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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이씨

연안이씨 시조 당 중랑장 신라 연안후 문청공 휘 무 지 신도비문

작성자새벽샘|작성시간14.02.07|조회수132 목록 댓글 0

延安李氏 始祖 唐 中郞將 新羅 延安侯 文淸公 諱 茂 之 神道碑文
연안이씨 시조 당 중랑장 신라 연안후 문청공 휘 무 지 신도비문

 

연안이씨의 시조는 본시 당(唐) 종실의 의친(懿親)으로 諱를 무(茂)라 일컬으신 어른이시다. 하악(河嶽)의 영기를 타고나신 불세출의 대인물로서 덕망이 높으셨고 기우(器宇)가 관작(寬綽) 하셨다 三軍을 홀로 호령하실 용혜(勇彗)로 도략(韜略)을 관통하셨지만 경상애하(敬上愛下) 하시며 겸양으로 자수(自守)하셨다 일찌기 당 고조의 창업을 도와 수선(隋禪)을 넘겨 받는데에 보필(輔弼)하신 공노가 지대하셨고 좌위중랑장의 위서(位序)에 오르셨으니 그 풍광 오죽이나 영매(英邁)하셨으리 천년이 흐른 오늘에도 모앙(慕仰)하려는 마음이 절로 솟는다 당 고종 현경(顯慶)五년 신라에서 김인문을 보내 원군을 청했다 당시 신라는 한강유역의 지배권을 둘러싼 고구려 및 백제와의 각축전에서 서북으로 四十여성을 잃어 국기가 흔들릴 지경이었고 당 나라는 건국 초 두 차례의 원정에서 고구려의 강력한 항전으로 국권에 커다란 손상을 입게 된 터라 신라와의 맹약을 다지기에 절실한 때였다 당 고종은 소정방(蘇正方)으로 신구도대총관(神丘道大憁管)을 삼고 李茂公으로 부총관(副憁管)을 삼아 十三萬의 대병으로 응원케 했다 당군(唐軍)은 래주(萊州)로부터 해로(海路)를 거쳐 덕물도(德勿島)에 이르렀고 신라는 태자법민(太子法敏)을 보내 맞게 하였다. 소공(蘇公)은 七월 十일을 기하여 백제성 남쪽에서 회합(會合)하기로 밀약을 정하고 부지포(夫只浦)로 상륙하여 예산(禮山) 청양(靑陽)등지로 진군하였고 그보다 먼저 계림을 떠나 남천정에서 머물던 신라군은 보은 옥천 금산 등지로 진군하였다 양군이 회동을 마치고는 蘇公은 부소산에 진을 치고 라당(羅唐)양군을 사로(四路)로 나누어 백제성의 공략을 지휘하는데 李부총관 및 유백영(劉伯英)과 풍사귀(馮士貴)는 각각 一萬兵으로 동북서의 삼면을 맡고 김유신은 二萬兵으로 남쪽을 맡아 일제히 진공케 하니 백제군은 전의를 잃고 허둥거리며 패색이 짙어졌다 소공(蘇公)은 김유신에게 다시 웅진성을 추공(追攻)케 하니 마침내 백제왕은 모든 장상(將相)을 거느리고 투항했는데 때는 태종무열왕 七년 세재경신(歲在庚申)(서기660년)의 七월十八일이었다 소공(蘇公)은 개악(凱樂)을 울리며 입성하여 당의 기치를 높이 꽂았다 무렬왕은 옥백성폐(玉帛盛弊)로 대첩을 치하하고  우양주식(牛羊酒食)으로 군졸들을 대향(大餉)하니 라당(羅唐) 장졸들이 모두 헌하(獻賀)의 예를 올렸다 한편 蘇公은 내친 김에 신라까지도 습취(襲取) 하리라 마음 먹고서 제장들을 모아 밀모하는데 李부총관이 진언하기를 황제께서는 유독 인명을 아끼시는데 어찌 무고한 동국민에게 흉화(兇禍)를 끼치리요 더구나 신라는 비록 소국이지만 군의신충(君義臣忠)하고 지헝인용(地險人勇)하여 쉽사리 도모하지 못할 것이다 하니 蘇公은 본국에 상소하여 군사를 더 청해서 단숨에 격파하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하였다 부총관은 다시 함부로 서둘다간 백제를 평정한 공마저 헛되고 말 것이니 먼저 신라 장수들의 무예를 시험해 보는게 좋겠다 하였다 蘇公은 수긍하고서 망해정(望海停)에 잔치를 베풀고 신라의 군신을 청했다 그리고 여흥을 핑계로 羅唐 장졸들의 무예를 겨루어 보자 청하면서 제조세전(濟朝世傳)의 보검(寶劍) 一件과 자신이 애장하던 황금갑(황금갑) 일습(一襲)을 현상으로 걸었다 이어 사후(射侯)를 세우고 궁술로 자웅을 겨루게 하는데 당시(唐矢)는 과녁을 벗어난 화살이 많았으나 라시(羅矢)는 화살마다 정곡(正鵠)을 꿰뚫으니 피아진(彼我陳)없이 탄성이 흔천(흔天)하였고 소공(蘇公)은 얼떨결에 일어나 동국(東國)의 장수들은 과시(果是) 모두가 신궁(神弓)이로다 하고 찬사를 보냈으나 불안한 빛이 역력하였다 잔치를 파하고 본영으로 돌아와선 부총관의 손을 잡고 탄식하며 공의 깨우침이 없었다면 십만왕사(十萬王師)의 목숨이 경각에  달릴뻔 했다 하고는 이내 웅진으로 진영을 옮기고 도독부를 설치하여 부총관과 유인원(劉仁願)을 남겨 제지(濟地)를 진무(鎭撫)케 하고 바다를 건너 회군하고 말았으니 여기에서 시세(時勢)를 통찰하고 장래를 예견한 우리 시조이신 부총관의 탁월한 자품(資稟)을 엿볼수 있다 제성(濟城)의 완전평정을 확인하고 무열왕은 계림으로 환가(還駕)하여 종묘(宗廟)에 告祭하고 논공행상을 하는데 대각간으로 승자(昇資)된 김유신이 백제를 평정한 功과 신라를 구제하고 양국을 화호(和好)케한 덕량을 들어 부총관에게 가봉예대(加封禮待)하기를 주청(奏請)하니 왕은 옳게 여겨 식채(食采)일천호(一千戶)로 연안백을 봉하고 빈례(賓禮)로 대우하니 우리 이씨의 연안관적(延安貫籍)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七~八년동안 고구려와의 충돌이 계속되더니 마침내 이적(李勣)을 대총관(大憁管)으로 압록강을 건너 남하한 十三萬의 당군(唐軍) 및 웅진(熊津)을 거점으로 한 부총관(副憁管) 이공(李公)의 三萬 정병(精兵)과 계림(鷄林)으로부터 북진한 김흠순(金欽純) 김인문(金仁問)의 五萬 라군(羅軍)의 협공으로 문무왕 八년[서기 668년] 마침내 고구려의 항복을 받으니 실로 삼국통일의 기저가 이날을 기하여 이루이진 것이다 흥덕왕조(興德王朝)에 이르러 연안백 이무공(李茂公)을 연안후(延安候)에다 시 문청(諡 文淸)으로 추숭하고 대각간 김유신에겐 흥무왕(興武王)이란 시호를 추증하였으니 모두가 지난날의 훈로(勳勞)를 보사(報謝)하려는 전장(典章)이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이던가 赤羅縣[軍威]에서는 소이김삼장군(蘇李金三將軍)의 유덕을 경모한 나머지 삼장군(三將軍)이 유진(留陳)했던 곳이라 전해진 삼정산(三井山) 마루에다 효령사(孝靈祠)라 일컫는 사우(祠宇)를 세우고 해마다 단오날이면 관민이 어울려 기고(旗鼓)로 영신(迎神)하며 받들던 제사가 향풍(鄕風)이 되어 이어지다가 경술 국치에다 누차의 화마로 폐지되었으니 사민자손(士民子孫) 할것없이 통석(痛惜)의 정(情) 그지없었다. 다행이도 국가의 보조 아래 유지가(有志家)들의 힘을 입어 一九九六년의 단오절에 복원(復元)을 아뢰고 향사(享祀)를 잇고 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희(噫:탄식,슬픔)라 세칭(世稱) 삼한관성(三韓冠姓)의 우리 家史를 삼별초란(三別抄亂)으로 잃고 세계(世系)가 묘연(杳然)해졌다 마침 麗末에 네분의 顯祖가 계셨음이 드러나 譜事를 닦았는데 태자첨사(太子詹事) 諱 습홍(襲洪)公 판소부감(判小府監) 諱 현려(賢呂)公 대장군(大將軍) 諱 송(松)公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諱 지(漬)公으로 각각 종파를 이루었다 덕후유광(德厚流光)은 고연(固然)한 이치라 각파(各派)마다 명공거경(名公巨卿)이 사책(史策)에 끊일날이 없었으니 영광스럽게도 상신(相臣)이 아홉분으로 영의정(領議政)에 시백(時白) 천보(天輔) 시수(時秀)요 좌의정(左議政)에 귀령(貴齡) 정귀(廷龜) 후(王厚) 복원(福源) 성원(性源) 시수(存秀)요 대제학(大提學)이 일곱분으로 호민(好閔) 정귀(廷龜) 명한(明漢) 일상(一相) 정보(鼎輔) 복원(福源) 만수(晩秀)요 청백리(靑白吏)가 여덟분으로 인충(仁忠) 숭원(崇元) 후백(後白) 광정(光庭) 기설(基卨) 시백(時白) 후정(后定) 명준(明俊)이요 판서(判書)가 四十二분이요 녹훈(錄勳)에다 봉군(封君)이 열분이요 증시(贈諡)가 오십구(五十九)분으로 조선조(朝鮮朝) 통틀어 대과(大科)에 급제한 二五十분의 인재가 배출 되었다 특히 독립운동가로 상해임정의 주석 및 의정원 의장을 지낸 동녕(東寧)은 이 민족의 영원한 추앙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충효열(忠孝烈)의 탁절(卓節)과 아문청덕(雅文淸德)이 속출하여 세속을 순화시켰으니 김포에다 모신 통칭 팔홍문가(八紅門家)의 十四 정려각(旌閭閣)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무너져 가는 망상(網常)을 굳게 지키고 있어 진정 國中의 망족(望族)으로 명실상부하니 은연중에 자긍심도 생기지만 자손되는 자 혁혁(赫赫)하신 대조(大祖)의 덕업을 계술(繼述)하는데 어찌 감히 몸가짐을 소홀히 하리요 고맙게도 다우당공파(四友堂公派) 소연(所捐)의 계룡산하(鷄龍山下) 유성(儒城) 갑동(甲洞)의 신좌원(辛坐原)에 영원(塋園)을 모시고 인근에다 연원(延源)으로 제액(題額)한 사우(祠宇)를 세워 세천(歲薦)을 올리고 이제 다시 요석(樂石)을 다듬어 희생(犧牲)을 매고 영원토록 유덕을 기리려한다 아! 삼국통일 그날의 위업은 천추만세(千秋萬世)에 영광스런 횃불이 되리라 애닯게도 하해(河海)와 같으신 음덕에 보효(報效)하는 정성이 너무나도 미미하기에 국내외의 백만자손들은 여경(餘慶)의 고마움을 폐간(肺肝)에 새겨 일거일동(一擧一動)이 청현세벌(淸顯世閥)의 성망(聲望)에 부합하도록 숙야전긍(夙夜戰兢)하며 대인(對人)처사(處事)에 성찰(省察)의 도리나마 다해야 할 것이다 불초(不肖)하온 小孫은 천졸(淺拙)한 문식(文識)의 소치로 대조(大祖)의 유덕을 만(萬)의 一도 발휘하지 못함에 무한한 죄책을 통감하는 바이다


단군(檀君)기원(紀元)四三三二년[西紀一九九九년]기묘(己卯)입추절(立秋節)

참고 : 한자를 한글로 고쳐서 읽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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