에게 반성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이 동일한 점이 매개되어 두 상황을 동시에 표현하는 기법일 가능성도 있다.
1연과 달리 5연의 4행에는 ‘우스워라’는 말을 첨부되어 사용했다. 이는 자조의 표현이다. 1연에서 ‘자유’를 말하는 ‘활자’가 침묵하는 서정적 자아의 모습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듯이, 서정적 자아 또한 ‘반짝이면서’ ‘간간히 자유를 말하는’ ‘활자(벗, 그대)’의 행동이 ‘행동(行動)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郊外)에서는’ ‘욕된’ 상태를 타파하지 못하는 행동이므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오십 보 백 보인 상태에서 누가(활자, 벗, 그대) 누구(서정적 자아)에게 ‘반짝이면서’ 말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라는 비판이 섞인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어라.’고 말을 하였다. 그러나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 것과 머리 속으로만 ‘자유’를 생각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서정적 자아는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 ‘활자(벗, 그대)’를 비판하면서도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의 차이점을 인식하고 더욱더 자신에 대한 자조를 가지고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사령>은 ‘자유’를 향한 행동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행동하지 않는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 자신을 반성하는 시이다. 2004.07.21. 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