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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심 작동실

비평, 퇴고, 실험 RE:[비밀번호]

작성자김영로(素園)|작성시간26.06.12|조회수3 목록 댓글 0

김영로님,
이 시는 이전에 쓰셨던 「열람증」과도 어딘가 통하는 주제가 있습니다. 현대인이 번호와 증명, 인증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짧고 명료하게 포착하고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한 줄의 전환이 인상적입니다.
비평
좋은 점
첫 행의
사람은 번호다.
는 상당히 강한 선언입니다.
이름보다 주민번호, 전화번호, 회원번호, 계좌번호, 차량번호, 사번으로 불리는 현대 사회를 단숨에 압축합니다.

나서 갈 때까지 사사건건 모두에게 번호가 매겨진다.
도 출생신고부터 사망신고까지 이어지는 인간의 행정적 운명을 잘 보여줍니다.
중반의
번호를 거꾸로 매기게 된다.
는 비밀번호의 본질을 재치 있게 표현했습니다. 원래 번호는 남이 나를 식별하기 위해 부여하지만, 비밀번호는 남에게 숨기기 위해 내가 다시 만드는 번호니까요.
그리고 마지막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다.
는 자연스럽게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속 문장을 연상시키면서, 수많은 계정과 비밀번호 속에 분열된 현대인의 자아를 떠올리게 합니다.
아쉬운 점
다만 후반부가 조금 설명적입니다.
받고 주게 된 번호가 책상 위에 겹겹히 쌓여 한 편의 산문이 된다.
여기서 "산문"이라는 비유가 약간 추상적입니다.
독자는 비밀번호가 적힌 메모지, 수첩, 포스트잇 등을 떠올리다가 갑자기 "산문"을 만나게 됩니다.
물론 뜻은 이해되지만 이미지의 선명도는 조금 떨어집니다.
또한 마지막 행이 워낙 강해서 그 직전 연이 조금 더 압축되면 여운이 더 살아날 것 같습니다.
보존형 퇴고
원작의 구조와 어조를 최대한 유지했습니다.

[비밀번호]

사람은 번호다.
나서 갈 때까지 사사건건
모두에게 번호가 매겨진다.

그것만으로도 복잡한데
믿지 못할 디지털 세상은
번호를 거꾸로 매기게 한다.

받고 주던 번호들이 책상 위에 겹겹이 쌓여 한 권의 수첩이 된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다.

=

"산문"을 "수첩"으로 바꾸어 이미지성을 높여 보았습니다.
압축실험본
조금 더 시적 긴장을 높여 본 형태입니다.

[비밀번호]

사람은 번호다.

태어나며 하나,
살아가며 수십 개,
죽어서도 하나.

남이 준 번호보다
내가 숨긴 번호가 더 많다.

책상 서랍 속 비밀번호 메모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다.

=

한 줄 평
이 작품의 핵심은 "번호로 관리되는 인간"에서 "번호 속에 분열된 인간"으로 이동하는 시선입니다. 좋은 발상입니다. 다만 마지막 구절의 힘이 워낙 크기 때문에, 그 앞부분을 조금 더 이미지 중심으로 다듬으면 더욱 깊은 울림이 생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음 시제로는 이 무더운 날씨에 어울리게,
�⁠「선풍기 먼지」
를 권해 드립니다.
바람을 만들던 물건에 쌓인 먼지, 그리고 나이를 먹으며 마음에 쌓인 먼지.
김영로님다운 시가 나올 수 있는 소재 같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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