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대한민국 이야기

29-75 조선시대 서얼차별법(庶孼差別法)

작성자김인선|작성시간13.12.25|조회수91 목록 댓글 0

 

29-75 조선시대 서얼차별법(庶孼差別法)

 

 

 

 

서얼은 정처(正妻)가 아닌 첩에게서 난 자손을 지칭하는 말이다. 일부일처제가 일반적이었던 고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서얼 자체를 찾아보기 어려웠지만 일부다처제가 허용된 조선시대부터 서얼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 서얼은 하나의 특수한 신분층으로서 법적으로 차별을 받았다. 정처의 자식과 달리 관직에 진출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 당했으며, 재산상속과 가족 내의 위치에 있어서도 차별대우를 받았다. 예를 들어 그 차별이 극명하게 들어나고 있는 것은 허균이 쓴 〈홍길동전〉에서 호부호형(呼父呼兄)을 못하는 현실이다. 결국 이는 조선 중기 이후 하나의 사회문제화 되었다. 이러한 서얼차별이 나타난 것은 양반을 지배계급으로 하는 신분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였고, 따라서 어머니가 사족의 혈통인 경우와 어머니가 천민인 경우의 차별은 서로 달랐다.

 

일단 법적으로 서얼 차별을 명문화하게 된 것은 조선 태종때의 일이다. 태종(이방원)은 태조(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에게서 난 아들로, 태조가 둘째 부인에게서 난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했을 때 이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키게 된다. 그것이 바로 1차 왕자의 난이었다. 이런 태종의 과거를 생각해본다면 그의 치세에 서얼 차별법이 생겼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태종은 여러 명의 처를 두는 일을 금지시키고, 이를 어길 경우 장형을 가하도록 법률을 정했지만 이는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경국대전에 “재가(再嫁)하거나 실행(失行 : 정조를 잃는 행위)한 부녀의 자손과 서얼자손은 문과의 생원시·진사시에 응시하지 못한다.” 라고 명문화시키기까지 했다. 그러나 같은 법전 안에서 청요직이 아니면 가능하다라는 문구가 있었고, 능력 있는 서얼을 썩히는 것은 국가적인 손해라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서얼의 관직 등용은 지속적으로 공론화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가 공론화 될 때마다 명분을 중시하는 사림들의 반대가 심했기 때문에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서얼들이 관직에 나갈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한 것은 임진왜란의 결과였다. 조선 선조 때 이이가 군량을 조달할 목적으로 쌀 80석을 납부하면 서얼을 허통할 수 있게 하였고, 이후 신분제의 해체라는 사회변화로 인해 이러한 허통은 더욱 가속화 되었다. 납속책(納粟策 : 일정액을 정부에 내고 벼슬을 받는 것)의 확대를 통해 서얼에 대한 차별이 보다 더 약화된 것이다. 영조 대에 발간된 〈속대전〉에는 서얼에 대해서 당대에는 차별을 받지만 그 아들 대부터는 양반이 될 수 있게 해 주었고, 이후 실제로 서얼에 대한 차별은 법적으로는 존속했지만 실제로는 많은 부분에서 누그러들었다.

 

이는 〈순조실록〉에 서얼의 자손이 한 나라의 반이라고 한 점으로 보아 서얼의 숫자가 무시 못 할 만큼이나 많았고, 시대의 대세가 서얼 허통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또한 서얼에 대해서 가장 관대했던 왕인 정조는 정유절목(丁酉節目 : 1777년에 내린 정치지침서)이라는 조치를 내려 서얼차별에 대한 명분은 인정하면서도 허통의 범위를 크게 확대했고, 실제로 검서관 제도를 두어 북학파의 이덕무·유득공·박제가 등의 서얼 출신을 중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얼 출신의 등용금지가 법제적으로 완전히 없어진 것은 그로보터 100년이 더 지난 1894년 갑오개혁에 이르러서의 일이었다.

 

2) 서얼금고법

 

서얼에 대한 차별의 규정은 《경국대전》에 다음과 같이 두 가지가 명시되어 있다. 예전(禮典) 제과조(諸科條)에 따르면 “죄를 범해 영구히 임용할 수 없게 된 자, 장리(贓吏)의 아들, 재가하거나 실행한 부녀의 아들 및 손자 등과 함께 문과, 생원·진사시에 응시하지 못한다.”라고 되어 있으며, 이전(吏典) 한품서용조(限品敍用條)에 “문·무 2품 이상의 양첩(良妾) 자손은 정3품, 천첩(賤妾) 자손은 정5품에 한하고, 6품 이상의 양첩 자손은 정4품, 천첩 자손은 정6품에 한하며, 7품 이하 관직이 없는 사람까지의 양첩 자손은 정5품, 천첩 자손은 정7품에, 양첩자의 천첩 자손은 정8품에 각각 한정해 서용한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규정은 유교적인 일처주의와 종부법에 따른 것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종모법에 따라서 어머니가 천민이면 그 자손도 천민이 되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아버지 신분을 따라 양인으로 되었기 때문에 양반의 천첩 소생들에 대한 차별이 따로 강구되어야 했고, 이에 양인으로서의 활동을 제약하는 법률을 제정하는 것이 적절한 것이었다. 양인 남자면 누구나 담당해야 하는 군역의 의무가 보충군(補充軍)이라는 특별한 병종에 일정한 기간 복무할 것이 요구되었고, 한품서용의 규정을 마련해 이 군역을 치른 뒤에 밟게 되는 벼슬길에 제한을 두었다. 한품서용의 규정도 그 대상 직을 잡직으로 한정해 서얼이 좋은 관직에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얼차별법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2007.12.15, 청서출판)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