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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이씨

가문을 빛낸 선조들

작성자새벽샘|작성시간14.02.07|조회수241 목록 댓글 0

가문을 빛낸 선조들  

이분희(李汾禧)  ?∼1278(충렬왕 4)

대장군(大將軍) 송(松)의 아들이고 분성(汾成)의 형이다. 고려 원종(元宗) 때 행수지유(行首指諭)가 되고, 이어 장군(將軍)에 올라 원종(元宗)의 총애를 받았다. 그 후 대장군(大將軍)·직문하(直門下)를 거쳐 상장군(上將軍)에 오르고, 1274년(충렬왕 즉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뒤에 지주사(知奏事)·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이르렀다.  sign_left_18_15.gif

이분성(李汾成) 일명 이습(李이습.bmp)  1240∼1278(충렬왕 4)

고려의 무신. 대장군 송(松)의 아들. 형 분희(汾禧)와 함께 김준(金俊)의 심복이 되어, 고려 고종의 궁첩(宮妾)의 딸과 결혼하여 국서(國參)라 자칭했다.
원종(元宗)의 총애를 받아 상서 우승(尙書右丞)에 오르고, 1274년 충렬왕이 즉위하자 추밀원 집주(樞密院執奏)·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가 되었다. 뒤에 상장군(上將軍)·승선(承宣)을 거쳐 지신사(知申事)에 이르렀다.  sign_left_18_15.gif

이귀령(李貴齡)  1345(충목왕 1)∼1439(세종 21)

고려·조선조의 문신. 자는 수지(修之), 시호는 강호(康胡), 고려 말 판선공시사(判繕工寺事)·청주등처 관군만호(靑州等處 官軍萬戶) 등을 역임,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태조 잠저(潛邸) 때의 공으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었다.
1394년(태조 3)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로서 사신(使臣)이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온 뒤 판승녕부사(判承寧府事)·좌군 도총제(左軍都摠制)·병조판서(兵曹判書)·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판좌군도총제부사(判左軍都摠制府事)·변정도감(辨定都監) 제조(提調)등을 역임하고, 1415년 검교우의정(檢校右議政)을 거쳐 이듬해 검교좌의정(檢校左議政)이 되었다가 곧 이어 좌의정(左議政)으로 치사(致仕)했다. sign_left_18_15.gif

 

이석형(李石亨)  1415(태종 15)∼1477(성종 8)

조선의 문신. 자는 백옥(伯玉), 호는 화헌(화軒), 시호는 문강(文康), 증좌의정(贈左議政) 회림(懷林)의 아들. 1441년(세종 23) 수석으로 진사·생원이 되고, 이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정언(正言)이 되었다.
이듬해 집현전 부교리가 되고 1447년 응교(應敎) 때 문신중시(文臣重試)에 급제, 집현전 수직제학(守直提學)에 보직되었다. 1451년(문종 1)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에 올랐고 춘추관 기주관(記注官)을 겸직, 정인지(鄭麟趾) 등과 「고려사(高麗史)」의 편찬에 참여했다.
1455년(세조 1) 첨지중추원사, 이어 전라도 관찰사를 지내고 이듬해 예조 참의를 거쳐 1457년 판공주목사(判公州牧使)로 나갔다가 세조(世祖)의 총애를 받아 한성(漢城) 부윤(府尹)에 올랐다.
1460년 황해도 관찰사, 이듬해 대사헌을 거쳐 중추원 부사(副使)로 경기도 관찰사를 겸직하고, 1462년호조(戶曹) 참판(參判)을 거쳐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7년 동안 재임, 1466년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승품되었다.
팔도(八道) 체찰사(遞察使)로 나가 지방의 호패법의 시행을 독찰(督察)하고 1468년 세조가 죽은 후 고부(告訃) 겸 청시승습사(請諡承襲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거쳐 1469년(예종 1)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랐다. 1470년(성종 1)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고,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4등으로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문장·글씨에 능했다.   sign_left_18_15.gif





이석형 필적

  이석형 신도비

이석형 묘


이숙함(李淑王咸)

조선의 문신. 자는 차공(次公), 호는 몽암(夢菴)·양원(楊原), 시호는 문장(文莊), 연성부원군 말정(末丁)의 아들. 1454년(단종 2)생원으로 증광문과(贈廣文科)에 급제, 경창부승(慶昌府丞)이 되고, 이듬해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으로 감찰(監察)이 되었다.
1457년(세조 3)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1459년 사경(司經)으로 사가독서(賜暇讀書)했으며, 응교(應敎)가 되어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2等으로 급제했다.
1470년(성종 1) 사섬시 첨정(司贍寺僉正)을 거쳐 1480년 군기시정(軍器寺正), 1484년 부제학(副提學)이 되고, 이듬해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신편동국통감(新編東國通鑑)」의 편찬을 끝냈다.
1488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이듬해 수전라도관찰사를 겨쳐 1490년 대사성(大司成)이 되고, 이조 참판에 이르렀다. 글씨를 잘 썼다.  sign_left_18_15.gif                   

이숭원(李崇元) 1428(세종 10)∼1491(성종 22)

조선의 문신. 자는 중인(仲仁), 시호는 충간(忠簡), 참판(參判) 보(補)의 아들. 1453년(단종 1) 증광문과(贈廣文科)에 장원하여 사재감(司宰監) 주부(主簿)가 되고, 정언(正言)을 거쳐 1459년(세조 5) 지평(持平)이 되었다.
이듬해 설화사건(舌禍事件)으로 파직당했다가 형조 정랑(刑曹正郞)에 재등용, 이조정랑(吏曹正郞)·부지통례문사·검상(檢詳) 등을 역임, 사인(舍人)에 승진하고 군자감정(軍資監正)이 되었다.
1468년 판결사(判決事), 이듬해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어 좌승지(左承旨)가 되고, 1471년(성종 2)에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으로 연원군(延原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도승지(都承旨), 1474년 병조판서(兵曹判書)로서 죽었다.
중종(中宗) 때 청백리에 녹선(錄選)되고, 1648년(인조26) 지례(知禮)의 도동사(道東祠)에 제향(祭享) 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숭원 초상                    



이숭원 현동사

이숭원 어서각


이숙기(李淑琦) 1429(세종 11)∼1489(성종 20)

조선의 무신. 자는 공근(公瑾), 시호는 정양(靖襄), 연성부원군 말정(末丁)의 아들. 1453년(단종 1) 무과중시(武科重試)에 급제, 사온서령(司온 署令)을지낸 뒤, 세조의 가전훈도(駕前訓道)로 뽑혔다.
1459년 평양 판관, 1461년 영변 판관을 역임하고, 1467년 특진하여 적개공신(敵愾功臣) 1等으로 이조 참판이 되고 연안군(延安君)으로 봉해졌다.
이 해 겨울 건주위(建州衛)의 정벌에 나가서 다시 크게 공을 세워 전토(田土)와 노비를 하사받고,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이 되고, 1479년(성종 10) 다시 건주위 정벌에 공을 세워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뒤에 황해도 관찰사·영안도 관찰사, 영안도(永安道)·전라도 및 경상도의 절도사(節度使) 등을 역임, 형조 판서를 거쳐 호조 판서에 이르렀다. 지례(知禮)의 도동사(道東祠)에 제향(祭享)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기(李山夔) 1493(성종 24)∼1547(영종 2)

조선의 문신. 자는 사고(士高), 호는 정헌(靜軒), 대호군 수장(壽長)의 아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 1513년(중종 8) 진사가 되고 151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를 거쳐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가 되었다.
이 해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유인숙(柳仁淑)과 함께 대죄(待罪)했으나 무사했다.1545년 대호군에 오르고, 1546년(명종 1)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sign_left_18_15.gif

이후백(李後白) 1520(중종 15)∼1578(선조 11)

조선의 문신. 자는 계진(季眞), 호는 청련(靑蓮), 시호는 문청(文淸), 관찰사(觀察使) 숙함의 증손, 국형(國衡)의 아들. 16세 때 향시(鄕試)에 수석 합격하여 상경, 이의건·최경창·백광훈 등에게 사사했다.
1546년(명종 1)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55년(명종 1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67년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에 보직, 1563년 사가독서(賜暇讀書)했으며, 1567년 전한(典翰)이 되고 1569년(선조 2)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도승지·대사헌·부제학·이조 참판을 역임, 1573년(선조 6)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대사간(大司諫)·이조 판서·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내고, 인성왕후(仁聖王后)가 죽어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일어나자 만2년상을 주장하여 실행하게 했고, 1578년 호조 판서에 이르렀다.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고, 앞서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1590년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에 연양군(延陽君)으로 추봉되었다. 함안(咸安)의 문회서원(文會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 희(李 熹) 1532(중종 27)∼1592(선조 25)

조선의 문신. 자는 자수(子脩), 호는 율리(栗里), 참의(參議) 인문(仁文)의 증손, 위수(威壽)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장중우(張仲雨)의 딸이다. 李滉의 문인. 1561년(명종 16)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74년(선조 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뒤 성균관 · 이조 ·호조 · 병조에서 여러관직을 역임하고 지방의 현령을 거쳐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에 군수를 지내다가 난이 일어나자 관군과 의병을 지휘하여 왜적과 싸우다 전사 하였다.  sign_left_18_15.gif

이 주(李 澍) 1534(중종 29)∼1584(선조 17)

조선의 문신. 자는 언림(彦霖), 호는 분봉(盆峯), 시호는 정목(靖穆), 군수 경종(慶宗)의 아들. 1558년(명종 13)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성균관 유생(儒生)이 되어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중 보우(普雨)를 총애하고 불교를 재흥시키자 여러 유생과 함께 보우의 처벌을 상소하여 크게 물의를 일으켰다.
 1573년(선조 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137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언(正言)을 거쳐 가산군수(嘉山郡守)로 재직 중 죽었다.
죽은 뒤에 아들 광정(光庭)의 공으로 영의정에 추증(追贈), 연녕부원군(延寧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 보(李 輔) 1545(인종 1)∼1608(선조 41)

조선의 문신. 자는 경임(景任), 호는 남계(南溪), 성리학자 진(軫)의 동생, 군위(軍威) 출신.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서 1580년(선조 13) 진사가 되고, 임진왜란 때 의 의병으로 활약하면서 전란으로 황폐해진 인동(仁同)을 임시로 맡아 다스리는 한편, 관찰사의 명으로 모속관(募粟官)이 되어 군량미 조달에 노력했다.
후에 김응남·정곤수 등의 추천으로 받아 당진(唐津) 현감(縣監)에 임명되었으나, 인동(仁同) 주민들의 청으로 인동 현감(縣監)에 보직되어 선정을 베풀고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이 천생산성(天生山城)을 쌓을 때 그 역사(役事)를 맡았다.   sign_left_18_15.gif 

이광정(李光庭) 1552(명종 7)∼1627(인조 5)

조선의 문신. 자는 덕휘(德輝), 호는 해고(海皐)·눌옹(訥翁), 정언(正言) 주(澍)의 아들. 1573년(선조 6)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590년 교관(敎官)으로 증광문과(贈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언·예조 좌랑(禮曹佐郞)·전적(典籍)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고, 1602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있을 때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명 나라에 다녀왔다.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연원군(延原君)으로 봉해지고 뒤이어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라 부원군에 진봉(進封) 되었다.광해군 때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임명되었으나 대북(大北)의 난정을 보고 병을 이유로 사퇴,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다시 이조(吏曹)·공조(工曹)·형조(刑曹)의 판서(判書)가 되었으나 사퇴, 1626년(인조 4) 개성부(開城府) 유수(留守)가 되었다가 이듬해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강화에 들어가 병사했다. 선조 때 청백리(靑白吏)에 녹선(錄選) 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광정 필적


이호민(李好閔) 1553(영종 8)∼1634(인조 12)

조선의 문신. 자는 효언(孝彦). 호는 오봉(五峰)·남곽(南郭)·수와(睡窩), 시호는 문희(文僖), 연안군 숙기(淑琦)의 증손. 1579년(선조 12) 진사가 되고, 1584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이듬해 사관(史官)으로 뽑히고 이어 응교(應敎)·전한(典翰)을 거쳐 집의(執義)로 응교를 겸했다.
1592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義州)에 왕을 호종(扈從), 그후 요양(遼陽)에 가서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 명장(明將) 이여송(李如松) 군대를 이끌어 들이는 데 크게 활약했다.
상호군(上護軍)·행사직(行司直) 등을 역임, 1595년 부제학으로 명나라와의 외교문서를 도맡아 기초했고, 이듬해 참찬관(參贊官)을 거쳐 1599년 동지중추부가 되어 사은사(謝恩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온 뒤 1601년 예조 판서로 인성왕후(仁聖王后)의 지문(誌文)을 다시 썼다. 이듬해 대제학·예조 판서를 거쳐 좌찬성에 이르고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으며 뒤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가 되고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 되었다. 1608년 선조(宣祖)가 죽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즉위를 반대하고 적서(嫡庶)의 구별 없이 장남(長男)을 등극(登極)시켜야 한다는 입장론을 주장했고,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고부청시청승습사(告訃請諡請承襲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 문외출송(門外黜送)당했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 나와 향리(鄕里)에서 시주(詩酒)로 소일했다.
지례(知禮)의 도동향사(道東鄕祠)에 제향(祭享) 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기설(李基卨) 1556(명종 11)∼1622(광해군 14)

조선의 문신. 자는 공조(公造), 호는 연봉(蓮峯), 박지화(朴枝華)의 문인. 효행으로 1585년 참봉에 발탁, 이듬해 청산 현감(靑山縣監)에 특진, 1592년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이 되고, 이 해 임진왜란 때 호조 정랑(戶曹正郞)으로 군량미 조달에 힘썼다.
난이 끝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 갔다가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추천으로 1599년 상원(祥原) 군수를 거쳐 1601년 쳥백리에 녹선, 이듬해 연안부사(延安府使)가 되었다.
1603년 군자감 부정(軍資監副正)을 거쳐 1605년 사도시정(司道寺正), 광해군이 즉위하자 장령(掌令)에 발탁되었다. 1610년(광해군 2) 부호군(副護軍), 예빈시정(禮賓寺正)을 역임, 1613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이서인(庶人)으로 쫓겨나고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시국을 개탄하며 벼슬을 사직, 고향에 내려갔다.
만년에는 학문에 전심, 경사를 비롯하여 천문·지리·율학·병술(兵術) 등 여러 방면에 정통했다. 1623년(인조 1) 정경세(鄭經世)의 상소로 이조 참판에 추증, 1633년에는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sign_left_18_15.gif

이 귀(李 貴) 1557(명종 12)∼1633(인조 11)

조선의 문신. 자는 옥여(玉汝), 호는 묵재(默齋), 시호는 충정(忠定), 정화(廷華)의 아들. 이 이(李 珥)·성 혼(成 渾)의 문인으로서, 1582년(선조 15) 생원이 되고, 강릉(康陵) 참봉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에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삼도 선유관(宣諭官)으로 우마(牛馬)·군졸(軍卒)·대두(大豆) 등을 징발하여 도체찰사 유성룡에게 수송했다.
이듬해 장성(長城) 현감·군기시(軍器寺) 판관·김제 군수를 역임, 1603년(선조 36)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형조 좌랑·안산 군수·양재도 찰방(良才道察訪)·백천(白川) 군수 등을 역임했다. 1609년(광해군 1) 함흥 판관(咸興判官)을 겨쳐 1616년 숙천 부사(肅川府使)로 무고를 입고 수삼된 해주 목사(海州牧使) 최 기(崔 沂)를 만나 본 죄로 이천(伊川)에 유배당했다.
그 후 평산(平山) 부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亂政)을 개탄, 1623년 김 유와 함께 광해군을 폐하고 선조의 손자 능양군(綾陽君)을 추대, 호위 대장·이조 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참찬·대사헌·좌찬성이 되었으며,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으로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해지고 공서(功西)의 영수가 되었다.
1626년(인조 4) 병조 판서·이조 판서를 지내고, 이 해 김장생(金長生)과 함께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상(喪)을 만2년으로 주장했다가 대간의 탄핵으로 사직했다.이듬해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왕을 강화도에 호종(扈從), 최명길(崔鳴吉)과 함께 화의(和議)를 주장하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영의정에 추증(追贈), 인조 묘정에 배향(配享)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귀 초상

이귀 필적


이홍로(李弘老) 1560(명종 15)∼1612(광해군 4)

조선의 문신. 자는 유보(裕甫), 호는 판교(板橋), 군수 간(侃)의 아들. 1579년(선조 12) 진사(進士)가 되고, 1583년 정시문과에 장원(壯元),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 좌랑으로서 왕을 호종(扈從)하다가 도망, 뒤에 함경도 도검찰사(都檢察使)의 종사관(從事官)을 지내면서 또 도망, 다시 선전관이 되었으나 양사(兩司)의 탄핵으로 원배(遠配)되었다. 그후 풀려나와 경기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1608년 유영경(柳永慶) 등 소북(小北)의 일파로 제주에 유배(流配), 1612년(광해군 4) 능지처참(凌遲處斬)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정귀(李廷龜) 1564(명종 19)∼1635(인조 13)

조선의 문신·학자.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月沙)·보만당(保晩堂)·응암(凝菴), 시호는 문충(文忠), 연성부원군 석형(石亨)의 현손(玄孫), 현령(懸令) 계(계)의 아들. 윤근수의 문인. 1585년(선조 18) 진사가 되고 159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었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행재소(行在所)에가서 설서(說書)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의 요청으로 황 신(黃 愼) 등과 함께 뽑혀서「경서(經書)」를 강의하여 학자로서 존경을 받았다.
그후 병조(兵曹)와 이조(吏曹)의 좌랑(佐郞), 예조(禮曹)와 병조(兵曹)의 정랑(正郞), 집의(執義)·승지(承旨)를 역임하고 병조 참지(參知)가 되어 승문원 부제조(副提調)를 겸했다.
1598년 명나라 병부 주사(兵部主事) 정응태가 조선에서 왜병을 끌어들여 중국을 침범하려 한다고 자기 나라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조선국 변무주문(朝鮮國辨誣奏文)을 지어 진주부사(陳奏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정응태의 무고임을 밝혀 파직시켰다.
귀국 후 대제학에 올랐다가 1604년(선조 37) 세자책봉 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자주 관반(館拌)이 되어 중국 사신을 접대하고 명나라에 갔을 때는, 그 곳 문사들의 청에 의해 1백여 장(章)의 기행문을 모은 「조천기행록(朝天紀行錄)」을 간행했다.
1623년(인조 1)에 예조 판서가 되고 이듬해 이 괄(李 适)의 난에 왕을 공주에 호종, 1627년 정묘호란 때도 병조 판서로 왕을 호종, 강화에 피란하여 화의를 반대했다.1628년 우의정에 승진,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
문학의 대가로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신 흠(申 欽)·장 유(張 維)·이 식(李 植)과 함께 조선 중기의 4代 문장가(文章家)로 일컬어진다.  sign_left_18_15.gif

이정귀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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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귀 묘                                                          이정귀 필적


이희건(李希建) ? ∼1627(인조 5)

조선의 무신. 자는 중식(仲植), 시호는 장렬(壯烈), 홍평군 종장(宗張)의 아들. 무과에 급제, 안주 목사로 한때 견책되어 평안도 우후(虞侯)로 좌천되었다가 뒤에 선천(宣川) 부사가 되었다.
1624년(인조 2)용천(龍川) 부사로 있을 때 이 괄(李 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원수(元帥) 장 만(張 晩)을 따라 적을 안현에서 격파, 진무공신(振武功臣)2등으로 홍양군에 봉해지고, 임지에 돌아가 용천의 전략적 중요성에 대비, 백성을 동원하여 용골산성(龍骨山城)을 쌓았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에 의주·안주가 함락되고 용골산성이 포위되자 부하를 이끌고 분전 하다가 전사했다. 뒤에 부민(府民)들이 그의 산성 축조의 공덕을 찬양하여 비를 세웠다. 좌찬성에 추증, 숙종 때 용처의 충렬사, 안주의 충민사(忠愍祠)에 제향(祭享)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시직(李時稷) 1572(선조 5)∼1637(인조 15)

조선의 문신. 자는 성유(聖兪), 호는 죽창(竹窓), 시호는 충목(忠穆), 연성부원군 석형(石亨)의 후손. 조호익·김창생의 문인.1606년(선조 39 )사마시에 합격, 1624년(인조 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별제(別提)가 되고, 이 해 이괄의 난 때 왕을 공주에 호종했다.
종묘서 직장(宗廟署 直長)을 거쳐 1635년 正言(정언)·掌令(장령)·弼善(필선) 등을 역임하고 장악원정(掌樂院正)·사복시정(司僕寺正)·봉상시정(奉常寺正)을 지낸후,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강화가 함락되자 사복시 주부(司僕寺주부(主簿)) 송시영의 뒤를 이어 자결했다. 이조 판서에 추증, 강화의 충렬사, 회덕(懷德)의 숭현서원(崇賢書院) 별사(別祠)에 제향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시직 필적


이창정(李昌庭) 1573(선조 6)∼1625(인조 3)

조선의 문신. 자는 중번(仲蕃), 호는 화음(華陰)·무궁옹(無求翁), 정언 주(澍)의 아들. 1603년(선조 36) 진사가 되고, 1608년(광해군 즉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은율 현감이 되고, 행호군(行護軍)을 거쳐 1611년 순천 부사, 1613년에 동래 부사, 1616년 양주 목사가 되었다.
1623년(인조 1) 충청도 수군절도사, 이듬해 이괄의 난에 인조를 공주에 호종했다. 이해 명장(明將) 모문룡과 의견충돌을 일으킨 함경도 관찰사 권반(權盼)의 후임으로 임명되어 명나라 군대의 약탈행위를 금지시키는 데 성공하고, 1625년 선위사(宣慰使)로 안변에 가서 명나라 사신을 기다리던 중 병사했다.  sign_left_18_15.gif

이시담(李時聃) 1584(선조 17)∼1665(현종 6)

조선의 문신. 자는 현충(玄忠), 호는 사우당(四友堂), 연평부원군 귀(貴)의 아들, 영의정 시백(時白)의 아우. 1613년(광해군 5) 사마시에 합격. 성균관 유생으로서 1623년 인조반정 때 아버지와 형을 도와 반정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고, 내자시 주부(內資寺主簿) 감찰(監察)·사직서령(社稷署令) 등을 지낸 후 충주 목사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후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부임하는 곳마다 잘 다스려 명관으로서 이름났고 순창·능주 등지에 선정비가 세워졌다. 어렸을 때부터 서예에 능했고, 오언시(五言詩)를 잘 지었으며, 그림도 잘 그렸다. 호조 판서에 추증 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 현(李 示玄 ) 1584년(선조 17)∼1637(인조 15)

조선의 문신. 자는 자장(子章), 호는 탄옹(灘翁)·월탄(月灘), 시호는 충정(忠定) 판서 광정(光庭)의 아들, 영의정 유영경의 사위. 1603년(선조 36) 진사가 되고,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1612년 유영경이 추죄(追罪)를 당할 때 삭직(削職) 당했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전적(典籍)에 등용되었다.이어 호조·형조·병조의 좌랑을 지내고, 1628년(인조 6) 장령(掌令)에 승진, 1631년 정언(正言)을 거쳐 1634년 순천 부사로서 잘 다스려 가자(加資)되고, 이해 충청도 양전사(量田使)로 나갔다가 1635년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황해도·평안도의 관향사(管餉使)로 공을 세워 연안군에 봉해지고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글씨를 잘 썼고, 좌찬성에 추증 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경의(李景義) 1590(선조 23)∼1640(인조 18)

조선의 문신. 자는 자방(子方), 호는 만사(晩沙), 부사(府使) 상민(尙閔)의 아들. 어머니는 전주이씨 북청판관 학수(鶴壽)의 딸이다.1616년(광해군 8) 진사가 되고, 1619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전적(典籍)을 거쳐 인조반정(1623) 후 정언(正言)·지평(持平)·헌납(獻納)을 역임. 1627년(인조 5) 평안도 순안어사(巡按御史)·수찬(修撰), 이듬해 장령(掌令)을 지냈다.
1630년 경상도 암행어사·부교리·집의·부응교, 이듬해 교리를 역임, 1636년(인조 14)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군량을 조달하는 한편 흩어진 군진을 수습하여 어가를 호종했다.
1638년 홍주(洪州) 목사·호조 참의, 이듬해 승지, 이조의 참의·참판을 거쳐 1640년 행호군(行護軍)이 되었다. 문장가로 일가를 이루어 당대 명문으로 알려졌다.  sign_left_18_15.gif

이시백(李時白) 1592(선조 25)∼1660(현종 1)

조선의 문신. 자는 돈시(敦詩), 호는 조암(釣巖), 시호는 충익(忠翼), 연평부원군 귀(貴)의 아들. 시방(時昉)의 형이다. 이항복·김장생의 문인. 1623년 유생으로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연양군에 봉해졌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협수사(協守使)가 되어 군사를 모집, 그 공으로 수원 방어사(防禦使)가 되었다.
1629년 삼수미(三手米)를 국고에 수납하는 데 태만했던 죄로 품계가 깎이고, 이듬해 양주(楊州) 목사를 거쳐 1631년 병조 참판으로 남한산성 수어사·호위대장·특진관을 겸직했다.
이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서성장(西城將)으로 성(城)을 수비했고, 이듬해 병조 판서에 특진했으나 1638년 척화신(斥和臣)이라 하여 아들 유(愉)를 심양(瀋陽)에 볼모로 보내게 되자 대신 서자를 보냈다가 2년 후 탄로되어 파직, 중도부처(中途府處)되었다.
곧 풀려나와 총융사(摠戎使)에 보직되고, 1642년 진하사(進賀使)로 청나라에 다녀온뒤 1645년 공조 판서, 이어 병조 판서, 1649년 이조 판서를 거쳐 1650년(효종 1년) 우의정에 올랐다. 이 해 진주사(陳奏使)로, 이듬해 좌의정으로 사은사(謝恩使), 1653년 다시 사은사로 각각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연양부원군에 진봉되었고, 1655년 영의정에 올랐다. 1658년 김육의 건의를 따라 호남에도 대동법을 실시하도록 했고, 1660년(현종 1)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로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송시열 등 서인(西人)의 기년설(朞年說: 만1년)을지지했다. sign_left_18_15.gif

 


이시백 초상

 

이시백 필적


 

 이시방(李時昉) 1594(선조 27)∼1660(현종 1)

조선의 문신. 자는 계명(季明), 호는 서봉(西峯), 시호는 충정(忠靖), 연평부원군 귀(貴)의 아들, 영의정 시백(時白)의 아우. 1623년 인조 반정에 아버지와 함께 가담, 정사공신 2등으로 연성군에 봉해졌다.
이듬해 이괄의 난 때는 군사를 모아 반란군을 토벌하고 1625년(인조 3) 서산 군수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인조가 강화에 피란하기에 앞서 순검사(巡檢使)가 되어 강화의 군비를 정비했고, 인조 도착 후에는 군량미 조달 임무를 맡아 보았다. 이듬해 전공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가 되고, 이해 광주 목사(廣州 牧使) 겸 남한산성 방어사가 되었다.1632년 한성부의 좌·우윤(左·右尹)을 역임하고 인목대비가 죽자 국장도감(國葬都監)과 산릉도감(山陵都監)의 제조(提調)가 되었고, 1636년 나주 목사·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이 해 겨울 전년의 병자호란에 즉시 군사를 동원하여 상경하지 않은 죄로 정산(定山)에 유배되었고, 1640년(인조 18) 풀려 나와 제주 목사로 부임했다. 이듬해 제주도에 안치되어 있던 광해군이 죽자 손수 염습(殮襲)했고, 그 뒤 광주 수어사·병조 참판을 지내고, 호조 참판으로 있을 때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을 주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효종 때 형조·호조·공조의 판서를 역임했다.  sign_left_18_15.gif

이시방 필적


이명한(李明漢) 1595(선조 28)∼1645(인조 23)

조선의 문신. 자는 천장(天章), 호는 백주(白洲), 시호는 문정(文靖), 좌의정 정귀(廷龜)의 아들. 1616년(광해군 8)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정자(正字)·전적(典籍)을 거쳐 공조 좌랑에 이르러 앞서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났을 때 이에 참여치 않았다 하여 파면되었다.
인조반정(1623) 후 경연시 독관(經筵侍 讀官)이 되고, 이괄의 난때 왕을 공주로 호종하여 8도(道)에 보내는 교서를 지었다.
여러 조의 참의, 대사간·부제학을 지내고 1639년(인조 17) 병조 참의·도승지를 거쳐 1641년 한성부 우윤(漢城府 右尹)이 되고, 이해 대사헌·도승지 겸 대제학·이조판서 등을 역임, 1645년 이경여·신익성 등과 함께 척화파라 하여 심양에 잡혀가 억류되었다.
이듬해 세자 이사(世子 貳師)가 되어 볼모로 잡혀 간 세자를 모시러 심양에 갔으며, 1645년에 명나라와 밀통하는 자문을 썼다 하여 다시 청나라에 잡혀 갔다가 뒤에 풀려 나와 예조 판서에 이르렀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고, 시와 글씨에 뛰어났으며 병자호란 때 척화파로 심양까지 잡혀 갔던 의분을 노래한 시조 6수(首)가 전한다.  sign_left_18_15.gif

이소한(李昭漢) 1598년(선조 31)∼1645(인조 23)

조선의 문신. 자는 도장(道章), 호는 현주(玄洲), 좌의정 정귀(廷龜)의 아들. 1612년(광해군 4) 15세로 진사가 되고, 1621년(광해군 1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다가 인조반정(1623) 후 정자(正字)·정언(正言)· 교리(校理)를 지냈다.1626년(인조 4) 다시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 헌납·응교를 거쳐 승지에 올랐다. 1632년에 인조의 사친 추숭(私親 追崇)을 반대하여 충원(忠原) 현감으로 좌천, 이어 사직했다가 다시 등용되어 병조 참지·예조 참의·진주 목사를 역임했다.
1643년(인조 21) 왕세자가 심양(瀋陽)에 볼모로 갈 때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 호종(扈從), 돌아와서 승지를 거쳐 형조 참판 겸 비변사 당상(備邊司 堂上)에 이르렀다.
어려서 신동으로 불리었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나 아버지, 형 명한(明漢)과 함께 송나라의 삼소(三蘇:순(詢)·식(軾)·철(轍))와 비교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소한 필적



이소한 묘


이돈오(李惇五) ?∼1637(인조 15)

조선의 순절자(殉節者). 자는 자전(子典), 시호는 충현(忠顯), 기설(基卨)의 아들. 어머니는 참봉 허진(許진)의 딸이다. 4대에 걸쳐 정문(旌門)이 세워진 가문에 태어났다. 천거로 선공감(繕貢監) 감역(監役)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후에 제릉 참봉(齊陵 參奉)·사섬시 봉사(司贍寺 奉事)·시직(侍直) 등을 지내고 광해군 때 폐모론이 일어나자 사직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장례원 사평(掌隷院 司評)이 되었고, 이어서 여러 벼슬을 지내다가 1636년(인조 14) 사직했다.
이 해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모친과 함께 강화에 가서 훈련 도감 낭청(訓鍊都監 郎廳)으로 군기(軍器)를 관리했고, 강화에 침입한 적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좌참찬에 추증, 숙종 때 강화의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시정(李時程) ?∼1653(효종 4)

조선의 문신. 자(子)는 중화(仲和), 형조 정랑 윤(贇)의 아들. 유생으로서 1618년(광해군 10) 폐모의 논의가 일어나자 향리에 은퇴했다가 1623년 인조 반정 후 성균관 재임(齋任)이 되고 대사성 정엽(鄭曄)에게 건의하여 앞서 광해군 때 협박에 못이겨 폐모론에 추종한 자들은 유적(儒籍)서 빼지 않도록 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경상도로 피란, 명유 정경세(鄭經世)에게 수학하고 이듬해 활인서 별제(活人署 別提)를 거쳐 의금부 도사(都事), 후에 남별궁(南別宮) 감조관(監造官)을 지냈다.  sign_left_18_15.gif

이수인(李壽仁) 1601(인조 2)∼1661(현종 2)

조선의 문신. 자는 유안(幼安), 호는 성암(惺菴), 현감 태길의 아들 강진출신. 1624(인조 2) 생원시 진사시에 합격, 1632년 현릉(顯陵) 참봉이 되고, 이듬해 증광문과(贈廣文科)에 병과로 급제, 권지정자(權知正子)가 되었다. 정언(正言)에 이르러 아버지를 여의고 나서 오직 학문에만 뜻을 두고 전적(典籍).지평(持平)·사간(司諫)·전한(典翰) 등에 여러번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 경사(經史)·성리학(性理學)에 밝았다.   sign_left_18_15.gif

이극인(李克仁) 1602(선조 35)∼ ?

조선의 문신. 자는 사안(士安), 호는 송정(松汀), 복길(復吉)의 아들. 해남(海南)출신. 1635년(인조 13) 증광문과(贈廣文科)에 병과로 급제, 1639년 지평(持平)에 이르렀다.  sign_left_18_15.gif

이완 (李 示完) 1604(선조 37)∼1649(인조 27)

조선의 문신. 자는 자완(子完), 1639년(인조 1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자(正字)가 되고 , 흉년으로 기근이 심하자 구휼칠조(救恤七條)를 상소, 이를 시행하게 했다.
이어 병조 좌랑을 거쳐 옥구(沃溝) 현감에 보직, 각종 잡세를 폐지하도록 건의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예조·병조의 정랑, 정언·직강·지평 등을 역임하고, 1645년 대기근으로 진휼청(賑恤廳)을 두게 되자 각도의 운미선(運米船)을 보내어 비축미를 풀어 백성을 구제했고, 1648년 지평에 재임되자 권신 김자점(金自點)이 뇌물을 받고 기강을 문란시킴을 상소하고 사직했다.  sign_left_18_15.gif

이 회(李 示會 ) 1607(선조 40)∼1666(현종 7)

조선의 문신. 자는 자방(子方), 관찰사 창정(昌庭)의 아들. 1631년(인조 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藝文館)·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벼슬과 6조의 낭관(郎官), 3사(司)의 벼슬을 거쳐 주군(州郡)을 다스렸다.1648년(인조 26) 강릉 부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 받았다.  sign_left_18_15.gif

이 도(李 示周 ) 1609(광해군 1)∼1639(인조 17)

조선의 문신. 자는 자주(子周), 호는 하석(霞石), 판서 광정(光庭)의 아들. 1624년(인조 2)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33년 증광문과(贈廣文科)에 장원(壯元), 1635년 홍문관에 등용되고, 이듬해 정언(正言)으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갑과로 급제, 수찬(修撰)이 되어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화의를 반대했다.
이듬해 교리를 거쳐 1638년 이조 정랑(吏曹 正郞)에 전직, 다음해 헌납(獻納)에 올랐다가 교리가 되어 왕에게 잠(箴)을 지어 올려 상으로 호피(虎皮)를 받았다.   sign_left_18_15.gif

 

이일상(李一相) 1612(광해군 4)∼1666(현종 7)

조선의 문신. 자는 함경(咸卿), 호는 청호(靑湖), 시호는 문숙(文肅), 영의정 정귀(廷龜)의 손자, 이조 판서 명한(明漢)의 아들. 1628년(인조 6) 17세로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연소하여 벼슬을 하지 않고 있다가 1633년 설서(說書)가 되고, 검열(檢閱)을 거쳐 1636년 병자호란 때 정언(正言)으로 화의를 반대하다가 이듬해 척화죄인(斥和罪人)으로 절도(絶島)에 유배되었다. 그 후 풀려나와 청요직(淸要職)을 역임, 1654년(효종 5) 진하부사(進賀副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 청나라의 실정을 보고하여 효종의 북벌계획수립에 도움을 주었다.
1657년 부제학으로 실록수정청(實錄修正廳) 당상(堂上)이 되어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의 편찬에 참여하고, 이어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에 올랐으며, 1659년 효종이 죽자 빈전도감(殯殿都監) 당상(堂上)에 차출되었으며 영릉지장(寧陵誌狀)의 애책문(哀冊文)을 지었다.
1660년에 현종(顯宗)이 즉위하자 이조와 예조의 참판, 대제학을 지내고, 그 후 우참찬·한성부 판윤·동지경연사·지의금부사·지춘추관사·호조판서 등 요직을 거쳐 예조판서에 이르러 죽었다.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일상 필적



이일상 묘


 

이가상(李嘉相)  1615(광해군 7)∼1637(인조 15)

자는 회경(會卿), 호는 빙헌(氷軒), 판서 명한(明漢)의 아들. 척화신 공조참의 나만갑(羅萬甲)의 딸과 혼인하였다.1630년(인조 8) 진사가 되고, 163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병자호란이 일어나 어머니를 모시고 강화에 피란, 이듬해 강화가 함락되자 탈출, 또 피란 중 적에게 쫓겨 어머니만 숨기고 자신은 체포되었다. 아내 나씨가 어머니를 모시고 섬으로 피신, 그 후 풀려나온 그는 어머니의 행방을 찾아 적진을 헤매다가 적에게 살해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아내도 상심 끝에 죽었다. 인조의 명으로 효자 정문이 세워졌고, 현종 때 교리에 추증 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은상(李殷相) 1617(광해군 9)∼1678(숙종 4)

조선의 문신. 자는 열경(說卿), 호는 동리(東里), 시호는 문량(文良), 정귀(廷龜)의 손자, 소한(昭漢)의 아들. 어머니는 여주이씨로 좌찬성 상의(尙毅)의 딸이다. 1651년(효종 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 설서(說書)로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 165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로 급제, 1660년(현종 1) 교리(校理)로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오르고, 1663년 승지(承旨), 1666년 대사간, 1668년 도승지를 지냈다.
1674년(현종 15)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를 논할 때 형조 판서로서 대공제(大功制 : 滿 9개월)를 주장했다
이해 8월 현종(顯宗)이 죽자 애책문(哀冊文)을 찬진(撰進)했고, 송시열이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유배당하자 병을 핑계로 조회에 나가지 않았다가 이어 서인(西人)들이 실각하자 삭출(削黜) 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은상 신도비


 

이관징(李觀徵) 1618(광해군 10∼1695(숙종 21)

조선의 문신. 자는 국빈(國賓), 호는 근옹(芹翁)·근곡(芹谷), 시호는 정희(靖僖). 심( )의 아들. 1639년 (인조 1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성균관 유생으로서 뛰어난 재질을 보여 천거(薦擧)로 참봉이 되고, 1653(효종 40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장령(掌令)에 승진했다.
1660년 제1차 복상문제 때 송시열 등 서인의 기년설(朞年說 : 滿 1년)에 대해 만 2년설을 주장하다가 쫓겨난 남인(南人) 허적(許籍)·허목(許穆) 등을 구제하려다가 전라도 도사(都事)로 좌천되었다.
1664년(현종 5)다시 장령(掌令)이 되고, 1674년 숙종(肅宗)이 즉위하여 남인의 득세하자 이듬해 대사성 대사헌을 역임, 한편 경연관(都憁管)이 되어 숙종의 신임을 받았다.
1680년 동지사(同知事)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689년 예조판서·보양관(輔養官) 이어 이조 판서를 거쳐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로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1694년(숙종 20) 갑술(甲戌)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기사환국(己巳換國) 때의 발계인(發啓人)으로 삭출(削黜)되었다. 해서(楷書)에 일가를 이루었고 만년에는 김생(金生)의 필법(筆法)을 연구했다.   sign_left_18_15.gif

이관징 필적


 

이유상(李有相) 1623(인조 1)∼1673(현종 14)

조선의 문신·명필. 자는 세경(世卿), 호는 동둔(東芚), 형조 참판 소한(昭漢)의 아들. 1642년(인조 20) 사마시(司馬試)를 거쳐1660년(현종 1) 증광문과(贈廣文科)에 병과로 급제, 1663년 부교리가 되고, 응교(應敎)·예조좌랑(禮曹佐郞)·헌납(獻納)을 역임했다.
시문을 잘 했으며, 특히 초서(草書)에 뛰어났다.  sign_left_18_15.gif

이유상 필적


 

이익상(李翊相) 1625(인조 3)∼1691(숙종 17)

조선의 문신. 자는 필경(弼卿), 호는 매간(梅磵), 시호는 문희(文僖), 좌의정 정귀(廷龜)의 손자, 소한(昭漢)의 아들. 1652년(효종 2) 사마시를 거쳐, 1660년(현종 1)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부정자(副正字)가 되어 「효종실록」편찬 때 기사관(記事官)으로 참여, 이어 대교·사간·지평·이조정랑·승지·응교·필선 등을 거쳐 1672년(현종 13) 대사간이 되었다.현종이 죽자 빈전도감 당상(殯殿都監堂上)이 되고, 1675년(숙종 1)한성부 우윤·대사헌을 역임, 1679년 도승지로서 송시열의 예론을 공박하는 곽세건(郭世健)을 논척(論斥)했고 경연에 나가 윤휴·허목을 면박했다.이듬해 대사헌에 전직되었으나 경신 대출척(庚申 大黜陟) 때 강릉 부사로 좌천되었다가 1681년 대사성·부제학을 지냈다.다음해 도승지·이조 참판을 역임하다가 대신들의 공박을 받아 한때 개성부 유수로 전직되고, 1687년(숙종 13) 공조 판서, 이듬해 우참찬·제학·이조 판서를 지냈다. 1689년 기사환국에 인현왕후가 폐위되자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sign_left_18_15.gif

이익상 필적


 

이단상(李端相) 1628(인조 9)∼1669(현종 10)

조선의 문신.  자는 유능(幼能), 호는 정관재(靜觀齋) · 서호(西湖), 시호는 문정(文貞), 대제학 명한(明漢)의 아들. 1648년(인조 26) 진사시에 장원, 이듬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설서· 대교 · 봉교 · 부수찬 · 교리등을 거쳐 이조 병조의 정랑을 지내고, 1655년(효종 6)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후에 대간을 거쳐 청풍 부사를 지내고 1658년 응교가 되었다. 그후 인천 부사가 되었으나 곧 사퇴, 양주에서 학문 연구에 힘썼다. 1664년 (현종 5) 집의가 되고 1669년 부제학으로 서연관(西筵官)을 겸했다.

문하에서 아들인 이희조와 김창협· 임영등의 쟁쟁한 학자가 배출되었다. 이조 판서에  추증, 양주(楊州)의 석실서원, 인천의 학산서원에 제향 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단상 필적


 

 이후정(李后定) 1631(인조 9)∼1689(숙종 15)

조선의 문신. 자는 정숙(定叔), 호는 만안당(晩安堂), 장령 기설(基卨)의 손자. 1660년(현종 1) 생원이 되고, 1675년(숙종 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지평·정언·부수찬·헌납을 지냈다.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때에 병조참지(兵曹參知)로서 인현왕후 폐위의 부당함을 상소했으나 용납되지 않으므로 격분하여 죽었다. 후에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봉징(李鳳徵) 1640(인조 18)∼1705)(숙종 31)

조선의 문신. 자는 명서(鳴瑞), 호는 은봉(隱峰)·해봉(海峰), 지평 완(示完)의 아들. 1675년(숙종 1) 생원이 되고, 이 해에 증광문과에 장원, 수찬·사인·부제학을 거쳐 1691년 개성부 유수가 되었다. 이듬해 전라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1694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갑술옥사로 남인들이 제거당할 때 파직, 1698년 형조 참판이 되고, 1701년 행부사직(行副司直)으로 희빈 장씨의 사사(賜死)를 반대하다가 지도(知島)에 위리안치,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sign_left_18_15.gif

이 오(李  敖頁) 1641(인조 19)∼1698(숙종 24)

조선의 문신. 자는 문약(文若), 호는 박천(博泉), 관징(觀徵)의 아들. 1660년 예조좌랑을 지내고, 1670년 정언·지평이 되고, 1675년(숙종 1)홍문관에 등용된 후 헌납·이조 좌랑·응교·사간·우부승지 등을 역임했다.1677년 부제학이 되었다가 이듬해 서인의 영수 송시열의 처벌 문제로 남인이 청남(淸南)·탁남(濁南)으로 분열되자. 청남에 속하여 송시열을 종묘에 고하여 극형에 처하자고 주장다가 탁남의 영수 허적 등의 반대로 사직, 북청에 유배되었다.1689년 기사환국으로 풀려 나와 승지에 등용되고 경기도 관찰사를 거쳐 1692년 예조 참판에 이르렀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sign_left_18_15.gif

 이 관(李 慣) ? ∼1692(숙종 18)

조선의 문신. 자는 중습(仲習), 판서 시방(時昉)의 아들. 어머니는 이수검(李守儉)의 딸이다.진사가 된 후 여러 벼슬을 역임, 만년에 이르러 판결사·형조 참의 등을 지내고 1685년(숙종 11) 공홍도(公洪島) 병마절도사가 되었다.이어 한성부 좌윤을 거처 1688년 총융사·공조참판을 역임, 이듬해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나주 목사·안동부사 등의 외관직을 지내다가 사임했다.  sign_left_18_15.gif

 이만원(李萬元) 1651(효종 2)∼ ?

조선의 문신. 자는 백춘(伯春), 호는 이우당(二憂堂), 형(泂)의 아들. 어머니는 최대년(崔大年)의 딸이다. 1678년(숙종 4)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지평을 지내고 1689년 정언으로서 기사환국에 의주(義州)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 나와 헌납이 되고, 이어 이조 참의·수원 부사, 평안도와 함경도의 관찰사, 상주 목사 등을 거쳐1700년(숙종 26)충청도 관찰사, 뒤에 공조와 이조의 참판 등을 역임했으며, 연릉군을 습봉하였다.청백하기로 이름이 났고, 공주의 부용당 영당(影堂)에 제향 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희조(李喜朝) 1655(효종 6)∼1724(경종 4)

조선의 문신. 유학자. 자는 동보(同甫), 호는 지촌(芝村)·간암(艮菴), 시호는 문간(文簡), 부제학 단상(端相)의 아들. 송시열의 문인. 1680년(숙종 6)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건원릉 참봉이 되었으나 사퇴, 그 뒤 전설별검(典設別檢)을 지내고 의금부 도사·공조 좌랑을 거쳐 진천 현감 때 선정을 베풀었다. 1694년(숙종 20) 이후 인천 현감·서연관·지평·천안군수·장악원정 등을 역임, 1707년(숙종 33) 장령을 지내고 해주 목사로 있을 때 석담에 있는 이 이(李 珥)의 유적을 찾고 요금정(瑤琴亭)을 세웠다. 1717년 대사헌이 되고, 이듬해 이조 참판을 거쳐 찬선·좨주를 지내고, 1719년 다시 대사헌, 1721년(경종 1) 신임사화로 김창집 등 노론 4대신이 유배당할 때 영암에 유배, 철산에 이배 도중 정주에서 죽었다.후진교육에 힘쓰는 한편 많은 저서를 남겼다. 영조 즉위 후 유생들의 상소로 신원(伸寃)되고, 좌찬성에 추증, 인천의 학산서원, 평강의 산앙재영당(山仰齋影堂)에 제향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 식(李 拭) 1659(효종 10)∼1729(영조 5)

조선의 학자. 자는 경숙(敬淑), 호는 외재(畏齋), 제헌(齊憲)의 아들. 이 황(李 滉)·이 재(李 縡) 의 학통을 이어받아「사칠부화(四七附話)」를 저술, 숙종 때 천거로 3차례나 군읍(郡邑)을 다스렸고, 1722년(경종 2)과 1727년(영조 3) 각각 익위(翊衛)를 지냈다.  sign_left_18_15.gif

 

이해조(李海朝) 1660(현종 1)∼1711(숙종 37)

조선의 문신. 자는 자동(子東), 호는 명암(鳴巖), 우의정 정귀(廷龜)의 증손, 대제학 일상(一相)의 아들. 1689년(숙종 15) 인현왕후가 폐위되자 벼슬을 단념하고 있다가 1694년 왕후가 복위된 후 빙고 별검(氷庫 別檢)이 되고, 1702년 전주 판관으로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 했으며, 정언·부교리·집의·대제학을 역임하고 전라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조부 때부터 3대가 모두 대제학을 지냈으며, 시문에 능하여 김창습으로부터 천재라는 격찬을 받았다.  sign_left_18_15.gif

이해조 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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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을 빛낸 선조들

이정신(李正臣) 1660(현종 1)∼1727(영조 3)

 

조선의 문신. 자는 아언(我彦), 호는 송벽당(松蘗堂), 군수 봉조(鳳朝)의 아들. 어머니는 전라감사 홍주삼(洪柱三)의 딸이다. 박세당의 문인. 강릉 참봉을 지내고, 1699(숙종 25)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언·수찬·응교를 거쳐1711년(숙종 37) 동래 부사로 나갔다가 1716년 병조 참의가 되었다.             

소론으로 경종 초 도승지가 되어 노론을 탄핵했고, 병조 참판·경기도 관찰사를 지내다가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신임사화를 일으킨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 몰려 유배되었다. 글씨에 뛰어났다. sign_left_18_15.gif 

이정신 필적


 

 이하조(李賀朝) 1664(현종 5)∼1700(숙종 26)

조선의 학자. 자는 낙보(樂甫), 호는 삼수헌(三秀軒), 부제학 단상(端相)의 아들. 어머니는 우의정 이행원(李行遠)의 딸이다. 1682년(숙종 8)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대과를 단념. 송시열의 문인이 되어 학문을 닦았다. 1694년 음보(音譜)로 세자익위사 세마가 되어 부평 현감에 올랐으나 37에로 죽었다.  sign_left_18_15.gif

이만부(李萬敷) 1664(현종 5)∼1732(영조 8)

조선의 학자. 자는 중서(仲舒), 호는 식산(息山), 예조참판 옥(沃)의 아들. 어머니는 전주이씨 로 승지 동규(同揆)의 딸이다. 효성과 학행으로 천거되어 장릉 참봉·빙고 별제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 만년에는 역학(易學)에 전심했다. 서예에 뛰어났고 특히 고전팔분체(古篆八分體)에 일가를 이루었다.  sign_left_18_15.gif

이우신(李雨臣) 1670(현종 11)∼1744(영조 20)

조선의 문신. 자는 백열(伯說), 호는 십탄(十灘), 사복시 첨정 성조(成朝)의 아들. 어머니는 증찬성 조상정(趙相靜)의 딸이다. 이희조의 문인. 사산 감역(四山 監役)으로 초임, 정읍 현감·대구 판관·함양 군수·의성 현령·부평 부사 등을 역임하고 사직했다. 1728년(영조 4)의 이인좌의 난 후 서울에 있기를 싫어하여 가평에 이주, 1771년에 사복시 첨정이 되고, 1733년에 원성 현감, 1735년 첨지중추부사·오위장·돈령부 도정, 1736년 판결사를 거쳐 동지돈령부사·한성부 우윤 ·도총관 등을 지냈다. 이어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노령을 이유로 사퇴했다. 문장에 능하고 특히 변려문에 뛰어났다.   sign_left_18_15.gif

 

이술원(李述源) 1679(숙종 5)∼1728(영조 4)

조선의 의사. 자는 선숙(善叔). 호는 화촌(和村), 시호는 충강(忠剛), 김해부사 중길(重吉)의 손자. 거창 출신. 문무를 겸비했으며, 거창읍의 좌수로 있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이 일어 나 정세가 위급할 때 거창 현감 신정모로부터 현내의 군사권을 위임받았다. 이 때 안의현에서 이인좌의 일당인 정량이 반란을 일으키자 신정모에게 이를 토벌할 것을 요청, 현병(縣兵)을 출전시켰으나 병졸들이 흩어져 실패했다. 이어 정희량의 격문이 도착하자 신정모는 가족을 이끌고 도망했으나 그는 끝까지 부서를 지키던 중 적의 수색병을 만나 육박전으로 저항하다 피체, 정희량에게 끌려가 참한 형벌을 받고 죽었다. 그 후 아들 우방(遇芳)이 우영장 휘하에 종군하여 거창에서 난군을 토벌, 체포된 정희량의 목을 베었으며, 사복시 주부에 승진되었다. 영조는 어사 이종성을 보내어 술원을 제사 지내게 하고 충신 정문을 세웠다. 대사헌에 추증, 거창의 포충사에 제향 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술원 신도비


 

이양신(李亮臣) 1689)∼1739(영조 15)

조선의 문신. 초명는 종신(宗臣), 자는 원량(元亮), 희조(喜朝)의 아들. 어머니는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의 딸이다. 어유봉의 문인. 1715년(경종 1) 내시교관에 음보, 공조 좌랑으로서 1727년(영조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수찬·병조좌랑을 지냈다. 이 해 정미환국이 일어나자 소론의 영수 이광조의 12가지 죄목을 열거하여 탄핵했다가 곽산에 유배, 이어 경원에 이배 되었다가 곧 풀려 나왔다. 그 후 대사간을 거쳐 예조 참의를 지낸후 삼화부사(三和府使)가 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도익(李道翼) 1692(숙종 18)∼1762(영조 38)

조선의 문신. 자는 원명(原明). 호는 희구재(喜懼齋), 식(木式)의 아들. 음보로 삼가 현감(삼가 현감)이 된 주부에 이르렀다. 문명이 높았고,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정보(李鼎輔) 1693(숙종 19)∼1766(영조 42)

조선의 문신. 자는 사수(士受), 호는 삼주·보객정(三洲·報客亭), 시호는 문간(文簡),호조 참판 우신(雨臣)의 아들. 어머니는 승지 윤빈(尹彬)의 딸이다.1721년(경종 1) 진사시에 합격, 익릉 참봉이 되었으나 곧 사퇴, 1732년(영조 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에 등용되었다가 1736년 지평으로서 탕평책을 반대하는 시무십일조(時務十一條)를 올려 파직되었다.부수찬으로 다시 기용되어 부제학·대사간·대사성·승지를 역임, 1750년(영조 26) 다시 탕평책을 반대하여 인천부사로 좌천되었다. 그 후 우빈객을 거쳐 이조 판서에 올라 기로소에 들어갔으며,이어 양관 대제학·지성균관사·예조 판서 등을 역임,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글씨와 한시에 능하고 시조의 대가로서 78수의 작품을 남겼다.  sign_left_18_15.gif

이정보 초상 

이정보 필적


 

이 후(李 王厚) 1694(숙종 20)∼1761(영조 37)

조선의 문신. 자는 후옥(厚玉), 호는 구옹(구翁), 시호는 충헌(忠獻), 연안부원군 시백(時白)의 5대손, 참판 명희(命熙)의 아들. 1762년(영조 2) 생원시에 합격, 음보로 목사가 되었다가 175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 해 호남 균세사(均稅使)에 임명되어 세정(稅政) 작정(酌定)에 참여했다. 1755년 이조 참판으로 지경연사를 겸했다가 경상도 관찰사·대사간·승지·한성부 우윤·예조 참판·경기도 관찰사·형조 판서·병조 판서를 역임, 1758년 이조 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다. 이어 좌의정에 올라 세자부를 겸임 이 때 세자의 평양 원유사건에 대해 왕의 추궁을 받자 그 책임을 느끼고 이천보·민백상과 함께 음독 자결했다.   sign_left_18_15.gif

 

이천보(李天輔) 1698(숙종 24)∼1761(영조 37)

조선의 문신. 자는 의숙(宜叔), 호는 진암(晋庵), 시호는 문간(文簡), 군수 주신(舟臣)의 아들 생원시에 합격, 내시 교관으로 있다가, 1739년(영조 15)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정자가 되고, 교리·헌납·장평을 역임, 1749년(영조 25) 이조 참판에 올랐다.그 후 이조·병조의 판서를 거쳐 1752년 우의정에 승진, 이 해 좌의정이 되고, 1754년 영의정에 올랐다가 영돈령부사로 전임, 1761년 다시 영의정이 되었으나 장헌세자의 평양 원유사건에 인책, 음독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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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보 고가(古家)   

이천보 묘


  

이지억 초상

이지억(李之億) 1599(숙종 25)∼1770(영조 46)

 

조선의 문신. 자는 덕수(德수)·항승(恒承)·대수(大수), 호는 성헌(醒軒), 정랑 만성(萬成)의 아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 때 그 일당이라는 무고로 왕의 친국을 받았으나 조리있게 대답하여 그 비범함을 인정받아 무사했다. 1751년 (영조 2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주서가 되고 장령·우승지·형조 판서·공조 판서·예조 판서·한성부 판윤을 지내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영조의 총애를 받아 그의 승진은 모두 왕의 특명에 의해 이루어졌다.   sign_left_18_15.gif


 

이익보(李益輔) 1708(숙종 34)∼1767(영조 43)

조선의 문신. 자는 사겸(士謙), 참판 우신(雨臣)의 아들. 1739년(영조 15)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1741년 검열에 등용되고 이어 봉교·정언·교리·응교·사인·필선·문학을 역임했다.

1749년(영조 25) 대사간에 특진하고, 이듬해 충청도 관찰사로 나가 치적을 올렸으며, 1752년 좌승지에서 고성 군수가 되고, 이듬해 예조 참판에 올랐으나 아첨을 하지 않아 경상도 관찰사의 외직에 나갔다. 1756년(영조 32) 대사헌에 이어 1759년 병조 판서, 이듬해 수어사를 거쳐 이조 판서에 승진, 1761년 우빈객, 1763년 좌참찬이 되고, 앞서 민정중이 함경도 백성들의 편익을 위해 제정했던 상정제가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폐단이 생기에 되자, 왕명을 받고 홍계희와 함께 이를 개정했으며, 이듬해 판의급부를 거펴 추참찬이 되었다.    이어 예조 판서·회양부사·병조 판서 등을 거쳐 이조 판서·판돈령부사를 지내고, 1767년 좌참찬을 거쳐다시 이조 판서가 되어 죽었다.  sign_left_18_15.gif

 

이복원 초상

이복원(李福源) 1719(숙종 45)∼1792(정조 16)

조선의 문신, 자는 수지(綏之), 호는 쌍계(雙溪), 시호는 문정(文靖), 정귀(廷龜)의 6대손이며, 판서 철보(喆輔)의 아들. 음보로 양구 현감이 되고, 1754년(영조 30)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지평으로 등용되었다. 이어 헌납·교리를 거쳐1768년(영조 44) 대사간이 되고, 예조·병조·이조의 참판을 역임, 1772년(영조 48) 대사헌에 올랐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한성부 판윤·강화 유수를 역임, 대제학을 거쳐 신설된 규장각 제학을 지냈다. 1780년 이조·형조 판서가 되어 찬집 당상으로 「국조보감」의 편찬에 참여, 이듬해 우의정, 이어 좌의정에 이르렀다.

전후 세번 좌의정을 역임, 1790년 동지 겸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영중추부사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sign_left_18_15.gif


 

이민보(李敏輔) 1720(숙종 46)∼1799(정조 23)

조선의 문신. 자는 백눌(伯訥), 호는 상와(常窩)·풍서(豊墅), 시호는 정효(貞孝), 이조참판 희조(喜朝)의 손자. 진사시에 합격, 음보로 군수가 되고, 장악원정·동부승지·호조 참판을 역임하고, 1791년(정조 15) 공조 판서가 되어 장악원 제조를 겸했다. 그 후 형조 판서에 전임했다가 1796년 노인직으로 보국숭록대부의 위계에 올라 판돈령부사가 되었는데, 음보로 보국숭록대부에 오른 것은 황수신(黃守身) 이후 처음의 일이었다. 노론에 속했으며, 동서 분당 이후 당쟁을 노론의 처지에서 논한 「충역변(忠逆辯)」이란 저서가 있다.   sign_left_18_15.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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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원 초상

이성원(李性源) 1725(영조 1)∼1790(정조 14)

조선의 문신. 자는 선지(善之), 호는 호은(湖隱), 시호는 문숙(文肅), 좌의정 정귀(廷龜)의 후손, 정릉 참봉 득보(得輔)의 아들, 판서 길보(吉輔)에게 입양. 1754년(영조 30) 생원시에 합격, 의금부 도사에 음보되고, 1763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병조 좌랑 교리를 지냈다.

1778년(정조 2)경상도 관찰사, 1780년 선혜청 제조를 거쳐 이듬해 병조 판서, 1784년 평안도 관찰사, 1786년 규장각 직제학을 지내고, 이듬해 개성부 유수가 되었다.

1788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되고, 1789년(정조 13)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로 청나라에 가서 병사했다.   sign_left_18_15.gif


이의조(李宜朝

조선의 학자. 자는 맹종(孟宗), 호는 경호(鏡湖), 이 재·송능상의 문인.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심했다. 정조 때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후진 양성에 일생을 보냈다.   sign_left_18_15.gif

이지영(李祉永) 1730(영조 6)∼ ?

조선의 문신. 자는 유조(幼祚), 호는 임하(林下), 만회(萬恢)의 아들. 어머니는 정응상(鄭應尙)의 딸이다. 1775년(영조 51) 진사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3사(三司)의 벼슬을 거쳐, 1790년(정조 14) 수찬으로 동지의 서장관(西狀官)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참판에 이르렀다.

1792년 유성한의 죄를 논한 상소문이 조리에 맞고 명문이 었으므로 「시정기」와 「승정원일기」에 수록되었다. 1810년(순조 10) 호군으로서 「국조오례통편」을 찬진하여 호피를 하사받았다.  sign_left_18_15.gif 

이조원(李祖源) 1735(영조 11)∼1806(순조 6)

조선의 문신. 자는 현지(玄之), 호는 판교(板橋), 진보(鎭輔)의 아들. 1768년(영조 44)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1771년 정언이 되고, 1786년(정조 10) 의주 부윤, 1789년 이조 참의를 지냈다.  1798년 동지부사, 이듬해 동지사로 각각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좌참찬·한성부 판윤, 1800년(순조 즉위) 판의금 부사·우참찬, 이듬해 병조 판서 등을 역임하고, 1801년(순조 1)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에 대항하다가 유배, 1805년 풀려 나왔다. 글씨는 당대 명필로 이름났다. 죽은 뒤 관작이 복구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단전(李亶佃) ? ∼1790(정조 14)

조선의 문신. 서예가. 자는 운기(耘岐), 호는 필재(疋齋)·필한(疋漢)·인재(因齋), 평소에 패랭이를 쓰고 다녔으므로 이패랭이라 불리었다. 한미한 가문의 출신이었으나 특히 시(時)에 뛰어났고, 글씨를 잘 썼다.   sign_left_18_15.gif 

이지승(李祉承) 1736(영조 12)∼ ?

조선의 문신. 자는 경조(景祖), 참판 만회(萬恢)의 아들. 어머니는 정응상(鄭應尙)의 딸이다.1755년(영조 3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지평·시강·정언 등을 역임했다.  sign_left_18_15.gif 

 

이직보(李直輔) 1738(영조 14)∼1811(순조 11)

 

조선의 문신. 학자. 초명은 성보(城輔), 자는 유종(維宗), 호는 중주(中洲)·돈암(돈庵), 시호는 문경(문경), 정귀(廷龜)의 후손, 도신(度臣)의 아들. 김원행·김양행의 문인. 1784년(정조 8)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선공감 감역이 되었으나 사퇴, 이듬해 부수(副率)가 되었다.

1791년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서 의정부와 이조의 천거를 받아 경연관이 되었다.

그후 고성 군수·승지를 지내고, 1796년(정조 20) 김인후를 문묘(文廟)에 배향 할 것을 논의할 때 조헌과 김집도 같이 배향 할 것을 주장하다 한때 파직되었다. 이듬해 세자시강원 우유선(右諭善)이 되고, 공조 참판·도승지를 거쳐 우참찬에 올라 사직했다. 1800년 순조가 즉위하자 대사헌을 거쳐 좨주·이조 판서를 역임하고 무주에서 죽었다. 경사(經史)에 밝아 사림의 중망을 받았으며 평생을 청렴하게 살았다.   sign_left_18_15.gif 

이직보 필적


 

이문원(李文源) 1740(영조 16)∼1794(정조 18)

조선의 문신. 자는 사질(士質), 시호는 익헌(翼憲), 천보(天輔)의 아들. 1763년(영조 39) 진사가 되고, 음보로 호조 좌랑에 승진했다.

1771년(영조 4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교리·승지·대사간을 거쳐 1780년(정조 4) 동래 부사, 이듬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대사성·공조 판서를 역임, 1787년(정조 11) 지경연사·선혜청 제조를 거쳐 이조 판서에 승진, 이듬해 한덕후를 잘못 천거한 죄로 숙천부에 유배, 1789년 풀려 나와 형조 판서로 다시 기용되고, 병조 판서·이조 판서·판의금부사를 역임, 함경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시 예조·이조의 판서를 지냈다.   sign_left_18_15.gif 

 

이정운(李鼎運) 1743(영조 19)∼ ?

조선의 문신. 자는 공저(公著), 호는 오사(五沙), 시호는 정민(貞敏), 징대(徵大)의 아들. 신창 출신. 1769년(영조 45)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정언·지평 등을 거쳐 1781년(정조 5) 홍충도 암행어사가 되고, 1784년 사장관으로서 사은사 박명원 등과 함께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했다.

그후 승지 등을 지내다가 한 때 안치, 1796년 충청도 관찰사, 이듬해 함경도 관찰사, 1800년(순조 즉위) 현조 판서가 되었다. 문명(文名)이 있었다.   sign_left_18_15.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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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운 필적


 

이시수(李時秀) 1745(영조 21)∼1821(순조 12)

조선의 문신. 자는 치가(稚可), 호는 급건(及健), 시호는 충정(忠正), 좌의정 복원(福源)의 아들, 어머니는 안수곤(安壽坤)의 딸이다. 1771년(영조 47) 진사가 되고, 1773년(영조 4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780년(전조 4) 영남암행어사로서 탐관오리를 적발했다.

이듬해 교리·수사과·조부시정을 지내고, 1783년 춘천부사로서 영동구군(嶺東九郡) 선유사가 되어 흉작의 영동 지방민을 구휼(救恤)했다.

1787년 이조 참의, 1790년 황해도 관찰사, 1795년 호조 판서에 이어 예조 판서를 역임, 1799년 우의정에 오르고, 이듬해 내의원 도제조를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1804년(순조 4) 정순왕후가 재차 수렴청정하려고 할 때 대의를 들어 이를 반대, 한때 좌의정에서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동지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좌의정이 되었다.

1808년 영(嶺)중추부사가 되고, 12812년 진주(陳奏) 겸 주청사(奏請使)로서 재차 청나라에 다녀왔다. 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시수 필적


 

 

이익운(李益運) 1748(영조 24)∼1817(순조 17)

 

조선의 문신. 자는 계수(季受), 호는 학록(鶴鹿), 시호는 정숙(靖肅), 증 이조 판서 징대(徵大)의 아들. 1774년(영조 50)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1782년(정조 6) 정언이 되어 시파(時派)로서 채제공(蔡濟恭)을 변호하다 한 때 파직당했다.

1788년 교리가 되고, 승지·이조 참의를 거쳐 다시 승지가 되었다가 1794년 벽파의 논척으로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그 후 다시 기용되어 대사간 ·대사헌·공조판서·예조판서를 역임, 1801년(순조 1)경기도 관찰사로서 벽파에 의해 채제공의 관작이 추탈될 때 파직되어 고향에 돌아갔다. 1807년 복관되고 이듬해 지(知)중추부사에 보직, 이어 수원 부 유수·대사헌을 지내고 대호군으로 죽었다.   sign_left_18_15.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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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운 필적


 

이만수(李晩秀) 1752(영조 28)∼1820(순조 20)

조선의 문신. 자는 성중(成仲), 호는 극옹(극翁)·극원(극園), 시호는 문헌(文獻). 좌의정 복원(福源)의 아들. 어머니는 안수곤(安壽坤)의 딸이다. 1783년(정조 7) 사마시에 합격, 음보로 부사과를 지내고, 1789년(정조 1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1795년(정조 19) 대사성 겸 규장각 제학이 되었다. 이듬해 정리자(整理字) 만드는 일을 감독하고 1800년 예조 판서에 승진, 이어 공조 판서·수원 유수·판의금부사·홍문관·대제학·호조 판서를 거쳐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지방의 치안유지를 잘못했다는 죄로 이듬해 파직, 경주에 유배되었다가 곧 용서되어 수원 유수로 나가 임지에서 죽었다. 문학에 뛰어났고 특히 변려문(변儷文)에 특출했다. 글씨에도 능했다.  sign_left_18_15.gif 

이시원(李始源) 1753(영조 29)∼1809(순조 9)

조선의 문신. 자는 경심(景沈), 시호는 문간(文簡), 대사간 양신(亮臣)의 손자 형조판서 민보(敏輔)의 아들. 1777년(정조 1) 사마시에 합격, 호조 좌랑에 음보, 1795년(정조 19)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규장각 직각·교리를 거쳐 이듬해 안악 군수를 지내고, 대사성에 승진, 1801년(순조 1)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규장각 직제학이 되고 1805년 홍문관 부제학으로 사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와 다음해 형조 판서·대사헌·이조판서 등을 역임, 1808년 참찬을 지낸 후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다음해 병조 판서 겸 예문관 제학이 되어 영희전(永禧殿)에 제사를 지내고 들어오다 급사했다. 청렴했으며 문장에 능했고, 주자학에도 통했다.   sign_left_18_15.gif 

이조원(李肇源) 1758(영조 34)∼1832(순조 32)

조선의 문신. 자는 경혼(景混), 호는 옥호(玉壺), 시호는 문경(文景), 판서 민보(敏輔)의 아들. 1792년 (정조 16) 식년문과에 장원, 이듬해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으며 정언·지평·사간 등을 거쳐 1795년 대사간이 되었다.

1801년(순조 1) 이조 참의·승지, 1814년 홍문관 제학, 이듬해 한성부 판윤· 이조 판서를 지내고 1816년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좌빈객·평안도 관찰사·예문관 제학, 1820년 판돈령부사를 거쳐 이듬해 진하사(進賀使)로 청나라에 갔다. 귀국 후 각 조의 판서를 역임, 1827년 호조 판서 겸 판의금부사를 역임 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 해 10월 앞서 1814년 왕의 질환이 위급했을 때 반역을 도모했다는 탄핵을 받고 흑산도에 위리안치, 후에 사형되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전각에 뛰어났다. 1835년(헌종 1) 신원(伸寃)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곤수(李崑秀) 1762(영조 38)∼1788(정조 12)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성서(星瑞), 호는 수재(壽齋). 아버지는 판서 성원(性源)이며, 어머니는 고령신씨(高靈申氏)로 진사 호(護)의 딸이다. 종숙 복원(福源)에게 수업하였다.
21세 때인 1782년(정조 6) 성균관 유생으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을 거쳐 규장각대교가 되었다.
1784년 시강원설서가 되었고, 1787년에는 황해·평안 양도의 어사로 나가 민정을 살피고 시정책을 건의하였다. 이해 9월 함경도관찰사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다가 병으로 요절하였다. 문재(文才)가 뛰어나 정조에게 남다른 총애를 받았으며, 호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여러 편의 응제문(應製文)과 시문을 남겼으며, 경서(經書)에 대한 강의(講義) 6편과 직제(職制)·예악(禮樂)·학문(學問) 등에 관한 정조의 말을 기록한 《일득성어록 日得聖語錄》 등의 저술을 남겼다. 윤행임(尹行任)과 친교가 두터웠다.
저서로는 《수재유고》 8권 3책이 있다.  sign_left_18_15.gif 

이익연(李翼延) 1762(영조 38)∼1815(순조 15)

조선의 서화가. 자는 방수(방수), 호는 행좌(杏左), 지순(之洵)의 아들. 초시에 급제했으나 회시(會試)에 낙방한 뒤부터 문과를 단념, 산수를 찾아다니며 서화를 연마했다

그림은 꽃과 과일에 능했고, 글씨는 전서(篆書)를 잘 썼다.  sign_left_18_15.gif 

 

이존수(李存秀) 1772(영조 48)∼1829(순조 29)

 조선의 문신. 자는 성로(性老), 호는 금석(金石)·연유(蓮遊), 시호는 문익(文翼), 판서 문원(文源)의 아들. 어머니는 이조판서 심수(沈수)의 딸이다. 1794년(정조 1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자(正字)가 되고, 1800년 겸설서·대교·수찬을 거쳐 1802년(순조 2) 검상·직각, 이듬해 황해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1808년 이조 참의가 되었다. 1810년 부제학·규장각 직제학·전라도 관찰사·이조 참판, 1812년 비변사 제조를 거쳐 경기도 관찰사를 지내고, 1814년(순조 14)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김종한 등 천주교인을 처형했다. 1818년 좌부빈객·좌참찬·한성부 판윤, 이듬해 대사헌, 1820년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 형조 판서·호조 판서·우참찬·병조 판서·판의금부사를 지냈다. 1827년 우의정을 거쳐 1829년 좌의정이 되었고, 시문(詩文)에 능했다.   sign_left_18_15.gif 

이존수 필적


 

이봉수(李鳳秀) 1778(정조 2)∼1852(철종 3)

조선의 학자·문신. 자는 자강(子崗), 호는 대은(大隱)·금계(襟溪), 판서 시원(始源)의 아들. 어머니는 청풍김씨로 현감 안묵(安默)의 딸이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정조로부터 「근사록(近思錄)」을 하사받아 권학의 격려를 받았다.

종조부 직보와 임노·오희상 등에게 수학, 1805년(순조 5) 생원이 되고, 1812년 세마·감찰·의빈부 도사·의령 현감·공주 판관을 역임, 이어 의성현령을 지내고 낙향했다. 그후 돈령부 판관·장악원정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sign_left_18_15.gif 

이지수(李趾秀) 1779(정조 3)∼1842(헌종 8)

조선의 문신. 자는 계린(季麟), 호는 중산재(重山齋), 참봉 명원(命源)의 아들. 옥천 출신. 180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181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3사의 벼슬을 거쳐 서연관이 되어 세자에게 학문을 전강했고, 부승지를 지낸 후 1840년(헌종 6) 회양부사가 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약우(李若愚) 1782(정조 6)∼1860(철종 11)

조선의 문신. 자는 경용(景容), 호는 호거(壺居), 시호는 문간(文簡), 도정 낙수(洛秀)의 아들. 대교 곤수(崑秀)에게 입양. 1810년(순조 10) 진사시에 합격, 천거를 받아 강릉 참봉이 되고, 부수로서 1812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 해 홍문관에 보직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1823년 통정대부에 승진하고, 이듬해 대사성을 거쳐, 1826년 병조 참의, 1835년(헌종 1) 대사헌에 승진되어, 이조·병조·형조·공조·호조의 참의를 역임했다. 1848년 예조 판서에 승진, 「삼조보감(三朝寶鑑)」 찬집당상(纂輯堂上)을 겸하고, 1841년 동지사로 명 나라에 다녀와서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그후 청녕군에 봉해지고 공조·이조의 판서, 판의금부사를 역임, 헌종이 죽자 왕의 시장 제술관이 되고, 1852년(철종 3) 예조와 공조의 판서, 1856년 형조 판서가 되었다. 문장에 뛰어나 그의 상소문은 명문으로 유명했고, 역학·산수에도 정통했다.  sign_left_18_15.gif 

이기수(李驥秀) 1783(정조 7)∼1816(순조 16)

조선의 문신. 자는 자야(子野), 호는 원천(原泉), 태원(太源)의 아들. 1812년(순조 1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벼슬이 문학에 이르렀고, 문장이 뛰어났다.  sign_left_18_15.gif 

이가우(李嘉愚) 1783(정조 7)∼1852(철종 3)

조선의 문신. 자는 윤빈(允賓), 시호는 문정(文貞), 군수 전수(田秀)의 아들. 1816년(순조 16)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검열을 거쳐 1826년 직각(直閣)이 되고, 1839년(헌종 5)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함경도 관찰사를 거쳐 1842년 공조 판서, 1850년(철종 1) 판의금부사를 지내고, 이조 판서에 이르렀다.  sign_left_18_15.gif 

이종우(李鍾愚) 1801(순조 1)∼ ?

조선의 문신·서화가. 자는 대여(大汝), 호는 석농(石農), 시호는 문헌(文憲), 조원(肇遠)의 아들. 1851년(철종 2) 홍문관에 등용되고 1853년 부사과·예방 승지, 1856년 강원도 관찰사, 1858년에 형조와 공조의 판서를 ㄹ역임, 1859년 우참찬·이조 판서를 거쳐 이듬해 대사헌·판의금부사가 되었다. 이어 병조 판서가 되고 1862년(철종 130 함경도 관찰사로 있다가 함흥 민란의 책임을 지고 파직되었다.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으며 특히 그의 글씨는 석농체라 하여 독특한 필체를 이루었다.   sign_left_18_15.gif 

이교익(李敎翼) 1807(순조 7)∼ ?

조선의 화가. 자는 사문(士文), 호는 송석(松石), 산수와 화접을 잘 그렸다.  sign_left_18_15.gif 

이일우(李佾愚) 1821(순조 21)∼1874(고종 11)

조선의 무신. 자는 주팔(周八), 경상도 관찰사 재수(在秀)의 아들. 1843년(헌종 9) 무재(武才)를 인정한 조병귀가 추천하여 무과에 응시케 했으나 불응하자 왕의 특명으로 시험을 거치지 않고 급제케 했다. 1847년 우위장이 되고, 1850년(철종 1) 가덕진 첨절제사를 거쳐 영원(寧遠) 군수가 되어 선치했다. 1857년 죽산 부사를 지낸 뒤 면천에 은거했고,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조연(李祖淵) 1843(헌종 9)∼1884(고종 11)

조선의 문신. 자는 경집(景集), 호는 완서(翫西), 시호는 충정(忠貞), 용규(用奎)의 아들. 1880년(고종 19) 감찰로서 수신사 김홍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오고, 이듬해 다시 조병호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 왔다. 1882년(고종 1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 해 고선관으로 청나라에 가서 영선사를 따라 천진에 간 유학생·공장들의 실정을 조사했고, 이어 통리기무아문 주사(統理機務衙門 主事)로 사은 겸 진주사 조영하의 종사관이 되어 청나라에 가서 대원군 수금에 대한 간사를 표하고 귀국했다. 이 해 청나라 제도를 본떠 군제개혁이 단행되자 친군영 좌감독이 되고 이어 참의교섭통상사무·기계국총판·혜상공국 총판·이조 참의·함경북도 병마절도사를 역임, 1884년(고종 21) 협판군국사무 겸 기계국 총판으로 있다가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사대당의 거물로 지목되어 독립당 행동대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조연 필적


 

이현섭(李鉉燮) 1844(헌종 10)∼1910(융희 4)

조선의 지사. 자는 서규(瑞圭), 호는 우헌(愚軒), 진(軫)의 후손. 경북 군위 출신. 1885년(고종 22) 성균 생원의 되었으나 다음해 평안도 철산 사건으로 유기호·이만응·이명연 등 영남 명유들이 유배될 때 형 현무와 함께 견책을 받았다. 1895년(고종 32) 명성황후가 살해되자 경자 경북 예안 양평리에 은거했다. 1910년(융희 4) 한일합방의 소식을 듣고 단식을 결행하다가 음독 자결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도재(李道宰) 1848(헌종 14)∼1909(융희 3)

조선의 문신. 자는 성일(聖一), 호는 심재(心齋), 시호는 문정(文貞), 명익(溟翼)의 아들. 건익(健翼)에게 입양. 1882년(고종 19) 생원으로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886년 호군으로 재직 중 사대당에 의해 고금도에 유배 되었다가 1894년 갑오경장으로 개화당 정부가 수립되자 풀려 나왔다. 이 해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 지휘자 전봉준을 생포하여 서울로 압송했으며, 이듬해 지방관제 개혁 때 전주부 관찰사가 되었다. 이어 군부 대신을 거쳐 학부 대신이 되었으나 단발령을 반대하고 사직했다. 후에 다시 학부 대신에 임명되어 1898년(광무 2) 지석영의 청을 들어 한성의학교의 설치를 인가,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의학 교육기관을 세우게 했다. 그후 내부 대신을 거쳐 시종원경(侍從院卿)에 이르렀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sign_left_18_15.gif 

이 설(李 설) 1850(철종 1)∼1911

조선의 의사, 자는 순명(舜命), 호는 복암(復庵), 조익(祖益)의 아들. 조겸(祖謙)에게 입양, 충청도 홍성 출신. 1889(고종 26) 생원으로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수찬에 등용, 이어 수찬·교리·정언을 지내고 지평으로 동·서학 교수와 전시 대독관(殿試對讀官)을 겸했다. 1894년 응교·사복시정에 올랐고, 1895년 도부승지·우부승지에 이르렀으나 민비의 피살 사건을 한탄, 사직하고 낙향, 목사 이승우와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피체, 특지로 석방되었다. 그 후에 다시 토왜(討倭)의 격문을 돌렸고 내부 대신 이용태의 주선으로 안주 군수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했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매국 5적신의 처형을 상소하고 경무청에 붙잡혔다가 1910년 석방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병화(李炳華) 1869(고종 6)∼1942

유학자. 자는 계초(啓初), 호는 눌운(訥雲)·어산(於山), 정기(鼎基)의 손자. 음보로 감동관(監董官)을 지냈으며 한학에 조예가 깊었다. 글씨는 안진경체를 잘 썼다. 죽은 뒤 유림장이 겨행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도영(李道榮) 1884(고종 21)∼1933년

서화가. 자는 중일(仲一), 호는 관재(貫齋)·면소(면巢)·벽허자(碧虛子), 서울 출신. 안중식·조석진의 문인. 글씨는 예서·행서에 능했고, 그림은 특히 산수·인물·화조·절지·기명 등에 뛰어났다. 1918년 조석진·안중식·김응원·오세창 등과 함께 서화협회를 조직, 조선 미술전람회의 동양화부 심사위원을 지냈다.   sign_left_18_15.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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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영 기명도

이도영 세검정

이도영 인물화


 

이동녕(李東寧) 1869(고종 6)∼1940년

호는 석오(石吾), 충남 천안 출신으로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자 상동청년회에 가입하여 계몽운동에 앞장섰으며 이듬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폐기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이 해 북간도에 가서 이상설·여준(呂準) 등과 용정에서 서전의숙을 설립하여 교포들의 교육에 힘썼다.

1907년 귀국하여 안창호·김구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였으며 청년학우회 총무가 되었고 1910년에는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여 독립군 양성과 교포의 교육에 힘썼다. 1911년 블라디보스톡에 가서 권업회(權業會)를 조직하여 「해조신문(海朝新聞)」을 발행하였으며 1913년에는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장 내무총장이 되었고 1921년 국무총리 서리를 역임 하던 중 파벌싸움으로 임시정부가 위기에 놓이자 1922년 에는 안창호·여운형 등과 시사책진회를 조직하여 단결을 촉진했다. 1924년 재차 국무총리가 되어 군무총장을 겸했고 이어 대통령 대리가 되었으며 26년 국무령이 되었다. 1928년 한국독립당 이사장에 피선되었고 1929년에는 재차 의정원 의장이 되었으며,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여 당수가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陳線) 결성에 참가하여 항일전에 투신했다. 임시정부를 이끌고 장사(長沙)로 이전했다가 쓰촨성(四川省)에서 병사하니 임시정부 국장으로 장례가 거행되고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동녕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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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을 빛낸 선조들


이번(李蕃) : 1641(인조 19)∼1708(숙종 34)

조선 후기의 의인(醫人). 자는 중거(仲擧). 식(植)의 손자이다.
그는 당시 유행하였던 두창(痘瘡)에 대해 의인으로 경험한 바를 종합하여 1672년(현종 13)에 용산요두편《龍山療痘篇》(1권)을 저술하였다.  sign_left_18_15.gif


이경엄(李景嚴) : 1579(선조 12)∼1652(효종 3)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자릉(子陵), 호는 현기(玄磯). 연릉부원군(延陵府院君) 호민(好閔)의 아들이다.
1610년(광해군 2)에 현감으로서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17년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는 데 대하여 백관(百官)으로부터 의견을 수렴하였는데, 현감으로 있던 그는 “이 일은 중대하여 소관들의 의논할 바가 아니니 의정부에서 잘 처리할 일이다.”라고 하였다.
1624년(인조 2)에 배천군수로 있으면서 불근(不謹)하다 하여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며, 1628년 가례(嘉禮)때 사옹원정(司饔院正)으로 있던 중 가자(加資)를 받았으나, 얼마 뒤 가도(#가15島)의 문안사(問安使)로서 까닭없이 지체하여 파직되었다.
1647년 연천군(延川君)으로 있으면서 수령으로 천거한 자가 적합하지 못하다는 탄핵을 사간원으로부터 받기도 하였다.
1649년(효종 즉위년)에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sign_left_18_15.gif


이경현(李景賢) : 1579(선조 12)∼1632(인조 1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명지(明之). 아버지는 부사 상민(尙閔)이며, 어머니는 판관 이학수(李鶴壽)의 딸이다.
7세 때 독서를 하였고, 1610년(광해군 2) 세마(洗馬)가 되었다.
1612년에 전옥주부(典獄主簿)가 되고, 곧 전중도감(殿中都監)을 거쳐 낭청이 되었다.
1617년에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교가 되고, 이어서 전적을 거쳐 형조정랑이 되었다가, 직강으로 옮겼다.
1623년(인조 1) 흥해군수로 나갔다가, 그곳 이민들이 소요를 일으키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이듬해에 공조좌랑이 되었고, 1625년에 관서에 가서 북쪽 여진의 사신인 모도사(毛都司)를 접반(接伴)하였다. 형조정랑을 거쳐서 고양군수가 되고, 1627년에 수부랑첨정(水部郎僉正)을 거쳐 상례원통례가 되었다.
이듬해 정랑이 되었다가 군기시정(軍器寺正)으로 승진하고 이어서 군자감정(軍資監正)이 되었다. 그해 고원군수로 나갔다가, 풍토병에 걸려 임지에서 죽었다. 도승지에 증직되었다. 사람됨이 폭넓고 천진하였다. 조경(趙絅)이 묘갈명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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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곤(李坤) : 1462(세조 8)∼1524(중종 18)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정(子靜). 인문(仁文)의 아들이다.
1492년(성종 2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병조좌랑·헌납을 지냈으며,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윤은보(尹殷輔)와 함께 장(杖) 70의 처벌을 받았다.
1506년(중종 1) 9월 중종반정에 참여한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연성군(延城君)으로 봉하여졌다.
1511년 첨지중추부사로 관압사(管押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후 밀양부사로 외보(外補)되었다.
이때 사헌부·사간원으로부터 밀양과 같은 큰 읍을 다스림에 부적합한 인물로  체직(遞職)을 청하는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519년 대사헌 조광조(趙光祖), 대사간 이성동(李成童) 등의 정국공신에 대한 삭훈 조치로 같은해 11월 삭록되었다. 기묘사화 이후 다시 철원부사·여주목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1524년 2월 가노(家奴)에 의하여 독살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구인(李求仁) : 1524(중종 19)∼1569(선조 2)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면지(勉之). 사헌부감찰을 지낸 구령(九齡)의 손자로, 생원 계준(繼俊)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신흠(金愼欽)의 딸이다.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5년(명종 10)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정자가 되고 저작·박사·성균관전적·형조정랑·종부시첨정을 역임하였으며, 외직으로는 함경도평사·전라도도사·곤양군수(昆陽郡守)·울산군수를 지냈다.
춘추관기주관·춘추관편수관으로 《명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sign_left_18_15.gif


이도영(李道榮){2} : 1913∼1973

실업가·육영사업가. 호는 문헌(文軒). 충청북도 청원출생. 아버지는 예승(禮承)이며 어머니는 은진송씨(恩津宋氏)이다.
1932년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193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수료하였으며, 1938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1956년 홍익대학을 인수하고 학교법인 홍익학원을 설립하였다.
1962년 홍익공예고등전문학교, 1965년 홍익국민학교, 1968년 홍익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1970년 성암국민학교와 성북중고등학교를 인수하고 1971년 수도공과대학을 인수하였다. 같은해 홍익대학을 종합대학으로 발전시켰으며, 1972년 학교법인 계원학원(繼遠學園)을 홍익학원에 흡수, 합병시켰다.
1950년 충일장학회(忠逸奬學會)를 설립하고, 1969년 문헌장학회로 개명하였다.
1950년 제2대 민의원에 당선되고 1951년 헌법위원회 위원을 역임하였으며, 1972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피선되었다.
1946년 이후 일신산업주식회사 사장, 남한흥산주식회사 사장, 한국원양어업주식회사 사장 등을 역임하였고, 1969년 홍익개발주식회사 사장, 1970년 일신동화통신기주식회사 사장과 일신동화전자주식회사 사장 등을 지냈다.
1955년 한국무역협회 이사, 1957년 남한제지주식회사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1962년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1963년 한국생산성본부 부회장, 대한광업협회 부회장, 1964년 한국수출산업공단 이사,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 1965년 한국제지공업연합회 이사 등을 각각 역임하였다.
1953년 충청일보사 사장, 1971년 주식회사 청주문화방송 사장을 역임하였다.
1970년 대한체육회장상(체육진흥공로), 같은해 대통령표창(수출진흥공로), 1972년 문교부장관상 등을 받았다. 그의 경영이념은 신용제일주의이다.
저서로 《사학의 진로》가 1974년 홍익대학교 출판국에서 유고집으로 출판되었다. 〈黃明水〉  sign_left_18_15.gif

이돈서(李惇敍) : 1599(선조 32)∼1637(인조 15)

병자호란 때의 순절인(殉節人). 자는 자륜(子倫), 호는 만사(晩沙). 부호군 기설(基卨)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참봉 허진(許#진26)의 딸이다.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선산으로 피난하였다.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성으로 들어갔다가, 그 성이 적에게 함락되자 마니산(摩尼山)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적병에게 잡혔으나 끝내 굽히지 않으면서, 함께 잡힌 유옹(柳雍)과 함께 절의를 지키기 위하여 죽기를 맹세하였다. 적에게 끌려가다가 진강리(鎭江里)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1824년(순조 24)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강화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sign_left_18_15.gif


이만교(李萬敎) : 1851(철종 2)∼?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치억(稚億). 아버지는 현령 원흥(源興)이며, 어머니는 안익중(安翊重)의 딸이다.
1872년(고종 9)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록(官錄)·도당록(都堂錄)에 오르고, 1879년에 사은 겸 동지정사(謝恩兼冬至正使)인 윤자승(尹滋承)의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1885년에 전라좌도암행어사가 되었지만, 능주목사(綾州牧使) 김익성(金益成)의 국상이 실제와 많이 틀린다고 하여 중추(重推)를 당하였다.
그러나 2년 뒤에 다시 전라좌도암행어사로 나가 흥양(興陽)의 진결(陳結)폐단을 바로잡기도 하였다.
그뒤 내무부참의·대사간·이조참의를 순탄하게 천임하였지만, 신식제도에 어둡거나 불필요하다고 판단된 관리들이 대량 퇴직당한 갑오경장 이후에는 한동안 등용되지 못하였다.
수구파가 득세하였던 1898년 중추원의관이 된 뒤 서리대신사무·비서승 겸 장례를 역임하였고, 또 함경도관찰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1899년 정종대왕을 추상존호(追上尊號)할 때 채제공(蔡濟恭)과 이이장(李#이23章)을 종묘에 배향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sign_left_18_15.gif


이만영(李萬榮) : 1679(숙종 5)∼?

조선 후기의 문신. 충청도 충주출신. 정(#정40)의 아들이다.
1725년(영조 1)유학으로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관직이 장령에 이르렀으나 이조의 관리를 모욕한 죄로 파직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만유(李萬維) : 1674(현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지국(持國). 옥(沃)의 아들이다.
1705년(숙종 31)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28년(영조 4)에 울산부사로 재임할 때 어사 박문수(朴文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사헌부집의에 제수되었다.
이때 경연의 연혁을 글로 써서 올렸으며, 《숙종보감 肅宗寶鑑》에 방례(邦禮)의 한 항목을 재록(載錄)할 것을 요청하였다.
같은해 홍문관의 교리·수찬의 후보자를 천거하였는데, 11명 중의 한 사람으로 발탁되어 부수찬에 임명되었다. 연잉군(延#잉03君:후의 영조)의 왕세제책봉을 반대한 소론에 가담한
혐의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는데, 1732년 감형되어 출륙(出陸)이 허용되었을 뿐 그의 석방을 요청한 상소는 영조로부터 거부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만유초상



이만유 검

이면우(李勉愚) : 1812(순조 12)∼1878(고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자는 성여(成汝), 호는 유형(維馨).
아버지는 이조판서에 증직된 봉수(鳳秀)이며, 어머니는 청송심씨(靑松沈氏)로 헌(獻)의 딸이다.
작은아버지 학수(鶴秀)에게 입양되었다. 가학(家學)을 이어 경사(經史)를 편력하고,  시문에 능통하였다.
1836년(헌종 2)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사과·선전관 등 임시직으로 있다가, 생가의 부모가 죽고 양부가 유배생활을 하는 등 집안의 환란이 계속되자 집에 돌아와 치가(治家)에 힘썼다.
그뒤 1850년(철종 1) 원릉참봉(元陵參奉)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사옹원과 선공감(繕工監)의 봉사, 전생서직장(典牲署直長)·한성부주부·의금부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1857년 홍문관교리·사간원사간 등을 거쳐 사복시정이 되었으며, 다시 응교·수찬·서학교수(西學敎授) 등을 지냈다.
또한, 묘호도감(廟號都監)의 도청(都廳)이 되었다가 통정대부에 승자(陞資)되어 호조참의가 되고, 다시 승정원우부승지가 되었다.
1858년 외직으로 춘천부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다시 내직인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고, 그뒤 형조·이조·호조 참의를 역임하였다.
1865년(고종 2)가족을 데리고 지산(芝山)으로 내려가 은거하였으나, 1867년 다시 좌승지에 임명되고 가선대부에 승자되어 예조참판에 승진, 그뒤 동지경연사·동지춘추관사·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 등을 지냈다.
1870년 이후부터는 지산에 내려가 은거하였다. 관직에 있는 동안에는 삼정의 문란 등 시폐를 개선하기에 힘썼다.
또한,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동서고금의 인물을 독자적인 안목에서 평가한 글을 많이 남겼다.
저서로는 《유형유고》 6권 3책이 있다.  sign_left_18_15.gif


이명재(李命宰) : 1838(헌종 4)∼1895(고종 32)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자는 성의(聖意), 호는 금어(琴漁). 아버지는 만수(晩秀)이며, 어머니는 풍산홍씨(豊山洪氏)로 양호(良浩)의 딸이다. 큰아버지 공익(公翼)에게 입양되었으며, 생부에게 수학하였다.
1853년(철종 4)생원시에 장원하였고, 1874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가주서(假注書)가 되었다.
그뒤 성균관전적·동학교수(東學敎授) · 부교리 · 병조정랑 · 영돈녕 · 동부승지 · 이조참의 · 예조참판·대사헌 등을 지내다가 몸이 쇠약해지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 강호에 놀며 자연을 벗삼아 한가로운 만년을 보냈다.
경전을 근본으로 삼고 제자백가서를 두루 통독하였으며, 덕치(德治)와 인정(仁政)을 베풀어 위로 군주를 보필하고, 조정에는 어질고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하여 국민에게 최대한의 복리를 증진시켜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임을 주장하였다.
노년에는 금호(琴湖)가에 살면서 시와 노래로 소일하고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그 중 국문으로 저작된 〈금호어인가 琴湖漁人歌〉와 〈단경삼첩 短脛三疊〉 등은 고전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저서로는 《금어유고》가 있다.  sign_left_18_15.gif

 

이병기(李秉岐) : 1891(고종 28)∼1968

국문학자·시조시인. 호는 가람(嘉藍). 전라북도 익산출신. 변호사 채(採)의 큰아들이다.
1898년부터 고향의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당대 중국의 사상가 량치챠오(梁啓超)의《음빙실문집 飮氷室文集》을 읽고 신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한다.
1910년 전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13년 관립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재학중인1912년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周時經)으로부터 조선어문법을 배웠다.
1913년부터 남양(南陽)·전주제2·여산(礪山) 등의 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부터 국어국문학 및 국사에 관한 문헌을 수집하는 한편, 시조를 중심으로 시가문학을 연구, 창작하였다.
이때부터 수집한 서책은 뒷날 방대한 장서를 이루었는데, 말년에 서울대학교에 기증하여 중앙도서관에 ‘가람문고’가 설치되었다.
1921년 권덕규(權悳奎)·임경재(任暻宰) 등과 함께 조선어문연구회를 발기, 조직하여 간사의 일을 보았다.
1922년부터 동광고등보통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시조에 뜻을  두고, 1926년 ‘시조회(時調會)’를 발기하였고, 1928년 이를 ‘가요연구회(歌謠硏究會)’로 개칭하여 조직을 확장하면서 시조 혁신을 제창하는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1930년 조선어철자법 제정위원이 되었고, 연희전문학교·보성전문학교의 강사를 겸하면서 조선문학을 강의하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한때 귀향하였다가 광복이 되자 상경하여 군정청 편수관을 지냈으며, 1946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 및 각 대학 강사로 동분서주하였다.
6·25를 만나 1951년부터 전라북도 전시연합대학 교수, 전북대학교 문리대학장을 지내다 1956년 정년퇴임하였다.
1957년 학술원 추천회원을 거쳐 1960년 학술원 임명회원이 되었다.
그는 스스로 술복·문복·제자복이 있는 ‘삼복지인(三福之人)’이라고 자처할 만큼 술과 시와 제자를 사랑한 훈훈한 인간미의 소유자였다.
그가 처음으로 문학작품을 활자화한 것은 1920년 9월 《공제 共濟》 1호에 발표한〈수레 뒤에서〉였는데 이것은 일종의 산문시와 같은 것이었다.
그가 시조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시조부흥론이 일기 시작한 1924년 무렵부터였는데, 이 시기의 그의 시조는 다분히 의고조(擬古調)를 띠고 있었으며 그가 시조 혁신에 자각을 가지게 된 것은 1926년 무렵이었다.
〈시조란 무엇인가〉(동아일보, 1926.11.24. ∼12.13.)·〈율격(律格)과 시조〉(동아일보, 1928.11.28. ∼12.1.)·〈시조원류론 時調源流論〉(新生, 1929.1. ∼5.)·〈시조는 창(唱)이냐 작(作) 이냐〉(新民, 1930.1.)·〈시조는 혁신하자〉(동아일보, 1932.1.23. ∼2.4.) ·〈시조의 발생과 가곡과의 구분〉(진단학보, 1934.11.) 등 20여편의 시조론을 잇따라 발표한바, 그 중에서 시조 혁신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기념비적 논문은 〈시조는 혁신하자〉였다.
이무렵 《동아일보》의 시조모집 ‘고선(考選)’을 통하여 신인지도에 힘썼고, 1939년부터는 《문장 文章》에 조남령(曺南嶺)·오신혜(吳信惠)·김상옥(金相沃)·장응두(張應斗)·이호우(李鎬雨) 등 우수한 신인들을 추천하여 시조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는 시조와 현대시를 동질로 보고 시조창(時調唱)으로부터의 분리, 시어의 조탁과 관념의 형상화, 연작(連作) 등을 주장하여 시조 혁신을 선도하면서 그 이론을 실천하여 1939년《가람시조집 嘉藍時調集》(문장사)을 출간하였다. 여기에 수록된 그의 전기 시조들은 〈난초〉로 대표되는 자연 관조와 〈젖〉에 나타난 인정물 등 순수서정 일변도였다.
그뒤 옥중작인 〈홍원저조 洪原低調〉등에서 사회성이 다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의 후기작은 6·25사변의 격동을 겪으면서 시작되어 사회적 관심이 더욱 뚜렷해졌다.
〈탱자울〉 등에서 보는 것과 같은 비리의 고발, 권력의 횡포에 대한 저항이 후기의 특징으로 꼽히는데, 이것은 현대시조의 새로운 일면을 개척한 것이었다.
그의 주된 공적은 시조에서 이루어졌지만 서지학(書誌學)과 국문학분야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묻혀 있던 고전작품들, 〈한중록〉·〈인현왕후전〉·〈요로원야화기 要路院夜話記〉·〈춘향가〉를 비롯한 신재효(申在孝)의 ‘극가(劇歌)’ 즉 판소리 등을 발굴, 소개한 공로는 크다. 그는 이밖에 많은 수필을 썼고, 특히 평생동안 극명하게 쓴 일기는 놀랄만하다.주요저서로는 《가람시조집》을 비롯하여 《국문학개론》·《국문학전사》·《가람문선》등이 있다.
전라북도 예총장(藝總葬)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1960년 학술원 공로상을 수상하였으며, 1962년 문화포장을 받았다. 전라북도 전주시 다가공원에 시비가 세워졌다.  sign_left_18_15.gif

이병기 초상




이병기 생가


                         


이순탁(李順鐸) : 1897∼?

경제학자.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효정(曉亭). 경기도출신.1922년에 일본 경도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1923년 연희전문학교 상학과과장을 역임하였으며, 1933년 연희전문학교 봉직 만 10년의 안식일 휴가(1년)로 세계각국을 시찰하였다.
1933년의 이른바 연전상과사건으로 3년의 옥고생활을 하였다.
1945년 미군정부 입법회의위원, 1946년 연희대학교 초대 상경대학장, 1948년 대한민국정부기획처 초대처장, 1949년 대한금융조합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0년 6·25동란으로 납북되었다.
논문으로는 〈자본주의 경제조직에 관한 일고찰〉·〈노동운동과 소작운동〉·〈조선인의 결혼연령 추이〉등이 있다.  sign_left_18_15.gif


이시익(李時益) : 1567(명종 22)∼1642(인조 20)

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성흠(聖欽), 호는 죽재(竹齋). 찰방 빈(賓)의 아들로, 귀(貴)의 종질이며, 석형(石亨)의 6세손이다. 천성이 지효(至孝)하고 총민하여 어려서부터 글배우기를 좋아하였다.
15∼16세에 경전제가(經傳諸家)에 박통할 정도였으나,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은 채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김장생(金長生)을 종유하면서 더욱 학문이 정미해졌고 동생인 시직(時稷)과의 우애가 돈독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서울과 강도(江都)가 함락되고 남한산성이 위급하다는 소식이 들리자 통곡하며 자결하려 한 바 있으며, 장령을 지냈던 동생 시직이 이미 강화에서 순절한 소식을 듣고 “임금을 욕되게 하는 신하는 마땅히 죽어야 되는데 동생이 사소(死所)를 얻었구나.” 하고 애통해하면서도 충의의 마음이 결연하였다. 뒤에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이 그의 행의(行誼)를 칭송한 바 있다.  sign_left_18_15.gif


이시정(李時程) : ?∼1653(효종 4)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중화(仲和). 형조정랑 빈($빈02)의 아들이다.
일찍이 과업에 뜻을 두어 진사에 오른 뒤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학생 때인 1618년(광해군 10)에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논의가 일어나자 가족을 이끌고 향리에 돌아가 은거하였다.
인조반정 후 성균관에 추천되어 재임(齋任)이 되었다. 이에 앞서 광해군 때 폐모론에 동조한 유생들의 유적삭제문제(儒籍削除問題)가 일어나자, 위력에 못 이겨 추종한 자는 제거시킬 것을 주장, 이를 당시 성균관대사성 정엽(鄭曄)에게 건의하여 뜻을 이루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는 경상도로 피란하여 그곳에 가까이 있는 정경세(鄭經世)의 지우(知遇)를 받았으며, 이듬해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를 제수받고,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거쳐 뒤에 남별궁감조관(南別宮監造官)이 되었을 때 제조(提調)였던 김자점(金自點)에게 수모를 당하고 향리로 돌아갔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남방으로 피란갔으며, 만년 18년간을 은거하다가 용인에서 죽었다.  sign_left_18_15.gif


이언침(李彦침) : 1507(중종 2)∼1547(명종 2)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중부(仲孚). 승지 인충(仁忠)의 증손으로 병절교위(秉節校尉) 필(弼)의 손자이고, 남부참봉(南部參奉) 계장(繼長)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개성유수 성세정(成世貞)의 딸이다.1537년(중종 32) 식년시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헌납·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545년(인종 1) 장령으로 있다가 사임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순창군수로 나갔으며, 1547년(명종 2) 서천에 유배되자 우울하게 지내다 죽었다.
1570년(선조 3) 직첩(職牒)을 환수받았다. 그의 처 안한영(安漢英)의 딸은 열행(烈行)으로 정려가 세워졌다.  sign_left_18_15.gif

이 영(李泳) : 1650(효종 1)∼1692(숙종 18)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여함(汝涵).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흔(欣)의 손자로 상윤(相胤)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예조참판 허계지(許啓之)의 딸이다. 큰아버지 상주(相胄)에게 입양되었다.
1674년(현종 15) 음서로 후릉참봉(厚陵參奉)이 되고, 곧이어 예빈시봉사(禮賓寺奉事)를 거쳐 군자감직장(軍資監直長)을 역임하였다.
1680년(숙종 6)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에 올랐다. 통례원인의에 제수된 지 1년도 안 되어 증조모 황부인(黃夫人)이 종숙의 임소인 배천에 머무르자, 배천에 가까운 신계현령(新溪縣令)을 자원하여 내려가 그를 모셨다.
그뒤 1687년 사재감주부(司宰監主簿)가 되고, 이어 창평현령이 되어 치민에 진력하여 그 지방 백성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천품이 관인돈소(寬仁敦素)하고 겉치레를 싫어하였으며, 효성도 지극하였다.  sign_left_18_15.gif

이영보(李英輔) : 1687(숙종 13)∼1747(영조 23)

조선 후기의 학자. 자는 몽여(夢與), 호는 동계(東溪). 통덕랑 화신(華信)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정(楨)의 딸이다.
유가의 경전은 물론 제자백가에 통하였다. 《사기 史記》를 깊이 연구하여 역사학에도 일가견을 가지고 고대 인물의 선과 악, 정치의 잘잘못을 기탄없이 비판하였다.
특히 당시에 이단으로 지목되던 《장자》·《이소경》·《노자》 및 불경 등을 깊이 연구하여 유가의 경전과 비교분석한 뒤 옳은 것은 인정하고 그르다고 인정되는 것은 비판하였다.
1714년(숙종 40)진사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1717년 정릉참봉(靖陵參奉)에 기용된 뒤 순탄하게 관계에 있다가 1743년(영조 19) 금성현령을 끝으로 사직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후진을 육성하면서 지냈다. 마을에 충신과 효자, 열녀 등을 찾아 포상을 상신하고 정려각을 세우는 등 지방문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저서로는 《동계유고》 4권이 있다.  sign_left_18_15.gif


이옥(李沃) : 1641(인조 19)∼1698(숙종 24)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문약(文若), 호는 박천(博泉). 관징(觀徵)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최호(崔#호39)의 딸이다.
1660년(현종 1) 즉위증광시(卽位增廣試)에 병과로 급제하고, 사관(史官)을 거쳐 1668년(현종 9) 예조좌랑, 1670년 사간원 정언·사헌부지평이 되었으며, 1675년(숙종 1)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그뒤 헌납·이조좌랑·응교·사간·우부승지·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678년 예송(禮訟)에 의하여 시정된 복제(服制)의 고묘(告廟)와 송시열(宋時烈) 등의 오례주장자(誤禮主張者)의 처벌문제로 남인이 강경파 청남(淸南)과 온건파 탁남(濁南)으로 분열되자, 아버지와 함께 허목(許穆)·윤휴(尹#휴17)를 중심으로 한 청남에 속하여 송시열의 극형을 주장하다가 탁남의 영수 허적(許積) 등의 반대로 삭직되어 북청(北靑)에 유배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풀려나 승지에 등용되고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1692년 예조참판이 되었다.
직간(直諫)을 잘하여 여러 차례 유배당하였으며, 1698년 영남에서 죽었다.
글씨에 능하고 문명도 높았다.
저서에는 《박천집》 33권과 《역대수성편람 歷代修省便覽》이 있다.  sign_left_18_15.gif


이옥(李鈺) : 1760(영조 36)∼1812(순조 12)

조선 후기의 문인. 자는 기상(其相), 호는 문무자(文無子) · 매사(梅史) · 매암(梅庵) · 경금자(絅錦子) · 화석자(花石子) · 청화외사(靑華外史) · 매화외사(梅花外史) · 도화유수관주인(桃花流水館主人). 본관은 미상이나 그의 《예림잡패 藝林雜佩》에는 연안(延安)으로 되어 있고, 《해동시선 海東詩選》에는 전주(全州)로 되어 있는데, 《전주이씨대동보》에 있는 이옥이라는 인물과는 생몰연대가 다르므로 동명이인인 것으로 보인다.그의 가계를 정확히 밝혀줄 자료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그의 생애도 그 자신의 글과 친구인 김려(金#여34)의 문집 발문에 의하여 추정한 것이다.
초년의 성장기는 자세히 알 수 없고, 30세 전후하여 서울에서 성균관유생으로 있었다. 실록에 나타난 바로는, 1792년(정조 16)에 성균관유생으로 있으면서 소설문체를 써서 선비들이 답습하여 그 폐해가 극심하므로 정조가 문체를 개혁한 뒤 과거에 나아가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과거에서도 여전히 문체를 고치지 못하여 충군(充軍)하도록 명을 받았다. 영남의 삼가현(三嘉縣)으로 이적되어 3일 동안 머물렀다.
1796년 별시 초시(初試)에 방수(榜首)를 차지하였으나 이때에도 문체가 문제되어 방말(榜末)에 붙여졌다.
그뒤 1799년에 삼가현에 소환당하여 그곳에서 넉달 동안 머물렀다.
그뒤 서울에 돌아와서는 본가가 있는 경기도 남양으로 내려가 전원생활을 하면서 저작활동을 하였다. 그의 사상적 기반은 유교의 합리주의로서 불교의 신비체험적 원리를 철저히 부정, 비판하였으며, 오행(五行)의 상생설(相生說)에 대해서도 이론의 부당함을 설파하였다.
그러나 문체파동을 겪고 현실에서 소외되고 나서부터는 전반기의 현실주의적 세계관이 아닌 허무주의적 의식의 흔적을 보여주며, 신비체험의 현상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기록하고 있는 등 태도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그의 저술은 친구인 김려가 교정하여 《담정총서 潭庭叢書》 안에 수록한 11권의 산문과 《예림잡패》에 시 창작론과 함께 남긴 이언(俚諺)65수가 전한다.
11권의 산문은 각각의 제목을 가지고 있는데, 〈문무자문초 文無子文#초53〉·〈매화외사梅花外史〉·〈화석자문초 花石子文#초53〉·〈중흥유기 重興遊記〉·〈도화유수관소고 桃花流水館小稿〉·〈경금소부 絅錦小賦〉·〈석호별고 石湖別稿〉·〈매사첨언 梅史添言〉·〈봉성문여 鳳城文餘〉·〈묵토향초본 墨吐香草本〉·〈경금부초 絅錦賦草〉 등이다.
이 가운데에는 전(傳)23편을 비롯하여 문학사적인 의의를 지닌 글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예림잡패》에는 ‘3난(難)’으로 나누어 시를 창작하는 이론을 설명하였고, 4조(調)로 나누어 각 조에 10여편씩 이언을 창작하였다.
이 작품은 조선 후기 조선시풍의 경향과 밀착되어 민요풍의 정서를 담고 있으며, 속어를 사용하여 남녀간의 정 또는 시집살이의 애환을 그리고 있다. 이밖에 가람본 《청구야담》에서는 〈동상기 東廂記〉를 그가 지었다고 하였는데, 사실여부는 알 수 없다.
그는 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正)의 희생물이 되었으나, 그가 남긴 산문과 시는 조선 후기 문학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경향을 대변하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우민(李友閔) : 생몰년 미상.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효숙(孝叔), 호는 수졸재(守拙齋)의 아들이며. 국주(國柱)이고, 어머니는 민침(閔琛)의 딸이다.
1546년(명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예문관의 검열을 거쳐 홍문관저작·박사·부수찬·수찬·응교·직제학을 지냈다.
또한, 성균관사예·사간원정언, 승정원의 우부승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개성부유수·첨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경상도·황해도·함경도의 관찰사를 거쳐 예조참판에까지 이르렀다.  sign_left_18_15.gif


이원순(李元淳) : 1890(고종 27)∼1993

경제인·독립운동가. 아호는 해사(海史). 서울출신. 아버지는 이명선(李明善)이며 어머니는백씨(白氏)이다. 명필 김석준(金奭準)으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1907년 배재학당을 수료하였다.
1909년 관립외국어학교 영어과를 졸업하였다.
1914년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수료하고 1974년 고려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라남도 해남에서 잠업기술연수중 1910년 8월 한일합방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YMCA에서 영문타자를 습득하였다.
이때 이승만(李承晩)·이상재(李商在)·박교상(朴敎相)·백관수(白寬洙)·임병직(林炳稷)·임병삼(林炳三) 등과 교분이 있었다.
1911년 경신학교장비서 겸 영어교사로 최남선(崔南善)과 함께 근무하였다.
1914년 상해를 거쳐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여 1919년 대한독립단 회장, 1929년 대한인동지회 회장, 미주 하와이태평양주보 주필, 하와이 YMCA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3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미 행서위원, 1943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미국 워싱턴주재 구미위원을 지냈고, 1946년 미국 뉴욕에서 한미무역회사를 설립하였다.
1947년 한인이민위원회 위원장에 피선되어, 한인이민법안의 미국의회 통과를 위해 조력하였고 대한올림픽위원회(KOC) 한국대표, KOC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정회원으로 가입하는 데 조력하였다.
1948년 대한체육회 고문, 1949년 대한상공회의소 주미대표, 그해 워싱턴주재 주미대사관
건물구입 및 한국 최초의 함정인 백두산호를 구입, 주선하였다.
1953년 40년간의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였다. 한국증권주식회사를 설립하고 회장에 취임하였다.
1958년 대한상공회의소 대표로 아세아지역 국제상공회의에 전택보(全澤珤)와 참석(마닐라)하여 대한상공회의소를 국제상공회의소에 가입시켰다. 대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에 피선되었고 한국해광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회장에 취임하였다.
1960년 원용석(元容奭)과 혜인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회장에 취임하였다. 그해 동계올림픽대회 한국선수단장(뉴욕), 1963년 민주공화당 당무위원, 최두선(崔斗善)·김활란(金活蘭)·오천석(吳天錫) 등과 한미협회(韓美協會)를 창설하여 초대회장을 지냈다.
김용완(金容完)·전택보 등과 한국경제협의회를 창설(현재 전국경제인연합회)하여전국경제인연합회 고문, 미주지역경제사절단장, 일본·대만 등의 민간경제사절단으로 민간경제 외교를 증진, 조력하였다.
1979년 미국에서 개최된 한국미술5천년전을 계기로 문화재, 개인소장도서 및 독립관계자료를 독립기념관에 기증하였다.
1982년 평화통일정책자문위원, 1987년 임시정부기념사업회 고문, 1989년 백범기념사업회 고문, 한국시청각장애자복지회장, 광복회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1975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상, 1982년 보관문화훈장 및 세계종교사회기구 메이슨으로부터 33급 작위와 마샬칭호를 받았다.
저서로는 《인간 이승만》·《세기(世紀)를 넘어서》 등이 있다. 사회장으로 국립묘지 독립유공자묘역에 안장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원순 초상


 

이유길(李有吉) :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의사(義士). 자는 유지(有之). 종계변무(宗系辨誣)로 광국공신(光國功臣)이 된 후백(後白)의 손자이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가 왜병에게 해를 입자 검은 상복으로 기의(起義), 해남의 명량(鳴梁)에서 17세의 나이로 공을 세웠으며, 평안도 영유현(永柔縣)에서 전봉장(前鋒將)으로 왜군과 싸우고, 명나라 유정(劉綎)의 원군에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숙종 때에 정려되었으며 참판으로 추증되었고 강진에 사우를 세워 제향하게 하였다.  sign_left_18_15.gif

이유길 유허비 탁본


 

이재수(李在秀) : 1770(영조 46)∼1822(순조 22)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신로(新老). 정구(廷龜)의 후손으로, 영상 천보(天輔)의 손자이고, 판서 문원(文源)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심숙(沈#수A0)의 딸이다.
1809년(순조 9)별시문과에 갑과로 합격하고, 홍문관응교·경상도감사 등을 역임하였다.  sign_left_18_15.gif

 



 

이정림(李庭林) : 1913∼1990

실업가. 호는 송정(松汀). 개성출생. 아버지는 윤신(允新)이며 어머니는 고순경(高舜慶)이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921년 송도보통학교에 입학, 졸업한 뒤 1929년 도매상인 송래상회(松來商會)에서 개성상인으로서의 수련을 쌓고, 사개문서법(四介文書法)의 사용법을 배웠다.
1933년 고무신도매상을 시작하여 경기·황해·강원지방의 총대리점을 경영하였다.
1940년 경기도고무조합 이사로 재직하면서 주단포목도매업도 겸업하였다.
1945년 광복 후 천일고무 이리공장에서 고무신 제조에 주력하였다.
1946년 김영준(金英俊)과 천일고무주식회사를 설립, 경영하였고, 이합상회(二合商會)를 개업하였다.
1949년 이합상회를 개풍상사(開豊商社)로 개칭하고 정식무역회사로 창립하여무역업에 종사하였다.
1953년 환도 후 호양산업주식회사(好洋産業株式會社)를 창립하여 제빙공장을 건설하였고, 1955년 대한탄광주식회사를 설립, 경영하였다.
1956년 대한양회공업주식회사를 창립하여 사장에 취임하고 우리나라 사상처음으로 국산시멘트공장인 대한양회 문경공장을 준공하였다.
1958년 3·1문화상제도를 만들었다.
1959년 서울은행을 창립하여, 대한양회공업이 서울은행 주식 74%를 인수하였다.
1961년 한일시멘 트주식회사를 설립하였으며, 1962년 5·16 후 실업인 13명이 회동하여 경제재건촉진위원회를 발족, 회장에 취임하였다.
1963년 한국경제인연합회 제2대 회장에 피선되고, 같은해 8월 3·1문화재 단을 설립하였다.
1965년 공영화학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1967년 전택보(全澤珤)·박용학(朴龍學) 등과공동출자하여 대한선박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1970년 대한유화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1974년 한국석유화학공업협회 회장에 선임되었다.
1972년 해운업계에서의 공로로 대통령표창, 197년 해운의 날에 국무총리표창(단체) 및1980년 제4회 해운의 날에는 석탑산업훈장 등을 받았다.  sign_left_18_15.gif


 

이지남(李至男) : 1529(중종 24)∼1577(선조 10)

조선 중기의 효자. 자는 단례(端禮), 호는 영응선생(永膺先生). 을사에 화를 입은 장령 언침(彦#침07)의 아들이다.
일찍이 조광조(趙光祖)에게 배워 스스로 힘써 행할 줄 알았으므로 모두들 효성있는 자라고일컬었다. 아버지가 직언으로 탄핵을 받고 순창군수로 좌천되자 따라갔는데, 마침 군내에 김인후(金麟厚)가 살고 있었으므로 그의 제자가 되었다.
김인후가 자를 지어주고, 자설까지 지어주었으며, 또 이때 이중호(李仲虎)에게도 배웠다. 뒤에 아버지가 서천으로 귀양가서 죽게 되자 지성으로 장사지내고 묘 옆에 여막을 짓고 3년간 지냈으므로, 나이 20도 못되어 지효(至孝)라는 이름이 널리 퍼졌다.
1577년(선조 10)나라 안에 학행이 있는 선비를 천거할 때 소격서의 참봉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이해에 어머니 안씨가 이질을 앓아서 증세가 위급하자 목욕하고 울부짖으며 하늘에 호소하여 감동시켰다.
즉, 어머니는 차츰 회복되었으나 그는 오랫동안 시탕(侍湯)과 간호에 지쳐서 피를 토하다가 그해 8월에 죽으니 사람들이 연안의 읍호(邑號)를 따라 ‘영응선생’이라 하였다.
기직(基稷)·기설(基卨)두 아들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쌍벽(雙壁)·연주(聯珠)라고 일컬었다.
맏아들 기직은 아버지의 상사에 지나치게 슬퍼하여 23세에 죽고, 시집 안 간 누이는 애통해하다가 18세에 죽으니 향교구동(鄕校舊洞)에 사는 사람들이 지극한 효성을 조정에 알려, 인조의 특명으로 효자문과 정려를 세우게 하였다.
따라서 어머니 안씨와 부인 정씨, 아들 기직·기설, 딸이 모두 그와 더불어 표창을 받아 한 집에 여섯 정문이 세워졌으며, 임금이 효자삼세(孝子三世)라는 편액을 내렸다.
그뒤 또 기설의 아들 돈오(惇五)·돈서(惇敍) 및 돈오의 처 김씨가 병자호란 때 강화에서 순절하여 모두 정려됨으로써, 여덟개의 정문이라는 뜻에서 팔홍문(八紅門)이라 일컬었다.  sign_left_18_15.gif

 

이지수(李趾秀) : 1779(정조 3)∼1842(헌종 8)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계린(季麟), 호는 중산재(重山齋).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명원(命源)이며, 어머니는 경주김씨(慶州金氏)로 통덕랑 하주(厦柱)의 딸이다.
19세에 서울로 올라가 족부(族父) 병원(秉源)에게 수학하였다.
1809년(순조 9)사마시에 합격하고 181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이어 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을 거쳐 병조좌랑·시강원사서가 되고, 1825년 옥구 현감으로나갔다가 1831년 동부승지, 1840년(헌종 6)회양부사 등을 지내고, 1842년 다시 동부승지가 되었다.
옥구현감으로 있을 때는 민폐를 없애고 백성을 구휼하는 한편 향약을 만들어 교화에 힘썼다.
동부승지가 되어서는 여러 차례 소대(召對)에 응하여 국가기본정책을 건의하였다.
만년에는 향리에 돌아와 중산재를 짓고 후진교육에 힘썼다.
저서로는 《중산재집》 8권이 있다.  sign_left_18_15.gif

 



이지호 초상

이지호(李智皓) : 1919∼1986

지리학자·교육자. 호는 팔역(八域). 황해도 수안출신. 1941년 평양사범학교 심상과를 졸업한 뒤 1945년까지 일본 릿쇼대학(立正大學)지리역사과에서 지리학을 전공하였다. 경성여자사범학교 교사를 거쳐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 창설과 더불어 사범대학 전임강사로 출발하여 1984년에 교수로 정년퇴임하였으며, 동시에 명예교수로 추대되었고 국민훈장 모란장이 수여되었다.
광복 후 최초로 대학에 지리학 전공학과를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창설하였고, 38년간 같은 학과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특히, 인구지리학·도시지리학·취락지리학에 대한 강의와 연구, 제자양성에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10여편의 저서와 수십편의 논문을 남겼다.
특히, 광복 직후에 중고등학교 지리교과서를 통해서 지리교육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문교부 교육과정심의위원·장학위원 등을 지냈다.
국토개발·인구문제에도 관심이 컸으며, 건설부의 국토종합개발심의위원, 인구문제연구소 이사, 내무부 정책자문위원 등도 역임하였다.
학회활동으로는 대한지리학회의 창립회원이고 두 차례 회장직을 역임하였다.  sign_left_18_15.gif


 

이진(李袗) : 1600(선조 33)∼?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자회(子晦), 호는 고산(孤山)·포산(匏山). 창정(昌庭)의 아들이다.
1635년(인조 13)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37년에 정언이 되었으나, 홍문관에서 양사가 언관으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다 하여 대사헌·대사간과 함께 체차(遞差)되었다가 다시 정언을 거쳐 지평에 올랐다. 이후 부교리·수찬을 지내고, 세자시강원문학이 되어 1643년 8월 청나라 태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고애사(告哀使)로 심양에 다녀왔다.
1645년 3도의 조세운송 등을 독촉하고 감독하기 위하여 각 도에 독운사(督運使)를 파견할 때에 호서어사(湖西御史)에 제수되었고, 이재(吏才)가 있다는 이조의 수망(首望)을 받아 수찬이 되었다.
1649년 사간이 되어 사간원의 다른 관원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독단으로 일을 처리한다는 간원의 탄핵으로 체차되었으나, 다음해 도목정사(都目政事)에 의거하여 충원현감에서 부수찬으로 제수되었다.
그러나 비변사에서 그의 충원현감으로서의 치적과 출대(出代)의 시기가 농번기라는 점 및 한황(旱蝗)이 겹쳤다는 이유를 들어 충원현감에 유임시킬 것을 간청하여 허락되었다.
1654년(효종 5)교리로 김홍욱(金弘郁)의 특사를 청하는 상소에서, 왕자로서의 치정(治政) 및 당시의 우의정 심지원(沈之源)과 이조판서 정유성(鄭維城)이 인척으로서 전형(詮衡)을 좌우하는 폐단을 논하였다. 이후 집의·사간·부응교·세자시강원보덕 등을 거쳐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나아가 백성들에게 회부향미(會簿餉米)를 나누어주었다.
1660년(현종 1)동부승지·병조참의·병조참지를 거쳐 다음해 예조참의로 청나라 세조(世祖)의 죽음에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의 일원으로 연경에 다녀왔다.
1663년 대사간으로 균역을 위한 양전(量田)의 개선책을 상계하여 시행하게 되었다.
즉, 양전은 지품(地品)을 등급으로 나눔으로써 민역(民役)을 균등하게 하되, 땅의 비옥도를 살펴 등급을 정하여야 한다고 역설하고, 아울러 양전에 있어서 엄격한 등급의 구분보다는 결부(結負)의 증가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후 병조참의·호조참의 등을 두루 거쳐 1667년 도목정사에 의하여 강원감사로 나아갔다.  sign_left_18_15.gif

이천기(李天基) : 1607(선조 40)∼1671(현종 12)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재원(載元), 호는 허주(虛舟). 도사 시정(時程)의 아들이다.
1635년(인조 13)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지·한림·삼사이랑(三司吏郎)을 역임하였고, 벼슬은 감사에서 그쳤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서 일찍 학문을 닦았고 예의범절에 밝았다.
정언으로 재직중 1641년 광해군의 초상 때 대사간 이덕수(李德洙)와 함께 예조에 올린 계사(啓辭)에 백관이 변복하고 모여서 곡한다는 등의 말로 물의를 빚자 그는 “광해가 버림받은 것은 인륜의 바깥에 있는 것이지 연산의 황란(荒亂)과는 다르므로 쫓아내고 폐하였을 때는 비록 죄인이나 관을 덮은 뒤에는 은혜를 가하여 왕자의 열(列)에 서게 함이 마땅하다.”고 하고 “인조께서 은혜와 예의를 특별히 더하여 비록 대우를 지나치게 하였다하여도 이것은 성상의 큰 덕에서 나온 일이므로 신하가 감히 말할 바가 아니다.”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뒤집고 망령되고 혼미하게 하여 시비에 현혹되었음을 스스로 반성하여 삭탈관직을 자청하였고, 또 대사간 이명한(李明漢)의 상소도 있고 하여 관직을 그만두었다. sign_left_18_15.gif 

 

이철보(李喆輔) : 1691(숙종 17)∼1775(영조 51)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보숙(保叔), 호는 지암(止庵). 아버지는 경기도관찰사 정신(正臣)이며, 어머니는 전주유씨(全州柳氏)로 이진(以震)의 딸이다.
1723년(경종 3)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예문관검열로 기용되고 이어서 대교를 거쳐, 1729년(영조 5)봉교로 승진하였다.
1731년 홍문록(弘文錄)에 등재되고, 1733년 홍문관에 들어가 부수찬과 교리를 지냈다.
1734년 각 도에 기근이 들어 민심이 흉흉하자 관서어사로 발탁되어 민정을 조사하고 탐관오리를 적발하였다.
특히, 관서지방에서 발생한 화월죄인(化越罪人) 김세정(金世丁) 등을 조사하여 처리하였다.
이어서 수찬에 승진되고, 1736년 왕명에 따라 경기도와 충청도에 암행하여 민정을 시찰하였다.
이어서 부응교와 응교를 지내고 사헌부로 옮겨 지평과 집의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다시 사간으로 옮기고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승정원의 승지로 발탁되었고 1741년 안변부사로 나가서 북방지대의 성곽을 수축하고 군기를 판비(辦備)하여 국방에 주력하였다.
1744년 대사간에 오르고, 1747년 다시 이천부사로 나갔다가 되돌아와서 도승지와 이조참판을 지냈다. 그해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시 다녀오고 1749년 동의금부사·대사간을 거쳐 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이듬해 함경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751년 이조참판에 오르고, 이듬해 《국조오례의》를 편수할 때 편집당상이 되었다.
1753년 동지춘추관사를 지내고 이듬해 호조판서가 되었으나 사임하고 상소하여 삭과(削科)하여 줄 것을 자청하였다.
이듬해 나주에서 일어난 괘서의 변에 주모자인 윤지(尹志)와 그 추종자들의 공사(供辭)에 자주 이름이 오르내리자, 토역소(討逆疏)를 올려서 자기와는 관계가 없음을 밝히고 죄인을 엄중처단할 것을 강조하였다.
1755년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연접도감당상(延接都監堂上)·공조판서 등을 지내고 이듬해 판의금부사·병조판서를 거쳐 좌참찬에 올랐다.
1757년 치사하고 향리로 돌아오니 영조가 그의 공로를 치하하여 수어사(守禦使)에 제수하고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뒤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궤장(#궤02杖)을 하사받았다.
형 길보(吉輔)와 함께 기로소에 들어간 데 이어 아들 복원(福源)과 손자 시수(時秀)가 모두 기로소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어 조선시대 최초의 삼세입사가 되었다.
저서로는 《지암집》이 있다.  sign_left_18_15.gif

이철보 초상


 

이풍익(李豊瀷) : 1804(순조 4)∼1887(고종 24)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자곡(子穀), 호는 육완당(六玩堂). 아버지는 존우(存愚)이며, 어머니는 풍산홍씨(豊山洪氏)로 경안(景顔)의 딸이다. 작은아버지 우의정 화우(和愚)에게 입양되었다.
1829년(순조 29)춘당대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정자가 되었고, 1838년(헌종 4)병조정랑, 1847년 대사간, 1873년(고종 10)대사헌·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44년 경상좌도의 시관으로 있을 때 감식에 밝고 공평하였으므로 영남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1858년(철종 9)어사 이건필(李建弼)의 탄핵을 받아 김제로 귀양갔으나 곧 풀려났다.
1881년(고종 18)예조판서로 있을 때 동궁의 풍악설치문제로 이론이 있었으나 《서전 書傳》의 고사를 인용하여 악관의 설치를 청하여 채택되게 하였다.
그뒤로 동궁이 거동할 때나 사부(師傅)의 상견례를 행할 때는 풍악을 설치하는 것이 정식화되었다.
저서로는 《육완당집》 6권이 있다.  sign_left_18_15.gif


이풍익 유점사



이풍익 삼일호

이풍익단발령  


 

이하징(李夏徵) : ?∼1755(영조 31)

조선 후기의 역신(逆臣). 광주부윤(廣州府尹) 회(檜)의 아들이며, 신임사화 때의 역신 명언(明彦)·명의(明誼)의 조카이다.
1726년(영조 2) 사마시에 합격하고, 1735년에 음보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서임되었으며, 벼슬은 풍덕부사에 올랐다.
1747년 나주목사로 있을 때 수관문제(輸款問題)로 동래에 유배되었고, 괘서사건을 일으킨 윤지(尹志)와는 사우관계(死友關係)를 맺었다.
나주괘서사건이 일어났을 때, 임국훈(林國薰)·이효식(李孝植) 등과 함께 연루되었는데, 임국훈이 관에 바친 상자 속에는 윤지와 서신교환을 한 사람 가운데 이하징의 서찰이 가장 많았으며, 그 내용 또한 친밀하여 골육과 같았다.
왕이 친국을 할 때 취상(就商:윤지의 아버지)의 역적행위를 부인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얻어 종성으로 유배되었다가, 복주(伏誅)되었다.  sign_left_18_15.gif


이행상(李行祥) : ?∼1800(순조 즉위년)

조선 후기의 학자. 자는 공리(公履), 호는 왕림(旺林). 세조 때의 명신 석형(石亨)의 후예로 익위(翊衛) 신로(莘老)의 손자이다. 이재(李縡)에게서 수학하였다.
일찍이 사서삼경에 통달하였으며, 특히 스승의 역책(易#책06:학덕높은 사람의 죽음이나 임종)에 즈음하여서는 홀로 향촉(香燭)을 밝히고 마치 친아들같이 슬퍼하였다. 스승을 깊이 흠모하여 유문(遺文)을 정리하여 출간하기도 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도암의 문(門)에 이처사(李處士)를 얻어 사문(師門)이 더욱 높아졌다.”고 하였다.
성격은 기량돈후(器量敦厚)하고 성도강확(性度剛確)하여 한번 책을 잡으면 밤새껏 책을 읽었고, 특히 《소학》·《논어》에 열중하여 늙을 때까지 학문을 쉬지 않았다.
또한 당시 유자(儒者)들의 행동을 비판하고 마침내 은신하여 오로지 내수(內修)에 정진하여, 시골의 수재들을 모아 사(社)를 세우고 이를 이끌어 나갔으니, 학자들이 그를 가리켜 왕림선생(旺林先生)이라 칭하였다.
정조 때 저사(儲嗣:왕세자)를 세우고 경술(經術)의 선비를 구하매 많은 사람들의 추천으로 광릉참봉(光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94년(정조 18) 수질(壽秩)로 첨추(僉樞)에 오르고, 1824년(순조 24)에는 특별히 승정원승지로 추증되었다. 송단(宋湍)·성덕명(成德明)과 함께 이재 문하의 3처사(三處士)로 불리었다.  sign_left_18_15.gif

 

이협(李浹) :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자는 열경(悅卿), 호는 동애(東厓). 이조판서 관징(觀徵)의 아들이다.
허목(許穆)·홍우원(洪宇遠)에게서 수학하였다.
일찍이 문예를 성취하였으며, 1689년(숙종 15) 생원·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고, 특히 생원시에서는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같은해 유생으로 대사헌 이현일(李玄逸)의 유임을 청하는 소를 올렸다. 벼슬은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에 그쳤다. sign_left_18_15.gif

이희보(李熙輔) : 1721(경종 1)∼1804(순조 4)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자는 재숙(載叔), 호는 녹소(麓巢).아버지는 형신(衡臣)이며, 어머니는 부안김씨(扶安金氏)로 곤(坤)의 딸이다.
일찍이 문장을 성취하여 문명이 높았는데, 특히 시에 능하여 여러 사람이 애송하였다.
1750년(영조 26) 진사시에 합격하고 1776년(정조 즉위년) 숭릉참봉(崇陵參奉)에 제수되었다.
1778년 중부봉사(中部奉事), 1779년 종부시직장(宗簿寺直長)에 승진되었으나 이듬해 작은 일로써 해직되어 귀향하였다.
그뒤《중용》·《주역》의 연구에 힘썼으며, 1790년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1794년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고, 1800년에는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차하였다.
저서로 《녹소유고》가 있다.  sign_left_18_15.gif

이돈(李惇) : 1609(광해군 1)∼1683(숙종 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형보(亨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시담(時聃)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군수 이덕순(李德淳)의 딸이다.
학문이 높았으나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홍주와 여주 등을 천거(遷居)하면서 어렵게 살면서도 남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자손들에게 항상 성현을 경모하고 근검절약을 잊지 말라 경계하였다.
조용히 학문을 닦았을 뿐 세상에 나타나기를 꺼렸으나 그의 문명을 전하여들은 김익희(金益熙) 등이 조정에 천거하여 6품(六品)에 서용되었다.
1652년(효종 3) 금정찰방(金井察訪)이 되고, 1657년 경양찰방(景陽察訪)을 거쳐 1668년(현종 9) 예빈별제(禮賓別提)가 되었다.
1671년 횡성현감, 1674년 통진현감을 거쳐, 1675년(숙종 1) 청도현감을 역임하였다. 임지에 부임한 뒤 그곳의 적폐(積弊)를 바로잡은 다음, 몇 달을 넘기지 않아 사임하고 떠나버렸다.
많은 관직을 역임하면서도 오직 백성을 위하는 일에만 전념하였을 뿐, 자신은 매우 가난하게 지내어 세인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sign_left_18_15.gif

 이우민(李友閔) :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효숙(孝叔), 호는 수졸재(守拙齋)의 아들이며. 국주(國柱)이고, 어머니는 민침(閔琛)의 딸이다.
1546년(명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예문관의 검열을 거쳐 홍문관저작·박사·부수찬·수찬·응교·직제학을 지냈다.
또한, 성균관사예·사간원정언, 승정원의 우부승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개성부유수·첨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경상도·황해도·함경도의 관찰사를 거쳐 예조참판에까지 이르렀다. sign_left_18_15.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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