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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이야기

정상기(鄭尙驥, 1678~1752)의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

작성자관운|작성시간16.06.06|조회수982 목록 댓글 2


정상기(鄭尙驥, 1678~1752)의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는 조선 영조 때 정상기가 제작한 한국의 옛 지도이다. 2007123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538호로 지정되었다.

 

42만분의 1 축척의 동국대지도는 축척과 방위가 매우 정확하여, 김정호가 지도를 제작할 때 중요한 자료로 삼았을 만큼 한국 지도역사에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1장의 전국도(全國圖)8장의 도별도(道別圖)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 지도로는 최초로 백리척을 이용하여 축척을 나타내고 지도상의 거리를 측정할 수 있게 하였으며, 그로써 한국의 윤곽이 정확히 드러나는 지도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영조가 그의 지도를 보고 감탄하여 베끼어 비치하게 했다.

 

1축이 272.2×137.9cm에 달하는 대형 조선전도의 족자로서, 표현된 범위는 조선과 만주의 일부를 아우르고 있다. 지도의 재질은 세견(細絹)으로 세 폭을 이어 만들었는데, 정교하게 그려진 솜씨로 볼 때 도화서의 화원이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의 전체적인 모습, 수록된 정보의 종류와 양이 정상기(鄭尙驥, 1678-1752)<동국지도>원본 계통과 동일하다. 1767년에 산청(山淸)과 안의(安義)로 바뀌는 산음(山陰)과 안음(安陰)이 명칭변경 이전의 지명으로 기록되어 있는 점 등에서 1755년에서 1757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국대지도>는 만주를 함께 그린 것을 통해 볼 때 정상기가 그린 전도인 <동국지도>를 원본으로 하여 관에서 필사한 초기의 지도로 연구되고 있다.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조선전기 계통의 조선지도에 비해 정확성이나 수록된 정보의 양 등에서 혁신적인 분기점을 긋고 있다. 현재 정상기의 <동국지도> 원본은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전도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판단되는 이 <동국대지도>는 학술사적 측면뿐만 아니라 문화재적 측면에서도 높은 가치를 지닌다 하겠다.

 

 

정상기(鄭尙驥, 1678- 1752)는 조선 시대 후기의 지도 제작자이며 지리학자, 실학자, 만학도이다. 성호 이익의 4대 제자중의 한사람이다. ()는 여일(汝逸) ()는 농포(農圃)이다. 동국대지도팔도분도를 만들었다. 특히 동국대지도는 한국 지도사에서 매우 중요시되는 지도로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등에 영향을 끼쳤다. 그의 아들 정항령과 손자 정원림을 거쳐 증손자인 정수영도 뛰어난 지도 제작자였다. 학역재 정인지의 8대손이며 장정공 정숭조(鄭崇祖)7대손이다. 성호 이익의 문인이다.

 

농포 정상기는 1678년에 태어났다. 그러나 일곱 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세도 기울어졌고 몸이 약하여 병환에 걸렸으므로 과거(科擧)를 단념하고 뜻을 학문 연구에 두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고상(高尙)한 마음과 뜻을 가지고 원대한 포부로 학문에 매진하였으며 반드시 옛 성현(聖賢)들과 같이 학문을 깊고 원대하게 탐구할 것을 마음속에 스스로 기약하고 조용히 들어 앉아 많은 책을 읽었다. 뒤늦게 자신보다 3년 연하인 성호 이익(星湖李瀷)에게 가르침을 청해 그의 문인이 된다. 이익을 통해 농포는 퇴계 이황, 남명 조식에게 뿌리를 둔 남인 성리학과 실학 사상을 수학하였다.

 

성호 이익의 제자들 중 이름난 제자의 한 사람이며 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派)가 이때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는데 공은 특히 지리학자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또 그가 어느날 지인에게 말하시기를 "선비가 비록 궁하게 되어도 뜻을 굽히면 안된다"고 하시더니 과연 백성을 다스리고 군사(軍士)를 다스리는 것과 산천(山川) 경제(經濟) 성곽(城郭) 차갑(車甲)이하 의약(醫藥) 기계(機械) 잠적(蚕績) 농경(農耕)등 사람이 생각할 수 있고 말로 열거할 수 있는 것은 못하는 것이 없어 국민생활을 크게 도울 방안을 설명하였다. 또한 사람들에게 점을 치고 문자를 써서 사람의 마음을 혼란케 하는 것은 못하도록 권고하였다. 그리고 높은 선비들이 입던 웃옷의 제작법을 잃어가고 있으므로 공이 그 문헌을 살펴 원본대로 제작하여 입도록 하였다.

 

오랫동안 조선을 여행, 8도 전국(全國)을 답사하고 과학적(科學的)인 백리척(百里尺)의 축척법(縮尺法)을 이용하여 팔도도(八道圖)를 도별로 제작해 거기에다 역대의 국경변천역사와 군현(郡縣)의 연혁(沿革)과 관방(關防)의 성곽(城郭) 해로(海路) 궁실(宮室)등에 대한 변천을 기술했으며 그리고 사람들에게 수행(修行) 섭양(攝養) 근업(勤業)3조목을 들어 가르쳤다.

 

아들 겸재 정항령(恒齡)이 영조를 시종(侍從)하였던 추은(推恩)으로 말년에 특별히 통정대부 행첨지중추부사(通政大夫行僉知中樞府事)의 벼슬을 가자(加資)받았다. 저서로는 인자비감(人子備鑑), 농포문답(農圃問答), 심의설(深衣設), 도검편(鞱鈐篇), 향거요람(鄕居要覽), 치군요람(治郡要覽), 작품으로는 동국여지도(東國與地圖) 등을 남겼다. 1752(영조 28) 85일 향년 75세로 사망하였다. 묘비문은 성호 이익이 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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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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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관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6.07 정상기 선생은 고산자 김정호 선생보다 100년 먼저 우리나라 지도를 그렸습니다. 그 분이 전국을 답사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 작성자김지환 | 작성시간 16.06.07 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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