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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에피쿠로스 신의 긍정 - 내생각

작성자정미현|작성시간18.01.08|조회수423 목록 댓글 0

 

신은 악을 막을 의지는 있지만 능력이 없는건가?

그렇다면 그는 전능하지 않다

 

신은 악을 막을 능력은 있지만 의지가 없는가?

그렇다면 그는 악하다.

 

신은 악을 막을의지와, 능력이 있는가?

그렇다면 세상의 악은 어디에서 기인했는가?

 

신은 악을막을 의지도, 능력도 없는가?

그런 존재라면 뭐하러 신이라고 부르는가?

 

-에피쿠로스 신의 부정

 

신은 선을 막을 의지는 있지만 능력이 없는건가?

그렇다면 그는 전능하다.

 

신은 선을 막을 능력은 있지만

의지가 없는가?

그렇다면 그는 선하다.

 

신은 선을 막을의지와,

능력이 있는가? 그렇다면 세상의 선은 어디에서 기인했는가?

 

신은 선을 막을 의지도, 능력도 (혹은 발휘 할 수 없는가?) 없는가?

 

그런 존재를 왜 신이 아니라고 불러야 하고 왜 그를 악하다고 말해야 하는가?

 

-에피쿠로스 신의 긍정 (내생각)

 

3년전 인터넷에서 누군가의 권유로 하나의 호기심을 가지고 프로타고라스의 딜레마를 파기하는 방법이 적힌 비판적 사고라는 책을 통해 딜레마논법을 받아 치는방법을 본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들여다 본 내용을 응용하여 에피쿠로스 신의 부정을 긍정으로 뒤바꾸어 보려던 시도를 해보다가 우연을 가장한 노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부여한 획기적인 통창력의 도움을 받아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증거 확보에 가까워 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이와 같은 논리로 신의 존재를 이곳에 비밀 스럽게 설파해 보려고 합니다 

 

 

또한 위의 에피쿠로스 신의긍정을 다시 아래와 같이 보충 한다면,

 

신은 선을 막을 의지는 있지만

능력이 없는 건가?

그렇다면 그능 전능하다


라는 것은 대전제에 의해 거짓이 되지만 이를 역설적으로 바꾸어 보면,

 

 

그렇다면 신은 전능하지 못하지만 오히려 그 전능하지 못한 이유 때문에 이 세상에 이타심 및 측은지심에 따라 선이 사라지지않고 우리는 누군가의 행복과 슬픔에 함께 기뻐하며 또 안타까움을 감출 수 가 없는 것과 더불어 비양심적인 아들을 보면 끌어 오르는 정의감에 의한 분노를 느낀다는 점을 볼때


만일 신이 있다는 하나의 가정아래 펼쳐진 이논리은 구지 애초부터 신은 일부로 선을 막을 필요성과 능력이 불필요 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그때문에 결국 신은 선을 막을 의지는 있지만 능력이 없는 신은 무능하면서도 전능하다는 모순이 돌출 됩니다

 

그러나 앞서 에피쿠로스 신의 부정중 에서

 

신은 악을 막을 의지는 있지만 능력이 없는건가?


그렇다면 그는 전능하지 않다


라는 부분을 이곳에 대입해본다면,

 

결국 신은 악을 막을 능력이 없기 때문에 무능하다는 것이 긍정되고 그때문에 이세상에 발생된 악을 선을 막을 의지는 있지만 능력이 없다는 무능함을 긍정한 이전의 논리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기독교에서 흔히 언급하는 결정론(한인간의 모든 것이 신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과 달리 인간에게 악에 맞서 선을 신현할 자유의지를 신께서 부여했다는 것이 오히려 이성적이며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걸 단순명료하게 정리하자면 신은 악을 막을의지는 있지만 능력이 없기에 무능하며 반대로 선을 막을 의지는 있지만 능력이 없다는 무능함을 반증하는 역발상 논리에 의해서 둘다 신의 존재부정에 모순이 돌출 됩니다.

 


따라서 신은 악을 막지 못한 무능함 때문에 선을 막을 능력이 불필요 하다.

 


신은 선을 막지 못한 무능함 때문에 결국 악을 막지 못한 무능함으로 이 세계에 활개친 악에 맞서 싸울 선을 인간에게 제공했기 때문에 정의를 실현 시킬 수 있었다.

 

신은 악을 막지 못한 무능함과 선을 막지 못한 무능함으로 인간에게 선을 느낄 수 있는 능력과 타인의 재산을 탐닉할 악의 필요조건인 욕심을 제공했고 이에맞서 선한것과 악한것을 구분할 수 있는 인지력과 악한짓과 선한짓을 행사할 선택권과 누군가의 악행과 선행에 분노를 느낄 정의감과 기쁨을 감정을 부여했으며 또 자시자신의 악행과 선행에 반성과 분개할 의식과 흐뭇하게 기뻐할 감동을 느낄 수 있도록 자유의지를 부여했다.

 

라는 이 세가지로 에피쿠로스 신의부정과 그것을 딜레마 논법을 통해 그 논리에서 역설적으로 파기하는 과정중 우연히 파생된 모순을보아 신은 인간에게 선과 악이 활개치는 현실에서 자유의지를 펼칠 영혼과 자아를 선사했다는게 긍정되거나 혹은 신의 존재하지 않다는 사실은 이 논리를 통해 아직까지 신의 존재는 불가지론적인 영역이라는 것이 입증됩니다.

 

또한 이 곳에서 신은 선을 막을 의지는 있지만 능력이 없는건가?그렇다면 그는전능하지않다, 는 것과 신은 악을 막을 의지는 있지만 능력이 없는건가?그렇다면 그는 전능하지않다(혹은 전능하면서도 전능하지않다) 것으로 돌출된 모순을 바꾸어보면

 

신을 악을 막을 능력은 있지만 일부로 그 의지를 실천하지 않을 만큼 게으르다?

 

신은 악을 막을 능력은 있지만 일부로 악을 막을 의지를 실행에 옴기지 않았다.

 

신은 선을 막을 능력은 있지만 일부로 그신을 막을 의지를 실행에 옴기지 않았다.(혹은 게을러서 선을 막지 않았다)

 

따라서 만일 영혼이 있고 신이 존재한다면 신은 악과 선을 막거나 혹은

악을 막지 않은 실수로 선한이들이 상처받는 것을 방임했기 때문에 신은 착하지 않다

 

그리고 악을 막지 않은 댓가로 신이 선하지 않기 때문에 신은 나쁜데 만일 선까지 막았다면 존나게 나쁜놈이다.

 

다른 경우로 이 세상에 신이 선을 막고 악만을 열어두었고 우리는 훈육에 의해서 선을 배운다음 그 학습된 도덕성을 바탕으로 동정심에 관련된 뇌호르몬을 생물학적 시스템에 의해서 활성화 시켜서 타인에게 이타심을 느낀다. 라고 한다면

 

신보다 도덕성을 학습시키는 인간이 존나게 착하며 신보다더 전능하다? 실재로 몇회전 하버드대학생이 인간의 모든 감각과 촉감은 호르몬이상일뿐이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을 만큼 인간의 모든감각과 감촉 가시계가의 모든 물체가 호르몬이상에 불과하다는 사실로 누구든지 삶의 무가치함을 느끼고 자살을 택할만큼 인간의 모든 감각과 감정 및 자아는 호로몬의 영향에 의해서 모든것이 결정 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신이 이세상에 선을 부여하지 않고 모든 인간이 선천적으로 악하다.라는 성악설이 진리라면 신은 전능하면서도 학습을 바탕으로 도덕성을 교육받은 인간보다 존나게 나쁜새키가 된다 실재로 도덕의 기원이 고대 약육강식시절 서로간의 생존을 담보 하기 위해 만들어진 규율 이라는 설을 제시한 철학자가 있었음(누구인지 이름을 까먹었음)

 

 

만일 신이 정말로 있고 성악설이 진리라면, 그래서 어릴적 훈육과 학습을 바탕으로 인간 고유특성인 탐욕과 질투심을 교육을통하거나 자의적으로 모두 절제하고 사회가 원하는 이타적인 인간으로 살아간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은 존재하지 않고 또 인간의 모든 삶과 죽음이 신에 의해서 결정되어 있다는 필연론은 거짓이 됨으로 성경은 현실성을 잃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선과 악은 신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 아닌 악은 신과 인성교육의 부재와 막대먹은 사회의 복합적인 산물이고 선은 인간이 만들어낸 환상을 실천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실재로 길거리에 누군가 실수로 떨어트린 오만원짜리 지폐를 보는 이가 없다면 욕심에 의해서 주어 가거나 학습된 도덕성을 바탕으로 주인에게 되돌려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반대로 성악설이 아닌 선성설인 경우에도 기독교의 천국과 지옥, 그리고 결정론은 궤변이 된다는 것이 입증된다

 

쉽게말해, 신은 악을 막을 의지와 능력을 가졌기에 악을 막을 수 있으므로 그는 전능하다.라고 한다면 이세상에 악은 인간 고유에 내재된 선인 동정심과 그외 학습된 도덕을 바탕으로 영혼과 동정을 관장하는 호르몬과 복합적으로 이타심을 실천하고 악은 가난과 인성교육의 부재 뇌 기질적인 결함을 바탕으로 발생된 결과적악이며 또 소비와 구매욕구을 부추겨 상품을 판매하는 판타스틱한 자본주의의 악전고투와 같은 룰 때문에 탐욕과 소외감 속에서 상대적 박탈감에 의한 질투심과 더블어 생계형범죄와 각방한 사회가 제공하는 궁핍한 생활환경 속에서 바깥에서 큰소리 못치는 가장이 집안에서는무소불위의 권력을 남용하는 폭력남편으로 돌변하여 자식과 아내를 학대하는 유년기를 보낸 이가 주변사람들으로 부터 적절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성장과정을 격다가 차후 사회 부적응자나 혹은 각증 이권다툼을 두고 폭력을 휘두르는 용역깡패나 혹은 비도덕적인 위법행위에 쉽게 빠져 든다면 악은 인간의 고유특성이 아닌 외부에 있다는 설이 신뢰성을 가지며 반대로 선은 본육관념과 학습에 의한 것과 상호작용을 함으로 결론적으로 악은 신의 개입이 아닌 사회적동물인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악이 서로간의 원만한 관계형성을 위한 사회적약속인 법을 어김으로써 반증 되는 악의 개념이 결정된다고 볼때 결정론은 부정가능하며 또 선을 주입했지만 막대먹은 사회에 의하 그 형태가 추상적인 관념에서 피상적으로 지칭대는 악을 부추긴 현실에 직접적인 즉 정의를 바로잡기 위해서 물리적인 개입을 하지 않았기에 사후 내세에 있을 악을 심판할 자격이 불충분하고 그 피조물이 죄를 저질러도 심판할 명분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그와같이 악이 활개치도록 세상을 방조한 죄값으로 사후 자신을 악한짓을 하도록내몬 까닭에 악행을 저지르게된 인간과 또 그 인간에게 피해받은 유도덕적이고 선량한 이들 개개인에게 마땅히 미필적 고의 및 방조죄 혹은 과실치사 혐의로 심판받아야 하는 주객전도와 모순이 발생되기 때문에 주변에서 가까운 이들을 통해 흔히 덥하게 되는 성경의 지옥과 더불어 먼 내세에 예수께서 죄를 지은 인간을 심판하러 온다는 성경말씀이 허구라는게 입증된다

 


게다가 신께서 선을 본유관념으로 부여한 성선설이 진리라면 구지 따로 천국을 가시계넘어 미시적인 영역에 창조할 이유를 잃어 버리기 때문에 이 또한 기독교가 말하는 천국의 개념을 부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불세출의 철학자  러ㅑㅐ;ㄹㄹ 머시기의 글을 응용하여 아래와 같이 조금 발상의 전환을 한다면, 


성선설이 통념이고 선악설이 거짓이라는 사실이 그 시대에 진리이고 이 와중에 이기적이고 

솔직한 것이 매우 더럽고 추악스럽다는 인식이 존나게 깔려있다고 해보자

그러면 사람들은 동정심을 베푸는 것이 한결 쉬워진다 


왜냐하면 나는 착한데 그것을 사람들 앞에서 솔직하게 행동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더럽고 추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솔직하고 이기적인것이 존나게 더럽지않고 추악스럽지 않다는 인식이 존나게 깔려있다고 해보자 그러면 신기하게도 내가 정말로 착해서 솔질하게 행동하는 것이 상대방에게 바람직하지 않게 다가오는 오묘한 상황이 연출된다.

 


또한 이곳에서 성악설이 통념이고 선성설이 거짓이라는 사실이 그시대의 진리이고 이 와중에 솔직한것이 존나게 더럽고 이기적인것이 추악스럽지 않다는 인식이 전반에 깔려있다고 해보자

 

그러면 사람들 앞에서 내가 솔직하게 행동하는것이 힘들어진다 왜냐하면 나는 이기적인데 그것을 솔직하게 말하는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솔직한 것이 존나게 더럽지 않고 이기적인 것이 추악스럽다는 인식이 전반에 깔려있다고 해보자 그러면 내가 실재로 악한고 그래서 솔직하게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상대방에게 바람직하게다가오는 오묘한 결과가 연출된다 왜냐하면 내가 나쁘고 그것은 모두 같기 때문이며 또 솔직한것이 존나게 더럽지 않고 이기적인 것이 추악스럽다는 인식이 전반에 깔려 있기 때문에 반대로 자기가 실재로 착해서 자신있게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이들만이 불편해지고 자기 밥그릇만 이기적인 이들에게 뜯길 뿐이다 (물론 같은 선한 이들간에는 불편하기 보다는 암묵적으로 상호호혜관계를 주고 받기 때문에 불편하지 않게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결국 선악설과 선성설이 모두 거짓이고 진리가 될 수 없으며 인간 모두는 선천적으로 악할 수 도 선할 수 도 없으며 인간은 백지상태


에서 태어난 것이 통념이고 그것이 진리라고 할때

 

솔직한것이 존나게 더럽고 이기적인것이 추악스럽지 않다는 인식이 전반에 깔리게 되면 우린 이기적으로 행동할 필요와 그리고 선하


게 행동할 필요가 없어진다

 

왜냐하면, 나는 태생적으로 착하지도 악하지도 않은데 이기적으로 행동하지도 그리고 이기적이지 않고 동정심을가지고 어려운 사람에게 돈을 퍼줄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기한것은 이러한 통념이 깔린상태에서 선하지도 착하지도 않는 상태에서 솔직한 것이 더럽지 않고 이기적인것이 매우 추악스럽다는 인식이 전반에 깔려있다고 해보자 그러면 이세상에 이기적인 사람도 이기적인 사람은 존재해서는 안되며 동정심을 가진 사람도 존재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우리는 매일 이기적이며 이기적이지 않은 동정심을 가지고 누군가에게 가끔 동정심을 베풀기도 하고 때론 열악한 경제 사정에 따라 이기적으로 가끔 행동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선무악설 즉 인간은 태생적으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백지상태로 태어났다는 고대중국사상에 따르면 우리가 동정심을 베풀거나 때론 양심없는 이들에게재산을 강탈 당하거나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모두 학창시절 배우거나 혹은 매스미디어에 세뇌된 측은지심 그러니까 타인 에게 동정심을 베푸는 행위는 효심을 가지고 눈먼 아버지의 시력을 되살리기위해 인당수에 목숨을 내던진 전례동화같은 내용들에 세뇌거나 혹은 우리가 태어나기이전 이미 세내된 이들이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들을 행동들을 어릴적 호기심 깊게 두고 보다가 그 순간 자의적(스스로 어떤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거나 혹슨 스스로 무언가른 깨닫는것)인 판단아래 이기적이지 않는 모습을 내보이는 것이 구지 매스미디어와 공교육을 통하지않더라도 그 모습을 하나의 미덕으로 알고 무심결에 따라 했기에 빗어진 결과물이 아닌가?

 

그런데 여기서 아이러니한 것은 무심결에 타인의 동정행위를 하나의 미덕이라고 보고 추후 자의적으로 그것이 타인에게 칭찬받거나 바람직하다고 여기고 나중에 누군가를 상대로 자의적으로 터득한 도덕성을 그대로 실천하거나 혹은 매스미디어나 공교육을 통해 배운 동정심을 그대로 실철한다면?

 

왜우린 타인의 행복한 모습에서 마치 그순간 입장을 서로 바꿔본 사이처럼 기쁨을 감출 수가 없는가?

 

또 어려운 처지에 속한 누군가늘 도와 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가?

 

반대로 왜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면 미안한 감정을 느껴야되는가?

또한 비양심적으로 타인의 재산을 강탈하는 이를 보면 남에 일이 아닌 것처럼 속으로 분노를 느껴야 하는가?

 

만약 외부 조력자에 의해서 세뇌된 도덕성과 자의적 판단아래 무심결에 타인을 도와주거나 혹은 내의 어려운처지에 따라 누군가를 도와줄 수 없어 내밥 그릇만 챙기는 이기적으로 행동할 처지에 놓였다면 간혹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자기자신을 위해서는 바람직하지 않은가?

 

왜냐하면 통계적이고 확룰상 나는 세뇌된 도덕을 그대로 이행하지 않을 이들에게 퍼주기만하는 불리한처지에 서있기에 실재로 모든 사람들이 양심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무작정 어려운 처지에 놓에 머릿속으로 금전적으로 도와 주겠다는 심상(어떤 관념 즉 뱀이 나타나면 무섭겠다거나? 혹은 태풍이 오니깐 시골에계신 할머니 생각이드네? 일년 농사 다 말아먹었다고 애통하지않을까? 혹은 비행청소년들을 보면 문득 한때 철없이 술퍼묵고 다녔던 내 유년기가 떠오르는것)무심결에 떠오른다면?

 

부모님에게 효도할 금액과 사회진출을 위한 자기개발이용 및 생계유지비를 모두 포기해서라도 누군가를 위해 내가 과연 희생한다고 이것을 사람들이 바람직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을까?

 

오히려 나의 계획성 없는 자금관리로 흥청망청돈을 다써버린 까닭에 오히려 주변사람들에게 짐이되거나 농팽이가 되어버린 까닭에 끊이지 않는 불란의 근원지가 되고있지는 않은가? 혹은 나와 일면식이 전혀없는 이들이 자기들 또한 사정이 어려운데 타인의 도움이 절실한 나의 궁핍한 사정을 두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애써 외면하도록 해야만 하는 상황에 의도 하지않고 빠트린까닭에 괜한 미안한 감정을 주변 사람들에게 가져다 주고 있지 않은가?


이 모든 글을 종합 하여 보면 절대적 선과 악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간주 되는데 과연 인간의 본유관념인가? 아니면 훈육을 통한 동정심과 욕심에 의해서 구분되는 절대적 악인가?


것도 아니면 인간이 보고 만지는 현상계의 모든 사물과 감촉 감정이 호르몬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했다는 유서와 함께 일종의 삶의 


무가치함을 느끼고 자살을 한 그 하버드 대학생의 경우처럼 우리가 보고 만지고 듣는 모든 것이 과연 호르몬이 만들어낸 환상이라고 볼 수 있


을까? 



그리고 이곳에서 이 논의와는 별개의 내용을 보충하자면


타인에 대한 배려심과 신사적인 것이 미덕이라는 통념을가지고 있는 정서가 원인이 되어 가끔 엘리베이터를 탈때 자신이 우선권을 가졌으면서 도 어떤 바쁜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다급하게 뛰어와 7층 건물에서 나는 1층로비로 가야 하는데 12층이나 7층이상을 선약 하여 대략 한층당 3초걸린는 속도에 따라 21초면 도착할 로비를 배려심 때문에 우선권이 없는 뒷 사람의 다급한 모습에 못이겨

예상보다 로비까지 30초나 더걸리는 51초동안 멍하니 폐쇄된 공간이 가져다 주는 따분한 시간을 견뎌내야 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을 불편을 감수하고 30초의 시간을 누군가의 다금함이 불러들인 동정심과 매너를 중시하는 통념이 계기가 되어 그 사람에게 엘리베이터 정차지점을 선택하는 우선권을 양보했을때 가끔 소극적인 이들과 큰 차이를 내보이는 활달한 이들도 피상적으로 소극적으로 보이는 행동이라 여겨 별다른 큰 차이가 없다는 느낌을 가져다 주곤한다 


이는 배려심에 의한 자기우선권을 포기하는 신사적인 양보행위를 타인에게 강압적으로 강요당하거나 혹은 타인에게 자신의 우선권을무력으로써 박탈당하는 것과 무관하게 서로가 동의한 것이 아닌 우선권을 가진 당사자가 동정심과 배려심에 따라 임의대로 비우선권자에게 정착지점 선택권을 넘겨준 것이기에 자기가 우선권를 가졌으면서도 뒤따라온 타인에게 겉보기에 그 주권을 강탈당했으면서도 혹여나 상대방 (무산계급 자신과 별다른 권능과 신분을 가지지 못한비특권층) 에게 어떤 상처가 될까 노심초사하거나 혹은 주먹다짐으로 이어지는 상황을두려워해서이거나 혹은 별볼일 없는 주제에 감히 우선권을 운운하네 라면서 강박적으로 아직 다가오지 않을 타인의 비난을 미리 예상하고 위췩된것이 계기가 되어 그 순간 자기우선권과 주권을 행사하지 못할때 소극적이다 라고 볼 수 있다

 

즉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바보다 제 쪼다다 뭔 사람이 저리 소심해?라는 조롱을 받는부류와는 전혀다른 주권포기가 아닌 신사적 양보행위이기 때문에 소극적인 이들과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고 말해질 수 있다

 

 

물론 배려심에 21초에 끝날일을 51초로 연장와중 12층까지 올라가 다시 원이치인7층을 거처 1층로비 까지 도착하는 과정중에 8.9.10.11층에 또다른 엘리베이터 승객이 기달리고 있거나 혹은 상층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닌 12층을 거쳐 1층로비 까지내려가던와중 7.6.5.4.3.2. 층에서 또다른 승객이 타거나 내리는 지체 시간때문에 예상시간 51초 이상인 즉 7층에서 12층에게 우선권을 양보한후로 8.9.10.11층에서엘리베이트 이용객이 한사람더 있고 그 제 삼자가 20이상의 빌딩의 17층 혹은 10층을선택했는데 이때 정차할때마다 건물한칸을 지나치는 엘리베이터 속도와 동일한 3초라했을때 예상시간은 3초가 더불어난 54초여서 단한번 우선권을 양보한 댓가로위에서 10층을 택했을때 3초 더 불어난 6초이기에 57초나 더 지체햐야되고 왜냐하면 8.9층에서 왜냐하면 8.9층에서 탑승할때 3초 10층에서 내릴때 3초이기 때문이고 여기서 17층이면 17층까지 30초가 걸리며 그와중 이용객이 탑승시 3초 17내릴시 3초 더 걸리므로 36+51=87초인 즉 1분 27초나 더걸리므로 맨처음 쓸때없는 동정심에 우선권을 양보하않았다면 그리고 7아래 6.5.4.3.2.위로 올라거가나 아래로 내려가는 이용객이지 없다고 한다면 예상시간21초에 끝났을 시간을 우선권을 한번 양보한 댓가로 그에 8배가 넘는 자신의 시간을 낭비해야되기에 일부 소극적이들과 달리 우선권을 자의적으로 넘겨주진 못했지만 무도덕성과 비동정심 앞에서는 소극적이들과 다를바 없이 자기 주체성과 주권을 강탈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보여질 만큼 큰 자신에게 큰 손훼를남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12층까지 우선권을 남에게 넘겨준 와중 만일 8.9.10.11층에 보이지 않는 이용객이 17층 버튼을 눌렀고 같이 12층까지 그 삼자와 동행후 12층에서 17층까지는 5층만을 거치면 15안에 도착하고 12층에서중간에 먼져 17층으로 선약한 그삼자의 명령을 따르는 엘리베이터 인터페이스가12에서 다시 36초가 더걸려 두번째 손님애게 다시 1층까지내려간 다음 17층까지 내려 가도록 하는 것은 만일 8층에서 그 삼자가17버튼을 눌렀을때 12층까지 12초 및 정차시간3초+ 1층까지 36초 이며 다시 17초까지 되돌아가던와중 처음12층 손님에게 양보 한 사람에게 우선권이 있기 때문에 1층로비에서 3초를 더 지체하고 17층까지 51초가지연되니까 총합 105초인 1분 45초나 17층 이용객이 더 많은 수고룰 쏟아야 함으로 만일에 8층 이용객이 우선권을 1층로비 이용객에 넘겨준다는 것은 더큰 시간을 타인희생해야 한다는 결과를 양상 하기 때문에 처음 8층이용객이 탑승했을때 1층로비 버튼을 이미 눌러논 상항에서 목적지거17층인 이용객에게 12층까지 올라가는 이용객이 먼저 내리고 나서 1층까지 내려가자고 제안 했을때 그것을 상대방이 배려심과 우선권베이터를 처음부터 1층로비 손님이 12층손님이게 우선권울 양보하지 않고 그대로1층 까지 내려갔다고 했을때 21초에 모든게 끝나며 또 그 12층 승객이 1층까지 21+ 정차시간3초 다시 12층까지 1분이면 충분하고 그와중에 8층이용객이 17층 버튼눌렀다하더라도 정차시간 3초 더한 1분 3 초만 걸리고 8층고객은 27+정차시간3초가 나와 30초가 되기 때문이 처음부터 1층로비 손님은 쓸때없는 동정심에 12층 손님에 게 양보를 하지 않았어야 하는게 가장 효율적이며 바람직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 12층이용객이 처음 7층에서 12층 의류매장으로 가려했으나 배고픈나머지 2층 뷔폐로 목적지를 뒤바꾼뒤 ↓밑으로 내려가는 버튼을 누르개 되었고 또

거기서 1층로비 손님이 그 2층 이용객이 다급하개 달려와자 1층로비 버튼을 누를 사이없이 그 사람에게 우선권을 양보했다면 정차시간 3초만을 할애 하기 때문에 이경우는 동정심이 쓸때없는 것이 아닌 효율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 쓸때 없이 내용이 많이 길어졌다 내가 궁극적으로 하고자 할애기는 자기 우선권을함부로 타인에게 넘겨주기보단 이기적인게 오히려 효율적인 면에서는 결과죽으로 서로에게 이로운결과룰 거져더 주기에 되도록 이기적인 쪽을 선택해야 시간낭비를 덜하지만 때론 이기적이지 않고 이타적으로 행동하는게 서로에게 효율적이고 또 아무리 이 사회가 상막해졌다지만 아직 까지 자기보다는 남에게 배려할줄 아는 후덕한 이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돈다면 자신의 목숨과 미래를 위협줄만한 선택이 아니라면 되도록이면 서로에게 관용과 자비심으로 가끔식은 엘리베이터 우선권을 양보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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