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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詩300首

217] 서시영(西施詠서시를 노래하다)-왕유(王維;?699-761?)

작성자새벽샘|작성시간19.06.20|조회수62 목록 댓글 0

217] 서시영(西施詠서시를 노래하다)-왕유(王維;?699-761?)

 

艶色天下重(염색천하중), ;여자의 아름다움은 모든 사람 좋아하니

西施寧久微(서시녕구미). ;미인 서시 어찌 시골에 오래도록 묻혀있겠는가

朝爲越溪女(조위월계녀), ;아침에 월나라 개울가 처녀

暮作吳宮妃(모작오궁비). ;저녁에는 궁궐의 왕비가 되었구나

賤日豈殊衆(천일개수중), ;그녀 미천할 때, 뭇 여자들과 무엇이 달랐던가

貴來方悟稀(귀내방오희). ;귀해지니 드문 줄 알았네

邀人傅脂粉(요인부지분), ;화장도 남시켜 하고

不自著羅衣(부자저나의). ;비단 옷도 자신이 직접 입지 않았소

君寵益嬌態(군총익교태), ;임금이 총애하면 교태 더욱 늘어나고

君憐無是非(군련무시비). ;임금이 위해주어 잘잘못도 모른다네

當時浣紗伴(당시완사반), ;지난 날 빨래하던 동료들

莫得同車歸(막득동거귀). ;누구도 같이 선택되어 같이 가지 못 했네

持謝鄰家子(지사린가자), ;이웃 여자에게 사랑받는 법 알려주어도

效顰安可希(효빈안가희)! ;찡그려도 총애 받는 일 어찌 바랄 수 있으리?

 

<중국의 4대 미인>

1. 서시(시쓰, 西施, 생몰년 미상)는 고대 중국 4대 미녀 중 한 명으로, 본명은 시이광(스이광, 施夷光)이다. 중국에서는 서자(시쯔, 西子)라고도 한다. 기원전 5세기(춘추 시대 말기)의 사람이다. 현재의 저장 성 사오싱 주지 시 출신이다.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자 월나라 구천의 참모 범려의 전략에 따라 패전의 처리에 대한 공물로 오나라 부차의 여인이 된다. 서시가 부차에게 총애를 받자 부차의 후궁 위희부인이 서시를 질투하여 서시를 비밀리에 제거하려 했던 적이 있었다. 서시에게 빠진 부차는 월나라를 끝까지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던 오자서를 죽이면서까지 월나라 경계에 소홀하게 되고, 결국 국력을 키운 월나라에 패망하게 된다.

 

오나라가 패망한 뒤의 서시는 월왕 구천의 후궁이 되어 총애를 받지만, 구천의 정부인인 월부인에게 비밀리에 제거당한다.

 

2.왕소군(王昭君, 기원전 1세기)은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 복주누약제 선우(復株累若鞮單于)의 알씨(선우의 처), 본래 한나라 원제의 궁녀였다. 이름은 장(, 출전은 한서)이다. 성을 왕, 자를 소군이라고 하여 보통 왕소군이라고 불리며 후일 사마소(司馬昭)의 휘()를 피하여 명비(明妃), 왕명군(王明君) 등으로도 일컬어졌다. 형주 남군(현재의 호북성 사시) 출신으로 양귀비, 서시, 초선과 함께 고대 중국 사대 미인의 한 사람에 손꼽힌다.

 

3.초선(貂蟬, 175~199(소설상 나이))은 서시, 왕소군, 양귀비와 함께 중국의 4대 미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삼국지연의에서 왕윤의 수양딸로 등장해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여포가 동탁의 이름 없는 시녀와 염문을 가졌다는 정사의 기록과 왕윤이 여포를 부추겨 동탁을 죽이게 했다는 사실을 연의에서 각색한 것이다.

초선은 비록 삼국지 상에서는 가공의 인물이지만 이에 해당되는 실존인물은 있었다. 정사 후한서 여포전에 의하면 여포는 동탁의 시녀와 밀통을 하고 있는데 계속 밀통하다가 동탁이 이를 알자 여포에게 수극을 던지며 둘의 연애를 반대했다고 나온다. 이를 이용하여 왕윤이 여포를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결국 동탁을 죽이도록 만든다. 정사 후한서 여포전에 의하면 여포와 밀애를 한 이 동탁의 시녀는 이름이 알려진 바 없으며 왕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만 나관중은 이 사실에 대해 삼국지연의를 집필할 때 동탁의 시녀 대신 왕윤의 양녀라는 설정으로 변경하고 초선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4.양귀비(楊貴妃, 719~ 756)는 당 현종의 후궁이자, 며느리이다. 서시(西施), 왕소군(王昭君), 초선(貂蟬)과 더불어 중국의 4대 미인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그녀의 성은 양()이고 이름은 옥환(玉環)이며, 귀비는 황비(후궁)로 순위를 나타내는 칭호이다.

 

당 현종 이융기에게 총애를 받았지만, 그것이 과도하여 끝끝내 안녹산과 사사명이라는 두 호족 세력 무장 대표가 공동 주도하여 반란을 획책한 이른바 안사의 난이 발발하는 원인이 되었고 이 역사적 배경을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고도 부른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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