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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이야기

09. 조선시대 붕당정치(朋黨政治)의 형성과 전개

작성자관운|작성시간16.06.16|조회수274 목록 댓글 2


09. 조선시대 붕당정치(朋黨政治)의 형성과 전개

 

 

 


 

 

벽파(僻派)-조선 정조시기 정조의 탕평책을 반대한 세력이다.

사도세자로 널리 알려진 장헌세자는 영조의 둘째 아들로 효장세자가 사망하자 세자에 책봉되었다. 영조와의 갈등으로 정신병을 앓고 비행을 저지르다 폐위된 뒤 뒤주에 갇혀 사망한다. 이후 조선의 조정은 장헌세자의 죽음에 대해 안타까운 죽음이라는 입장과 당연한 죽음이라는 입장으로 나뉜다. 벽파는 장헌세자의 죽음이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반대편에 선 사람들은 시파라 한다.

벽파는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의 처가인 외척을 중심으로한 노론의 일부 세력이 그 중심을 이루었다.

시파와 벽파의 호칭이 처음 생겨난 건 문헌상의 언급을 종합하면 정조 1219년 사이이며 정조의 임오의리에 대한 입장차이를 배경으로 노론의 우위를 고수하는 부류가 벽파를 이루었다.

벽파는 정조 사후 순조가 어린나이로 즉위하여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다시 권력을 장악했다. 권력을 장악한 벽파는 장헌세자의 추승을 건의하였다는 구실로 시파를 탄압하여 조정에서 몰아냈다. 노론 벽파는 노론 사이의 정파적 수준의 존재로, 정조 사망 시점에 핵심권력에 가장 근접해 있었지만 압도적인 세력이라 할 수 없었다. 심환지 세력은 정조 사후 유리한 지위를 활용해 더욱 강력한 세력과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강경한 행동에 나섰다고 보인다. 신유박해(1801)라는 도발적 양상은 벽파가 일반적 인식처럼 강고한 집단이 아니었다는 방증이며, 5년 후 병인경화(丙寅更化, 1806)로 벽파가 숙청된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한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순조가 친정하게 되자 순조의 외척이었던 김조순를 중심으로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벽파 역시 붕괴되고 만다. 김조순은 비변사를 중심으로 권력을 장악한 후 시파를 다시 중용하였다.

 

시파(時派)는 조선 정조 시기 정조의 탕평책을 지지한 세력이다.

사도세자로 널리 알려진 장헌세자는 영조의 둘째 아들로 효장세자가 사망하자 세자에 책봉되었다. 대리청정을 맡길 정도로 영조의 신임이 두터웠으나 노론을 지지하는 영조와의 갈등으로 폐위 된 뒤 뒤주에 갇혀 사망한다. 이후 조선의 조정은 장헌세자의 죽음에 대해 안타까운 죽음이라는 입장과 자업자득이라는 입장으로 나뉜다. 시파는 장헌세자의 죽음이 안타까운 죽음이라 여겼다. 반대편에 선 사람들은 벽파라 한다.

시파에는 남인과 소론, 그리고 노론의 일부가 가담하였다. 시파와 벽파의 입장차는 장헌세자의 죽음으로 생겨난 것이나, 정조가 즉위한 뒤 숙위소가 설치되고 홍국영이 숙위대장으로 세도정치를 편 1778년 이후 본격적인 대립이 시작되었다. 정조는 자신의 탕평책을 지지한 시파를 중용하여 개혁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정조 시기 중용되었던 시파는 정조 사후 순조가 어린나이로 즉위하여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벽파를 중용하자 몰락하였다. 한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순조가 친정하게 되자 순조의 외척이었던 김조순를 중심으로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벽파 역시 붕괴되고 만다. 김조순은 비변사를 중심으로 권력을 장악한 후 시파를 다시 중용하였다.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조선 후기의 문신, 정치인이다. 영조 후반과 정조대의 남인의 영수로 정조의 최측근 인사 중의 한사람이며, 정약용, 이가환 등의 정치적 후견자였다. 강박과 오광운의 문인이며 사도세자를 가르친 스승이자 세자궁의 측근신하의 한 사람이었다. 본관은 평강,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 번옹(樊翁),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영조조와 정조조의 남인 지도자로 사도세자의 측근이자 스승이었으며 세자의 사후에는 세손의 측근이었다. 정조 즉위 후 남인의 영수로 중용되어 요직을 역임하였다. 제도의 개선과 개정에 관심을 가졌고, 1781년 서명응(徐命膺)과 함께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하였으며, 가톨릭교에 대하여 온건 정책을 폈다. 1790년에는 영의정직의 공석으로 단독으로 국정을 보좌하기도 했다. 충청남도 출신.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경기도 광주부에서 태어난 조선 정조 때의 문신이다.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과학자·공학자이다.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美庸),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문암일인(門巖逸人),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중농주의 실학자로 전제 개혁을 주장하며 조선 실학을 집대성하였고, 수원 화성 건축 당시 기중가설(起重架說)에 따른 활차녹로(滑車轆轤 : 도르래)를 만들고 그를 이용하여 거중기를 고안하여 건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유교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당대 조선을 지배한 주자학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시도하였다. 문집으로 여유당전서가 있다.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 정조의 다른 최측근인 홍국영과 인척관계이기도 하다.

 

세도정치(勢道政治)는 조선시대 왕의 신임과 직접적인 위임(委任)을 받는 형식으로 정권을 잡고 나라를 다스리던 일이다. 세도 정치는 그 형태에 따라 정조 이전과 이후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양반정치의 파탄과 세도

 

영조·정조와 같은 뛰어난 군주가 탕평책을 쓰고 있는 동안은 어느 정도 정치의 안정을 기할 수가 있었다. 영조 말년부터 정조 초년에는 정조를 보호한 공이 있는 홍국영이 도승지로 있으면서 정권을 농단하였으나, 그리 오래 가지 않아 정권에서 배제되었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외척세력은 왕권을 압도하고, 이른바 세도 정치가 시작되었다. 즉 순조 초에 정조의 유명(遺命)으로 안동 김씨인 김조순이 국구(國舅)로서 정치를 전담하다시피 하였는데, 이에 따라 그의 일족은 모두 영달하여 노론인 안동 김씨는 많은 관직을 차지했다.

이렇게 권력을 독점하던 안동 김씨의 전권 시대는 풍양 조씨라는 강적을 만나 일시 후퇴하였다. 그것은 익종(翼宗)의 비()가 조만영의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헌종 때에는 조씨 일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어 조씨는 많은 관직을 역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철종이 즉위하면서 비가 김문근의 딸이었으므로 다시 세도가 안동 김씨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형세였으므로 종실(宗室)이라하더라도 김씨 일문의 세력에 억눌려 살아야 했으며, 다른 세력이 안동 김씨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 정치에 참여할 기회 또한 희박해졌다. 따라서 정치 기강이 극도로 문란해져서 유교적인 관료 정치라는 무너지고, 붕당 사이의 세력 투쟁 시대로부터 척족(戚族)이 정권을 농단하는 시대로 변화한 것이다.

왕실의 외척이 정권을 독차지함으로써 척족의 가문이 고위 관직을 독점하여 정치 기강이 더욱 문란해졌다. 그로 말미암아 농민들의 피해는 더욱 커졌으며, 많은 뇌물을 바치고 관직을 얻은 관리들은 그 대가를 농민에게서 짜 내어 자신의 이익만을 얻어 갔다.

당시 재정을 확충하는 제도는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이었으며, 통틀어 삼정(三政)이라 한다. 세도 정치와 맞물려, 삼정은 날로 문란해졌다. 전정에서는 삼수미·대동미·결작·도결 등의 폐해가 극심했고, 군정에서는 황구첨정·백골징포·족징·인징 등의 각종 편법이 생겨서 농민을 괴롭혔다. 환곡 또한 고리(高利)로 이익을 착취하는 수단이 되었으며, 반작·허류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농민을 괴롭혔다.

이러한 삼정의 문란은 농민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었을 뿐 아니라, 국가의 재정까지 위협했고, 곳곳에서 민란이 발생하게 되었다.

 

홍국영(洪國榮, 17481781)은 조선 영조, 정조대의 세도 정치가.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자는 덕로(德老)이다. 세손궁의 궁료(宮僚)로 정조(正祖)의 총애를 얻고, 정조 즉위 후 부홍파(扶洪派)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세간에는 흔히 권력을 잡은 후 세도를 부리다 축출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축출 이유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은 조선 후기의 문신, 정치가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는 사원(士源), ()는 풍고(楓皐),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영의정을 지낸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의 현손이며 서흥부사(瑞興府使) 김이중(金履中)의 아들이다. 노론이었으나 시파에 속하였으며, 정조의 신임이 바탕이 되어 딸인 순원왕후가 순조의 왕비로 책봉되면서 어린 순조를 도와 국구(國舅)로서 30년간 순조를 보필하여 군덕(君德)을 함양시키는 일에 진력하여,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순조 즉위 후 영돈녕부사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졌고 정순왕후 사후 노론 벽파를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사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저서로는 풍고집이 있고 소설인 오대검협전을 쓰기도 했다.

 

조만영(趙萬永, 17761846)은 조선 후기의 정치가·문신이다. 자는 윤경(胤卿), 호는 석애(石崖), 시호는 충경(忠敬), 본관은 풍양(豊壤)이며, 조진관(趙鎭寬)의 아들이다.

1813(순조 13) 능원량(陵園郞)의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이 된 뒤, 지평(持平사간원정언, 겸문학 등을 역임하고, 1816년 전라도 암행어사로 나갔다. 1819년 부사직으로 있을 때 딸이 세자빈(世子嬪 : 순조의 장남인 추존왕 익종비)으로 간택되자, 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에 봉해졌다. 이후 그 일파인 풍양 조씨가 정계에 등장하자, 그 중추적 인물로서 안동 김씨와 세도를 다투게 되었다.

이듬해 행 이조 참의가 되고 1821년 금위대장(禁衛大將), 이어 이조·호조·예조·형조의 판서와 한성부 판윤, 판의금부사 등 요직을 역임, 1845년 궤장(机杖)을 하사받고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특히 글씨를 잘 썼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追增)되었다.

 

홍봉한(洪鳳漢, 17131778)은 조선 말기의 대신으로,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이며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장인이다. 딸이 세자빈으로 뽑힌 이듬해인 1744년 문과에 급제한 뒤 사관이 되었다.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광주 부윤·어영대장 등을 지내고 좌의정, 영의정에 이르렀다. 1761(영조 37) 세자의 평양 원유사건으로 이천보, 민백상 등이 갑자기 의문의 최후를 맞이하자 일약 승진, 우의정에 발탁되었다. 그 뒤 영의정에 재직 중 사도세자의 처형을 목격하였으나 반대하지 않았다. 영조의 탕평책에 부응하여 당쟁의 폐해, 인재의 발탁 등의 내용을 담은 시무 6조를 제시하는 등 국정 쇄신에 노력하였다. 영조의 탕평을 따르는 탕평파의 우두머리였고 노론측에서는 노론의 당론을 외면하고 임금의 뜻을 쫓아 아부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조선 고종 때 사도세자가 장종으로 추존되면서 홍봉한도 부원군의 증직이 내려져 영풍부원군에 추봉되었다. 고구마를 처음 도입한 조엄은 그의 매부였으며, 그의 누이는 익종비 조대비의 증조할머니가 된다. 자는 익여(翼汝), 호는 익익재(翼翼齋), 시호는 익정(翼靖)이며,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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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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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관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6.16 역사에서 배웠듯이 백성의 삶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정쟁 가지고 서로 죽이고 살리며 싸워서는 아니되겠습니다. 이런말 하면 속이 다 뒤집어지기 때문에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고자 합니다. 끝까지 살펴주신 분께 감사드립니다.
  • 작성자김지환 | 작성시간 16.06.16 오늘날 구캐의원들하고 또옥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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