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이 산으로 간 이유는? |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사고가 있는 산 정상은 사방이 바위로 절벽을 이루거나, 비탈진 지형이거나, 바다에 인접해 있다. 조선시대 외사고가 있는 각각의 산들은 이처럼 인적이 닿기 힘든 곳이었으며, 모두 요새와 같은 형태를 이루고 있다. 굳이 이 깊은 산 속에 사고를 만들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 |
| | | |
| 세부설명 | | | | 1. 산 중의 사고들
사고가 있는 산 정상은 사방이 바위로 절벽을 이루거나, 비탈진 지형, 바다에 인접해있다. 조선시대 외사고가 있는 각각의 산들은 인적이 닿기 힘든 곳이었으며, 모두 요새와 같은 형태를 이루고 있다.
2. 사고가 산에 있었던 이유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를 왜 산 속에 두었을까? 실록을 보관하자면 아무래도 사람이 많은 곳, 쉽게 오갈 수 있는 그런 곳이 좋지 않을까? 실제로 조선 전기까지 사고는 모두 읍성 안에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사고는 산속으로 옮겨진다. 이 산중 사고에는 실록을 후대에 남기려 했던 당대의 노력이 짙게 배여 있다.
3. 사고의 구조
사고는 규모는 작지만, 전체적으로 우람해 보인다. 주춧돌은 상당히 크고, 그에 걸맞게 기둥이나 다른 부재들도 육중하고 견실하다. 여기에 단청을 곁들여 화려함까지 더했다. 특히 웅장한 지붕은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 하지만 건물규모에 비해 지붕이 유난히 크다. 그리고 처마도 길게 늘어뜨려져 있는데,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4. 사고의 관리
사고가 중요하다면 그만큼 관리도 중요하다. 그렇다면 이 중요한 사고를 인적이 드문 산 속에 두고 어떻게 관리했을까? 김홍도가 정조에게 바친 사고 그림을 보면, 사고 옆에 사고 관리자들이 머물렀던 건물이 하나 있다. 하지만 국가의 소중한 역사 기록을 관리하는데, 이 정도로 그쳤을리가 없다.
5. 실록의 제작과정
실록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실록의 기초 자료는 사관이 조정에서 그날그날의 일을 기록한 사초이다. 또 다른 사료는 승정원일기나 비변사등록 같은 관청에서 작성한 공식 기록이다. 왕이 죽으면 다음 왕대에서 이들 사료를 수집해 실록제작에 들어간다.
6. 실록의 보관방법
실록은 궤짝에 보관되어 있었다. 궤짝은 자물쇠로 채워져 있고, 봉인이 되어 있다. 이들 궤짝 속에는 여러 내용물이 들어있는데, 그것은 붉은 보자기와 얇은 종이인 초주지, 창포와 천궁, 사슴 가죽 그리고 종이였다. 창포와 천궁은 방부, 방충효과가 있다. 그렇다면 그 밖의 다른 내용물들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