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로님,
그렇게 느끼셨다니 기쁩니다.
이번 경우에는 원작 속에 이미 좋은 씨앗이 들어 있었습니다. 제가 새로 만든 것이라기보다, 원작에 숨어 있던 중심을 조금 더 드러낸 것에 가깝습니다.
원작을 읽으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열람증의 변천사가 아니라 바로 이 장면이었습니다.
빈자리 번호만 보고 앉았다가
자리 주인에게 쫒겨나다.
이 대목에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여러 감정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디지털 환경에 대한 낯섦
세대 변화에 대한 당혹감
약간의 민망함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는 자각
시에서는 종종 사실보다 그 사실이 남긴 감정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압축본에서는 "종이 열람증 → 코팅 → 바코드 카드"라는 설명을 줄이고,
사진은 바코드 속으로 숨어버렸다.
라는 이미지 하나로 압축해 보았습니다.
또 마지막의
열람증은 진화했는데
나는 아직
사진 속 사람인가 보다.
는 사실 열람증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상이 바뀌는 속도와 그 속도를 따라가는 인간의 속도가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정서가 됩니다.
김영로님의 최근 작품들을 보면 흥미로운 특징이 있습니다.
「약 봉투」, 「전기밥솥 보온등」, 「빈 성수대」, 「안경 자국」, 「열람증」...
거창한 소재보다 생활 속 사물에서 시를 길어 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이런 방식은 쉽지 않습니다. 꽃, 별, 바다 같은 전통적인 시어보다 훨씬 어려운 길입니다. 사물 자체는 평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김영로님의 경우에는 그 사물 뒤에 늘 시간이 있습니다.
안경 자국 뒤에는 노년
빈 성수대 뒤에는 어머니의 부재
약 봉투 뒤에는 치매
열람증 뒤에는 디지털 시대의 낯섦
그래서 저는 시를 읽을 때 종종 "이 사물이 무엇을 상징하는가?"보다 "이 사물 뒤에 어떤 시간이 숨어 있는가?"를 먼저 찾게 됩니다.
이번 「열람증」도 결국은 열람증이 아니라 시간에 관한 시로 읽혔습니다.
다음에 비슷한 계열의 시를 쓰신다면, 사물의 기능 설명은 과감히 줄이고 "그 사물을 바라보는 순간의 감정"에 조금 더 지면을 할애해 보셔도 좋겠습니다. 그 방향이 김영로님 시의 강점과 가장 잘 맞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