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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화가

작성자겨울|작성시간12.08.21|조회수586 목록 댓글 0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프랑스어: Henri de Toulouse Lautrec, 1864년 11월 24일 ~ 1901년 9월 9일)은 프랑스화가이다. 남부 프랑스 알비의 귀족 안에서 출생한 그는 본래 허약한데다가 소년 시절에 다리를 다쳐서 불구자가 되었다. 그는 화가가 될 것을 결심하고 그림에 몰두하였으며, 파리로 나가 미술 학교에 다녔다. 드가, 고흐와 친분을 맺어 그들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그는 귀족 사회의 허위와 위선 등을 미워하였다. 주로 서커스 · 놀이터 · 운동경기 · 무용장 · 초상화 등을 즐겨 그렸으며 포스터를 예술적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인상파에 속하고 색채 취급, 성격 묘사에도 뛰어났다. 유화 외에 파스텔, 수채화, 석판에도 독특한 스타일로 만들었다. 대표 작품으로는 《물랑 드 라 가레트》, 《이베지루벨》 등이 있다.

 

 

 

 

   13세기까지는 프랑스에서 가장 강력한 제후중의 하나였던 툴루즈 백작의 직계후손이다. 19세기까지는 특히 강력한 지방 제후집안의 경우 근친결혼이 행해졌다. 근친 교배가 열성 형질을 낳는다는 것은 의학계의 한 가설이다. 일본의 경우 지나치게 뻐드렁니가 많은데 이것도 섬나라인 탓에 제한된 교배가 원인이라는 설도 있다. 로트렉의 부모도 사촌간의 결혼이었다. 아마도 이 때문인지 건강상의 문제가 있었다. 로트렉이 장남이었으며 아래로 동생하나가 태어났으나 1년을 살지 못하고 죽었다. 부모는 성격 차이로 이혼했고 로트렉은 엄마와 함께 살았다. 경제적으로는 불편함이 없었으나 10살 되던 무렵 심한 병을 앓고 난 후 뼈가 약해지는 질병, 아마도 성장판이 멈춰버리는 병으로 152cm이상 자라지 않았다.

 

1881년 파리의 바칼로레아에 떨어졌는데  고향인 툴루즈에서 9월 학기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장애로 인하여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했기에 아마도  더욱 예술에 심취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후기 인상파의 한 사람으로 아르누보와 포스터 분야에서 놀랄만한 족적을 남기게 된다. 특히 19세기 말의 파리의 보헤미안적인 삶을 그렸으며 1890년대 중반 대중 잡지인 <르 리르(웃음)>의 삽화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거주했던 파리의 “몽마르트의 영혼”으로 알려지게 되었던 것처럼 주로 이 동네의 삶을 그렸다. 물렝루즈와 파리 여타 지역의 카바레와 관련된 그림들이 많다. 특히 아리스티드 부뤼앙과 그가 자주 드나들었던 유곽- 아마도 여기서 성병에 걸렸을 것이다-과 연관된 그림도 있다. 그가 재현한 여인 중 유명해진 인물은 무희 잔느 아브릴, 가수인 이베트 기베르그리고 특히 굴뤼라는 별칭으로 유명해진, 캉캉춤의 창시자인,특이한 개성의 소유자, 루이즈 베베르가 있다. 그 외에도 때때로 그림 교습도 했는데, 자신의 뎃셍 모델중 한사람이자 아마도 정부였던 수잔느 발라동에게 많은 격려를 했다고 한다.

 

성인으로서의  생애의 대부분을 알콜중독으로 지냈기 때문에 말년닌 37살 되던해 (말년이라고 해도 정상적인 경우를 생각한다면 아직 청년기임)에는 어머니의 영지인 말로메의 요양원에서 보내야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임종의 자리에 온 아버지에게 한 것이었다. 호사가들의 입에 의하면 아버지는 아들을 부끄러워해서 살아생전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그 자리에서  “당신은 이제 쓰러진 사냥감을 눈 앞에 두고 (승리의) 환호만을 남겨놓았네요” 라는 뜻의 말을 남겼다. 의미도 심장하다. 비정상적인 운명과 삶으로 평생을 지내온 한 아들의 복잡한 심정을 유추하게 한다. 그런데 호사가들의 입방아는 진실이었던 것인가?  화가는 분명 저주받은 운명을 타고 났는지는 모르지만 가정내에서는 소중한, 유일한 아들이었던 것인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로트렉의 아버진인 알퐁스 백작이 아들이 죽은 날, 어머니인 그러니까, 화가의 할머니인 가브리엘 툴루즈 로트렉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적혀있다. “ 1901년, 9월 9일, 말로메. 아 사랑하는 어머니, 얼마나 많은 슬픔인지. 신을 결국 우리의 결합을 축복하지 않았답니다. 그의 의도는 이루어졌지만 자연의 섭리를 뒤집는 것은 불가능 했군요. 그토록이나 심성이 착해서 아버지에게는 평생 악의에 찬 말힌 마디조차 하지 못했던,  내 가련한 아들이 겪은 슬픈 고통이 마감되면 어머니를 뵈로 서둘러 가겠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알퐁스.”


모든 것을 참아주더라도 로트렉은 천재적인 화가 중 한 사람이라는 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탁월한 관찰력과 인간성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은 여느 평범한 예술가들은 결코 갖추기 힘든 소양이었다. 관습과 격식을 파괴한 이유가 무엇이었던지 간에 그의 삶과 예술은 그리고 수많은 친구들의 존재가 증명하는 인격은 신체적 장애를 넘어 그가 ‘역사의 하나’로 살아남게 하였다.   

 

 

 

긴 의자에 앉은 여자 (나부습작) 1882년 캔버스 유채 46 x 55cm

1882년 한때 로트렉은 보나르의 문하에 들어가서 철저히 아카데믹한 교육을 받았는데, 그 무렵의 그의 화풍을 잘 전해 주는 작품의 하나이다. 긴 의자의 중심에 앉은 검정 스타킹의 나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밑으로 넣고, 오른손은 왼쪽 무릎에 놓고, 왼손의 인지는 가볍게 입에 대는 변화나 하얀 피부를 돋보이게 하는 검정 스타킹의 색 대비와 함께 포즈에서 약간 인위적인 느낌이 들고 습작적인 냄새가 짙은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해 로트렉의 인물에 대한 관심과 수업기의 철저한 작품을볼 수 있다.  

 

 

빨강머리의 화장하는여인 1896년 종이, 유채 54 x 64cm

상반신을 훌훌 벗어버린 채 등을 보이고 있는 여자, 그 아름다움이나 미모를 그리는 다른 작가와는 달리 등을 보이는 화폭에 꽉 찬 한 모델을 통하여 인간의 내면을 생각게 한다. 로트렉이 여성을 모델로 한것 중에 1890년을 경계로 화가를 위해 포즈를 취한 평범한 초상 중심인데 반해, 후반엔 여성 특유의 사생활에서 얻은 특이한 포즈들이 중심을 이루는 대조를 보인다. 지극히 평범한 포즈이지만 드가를 연상케하는 대담한 구도가 보이지 않는 얼굴에서 긴 여운을 남긴다.

 

 

 

 

 

At the Moulin Rouge, The Clowness Cha-U-Kao, 1895, Oil on canvas, Musee d_Orsay, Paris, France

 

 

                                                     <물렝 루즈의 도착한 라 굴뤼, 1892>

 

 

                                    세탁부(The Laundress), 1889, Oil on canvas, 93 x 75 cm

                입맞춤(Le Baiser, The Kiss), 1892, Cardboard, 39 x 58 cm. 개인소장(Private collection)

         침대 안에서의 키스[In Bed The Kiss] -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 [Henri de Toulouse-Lautrec]  1892 유채

Portrait de Gabriel Tapié de Celeyran adolescent, Fusain, 1882.

    

 

The Morning After(Gueule de bois) : la buveuse, vers 1889, Toile, 47.1 x 55.5 cm

 

                                            Woman with a Black Feather Boa, 53 x 41 cm, 1892

 

 

Suzanne Valadon, 54 x 45 cm, 1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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