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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송민도 - 고향초 (故鄕草)

작성자전곡너구리|작성시간08.01.17|조회수655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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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민도 / 고향초 (故鄕草)


                                                                         김다인 작사 / 박시춘 작곡

 

                   1. 남쪽나라 바다 멀리 물새가 날으면
                          뒷동산에 동백꽃도 곱게 피는데
                             뽕을 따든 아가씨들 서울로 가네
                                정든 사람 정든 고향 잊었단 말인가

 

                                                     2. 찔레꽃이 한 잎 두 잎 물 위에 날리면
                                                           내 고향에 봄은 가고 서리도 찬데
                                                                 이 바닥에 정든 사람 어디로 갔나
                                                                    전해 오든 흙 냄새를 잊었단 말인가

 

1993, 2, 15 / 지구레코드사 제작 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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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드라마 주제가 1호인  "청실홍실" 을 비롯해 "고향초", 
"나 하나의 사랑",  "카츄샤의 노래" 같은 히트곡들로 지금까지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가수 송민도씨...

당시  "꾀꼬리 같은 미성" 의 가수들이 각광받던 시대에 우리나라 최초로
허스키 보이스를 구사하며 등장, 애상이 깃든 부드러운 저음과 특유의
지적인 분위기로 인텔리 층에서 높은 인기를 구가했다.

우리 가요의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았다고 평가 받는 송민도씨는 어느덧
85세...
현재 미국 LA의 오렌지카운티에서 생활하고 있는 그녀가 지난 2006년
10월13일 내한했다.

"가요무대 1000회 축하공연" 무대에 서기 위해 KBS 측의 초청으로
10여년 만에 고국 땅을 밟은 것.
몇 년 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인해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였다.

송민도 여사가 미국으로 건너가 생활한 것은 1971년부터.
벌써 37년째의 미국생활이지만 아직도 전화를 받을 때면 항상 
"여보세요" 하고 먼저 한국말로 전화를 받는다.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난 그는 감리교 목사인 부친을 따라 2,3년에 한번씩
이사를 다녀야 했다.
평안남도의 삼화보통학교를 나온 뒤 서울 이화학당을 졸업했다.
그의 어머니 역시 이화학당 출신으로 어머니는 김활란 여사와 동창이고
송민도씨는 이휘호 여사와 동기동창이다.

학업을 마친 후 만주 용정에서 유치원 보모 생활을 잠시 한 뒤 결혼과
함께 연길로 거처를 옮긴 송민도씨는 해방이 되자 가족과 함께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 아이의 엄마이자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착실히
살아가는 평범한 주부였던 그가 서울 온 지 2년 만인 1947년, 가요계의
흐름을 바꾸어놓는 대형가수로서 첫 발을 내딛는다.

이때가 그녀의 나이 스물넷.
당시에는 가수 데뷔가 거의 불가능해보였던  "애 딸린 주부" 가 중앙방송국
(현 KBS) 전속가수 모집에 응시한 것.
남편이 먼저 제안해 용기를 냈다.

"당시 선발시험에서 첫 테스트는 자신이 가장 자신 있게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먼저 부르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현제명 작곡의 ‘니나’ 를 불렀는데 심사위원들이 계속해서 가요를
한 곡 더 부르라고 요청하는데 그때까지 가사를 끝까지 아는 노래가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서 고민 끝에 앞사람들이 부르던 당시 유행가, 장세정의
'역마차는 달린다' 를 불렀는데 결국 가사를 몰라 중간에서 중단되었지요.
더구나 이 심사실황이 라디오에 그대로 생중계 되고 있어 얼마나
당황했는지...  "

송민도 여사는 당시 상황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방송국 전속가수 1기생" 으로 발탁된다.
이때 동료로는 이예성, 원방현, 김백희, 옥두옥씨 그리고 2차로 전속가수에
합류한 고대원, 금사향씨 등이다.

입사 후 3개월간의 교육과정을 거쳐 송민도씨는 그의 데뷔곡이자
대표곡인 "고향초" 를 첫 취입한다.
그러나 이때 음반에는 본인도 모른 채 이름이  "송민숙" 으로 표기된다.
음반사 측에서 송민도라는 이름이 남자 이름 같다며 일방적으로 바꾼
것이다.

하늘 민(旻), 길 도(道), 즉  "하늘가는 길" 이라는 뜻의 본명  "송민도" 는
목사였던 부친이 직접 지어준 이름.

정작 본인은 이 노래  "고향초" 가 어느 정도 히트되었는지 당시엔 알지
못했지만 그로부터 3년 뒤 한국전쟁이 발발해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중 남녀노소, 모두 이 노래를 즐겨 부르는 걸 보고 눈물겨웠다고
회고한다.

9.28 서울 수복 이후 그녀도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정훈공작대에 소속되어
"군번 없는 용사" 로 참전, 목숨을 건 위문공연 활동을 펼친 뒤 전쟁
후에서야 본격적으로 활동을 펼친다.

드라마 주제가 제1호인  "청실홍실" 에 이어 지금까지도 결혼축가로
불려지는  "나 하나의 사랑" 이 크게 히트하면서 전쟁의 상흔이 점차
아물어가는 50년대 후반의 낭만시대를 대표하는 가수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허스키한 알토의 저음으로 등장한 송민도씨는 KBS 전속가수 1기생으로
당시 KBS 전속악단의 가요방송 지휘를 전담하고 있던 작곡가 손석우씨와
손잡고 우리나라 드라마 주제가 1호인  "청실홍실" 에 이어 "나 하나의 사랑"
을 발표한다.

이 노래 첫 소절의  "나 혼자만이" 는 당시 인기작가 박계주씨에 의해
소설화되고 이어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우리나라 히트가요가 영화화된 최초의 노래인 셈이다.

남자 이름 같다는 이유로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음반에  "송민숙" 이라
표기되기도 했던 그는 주위의 권유로 한때  "백진주" 라는 지극히 여성적인
예명으로 잠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송민도’로 돌아온 그는 50년대 낭만시대를 지나 60년대
개성시대를 주도하며  "목숨을 걸어놓고",  "여옥의 노래",  "서울의 지붕 밑", 
"하늘의 황금마차",  "청춘목장",  "행복의 일요일’" 등 명곡들을 잇달아
발표한다.

"방송활동과 더불어 계속되는 지방공연으로 매우 바쁜 나날을 보냈기
때문에 아이들을 대부분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맡겨 키우다시피 했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아주머니에게 엄마라 부르고 내겐 심지어 아빠라 부를
정도였지요."
송씨의 회고다.

아울러 1963년,   "백만불쇼단" 을 직접 결성해 단장을 맡으며 쇼단을
이끌었다.
가수 남일해, 고대원씨를 비롯해 무용단, 밴드 등을 합쳐 모두 25명 정도로
구성된  "백만불쇼단" 은 가는 곳마다 인기가 높았지만 당시 여건에서는
늘 적자로 운영되어 고되고 힘들었다.

창립 5년 만인 1968년, 송민도씨는 자신의 분신처럼 여기던 백만불쇼단을
접는다.
장남 서동헌씨 때문이었다.

당시 서동헌씨는 해병대에 입대해 월남 청룡부대로 파병되었는데 어느 날
부대가 베트콩의 습격을 받았다는 소식이 국내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연일 방송과 신문에서는 대서특필했지만 두 달이 지나도록 그 후 소식을
몰라 애태우던 송민도씨는 직접 아들을 찾아 월남으로 떠난다.

다행히도 아들은 무사했으나 임시여권으로 월남에 갔기 때문에 
"오버스테이(overstay)", 즉 기한을 넘겨 불법체류까지 하게 된다.
곧 국방부가 나서서 해결해 주었지만 전쟁터에 아들을 두고 올 수 없어
아예 사이공에 남는다.

송민도씨는 한국식당을 차려 3년 반 동안 사이공에서 체류한 뒤 곧바로
미국으로 거처를 옮겼고 서동헌씨는 귀국한 이후 월남 청룡부대 출신들로
결성한 6인조 그룹사운드  "드레곤스" 에서 키보드를 담당했다.
당시 미국에 있던 송민도씨는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회고한다.

"1995년, 귀국해 아들과 함께  빅쇼에 출연했는데 그때서야 그룹사운드
활동을 했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물론 음악 활동을 하겠다고 먼저 상의해 왔더라면 무조건 말렸겠지요."
라고 웃으며 회고하는 송민도씨...

트롬본 연주인으로 KBS 경음악단장을 역임했던 작곡가 송민영씨가 바로
그의 남동생이다.
이들 남매는 함께 듀엣으로 노래를 발표하기도 했던 음악가족.
송민영씨는 안타깝게도 지난 2002년 미국에서 타계했다.

현재 LA 오렌지카운티에서 생활하고 있는 송민도씨는 7년 전 운전 중 팔이
부러지는 대형사고를 당했다.
그 후 2년 뒤 또다시 넘어져 척추를 크게 다쳐 제대로 거동할 수 없는 상태.
이 때문에 그 무렵 계획되어 있던 고국 방문을 지금까지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근 KBS  "가요무대" 의 초청은 그 스스로도 마지막 귀국일 것이라
여기며 무리한 일정을 강행했다.
유독  "자존심 강하고 고집 센" 그는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무대에
나서면서도 아무런 내색도 내비추지 않았다.
더구나 국내에 체류하는 동안 잠을 도통 못 이뤘다고 했다.
피로가 겹치기도 했겠지만 오랜 팬들을 만난다는 설렘도 한편 작용
했으리라.

"무대에 서니 심장이 멎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박수소리 때문에 그 큰 무대에서 견뎠지요."

"고향초",  "카츄샤의 노래",  "나의 탱고",  "나 하나의 사랑" ...
송민도씨가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부르는 이 노래들을 따라 여기저기서
눈물을 훔치는 방청객들이 적지 않았다.
무대는 매우 감동적이었다.

모든 예술의 감동, 그 최고치는 역시  "눈물" 이다.
그렇듯 가수 송민도씨는 많은 이들의 아픔을 여전히 아름다운 노래로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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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곳곳이 그 유래와 더불어 노래의 소재가 되고 아울러 대중들로부터 애창됨으로써 다시금 관광명소로 자리한다. ‘노래는 추억의 묘비명’이라는 어느 시인의 비유가 아니더라도 노래는 대중들에 의해 꾸준히 불리어지고 또 뜻있는 이들에 의해 그 의미가 기려진다.
 
노래가 지닌 위력을 실감케 하는 노래비. 삼천리 방방곡곡 東-西-南-北, 노래 따라 기념비 따라. 이번 호에는 강원도 고성 건봉사에 건립된 노래비 '고향초'를 찾아본다.
 
김다인 작사, 박시춘 작곡, 송민숙 노래‘로 표기되어 1948년 처음 발표된 노래.
 
가수 송민숙은 송민도의 예명. 현재 ’조령출(조명암) 시와 노래비’의 뒷면에 약력과 함께 1절 가사가 새겨져 있다.
 
2000년 1월 1일, 강원도 고성 건봉사 경내에 건립된 이 비의 앞면은 시, ‘칡넝쿨’.
(김다인 작사, 박시춘 작곡, 송민도 노래)
 

나의 탱고


청실홍실 /with 안다성


나하나의 사랑


카츄샤의 노래



여옥의 노래


아 목동아


행복의 일요일




01. 과거를 묻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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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송민도-고향초.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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