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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의 초서 6폭 병풍

작성자새벽샘|작성시간19.06.17|조회수156 목록 댓글 0

신사임당의 초서 6폭 병풍

종이바탕,  각각 세로 44.5㎝, 가로 33.5㎝.  강릉시오죽헌·시립박물관 소장.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1호.



사임당(1504∼1551)은 대유학자 율곡(栗谷)이이(李珥)의 어머니로 자식 교육에 있어 남달랐을 뿐만 아니라 그림과 글씨에 뛰어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여류서화가로 평가되고 있다. 이 초서 필적은 당시(唐詩) 오언절구 6수를 각각 한 장에 쓴 것으로 뒤에 병풍으로 꾸민 것이다. 글씨는 둥그런 원필세(圓筆勢)가 또렷하고 점획이 매우 깔끔한 점이 특징이다.


이은상, 이용의 발문                                               이형규의 발문


병풍 말미의 2폭에는 강릉부사 이형규(李亨逵, 1733∼1789)의 1744년 발문, 강원도지사 이용(李龍)의 1963년 발문, 시인 이은상(李殷相)의 1971년 발문이 있다. 이중 이형규의 발문에 따르면, 사임당의 넷째 여동생의 아들인 권처균(權處均)이 초서 6폭을 얻었는데, 그의 딸이 최대해(崔大海)란 사람에게 출가하면서 이것을 시집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그 뒤 영조 때 이 글씨가 이웃고을 사람에게 넘어간 것을, 당시 부사 이형규(李亨逵)가 되찾아 주고 병풍으로 꾸며 보관하게 하였다. 근래까지 강릉시 두산동의  최돈길(崔燉吉)씨 집에 전해오다가 1971년 강릉시가 양수(讓受)받아 율곡기념관에 보관하였다.


이 필적은 1868년에는 강릉부사 윤종의(尹宗儀)에 의해 목판으로 간행, 널리 전파되었다.

고종 5년(1868)에 윤종의(尹宗儀 1805~1886)가 강릉부사로 부임하여 최씨 집안의 병풍을 보고 감격하였다. 그 이듬해  최씨 집에 불이 났다. 온 집안이 불길에 휩싸였을 때, 당시 주인 최전의 처 江陵 金氏가 80노령임에도 불구하고 타오르는 불속으로 뛰어들어 사임당의 글씨 병풍을 꺼내고, 다시 불속으로 뛰어들어 율곡의 친필 글씨가 든 궤짝을 끌어내다가 불 속에 쓰러져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지 두 달 후, 윤종의는 사임당의 글씨를 영구히 보존하고자  판각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판각을 대대로 오죽헌을 지켜온 권씨 집안에 주어 몽룡실에 간직하도록 하였다. 


 

 

 제1폭


차의정무사 폐문풍경지(此意靜無事 閉門風景遲)
유조장백발 상대공수사(柳條將白髮 相對共垂絲)
                                      (唐. 叔倫의 詩 '贈李唐山人')

어저 고요할레 할 일이 전혀 없네.
문 닫고 앉았으니 날조차 더디 가네.
백발만 버들가지랑 하냥 서로 마주 드리웠네.


* 대숙륜(戴叔倫, 732~789)

당나라 윤주(潤州) 금단(金壇) 사람. 자는 유공(幼公) 또는 차공(次公)이다. 어렸을 때 소영사(蘇潁士)에게 배웠다. 시를 잘 지었고, 청담을 잘했으며, 문학으로 유명했다.  은자의 삶을 동경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가는 도중 청원협(淸遠峽-成都 북쪽)에서 세상을 떴다. 그의 시는 은자의 삶을 노래한 것이 많다.

 

 

 제2폭
연로강풍음 한호야초춘(輦路江風音 寒湖野草春)
상심유개부 노작북조신(傷心庾開府 老作北朝臣)
                                           (唐. 司空曙의 詩 '金陵懷古')

임금 다니던 길에 신나무 우거 있고
대궐 뜰에는 봄풀이 푸르렀네.
유개부 슬픈 노래 부르며 북조 신하 되단 말가.



* 사공서(司空曙, 740~790 추정)

자는 문명(文明). 하북성(河北省) 광평(廣平) 출생. 인품이 결벽하여 권신(權臣)과 가까이하지 않고 가난을 감수하였다고 한다. 전기(錢起) 등과 함께 ‘대력십재자(大曆十才子)’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시집 '사공문명시집(司空文明詩集)'이 있다.

 

이 오언절구의 시는 중국 당(唐)나라 시절 문인 사공서(司空曙)가 육조시절 양(梁)나라 신하로써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유신(庾信)을 회고하며 나라가 망한 뒤에 슬픈 모습으로 방황하는 신하의 애닯은 모습을 주제로 삼았다.


* 유개부(庾開府)

중국 남북조시대 북주의 유신(庾信)을 가리킴. 유신은 南朝인 梁나라에서 右衛將軍에 임명되고 武康縣侯에 봉해졌다. 元帝 때에 북주에 사신으로 갔다가, 문학을 좋아하는 북주의 明帝와 武帝에 의하여 억류 당하였다. 융숭한 대우를 받아 여러차례의 승진으로 驃驥將軍에 이어 開府儀洞三司라는 벼슬에 올랐으므로, 세상에서 庾開府라 불리웠다. 그의 문학은 북조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슬퍼하여 지은 '애강남부(哀江南賦)'가 유명하다.



 

 제3폭
귀인승야정 대월과강촌(歸人乘野艇 帶月過江村)
정락한조수 상수야도문(正落寒潮水 相隨野到門)
                                   (唐. 劉長卿의 詩 '送張十八歸桐慮')

달 아래 배를 띄워 강 마을 지나는 그대
지금 바로 조수 한창 떨어지는 썰물이라
물 따라 한밤중이면 문 앞까지 댈 걸세.



* 유장경(劉長卿, 725? ~ 791?)

자는 문방(文房)이다. 안휘성(安徽省) 선성(宣城) 출신이라는 설과 하북성(河北省) 동남쪽에 위치했던 하간(河間)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 젊었을 때는 낙양(洛陽) 남쪽의 숭양(嵩陽)에서 살면서 청경우독(晴耕雨讀)하는 생활을 하였다.

733년(개원 21)에 진사가 되었다. 강직한 성격에 오만한 면이 있어 시에 서명할 때는, 자기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는 자부심에서 성을 빼고 ‘장경(長卿)’이라고만 표기하였다.

 

오언시(五言詩)에 능하여 ‘오언장성(五言長城)’이라는 칭호를 들었다. 시의 동일표현이 돋보이며, 전원과 산수묘사는 도연명(陶淵明)과 왕유(王維), 맹호연(孟浩然)과  통하는 바가 있다. 관리로서도 강직한 성격을 그대로 나타내 자주 권력자의 뜻을 거슬리는 언동을 하였다. 그래서 2차례나 유배를 당하여 실의의 세월을 보냈다. 그의 시에 유배당하여 실의 속에 보내는 생활과 깊은 산골에 숨어 살려고 하는 정서를 그린 것이 많은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제4폭
강남우초헐 산암운유습(江南雨初歇 山暗雲猶濕)
미가동귀요 전계풍정급(未可動歸橈 前急)
                                     (唐. 戴叔倫의 詩 '戱留顧十一明府')

강남을 바라보매 비는 막 개었건만
산은 컴컴하고 구름 상기 젖었구려.
노를 되돌려 움직일 수 없으니 앞길에 바람이 세겠네.



이 글은 첫 번째에 쓰여져 있는 시와 같은 작가인 중국 당나라 중기 대 시인이었던 대숙륜이 지은 시인데, 시의 내용은 강남의 산수를 노래하면서 당시 처해있는 정국(政局)을 빗대어 표현한 내용으로 나라를 어지럽히는 독재자나 간신 또는 난을 일으킨 자는 제거 되었으나 그 잔당의 세력이 완전히 평정되지 않고 남아 있으면서 저항이 심하여 변화나 개혁에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신사임당이 쓴 글씨를 보면 대숙련이 지은 원시 중 네 번째 구의 일부 글자를 다른 글자로 옮겨 적었는데, 한석봉이 쓴 글씨에서도 이와 똑 같은 글자가 적혀 있어 이렇게 글자가 바뀌어진 문장이 신사임당이 임의로 바꾼 문장이 아니라 당시 이미 보편적으로 원시(原詩)에서 응용되어 회자되었던 문장임을 알 수 있다. 急(사임당)-前急 (原詩)

 

* 대숙륜(戴叔倫, 732~789)

당나라 윤주(潤州) 금단(金壇) 사람. 자는 유공(幼公) 또는 차공(次公)이다. 어렸을 때 소영사(蘇潁士)에게 배웠다. 시를 잘 지었고, 청담을 잘했으며, 문학으로 유명했다. 대종(代宗) 대력(大曆) 연간에 유안(劉晏)의 부름에 응해 염철전운사(鹽鐵轉運使) 부중(府中)에서 일을 맡아보았다. 덕종(德宗) 건중(建中) 때 조왕(曹王) 이고(李皐)가 호남관찰사(湖南觀察使)와 강서절도사 (江西節度使)를 맡으면서 막부에 들어갔다. 일처리가 깨끗하여 칭찬을 들었다. 나중에 무주자사(撫州刺史)에 올랐다. 주민들이 해마다 관개(灌漑) 때문에 싸우는 것을 균수법(均水法)을 실시해 골칫거리를 해결했다. 정원(貞元) 4년(788) 용주자사(容州刺史)로 옮기고, 어사중승(御史中丞) 용관경략사(容管經略使) 를 겸했는데, 위명(威名)을 크게 떨쳤다.

다음 해 표(表)를 올려 출가하여 도사가 되기를 청했는데,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가는 도중 청원협(淸遠峽-成都 북쪽) 에서 세상을 떴다.


 

 

 제5폭
동림송객처 월출백원제(東林送客處 月出白猿啼)
소별려산원 하수과호계(笑別廬山遠 何須過虎溪)
                                            (唐. 李白의 詩  '別東林寺僧')

동림사에서 손님을 배웅하던 곳

달 뜨고 흰 원숭이 우네

여산에서 멀리 나와 웃으며 헤어지니

어찌 호계를 지남을 성가셔하리.


송(宋)나라 진성유(陣聖兪)의 <여산기(廬山記)>에, "동림사(東林寺)의 중 혜원(慧遠)은 평소 ‘영불출산 적불입속(影不出山 跡不入俗)’(그림자는 산을 나서지 않고, 발자취는 속세에 물들지 않는다)라는 글을 벽에 걸어두고 있었다. 동림사 삼문(三門)안에 작은 개울이 있는데 혜원이 어떤 손님을 배웅하더라도 이 개울을 지나지 않았으며, 또 이곳을 지나면 반드시 혜원을 인도하는 호랑이가 울어 호계(虎溪)라고 하였다. 어느날 시인인 도연명(陶淵明)과 도사인 육수정(陸修靜)을 전송할 때, 이야기에 심취해 그냥 호계를 지나며 호랑이가 우는 소리도 듣지 못한 것을 나중에야 깨닫고 서로 마주보며 한바탕 가가대소(呵呵大笑)했다" 고 쓰여 있다.  세상에서는 이때의 일을 그림으로 그려 '호계삼소도(虎溪三笑圖)'라 한다


동림사(東林寺)는 여산(廬山) 제일 명찰(名刹)로 뒤로 동림산에 의지하고 남쪽으로 여산을 바라보고 있다. 지금 강서(江西)성 북부(北部) 구강(九江)시 여산(廬山) 서쪽 기슭(西麓)에 있다. 지금도 동림사에는 삼소당(三笑堂)이 있으며 호계교(虎溪橋) 옆에는 돌로 만든 호랑이가 엎드려 있다. 

 

李白의  '別東林寺僧'은 마음이 맞는 사람을 이별할 때 정표로 주는 시로 많이 이용되었다.

고려 태조 왕건도 중국의 유덕량(劉悳梁)장군에게 이 시를 써 주었다.

 

고려 태조 왕건의  '別東林寺僧' 필적



부림 홍씨 집안에 전하는 귀한 보물이 한 점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친필이다. 1926년 문중이 입수해 세상에 알린 백원첩(白猿帖)이라는 필적(筆跡)이다. 왕건이 916년 궁예의 태봉국을 공격할 무렵에 중국의 유덕량(劉悳梁) 장군에게 써준 이태백의 시 두 편 중 한 편인데, 정몽주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유덕량의 후손인 유희억(劉禧億)에게서 입수해온 글이다. 정몽주는 팔공산 동화사로 놀러 간 1387년 8월15일, 동행한 동료와 후학들에게 유려하게 휘갈긴 이 글씨를 보여주었다. 

이날 팔공산 회동에 참석한 이들은 당대에 쟁쟁한 문사 14명이었다. 이재현(李齋賢)의 손자 이보림(李寶林), 이색(李穡)의 아들 이종학(李種學),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두문동 72현으로 꼽히는 김자수(金自粹), 김약시(金若時), 이행(李行), 안성(安省), 도응(都膺), 조희직(曺希直), 홍노(洪魯), 윤상필(尹祥弼), 홍진유(洪進裕), 고병원(高炳元)이 그들이다. 이들은 이날 태조 왕건의 필적을 보면서 한 편의 연시를 남겼다. 그런데 아쉽게 연시는 7명의 글만 남아 있고, 정몽주를 포함한 7명의 시는 전해오지 않는다.

홍씨 문중에서 이 글을 소중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들의 선조가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부림 홍씨인 홍노(1366~ 92)다. 기이하게도 홍노는 조선이 개국한 날이자, 고려가 망하던 날인 1392년 음력 7월17일에 불귀의 객이 되었다.

현존하는 것은 태조의 친필 자체가 전하는 것은 아니고, 후대에 이를 모각한 것으로 보인다.

 

 

제6폭
해안경잔설 계사조석양(海岸 殘雪 溪沙釣夕陽)
가빈하소유 춘초점간장(家貧何所有 春草漸看長)
                                 (唐 皇甫의 詩  '送王翁信還剡中舊居)'

남은 눈을 헤치고서 바닷가에 밭을 갈고
시냇가 모래에 내려 夕陽 아래 고기를 낚소
내 집에 무엇이 있으리. 봄풀만이 자란다오.
 


원시의  제목이 「왕옹신이 섬중에 있는 옛 거처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며」인 이별하는 사람을 전송하는 시이다.

중국 성당시기 저명한 시인이었던 황보염(皇甫冉)의 벗이었던 왕옹신(王翁信)은 원래 섬중(剡中) 사람으로 청운(靑雲)에 뜻을 두고 살 곳을 경사(京師)에 정했었는데, 금서(琴書)를 휴대하고 옛날에 살던 곳으로 돌아가 은거하면서 구름속의 밭을 갈고 달빛 아래서 낚시질을 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게 되었다고 한다.


송대 성리학자였던 주돈이(周敦頤)는 「周茂叔 窓前草 不除曰 觀天地 生物氣象」라 하여 “창문 앞의 풀을 제거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천지 생물의 기상을 관찰한다.”라고 하였으니, 이 시에서 ‘풀이 자란다’함은 곧, 자연의 순환 이치에 대한 공부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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