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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이야기

푸른 혈맥 / 제은숙

작성자마운틴|작성시간26.06.09|조회수0 목록 댓글 0

푸른 혈맥 / 제은숙

 

겨울의 문턱, 아파트 정원은 전기톱 소리로 요란했다. 장정 팔뚝만 한 가지들이 무자비하게 지상으로 떨어졌다. 봄날 새롭게 태어났을 죄 없는 목숨들이 항변할 새도 없이 내동댕이쳐졌다. 바닥에 뒤엉켜 있는 가지들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동살이 파고들 아파트에서는 오로지 인간이 꾸며낸 죄목으로 나무들만 모진 참형을 당했다.

사정없이 칼을 대니 보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쓰러진 나무들은 피를 흘리는 대신 흥건한 향기로 비명을 질렀다. 허리가 잘린 후에도 자신의 피로 글자를 썼다는 고사 속 어느 사람처럼 향으로 억울한 죽음을 알리는 듯했다. 아플지언정 황홀한 내음. 식물의 죽음이 향긋한 까닭은 살면서 순한 마음만 간직한 까닭이다. 모든 죽어가는 존재들 중 가장 숙연한 향을 품었다.

숲에 가면 향기의 근원을 이해할 수 있다. 나무 향은 커피처럼 천천히 음미하게 하고 잔잔한 파도처럼 발끝을 적신 뒤 온몸으로 스며든다. 꽃으로 피어나 숲 너머를 매혹시키고 과육의 단내로 숨탄것들의 목숨을 온전하게 지켜낸다. 떨어진 낙엽은 밥물 넘치는 냄새처럼 구수하고 마룻장 밑에 묻어둔 고구마 냄새같이 허기를 달래기도 한다. 평온한 냄새, 누구도 해치지 않은 식물의 생이 그러했던 까닭이리라.

나무들이 높이 서서 쓰러지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본다. 눈앞에 펼쳐진 초록의 형상뿐 아니라 자신의 키보다 몇 곱절로 번져서 땅을 움켜쥐고 생동하는 뿌리에서 비롯된 힘이 아닐까. 서로의 혈맥이 땅 아래 깊은 곳까지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홀로 섰으되 함께 사는 지혜를 지녔다. 그 혈맥의 따스함이 다른 생명에게도 전해져 선한 본성을 일깨운다. 어디 그뿐이랴. 나무는 전 생애를 세상과 나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에게 생을 바치고 주검조차도 바닥을 먹여 살린다. 삶의 잔해들은 조각조각 부숙되어 느린 숨을 쉰다. 푹 곰삭은 주검이 점점 더 낮은 곳에 가 닿으면 이른 봄 양지바른 산 끝자락에 진달래 한 송이가 피어난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여 비로소 숲이 완성된다. 나무의 모든 순간에는 생명의 마음이 깃들어 있다. 이것이 나무가 천 년 생을 부여받은 까닭이 아닐까.

오래 서 있는 나무는 언제 잠을 자는지, 키 큰 나무의 우듬지는 무엇을 먹고 사는지 그들에게 미물인 나는 알 길이 없다. 그저 나무는 다른 생명을 대하듯 사람 또한 외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든든한 대들보로 삶을 지탱해 주었고 넉넉한 품으로 잠시나마 비를 피하게 했다. 이승의 마지막 순간에도 생의 끝집이 되어 동행한다. 기꺼이 온몸을 사르는 혼백의 길동무이다.

나무의 맥박 소리를 듣는다. 내 손바닥에 퍼져있는 파란 핏줄과 가지 끝까지 이어진 나무의 진녹색 맥을 바라본다. 어쩌면 나와 나무는 같은 흙에서 태어난 혈족이 아닐는지. 천 년을 나눠 쉬는 들숨 날숨에 백 년도 채 못사는 내 가쁜 숨을 포갠다. 배어드는 목향에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는다. 서늘하게 말라버린 푸른 혈맥이 뜨겁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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