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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이야기

43. 후릉(厚陵) 정종(定宗)과 정안왕후(定安王后)의 능

작성자관운|작성시간15.09.06|조회수110 목록 댓글 1


43. 후릉(厚陵) 정종(定宗)과 정안왕후(定安王后)의 능

 

 

  


  

 

경기도 개성시 판문군 령정리(북한 소재)

 

정종대왕과 왕비 정안왕후 김씨(定安王后 金氏)의 후릉은 조선 최초로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하게 난간석으로 연결한 쌍릉(雙陵)의 형식을 하고 있다.

 

 

정종보다 앞서 승하한 정안왕후는 후릉이라는 능호를 얻었고 나중에 묻힌 정종은 정안왕후의 능호를 이어받습니다. 조선 초기에 왕비가 먼저 죽고 능호를 받으면 왕이 나중에 죽어도 능호를 이어받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이는 왕릉 제도가 정비되지 않은 조선 초기의 일입니다. 세종도 소헌왕비가 먼저 죽어 영릉(英陵)이라는 능호를 쓰자, 이를 함께 쓴 경우입니다. 정종의 후릉은 박자청의 작품으로 태종의 헌릉과 쌍둥이처럼 닮아 있습니다. 두 쌍의 문인석과 두 쌍의 무인석 모습도 헌릉과 다르지 않습니다. 후릉도 공민왕릉(恭愍王陵)과 비슷해 조선 왕릉이 고려의 왕릉제도를 계승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병풍석을 둘렀으며 면석에 12지상을 새겼고 왕과 왕비의 묘 앞에 각각 장명등을 세운 것과 혼유석의 받침돌이 5개인 것도 조선 초기 양식이며 이는 고려왕릉(高麗王陵) 제도에서 나왔습니다.

 

 

조선 제2대 정종(定宗) 이방과(李芳果)와 왕비 정안왕후 김씨의 능이다. 해방 전 주소는 경기도 개풍군 흥교면 흥교리이나 지금은 북한의 행정구역내에 있어 경기도 판문군 령정리이다. 직접 가보지 못하고 평양에서 발간된 조선유적도감에 실린 사진을 보아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정종은 1399년에 즉위하여 14001111일에 동생 방원에게 왕위를 넘기고 물러나 상왕으로 태종의 우애를 받으며 개성 백룡산 기슭의 인덕궁에서 거주하면서 격구 사냥 온천 연회등으로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다 1419926일 천명을 다했다.

 

 

왕위에 있은 지 2년이었고 상왕의 자리에는 20년간 있었으며, 보령 63세였다. 125771일 함흥의 귀주동에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경 초명은 방과 자는 광원으로 일찍이 고려의 무관계(武官係)로 나아갔다. 13775월 스무살 청년 시절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지리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1390년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한 공로로 밀직부사에 올랐다.

 

 

양광도에 침입한 왜적을 영주 도고산 아래서 격파했고 판밀직사사 삼사우사(三司右使) 등을 역임했다. 정종은 성품이 순진근실하고 지행이 단엄, 방정했다. 정안왕후 김씨와의 사이에서는 후사가 없으나 숙의 기씨, 윤씨, 지씨, 이씨, 문씨 사이에서 15명의 군과 8명의 옹주를 낳았다.

 

 

조선이 건국하자 정종은 영안군(永安君)에 봉해지고 이듬해의 흥삼군부중군절제사로서 병권에 관여했다.

 

 

13988월 동생인 정안군(靖安君) 이방원(李芳遠)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이 성공을 거두자 세자책봉(世子冊封) 문제가 제기되었다. 정종은 당초부터 대의를 주장하고 개국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업적은 모두 정안군의 공로인데 내가 어찌 세자가 될 수 있느냐? 며 완강하게 거절했으나 정안군의 양보로 결국은 세자가 되고 95일 왕위에 올랐다.

 

 

오늘날에 와서 태조의 양위는 자발적이라기보다는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정종 역시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동생 방원의 양보로 즉위하여 실권도 그가 쥐고 있는 까닭에 정종의 정치는 거의 방원의 뜻에 따라 전개되었다.

 

 

1399년 개경으로 천도 이듬해 8월 분경금지법(분경이란 벼슬을 얻기 위해 권력자를 분주히 찾아다니는 것으로 이를 금지하여 권력을 쥔 귀족의 힘을 약화시킴)을 제정하고 1400242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동생 방원을 세제로 책봉하며 4월 사병혁파를 통한 병권 집중 삼군부와 의정부의 분리를 통한 군정분리체제 현성등을 통해 왕권의 강화를 위한 개혁을 방원의 영향력 하에서 이루어졌다.

 

 

그 외에도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을 편찬하고 조례상정도감(條例詳定都監)과 노비변정도감(奴婢辨定都監)을 설치했으나, 재위 시 정무보다는 격구 등의 오락에 탐닉하면서 보신(保身)했다고 한다.

 

 

태종이 즉위한 방원이 정종을 상왕으로 삼고 140012월 상왕전에 나아가 존호를 인문공예상왕(仁文恭睿上王)이라 올렸는데 그 책문은 다음과 같았다.

 

 

덕은 친애를 돈독하게 하여 능히 사양하는 빛을 나타내셨으니 예를 마땅히 존승하여 더욱 도를 경건히 해야 하겠습니다. 생략...태조를 이어 정사에 나아가 모유를 편안케 하셨고 소자를 보건케 하셨으며 인애를 다하여즉위토록 명하였습니다.

 

 

후릉은 계좌정향(북북동에서 남남서 방향)의좌향으로 백룡산을 뒤고 하고 탁트인 평지를 건너 멀리 안산이 바라보이는 배산임수의 명당자리에 자리잡고 있는 후릉은 아마도 1407년에 제릉의규모를 확장하고 1408년에는 건워릉 축조에서 국장도감판사겸 조묘도감판사로서 실무를 전담하여 일한 적이 있는 박자청의솜씨가 아닌가 한다.

 

 

고려 공민왕릉제를 충실히 따라 12면의 병풍석을 봉분에 두르고 있으며 7년후 정종이 승하하자 난간석으로 두 봉분을 연결하여 왕과 왕비가 승하한 뒤에도 함께 사는 쌍릉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봉분 앞 조우에 서있는 문무인석은 표정을 읽을 없을 정도로 풍화가 심하다.

 

 

분분을 두른 병풍석도 침식으로 인해 새겨진 조각을 식별하기가 곤란하고 난간석 주두는 건원릉에서의 꽃봉오리 모양의 원수가 아니라 고려 공민왕릉의 경우처럼 사각의 기둥이다.

 

 

죽석 일부와 동자석주 일부가 없고 도굴범의 소행인지 아닌지 봉분을 에워싼 병풍석중 위에서 봉토를 받쳐주는 만석의 사이가 벌어져 있는 등 능을 만들고 지킨 사람들이 보면 세월의 무상함과 후세인에 대한 야속함에 처연히 눈물 흘릴 것만 같다.

 

 

역사는 흐르고 흘러 한 민족이 둘로 나뉜 현재 정자각은 없어져 터만 황량하게 남고 곡장도 없이 산허리에 외로이 있는 후릉은 자기도 분단의 고통을 지고가고 있음을 큰소리로 허공에 외치는 듯하다.

 

 

박자청(朴子靑)에 대하여

 

1357(공민왕 6)1423(세종 5).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영해(寧海). 황희석(黃希碩)의 가인(家人)이다. 내시로 출사해 낭장(郞將)에 오르고,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중랑장으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입직군사(入直軍士)로 궁문(宮門)을 지킬 때에 왕제(王弟) 의안대군(義安大君)이 들어가려 하자 왕명이 없다고 거절하였다. 의안대군이 발길로 차며 상처를 입혔는데도 끝내 거절하였다. 태조가 이 사실을 알고 은대(銀帶)를 하사해 내상직(內上直)에 임명하고 어전 밖을 지키도록 하였다.

 

철야로 직무에 충실해 선공감소감(繕工監少監)이 되고, 1396(태조 5) 호익사대장군(虎翼司大將軍)으로 동북면선위사(東北面宣慰使)가 되어 오랑캐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를 불러 타일렀다. 1402(태종 2) 공조·예조전서, 1406년 중군총제 겸 선공감사(中軍摠制兼繕工監事)가 되는 등 주로 영선(營繕 : 보수 공사)을 맡았다.

 

문묘(文廟)를 새로 지을 때 역사의 감독을 맡아 주야로 살피고 계획해 4개월 만에 완공시켰다. 그러나 모화관(慕華館)을 남지(南池)에 닿게 하는 작업은 시일만 끌고 완성하지 못해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1408년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공조판서를 역임할 때 제릉(齊陵)과 건원릉(健元陵)의 공사를 감독하였다. 1413년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로 경성수보도감제조(京城修補都監提調)를 맡아 도성을 수축하였다.

 

그 뒤 좌우군도총제(左右軍都摠制), 1415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지내고, 1419(세종 1)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에 이르렀다. 이 해 인정문(仁政門) 밖의 행랑 축조를 감독했으나 측량 실수로 기울어지자 직무 태만으로 하옥되기도 하였다. 성품이 각박하고 인정이 적다는 평을 받았다. 시호는 익위(翼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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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관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9.06 조선왕릉만 공부해도 우리역사를 많이 배우게 됩니다. 조선왕릉에 대하서는 많은 설이 있기 때문에 정확히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직접 조선왕릉을 답사하지 않고 문헌만 보고 공부하게 되면 대부분 실제와 다른 오류를 범하기 쉽습니다. 사진으로 능침만 보고도 누구에 릉인지 알 정도로 발품을 팔아야 좀 공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잘못된 정보를 올리게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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