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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이야기

강화도령 철종이 살던 잠저(潛邸), 용흥궁

작성자관운|작성시간16.06.07|조회수385 목록 댓글 1


강화도령 철종이 살던 잠저(潛邸), 용흥궁

 

 

 





 

'용이 일어난 곳' 이름만 거창허수아비 왕의 비애련가

용흥궁 정문

 

강화대교를 건넌 강화읍 관청리 강화경찰서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고려궁지·강화초등학교로 들어가는 골목이다. 이 골목으로 들어서면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될 때 순절한 김상용의 순절비각과 비각 건너편에 용흥궁공원이 도로변에 있는데, 이곳에서 약 100m쯤 떨어진 주택가에 조선 25대 임금(哲宗: 18311863) 이원범(李元範)이 살았던 집 용흥궁(龍興宮: 인천시유형문화재 제20)이 있다. 순절비각 골목에서 왼편에 한국 최초로 한옥기와로 지은 성공회 강화성당이 있고, 오른쪽이 용흥궁이다. 용흥궁은 더벅머리 총각 원범이 임금이 된 4년 후인 1853년 강화유수 정기세가 원범이 5년 동안 살았던 초가집을 헐고 지금의 기와집을 지으면서 붙인 것이다. 법통이 아닌 방법으로 임금이 된 사람이 이전에 살았던 집을 잠저(潛邸)라 하고, 대개 왕위에 오른 뒤에 잠저를 새로 짓는 것이 관행이어서 철종의 즉위한 뒤 비좁은 초가집을 헐고 새로 잠저를 지은 것은 하등 이상한 일도 아니지만, 주택가 좁은 골목에 솟을 대문도 아닌 비좁은 대문과 마당도 없는 옹색한 집에 용이 일어난 궁이라는 용흥궁 편액이 무색하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 속에서 허수아비 임금으로 살았던 철종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는데, 용흥궁은 현재 강화군에서 다도(茶道)예절 교육장으로 쓰고 있다.

 

용흥궁 본전 건물

 

여염집 대문보다 좁은 대문의 추녀 밑에 걸린 용흥궁이라는 편액이나 대문 왼편에 세워둔 영의정 정원용(鄭元容)과 그의 아들 정기세(鄭基世)의 공적비 2개가 가소로운데, 정원용은 영의정이 된 이듬해인 184965일 헌종이 승하하자 순조의 비인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의 명을 받아 원범을 왕으로 맞으러 이곳을 찾아왔고, 정기세는 정원용의 아들로서 훗날 강화유수가 되어 용흥궁을 지은 인물이라고 한다. 과연 궁을 짓는데 그들의 공적비가 꼭 필요했을까 싶다. 용흥궁은 입장료가 없고, CCTV만 설치한 채 관리인도 없다.

 

외전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자로 지은 외전이 있고, 외전과 정면으로 앞면 7, 측면 5칸의 자 기와집인 용흥궁이 남향으로 있다. 궁은 원범이 임금이 된 후 신축된 건물이어서 과연 누가 이 궁에서 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부는 닫아두어서 볼 수 없다. 내전 뒤로 돌계단을 올라 좁은 협문을 들어가면 일반 사대부가의 사랑채처럼 앞면 6, 측면 2칸인 자형인 별전이 있다. 별전을 내전의 뒤편에 지어졌다는 것이 조금은 어색한 건물 배치인데, 이곳이 현재 강화군의 다도예절 교육장이다. 별전 왼쪽의 낮은 대문에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면 약 20평이 될까싶은 집터가 원범이 5년 동안 살았던 곳인데, 이곳에는 철종이 살던 집터라는 철종잠저구기비각(哲宗潛邸舊基碑閣)만 있다. 이 비탈진 좁은 공간에서 희망 없이 살았을 원범의 모습이 눈에 선한데, 비와 비각은 강화부사 정기세가 용흥궁을 지으면서 세웠다.

 

용흥궁 현판

 

철종은 사도세자와 후궁 임씨 사이에서 태어난 은언군 이인(恩彦君 李裀)의 손자다. 사도세자에게는 적자인 정조 이외에 은언군·은신군·은전군 등 서자 셋이 있었으니, 혈통상 은언군은 정조의 이복동생이다. 그러나 은신군은 영조 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죽고 은전군도 정조 원년(1775) 3월에 사사되었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았던 노론 벽파는 정조가 즉위하면 자기들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을 알고 은언군을 임금으로 추대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었다. 하지만, 정조는 관련자를 처형하면서도 이복동생 은언군만은 제주도로 유배했다가 강화도로 이배했으나, 정조 사후 순조 즉위 원년(1801)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가 청의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 받은 사실이 밝혀지면서 함께 처형당했다(신유박해).

 

별전 사랑채

 

은언군의 자식 중 다섯째인 전계군(全溪君) 이광에게는 아들 셋이 상계군 원경(常溪君 元慶경응·원범 등 세 아들이 있었는데, 헌종이 후사가 없음을 알고 헌종 10(1844) 중인 출신 민진용이 상계군 원경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모반을 꾸미다가 발각되어 능지처참 당하고, 상계군과 전계군이 사사되면서 경응·원범 두 형제는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이때 원범의 나이 14살이었지만, 원범은 왕족이긴 해도 임금이 될 수 없는 역적의 자손이고, 또 아버지 전계군도 목숨이 위태롭다며 자식들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아서 원범 형제는 일자무식이었다고 한다.

 

별전으로 가는 길

 

18006월 정조가 승하하고 둘째아들 순조가 11세로 임금이 되니, 영조의 계비이자 대왕대비인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했다. 그러나 1804년 친정을 시작한 순조는 막강한 안동 김씨의 세도를 막으려고 풍양 조씨 조만영의 딸을 효명 세자의 빈으로 삼았다. 하지만, 효명세자(후에 익종으로 추존)1830622세로 죽고, 183412월 순조마저 승하하자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憲宗)8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그런데, 헌종도 1849622세의 나이로 후사 없이 죽으니, 왕실에는 6촌 이내의 왕족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 되자 순조의 비인 대왕대비 순원왕후를 축으로 하는 안동 김씨와 순조의 장남 효명세자(익종)비 신정왕후를 축으로 하는 풍양 조씨가 서로 자기에게 유리한 왕족을 임금으로 세우려고 각축을 벌였다. 궁중에서 가장 어른인 순원왕후는 덕흥대원군의 종손이자 항렬상 헌종의 조카뻘인 이하전(李夏銓)을 후사로 삼으려고 했으나, 이하전의 주변에 벽파 세력이 많은 것을 염려한 안동 김씨들은 순원왕후를 설득하여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손자 원범을 적격자로 지목했다. 신하가 임금을 택하는 택군(擇君)제도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수차 시행되었고 항렬상 왕의 동생이나 조카뻘이 왕통을 잇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안동 김씨는 자파에게 유리하도록 헌종의 7촌 아저씨뻘인 원범을 추대한 것이다. 조선 역사상 이렇게 법도에 어긋나게 왕통이 이어진 것은 조카 단종을 죽이고 즉위한 세조와 철종 두 케이스뿐으로 조정의 기강이 극도로 문란했음을 의미한다.

 

철종이 살던 집터(비각)

 

어느 날 갑자기 한양에서 관리들이 무리로 찾아오자 원범은 또다시 무슨 변고가 생겨서 자신을 체포하러 온 줄 알고 산속에 숨었는데, 원범을 찾지 못한 현지 관리들은 원범이 사귀던 처녀를 설득해서 내려오도록 했다. 새 임금을 모시러 온 정원용도 원범의 용모를 알지 못해서 첫 인사를 올리면서 이름자를 묻는 것으로 신원을 확인할 정도였다고 한다. 원범의 형 경응은 이후 전혀 기록이 없어서 유배 후 5년이 지나는 동안 죽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철종의 어진

 

아무튼 18496월 원범이 창덕궁에서 임금으로 즉위하고, 시나리오대로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했다. 2년 뒤 친정 조카뻘인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삼았으니,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허수아비가 된 철종은 이들로부터 강화도령이라는 별명으로 낮춰 불릴 정도였다. 매관매직과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끊이지 않자 1862년 봄 진주민란을 시작으로 삼남지방에서 민란이 발생하고 최제우가 창시한 천도교도 생겨났는데, 철종은 삼정(三政: 전정·군정·환곡)의 폐단을 없애고 민란 수습에 노력했지만 결국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현실정치에 실망하여 주색에 빠졌다. 임금이 된 직후 철종은 강화도에서 사귀던 처녀를 궁중으로 불러들이려고 했지만 안동 김씨의 반대로 김문근의 딸 철인왕후와 혼인하고, 왕비와 7명의 후궁 사이에서 56녀를 낳았지만 모두 일찍 죽었다. 궁인 범씨가 낳은 영혜옹주가 유일한 혈육이었으나, 영해옹주도 혼인한지 3개월 만에 죽었다. 그녀의 남편이 갑신정변을 일으킨 박영효이다.

 

1863년 철종이 재위한지 146개월 만에 33세로 죽자 경기도 서삼릉에 묻고 예능(睿陵)이라고 했지만, 또다시 후사문제가 대두되어 헌종의 모후인 조대비는 이하응과 결탁하여 이하응의 둘째아들 명복을 임금으로 세우니 그가 곧 고종이다. 200×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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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김지환 | 작성시간 16.06.07 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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