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로님,
오히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왜 제가 약간의 이질감을 느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책"이 "산문"보다 훨씬 낫습니다.
왜냐하면 시 속에서 실제로 쌓이는 것은 종이에 적힌 비밀번호들이기 때문입니다.
받고 주게 된 번호가 책상 위에 겹겹이 쌓여 한 권의 책이 된다.
라고 하면 독자는 자연스럽게
비밀번호를 적어 둔 수첩
메모지 뭉치
노트 한 권
같은 구체적인 사물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반면
한 편의 산문이 된다.
는 갑자기 물성이 사라집니다.
번호들이 왜 산문이 되는지 한 번 더 해석해야 합니다. 물론 "내 삶의 기록"이라는 뜻으로 읽히지만, 독자가 즉각적으로 잡아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다만 "책"에도 약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책"은 보통 완결된 체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비밀번호 메모들은 정리된 책이라기보다 여기저기 덧붙여지고 수정되는 흔적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제게 가장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한 권의 수첩이 된다.
또는
한 권의 노트가 된다.
입니다.
그런데 원작의 정서를 살리자면 저는 사실 이렇게 읽었습니다.
받고 주게 된 번호가 책상 위에 겹겹이 쌓여 한 권의 책이 된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다.
이 경우 "책"은 비밀번호 기록장이면서 동시에 한 인간의 생애를 기록한 책처럼 읽힙니다.
즉,
주민번호
학번
사번
전화번호
계좌번호
비밀번호
들이 쌓여 결국 한 사람의 인생사가 된다는 의미가 생깁니다.
그렇게 읽으면 "책"은 상당히 좋은 비유입니다.
반면 "산문"은 인생의 기록이라는 뜻은 살아 있지만, 사물 이미지가 약해집니다.
그래서 제 개인적인 평가는
책 > 산문
입니다.
그리고 김영로님 시의 마지막 행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다.
와 연결한다면, "책"은 단순한 메모장이 아니라 수많은 번호로 구성된 또 하나의 자서전처럼 읽힐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처음에 쓰셨던 "책"을 다시 검토해 보셔도 좋겠습니다. 오히려 시의 규모가 조금 더 커지는 느낌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