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로님, 이번 작품은 '보증서'라는 사물을 삶의 존재론으로 확장했다는 점에서 발상이 매우 좋습니다. 지금까지 쓰셨던 '영수증', '열람증', '가격표', '장바구니'와 같은 사물시의 흐름 속에서도 철학성이 가장 강한 축에 속합니다.
다만 예상하신 대로, **"시보다 생각이 앞선다."**는 평을 받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좋은 점)
첫 연은 아주 좋습니다.
어젯밤 꿈, 금괴 한 궤짝 샀더니 보증서가 따라왔다.
독자를 단숨에 끌어들이는 도입입니다. '금괴'와 '보증서'라는 현실적인 물건이 곧바로 삶의 비유로 연결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합니다.
또
순도 세븐 나인, 발행인은 제조자.
이 부분도 간결하면서 금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연결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합니다.
아쉬운 점)
이후부터는 이미지가 아니라 설명이 이어집니다.
예를 들면
현실의 삶에도 품질 보증서를 발행 받을 수가 있을까?
이미 독자는 그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시가 먼저 질문을 해버리면 독자가 참여할 여지가 줄어듭니다.
또
부모님은 아니 계시고, 하느님은 어디 계신지 모르고, 결국 보증서 발행인은 나 자신.
이 역시 생각은 깊지만 거의 산문의 논리 전개입니다.
마지막도
사전에 발행할 수도 없고, 사후는 존재가 없으니 불가.
설명입니다.
특히 마지막
참 보증할 수 없는 것이 인생~
이 한 줄이 작품의 의미를 설명해 버립니다.
오히려 여운을 남기는 편이 훨씬 시적입니다.
예를 들어
보증서란 끝내 빈칸으로 남았다.
또는
서명란은 끝내 비어 있었다.
혹은
보증서는 살아 있는 동안만 미완성이었다.
이처럼 이미지 하나로 끝내면 독자가 스스로 "아, 인생은 보증할 수 없는 것이구나."를 깨닫게 됩니다.
종합평)
이 작품은 발상 9.5점, 철학성 9.5점입니다.
다만 시성은 7.5점 정도입니다. 철학을 너무 친절하게 설명한 것이 이유입니다.
김영로님 작품은 최근 들어 "가격표", "반납일 도장"처럼 설명을 줄일수록 훨씬 힘이 생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작품도 마지막 7~8행만 과감히 덜어내면 상당히 응축된 시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한 줄 평을 드리자면
"생각은 이미 시가 되었는데, 시인이 끝까지 설명해 버렸다."
이 작품은 조금만 덜 말하면, 김영로님의 사물시 가운데에서도 오래 남는 작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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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로님, 그 점이 바로 요즘 작품들의 가장 큰 과제인 것 같습니다.
설명을 잘하는 분일수록 시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김영로님은 오랫동안 강의와 유튜브 대본을 쓰셨기 때문에 독자를 이해시키려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그런데 시는 역설적으로 이해시키지 않을수록 오래 남는 장르입니다.
그래도 최근 작품들을 보면 설명이 조금씩 줄고 있습니다. 「반납일 도장」, 「가격표」를 거치면서 분명한 변화가 보였습니다. 이번 「보증서」도 조금만 덜어내면 훨씬 단단해질 수 있습니다.
보존형 퇴고본)
원작의 흐름과 사상을 최대한 살리고, 설명만 조금 줄여 보았습니다.
글쓰기
[보증서]
어젯밤 꿈,
금괴 한 궤짝 샀더니 보증서가 따라왔다.
순도 세븐 나인, 발행인은 제조자.
깨어 보니 하룻밤의 꿈.
문득, 삶에도 품질 보증서가 있을까.
부모님은 떠나셨고,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다.
결국 발행인은 나 자신.
그러나 미리 쓸 수도, 나중에 고칠 수도 없다.
보증서는 오늘도 빈칸이다.
=
원작의 철학을 유지하면서도 마지막의 "인생은 보증할 수 없다"는 설명을 이미지인 **'빈칸'**으로 바꾸었습니다.
실험적 축약본)
이번에는 훨씬 시적으로 압축해 보았습니다.
글쓰기
[보증서]
금괴 한 궤짝 샀더니 보증서가 따라왔다.
순도 세븐 나인. 발행인은 제조자.
깨어나 내 삶을 뒤져 보았다.
서명란은 비어 있었다.
=
이 버전은 독자가 스스로 질문하게 만듭니다.
"왜 비어 있었을까?" "누가 서명해야 하는 걸까?" "보증은 끝내 불가능한 것일까?"
이런 여운이 생기면 시는 독자 안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말씀드리자면, 김영로님은 최근 사물 하나에서 존재를 묻는 시를 꾸준히 쓰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의 개성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제는 거기에 **'한 줄을 참는 힘'**만 더해지면, 지금보다 훨씬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들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변화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