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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이야기

《가례도감의궤 영조정순왕후(嘉禮都監儀軌英祖貞純王后), 1759 영조35년》 해제(解題)

작성자관운|작성시간16.06.05|조회수581 목록 댓글 1


가례도감의궤 영조정순왕후(嘉禮都監儀軌英祖貞純王后), 1759 영조35해제(解題)

 

 


 

한영우(韓永愚)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1.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는 조선 21대 임금 영조(英祖 1694~1776 재위 1724~1776)1759(영조35) 6월 김한구(金漢耉 慶州金氏 鰲興府院君)의 딸인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1805)와 혼인하는 의식의 모든 과정을 기록한 의궤(儀軌)이다. 영조는 숙종의 넷째 아들로서 11세 때인 1704(숙종30)에 달성 서씨(達城徐氏) 서종제(徐宗悌)의 딸인 정성왕후(貞聖王后 1692~1757)와 혼인하였으나, 1757년에 세상을 떠나자 2년 뒤에 계비를 맞이하게 되었다. 당시 왕의 나이 66세였고 계비는 15세였다.

 

영조와 정순왕후의 혼례는 법제에 따라 세 차례의 간택 과정을 거쳐 진행되었다. 62일에 행해진 초간택에서는 유학(幼學) 김한구(金漢耉)의 딸, 현감(縣監) 김노(金魯)의 딸, 유학 어석주(魚錫疇)의 딸, 유학 윤득행(尹得行)의 딸, 전 주서(注書) 김재록(金載祿)의 딸, 생원 유간(兪墾)의 딸 등 6명을 후보로 뽑았고, 64일에는 그중에서 김한구의 딸과 김노의 딸, 윤득행의 딸 등 3명을 재간택하였으며, 마지막으로 69일 통명전(通明殿)에서 삼간택을 행하여 3명 중에서 김한구의 딸을 왕비로 정하였다. 혼례는 일관(日官)이 날짜를 정하여 622일 거행되었다.

 

정순왕후는 소생이 없어 영빈 이씨(暎嬪李氏) 소생이 세자로 책봉되었는데 이가 사도세자(思悼世子)이다. 왕후는 사도세자와 사이가 나빴으며, 1762년 세자가 비명으로 죽게 된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 때문에 세자를 동정하던 시파(時派)나 세자의 아들인 정조와도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1800년 정조가 죽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정순왕후는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하면서 노론 벽파(僻派)와 정치 노선을 함께하여 정조를 따르던 정치 세력과 천주교도를 탄압하였다. 그러나 순조가 시파인 김조순(金祖淳)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자, 1803년 수렴청정을 거두면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으며, 1805년에 타계하였다. 능호는 원릉(元陵)이다.

 

조선 시대에는 왕과 왕세자 그리고 왕세손의 혼례가 있을 때는 가례도감(嘉禮都監)이라는 임시 기구를 설치하여 간택(揀擇 후보 선택), 납채(納采 청혼), 납징(納徵 예물 보내기), 고기(告期 길일 선택), 책비(冊妃 왕비 책봉), 봉영(奉迎 사자를 보내 신부를 맞아들이는 의식), 동뢰연(同牢宴 혼인 후 잔치), 조현례(朝見禮 가례 후 처음으로 부왕이나 모후에게 뵈는 예식) 등의 행사를 주관하고, 행사가 끝나면 가례도감 설치 시의 조직, 업무, 예규, 행사, 결과 등 모든 사항을 의궤의 형태로 기록하였다. 왕과 왕자는 가례 절차가 다른데,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의하면, 왕의 경우는 납채, 납징, 고기, 책비, 봉영, 동뢰연 등 육례(六禮)가 있었고, 왕세자의 경우는 봉영(奉迎) 대신에 세자가 직접 신부 집으로 신부를 맞이하러 가는 친영(親迎)이 있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는 영조 때 국혼정례(國婚定例)(1749)상방정례(尙方定例)(1752)가 차례로 만들어지면서 국혼(國婚)의 의식 절차가 더욱 정밀하게 체계화되었다. 이에 따라 의궤의 내용도 한층 상세해지고 분량도 늘어나게 되었다. 종전에 한 책으로 만들어지던 의궤가 두 책으로 늘어나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제도의 변화에 따라 왕의 봉영이 친영으로 바뀌고, 친영의 장소를 사가(私家) 대신에 별궁(別宮)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왕비로 간택된 신부는 궁으로 오기 전에 왕비로서 지켜야 할 법도와 혼인 의식을 별궁에 거주하면서 익히게 하였다. 영조와 정순왕후의 혼례식도 물론 이러한 친영의 법도를 따랐다.

 

의궤(儀軌)의식(儀式)의 궤범(軌範)’이라는 뜻으로, 조선 후기에는 왕실의 혼인뿐만 아니라, 왕실의 장례, 제사, 잔치, 활쏘기, 태실(胎室) 봉안, 행차, 궁궐 건설 등 주요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의궤를 만들었다. 의궤는 보통 5부 혹은 9부를 만들어 궁중과 의정부, 예조에 바치고, 유사시를 대비하여 지방의 여러 사고(史庫)에 비치하였다. 궁중에 바치는 어람용(御覽用)은 고급 초주지(草注紙)를 사용하고, 붉은 선을 두르며, 표지도 비단으로 장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비하여 어람용이 아닌 것은 일반 저주지(楮注紙)를 사용하고, 검은 선을 두르며 표지도 삼베를 쓰는 것이 보통이다.

 

왕실의 혼사를 기록한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는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약 20종이 된다. 그런데 같은 행사에 대한 의궤를 여러 부 작성하였으므로 실제 책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이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1627년의 소현세자가례도감의궤(昭顯世子嘉禮都監儀軌)이고, 가장 최근의 것은 1906년의 순종순종비가례도감의궤(純宗純宗妃嘉禮都監儀軌)이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는 소현세자(昭顯世子), 인조장렬후(仁祖莊烈后), 현종명성후(玄宗明聖后), 숙종인경후(肅宗仁敬后), 숙종인현후(肅宗仁顯后), 경종단의후(景宗端懿后), 숙종인원후(肅宗仁元后), 경종선의후(景宗宣懿后), 진종효순후(眞宗孝純后), 장조헌경후(莊祖獻敬后), 영조정순후(英祖貞純后), 정조효의후(正祖孝懿后), 순조순원후(純祖純元后), 문조신정후(文祖神貞后), 헌종효현후(憲宗孝顯后), 헌종효정후(憲宗孝貞后), 철종철인후(哲宗哲仁后), 고종명성후(高宗明成后), 순종순명후(純宗純明后), 순종순종비(純宗純宗妃) 20종의 가례도감의궤가 남아 있다. 그 밖에 장서각에 11,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13종이 있으나 규장각 소장 의궤와 내용이 같은 것이 대부분이다.

 

영조정순왕후의 가례도감의궤는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3부가 있다. 원래는 어람용 1부와 예조, 태백산 사고, 오대산 사고, 적상산 사고에 각각 1부씩 모두 5부를 만들었다. 그러나 어람용은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되었다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가져가 지금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규장각에 있는 것은 예조 소장본(13104), 태백산본(13102) 그리고 오대산본(13103)이다. 이 중에서 예조 소장본은 상책이 결본이고, 나머지 둘은 상하 2책으로 된 완질본이다. 오대산본과 태백산본은 사소한 차이가 있으나 이는 필사 과정의 착오로 보이며, 태백산본에는 가례의 내용과 관계없는 산릉도감별단 경릉좌변산론(山陵都監別單 景陵左邊山論)’이 실려 있다. 따라서 본 해제는 오대산본을 대본으로 택하였다.

 

오대산본의 표제는 기묘 유월 일 오대산상 가례도감의궤 상하(己卯六月日五臺山上嘉禮都監儀軌上下)’로 되어 있으며, 필사본이다. 크기는 세로 45.8cm, 가로 33cm이다. 상책은 304, 하책은 278면이며, 하책의 말미에는 천연색으로 그려진 50면의 반차도(班次圖)가 실려 있다. 이 책은 1994년에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두 권으로 영인하였다. 이번에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규장각 영인본을 대본으로 하여 번역하였다.

 

2.

 

영조정순왕후의 가례도감의궤의 구성은 좌목(座目), 계사(啓辭), 예관(禮關), 이문(移文), 내관(來關), 품목(稟目), 감결(甘結), 서계(書啓), 논상(論賞), 부의궤(附儀軌), 일방 의궤(一房儀軌), 이방 의궤(二房儀軌), 삼방 의궤(三房儀軌), 별공작 의궤(別工作儀軌), 수리소 의궤(修理所儀軌), 반차도(班次圖)의 순서로 되어 있다. 내용을 순서대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좌목(座目)은 이 행사를 주관한 담당 관리들의 명단을 먼저 싣고, 다음에 도감사목(都監事目)’이라 하여 행사에 필요한 인력과 물자 배치에 대한 큰 원칙을 제시한 것이다. ‘도감사목은 말하자면 행사 계획서에 해당한다. 가례도감의 최고 책임자인 도제조(都提調)는 삼정승 중에서 한 사람이 맡게 되어 있는데, 실제로 우의정 신만(申晚 1703~1765)이 도제조가 되었다. 도제조 다음의 제조(提調)는 세 사람으로 판서급에서 맡게 되어 있으며, 행 호조 판서 홍봉한(洪鳳漢), 행 예조 판서 홍상한(洪象漢), 그리고 병조 판서 조운규(趙雲逵)가 맡았다. 제조 다음의 도청(都廳)은 사복시 정(司僕寺正) 송영중(宋瑩中)과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 이심원(李心源)이 맡았다. 그다음 낭청(郞廳)6명으로 구성되었는데 도중에 인원이 교체되어 호조 정랑 정일상(鄭一祥)을 비롯하여 연인원 10명이 되었다. 낭청은 세 방에 나누어 배속하였다.

 

좌목에 의하면, 기묘년(1759) 55일 내려진 왕명에 의해 다음 날 가례도감 책임자들이 임명되고, 그다음 날 도감사목이 정해졌다.

 

계사는 175956일부터 620일까지 날짜별로 왕이 지시한 사항과 신하들이 건의한 사항들을 상세하게 기록한 것이다. 그 내용은 행사 일정과 인력 배치, 그리고 납채, 납징, 고기, 책비, 친영, 동뢰연 등 육례의 의식에 쓰이는 물품 목록, 빙재(聘財)라 하여 삼간택(三揀擇) 후 신부 집에 보내는 예물 목록, 별궁에 보내는 예물, 정친(定親)할 때 보내는 예물, 납징할 때의 예물, 본방(本房)에 보내는 예물, 대전(大殿)과 중궁전(中宮殿)에서 갖춰야 할 의복, 수라간의 용품, 의식에 쓸 그릇과 깔개, 타고 갈 가마와 의장(儀仗)에 쓰이는 물품 등에 관한 것이다. 그 기록이 매우 자세하여 혼례 때 어떤 물품이 사용되었는지를 소상하게 알 수 있다. 또한, 의복과 그릇의 이름이 한자로 赤亇[치마], 赤古里[저고리], 大也(대야), 要江(요강) 등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도 흥미를 끈다.

 

예관, 이문, 내관은 혼인과 관련된 여러 행사를 각 관청별로 집행하기 위해 예조, 병조, 호조 등 여러 관청 사이에 주고받은 공문서를 역시 날짜별로 기록한 것이다.

 

품목과 감결은 각종 물품 조달과 인력 배치, 인건비 지급, 의궤를 만드는 일 등과 관련하여 각각 하부 관청에서 올린 품목과 상급 관청에서 아래 관청에 지시한 감결을 날짜별로 모은 것이다. 그중에는 도감 별단(都監別單 가례도감 관원 명단), 도감원역 별단(都監員役別單 아전 명단), 도감공장 별단(都監工匠別單 각종 장인 명단)이 있어서 이 행사에 동원된 인력의 구성을 이해할 수 있고, 도감의궤사목(都監儀軌事目 622)을 통해서 이 의궤는 다섯 부가 제작되어 어람용으로 바쳐지고 예조, 태백산 사고, 오대산 사고, 적상산 사고에 비치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어람용 의궤는 상품(上品) 초주지(草注紙)를 쓰고, 초록 비단으로 표지를 하는 등 특수하게 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서계, 논상, 부의궤는 목록에는 들어가 있으나 본문에는 독립된 편차를 두지 않고 세부 내용으로 처리하고 있다. 이러한 처리 방식은 후대의 의궤와 비교하여 아직 의궤 편찬 방식이 세련되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논상은 도제조인 신만(申晚)에게 안구마(鞍具馬)를 제급한다는 내용이고, 부의궤는 다섯 질의 의궤를 만들어 올린다는 것이다.

 

일방 의궤, 이방 의궤, 삼방 의궤는 가례도감의 일을 나누어 집행하기 위해 설치한 세 방에서 행한 일을 기록한 것이다. 의궤 중에서 이 부분이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각방(各房)의 의궤는 본방 소장(本房所掌), 품목, 감결, 이문, 실입(實入), 용환(用還), 공장(工匠)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의궤 속에 의궤가 들어 있는 셈이다. 본방 소장은 각방에서 하는 일, 품목은 상급 관청에 건의한 일, 감결은 하급 관청에 지시한 일, 실입은 실제 소요된 물품, 용환은 빌려 쓰고 다시 돌려주는 물품, 그리고 공장은 물품을 제조하는 데 동원된 장인(匠人)의 이름을 적은 것이다. 이제 각방 의궤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다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일방 의궤는 교명(敎命), 의대(衣襨), 포진(鋪陳), 의주(儀註), 상탁함궤(床卓函樻)의 순으로 되어 있다. 일방의 일은 호조(戶曹), 병조(兵曹), 상의원(尙衣院), 공조(工曹)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이 기관의 낭관들이 낭청을 맡고 있었다.

 

교명은 혼례식과 관련된 교지(敎旨)의 양식과 재료, 교지의 내용, 교지를 담는 궤()의 장식, 교지를 싸는 재료 등을 소개하고, 이어서 육례를 실행할 날짜의 택일(擇日)을 기록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납채, 납징, 고기 등의 습의(習儀 예행연습)611일에 의정부에서 한 번 행하고, 책비와 친영의 외습의(外習儀)615일에, 비수책(妃受冊), 친영, 동뢰연의 내습의(內習儀)616일에 창경궁의 통명전(通明殿)에서 행한다. 또한 납채는 613일 진시(辰時), 납징은 617일 진시에, 고기는 619일 진시에, 책비는 620일 진시에, 친영은 622일 인시(寅時), 동뢰연은 622일 진시에 각각 거행한다. 다음, 육례 시 거행(六禮時擧行)의 일로서 육례 때 쓰이는 교문지(敎文紙)와 그 교문을 담을 함()과 상(), 친영 때 쓰는 생안(生雁)과 화룡촉(畫龍燭) 등을 어느 관청에서 조달할 것인지를 밝히고, 이어서 빙재(聘財), 별궁 예물(別宮禮物), 본방 예물(本房禮物), 정친 예물(定親禮物), 납징 예물(納徵禮物), 별궁 진배(別宮進排)에 쓰일 물품의 종류와 수량을 적고 있다.

 

의대는 혼례 때 중궁전(中宮殿) 이하 상궁(尙宮), 시녀(侍女), 나인(內人), 내관(內官) 등이 입는 의복과 장식에 대하여 기록하였는데, 그 수량과 재료, 크기 등이 상세하다. 그리고 의대의 말미에는 품목, 감결, 이문, 실입, 용환, 공장의 순으로 기록이 이어져 구체적으로 일이 어떻게 집행되었으며, 쓰고 남은 예산이 얼마인지, 이 일에 참여한 화원(畫員)이나 장인들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있다.

 

의주는 납채, 납징, 고기, 책비, 친영, 동뢰연 등 육례의 의식(儀式)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육례는 대부분 창경궁 명정전(明政殿)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다만, 친영은 출궁 의식(出宮儀式)과 환궁 의식(還宮儀式), 그리고 납비 친영 의식(納妃親迎儀式)으로 진행된다. 출궁과 환궁은 창경궁(명정문, 홍화문), 본궁, 종묘, 창덕궁(돈화문)의 코스로 진행된다. 그다음 납비 친영 의식은 왕이 왕비의 집(별궁)으로 가서 의식을 치르고 왕비와 함께 궁(창경궁)으로 돌아오는 의식이다. 이 모든 과정에서 참석자들이 해야 할 일거일동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각방 의궤(各房儀軌)의 기록들은 내용상 계사와 중복되는 점이 많지만, 계사는 계획을 적은 것이고, 각방 의궤는 실제 행한 일을 적은 것으로 계획과 실행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보인다. 특히 실입과 용환을 상세하게 드러내 어떤 물건이 몇 장, 몇 근, 몇 개, 몇 냥, 소요되고, 빌려 쓰고 되돌려 주는 물건이 무엇인지를 소상하게 적은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또한 물품 제조에 참여한 공장, 예컨대 사자관(寫字官), 화원(畫員), 칠장(漆匠), 옥장(玉匠), 책장(冊匠), 입장(笠匠), 소목장(小木匠), 침선비(針線婢) 등 모든 장인의 이름을 일일이 기록해 놓은 것도 주목된다. 물론 이러한 형식은 비단 이 의궤에만 보이는 것은 아니고 모든 의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방 의궤는 일방 의궤와 비슷하게 본방 소장, 품목, 이문, 감결, 실입, 용환, 환하 호조(還下戶曹), 공장의 순으로 되어 있다. 이방의 일은 의빈부(儀賓府), 예조(禮曹), 병조(兵曹)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의빈부 도사(儀賓莩事)와 예조 정랑(禮曹正郞), 그리고 부사과(副司果)가 낭청을 맡고 있다. 이방에서 하는 일은 주로 혼례식 때 의장(儀仗)에 필요한 중궁전의 여(輿 궁 안에서 타는 뚜껑이 없는 가마)와 연(궁 밖에서 타는 뚜껑이 있는 가마), 그리고 각종 깃발과 도구들을 관장하는 것이다. 깃발로는 백택기(白澤旗)가 쓰이고, 그 밖에 의장품으로 홍양산(紅陽繖), 홍개(紅蓋), 청개(靑蓋), 청선(靑扇), 봉선(鳳扇), 작선(雀扇), 정절(旌節), 금등자(金鐙子), 은등자(銀鐙子), 은장도(銀粧刀) 22종이 등장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은 의장용품이 쓰였다는 사실이 품목에서 확인되고 있다. 가령 깃발만 하더라도 백택기 이외에 홍문대기(紅門大旗), 주작기(朱雀旗), 청룡기(靑龍旗), 백호기(白虎旗), 현무기(玄武旗), 삼각기(三角旗), 정사기(丁巳旗), 정축기(丁丑旗), 정미기(丁未旗), 군주천세기(君主千歲旗), 후전대기(後殿大旗), 각단기(角端旗), 용마기(龍馬旗), 현학기(玄鶴旗), 백학기(白鶴旗), 황룡기(黃龍旗), 가귀선인기(駕龜仙人旗), 벽봉기(碧鳳旗), 정묘기(丁卯旗), 영자기(令字旗), 고자기(鼓字旗) 등 수십 종에 이른다. 이러한 물품들은 반차도(班次圖)에 실물이 그려져 있어서 이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품목에는 일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상급 관청에 품의한 내용이 담겨 있고, 이문에는 경기 감영 및 호조와 연락한 문건, 그리고 감결에는 상급 관청에서 내린 지시가 기록되어 있다. 실입에는 실제 소요된 물자(원자재)의 종류와 수량이, 용환에는 쓰고 돌려주는 물품의 종류와 수량이, 환하 호조(還下戶曹)에는 호조에 돌려준 물품이 각각 기록되어 있다. 이런 기록들은 당시 예산 집행이 얼마나 투명하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 준다.

 

공장에는 이방에 소속된 화원(畫員)과 장인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데, 화원이 6명이요, 장인은 44종에 102명이 동원되었다. 당시 최고급 기술자들이기는 하지만 신분적으로는 낮은 사람들인 장인과 심지어 침선비(針線婢)의 이름까지 적은 것은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삼방 위궤는 본방 소장, 옥책문(玉冊文), 각 차비 충찬위(各差備忠贊衞), 품목, 감결, 이문, 실입, 용환, 공장의 순으로 되어 있다. 삼방의 주요 임무는 옥책(玉冊)과 갑(), (), 금보(金寶), 보통(寶筒), 주통(朱筒)을 비롯하여 각종 그릇과 상탁(床卓) 등의 물품을 담당하였다. 삼방의 일은 공조(工曹) 및 한성부(漢城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공조 정랑(工曹正郞)과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이 낭청을 맡고 있다.

 

옥책문은 옥()으로 된 책()에 왕비 책봉을 적은 일종의 임명장이다. 각 차비 충찬위는 옥책을 비롯하여 안(), 욕석(褥席), 독책상(讀冊床), 금보(金寶) 등을 전달할 때 호위를 맡은 충찬위 임원의 명단이다. 반차도에 의하면, 옥책이나 금보는 가마에 싣고 가는데 그 뒤를 충찬위 군사가 호위하고 따라간다.

 

품목은 삼방에서 일의 집행 과정을 상급 관청에 품의한 문서이다. 품목 안에는 각 장인들이 물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원료와 도구의 종류와 수량, 크기 등을 세밀하게 기록한 것도 보인다. 장인의 종류는 유장(鍮匠), 권로장(權爐匠), 은장(銀匠), 동장(銅匠), 소목장(小木匠), 칠장(漆匠), 소로장(小爐匠), 옥장(玉匠), 시장(匙匠), 대인거군(大引鉅軍), 각수(刻手), 입사장(入絲匠), 침선비(針線婢), 다회장(多繪匠), 두석장(豆錫匠), 마조장(磨造匠), 천혈장(穿穴匠), 마경장(磨鏡匠), 보통장(寶筒匠), 보장(寶匠), 호갑장(護匣匠), 담편장(擔鞭匠), 병풍장(屛風匠), 보록장(寶盝匠), 귀기장[耳只匠], 야장(冶匠), 주장(注匠), 조각장(雕刻匠), 석수(石手), 납장(鑞匠) 등 모두 30종에 이른다. 수공업의 전문화된 모습이 여기에서도 드러난다.

 

품목 중에는 금보(金寶 왕비 직인), 보통(寶筒 금보를 넣는 금속그릇), 주통(朱筒 내부를 붉게 칠한 보통), 보록(寶盝 금보를 넣는 나무 상자), 주록(朱盝), 호갑(護匣 보록을 넣는 가죽 상자), 납염쇄약시구(鑞染鎖鑰匙具), 담편(擔鞭), 옥책(玉冊 왕비 책봉문), (), 과겹복(裹裌袱 겹보자기), 결영자(結纓子), 흑칠외궤(黑漆外樻), 금보배안상(金寶排案床 금보를 올려놓는 상), 독보상(讀寶床) 등 기물(器物)의 모습을 그림으로 설명하고, 그것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를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 밖에 별궁(別宮)을 비롯하여 여러 행사에서 필요한 그릇과 잡다한 도구들도 보인다.

 

상급 관청에서 지시한 감결은 문서가 많지 않다. 대부분 품목에 의해서 일이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이문은 훈련도감, 평안 감영, 경기 감영, 호조 등과 연락한 문서들이다.

실입은 다른 방()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수요된 물품의 종류와 수량이 기록되어 있고, 용환은 쓰고 남은 물자로서 호조에 돌려준 것을 적고 있다. 흥미있는 것은 나무 한 주(), 송판(松板) 두 장 등 아주 작은 수량이라도 남은 것은 모두 호조에 돌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공장은 삼방에 소속된 42종의 장인과 화원의 명단을 적고 있다. 일의 성격상 옥장, 각수(刻手), 도자장(刀子匠)이 가장 많다.

 

별공작 의궤는 선공감 봉사(繕工監奉事)가 감역관(監役官)이 되어 각방(各房)에서 부족한 물품을 추가 지원한 것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별궁과 수라간(水刺間) 등에 보낸 물건이 많다. 다음에 수본(手本)이라 하여 상급자에게 건의한 문서들이 이어지고, 간단한 이문에 이어 실입과 용환이 보인다. 마지막으로 공장에서는 24종의 장인 명단이 보이는데, 목수(木手)가 가장 많다. 전반적으로 각방 의궤에 비해 내용이 빈약하다.

 

수리소 의궤는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이 감역관이 되어 주로 혼례 행사와 관련된 건물의 보수와 장인들의 가가(假家 임시 처소) 건축에 관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수본, 이문, 실입, 공장의 순으로 되어 있다. 장인은 선공감 소속의 목수가 가장 많이 참여하고 있다.

 

영조정순왕후의 가례도감의궤의 마지막 부분은 50쪽의 반차도로 장식되어 있다. 화려한 채색으로 그려진 이 그림은 영조가 622일 인시(寅時)에 별궁에서 친영의(親迎儀)를 마치고 왕비와 더불어 대궐로 돌아오는 행차 장면이다. 이 반차도를 그리는 데 소요된 물품은 일방 의궤의 의주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이 반차도를 그린 화원은 일방 의궤의 공장질(工匠秩)에 보이는 화원 현재항(玄載恒), 이최인(李最仁), 이복규(李復圭), 신한동(申漢棟), 이필한(李必漢), 이광필(李光弼), 신덕흡(申德洽) 등으로 짐작된다. 그림을 그린 방법으로는 목판에 그림을 새겨 도장을 찍듯이 종이 위에 인쇄하고, 그 위에 색을 칠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이는 등장인물이 많을 뿐 아니라 의궤 5부를 똑같은 형태로 만들어야 하는 필요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단 이 의궤만이 아니라 현존하는 영조대 이후의 의궤들은 모두 같은 방법을 취하고 있다. 종전에 직접 붓으로 그리던 방식이 이때 와서 목판 채색법으로 바뀐 것은 진일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채색으로 쓰인 물감은 진분(眞粉), 삼록(三碌), 이청(二靑), 삼청(三靑), 당주홍(唐朱紅), 동황(同黃), 청화(靑花), 편연지(片臙脂) 등이다. 천연 물감을 썼기 때문에 25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변색되지 않고 생생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방 의궤의 친영의에는 친영 행렬에 참여하는 모든 수행원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이 그림에는 총 1188(보행인물 797, 기마인물 391)의 인물이 나타나 있다. 반차도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랑인 왕의 행렬이 앞부분을 구성하고, 신부인 왕비의 행렬이 뒷부분을 이루고 있다. 왕이 탄 연은 부련(副輦) 뒤에 있으며, 왕비의 연은 교명 요여(敎命腰輿), 옥책 요여(玉冊腰輿), 금보 채여(金寶彩輿), 명복 채여(命服彩輿)에 뒤이어 말을 탄 나인과 시녀에 둘러싸여 가고 있다. 왕과 왕비의 연 전후에는 전사대(前射隊)와 후사대(後射隊)가 따르면서 왕과 왕비를 호위하고 있으며, 연 부근에는 횃불을 든 사람들이 길을 밝히고 있다.

 

반차도의 또 하나의 특징은 행렬의 중앙에 위치하는 인물들은 전면을 향해 걸어가는 후면도(後面圖) 모습으로 그려져 있고, 양옆으로 가는 인물들은 안쪽을 향해서 넘어져 있는 측면도(側面圖)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그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아마 행렬의 중심부와 주변부를 구별하여 주변부 인물들이 중심부 인물을 감싸고 호위하는 모습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또한 대부분의 의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양식이다.

 

3.

 

국가의 주요 행사를 의궤의 형태로 남긴 것은 조선 시대에만 보이는 독특한 전통이다. 중국이나 다른 나라에는 이와 같은 형식의 의궤가 없다. 의궤는 문자 그대로 의식의 궤범을 만들어 후세인들이 그 궤범을 따르도록 하기 위한 목적에서 간행되었다. 따라서 후세인들은 앞 시기의 의궤를 참고하여 국혼(國婚)이나 국장(國葬) 등 국가의 주요 행사를 치렀다. 기록을 존중하는 조선 왕조는 실록(實錄)을 비롯하여 많은 연대기 자료들을 편찬했지만, 기록의 세밀성에 있어서 의궤를 능가하는 자료는 없다.

 

의궤의 사료적 가치는 매우 높다. 행사에 소요된 물품의 출납을 통해서 국가의 재정 상황을 이해할 수 있고, 물품 제조 과정을 통해서 수공업 상황을 알 수 있다. 또한 궁중생활사를 이보다 더 자세히 알려 주는 자료는 없다. 뿐만 아니라 채색화로 된 반차도는 당시의 복식과 의장 그리고 미술 수준을 알려 주는 자료도 된다. 말하자면 반차도는 문헌 자료가 지닌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시각 자료로서 더없는 가치를 지닌다.

 

의궤는 국어사 연구에도 도움을 준다. 지금은 없어진 생활 용구들의 이름이 무수히 보이고, 노비나 장인들의 이름도 매우 많다. 이들을 통해서 당시 최고의 기술자들이 누구인가를 알 수 있다. 끝으로 오늘날 단절된 옛 궁중 의식을 복원하는 데 있어서 의궤는 결정적 가치를 지닌다.

 

참고문헌

申炳周, 영조정순후 가례도감의궤 해제,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 서울대 규장각, 1994

劉頌玉, 朝鮮王朝 宮中儀軌服飾, 修學社,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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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김지환 | 작성시간 16.06.06 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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