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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이야기

제24대 헌종(憲宗, 1827~1849, 재위 1834~1849) 이야기

작성자관운|작성시간16.06.07|조회수281 목록 댓글 2


24대 헌종(憲宗, 1827~1849, 재위 1834~1849) 이야기

 

 

 

 

순조가 죽자 정조의 손자인 헌종憲宗은 불과 8세에 즉위하였으나 나이가 어려서 할머니인 정조 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제목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지내다가 통치할 능력을 가질 수 있는 나이인 23살이 되자 후사도 없는 상황에서 죽는다.

 

즉위초기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으로 많은 천주교 신자를 학살하는 기유박해가 있었고 7년 후인 1841년에 비로소 친정체제를 갖추게 된다.

 

그러나 삼정의 문란과 과거제도의 부정과 비리가 판을 치자 사회적으로 불만이 팽배해지면서 이양선이 출현하고 민심이 어지러워진다. 헌종은 순조 때의 천구교탄압정책을 이어 받아서 많은 신자를 학살하고 오가작통법을 만들어 탄압하였다.

 

그리고 헌종 15년 창덕궁 중희당에서 23세의 나이로 후사도 없이 죽는다.

 

 

조선 제24대 헌종은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후에 익종翼宗으로 추존)와 조만영趙萬永의 딸 신정왕후神貞王后 풍양조씨사이에서 태어났다.

 

순조 30년인 1830년에 왕세손에 책봉이 되고, 아버지 효명세자가 불과 5세로 죽는 바람에 1834년 순조가 죽자 손자로 불과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순조의 비인 할머니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수렴청정을 맡아서 하게 된다.

 

 

그동안 안동김씨가 세도정치를 통하여 정국을 농단하는 동안 헌종은 그동안 숨을 죽이고 이를 그냥 지켜보아야 하였다. 1837년 안동김씨 김조근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자 안동김씨 세도가 계속 이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순조가 죽으면서 헌종의 외삼촌인 조인경에게 헌종을 돌보아 주기를 청하여 풍양조씨가 득세하고 순원왕후가 1840년 수렴청정을 끝내면서 1841년부터 헌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풍양조씨의 세도가 시작되어서 신정왕후의 오빠 조병구, 조득영의 아들 조병현 등이 조인영과 같이 세도정치를 이끌어 나간다.

 

 

헌종 때에도 풍양조씨와 함께 천주교 탄압을 계속하여 1839년에 유학을 정학으로 규정하고 서학은 사학으로 배척한다는 척사윤음을 발표하고, 1940년까지 외국인 주교인 앙베르 신부, 샤스탕과 모방 신부, 유진길, 정하상 등이 처형당하는 기해박해를 하였고, 천주교인을 적발하기 위하여 다섯집에 대하여 연좌제를 적용하는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적용하여 처벌하면서 그 처벌자는 확대되었다.

 

 

그리고 그의 치세기간 동안인 1846년 프랑스 해군함장 세실이 군함 3척을 이끌고 충청도 홍주에 있는 외연도에 정박해 조선정부에 기유박해때 프랑스인들이 처형받은 사실을 항의하고 문호를 개방할 것을 제의하는 답변서를 두고 떠난다.

 

 

이에 헌종은 당시 체포되었던 김대건 신부와 여러 천주교신자를 처형하였다. 다음해에는 세실함장이 전하고 간 국서에 대한 답변을 받아가겠다고 글로아르호가 나타났다 전라도 만경에서 폭풍으로 침몰되어 다른 배를 타고 돌아갔다.

 

 

이와 함께 헌종도 나이가 들면서 외척 풍양조씨의 세도정치에 염증을 느끼면서 이를 바로 잡고자 하였다. 그런데 당시 헌종과 조병구 사이에 안경과 관련한 재미난 일화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조병구는 조만영의 아들로 눈이 매우 나빠서 오늘날로 말하면 고도근시에 해당하였는데 우리나라 경우 1970년대만 하더라도 안경에 대하여 한가지 금기시하는 터부가 있었는데 어른들이나 자신보다 높은 사람앞에서는 안경을 끼지 못하였다.

 

 

 

정조 역시 눈이 나빠서 안경을 끼어야 하는데 나이 많은 신하들 앞에서 건방지다고 생각하여 안경을 끼어야 할지를 놓고 많은 고민을 하였고 순종 역시 고종을 뵈울 때 어려움을 겪었다.

 

 

 

조선말 우리나라에 와 있던 묄렌도르프도 고도근시인데 안경을 끼지 않고 왕을 뵈어야 하였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당하였다고 하며 나중에 고종이 특별히 안경끼는 것을 허락하기도 하였다.

 

 

조병구는 자신이 고도근시여서 헌종이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여 안경을 끼고 헌종을 만나는데, 헌종은 외삼촌인 조병구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외삼촌에게 외숙의 몸에는 칼이 들거가지 않습니까?” 하여 조병구에게 말하였는데,

 

 

얼마 후에 신정왕후를 뵐 때에도 안경을 끼고 있자 다시 질책을 들어 조병구는 집으로 돌아가 음독자살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헌종이 외숙의 안경에 대하여 한 말이지만 풍양조씨에 대한 경고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풍양조씨의 권세도 1846년 조만영이 죽는 등 그 일문이 죽으면서 다시 정권은 안동김씨한테 넘어간다.

 

 

 

그리고 헌종 자신이 나이가 들어 새로이 뜻을 펼쳐볼 나이가 되자 뜻을 펼쳐볼 새도 없이 헌종 15년인 18496623세 젊은 나이로 창덕궁 중희당에서 병사한다.

 

 

 

헌종은 여인을 좋아하여 왕비가 2명이고 후궁이 3명이나 될 정도이고 궁중에 그가 가까이 하지 않은 궁녀가 드물 정도로 많은 여인들과 관계를 하였다고 하는데 정작 자신의 후사하나 두지 못하여 6촌이내에 아무도 없을 정도로 손이 귀하였다.

 

 

헌종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며느리 풍양조씨집안으로 권력이 넘어가는 것을 막아서 안동김씨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옥쇄부터 챙겼다고 한다.

 

 

영조의 유일한 혈손이 되는 전계군의 아들 이원범을 찾아 내어서 자신의 아들로 한 다음에 후사로 삼으니 강화도령 이원범으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강화도령 이원범바로 철종이다.

 

헌종은 죽어 경기도 구리시에 자리잡은 동구릉 내에 있는 경릉景陵에 묻힌다.

 

동구릉에 있는 경릉(순조, 효현왕후, 효정왕후)

 

 

추존된 헌종의 부모 익종과 신정왕후

 

신정왕후神貞王后 풍양조씨(헌종의 어머니)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후에 익종 또는 문조로 추존)의 부인 신정왕후 풍양조씨는 순조 8년인 1808년 한양의 한강동쪽에 위치한 두모포(지금의 옥수동 295번지 일대 부근)에서 태어난다.

 

 

어머니는 송시연의 딸 은진송씨이다. 그녀는 순조 191012세때 1살이 어린 11세 세자빈으로 간택이 되었다.

 

 

순조 30년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던 중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자 23세로 홀몸이 되었으며 효명세자와 사이에 아들을 두었는데 바로 헌종憲宗이다.

 

 

신정왕후가 태어난 옥수동에는 쌍호정이 있었는데 이 명칭은 신정왕후 조씨가 태어날 때 태몽을 꾸었는데 쌍호랑이 두 마리가 정자 옆에 앉아 있었다고 하여 쌍호정이라고 하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신정왕후는 1808년 순조 8126일에 태어나 12세인 18191011일 왕세자빈으로 책봉돼 1827년 헌종을 낳았다. 헌종이 왕통을 이어받자 왕대비가 된다.

 

 

 

1834년 헌종이 왕위에 오르며 효명세자가 익종으로 추존되자 조씨는 대비가 된다. 그리하여 일시적으로 풍양조씨가 집권을 하나 철종이 즉위하며 신정왕후는 시어머니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권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18578월에 순원왕후가 죽자 대왕대비가 된다. 그리고 18638월에 철종이 후사도 없이 죽자 안동김씨세도에 대한 반감이 큰 흥선대원군과 친정조카 조성하와 손을 잡고 흥선대원군의 2자 명복을 익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앉으니 바로 고종이다.

 

그러나 고종이 나이가 어려서 자신이 고종 3년인 18662월까지 수렴청정한다.

 

이후에 흥선대원군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하고 고종 27년인 1855417일 경복궁 흥복전에서 83세에 죽어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역내에서 초입에 위치한 곳에 있는 수릉綏陵에 헌종과 함께 묻힌다.

 

 

익종翼宗(효명세자)

 

 

효명세자는 1809년에 태어나 순조의 원자가 되고 왕세자로 책봉되어서 순조가 재위하던 시절에 순조 대신 대리청정을 하던 중에 순조 30년인 183056일 창덕궁 희정당에서 숨을 거둔다.

 

 

같은 해 84일 서울 동대문구 석관동에 있는 경종 무덤 의릉懿陵 오른쪽에다가 묘를 조성하였는데 연경묘延慶墓라고 하였다.

 

 

그러나 1835년에 헌종이 즉위하면서 519일 효명세자가 익종으로 추존이 되면서 연경묘는 수릉綏陵으로 이름이 바뀐다. 그러나 풍수상의 문제가 있다하여 18465월 양주에 있는 용마산 아래로 이장하였다.

 

 

 

그러나 다시 철종 6년인 18558월 현재의 위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내에 있는 동구릉東九陵(사적 제193)의 태조능인 건원릉 좌측에 자리를 잡는다. 신정왕후가 1890년 죽자 같은 해 830일에 합장이 된다.

 

 

수릉은 효명세자가 세자로 죽어 격식에 있어 다른 조선 왕릉이 일반적으로 3단으로 구성된 데 비해 2단으로 구성되고, 다른 왕릉들이 우상좌하라 하여 왕이 오른쪽에 자리를 잡고 왕비가 왼쪽에 배치되는 것과는 달리 수릉은 반대로 배치되어 있다.

 

 

그 이유는 효명세자는 세자 시절에 죽었으나 신정왕후는 대왕대비로 죽어서 신분상의 차이가 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헌종의 비와 후궁들

 

 

 

헌종憲宗은 헌칠한 키에다 이목구비가 수려해 뭇 여성들의 주목을 받았다고 하는데 당시 궁녀치고 순조의 성은을 입지 않은 사람이 드물 정도로 여성편력이 많을 정도로 자유분방하였던 것으로 전한다.

 

 

헌종이 여자를 좋아한 데는 당시 외척의 세도정치가 판을 치고 있어 왕으로서 할 일이 없었던 것도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보니 울안에 있는 궁녀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민간에 있는 규수중 인물이 출중하다고 알려진 예쁜 여인들을 선발하여 반월이라고 하는 곳을 창덕궁 건양재 동쪽에 기정이라고 하는 지금으로 본다면 주막이나 까폐비슷한 장소를 만든다.

 

 

 

또한 자신은 변복을 하고 궁녀는 주모로 분장을 하게 하여 운영하게 하였고 좀 한가하거나 고민을 할 일이 생기면 이곳을 찾아서 쉬면서 즐겼다고 한다.

 

 

그리고 헌종은 서화를 좋아하고 청동기, 비석 등에 새겨진 금석학을 연구하기를 즐기고 겼는데 자신이 수집한 물품은 궁중에 소장하였다.

 

 

 

그는 서화 및 인장을 수집해 창덕궁 뒤편에 있는 승화루承華樓에 보관을 하고 이곳에서 당대 최고의 문인을 만나고 추사, 단원, 겸재 등의 그림뿐 아니라 북송 때 휘종황제 그림, 문징명, 남영 등 명·청 대의 화가나 글까지 소장해 수시로 이곳에 들러서 이를 감상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승화루에 소장되어 있던 목록집인승화루서목이 전하는데 4,555점이 기록되어 있고 그 중 900점이 서화이다.

 

특히 당시 이곳을 방문한 추사 김정희의 제자인 허련은 김정희의 주선으로 헌종을 찾게 되는데 평민으로 궁중에 출입할 수 없자 무과에 급제시켜 궁에 출입을 시킬 정도로 헌종은 허련을 아꼈다고 하는데 이런 영향이어서 인지 헌종이 거주하는 곳에는 완당 추사의 글씨로 가득 찼다고 한다.

 

 

헌종은 이외에 허련에게 시법입문이란 서책과 3백금을 하사하여 허련이 한양에 거주할 수 있는 초가집을 구입하게 하고 귀양가 있던 김정희 안부도 물었다고 한다.

 

 

 

이처럼 헌종은 시, , 화를 좋아하여 낙선재에 걸려 있는 편액은 청나라 금석학대가 섭지선의 글씨이고 대청마루의 주련은 추사 김정희의 스승인 옹방강의 글씨라고 하며 낙선재 뒤편에 있는 육각형의 정자인 평원루도 청의 옹수곤의 글씨이다.

 

효현황후

 

 

순조의 비인 효현왕후孝顯王后는 안동김씨 김조근金祖根과 어머니 한산이씨 사이에서 순조 28년인 18283월 한양 안국동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가 서로 세력을 다투는 과정에 있었는데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는 자신의 친정집안 안동김씨 집안에서 간택하였다. 김씨는 10살 때인 18373월 왕비로 책봉되고 4년후에는 가례를 올리고 왕후가 된다.

 

 

그러나 그녀는 왕비가 된지 불과 2년밖에 되지 않아 18438월 소생도 없이 창덕궁 대조전에서 16세의 어린 나이로 숨을 거둔다.

 

죽어서 그녀는 경기도 구리시 용두동에 위치하고 있는 경릉景陵에 묻히게 되는데 다른 능과 달리 헌종과 계비 효정황후와 나란히 묻혀있는 삼련릉三連陵의 형식으로 묻힌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죽어서 부인간의 갈등은 없는지 모르겠다.

 

고종 때 대한제국이 되면서 순종 때 효현성황후孝顯成皇后로 추존된다.

 

 

효정황후

 

 

효정왕후孝定王后 남양홍씨는 효현왕후가 죽자 새로 간택하여 얻은 계비로서 홍재룡洪在龍과 어머니 죽산안씨 사이에서 순조 31년인 18311월 태어났다.

 

 

그녀는 1844914세살 때 4살이 더 많은 18세의 헌종의 비로 간택이 되었으나 헌종이 자신이 간택되었을 때 제외되었던 경빈김씨를 다시 후궁으로 맞아 들이면서 별로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래도 헌종으로부터 딸 1명을 얻었다고 하는데 일찍 죽는다.

 

 

헌종의 가례도 병풍도

 

 

1849년에 헌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게 되면서 19세의 어린 나이로 대비가 되어서 어른 노릇을 하여야 하였다. 광무 8년인 19031173세로 죽는다.

 

무덤은 효현왕후와 같이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내에 있는 삼연릉 경릉에 나란히 묻히는데 오른편부터 현종, 효현왕후, 효정왕후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후궁 경빈김씨와 궁인김씨

 

 

이외에 후궁으로는 경빈김씨와 궁인김씨, 정빈윤씨 등 3명이 있었다. 그 중에 숙의김씨는 딸 1명을 낳았으나 일찍 요절하였다. 그리고 간택한 후궁으로서 윤치수의 딸 정빈윤씨가 있었으나, 정사 실록에도 그 이름조차 전하지 않는다.

 

그리고 헌종이 어떤 다른 여인보다도 마음 속으로 사랑한 여인은 경빈김씨가 있는데 헌종은 그녀를 매우 사랑하였다고 하는데 그 일화를 간단히 살펴보자.

 

헌종 재위 4년에 1838년 간택령을 내려서 첫번째 왕비 효현성황후를 왕비로 간택하였으며 4년뒤 왕비로 책봉을 하였으나 3년뒤에 요절하였고, 자식도 없어서 1년후에 다시 왕비 간택령을 내리게 되었는데, 이때 다른 간택과 달리 헌종이 직접 간택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헌종은 당시 삼간택에 올라온 처녀 중에서 김재청의 딸인 김씨를 마음에 들어 하였으나, 순원왕후와 수빈박씨는 이들 중에서 경빈김씨보다 홍씨가 더 참하다는 이유로 왕비로 간택한 여인은 홍재룡의 딸이었다.

 

당시 왕실에는 사도세자의 서자들의 혈통을 제외하고는 다음 왕위를 이을 왕자가 없어서 후궁을 간택하여 들이기로 하였는데 당시 헌종은 계비를 맞을 때 본 바 있는 사가에 나가 있던 김씨를 간택하여 궁안으로 불러들인다.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안동김씨측도 왕후의 친정인 남양홍씨가문이 권력을 잡게 될 것을 경계해 이를 반대하지 않았다.

 

헌종은 경빈김씨를 후궁으로 맞아들이자 경빈김씨가 왕비와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1847년에 창경궁(지금은 창덕궁) 서쪽에 별궁인 낙선재를 지어서 자신의 서재와 사랑채로서 지어 자신과 경빈김씨가 함께 살았다.

 

창덕궁에 있는 낙선재

 

 

 

헌종이 화려한 것을 경계하여 단청을 사용하지 않은 건물로 이루어졌는데 헌종이 서화를 좋아하다보니 회랑을 만들어 작품을 걸어서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에 할머니 순원왕후와 경빈김씨의의 거처로 수강재와 석복헌을 새로 지어서 선물하였다. 헌종은 간택된 후궁은 종2품인 숙의로 책봉하는 관례를 무시하고 김씨를 바로 정1품 빈에 책봉하였다.

 

창덕궁의 석복헌

 

그런데 지금 낙선재의 위치는 창덕궁의 정문을 통하여 들어 갈 경우 창덕궁 끝자락에 위치하여 창덕궁인 것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궁궐지에서는 창경궁에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경빈김씨는 사계 김장생의 8대손인 주부 김재청과 평산신씨 신명하의 딸 사이에서 1831년에 태어나 정식으로 간택하여 들인 후궁으로 궁호는 순화궁이다. 순화궁 건물은 지금의 종로구 인사동 태화빌딩 근처이다.

 

 

 

헌종 13년인 1847년인 1020일에 16세때에 입궁하여 빈으로 책봉되었으나 소생이 없었다 하며 헌종이 죽자 궁밖 사가로 나와 살았다고 하는데 검소하게 홀로 지내며 생활하다 고종 44190761일에 77세 나이로 사망하였다.

 

 

경빈 김씨는 죽어서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에 있는 서삼릉에 묻히게 된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 경빈김씨가 살던 낙선재 석복헌에는 조선의 마지막 왕비인 순정효왕후 윤비가 1966년까지 살다가 죽었고 이어서 영왕과 이방자 여사가 1966년부터 1989년까지 이곳에 살면서 사회복지에 헌신하다가 그리고 이어 덕혜옹주가 수강재에서 기거하다가 죽는다.

 

 


동구릉의 경릉(헌종, 효현왕후, 효정왕후)




창덕궁 낙선재


낙선재와 석복헌 후원


석복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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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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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김지환 | 작성시간 16.06.07 즐감
  • 작성자관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6.07 1903년 헌종(憲宗)의 계비 효정왕후가 돌아가시면서 동구릉 경릉(景陵)에 마지막으로 들어가시게 됩니다. 참고로 문조의 비 신정왕후(神貞王后) 趙氏는 1890년에 승하하시어 동구릉 수릉(綏陵)에 합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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