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陵域의 空間構成
능역의 공간은 일반적으로 봉분을 중심으로 한 능상공간과 정자각을 중심으로 한 능하공간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능상공간을 살펴보면, 횡방향으로 장대석을 설치하여 상ㆍ중ㆍ하 3단으로 나뉘어져 있다. 상단(상계)의 경우, 원형봉분을 중심으로 3면을 곡담으로 둘러쌓았으며 봉분과 곡담사이에 4개의 석양과 석호가 좌우대칭으로 위치하고 있다. 원형봉분에 12각형의 병풍석을 설치하고 난간석을 세우는 형식으로 조선 태조 건원릉이 최초이다. 봉분의 전면에 혼유석을 놓았고 이것을 중심으로 좌우 망주석이 위치하고 있다. 중단(중계)은 혼유석의 전면에 설치되어 있는 장명등과 이것을 중심으로 좌우 문인석과 석마를 설치하였다. 하단(하계)은 무인석과 석마를 좌우대칭으로 위치하고 있다.
능하공간은 홍살문이 제일 앞(남측)에 설치되어 있으며,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길게 이어져 시선을 한곳으로 집중시키는 참도가 있다. 홍살문을 통과하면 참도의 우축에 임금이 능의 입ㆍ출시 절을 하는 판위가 있으며 참도의 끝은 정자각에 닿아 있다. 능하공간의 중요 건물인 정자각은 중심축선상의 시각적 구심점이 되며 정자각에 도달하기 전에 참도 우측에 수복방, 비각이 있고 정자각 좌측에는 수라간이 있다. 또 능상과 능하공간을 연결하는 전이공간에 해당하는 신도(신교)가 있다.
이외에 어정과 재실, 홍살문 밖의 재실, 능역을 경계지우는 화소와 해자, 홍살문에 진입하기 위하여 거쳐야 하는 명당수와 금천교 등이 포함된다.
(2007, 조선왕릉 세계유산 등재 추진 종합 학술 연구, 문화재청, 79p . 2003, 서오릉 산림생태 조사 연구 보고서, 문화재청, 56p 요약 정리)
조선시대에는 사회 신분에 따라 무덤을 둘러싸고 있는 땅의 크기를 제한하였다. 그 범위는 보(步:영조척으로 5자, 또는 주척으로 6자의 길이)를 단위로 하여 표기하고 있다. 이것을 흔희 묘계(墓界), 묘역(墓域), 영역(瑩域) 등으로 부른다. 그러나 왕릉의 경우는 보수법(步數法)에 의한 경계뿐만 아니라 ‘화소(火巢)와 해자(垓字)’ 그리고 주변의 산이나 지형지물에 의해서도 구분되어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1) 보수법에 의한 능역의 경계설정
능역의 경계에 대한 기록이 우리나라에서는《고려사》에 처음 보이고 있다. 이에 따르면 976년(고려 경종 1) 2월에 문무양반의 묘계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1품은 방(左右) 90보, 2품은 80보로 하며, 분묘의 높이는 모두 1장 6척이다. 3품은 70보에 분묘의 높이는 1장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4품은 60보, 5품은 50보, 6품 이하는 모두 30보로 하되 무덤의 높이는 8척을 넘지 못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이 규정은 1083년(고려 문종 37)까지 그대로 시행되었으며, 이때에 6품 이하 서인에 이르기까지의 규정이 새로 추가되고 있다. 이에 따르면, 1품부터 5품까지는 앞의 것과 같으나, 6품은 방 40보, 7품부터 9품까지는 방 30보, 서인은 방 5보로 하고, 보수는 주척과 같이 쓴다고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최초의 묘계를 정한 것은 《조선왕조실록》 태종 6년(1406) 11월 1일에서 볼 수 있다.
능침(陵寢)의 보수법(步數法)을 정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삼가 역대의 능실을 살펴보니,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의 원릉산(原陵山)은 사방이 3백 23보(步)였습니다. 이를 반감(半減)하여 1백 61보로 하면, 사면(四面)이 각각 80보가 됩니다. 금조(今朝) 선대(先代)의 여러 산릉(山陵)의 능실(陵室) 보수(步數)를 원릉(原陵)의 예(例)에 따라 사방 각각 1백 61보로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태종 18년(1418) 5월 21일에 종친의 묘지에 대한 새로운 규정과 함께 문무관의 묘지가 좁아서 이를 배로 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예조에서 분묘(墳墓)의 보수(步數)를 올리었다. 상언(上言)은 이러하였다.
“영락(永樂) 12년 3월에 본조(本曹)에서 수판(受判)1)하기를 ‘문무 양반(文武兩班) 조부모 분묘의 품(品)에 따른 보수(步數)와 서인(庶人) 부모 분묘의 보수(步數)를 정하되, 주척(周尺)을 써서 한계를 정한다.’하였습니다. 수교(受敎)하였으나, 그러나 종실(宗室) 묘지터의 한계는 상정(詳定)하지 아니하였고, 또 문무 양반 각품(各品)의 묘지 보수(步數)도 또한 심히 협착(窄狹)합니다. 빌건대, 이제부터 종실(宗室) 1품의 묘지는 4면을 각각 1백 보(步)씩으로, 2품은 90보씩으로, 3품은 80보씩으로, 4품은 70보씩으로 하고, 문무 양반의 묘지는 1품은 4면을 90보씩으로, 2품은 80보씩으로, 3품 이하는 또한 각각 정한 보수(步數)에다 한 배(陪)를 더하여 한계를 정하고, 아울러 인호(人戶)에서 1백 보(步) 안에는 안장(安葬)하지 말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말하자면 1품일 때 종래에는 방 90보로 하던 것을 4면 모두 90보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규정은 이후《경국대전》「예전」(“분묘는 한계를 정하여 경작하거나 목축하는 것을 금한다. 종친 일품은 사방 각 일백보, 이품은 구십보, 삼품은 팔십보, 사품은 칠십보, 오품은 육십보, 육품은 오십보, 여자는 남편의 관직을 따른다. 장사지내기전부터 경작하고 있는 것은 금하지 못한다. 서울의 성저(城底) 십리 및 인가로 백보내에 매장하지 못한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 1995, 243).”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러나 7품 이하나 생원, 진사, 유음자제의 경우는 6품과 같으며, 여자의 경우 남편의 벼슬에 따르도록 한 규정이 첨가되었다. 그리고 민간은 왕릉의 주위 100보 이내에는 물론 경성 주위 10리 안에는 매장을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구리시, 1996, 570~571).
(2) 해자와 화소에 의한 능역의 경계설정
《경국대전》「예전」의 기록 이후에는 보수에 의한 능역의 경계에 대한 내용은 아직까지 찾지는 못하였다. 이후에는 보수에 의한 한계는 인정치 않고 해자를 정하여 해자내의 입장경목(入藏耕牧)을 엄하게 금지한 내용들이 능지에 나타나고 있다.(이창환, 1998, 63~64).
《현릉지》에서 현릉의 화소 한계는,북측한계는 목릉 뒤의 양지바른 구릉을 한계로 하며, 동측으로는 동창촌 뒤 수계까지 남측으로는 대로 위 남측산 내의 소계(小界측)를 서측으로는 왕릉의 서측 백호의 목릉 한계까지 정하고 있다.
또 《장릉지》에 “능역의 폭원 둘레 4,260보이며, 남북으로 능 곡원 밖 북쪽으로 화소가 680보에 이르며 능계 아래로 남쪽으로는 740보의 거리에 화소가 있어 합계 1,345보이다. 신문(神門) 동측의 기둥으로부터 동쪽으로 600보의 거리에 화소가 있으며, 신문 서측 기둥으로부터 서쪽으로 400보의 거리에 화소가 설치되어 있으며 합계 1,000보에 이른다.”라고 기록되어 이는 장릉의 경계는 남북으로 1,354보, 동서가 1,000보로 면적으로는 약 600,000평에 이른다(이창환, 1998, 64).
현릉과 장릉의 화소 한계를 살펴볼 때 화소의 한계는 일정한 거리기준(步數)에 의하기 보다는 자연지형이 주요한 요소임을 알 수 있다. 즉, 좌청룡, 우백호, 안산, 주산, 명당수 등 풍수지리의 기본요건들이 관련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풍수의 지리적 요소들은 능역을 하나의 영역으로 인식하는데 주요한 가시적 요소가 되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표. 시대별 능역의 규모 변화(이창환, 1998, 67) 1보를 1.187m로 계산함
(3) 조선왕릉의 입지적 기준과 제한
조선시대 능역은 중국《주례》의 기본질서를 바탕으로 하되 한양으로부터의 거리, 주변지역과의 거리, 도로와의 관계, 방위, 주변산세, 국방 경계와의 관계를 통하여 입지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능역의 입지에 관해서는 《경국대전》에 명기된 한양으로부터의 거리, 지리적 측면, 기타 법제도에서 묘지를 써서는 안되는 지역에 대한 규정이 직ㆍ간접적으로 관여된 것으로 보인다. 먼저, 도성으로부터의 거리와 관련되어서《경국대전》등에서는 “능역은 한양성 서대문 밖 백리 안에 두어야 한다”는 입지조건을 훈령하고 있다. 또한 도성으로부터 10리 이내와 인가로부터 100보 이내에는 법전에 의하여 묘지를 쓰는 것을 금지하였다가, 조선말기에 들어 경성(한양)으로부터 100리 이내와 인가로부터 50보 이내에는 매장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를 미루어 보아 능역은 도성 중심으로 반경 10리(약 4km)밖, 100리(약 40km) 이내가 기준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조선시대 능의 분포는 북한에 위치한 후릉과 여주의 영ㆍ령릉, 영월의 장릉을 제외하면 모두 사대문으로부터 반경 40km내에 분포하고 있다.
두 번째로 산경 내맥의 중시와 풍수지리적 형국을 동시에 고려하였음은 조선시대 최초의 왕릉이자 조선왕릉의 전형이었던 건원릉의 입지를 설명하는 내용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건원릉신도비음기建元陵神道碑陰記》에 의하면 건원릉의 내맥을 “장백에서 근거하여 2,000여 리를 꾸불꾸불 내려와 철령에 이르러 서쪽으로 꺾여 수백 리를 내려와 백운산이 되고, 또 남으로 100여리 내려 남쪽을 향하고 있는 검암산을 이루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건원릉지》에 의하면 건원릉까지에 이르는 내룡, 즉 지맥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수락산으로부터 왼쪽으로 남행하여 불암산이 되고, 불암산으로부터 왼쪽으로 떨어진 곳에 강릉과 태릉을 조성하였다. 이 강릉의 청룡이 남쪽으로 꺾여 된 것이 사현이다. 이곳을 조금 지나 솟아오른 것이 검암산인데, 검안산으로부터 왼쪽으로 떨어져 뒤에 이르러 머리를 이루고 있다. 그 머리는 감방향으로부터 들어와 검암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다. 능으로부터 약3리 떨어져 있다.
마지막으로 조선시대말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매장지 제한’에 대한 항목도 능의 입지 선정에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1913년 형법대전의 폐지와 함께 사라진 매장지의 제한은 조선시대말의 매장제한에 관한 법제도를 엿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① 도성으로부터 10리 이내
② 객사, 학교, 관아 등의 사면 이백보내
③ 능원묘 해자내, 능침 화소 밖 안산 금표내
④ 역대 왕릉의 경계 내
⑤ 왕실의 태실 내
⑥ 전국의 봉산1)
⑦ 사능(詞陵)의 100보 내
⑧ 주인이 있는 분묘 경계 내
⑨ 인가로부터 50보 이내
⑩ 주산의 영역 내
(4) 조선왕릉의 유형
조선왕릉은 봉분의 조성형식에 따라 단릉(單陵), 쌍릉(雙陵), 합장릉(合葬陵), 삼연릉(三連陵),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동원상하봉릉(同原上下封,陵), 동봉삼실릉(同封三室陵)으로 나눌 수 있다.
① 단릉 : 왕이나 왕비 중 한 사람만 매장하여 봉분이 하나인 능으로 조선전기에 많이 나타나고 18세기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예) 건원릉(建元陵), 정릉(태조의 계비 신덕고왕후), 장릉, 사릉, 공릉, 순릉, 정릉, 온릉, 희릉, 태릉, 휘릉, 익릉, 홍릉
② 쌍릉 : 왕과 왕비의 봉분을 하나의 곡장 안에 나란히 조성하는 것. 우상좌하(右上左下; 오른쪽에 왕, 왼쪽에 왕비/봉분에서 정자각을 바라보는 방향에서 좌우를 말함)의 원칙에 의해서 조성한다.
예) 헌릉, 효릉, 강릉, 장릉(원종과 인헌왕후), 영릉(효종과 인선왕후, 동원상하봉릉), 숭릉, 명릉(동원이강릉의 변형된 형태), 의릉(동원상하봉릉), 원릉, 영릉(진종과 효순소황후), 예릉
③ 합장릉 : 왕과 왕비를 하나의 봉분 안에 2개의 현실을 만들어 2개의 관을 안치한 능
예) 영릉(세종과 소허왕후), 장릉(인조와 인렬왕후), 융릉, 건릉, 인릉, 수릉, 홍릉, 유릉(동봉삼실릉에 해당)
④ 삼연릉 : 왕과 왕비, 계비의 세 봉분을 하나의 언덕에 나란히 조성한 능으로 하나의 곡장안에 배치되어 있는 능
예) 경릉(헌종, 효현성황후, 계비 효정성황후)이 유일하게 삼연릉이다.
⑤ 동원이강릉 : 왕과 왕비의 봉분을 하나의 정자각 뒤에 다른 두 언덕에 각각 매장한 능
예) 현릉, 광릉, 경릉(추촌 덕종과 소혜왕후), 창릉, 선릉, 목릉이 있으며, 명릉은 하나의 정자각 뒤에 오른쪽 언덕에 숙종과 인현왕후(계비) 봉분을 쌍릉으로 조성하고 왼쪽의 언덕에 2계비인 인원왕후의 봉분을 단릉으로 조성한 변형된 동원이강릉이다.
⑥ 동원상하봉릉 : 왕과 왕비의 봉분을 하나의 언덕에 위, 아래로 안치한 능. 왕상비하(王上妃下, 위쪽에 왕을 아래쪽에 왕비를 안치하는 것)의 원칙에 의해 배치한다.
예) 영릉(효종과 인선왕후), 의릉
⑦ 동봉삼실릉 : 하나의 봉분에 왕, 왕비 그리고 계비를 합장한 형태이며, 크게 합장릉의 형태로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마지막 왕릉이 유릉이 이에 해당됨
조선왕조는 1392년 즉위한 1대 태조에서 1910년 마지막 임금인 27대 순종에 이르기까지 519년간 27명의 왕이 승계하면서 지속되었다. 여기에는 왕과 왕비 및 추존왕과 왕비가 있는데, 이 왕족의 무덤을 왕릉이라고 하고 묻히는 사람의 신분에 다라 능(陵)ㆍ원(園)ㆍ묘(墓)로 분류된다.
능 : 왕(추존왕 포함)과 왕비의 무덤
원 : 왕세자와 왕세자비 또는 왕의 사친(私親)의 무덤
묘 : 그 외의 왕족의 무덤. 대군, 군, 공주, 옹주, 후궁, 귀인 등의 무덤.
왕위에 올랐었더라도 폐위되어 복위되지 못한 연산군, 광해군의 경우는 묘에 해당
능ㆍ원ㆍ묘와 관련된 조선 왕조의 무덤 총 119기에 이른다. 그 중 능이 42기, 원이 13기, 묘가 64기가 있다. 42기의 능 중 제릉(태조의 비 신의왕후)과 후릉(정종과 비 정안왕후)이 북한지역에 있으며, 남한에는 40기의 능이 있다. 남한지역의 능 가운데 여주에 있는 세종과 소헌왕후의 영릉, 효종과 인선왕후의 영릉, 영월에 있는 단종의 장릉을 제외하고 도성을 중심으로 40km 이내인 서울 ㆍ경기 지역에 배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