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人의 魂 樓亭
한국의 혼 누정--2
11.삼가정 류봉시(해평)
10. 광풍정 , 제월대 (경당 장흥효)
9. 연좌루, 원지정 (하회)
8. 겸암정 (하회)
7. 군자정 (청도 화양읍)
6. 백운정 (안동 천전)
5. 황강정, (합천 쌍책)
4. 뇌룡정 (합천 삼가)
3. 노송정 (도산)
2. 추월한수정 (도산)
[한국의 혼 樓亭 .11] 가정 류봉시의 구미
해평면 '삼가정'
(제자·자문: 養齋 이갑규)
골짜기 초당지어 두 아들 교육 '山中之敎'
차남 관현은 사도세자 사부 지내…대대로 문장가·급제자 배출
원소재지는 '최고 문향' 안동 무실…댐 건설로 수몰돼 옮겨와
'수류우향(水柳寓鄕)'.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 마을 초입에 우뚝 서 있는 자연석에 새겨진 글씨다. 마을과 관련이 있는 것이겠지만, 정확하게 무슨 뜻을 담고 있는지는 몰라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냥 지나친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수류우향' 표지석은 안동 무실(水谷)의 전주류씨가 조상의 혼이 어린 고향을 떠나와 새로 터전을 잡은 타관마을이란 뜻을 담고 있다. 무심히 지나가는 길손에게는 좋은 터에 자리 잡은 깨끗한 마을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가 아닌 남들은 결코 알 수 없는, 이곳 주민들의 망향의 감회가 서려 있는 마을이다. 70여호가 새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 마을의 어르신 대부분은 아직도 고향 그리는 마음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무실류씨는 전주류씨 시조로부터 8세손 되는 시정공(寺正公) 류성(柳城)이 안동 수곡(水谷:무실)에 입향한 이후 형성된 가문이다. 시정공은 영주에서 살다 의성김씨 청계(靑溪) 김진(학봉 김성일 부친)의 사위가 되면서 안동으로 와 살게 되었다. 시정공의 안동 입향 이후 후손들이 400여년간 무실을 중심으로 박실(朴谷), 한들(大坪), 마령(馬嶺), 고천(高川), 갈전(葛田), 삼산(三山), 가야(佳野) 등지에서 수백호가 번성하며 살게 된다. 이들 중 문과 10명, 무과 3명, 생원·진사 33명 등의 급제자가 배출되고, 또한 대대로 문행(文行)이 이어져 74명의 문집이 출간된 전국 최고의 문향이었다.
그러나 임하댐 건설로 인해 그 터전이 수몰지역이 되면서 1987년을 전후로 그 중 70여호가 이 일선리에 새 터전을 마련, 옮겨오게 된 것이다. 이곳으로 집단 이주하면서 옛 터전에서 이건(移建)해온 건물 중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이 10여점에 이른다.
#아들 학문을 위해 세운 초당
삼가정(三 亭)은 이 마을 최고 위쪽에 있다. 안동 박실에서 이건한 정자 중 하나인 삼가정은 가정( 亭) 류봉시(柳奉時:1654~1709)가 무실 종가에서 위동(渭洞)으로 분가한 이후 두 아들의 교양수학(敎養修學)을 위해 지은 서재(書齋)다.
가정은 분가 후 용와( 窩) 류승현, 양파(陽坡) 류관현 두 아들을 낳았다. 가정은 자신의 학문은 물론이려니와 두 아들의 학문 성취를 위해 무실에서 조금 떨어진 위동에 터를 잡고 이 초당을 지었다. 그리고 두 아들의 학문이 대성하기를 염원하며 초당 앞에 가죽나무( ) 세 그루를 심었다. 한 그루는 자신의 완성을 위한 염원을 담았다. 자신의 호를 가정이라 한 데서도 그런 염원과 신념을 읽을 수 있다.
숙종 때 인물인 가정은 초야에 은둔한 학자로, 일생 동안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면서 자녀 교육에 정성을 다했다. "인륜에 돈독하고 의리를 좋아했으며, 시례(詩禮)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두 어진 아들을 두었는데 재주가 뛰어나고 위인의 자질과 도량이 있었다. 그래서 소란하고 어지러운 마을에서 올바르게 가르치기에는 방해거리가 너무 많다고 생각해 위천 골짜기 산 중으로 두 아들을 데리고 들어가 세속과 격리된 상태에서 10년 동안 전심전력으로 교육했다. 그렇게 한 이유는 대체로 맑은 물과 돌로 마음을 씻고, 담백한 국과 밥을 취하게 함으로써 학문의 뜻이 굳어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단순히 글 공부에만 목적을 두지 않고 그들의 자질을 다듬어 인품이 완성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준형이 쓴 '삼가정기'에 적고 있는 내용이다.
용와가 쓴 부친 행장에는 "신나게 놀기만 하던 어느 날 고기잡이를 해서 돌아오니 부친은 내다버리게 하시고, 번잡한 마을을 벗어나 십리
가정 류봉시가 자녀 학문교육을 위해 조용한 산 속에 처음 세운 삼가정. 지금은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에 옮겨져 있다.
가정의 첫째 아들 류승현이 강학을 위해 건립한 침간정. 삼가정 옆에 있다.
밖 조용한 산촌에 터를 잡은 뒤 3년 동안 전일하게 수업하였다"고 되어 있다.
오늘날 각종 문명의 이기와 오락물이 재능 있는 아이들의 정신을 빼앗고 있는 환경을 생각하면, 가정 선생의 자녀 교육 방법과 의지는 모두가 본받아야 할 가르침으로 다가온다.
#대대로 인물을 배출한 삼가정
삼가정에서 학문을 닦은 용와와 양파 형제는 모두 문과에 급제한 인물이다. 특히 용와는 예조좌랑, 사헌부 장령, 함안 군수, 풍기 군수 등을 역임했고, 이인좌의 반란(영조 4년)이 일어났을 때는 고장 사람들이 의병을 일으켜 용와를 대장으로 추대, 반란 평정에 앞장서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함경도 경성판관 등을 역임한 양파는 영조대왕에게 발탁돼 사도세자의 사부가 됐다. 그러나 사도세자 변고 이후에는 벼슬길에서 초연히 물러나 초야에서 학문을 닦으며 후진양성에만 전념, 나라에서 아무리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던 절의의 선비였다.
양파의 아들 노애(蘆厓) 류도원은 당시 석학이던 대산(大山) 이상정의 제자로, 수 차례의 임관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도학군자로 사림의 사표가 된 인물이다. 백부인 용와의 후사를 이은 노애는 문집 10권과 사례편람(四禮便覽), 동헌집록(東獻輯錄) 2권, 퇴계선생문집고증 8권 등의 저술을 남기고 있다.
양파의 셋째 아들 동암(東巖) 류장원은 백부 용와에게 수학, 학문을 대성했다. 천사(川沙) 김종덕, 후산(后山) 이종수와 함께 퇴계 학통의 정맥을 이은 대산 이상정 문하에서 세칭 '호문삼로(湖門三老)'로 불린 인물이다. 경학과 제자백가, 예학에 두루 통한 동암의 저서로는 계훈류편(溪訓類編), 호서류편(湖書類編), 자경록(資警綠), 상변통고(常變通攷) 30권, 사서찬주증보(四書纂注增補) 31권, 문집 14권 등이 있다. 특히 예학을 집대성한 상변통고와 대학, 논어, 맹자, 중용에 대한 주석을 증보한 사서찬주증보는 동양철학의 중요한 자료이다.
가정이 소박한 초당으로 건립, 자녀들의 학문 완성을 위해 정성을 다한 공덕으로 6~7대를 이어가면서 도학자와 문장가, 급제자가 끊임없이 배출된 삼가정을 원래의 장소에서 보지 못함을 후학들은 한탄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가정이 위동에 창건한 삼가정은 세월이 흐르면서 소멸되고 1937년 후손들이 박실 동구(洞口)에 새로 지었고, 이 정자가 87년 일선리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삼가정 옆에는 용와가 강학을 위해 지은 침간정(枕澗亭)이 자리잡고 있다. 침간정 역시 박실에서 옮겨 온 건물이다. 침간정에는 원교체(圓嶠體)로 유명한 조선 후기의 대표적 서예가인 이광사의 글씨인 침간정 현판이 눈길을 끈다.
◇애달픈 '무실수몰가사'
'어디 가서 살더라도/ 조선유훈(祖先遺訓) 명심하고/ 불추가성(不墜家聲) 원칙으로/ 예의염치 잊지 말고/ 근검절약 하여가며/ 삼여지공(三餘之工) 더욱 힘써/ 가학연원(家學淵源) 이어가며/ 앙불괴천(仰不愧天) 부부작인(俯不 人)/ 인간도리 다하면서/ 떳떳하게 살아가면/ 어느 누가 괄시하며/ 그 누구가 홀대하리/ 조선(祖先) 욕됨 없게 하고/ 고향명성 천양하세.’
무실 류씨 후손인 류건욱옹이 무실을 떠나 일선리에 새 터전을 마련하면서 후손들을 위해 지은 '무실수몰가사' 중 일부다. 선조들이 터를 잡은 이후 400여년간 수많은 인물을 배출하면서 남긴 선조유적들이 즐비한 고향을 떠나야 하는 명문가 후손들의 감정이 어떠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김봉규기자
[한국의 혼 樓亭 .10] 경당 장흥효의 안동
광풍정·제월대
"나와 남의 경계 없다" 큰 가르침 울리는 듯
(제자·자문: 養齋 이갑규)
김성일·류성룡 등 문하의 대성리학자
벼슬 멀리하고 평생 학문 정진·수행
선천방위 통달…천문학 새 지평 열어
/글·사진=김신곤기자 singon@yeongnam.com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경당이 학문과 수행에 전념한 광풍정과 그 위에 있는 제월대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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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원소장도
"나는 많기를 바라고 다른 사람이 적기를 바라는 것은 곧 나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欲己多而欲人少者, 有己故也). 내가 없어진다면 누구는 많기를 바라며 또한 누구는 적기를 바랄 것인가(無己, 則欲誰多而欲誰少). 자신이 이기기를 바라고 남이 지기를 바라는 것 또한 내가 있기 때문이다(欲己勝而欲人不勝者, 亦有己故也). 내가 없다면 누구는 이기기를 바라며 누구는 지기를 바랄 것인가(無己, 則欲誰勝而欲誰不勝).… 나 또한 저 사람이고 저 사람 또한 나이니 무엇을 뽐낼 것이 있겠으며, 나 또한 하늘이며 하늘 또한 나이니 무엇을 탓할 것이 있겠는가(己亦人, 人亦己, 己亦天, 天亦己, 何怨尤之有)."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1564(명종 19년)~1633(인조 11년))의 나와 남의 경계를 허물어 버린 경지를 엿볼 수 있는 예문이다. 경당 선생 일기요어(日記要語)에 나오는 이 예문은 송나라 철학가 장재(張載)의 민오동포(民吾同胞: 사람은 모두 같은 배에서 태어난 형제요), 물오여야(物吾與也: 만물은 나와 함께 있는 자이다)의 통체적(統體的) 세계관과 궤도를 같이 한다.
#광풍정은 성경(誠敬)의 도량(道場)
이러한 경당의 심오한 사상과 고절한 인품은 광풍정(光風亭: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322호)을 중심으로 안동 전역의 성리학자들에게 전파되었다. 경당은 고향인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있는 이 정자에서 강학을 끝내면 제자들과 함께 정자 뒤편 바위 위에 지은 제월대(霽月臺)에 올라 시를 외우고 담론을 하면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심어주었다. 광풍정과 제월대의 이름은 송나라 황정견(黃庭堅)이 북송의 대 성리학자 주돈이(周敦)의 인품을 형용하여 "가슴속의 맑고 깨끗함이 광풍제월(光風霽月: 화창한 날씨의 바람과 비 갠 뒤의 달이란 뜻으로 깨끗하고 맑은 마음을 비유)과 같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과 수행에 전념한 대성리학자 경당은 그의 호와 광풍정 및 제월대라는 이름을 지은 연유에 대해 친구인 최현(崔晛)에게 보낸 서신에서 "일찍이 정자(程子)의 뜻을 취하여 경(敬)자로서 나의 당(堂)을 이름 짓고 이것에 따라 호를 삼았다. 또 주자(周子)의 뜻을 취하여 정(亭)과 대(臺)의 이름을 정했다"면서 "내 스스로 그 실상에 맞다는 것이 아니라 고인들이 말한 것을 표적(標的)으로 삼아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자 한 것일 뿐"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무릇 경(敬: 한 점의 망상잡념 없이 마음을 하나 되게 하는 수행)이 아니면 마음을 주재할 수 없고 광풍제월이 아니면 이 도의 체(體)와 용(用)을 드러낼 수 없다"면서 학문과 경 수행에 특히 전념했다. 광풍정과 제월대는 경당이 죽은 30여년 뒤 없어졌다가 조선 헌종 4년(1838) 유림들이 뜻을 모아 다시 지었고 중간에 보수를 해오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치열한 수행인
그는 광풍정과 제월대를 중심으로 한순간도 쉼 없이 학문과 수행에 정진하였다.
"사람 되고 귀신 되는 관문 머리에 생각이란 말 한 마리가 있는데(人鬼關頭有一馬) 이 말은 보통 말과는 다르다네(殊異尋常之 者). 혹 길 따라 가기도 하고, 혹은 그렇지 않기도 하는데(或由其道或不由), 늘 단전(丹田)의 들녘에서 출발함을 보겠네 (每見發丹田野),
경당의 12세손인 장성진씨가 제월대에서 경당과 관련한 얘기를 하고 있다.
성성주인(惺惺主人: 마음)이 이 말을 타면(惺惺主翁乘此馬), 하루 중에 잠시도 머물지를 않는다네(一日不可須臾捨)… 만약 혹 잠깐이라도 기미를 못 살피면(苟或俄頃不察幾), 천리만리로 마음대로 달아나 애써 잡기 어렵다네(千里橫奔難力把)…." 그는 '의마(意馬)'라는 이 글에서 경(敬)을 통해 진실무망(眞實無妄)의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는 고삐를 놓으면 천리만리를 달아나는 말을 다루듯 한 순간도 정신을 놓지 말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크도다 도(道)여, 큰 것으로 말하면 그 크기가 밖이 없고 작은 것으로 말하면 그 작기가 안이 없다. 실을 수도 없고 깨뜨릴 수도 없는 것이면서 지극히 은미한 것이 그 안에 들어있다… 도를 행하려면 덕(德)을 닦아야 하고 덕을 닦으려면 성경(誠敬: 진실한 본체와 하나된 마음)해야 한다. 정(靜)할 때에 삼가고 두려워함이 있고 동(動)할 때에 홀로 있음을 삼가야 동(動)할 때와 정(靜)할 때가 교대로 닦여져서 체(體)와 용(用)이 아울러 세워지게 된다… 아, 도란 큰 길과 같아 탕탕평평(蕩蕩平平: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음)하다…." 이것은 '도대인행(道待人行)'이란 글에서 제시한 수행법이다.
그는 "…꿈을 꾸거나 잠을 잘 때, 엎어지거나 넘어질 때도 자기의 공부단계가 얕은지 깊은지를 살펴야 한다(夢寐顚倒, 卜自家工夫淺深)… 자기 욕심을 극복하지 못하면 닫힌 눈, 막힌 귀와 같게 되고 자기욕심을 이미 극복하면 마치 귀가 밝고 눈이 밝아지는 것과 같게 된다(己未克, 如閉眼塞耳, 己已克, 如耳聰目明.)"면서 철두철미한 수행과 털끝만큼의 욕심마저 소멸해야 됨을 강조하였다.
경당은 이러한 수행력으로 평생토록 사색하여 선천방위에 통달하였고 24절기의 중절되는 곳과 58괘 괘기(卦氣)의 음양변화, 그리고 64괘 12변(變) 768괘 4천680효(爻)의 변화무궁하고 정밀 미묘한 도리를 일원소장도로 재구성, 당시 천문학에 대한 새 지평을 열었다.
경당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맑은 정신과 수행인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는 70세가 되어 운명 하는 날 밤 맹자의 양심장(養心章: 마음수양은 욕심을 적게 해야 함을 강조하는 구절)을 한 번 외우고는 문인들에게 그 뜻을 얘기해 주었다. 또 "내가 밤에 꿈을 꾸었는데 하늘로부터 관(棺)이 주어졌으니 조짐이 필(必)히 일어나지 못할 듯하다"고 말하고는 편안한 모습으로 눈을 감았다.
#퇴계학파의 정맥
경당은 퇴계의 양대 고제자(高弟子)인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과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남명·퇴계의 양문(兩門) 제자인 한강(寒岡) 정구(鄭逑) 등 3인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다. 그는 학문을 하는 데 결코 나이와 관행을 따지지 않았다.
그가 학봉과 서애라는 두 거유(巨儒)로부터 직접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이들과 지척 간에 살았고 학봉과 인척관계였던 인연이기도 하다. 예나 지금이나 학봉과 경당종택은 한 마을에 있다.
학봉과 경당 집안 간의 인척 관계는 400여년을 넘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경당의 12세손인 장성진씨(69)는 "지금도 집안의 대소사는 학봉 집안과 의논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의 혼 樓亭 .9] 안동 연좌루·원지정
(제자·자문: 養齋 이갑규)
서애 유성룡 우국충정·향학정신 곳곳 서려
하회마을 휘감아도는 낙동강 한눈에…35세때 지어 학문 탐구·국정 사색
관직 물러난 후 여기서 '징비록' 집필
/글·사진=김신곤기자 singon@yeongnam.com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연좌루와 원지정사가 하회마을을 휘감아 도는 낙동강을 향하고 있다.
안동 하회에 가면 서애종택인 충효당, 옥연정(玉淵亭), 병산서원 만대루 등 불세출의 지혜로 임란을 극복케 한, 구국의 영웅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1542~1607)의 발자취가 곳곳에 남아있다. 바로 충효당(忠孝堂) 근처, 같은 담장 안에 있는 연좌루(燕坐樓)와 원지정(遠志亭: 혹은 遠志精舍)은 서애가 고향에 내려오면 고요히 머물면서 학문과 국정을 사색했던 특별한 곳이다. 연보에 의하면 서애는 본래 30세 무렵 낙동강 서쪽 물가(西厓)에 서당을 지으려고 했으나 터가 좁아 실현치는 못했다. 이로 인해 자호를 서애(西厓)라 하고 그곳 물가 언덕을 상봉대(翔鳳臺)라 이름하였다. 35세 무렵 원지정사와 연좌루를 지어 틈틈이 이곳에서 학문과 저술에 힘썼고, 국가경영 대책마련에 절치부심하였다. 그가 만년에 이곳에서 징비록(懲毖錄) 등의 글을 집필했을 것으로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서애의 학덕과 기개
서애는 항상 임금과 부모에 대한 충효와 끊임없이 도심(道心)을 추구했던 정통 성리학자였다.
그는 만년에 이렇게 회고했다. "내 평생에 세 가지 한이 되는 일이 있으니, 임금과 부모의 은혜를 갚지 못한 것이 첫째 한이요. 벼슬이 너무 지나쳤는데도 일찍 물러나지 못한 것이 둘째 한이요. 도를 배울 뜻을 두었으나 이를 성취하지 못한 것이 셋째 한이다.(吾平生有三恨, 未報君親之恩, 一恨也. 爵位太濫, 而不能早退, 二恨也. 妄有學道之志, 而無成 ,三恨也)"
28세 때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북경의 학자들과 당시 학계의 방향을 논하면서 "진헌장(陳獻章)은 도를 깨달은 것이 정밀치 못하고 왕양명(王陽明)은 선학(禪學)으로 얼굴만 바꾸었으니, 설선(薛瑄) 학문의 순정(純正)함만 못하다"고 평하여 중국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들은 서애 학문의 깊이에 탄복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훗날 왜적이 침입하자 이항복, 윤두수 등이 왜적이 북방까지 올라오면 선조 임금을 명나라 국경으로 피란시켜야 한다고 건의하자, "임금의 수레가 우리 땅을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난다면 조선은 우리 것이 아니다(大駕離東土一步地,朝鮮非我有矣.)"라며 이를 강력하게 제지하고 자주적인 전란극복 계책을 세웠다.
선조 32년(1599) 관직에서 물러나 하회로 돌아와 전란 중 겪은 성패의 자취를 반성하고 고찰하는 기록을 소상하게 남겨 뒷날 다시는 이러한 일이 없도록 대비했다. 시경에 "내 다친 바가 있어 경계할 줄 알았는지라, 훗날의 걱정을 삼갈까(予其懲, 而毖後患.)" 라는 구절을 빌려 징비록(懲毖錄)으로 명명하고, 16권으로 정리했다.
#연좌루와 원지정의 역사와 의미
원지정과 연좌루는 서애가 오칸으로 지은 작은 정자였다. 임란 때 불타면서 소장도서가 다 소실되고 왕양명 문집 등 몇 권만 남았다고 서애가 쓴 '서양명집후'에 전한다.
원지정과 연좌루에서 지은 시가 10여수 넘게 남아 있다. 연좌루(燕坐樓)의 연(燕)은 예기에서 '기쁘다, 편안하다'라는 뜻의 안(安), 혹은 희(喜)의 뜻으로 해석하였다. 그래서 연좌는 '편안하게 앉아있다. 고요히 앉아 마음을 존하다'라는 뜻으로 풀이되며 예기 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연좌루에 올라가 앉으면 정좌존심(正坐存心)이 절로 되고 누(樓)에 서서 앞을 바라보면 하회마을을 휘감으면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과 강 건너편 부용대(芙蓉臺)의 풍광이 한 눈에 들어와 누구나 시심(詩心)이 발동된다. 서애가 지은 원지정(遠志亭)
서애의 15세손인 유영하옹이 서애의 활동상 및 문화재보존과 관련한 얘기를 하고 있다.
시는 이러하다.
'문에는 푸른 이끼 덮였고 대나무 그림자 마루에 비치는데(門掩蒼苔竹映堂), 밤꽃 향기 한 낮의 서늘한 바람에 움직이네(栗花香動午風凉), 인간의 지극한 즐거움 별 것 없으니(人間至樂無他事), 고요히 앉아 책 읽는 재미 가장 유장하네(靜坐看書一味長)'.
기문에 따르면 서애가 이곳에 머무를 당시 이 연좌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제연좌루(題燕坐樓)라는 시도 남아있다. 현재의 기록에는 정조 5년(1781)에 중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현판의 글씨는 일성(一聲) 권응룡(權應龍)이 썼다.
서애가 직접 남긴 원지정사 기문에는 "정사를 북림(北林)에 지으니 무릇 오칸 집이다. 동쪽은 당(堂)이라 하고 서쪽은 재(齋)라고 하였으며 재로 말미암아 북으로 나가다가 한번 꺾어 서쪽 높은 곳에 누(樓)를 지어 강물을 굽어볼 수 있게 하였다. 편액의 이름을 원지(遠志)라 하니 객들이 내게 그 뜻을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원지는 본래 약초이름으로 일명 소초(小草)라고도 한다. 옛날 진나라 사람이 사안(謝安)에게 묻기를 '원지와 소초는 하나의 물건인데 어찌 두 가지 이름인가' 하니, 어떤 이가 답하기를 '산중에 처해 있을 땐(은거하여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을 닦을 때) 원지라고 하고 세상에 나오면(벼슬을 할 때) 소초라고 한다' 고 하니 (대답을 못한) 사안은 부끄러운 빛을 나타냈다. 나는 산중에 있을 때도 진실로 원대한 뜻(遠志)이 없었고 세상에 나와서는 소초밖에 되지 않았으니 이와 서로 닮은꼴이다.……이러한 것을 유추하여 그 뜻을 당겨왔다.…'라고 적고 있다. 한 시대를 경영했던 대 학자의 겸양지덕(謙讓之德)에 다시 한 번 감복할 따름이다.
서애 종택 충효당에는 서애의 15세 종손 유영하옹(80) 내외분이 비교적 건강하게 종택을 지키면서 전통의 맥을 변함없이 이어가고 있다. 차종손 유창해·이혜영씨 내외도 효성이 지극하여 열심히 전통을 잇고 있어 존경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서애는 누구?
관찰사 입암(立巖) 유중영의 둘째 아들인 서애는 영의정을 지낸 정치가요 경세가이며 대 성리학자였다. 그는 13세 때 서울 동학(東學)에 가서 대학과 중용을 강론하니 강관(講官)이 크게 놀라면서 "훗날 큰 학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퇴계 선생은 21세 때 자신에게 입문한 서애를 한번 보고는 "이 사람은 하늘이 낳은 사람이다. 훗날 반드시 국가에 큰 공을 세울 것(此人天所生也, 他日所樹立必大)"이라고 말했다.
경학과 역사·천문·지리·병법·의술·예학·수학 등에 두루 박통해 하늘이 낸 인재라는 말에 손색이 없었다.
임란 때는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을 저술, 이순신에게 보내 실전에 활용케 하니 이순신은 "만고에 기이한 의론"이라고 난중일기에 쓰고 있다.
그의 저술은 문집 20권과 별집·속집 등에 전하고, 난후잡록 등 전하지 않는 것도 많다. 50세 때 통신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이 일본에서 가져온 국서를 보고는 일본의 침략기미를 간파, 형조정랑(刑曹正郞) 권율을 의주목사, 정읍현감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추천·임명하여 왜란에 대비케 했다.
그는 임란이 끝날 때까지 외교·국방·민정 등 중책을 한 몸에 감당하면서 몸을 구부려 정성을 다해 진력하는 국궁진췌(鞠躬盡悴)로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했다.
[한국의 혼 樓亭 .8] 안동 풍천면 '겸암정'
겸암 유운룡 '선비 체취' 꽃내음 되어…
하회일대 秘境 벗삼아 동생 성룡과 학문연구·강학
퇴계 정신 계승…부귀영달 집착하는 학문풍토 비판
/글·사진=김신곤기자 singon@yeongnam.com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유유히 흘러내리는 낙동강을 굽어 보고 있는 겸암정 전경.
안동 하회라고 하면 서애(西厓) 유성룡의 발자취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의 형인 겸암(謙菴) 유운룡(柳雲龍·1539~1601)의 학덕을 알고 있는 현대인들은 많지 않다. 하회마을 건너편인 안동시 풍천면 광덕리 낙동강 변 부용대 왼편에 안온하게 자리 잡은 겸암정(謙菴亭·중요민속자료 제89호)은 선생의 체취가 강하게 묻어있는 곳이다.
겸암은 조선 선조 때 문신으로 풍기군수와 원주목사를 지냈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풍기에 있는 우곡서원(愚谷書院)에 봉향되었다.
#겸암정의 내력
겸암정사(精舍)로도 불리는 이곳은 겸암이 29세쯤 강학과 수양처로 지어, 동생인 서애 유성룡과 더불어 학문연구에 몰두한 곳이기도하다. 퇴계 이황의 정맥을 이은 대산(大山) 이상정(1711~1781)은 겸암정사기문에서 이 정자의 절경을 높이 찬양하고 있다.
'안동은 예부터 이름난 산수가 많으나 동남쪽이 기묘하고 빼어난 절경이다. 그중 하회일대가 가장 절경으로 달관대, 옥연, 도화천, 만송주 등 여러 승경은 마치 신선이 사는 별천지 같으나 유독 겸암정이 더욱 아름답고 하회의 아름다움을 독차지하고 있다… 정자가 위치한 곳이 양 암반사이에 있어 골짜기가 넓고 깊으나 정자는 그윽한 곳에 있고 지세가 높아 강기슭 따라 지나가면서 옆으로 흘겨보면 암벽 칡넝쿨사이로 숨듯이 가려져 보일 듯 말 듯 정자가 있는 줄도 모를 지경이다. 대체로 있어도 없는 듯, 안으론 부(富)하면서도 밖으로는 검소한 것이 모두 겸(謙)의 덕에 가까운 뜻이다'.
겸암정의 글씨는 퇴계 선생이 정자가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편액을 써 보낸 것으로 전한다. 겸암이라는 이름은 주역의 겸괘(謙卦)에서 뜻을 따온 것이다. 정자의 마루 안에 있는 겸암정사라는 글씨는 조선중기 중국 명나라의 신필로 알려진 원진해의 글씨라는 설이있다.
#겸암정은 겸(謙)의 덕(德)을 수행하던 곳
겸암은 성품이 지나칠 정도로 깨끗하며, 좋고 싫음의 구분이 너무 분명했다. 감정을 드러냄에도 항상 솔직하여 동지 간들이 공경하면서도 멀리할 만큼 모난 데가 있었다. 그러나 겸암은 퇴계선생에게 겸암이란 이름을 받고 이 정자에서 5년여 각고의 수행 끝에 모나고 별난 성품을 다스려 너그럽고 원만한 덕성을 길러, 도량이 너그럽고 혼후(渾厚)한 인품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인품은 훗날 퇴계학파와 남명학파 모두에게 존중받았다. 택당(澤堂) 이식이 지은 겸암묘갈명에는 '겸손하고 겸손한 군자여(謙謙君子), 내면의 본체는 굳세고
겸암정에서 바라본 낙동강과 하회마을 숲.
퇴계 이황이 써 준 겸암정 현판.
외면의 마음 씀은 온유하셨도다(體剛用柔)'라고 적고 있다.
대산은 겸암정사기문에서 겸암의 깊고 깊은 수행의 경지를 이렇게 찬탄하고 있다. '겸암선생은 이 정자에서 천지의 차고 비는(盈虛) 도와 산천의 덜고 더하는(損益) 묘리를 묵연히 감상하다 깨달음의 흥이 극에 이르면 돌아왔다. 방안은 허명(虛明)한데 좌우로 도서에 싸여 만상이 태극의 한 이치에 모여 함유되어 있음을 알았다. 학문의 성취는 오히려 미치지 못하는 것 같이 하였고 도는 이미 깨달았으나 깨닫지 못한 것 같이 여기었다. 사람들이 도의 광채가 난다고 하여도 겸암선생은 오히려 모자란 듯이 여겨 부지런히 힘써 종신토록 변하지 않았다.'
퇴계 선생이 운명했을 때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려는 조정과 간소하게 치르려는 유족과 제자들 간의 갈등을 무리 없이 조정하는 등 예학에도 깊은 경지를 보였다.
#당시 학문을 닦는 자세를 비판한 퇴계와 겸암의 대화
겸암은 관직 생활을 하면서도 심성을 닦는 도학의 실천공부에 주력하였다. 스승 퇴계와 나눈 대화 가운데 "지금 사람은 이 한권의 책을 다 읽지도 않고 과거(科擧)말이 나오면 다 버리고 달려가 마침내 부귀영달을 꿈꾸는 자가 많습니다"라고 하니, 퇴계는 "인재가 무너지는 것은 다 과거의 폐단"이라고 하였다. 이는 학문의 근본이 자신의 덕성을 닦아 완성하는 데 있지 않고 부귀영달에만 집착하는 당시의 폐단을 걱정한 것이다. 덕성을 기르지 않고 부귀영달을 꾀하면 국가와 백성을 저버리게 되고 결국 자신마저 무너지는 것이기에 순수한 도학자의 길을 걷는 참 선비들은 이를 아프게 경계했다. 이는 마치 오늘날 고시열풍의 폐해와 다르지 않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겸암은 퇴계의 정신을 계승해 근사록, 심경, 주자서절요 등을 연구하여 존덕성(尊德性) 공부에 열중했던 기록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우리가 이 정자에서 옛 선비들이 무엇을 고민하고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체취를 느끼지 못하고 단지 건물의 풍광만 즐기고 간다면 오히려 세속의 먼지만 남겨놓고 가는 것이 될 것이다.
겸암이 겸암정에서 지은 詩 '無題'
텅 빈 집 홀로 누워 비는 내리는데
(空齋獨臥雨淋淋)
창밖 매화에 너무 마음이 졸이네
(外梅花太損心)
날씨 추워 봄이 엷어짐 때문이 아니라
(不是天寒春意薄)
도리어 복숭아 살구꽃 괴로이 서로 침해할까 시름함이네(却愁桃杏苦相侵)
한국의 혼 樓亭 .7] 청도 화양읍 '군자정'
"연꽃처럼 청정한 군자 되리라"
'비운의 선비' 모헌 이육의 염원이 만개한 듯
(제자·자문: 養齋 이갑규)
5형제 모두 김종직 제자…사화로 사형·유배 당해
은둔 생활하며 강학 매진…연밭도 지성으로 가꿔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모헌 이육이 연꽃 같은 군자를 추구하며 지은 군자정과 유호연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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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와 연꽃
대구에서 팔조령 터널을 지나 청도군 화양읍 유등리에 이르면, 연꽃이 가득한 2만600여평의 유호연지(柳湖蓮池)를 만난다. 지금 유호연지에 가면 본격적으로 피기 시작한 홍련이 연못 전체를 메워가는 장관을 볼 수 있다.
연꽃이 필 때면 특히 많은 사람이 연꽃을 보기 위해 이곳을 찾아 연꽃을 감상하고 사진도 찍곤 한다. 요즘 한창 사람들이 몰려드는 시기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유호연지를 찾아 연꽃을 감상하며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지만, 도로 옆 연못 한쪽에 세워진 정자인 군자정(君子亭)에 어떤 사연과 정신이 간직돼 있는지 알려는 사람은 드물다. 이 군자정에 담긴 정신과 의미를 알면, 멋진 정자가 있고 연꽃이 가득한 이 연못을 보며 느끼는 감흥은 배가 될 것이다.
#연꽃 같은 군자를 염원하며 지어
연꽃은 예로부터 군자에 비유된 꽃이다. 군자정은 연꽃 같은 청정한 군자를 추구한 창건주의 정신과 연꽃사랑 마음이 서려 있는 정자다. 군자정은 조선시대 중종 때 모헌(慕軒) 이육(생몰 시기 미상)이 지어 강학하던 곳으로, 연꽃 같은 군자를 염원하며 정자를 짓고 연밭을 조성한 500년의 역사가 간직돼 있다.
모헌은 함창, 보은, 평택 등지의 현감을 지낸 이평의 다섯 아들 중 넷째다. 맏형 쌍매당(雙梅堂) 이윤은 문과급제 후 청도군수와 부제학 등을 역임했고, 둘째형 망헌(忘軒) 이주 역시 문과급제 후 요직을 두루 거쳤다. 특히 시문학에 뛰어났다. 셋째형 이전은 현감을 지냈다. 안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모헌 자신은 안기도찰방(安奇道察訪)을 역임했다. 아우인 이려는 문과급제 후 사간원 정언(正言), 홍문관 수찬(修撰) 등을 지냈다.
5형제 모두 점필재(畢齋) 김종직의 제자로 명성을 떨친 영재들이었으나, 모두 시절과 맞지 않아 제대로 뜻을 펴지 못했다. 쌍매당은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거제도로 유배되고, 망헌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갑자사화 때 처형되었다. 사화로 인해 형제 모두 점필재의 제자라는 이유 때문에 죽거나 유배되고 은둔하게 된다.
모헌은 사화로 가문의 수난이 시작되자 망헌이 유배되어 있던 진도를 오가면서 마음이 끌렸던, 산은 높지 않으나 수려하고(山不高而秀麗) 땅은 넓지 않으나 비옥한(地不廣而肥沃) 청도 유호(유등의 옛이름)에 은둔하게 된다.
안동에서 내려와 이곳 청도에 정착한 모헌은 후학을 가르치고 선비들과 학문을 논하며 일생을 보내게 되었다. 모헌은 이전부터 있던 조그마한 못을 더 파고 넓혀 지금과 비슷한 규모로 만들어 '유호(柳湖)'라 이름 붙였다. 정자 옆에는 지금도 오래된 버드나무가 있다.
모헌은 직접 유호에 연을 심어 연밭을 조성한 뒤 1531년 연못 속에 정자를 지었다. 이름을 군자정이라 붙이고 제자들과 함께 강학에 힘썼다. 모헌이 연을 특별히 사랑하고 정자 이름을 군자정이라 한 데는 그 연원이 있다.
중국 북송시대염계(濂溪) 주돈이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돈이는 모란을 부귀한 자에 비유하고, 국화는 은사(隱士)에 비유했다. 그리고 연꽃은 군자에 비유했다. 모헌은 주돈이의 정신을 이어받아 연꽃처럼 청정한 군자를 추구했기에 정자 이름을 군자정이라 하고, 연밭도 지성으로 가꾸었던 것이다.
4칸 겹집으로 구조가 특이한 군자정은 1915년 중창한 후 수차례의 중수를 거쳤으며, 현재의 건물은 1970년에 중건한 것을 1989년 새로 중수한 것이다. 유호연지의 물은 청도 들녘의 수원이 되고 있고, 연꽃이 만개한 풍경은 장관을 이루어 청도팔경 중의 하나로 꼽힌다.
#강학모임 지금까지 이어져
군자정은 조선시대부터 수많은 학자들이 찾아들어 학문을 강론하고, 시인묵객들이 화조월석(花朝月夕)에 음풍농월(吟風弄月)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현재 정자에 여러 인사들의 시문 현판이 걸려 있어 그런 정황을 엿볼 수 있다.
군자정에 드는 문에는 '일감문(一鑑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이는 송나라 주자의 '관서유감(觀書有感)'이란 시구 중 '반 이랑 네모진 못 하나 거울처럼 열렸는데(半畝方塘一鑑開)/ 하늘빛 구름 그림자 함께 배회하네(天光雲影共徘徊)'에서 따온 것이다. 유호연지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이 정자에서는 모헌의 강학 정신을 받들고 있는 모임인 '군자정 강학계(講學契)'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청도유림은 매년 음력 8월18일 군자정에 모여 강회(講會)와 시회(詩會)를 열고 있다. 현재 회원수는 200여명이며, 회장은 서제민씨가 맡고 있다. 강회가 열리면 반드시 고전 한 구절을 소리 높여 독송을 하고, 한시도 지어 발표하는 등 전통의 맥을 잇고 있다.
유호연지는 조선시대의 '반보기 풍습'의 유래지로 기록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반보기 풍습은 옛날 남녀가 유별하던 시대에 서로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던 규방의 여인들이 추석 다음날 이 연지에 모여 서로의 회포를 풀면서 연꽃을 감상하고 담소를 나누던 풍습이다. 이 풍습은 광복 후까지 지속되다 현대화의 물결에 휩쓸려 사라지고 말았다.
청도에는 모헌 자손이 번성하여 현재 수천여호가 벌족을 이루며 500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최근 군자정 모임으로 망헌·모헌선생시문학연구회가 결성돼, 송남(松楠) 이승필씨가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군자정 건너편 산기슭에는 망헌의 제단이 있고, 추원재(追遠齋), 유호재(柳湖齋), 원산재(院山齋)가 나란히 건립돼 있는데, 모두 모헌을 추모하는 재사이다.
한편 돈이 되는 것이면 조상의 혼을 모시는 사당 신주까지 훔쳐가는 세태 속에, 군자정에도 몇 해 전 도둑이 들어 정자 문짝을 모두 떼어 가버려 기둥만 남은 집이 돼버렸다. 이런 안타깝고 서글픈 현장을 한두 번 접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혼 樓亭 .6] 동 임하면 '백운정'
'의성 김씨 五龍' 학봉 김성일 5형제 학문연마 요람
(제자·자문: 養齋 이갑규)
부친 청계공 추모 위해 정자서 오랜 생활, 5형제 모두 퇴계제자 되어 과거시험 급제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백운정에서 바라본 반변천과 내앞마을 전경.
백운정(白雲亭)은 퇴계 이황의 수제자인 학봉(鶴峯) 김성일(1538~1593)이 자신의 형제들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던 정자였다. 또한 부친인 청계(靑溪) 김진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의탁한 곳이기도 하다.
이 백운정은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 내앞(川前) 마을 반변천(半邊川) 건너편 연화봉 자락 부암(傅巖) 위에 자리잡고 있다. 청계공의 둘째 아들 귀봉(龜峯) 김수일(1528~1583)이 1568년(선조 1년) 부친이 내 준 터전에 창건한 정자다. 백운정에서 내려다 보면 언덕 아래로 유유히 흘러가는 반변천과 주변 풍광이 눈길을 시원하게 한다.
#학봉 형제가 학문을 연마하고 부친을 추모하던 정자
한강(寒岡) 정구가 쓴 학봉의 행장에 의하면, 중앙요직을 두루 역임하다가 부친 청계공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고향에 내려온 학봉은 정성을 다해 부친을 간호했다. 부친이 별세하자 삼년상을 마치고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중형 귀봉과 함께 백운정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이는 부친을 잃은 슬픔이 그치지 않아 묘소가 바라보이는 정자에서 추모하는 마음을 다하기 위해서 였을 것이라고 전한다.
백운정은 청계공의 다섯 아들이 강학한 정자이기도 하지만, 이처럼 학봉 형제들이 부친인 청계공을 추모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자의 이름도 '높은 산에 올라 흰구름 바라보며(登高山望白雲)/ 어버이 그 아래 계신가 그리워 하노라(思親在其下)'라고 한데서 가져왔다.
반변천 건너 내앞마을이 바라보이는 정자에 오르면 멀리 의성김씨 큰 종택과 작은 종택이 눈에 들어온다. 북으로는 의성 김씨 가묘(家廟:사당)를 마주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선영(先瑩)이 바라보인다. 그리고 정자 마루 위에는 미수(眉 ) 허목이 90세에 쓴 전서 편액 '백운정'이 눈길을 끈다.
백운정에 걸려 있는 현판 중 귀봉이 어느 날 정자에 올라 감흥을 노래한 시다.
'고을 성 서북 낙동강 물 가(縣城西北洛江湄)/ 푸른 산 언덕에 우뚝한 작은 정자 지었네(靑 開成小閣危)/ 재자들은 한가한 틈에 와서 주역을 읽고(才子乘閒來讀易)/ 대형은 술을 가져와 앉아 시를 읊조리네(大兄携酒坐吟詩)/ 구름 거둔 먼 산골짝은 그림 같고(雲收遠壑山如畵)/ 바람 멈춘 깊은 연못 물은 숫돌같이 고요하네(風定深潭水似砥)/ 지난 밤 약한 물결 일어 밝은 달 흔들리는 모습이여(向夕微瀾搖朗月)/ 절승지에서 신녀가 구슬을 으르고 노는 때였네(絶勝神女弄珠時).'
#6부자(父子)가 서원에 제향된 청계공 부자
청계공 조부인 망계(望溪) 김만근이 내앞으로 입향한 이래 기반을 다져오다가 청계공대에 이르러 가문이 활짝 열리게 된다. 청계공은 다섯 아들을 두었다. 약봉(藥峯) 김극일, 귀봉 김수일, 운암(雲巖) 김명일, 학봉 김성일, 남악(南嶽) 김복일이다. 5형제가 모두 퇴계의 제자가 되었고, 그 중 3형제(약봉, 학봉, 남악)는 문과에 급제하였고, 운암과 귀봉은 소과에 급제했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흔히 이 집안을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이라 칭송하기도 하고, 다섯 형제는 의성김씨 오룡(五龍)으로 불리기도 했다.
훗날 사빈서원(泗濱書院)에서 청계공을 주벽(主壁)으로 그 아들 5형제를 제향(祭享)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6부자가 한 서원에 모셔지는 영예를 누렸다. 퇴계 학통의 번성함도 학봉에 의해 이루어졌다. 학봉의 학통은 경당(敬堂) 장흥효→석계(石溪)
학봉 김성일 형제들이 학문을 연마하던 백운정.
미수 허목이 90세에 쓴 백운정 현판.
학봉 문집에는 없는 학봉 친필 시.
이시명→갈암(葛菴) 이현일→밀암(密菴) 이재→대산(大山) 이상정 등으로 전해 내려갔다.
퇴계는 일찍이 학봉을 "행실이 훌륭하고 학문이 정밀하니 나의 눈에 그를 견줄 이를 보지 못했노라"고 평했다. 또 퇴계가 학봉에게 내린 병명(屛銘)에 '박문(博文)과 약례(約禮) 양면으로 도달하였고(博約兩至), 연원의 정맥이로다(淵源正脈)'라고 하였다. 선조실록에는 서애(西厓) 유성룡, 월천(月川) 조목, 학봉 김성일을 퇴계 문하의 삼영수(三領袖)로 꼽고 있다.
학봉은 훗날(1587년) 낙동강변 청성산(안동시 풍산읍)에 석문정(石門亭)을 지어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자녀 교육에 각별했던 청계공
학봉의 부친 청계공은 자녀들의 학문 장려에 대한 열의가 남달랐다.
의성 김씨 집안에는 시조인 김석(金錫)이 아버지 경순왕으로부터 받은 고적(古笛)과 문장검(文章劍) 등 보물이 대대로 전해 내려 왔다. 청계공은 이 보물들을 장학기금 용도인 문장답(文章畓)과 함께 가장 학문을 열심히 닦는 자녀에게 전하겠다고 했던 것이다. 이 모두가 둘째 아들 귀봉의 집에 전해 왔으나, 보물들은 6·25 전쟁을 겪는 과정에서 유실되었다 한다.
고적과 문장검은 귀봉의 증손자인 경와(敬窩)가 쓰던 연하침(煙霞枕) 및 매죽연(梅竹硯)과 함께 의성김씨 집안의 4보(四寶)로 받들어져 왔다. 연하침은 경와공이 금강산 만폭동에 들어갔다가 구해 온 것으로, 화석이 된 향나무 목침이다. 습기가 차면 향기와 안개가 자욱이 피어오르는 목침으로, 백운정에서 줄곧 사용해 왔다고 한다.
청계공은 일찍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했으나 대과를 포기하고 오직 부모 봉양과 자손 교육을 통해 영광을 이루려고 노력했다. 그 결실로 6부자가 사림(士林)의 존숭을 받게 된 것이다.
전하는 일화에는 어느 도사가 청계공에게 살아서 참판(生參判)보다는 죽어 판서로 증직(贈判書)됨이 나으리라 조언했다 한다. 훗날 넷째 아들 학봉의 벼슬로 인해 청계공은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안동 서후면 운장각
학봉 편지·안경 등 다양한 유물 소장, 후손이 우연히 구입한 희귀 친필 詩도
안동시 서후면에 있는 학봉 선생 종택에 가면 학봉의 유물들을 보관하고 있는 운장각(雲章閣)이 있다. 학봉의 14세 종손 김시인씨(90)를 찾아 백운정과 석문정 등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뒤 운장각에 들어가보았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유물이 지금까지 잘 전해져 올 수 있었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학봉이 아내에게 보낸 한글편지 등 각종 문적은 물론, 학봉의 가죽신과 패도, 갓끈들, 안경과 안경집(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임) 등 다양한 유물이 보관, 전시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 중 보물로 지정된 유물만 해도 73종 503점이나 된다.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로는 질적이나 양적으로 최고일 듯하다.
유물 중 수년 전 학봉 후손이 서울 인사동 골동상에서 우연히 찾아내 구해온 학봉 친필시를 소개한다.
'나무마다 단풍빛 곳곳마다 새로운데(樹樹楓光處處新)/ 만나는 곳 모두 생각 속에 친근하네(逢場盡是意中親)/ 한 단지 술 실은 조각배 타고 떠나니(一尊載得扁舟去)/ 어렴풋한 강 하늘 그림 속 몸이로세(漂渺江天畵裏身).'
사순(士純)은 학봉의 자(字)다.
[한국의 혼 樓亭 .5] 합천 쌍책면 '황강정'
영남 대석학 이희안 선생이 지어 인재 양성
초야에 묻혀 학문 정진…'嶺中 3高' 추앙 받아
당대 명유석학과 교유…조식 선생과 가장 절친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황강이 남명과 함께 학문을 연마한 황강정.
황강은 덕유산에서 발원해 합천을 거쳐 낙동강과 합류한다. 황강 하류인 경남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 지점의 푸른 절벽 위에 황강정(黃江亭)이 있다. 조선 중기의 학자인 황강(黃江) 이희안(1504~59)이 학문을 연마하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강변 절벽 위에 있는 황강정에 오르면 아득한 절벽 아래로 흐르는 푸른 강물이 더위를 가시게 하고, 멀리 굽이굽이 펼쳐지는 황강 줄기와 산봉우리들이 절경으로 다가온다. 정자에 이르는 길 초입에 황강의 절친한 벗인 남명 조식이 황강정을 방문해 남긴 시가 새겨진 표지석이 있다.
#11세 때 논어를 읽고 개명(開明)한 황강
황강의 자는 우옹(愚翁)이고 호는 황강이다. 강의 이름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도총부 부총관에 추증된 부친 이윤검의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기묘사화때 삭탈관직되었고, 큰 형 월휘당(月暉堂) 희증은 일두 정여창의 문인으로 대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을 지냈으나, 황강이 여섯 살 되던 해에 20대의 꽃다운 나이로 운명하였다. 중형 교리공 희민은 문과에 합격하여 승의랑이 되었으며, 부친과 함께 기묘명현(己卯名賢)에 들었다. 중형 역시 20대에 세상을 하직했다.
황강은 부친의 가르침도 받았지만, 특히 중형에게 소학을 배웠다. 10세에 글을 지을 수 있었고, 11세 때 비로소 논어를 읽고 활연히 개명(開明)했다고 전한다. 황강은 14세에 사마시(司馬試: 생원, 진사를 뽑는 초시)에 합격한 수재였으나 16세 때 기묘사화가 일어나 부친과 정암(靜庵) 조광조의 문인이던 중형이 삭탈관직되는 변고를 겪었다. 그로 인해 17세 때는 부친이 별세하고 18세 때는 중형마저 별세함으로써 벼슬의 뜻을 접고 초야에 묻혀 학문을 닦게 된다.
22세 때는 동당시(東堂試)에 응시하여 장원을 하기도 했지만, 벼슬에 나가지는 않았다. 40세 때는 조봉대부(朝奉大夫: 종4품인 종친 또는 문관품계의 위호)로 올라가 성균관에 머물면서 퇴계 이황과 경전의 뜻을 서로 토론함에 마음이 합하여 사귀기를 깊이 하였다. 훗날 회재(晦齋) 이언적의 추천으로 유일(遺逸: 과거를 통하지 않고 재야의 학자를 바로 발탁하는 제도)에 천거되어 고령현감으로 부임하지만, 몇 달간 근무하다가 깨끗이 물러나 본분대로 일생을 보내며 학자들의 사표가 되었다.
#당대 명유석학들이 모여든 황강정
황강은 28세 무렵에 황강의 절승지에 황강정을 짓고 좌우에 도서(圖書)를 갖춘 뒤, 고요히 정자에 앉아 치열하게 자신의 완성에 힘을 쏟으면서 제자 양성과 어머니 봉양에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황강정에는 남명(南冥) 조식, 청송(聽松) 성수침, 송계(松溪) 신계성, 대곡(大谷) 성운, 동주(東洲) 성제원, 삼족당(三足堂) 김대유 등 명유석학들이 찾아와 학문을 토론하고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 탁계(濯溪) 전치원은 소학을 가지고 와 배움을 청하였다. 탁계가 왔을때 황강은 그의 뜻을 떠보기 위해 거절했다. 그러자 그는 제자 되기를 청하며 종일토록 곧게 앉아 대기하기를 5일 동안이나 계속했다. 황강은 학문을 배우려는 그의 굳은 뜻을 가상히 여기며 탁계의 이같은 자세를 '정문입설(程門立雪)'에 비유했다. 정문입설이란 송나라 때 유조와 양시가 강남에서 하남까지 수천리길을 가서 정이천(程伊川)을 찾았을 때 마침 정이천이 정좌(靜坐)수행 중이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정좌를 마치길 기다렸는데,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던지 문밖에는 눈이 한 길이나 쌓였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말이다. 이는 미수(眉瘦) 허목이 쓴 탁계 비문에도 전하는 유명한 일화이다. 탁계는 훗날 선생을 위한 모든 사업을 도맡아 하였다.
#황강과
들어가는 문인 '망도문(望道門)'.
절친했던 남명
황강과 가장 친한 친구를 꼽는다면 남명 조식을 들 수 있다. 남명이 김해 산해정(山海亭)에 있을 때는 황강이 산해정에 가서 '산해연원록(山海淵源錄)'을 편수하였고, 남명은 황강정에 수시로 드나들며 함께 학문을 연마했다. 황강에게 준 시와 황강정에서 읊은 시만 해도 여섯 수나 전한다. 그리고 남명은 훗날 황강의 묘갈명도 지었다. 글씨는 탁계가 썼다.
남명이 지은 제황강정사(題黃江亭舍) 시다. '길 가 풀들 이름 없이 죽고(路草無名死)/ 산의 구름 자유로이 인다(山雲恣意生)/ 강물은 한 없는 한을 흘려보내며(江流無限恨)/ 돌과 다툴 일 없도다(不與石頭爭)'
황강은 학자이면서도 활쏘기와 말타기에도 능했다고 한다. 송계 신계성은 당시 인물평에서 "삼족당은 높이 트여 구속받지 않는 기운을 가졌고, 남명은 설천한월(雪天寒月)의 기상이며, 황강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큰 역량의 솜씨를 가졌다"고 평했다. 당시 사람들은 세 군자를 잘 형용했다고 했다. 그리고 남명과 대곡, 삼족당, 청송, 동주 등과 막역지교라고 한 것으로 보아 당대의 걸출한 인물로 꼽혔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남명은 뜻과 기운이 걸출하여 아무나와 함께 섞여 교유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황강과는 막역한 사이였다. 동계(桐溪) 정온은 송계, 남명, 황강을 영중(嶺中)의 삼고(三高)로 꼽았다.
당대의 명유석학으로 꼽히던 황강의 문집이 세상에 전하지 못해 후학들이 크게 아쉬워했다. 탁계가 원고를 수집하여 황강의 본가에 보관하면서 출판을 기다리던 중 화재가 나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그 후 400여년이 지난 뒤 유림과 자손들의 각별한 노력으로 두 편의 글이 수집돼 '황강선생실기'라는 제목의 목판본으로 출간됐고, 그의 행적은 '왕조실록' '국조보감' '동국유선록' 등과 선현들의 문집에 나타나 있다.
유림에서는 연곡서원(淵谷書院)을 세워 제향을 올리다가 훗날 청계서원(淸溪書院)을 건립, 오늘날까지 추모하며 학덕을 기리고 있다.
◇황강정 현판에 담긴 뜻
거경당(居敬堂)-마음 통일하고 이치를 궁구
비해재(匪懈齋)-낮밤으로 덕 닦기를 게을리 말라
백원당(百源堂)-백세의 근원지
지금 황강정에는 노상직(盧相稷)이 쓴 중수기문이 있고, 황강의 13세손 순용(淳容)이 쓴 기문이 남아있다. 정자 안에는 '거경당(居敬堂)' '비해재(匪懈齋)' '백원당(百源堂)' 등의 현판이 걸려 있다. 남명이 자작시를 쓴 것으로 판명되는 '제황강정(題黃江亭)'도 전해오고 있다.
거경당은 마음을 하나로 통일하고 이치를 궁구한다는 뜻인 '거경궁리(居敬窮理)'에서 온 말이고, 비해재는 시경에 '낮이나 밤이나 덕 닦기를 게을리하지 말라(夙夜匪懈)'고 한 데서 취한 것이다. 백원당은 백세(百世)의 근원지라는 뜻이다.
황강정 바로 아래에는 황강의 7세손인 이봉서가 강학한 관수정(觀水亭)이 있다. 황강정은 현재 황강의 14세손 이교용씨(76)와 15세손 이남기씨(73)가 관리하고 있다. 한편 유림에서는 오늘날까지 황강정에서 황강을 추모하는 석채례(釋菜禮)를 올리고 있다. 김봉규기자
▶남명 조식이 황강정을 방문해 남긴 詩
강 위로 제비 어지러이 날고 비 묻어 오려는데(江燕差池雨欲昏)
보리 누렇게 익어 누렁 송아지 분간할 수 없네(麥黃黃犢不能分)
접때부터 나그네 생각 조리 없이(向來客意無詮次)
도리어 외로운 기러기 되고 싶기도 하다가 또 구름 되고 싶기도 하네(旋作 孤鴻又作雲)
[한국의 혼 樓亭 .4] 합천 삼가면 '뇌룡정'
'불의엔 성난 龍처럼…' 조식 선생 강학 펼친 곳
(제자·자문: 養齋 이갑규)
평생 벼슬 거부하며 초야 묻혀 산 실천성리학 대가
48세때 뇌룡사 지어 곽재우 등 수많은 대석학 배출
전란때 불타 소실…1883년 복원
/글·사진=김신곤기자 singon@yeongnam.com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남명은 그의 학문적 황금기에 뇌룡정에서 경의지학(敬義之學)을 실천하고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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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의 경의철학
'시동(尸童: 옛날 신주가 없이 제사를 지낼 때 조상을 대신하여 제사상 앞에 소상처럼 앉아있는 아이)처럼 가만히 앉아 있어도 용처럼 광채가 나타나고, 말없이 고요히 침묵하여도 덕(德)은 우레소리와 같아 사람을 감동시킨다(尸居而龍見 淵默而雷聲).'
지금의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에 있는 뇌룡정(雷龍亭·경남도 문화재자료 129호)의 이름은 바로 장자(莊子)의 재유(在宥)편에서 따온 것이다.
남명 조식(南冥 曺植·1501(연산군 7년)~1572(선조 5년))의 불같은 삶은 이 구절과 너무 흡사하다. 평생동안 벼슬을 사양하고 초야에 묻혀 학문에 전념했지만 불의를 보면 등천하는 용처럼 불끈 일어나 전제왕권을 향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일갈을 서슴지 않았다. 남명은 48세(1548) 때 뇌룡사(舍)를 짓고 61세(1561) 때까지 강학에 힘썼다. 61세 이후는 산해정에서 일생을 보냈다.
#남명의 경의실천
남명은 뇌룡정시절 단성현감 사직소(丹城疏: 乙卯辭職疏)에서 "자전(慈殿:당시 수렴청정을 하던 문정왕후를 지칭)은 생각이 깊으시나 깊은 궁중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명종)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을 잇는 한 고아일 뿐입니다(慈殿塞淵, 不過深宮之一寡婦, 殿下幼沖, 只是先王之一孤嗣)"라는 과격한 표현을 써 조야가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이 상소이후 남명의 기개와 인품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뜻있는 유생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제자가 되기를 청했다.
남명은 이때 내암(來庵) 정인홍, 덕계(德溪) 오건, 한강(寒岡) 정구, 동강(東岡) 김우옹, 망우당(忘憂堂) 곽재우, 개암(介庵) 강익, 송암(松庵) 김면, 대소헌(大笑軒) 조종도, 영무성(寧無成) 하응도, 각재(覺齋) 하항 등의 대석학을 배출했다. 이들중 대부분은 남명이 죽은 지 20년 후인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장이 되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뇌룡정의 부침(浮沈)
뇌룡사는 전란으로 불타고 훗날 뇌룡정으로 복원되었다. 1883년 조희규·신두선 현감과 유림인 허유, 정재규 등의 발의에 의해 다시 중건되었다.
남명이 뇌룡사를 지어 거처할 때 화공에게 벽에 뇌룡을 그려 붙이도록 했다고 한다. 뇌룡정이라는 현판 글씨는 복원당시 학자인 하용제의 글씨이다. 14세 손인 율람(栗嵐) 조종명, 유림의 호당(浩堂) 김련씨 등이 뇌룡정과 최근 정 오른편에 복원한 용암서원(龍巖書院)을
뇌룡정의 모태가 된 신명사도.
관리하고 있다.
#뇌룡정은 신명사도의 표현
뇌룡정의 건축구조는 남명이 지은 신명사도(神明舍圖)를 본떠 지었다. 신명사도는 신명사명(神明舍銘)을 도표로 제작한 것으로 신명은 마음을, 사(舍)는 마음이 앉아있는 집, 즉 우리 육신을 의미한다.
후산(后山) 허유(1833~1904)의 신명사도명혹문(神明舍圖銘或問)에 따르면 남명은 주자의 대학장구(大學章句)에서 밝힌 심성(心性)의 수행체계를 독자적으로 체계화시킨 것이라 하였다. 도가와 병가(兵家)를 아울러 특별한 자신의 수행법으로 발전시켜 당시 주목받았다. 신명사도명은 다음과 같다.
"태일진군(신명을 뜻함)이 명당(신명의 집)에서 정사를 편다(太一眞君, 明堂布政), 안으로는 총재가 주관하고 밖으로는 백규(외정의 각 담당관)가 살핀다(內宰主, 外百揆省), 추밀(국가중요기밀처)을 받들어 왕명을 출납하니 진실과 믿음으로 수사(출납의 사령장)를 편다(承樞密出納, 忠信修辭), 화(和)·항(恒)·직(直)·방(方) 네 글자로 부절(符節: 신분의 징표)을 발하고 백가지 금지령 깃발을 세워 신명을 지킨다(發四字符, 建百勿), 구규(九竅: 사람신체의 아홉구멍)의 사(邪)가 세 요처(눈·귀·입)에서 비로소 발하니(九竅之邪, 三要始發), 사(邪)가 움직이는 기미가 있으면 용감히 이겨 전진하여 섬멸토록 하라(動微勇克, 進敎壓殺), 구규의 사(邪)를 이겨 신명에게 보고하니 요순시대의 태평함이로다(丹 復命, 堯舜日月), 세 관문(귀·눈·입)이 닫혀 있으니 맑은 들판 끝없이 넓도다(三關閉塞, 淸野無邊), 개선하여 하나의 본성으로 돌아가니 시동처럼 앉았고 연못처럼 고요하도다(還歸一, 尸而淵)."
#퇴계 이황과 서신으로 교류
남명의 벗으로는 송계(松溪) 신계성, 황강(黃江) 이희안, 삼족당(三足堂) 김대유, 대곡(大谷) 성운 등이 유명하다. 동계(桐溪) 정온은 송계, 남명, 황강을 영중(嶺中)의 삼고(三高)라고 칭송한 바 있다.
동 시대에 쌍벽을 이루던 퇴계 이황과는 서신으로 교류했다. 남명은 이황에게 "근래 학자들이 손으로 청소하는 예절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를 담론하여 명예를 훔치고 남을 속여 해가 타인에게 미치게 한다"면서 이들을 꾸짖어 줄 것을 서신으로 청하기도 했다. 기초학문이 없는 오늘날 남명이 태어난다면 뭐라고 할까.
[한국의 혼 樓亭 .3] 안동 도산면 '노송정'
퇴계 선생 태어나 자란 곳…'대석학의 산실'
단종 폐위로 낙향한 퇴계 조부가 지은 정자, "잠잘때도 먹을때도 글과 함께" 대대로 면학
퇴계와 넷째 형 가장 탁월…'금곤옥제' 불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의 노송정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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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으로 본 노송정
"나는 글에 대하여 먹을 때도 글과 더불어 함께 먹고 잠을 자도 함께 꿈꾸며, 앉아도 글과 함께 앉고 걸어도 글과 함께 걸어 잠시도 가슴에서 글을 잊은 적이 없다. 너희들도 이와 같아야 한다. 유유자적하며 세월만 보내다가 어떻게 성취를 바랄 수 있겠느냐.(吾於書, 食與俱嚥, 寢與俱夢, 坐與俱坐, 行與俱行, 未嘗頃刻而忘于懷, 汝輩乃如此, 悠悠度日, 何能有望於成就哉)" 퇴계가 부친의 행장에서 자녀들에 대한 부친의 가르침을 서술해 놓은 글이다.
퇴계의 조부는 "지금처럼 부지런하고 괴롭게 공부를 하는 것을 탄식하지 말라. 반드시 훗날 조상에게 다함없는 효를 바칠 수 있을 것이다(莫嘆如今勤苦業/定知他日孝無疆)"라는 권학시를 남기고 있다.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 있는 노송정(老松亭)은 퇴계의 조부인 노송정(老松亭) 이계양이 이곳으로 처음 입향하여 지은 거처의 정자로, 퇴계와 같은 대유학자가 나올 수 있었던 연유와 뿌리가 있는 곳이다. 이 노송정 종택은 퇴계가 태어난 퇴계 태실이 있는 곳이며, 퇴계가 자라난 곳이기도 하다.
#노송정 내력
노송정 이계양(1424~88)은 단종 원년(1453)에 성균진사로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키려는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벼슬길의 뜻을 접고 낙향하여 산수간에서 여생을 보내게 된다.
안동 주촌(현 와룡면 주하리)에서 태어난 이계양은 혼인 후 예안 동쪽 부라촌(현 예안면 부포리)에 거주했다. 어느날 봉화 훈도(각 도의 군현에 배치하는 종9품 외관직)로 부임하다가 온혜를 지나면서 그곳의 산수가 마음에 들어 이곳저곳을 거닐면서 두루 살펴보게 되었다. 그러다 신라재 고개에서 쉬는 도중 온혜에서 온 한 승려와 만나 함께 쉬면서 온혜지역의 풍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두 사람은 서로 의견이 합치돼 함께 온혜로 돌아와 두루 살펴본 뒤 노송정 부근을 택지로 점지했다. 그 승려는 그곳 터가 귀한 아들을 낳을 곳이라 했다.
이계양은 결단을 내려 1454년 온혜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온혜는 거주민이 한 집 밖에 없었고, 수목이 우거진 깊은 골짜기였다고 한다. 그는 성품이 맑고 고요하며, 벼슬길에 나아가기 위해 힘쓰지 않았다. 오직 농사짓고 낚시하며 산수간에 자적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고, 자손들을 올바로 교육시키는 데 일생을 바칠 뜻을 두었다고 퇴계가 남긴 '선조고사적(先祖考事蹟)'에 전한다.
이계양은 단종이 폐위된 세조 원년(1455)에 온혜의 거처 뜨락에 소나무를 심고 키우며 거처에는 '노송정(老松亭)' 현판을 내걸었다. 그리고 스스로 호를 또한 노송정이라 했다.
노송을 사랑하여 소나무를 심고 노송정이란 이름을 붙인 뜻은 공자 말씀에 '세한이 된 연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맨 나중에 시드는 줄 알겠도다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라고
노송정에 들어가는 문인 '성림문(聖臨門)'. 퇴계 모친이 공자가 집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퇴계를 낳았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 것과 중국 동진시대 도연명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와서 읊은 귀거래사(歸去來辭) 중 '외로운 소나무 어루만지며 배회하도다(撫孤松而盤桓)'라고 한 데서 가져왔다.
벼슬길에 더 나아가기를 거부하고 노송에 마음을 의탁한 깊은 뜻을 여기서 읽을 수 있다. 세조의 조정에서 벼슬하지 않으려 한 세한송백 같은 지조를 지키고, 도연명처럼 전원에서 자연을 벗삼아 본성대로 살고 싶었을 것이다.
이계양이 심은 노송은 아주 특별한 것이다. 본래 그의 부친 이정(李禎)옹이 북한 영변에서 '만년송' 세 그루를 가져와 한 그루는 주촌의 맏아들 집 경류정(慶流亭)에 주어 오늘날까지 자라고 있고, 사위에게 한 그루 준 것은 일제 때 훼손됐다. 나머지 한 그루는 이계양이 심었는데 수백년 동안 잘 자라오다 120여 년 전 폭설로 부러져 없어졌다. 그 자리에는 20년 전 경류정 노송(천연기념물)의 어린 소나무를 가져와 다시 심은 것이 자라고 있다.
#퇴계 조부와 부친의 남다른 자녀교육
이계양은 아들 둘을 두었다. 큰 아들 식(埴)은 퇴계의 부친이고, 둘째는 우()로 호가 송재(松齋)이다. 이계양은 일찍부터 독실하게 학문에 정진하여 체득한 것을 두 아들에게 물려주고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식은 진사 합격 후 집 부근 산기슭에 독서공간을 만들어 제자들을 가르치며 독실하게 공부를 하였으나 퇴계가 태어난 이듬해에 불행히도 별세했다.
퇴계 부친이 얼마나 학구열이 강했는지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서적을 많이 소장하고 있던 식의 장인이 불행히도 일찍 별세하자 장모되는 남씨 부인은 자기 자식들이 글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음을 한탄하다가, 사위가 학문에 열성적인 것을 보고 많은 서적을 모두 사위에게 넘겨준다. 그러면서 "내 들으니 서적은 공적인 기물이다. 반드시 학문하는 사람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 아이들은 이 보물을 소장하기엔 부족하다"고 했다 한다. 퇴계가 자신의 부친 행장에 기술한 내용이다.
식과 우 두 형제가 열심히 학문에 정진한 힘은 이계양으로부터 이어져 온 것이고, 그 결과 송재공 또한 문과에 급제했다. 당시 두 형제를 영남수사(嶺南秀士)로 꼽았고, 형제가 금과 옥과 같다고 하여 금곤옥우(金昆玉友)로 칭송되기도 했다. 송재공은 형이 별세하자 형이 남긴 서책으로 퇴계를 비롯한 조카들을 성심성의껏 가르쳤고, 그 중 퇴계의 넷째 형인 해(瀣)와 퇴계가 가장 우뚝해 금곤옥제(金昆玉弟)로 불렸다.
이처럼 노송정의 내력을 살펴보면 퇴계가 학문을 크게 이룬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노송정의 주인공인 퇴계 조부 이계양에서부터 쌓여온 공덕이 퇴계가 세계적 대석학이 될 수 있었던 터전이 됐던 것이다.
[한국의 혼 樓亭 .2] 안동 도산면 추월한
수정
퇴계 이황의 숭고한 학문·혼 면면히…
조선 중기 문인 권두경이 후학에 가르침 전하려 세워
일제때 방화로 소실…전국 450여개 문중이 나서 중건
학생·일반인 대상 예절교육장 등으로 활용돼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추월한수정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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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15세 종손 이동은옹
'공손히 생각하니 천년을 이어온 성인의 마음은(恭惟千載心)/ 가을 달빛이 차가운 물에 비춤이로다(秋月照寒水).'
이 글귀는 중국 남송의 대유학자 주자(朱子)의 시 '재거감흥(齋居感興)' 중 한 구절이다. 1천500여년 후 공자의 도학(道學)을 다시 이은 주자가 공자의 마음, 옛 성인의 마음이 가을 달빛이 비치는 차고 맑은 물과 같음을 비유하고 있다.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의 '추월한수'는 이 시의 한 구절인 '추월조한수'에서 온 말이다.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는 추월한수정은 퇴계(退溪) 이황(1501~1570)의 도학을 기려 후학들이 세운 정자이다. 퇴계의 마음 또한 '추월조한수'와 같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퇴계의 제자인 학봉(鶴峯) 김성일은 퇴계에 대해 "선생의 학문은 명백하고 쉽다. 선생의 도는 광명정대하다. 선생의 덕은 온화한 바람이요, 상서로운 구름이다. 선생의 마음과 도량은 가을 하늘 밝은 달이며, 탁 틔어 보이는 얼음항아리다"라고 표현했다. 성인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짐작할 수 있는 말들이다.
#퇴계를 기려 지은 정자
안동시에서 봉화 방향으로 가다가 도산면 소재지인 온혜리에 못 미쳐 우측으로 난 도로를 따라 가면 토계리 상계(上溪)가 나온다. 이곳에 있는 추월한수정은 야산을 등진 평탄한 지형에 동남향으로 앉아 있다. 정자 앞으로 토계(兎溪)가 흘러간다.
추월한수정은 1715년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충재(沖齋) 권벌의 5세손인 창설재(蒼雪齋) 권두경(1654~1725)이 퇴계의 도학을 추모해 퇴계가 자라고 공부하며 은퇴 후 머문 곳을 찾아 세운 정자이다. 퇴계의 정신과 소중한 가르침을 받들어 배우고, 또한 그 가르침을 영원히 후학들이 이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었을 것이다.
창설재는 자신의 선조가 세운 봉화 닭실의 '한수정' 이름에 '추월'을 더해 '추월한수정'이라 명명했다. 또한 정자 안에 걸려 있는 '도학연원방(道學淵源坊)' '산남궐리(山南闕里) 해동고정(海東考亭)' '이운재(理韻齋)' '완패당(玩佩堂)' 등의 현판 이름도 창설재가 명명한 것이다. 추월한수정과 인접해 있는 퇴계종택의 명칭인'퇴계선생구택(退溪先生舊宅)'이란 이름도 창설재가 당시에 붙인 것이다.
도학연원방은 도학의 본산이라는 뜻이다. 산남궐리 해동고정은 공자가 태어난 곳인 궐리와 주자가 강학한 곳인 고정이라는 지명을 빌려온 것으로, 퇴계를 기리는 추월한수정이 궐리와 고정과 같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운재의 뜻은 창설재가 지은 시 '이운재'에 잘 나타나 있다.
'보갑에 든 옥거문고(寶匣瑤琴)/ 줄이 끊어진 지 오래이네(絃絶多年)/ 퇴계 선생이 멀리 이어(先生遠紹)/ 그쳐버린 거문고 소리 다시 전하였네(輟響再專)/ 경전을 대한 매화창에(黃卷梅窓)/
한학자 이갑규씨와 추월한수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퇴계 15세 종손 이동은옹.
봄소식이 몇 번이나 돌아왔던가(幾回春信)/ 힘쓸지로다 후생들이여(勖哉後生)/ 오히려 여운을 다스려보세(尙理餘韻).'
거문고 줄이 끊어졌다는 것은 성인의 도학이 이어지지 못한 것을 상징한 것이다. 공자의 사상이 진시황 때 분서갱유로 단절돼 그 글만 복원돼 전해오다 1천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 송나라 때 정명도·정이천 형제가 공자의 도가 무엇인지 그 본질을 밝혀내게 되었고, 남송 때 주자가 집대성함으로써 공자의 도학이 새롭게 전해지게 되었다. 그래서 후대에 정주학이라 불렀다. 고려 충렬왕때 회헌(晦軒) 안향에 의해 정주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200년이 지난 뒤 퇴계에 이르러 정주학이 완성된다. 이러한 상황을 창설재는 퇴계가 끊어진 거문고 소리를 다시 이었다고 비유하면서, 그 여운을 받아 다스리자는 뜻으로 이운재라는 이름을 지은 것이다. 완패당에 관한 창설재의 시도 전한다.
#450여 문중이 중건한 현재 건물
창설재가 창건한 추월한수정은 안타깝게도 1896년 일제의 방화로 인해 다 타버렸다. 그 후 1926년 상주 도남단소(道南壇所:도남서원이 대원군 때 철폐되면서 성현을 모시기 위해 제단만 설치했을 때의 이름. 현재는 서원이 복원돼 있음)에서 추월한수정을 복원하자는 도회(道會)가 열린다. 전국의 450여 문중이 성금을 내 2년여에 걸쳐 정자를 포함해 정침과 사당을 완성했다.
지금 정자에 있는 '산남궐리 해동고정'이라는 현판 글씨는 해강(海岡) 김규진이 썼고, '이운재'와 '완패당'은 해강의 제자인 홍락섭의 글씨다. 그리고 '도학연원방'은 퇴계의 15세 종손 이동은옹(98)의 숙부인 원대(圓臺) 이원태의 글씨다. '추월한수정'과 '퇴계선생구택'은 근세 설암체로 필명이 높았던 이고(貳顧) 이동흠이 썼다. 모두 복원 이후에 다시 쓴 글씨들로 퇴계의 글씨를 보는 듯 단정하다.
추월한수정의 대들보는 도산서원에서 과거를 볼 때 시제를 걸던 나무를 100여명의 인부가 운반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이동은옹이 들려줬다.
창설재가 창건한 정자건물은 사라졌지만, 후학들의 복원을 통해 퇴계의 가르침과 혼을 전하고자 했던 그 마음과 업적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이갈암의 문인으로 유학에도 정통하고 시·서·화에 능했던 창설재는 퇴계의 언행을 모은 '퇴도언행통록'을 저술하고, '계문제자록'을 정리하기도 했다.
현재 추월한수정은 학생과 일반인들의 전통 예절교육이나 문중 모임의 장소 제청(祭廳) 등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퇴계의 차종손(16세 종손) 이근필씨(75)는 '도산서원 허시회(虛施會)'를 만들고 거경(居敬)대학 설립을 준비하는 등 퇴계의 정신과 가르침을 교육하고 보급하는 데 정성을 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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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혼 樓亭--1
28.계정 우복 정경세
22. 만귀정===응와 이원조
27.자언정--사미헌 장복추
12.청원루--청음 김상헌
15. 삼귀정 풍산 소산
26. 산수정 매산 정중기
25. 옥간정 정만양형제
24. 수운정 청허재 손엽(양동)
21. 척서정 군위 부계
20. 영귀정. 회재 이언적
19. 청암정 충재 권벌
18. 만화정 청도 금천면
17. 초간정 권문해(용문)
16. 근암정 류치덕(해평)
23. 강호정 정세아
14. 읍호정 약포 정탁
13. 호와정 류현시(해평)
[한국의 혼 樓亭 .28] 우복 정경세의 상주
외서면 '계정'
유일한 '草家정자' 청빈한 관료정신 후세 귀감
임란때 의병조직…어머니·동생 잃고 자신도 화살 맞아
(제자·자문: 養齋 이갑규)
대구 지산동 녹원아파트 자리에 저수지 축조 가뭄 대비
난폭한 광해군에도 직언상소…당시의 '미스터 쓴소리'
/
만학풍천에 빗장 걸어 닫고 홀로 있으니(萬壑風泉獨掩),
긴긴 해 계정에 찾아오는 나그네 없도다(日長無客到溪亭).
해질녘 정신 지쳐 서책 버려두고 나오니(晩來意倦抛書出),
눈부신 신록의 그늘 뜰 안에 가득하구나(潑眼新陰綠滿庭).
이 시는 우곡잡영(愚谷雜詠) 20수중에 있는 계정(溪亭)을 읊은 것이다.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의 조용한 산림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계정은 조선조 퇴계학의 정맥을 잇고,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대선비로 이름난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563(명종 18년)~1633(인조 11년))가 강학을 하던 곳이다. 우복은 본래 상주시 청리면 율리에 태어나 살았으나 28세 무렵 관직생활을 잠시 접고 우산리로 들어가 은거하다가 3년 후인 1603년 계정을 짓고 청간정(聽澗亭)이라 이름 하였다.
#유일하게 草家로 계승
우복은 대사헌에 14번이나 임명된 고관대작의 반열에 들어 있었지만, 귀향하면 이 산중으로 들어가 초라하기 그지없는 계정에서 청검하게 평생을 지냈다. 계정은 그의 이러한 선비정신을 상징하듯이 지금까지 초가로 계승되고 있다.
평생을 청빈한 관료생활로 일관하자 임금은 가정의 대소사가 있을 때면 빈한한 살림을 걱정하여 곡식을 하사하곤 하였다.
우복의 이러한 청빈한 관료정신은 후세까지 조정에서 높이 기렸다. 영조임금 때 와서 이 우산리 일대를 하사하여 사패지(賜牌地)로 지정하였다. 남북십리 동서오리 협곡으로 이루어진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이곳은 이른바 우산동천(愚山洞天), 혹은 칠리강산(七里江山)으로 불린다.
진양정씨인 우복은 찬성공 정여관(鄭汝寬)과 합천이씨 사이에 2남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7세에 '19사략'을 읽고, 8세에 '소학'을 절반쯤 읽자 문리가 확 통했다고 한다. 16세 때 진사초시에 합격하였고, 18세 때는 서애(西厓) 유성룡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다. 24세 때 문과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로 벼슬을 시작해 청환직을 두루 거쳤다. 그러나 정여립 모반사건 때는 정여립의 생질 이진길을 추천한 죄로 20일간의 투옥생활을 겪게 된다.
#죽음 무릅쓴 의병활동과 애민정신
30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조직해 김광복, 김사종 등과 목숨 걸고 항전하였다. 안령산(安嶺山)전투에서 어머니와 아우를 잃고 우복 또한 왜적의 화살을 맞아 절벽에 굴러 떨어지는 치명상을 입기도 했다. 구사일생으로 겨우 목숨을 건진 그는 그 후에도 김각, 송량, 이전, 이준 등과 함께 구국의 일념으로 의병활동을 계속하였다. 현재 대구 망우당공원에 있는 임란호국 영남충의단에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우복은 어느 누구보다 임란의 아픈 상처가 깊었다.
47세가 되던 4월 동지사(冬至使)로 임명되어 명나라 사신으로 7개월여에 걸친 장도에 오르게 된다. 그는 당시 국가의 주요한 무기였던 화약이 임란 후 불과 3천근으로 수입이 제한되자 명나라에 이를 시정해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여 수입물량을 6천근으로 늘렸다. 이로써 자주국방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또 대구부사 시절에는 대구의 식량고인 수성들판이 가뭄에 타들어가면서 굶주리는 자가 늘어나자 지산동에 저수지를 축조하여 세세 풍년을 이룰 수 있는 수해대책을 마련하였다. 지금 이 자리에는 녹원아파트가 들어섰고 그의 공적을 기리던 송덕비는 도시화에 밀려 두 동강이가 난 채 경북대 박물관 앞 비석마당에 겨우 보존되어 있다.
우복이 계정에서 독서와 저술로 보내던 때, 그는 당시 상주목사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과 의논하고 지방 유지들과 뜻을 합쳐 의료재단 존애원(存愛院)을 건립하였다. 존애원은 당시 의료시설이 취약한 시골 민중이 언제든지 무료로 질병을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한 의료기관이었다.
#萬言疏와 직언
광해군 시절 온갖 폐단이 속출해 정치가 어려워지자 나약한 문신으로 자처하지 않고 난폭한 광해군에게 일만여자의 직언
우복이 머물던 계정 초가지붕위에 하얀 눈이 살포시 내려 겨울정취를 더하고 있다.
계정 바로 옆에는 아주 독특한 한옥구조를 이루고 있는 대산루가 자리잡고 있다.
상소를 올렸다. 그 요지는 "나라 경제가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고위층들의 관혼상제에는 허례허식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또 경제인들의 돈을 끌어당겨 내년 세입으로 미리 쓰면서도 검소할 줄 모르니 군주(君主)로서 어찌 구걸하는 방식으로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십니까"라고 기강을 바로잡을 것을 강력하게 주문했다.
광해군은 이 상소를 읽고 크게 분노하여 그를 삭직(削職)과 국문(鞫問)으로 벌하려 하였다. 이에 영의정 이원익, 좌의정 이항복이 나서서 "그의 말이 과격하나 지극한 충성심을 품지 않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를 처벌하면 언로가 막히고 말 것입니다"라면서 임금을 달래 겨우 수습되었다.
우복은 광해군 시절 사단이 터질 때마다 연루되었다. 이는 불의를 보면 분연히 일어서는 그의 높은 기개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를 벌하려 했던 광해군마저 그의 충의정신을 감복해 마지않았다. 정인홍이 북인정권을 수립하여 회재(晦齋)와 퇴계(退溪)를 문묘에서 퇴출하려 할 때에도 영남 사림의 대표로서 그를 제지하였다. 이로 인해 끝내 정인홍으로부터 탄핵되어 해직된 후 무고하게 세 차례나 옥고를 치렀다.
우복은 성리학뿐만 아니라 예학에도 매우 밝았다. 사계(沙溪) 김장생과 논변한 경서변의(經書辨疑)는 영남학과 기호학의 의견이 교류된 것이다. 훗날 사계는 "오늘날 세상에서 학문을 강론하고 예를 논의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정우복밖에 없다"고 극찬하였다. 그리고 사계의 제자인 우암(尤菴) 송시열, 초려(草廬) 이유태, 동춘(同春) 송준길 등은 당시 모두 준수한 청년으로서 서인의 핵심 인물들이었지만 그는 동춘을 사위로 맞이하였다. 율곡의 제자인 성균관 대사성 정엽(鄭曄) 또한 우복을 존경하였고 늘 성균관 유생들에게 우복의 학문과 언행을 예찬하였다.
그는 한음(漢陰) 이덕형, 백사(白沙) 이항복과 가장 절친하였고 한음의 행장을 짓기도 했다. 훗날 우복의 행장은 동춘, 시장(諡狀)은 우암, 묘지명은 창석(蒼石) 이준이 각각 지음으로써 초당파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퇴계가 편찬한 '주서절요'를 출판, 반포하였고, 만년에는 주문작해(朱文酌海)라는 제목으로 주자서중의 봉사(封事)와 비지(碑誌)등을 뽑아 10권의 책으로 편찬하였다. 어린이 교육용으로 양정편(養正篇)을 지었고 사문록(思問錄)을 지어 주역, 예기, 의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이밖에 상참고(喪參考)와 문집 20권10책이 있다. 훗날 문집간행 후 관각(館閣)의 제현들이 우복문집의 중요저작을 뽑아 4책 분량으로 엮어 하거선영(荷渠選英)이란 제목으로 간행되어 많은 사람들이 읽고 문장의 지침으로 삼았다. 훗날 동춘은 우복이 세상을 하직하자 우산리 산중에 혼자 남아 우복의 어린 손자 도응(道應)을 10여년동안 양육하고 가르치면서 우복의 유고를 정리하였다. 이는 마치 공자의 제자 자공이 공자의 손자 자사를 가르치며 공자의 묘를 지킨 것과 너무나 흡사하였다.
#對山樓는 계정의 부속건물
우복의 7세손 입재(立齋) 정종로(1738(영조 14년)~1816(순조 16년))는 퇴계학파의 삼고봉(三高峰·청대(淸臺) 권상일, 대산(大山) 이상정, 입재)으로 꼽히는 인물이며, 당대 생존학자로 꼽을 때는 좌대산(左大山), 우입재(右立齋)로 불렸다.
입재는 45세 무렵 계정 옆에 대산루를 지어 영남학맥을 집대성하였다. 계정의 서남쪽에 우복 종택이 있고, 현재 우복의 16세손인 정춘목씨가 종가와 고향을 지키면서 살고 있다. 계정의 현판글씨는 선원 김상용이 쓴 것과 미수 허목이 쓴 것 모두가 잘 보존되어 있다.
계정 앞에 있는 문화재 안내문에 계정이 대산루의 부속 건물로 소개되어 있음은 잘못이다. 지은 연대 등을 감안하면 대산루가 계정의 부속건물에 속한다. 계정 위쪽 산언덕에는 우산서원이 세워져 우복을 추모하였으나 대원군 당시 훼철되었고 입재가 강학하던 도존당(道存堂)만 남아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은 기획시리즈입니다)
한국의 혼 樓亭 .1] 선비의 혼 담긴 누각과
정자를 찾아
(제자: 養齋 이갑규)
자연 즐기며 수양·저술·강학 …'선비들의 知的 공간'
누각이 정자보다 규모 커, 경상도 특히 안동 가장많아
퇴임 사대부·처사가 주역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우리 문화의 대표적 흐름 중 하나인 선비문화는 누정문화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에 속하는 밀양 영남루.
연재의 방향
누정은 건립 목적에 따라 그 기능이나 용도가 다양하다. 규모나 위치에 따라 지명도나 거쳐간 선비들의 수도 다르다. 수많은 누정 중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어느 누정을 다룰 것인지 결정하는 것도 쉽지 않은 문제다.
한학자 이갑규씨(대구대 겸임교수)와 누정연구가 오용원씨(동국대 한문학과 강사)의 자문을 받아 경상도 지방의 누정 중 학맥이나 문중을 대표할 수 있는 누정을 중심으로 다루기로 했다. 해당 누정의 주인공을 비롯해 그 주인공과 관련된 학맥과 문중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을 큰 흐름으로 삼고자 한다. 이런 기준으로 다루지 못한 누정 중 대표적인 것들은 건립 목적이나 용도 등을 기준으로 해서 다룰 계획이다.
누정마다 전문가와 함께 현장을 찾아 누정기나 각종 현판을 채록·해석하고, 누정과 관련된 후손을 인터뷰하면서 해당 누정에 담긴 선비들의 삶과 정신을 되살리고자 한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옛 목조건물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누정(樓亭)이다. 그 중에서도 정자가 제일 많다. 우리의 선조들은 벼슬길에서 물러난 뒤나 관직에 나가지 않는 처사(處士)로 지내면서 소박한 정자 한 칸을 마련, 저술과 강학(講學) 활동을 했다. 또한 학덕 높은 스승이 거닐던 곳에 제자나 후학들이 그 학덕을 기리는 정자를 건립, 인격과 학문을 수양하는 장소로 삼기도 했다.
귀족들이 풍광 좋은 곳에 정자를 앉히고 풍류를 즐긴 경우도 있지만, 그런 정자는 그리 많지도 않고 지금까지 보존된 곳도 드물다. 선비들의 정신과 혼이 누정의 핵심이며, 후학들이 본받고자 하는 그런 정신이 누정을 오랜 세월 동안 유지하게 하는 힘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누정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지역이 대구·경북이고 영남이다. 누정 건물 자체보다 거기에 담겨진 선비들의 삶과 정신이 더 소중한 자산이지만, 그 보물들은 아직까지 대부분 어둠 속에 묻혀 있다. 영남의 누정을 중심으로 누정에 남겨진 시문이나 누정기 등을 통해 선조들의 소중한 정신과 풍류, 지혜를 조금이나마 더듬어보고자 한다.
◆누정의 개념과 역사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마룻바닥을 지면에서 한층 높게 하고, 벽이 없게 지은 집인 누정(樓亭)은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함께 일컫는 이름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누각과 정자를 비롯해 당(堂), 대(臺), 헌(軒) 등을 포함해 일컫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멀리 넓게 볼 수 있도록 대개 높은 언덕이나 돌 또는 흙으로 쌓아올린 축대 위에 이층 이상으로 지은 것이 누각이라면, 정자는 벽이 없이 탁 트인 건물로 누각보다 규모가 작고 학문과 저술 활동을 위해 소박한 초당으로 지은 경우가 많다.
누정은 보통 마루로만 되어 있으나 한두 칸 정도의 온돌방이 딸린 경우도 적지 않다. 정자가 개인적 수양공간이라면, 누각은 공적인 집단 수양공간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누정은 신라 소지왕이 488년 정월에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처음 보인다. 천천정은 연못을 갖춘 정자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구전(口傳)이나 삼국사기의 다른 기록으로 볼 때 천천정 이전에 누정의 축조가 이뤄졌을 것으로 추측되나, 5세기 이전의 누정 역사는 알기 어렵다. 누정은 이처럼 궁실을 위한 원림(園林)의 조성과 더불어 군신의 휴식처로 만들어지기시작해 차츰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발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누정 지역적 분포
현재 문헌으로 전하는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전체 누정 가운데 경상도와 전라도의 누정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가장 최근인 1929년에 편찬된 '조선환여승람'에 따르면 경상도가 1천295개로 가장 많고 전라도(1천70개), 충청도(219개), 강원도(174개), 제주도(6개) 순이다. 경상도 중에서는 안동(97개), 산청(83개), 예천(79개), 거창(69개) 등 순으로 많다.
이보다 앞선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국역본)에는 전국의 누정 수가 885개로 돼 있다. 이 중 경상도가 263개로 가장 많다. 전라도(170개), 평안도(100개), 충청도(80개) 등이 뒤를 잇고 있다.
여기에 수록돼 있는 누정 중에는 소실된 누정도 있고, 이후에 신축한 누정도 있다. 안동 지방에 있는 누정 가운데는 안동댐과 임하댐의 건설로 다른 장소로 옮겨진 것도 상당수에 이른다.
누정은 지리적 환경과 누정을 건립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갖춘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누정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학자나 묵객(墨客)들의 출입이 있어야 한다.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는 어느 지역보다 퇴계 문인을 비롯해 많은 사숙문인(私淑門人)들이 배출된 지역이다. 조선시대 학풍을 이끈 본거지가 경상도인 만큼 학자들이 머문 곳이 많으며, 누정도 많을 수밖에 없다. 경상도는 이처럼 누정이 건립되거나 경영될 수 있는 제반 여건을 갖춘 곳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경상도의 누정 중에는 소박한 초당의 정자가 많다. 형편이 좋아 풍류를 즐기기 위해 지은 정자가 많은 전라도와는 차별되는 점이다.
◆누정의 기능과 누정문화
누정은 세워진 위치나 건립 취지에 따라 그 기능이 다양하다. 우선 유흥상경(遊興賞景)의 기능을 들 수 있다. 명승지나 경관이 좋은 곳에 있는 누정은 그곳에 오르면 산수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그 흥취를 즐기게 되는 것이 1차 기능임은 당연할 것이다.
조선 중기 이후 누정은 주로 학문을 가르치고 수양하며, 인륜의 도를 가르치는 역할을 했다. 사대부들이 벼슬을 그만두고 은퇴해 누정에서 유생들을 가르치는 경우도 많았다. 씨족끼리의 종회(宗會)나 마을사람들의 동회(洞會), 각종 계 모임을 위해 건립된 경우도 있으며, 활쏘기 수련장 구실을 한 곳도 적지 않다. 궁궐 및 관아의 누, 성루(城樓) 등은 휴식이나 연회, 감시, 조망 등의 용도로 활용되었고, 사찰의 누는 강당, 사찰사무실, 전망, 종루(鐘樓) 등의 용도로 사용됐다.
옛 관리와 선비들은 누정을 건립하고, 직접 누정을 유람하며 글을 남기는 것을 보람으로 생각했다. 누정 문화활동의 주역은 현직 관리보다는 퇴임한 선비나 처사로 지내던 지식인들이었다. 누정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정자에 남긴 자취로 보면 자연 속에 소요자적하거나 은둔하던 지식인들의 공이 절대적이다.
지식인들은 각박한 현실을 피해 누정에서 아름다운 산수를 즐기며, 거기서 정신적 즐거움을 찾고 자연을 배우는 삶의 방식을 추구했다. 우리 문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선비문화나 산수문화는 누정을 중심으로 형성된 누정문화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은 기획시리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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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혼 樓亭 .22] 응와 이원조의 성주 가천면 '만귀정'
10년 걸쳐 3번 옮긴 끝에 '포천구곡' 터 잡아
조정요직 두루 거치고 59세 물러나 학문 정진
당대 名儒 모여 강학·나라걱정 '역사적 명소'
/글·사진=김신곤 기자
포천구곡 끝자락의 폭포 곁에 편안하게 자리잡고 있는 만귀정.
아령산 외지고 좁은 터 대숲 마을 깊은 곳에(牙田欠窄竹村深), 갈곡의 시내가 앞으로 흘러 만년에야 마음에 쾌한 곳 얻었다네(葛谷前溪晩心). 삼면의 암석 간에 쌍폭포 나뉘어 흐르고(雙瀑分流三面石), 사방이 산으로 빙 두른 곳에 하나의 작은 산 숲을 끼고 있네(四山環擁一邱林). 하늘이 천년의 긴 세월동안 아끼고 비장해 둔 곳이라고 말하지 말게(莫言秘千年久), 예부터 지금껏 십년을 경영하여 얻은 곳이라네(自是經營十載今). 반드시 금강산에 가서 놀고 싶던 빚은 다 풀었고(好去金剛遊債了), 이제는 돌아와 흐르는 물 떠가는 구름 가에 한가로이 누웠다네(歸來閑臥水雲).
성주군 가천면 신계리 가야산 북쪽 포천구곡(布川九曲) 끝자락 만귀정(晩歸亭) 현판에 걸린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1792∼1871)의 '복축(卜築)'이란 시다. 이 시만 감상해 보아도 정자를 앉힌 본뜻과 그 아름다운 풍광을 잘 느껴 볼 수 있다.
깊어가는 가을 포천구곡 만귀정을 들어서면 뒤로는 우뚝 솟은 가야산 칼바위가 하늘아래 병풍을 치듯 둘러있고, 만산홍엽(萬山紅葉)과 맑디맑은 폭포의 물소리는 나그네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하다. 조선 후기를 불꽃처럼 살다간 응와는 내외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인생의 후반기인 60세 무렵 경주 부윤 벼슬을 마친 후 이곳으로 들어온다. 그는 이 정자를 짓고 학문과 수양에 전력을 다했다.
#금강에 버금가는 비경에 자리한 만귀정
이곳 신계동은 본래부터 산수풍경이 좋았지만 응와가 터를 잡고 살면서 더욱 명승지가 되었다. 주자가 중국 복건성 무이산에 들어가 무이구곡을 명명하고 제5곡에 무이정사를 지어 강학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응와는 신계동에 포천구곡을 명명하고 마지막 구곡에 정자를 지어 학문에 힘썼다.
만귀정 아래 계곡 암반에는 만산일폭루(萬山一瀑樓)가 남아 있다. 일만 산의 물이 하나의 폭포로 내려온다는 누각 이름에서 '일만 가지 사물의 다른 현상이 원리는 하나'라는 만수리일(萬殊理一)의 철학을 말해 주고 있다.
그 옆에는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이 응와의 학덕을 길이길이 추모하기 위해 철제로 세운 흥학비(興學碑)가 바위 위에 꽂혀있다. 이곳은 당대의 명유들이 모여서 강학을 하고 나라를 걱정했던 역사적인 명소이기도 하다. 응와가 쓴 포천지에는 10년 정성으로 마련한 만귀정과 포천산수의 아름다움, 곳곳에 이름 지은 지명 등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응와가 지은 만귀정 기문에 따르면 관직 생활 50년 세월에 하루도 돌아가기를 잊은 적은 없었고 본성이 산수를 좋아하여 관직에 부임하는 곳마다 회심처가 있으면 수레를 멈추고 방황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또 어느 한 곳에 은둔처를 구하면 조그만 오두막을 엮어 노년을 마칠 계획을 하였다. 그러던 중 52세 되던 계묘년(癸卯年) 탐라로부터 돌아와 목재와 기와를 매입해 놓고 3년 후인 병오년(丙午年)에 자주(慈州)에 있으면서 예서를 잘 쓰는 조소눌(曺小訥)에게 정자의 현판을 새기게 하였다.
그리고 4년 후, 59세 때인 경술년(庚戌年)에 경주부윤을 그만두고 돌아와 청천(淸川) 수렴동(水簾洞)에 터를 잡았다가 다시 조암(祖巖)의 강 언덕으로, 또다시 아령(牙嶺)의 폭포가 있는 이곳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모두 세 번 터를 옮겨 비로소 이 포천의 골짜기에 둥지를 튼 셈이다.
정자 이름을 만귀(晩歸)라 한 것은 늦게 돌아온 것에 부끄러운 마음도 있고 10년에 걸쳐 터를 잡고 3년에 걸쳐 집을 지은 것이 늦었다는 의미를 함께 내포하고 있다.
응와초상
만산일폭루를 끼고 포천구곡이 흐르고 있다.
"(중략) 나는 이제 늙었다. 벼슬길에 종적을 거두고 이 고요한 곳에 몸을 쉬려한다. 성인의 경전을 안고 일반 사람들이 맛보지 못한 것을 음미하기에 충분하며, 구름과 달 속에 노닐면서 일반 사람들이 즐기지 못한 것을 즐기기에 충분하다. 이제부터는 죽는 날까지 송나라 구양수(歐陽修)가 태자소사(太子少師)로 벼슬을 그만두고 영주(潁州)에 돌아가 만년을 마친 절의를 보존한 것처럼 하고, 위나라 거백옥(伯玉)이 자신의 양심에 허물을 줄이려고 노력하더라는 것을 따라, 인정의 종이 친 후에도(70세의 비유) 밤길을 다닌다는(벼슬살이 비유) 기롱(譏弄)을 면하여 바야흐로 이 정자의 이름에 저버림이 없으려고 이 내력을 기록하여 맹세한다 (…歐陽之節,寡伯玉之過,得免鍾漏夜行之譏,方爲無負於是亭,姑記之以自矢云.)" 라고 만귀정 기문에 밝히고 있다. 인생을 정리하는 만년의 삶의 자세가 어떠한지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다.
#독창적인 학설을 제시한 당대의 석학
응와의 본관은 성산이고 시호는 정헌(定憲)이다. 증조부는 돈재(遯齋) 이석문이다. 돈재는 선전관 근무 시절 목숨을 걸고 사도세자를 구명하다가 파직된 후 낙향하여 북쪽 사립문을 내고 평생을 벼슬하러 나가지 않은 충절의 선비로 흔히 북비공(北公)으로 칭한다. 조부는 사미당(四美堂) 이민겸이다.
응와는 사미당의 둘째 아들 함청헌(涵淸軒) 형진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인 농서(農捿) 규진의 양자로 들어갔다. 생부는 국자 생원이었고 양부는 장령 벼슬을 하였으며 형제가 입재(立齋) 정종로의 문하에 출입할 때 금곤옥계(金昆玉季 : 금과 옥같은 형제)로 칭송받았다.
응와는 이러한 가학의 터전 위에서 10세에 이미 사서(四書)와 시·서를 통하였고 12세 때는 부형의 글을 능히 대필할 정도로 모든 문체에 통달하였다. 18세에 대과에 급제하자 부친은 "소년으로 대과에 오름은 하나의 불행"이라고 경계한 고인의 말을 거울삼아 가르침을 내리고 앞으로 10년을 기약하고 독서만 할 것을 훈시하였다. 응와는 이 가르침을 따랐고 23세 때 입재 정종로의 제자가 되었다. 25세에는 당시 석학이던 호곡(壺谷) 류범휴를 배알하였고 수정재(壽靜齋) 류정문, 정재(定齋) 류치명 등을 종유(從遊)하였다. 26세에는 전적(典籍)의 벼슬을 시작하여 한성판윤,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퇴계 학통의 정맥을 잇는 정재와 입재 학문의 요지를 얻었고 당시 학계 쟁점이었던 사단칠정론에 칠정리발설(七情理發說)을 주장, 또 하나의 논단을 제시하였다. 응와의 학맥은 대산(大山) 이상정 → 입재 정종로 → 응와 → 한주 이진상 → 면우(宇) 곽종석 → 심산(心山) 김창숙으로 이어졌다. 특히 한주는 응와의 장조카이자 제자로 응와의 성리설을 진일보시켜 심즉리(心卽理)설을 확립, 당시 학계를 경악하게 한 독창적인 학자였다.
신계리에서 30분 정도 차를 달려 성주 월항면 대포리(한개마을)에 들어가면 응와의 종택과 종택 앞에 있는 북비 고택이 잘 보존되어 있다. 종택에는 응와의 6세 종손되는 이수학씨가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면서 선대의 정신과 고택을 지켜가고 있다.
응와는 응와문집 22권, 응와속집 20권, 성경(性經) 4권, 응와잡록, 국조잡록, 난보기략, 포천지, 포천도지, 무이도지, 탐라록, 탐라지초보, 탐라관보록, 탐라계록 등의 방대한 저서를 남겼으며 대부분 현재까지 잘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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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혼 樓亭 .27] 사미헌 장복추의 성
주 금수면 '자언정'
조선말 영남 최고 학자의 인재양성 강학처
(제자·자문: 養齋 이갑규)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사미헌이 78세 이후 강학한 자언정 전경.
좋은날 쇠한 몸 붙들고 진경을 찾으니(勝日扶衰眞境覓),
온 시냇가 좌우에는 푸른 절벽뿐이구나(一川左右但蒼壁).
이 사이에 길 있어 공연히 머뭇거리노니(此間有路空),
덮인 안개와 쉬어가는 노을에 방울방울 이슬이로다(冪霧棲霞滴復滴).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1815~1900)가 자언정(玆焉亭)에서 읊은 '묵방십영(墨坊十詠)' 중 '멱진탄(覓眞灘)' 원운이다. 성주군 금수면 무학리는 대가천이 흐르고, 한강(寒岡) 정구가 명명한 무흘구곡이 뻗어 있는 곳이다. 이곳에 자리한 묵방서당(墨坊書堂)에는 자언정이란 당호가 마루 위에 걸려있다. 자언정은 조선말 사미헌 장복추의 강학처로 수많은 학자들이 우국의 울분을 토로하며 유학을 연구하였던 곳이다.
#조선말 영남의 삼학자 중 한 사람인 사미헌
사미헌은 조선말 영남의 삼징사(三徵士: 장복추, 김흥락, 류주목)요 삼학자(장복추, 이진상, 김흥락)로 꼽힌다. 여헌(旅軒) 장현광의 9세손으로 태어난 사미헌은 7세부터 수학할 때 다소 지둔(遲鈍)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00번을 소리내어 계속 읽어서 외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 노력을 하자 마침내 문리가 크게 터졌다고 한다.
23세 무렵 깨달은 바 있어 과거공부를 접고 근사록, 심경, 주자서 등을 깊이 연구하였고, 이후 경·사·자·집(經·史·子·集)에 널리 박통하여 오직 지행의 실천에 목표를 두었다. 그의 학덕이 높아지자 나라에서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 등의 벼슬을 내렸지만 모두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조부 각헌(覺軒) 장주에게 수학할 때 조부는 "여헌 선조의 교훈에 '천하 제일 사업을 할 수 있어야만 천하제일 인물이 된다'고 하였으니 마땅히 깊이 생각하고 행하라"고 가르쳤다. 당시 사미헌은 영남 제일의 학자로 추중을 받았다.
#도의(道義)로 벗을 사귐
사미헌은 특별히 친근한 벗으로 유하(柳下) 정삼석(鄭三錫),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거암(菴) 송인각(宋寅慤) 등을 꼽는다. 널리 사랑하고 모든 이를 포용해 친하며 성근 벗이 따로 없었으나, 폐와 간을 서로 비출 정도로 터놓고 학문을 토론했던 벗은 이 세 사람정도였다.
당시 사방의 선비들이 찾아와 그에게 수업을 청하였다. 문 앞에는 늘 신발이 가득하였다고 한다.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이 쓴 언행기술에 의하면 '사미헌 선생은 비록 사도(師道)로 자처하지는 않았으나 지성으로 고심하면서 인재를 성취하려 하였고, 그들의 편벽된 곳을 바로잡아 주었다. 그래서 각자 그 사람의 재질에 따라 어질고 어리석은 사람, 크고 작은 기량을 모두 이루어주었다'고 하였다.
사미헌기념사업회 자료에 의하면 대표적인 제자로 회당(晦堂) 장석영, 공산(恭山) 송준필, 농산(農山) 장승택, 심재(心齋) 조긍섭, 위암(韋菴) 장지연 등 300여명이 사방에 산재한 것으로 전한다.
#사미헌의 남다른 자녀교육
사미헌은 여헌으로부터 내려오는 가학의 정신을 이어받았고, 조부 각헌공에게 특별한 훈화를 받았다. 사미헌은 자제들이 남을 나무라면 "너는 참으로 자기 밭은 놓아두고 남의 밭을 매는도다(汝眞可謂舍己田,
사미헌이 제자들을 가르친 녹리서당.
而藝人田也)"라고 하였다.
사미헌이 남긴 훈가구잠(訓家九箴)을 보면,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아홉가지로 분류하여 경계하고 있다. 1)부모섬김(事父母) 2)형제우애(友兄弟) 3)부부간에 삼감(謹夫婦) 4)자손교육(敎子孫) 5)제사공경(敬祭祀) 6)빈객응접(接賓友) 7)친척과 돈독(敦親戚) 8)독서에 힘씀(勉讀書) 9)농상을 권장함(勸農桑)이었다.
사미헌은 옛 제도나 정신을 원형 그대로 보존함을 중요시하였다. 남명(南冥) 조식의 문집을 중간할 때 심재(心齋) 조긍섭을 대표로 다소 수정을 가하자 "100% 합당하다해도 감히 고칠 수 없거늘, 더구나 합당치 못함에 있어서 이겠는가. 이대로 수정하여 중간(重刊)을 한다면 후세의 기롱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갑신년에 국가에서 의복제도를 개선하려 할 때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였는데, 사미헌은 상소를 올려 애민(愛民)과 절용(節用)에 힘쓰지 않고 제도에만 매여 한심한 일만 하고 있다며 단호히 거부하였다.
#자신에 대한 일생의 경계
45세 무렵 거처하는 곳을 사미헌이라 이름하고, 자신의 호로 삼게 된다. 사미헌의 사미(四未)란 중용 제13장의 "자식에게 요구하는 것만큼 부모 섬김에 능치 못하며, 신하에게 요구하는 것만큼 임금 섬김에 능치 못하며, 형에게 요구하는 것만큼 형 섬김에 능치 못하며, 벗에게 요구하는 것만큼 내가 먼저 베풂에 능치 못하다"라는 공자의 사미능(四未能)이란 말에서 취한 것이다. 사미를 정자 이름과 자신의 호로 삼으면서 효제충신(孝悌忠信)에 힘쓸 것을 맹세했던 것이다.
사미헌이 강학한 장소로는 거창군 가조면에 당동서당(唐洞書堂)이 있었고, 76세무렵에는 칠곡군 기산면 각산리의 녹리서당(里書堂), 일명 구욱재(求勖齋)에서 강학하였다. 녹리서당은 현재 사미헌의 고손자 되는 장지윤옹이 지키고 있다.
다시 78세 되던 해, 나라가 갈수록 혼란해지자 학문을 후세에 전하고자 여헌이 임란 때 피란처로 거처한 유적지인 성주군 금수면 묵방으로 들어가 집 한 칸을 매입하여 자언정(玆焉亭)이란 현판을 걸고 강학을 하였다. 자언(玆焉)이란 송나라 주자의 시(詩) 중 '자언필모경(玆焉畢暮景: 여기에서 늘그막을 마치려 하노라)'이라는 구절에서 취하여 왔다. 현재는 묵방서당(墨坊書堂)으로 현판이 걸려 있고, 마루위에 자언정 현판이 그대로 남아있다.
#하루 한 끼로 장수한 사미헌
사미헌은 당시 86세까지 살면서 장수하였다. 술은 한 잔으로 족하였고 식사는 하루에 한 끼였다. 몇 숟가락 먹는 정도의 엄격한 소식가였으며 찬의 가지 수도 대단히 소박하여 한 끼 식사에 한가지의 찬 정도였다. 그러나 만년으로 갈수록 기력이 강하고 맑았으며 학문에 전일하였다고 한다.
저서로는 독서쇄록, 역학계몽, 사서계몽 숙흥야매잠집설, 가례보의, 삼강록간보, 훈몽요회, 문변지론, 동몽훈, 성리잡의 등이 사미헌집 11권, 속집 2권, 부록 6권 등 총 19권에 전한다.
예학과 성리학에 통철한 사미헌은 조선말 유학의 보존을 위해 온몸으로 지탱한 순유(純儒)로서 영남학을 결집한 태산북두같은 인물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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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혼 樓亭 .12] 청음 김상헌의 안동
풍산읍 '청원루'
"청나라 멀리하라" 피맺힌 애국혼 서려
인조때 항복국서 찢고 자결시도 척화파 거두, 71세때 淸에 끌려가 갖은 고초 6년 만에 귀국
장동김씨 종택에 현판 내걸고 와신상담 은둔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청음 김상헌이 청나라에 항복하는 국서를 찢어버리고 낙향해 청을 멀리한다는 뜻의 '청원루(淸遠樓)' 현판을 내걸고 머물렀던 누각.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청음(淸陰) 김상헌(1570~1652)은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청나라와 항복의 화의가 성립되자 임금 앞에서 항복의 국서를 찢어버리고 자결의 뜻도 못이루자, 조향(祖鄕)인 안동 풍산읍 소산리의 청원루(淸遠樓)에 내려와 은거했다. 청원루에 머물다 그 사건으로 청나라 선양(瀋陽)으로 압송되어 가는 도중에 서울을 지나면서 읊었던 애국충절의 시조다.
#항복의 국서를 찢어버리고 낙향한 청음
청음은 평소 경기도 양주 석실(石室)에서 거처했기 때문에 병자년 이후에는 석실산인(石室山人)으로 호를 고쳐 썼다. 안동 도정(都正: 조선시대 정3품 벼슬)을 지낸 김극효의 셋째 아들이며, 당대의 명신이자 대학자였던 월정(月汀) 윤근수의 제자이다. 또한 임당(林塘) 정유길, 맏형 김상용에게도 수학하였고 현헌(玄軒) 신흠, 월사(月沙) 이정구 등과 공부했다. 선조 29년(1596)에 문과에 급제한 뒤 대사헌, 대제학, 예조판서, 좌의정 등을 역임했고, 중국 사신으로 가서 당대의 석학들과도 교유했다.
인조 14년(1636)에 청 태종이 13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왔다. 청 태종은 당시 의주부윤인 임경업 장군이 철통같이 방비하고 있던 백마산성을 우회하여, 단 10여일 만에 서울까지 공격해 들어왔다. 인조 임금은 남한산성으로, 종묘의 위패는 강화도로 피란해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마침내 청나라에 항복하는 화의가 성립되었다.
그러자 청음은 백방으로 방어와 공격 대책을 강구하는 한편, 통곡을 하며 항복의 국서를 찢어버렸다. 군신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사건이었다. 끝내 청음 등이 주장하는 척화론이 좌절되고,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한 지천(遲川) 최명길 등이 찢어버린 국서를 다시 붙여 항복하기로 결론지어졌다. 결국 삼전도에 수항단(受降壇)을 쌓고 항복하게 된다.
한편 종묘의 위패를 모시고 강화도로 간 청음의 맏 형인 우의정 선원(仙源) 김상용은 적병이 강화도로 쳐들어와 함락하게 되자 적들에게 무기를 내주지 않기 위해 화약고에 불을 질러 순절하였다.
청음은 이런 상황에서 자결을 시도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자결의 뜻도 좌절되자, 와신상담(臥薪嘗膽)하여 수복할 것을 간청하는 상소를 임금에게 올리고 안동 소산리로 내려와 은거했다. 그 후 국서사건에다 척화파의 영수로 지목돼 71세의 고령으로 청나라 선양에 끌려가 갖은 고초와 심문을 당했다. 그러나 끝까지 항복하지 않으니 청나라에서도 충신의 절의에 감복해 죽이지를 못했고, 6년 만에 귀국하게 되었다.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뜻의 '청원루'를 내걸고 손자들 교육
청원루는 안동시내에서 50여리 떨어진 풍산들 북쪽에 위치한 소산리 마을에 자리잡고 있다. 소산리 앞에 펼쳐진 비옥한 풍산평야 남쪽으로는 낙동강이 유유히 흘러간다. 이곳의 입향조는 안동 김씨 시조로부터 8세손이 되는 김혁(金革)의 세 아들(三近·三益·三友) 중 삼근이다, 의성의 비안 현감을 지낸 삼근은 두 아들을 두었다. 큰 아들 계권(係權)은 한성부 판관을 지냈고, 둘째 계행(係行)은 호를 보백당(寶白堂)이라 하며, 대제학을 지냈다.
두 형제는 벼슬생활로 한양에 거주했으나 계권이 별세한 후 그의 부인 예천권씨는 다섯 아들을 데리고 소산리로 낙향했다. 계권의 5형제 중 막내인
글씨의 주인공이 잘못 알려지고 있는 청원루 현판.
청원루 앞의 김상헌 시비.
영수(永銖)의 아들 중 첫째인 영(瑛)은 문과 급제 후 승지, 관찰사 등을 지냈고, 소산파로 분류된다. 둘째 번()은 문과 급제 후 정랑 등을 역임했고, 장동(壯洞)파로 분류된다.
청원루는 장동김씨 시조인 김번(1479~1544)이 지은 살림집으로 장동파 종택이었다. 김번의 아들은 군수를 지낸 김생해이고, 그의 아들이 도정을 지낸 김극효이다. 김극효가 청음의 부친이다.
청음은 병자호란 후 이 집으로 들어와 보수를 하고, '청원루'란 현판을 걸었다. '청원(淸遠)'은 본래 '산수가 맑고 세속을 멀리한다(山水淸且遠)'는 뜻과 '애련설'의 '향기 멀수록 더욱 맑다(香遠益淸)'는 뜻으로 많이 사용하지만, 청음의 후손들이 전하는 바로는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황하문명의 정화를 수입해 우리 문화로 소화한 이 땅의 지식인으로서, 힘으로 밀고 들어와 정복한 '오랑캐문화'의 청나라에 대해 형제국으로 국교를 수립할 수는 있어도 군신간의 국교는 수립할 수 없거니와 오랑캐문화의 지배에 따를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학자들의 소신이었다.
청음이 양주 석실에서 줄곧 머물다 국서사건 이후 청원루에 내려가 있을 때 손자 셋을 데리고 와 글공부를 시킨 일은 특히 유명하다. 손자들이 나중에 큰 인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장손 수증(壽增)은 성천부사를 지냈고, 둘째·셋째 손자인 수흥(壽興)과 수항(壽恒)은 둘 다 사마시에서 장원을 했고, 수항은 문과 장원도 차지했다. 이 두 형제 모두 영의정을 지냈다. 그리고 증손자 창집, 창협, 창흡, 창업이 모두 큰 학자였다.
'청원루의 자손'으로도 불리는 세칭 장동김씨 후손들은 '금관자(金貫子) 서말이 나온 집안'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인물을 많이 배출했다. 그 중 청음 자손들의 벼슬길 진출이 두드러져 부자 영의정, 형제 영의정, 부자 대제학, 15명의 정승과 51명의 판서 등을 배출했다. 장동김씨는 특히 조선 후기 60년 세도정치를 이끈 주역들로 활약했다.
청음의 파란만장한 생애에 대한 저술은 청음이 직접 편집해놓은 초고를 손자인 수증, 수흥, 수항 등이 약간 보완해 간행한 40권 6책의 '청음집'이 전하고 있다.
현판 글씨 회곡 조한영 친필? 판독 오류로 잘못 알려진 듯
청원루 현판은 근년에 청음의 후손으로 한국 서단의 원로인 여초(如初) 김응현씨가 새로 써서 달았으나 문중에서 글씨가 경박하다하여 떼어내고, 현재는 본래 전하던 옛 현판을 다시 달아놓고 있다.
옛 현판 글씨에 대해 후손들이 만든 청원루 소개 책자에는 회곡(晦谷) 조한영(曺漢永: 한성부좌윤)의 글씨로 되어 있다. 그러나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한학자 이갑규씨가 현판 글씨를 감별해본 결과 송나라 회옹(晦翁) 주희(朱熹)의 글씨를 모각한 것으로 판명했다.
초서로 된 '회옹(晦翁)'의 '옹(翁)'자를 '곡(谷)'자로 잘못 판독한 데서 오류가 생긴 것으로 보여진다. 회곡 조한영의 글씨라는 증거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다. 청원루를 관리하고 있는 청음의 15세손인 김창년씨(73)도 기록이나 근거가 있어 회곡 조한영의 글씨라고 한 것은 아니라고 한 것을 보면 오류로 보여진다.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199호인 청원루는 본래 두 채의 건물로 41칸 규모였으나 1934년 홍수로 무너지고 한 채만 남아있다. 몸채 부분은 기단을 높게 한 단층 다락집 형태이며, 대청을 중앙에 두고 양쪽에 온돌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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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혼 樓亭 .15] 안동 풍산읍 삼귀정
'조선시대 김영수 형제들 老母 위해 지은 정자' 안동金氏 '지극 효성' 근원지
(제자·자문: 養齋 이갑규)
87세 노모 즐겁게 하려 5형제 색동옷 입고 '재롱', 효행 덕 자손 번창…대제학·정승 등 줄지어 배출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삼귀정 뜰에 있는 3개의 거북바위.
논어(論語)에 효도와 공손은 사람의 본성인 인(仁)을 행하는 근본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로부터 효자·충신 없이 가문이 번창한 집은 없다. 하늘의 도(天道)는 무심치 않아 효도하는 가문에 복을 내렸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안동김씨는 대대로 문장가들이 끊이지 않았고 과거 급제자가 속출, 조선말에는 60년 세도정치를 이어간 가문이다.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삼귀정에 올라보면 이 가문이 이처럼 번창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지극한 효성에서 이어져 왔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소산 마을 안동김씨 후손들은 충절로서는 청음(淸陰) 김상헌이 거처한 청원루(淸遠樓)를 정신적 근원지로 삼고, 효행으로는 청음의 고조부 형제들이 어머니 예천권씨를 위해 지은 삼귀정(三龜亭)을 그 근원지로 삼고 있다. 소산은 안동김씨가 입향한 이후 500년을 이어오며 영고성쇠(榮枯盛衰)를 거듭한 세거지이다.
#노모를 즐겁게 하기 위해 세운 정자
삼귀정은 조선시대 연산군 2년(1496)에 김영수(1446~1502) 형제들이 80여세의 노모를 위해 세운 정자다. 김영수의 노모는 비안(의성)현감을 지낸 소산 입향조 김삼근의 큰아들인 계권의 부인 예천권씨다. 5남6녀를 둔 권씨 부인은 한성부판관인 남편과 함께 서울에서 살았으나, 불행하게도 남편이 먼저 별세한 후에는 자녀들을 데리고 소산으로 내려와 살게 되었다.
권씨 부인은 대제학을 지낸 권맹손의 딸로 부덕(婦德)을 갖춘 여사(女士)였다. 훌륭한 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한 다섯 아들은 모두 효성이 지극하였다. 특히 막내인 영수는 사헌부 장령을 거쳐 영천군수를 지내다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소산에 머물 적에 사헌부감찰을 지낸 큰 형 영전과 수원부사를 지낸 중형 영추와 함께 당시 87세의 노모를 위해 소요산(素燿山) 끝자락 동오봉(東吳峯) 머리에 삼귀정을 지었다. 형제들은 늘 어머니를 모시고 이 정자를 오르내리며 노모를 즐겁게 모시기 위한 효행의 장소로 삼았다.
삼귀정이란 이름은 정자 터에 있는 바위 세 개의 모습이 거북처럼 생긴 데서 연유한다. 거북은 십장생의 하나로 장수하는 동물이므로, 거북바위가 있는 삼귀정에는 어머니의 장수를 비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다. 또한 단단한 것으로 바위만한 것이 없기에 거북바위처럼 어머니가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라는 지극한 효성의 마음도 담겨 있다. 삼귀정의 기문에는 송나라때 주자가 어머니 축씨부인의 장수를 비는 시에 천년을 산 거북이 연잎위에 올라가 노니는 천년의 장수를 기원한 뜻과도 암합(暗合)한다고 하였다(願上龜蓮千歲壽).
영전·영균·영추·영수 형제는 자신들도 늙은 나이임에도 꽃 피는 봄날과 단풍 든 가을의 좋은 때 좋은 날(良辰吉日)이면 노모를 모시고 이 정자에 올라 색동옷을 입고 단란하게 모여 노모를 즐겁게 하였다고 한다.
용재(齋) 성현이 쓴 삼귀정기문은 '대체로 세상사람들이 그 거처를 두게 되더라도 그 명승지를 얻지 못하고, 명승지를 얻었다 하여도 그 즐거움을 얻지 못한다. 그런데 지금 이 땅은 명승지를 얻었고, 사람은 어진 이를 얻었으며, 어버이 또한 장수를 얻었으니 뭇 아름다움이 다 갖추어졌다. 이는 어찌 선행을 쌓고 경사스러운 일을 길러온 적선육경(積善毓慶)의 결과가 아니겠는가'라고 적고 있다. 또한 용재는 자신이 비록 부유하여 좋은
영천군수를 지낸 김영수 형제들이 노모를 위해 세운 삼귀정.
음식을 먹는 영화로움이 있지만, 이미 봉양할 부모가 없음을 탄식하면서 형제의 극진한 부모봉양을 찬미하고 있다.
용재는 기문뿐만 아니라 삼구정 현판도 친히 써 놓았다.
#효행의 덕으로 번성한 자손들
영수는 아들 셋을 두었다. 맏이 영(瑛)은 문과에 급제해 승지(承旨) 등의 벼슬을 했다. 영의 자손들은 안동김씨 소산파로 불리며, 장동파의 맏집이다. 둘째 번( ) 역시 문과에 급제해 정랑(正郞) 등의 벼슬을 역임했다. 번의 자손들은 서울로 옮겨가 살았기에 장동파로 분류된다. 셋째 순(珣)은 사마시에 합격해 찰방(察訪)을 지냈다. 특히 번의 증손에 청음이 있고, 이 후손들 중 대제학과 정승 등이 줄지어 배출되었으니 하늘은 효행가에 복을 내림을 부정할 수 없다 하겠다.
영수의 증손 기보(箕報)가 남긴 글에 '증조부 장령공(영수)이 팔순 노모를 모시고 이 정자에서 노니시다가 고조할머니께서 팔순이 저물 무렵에 돌아가셨고, 조부 승지공(영) 또한 칠순의 노모를 모시고 이 정자에서 노니셨는데, 증조할머니는 칠순이 저물 무렵에 돌아가셨다'고 적고 있다.
삼귀정은 그 주변 풍광도 아름답다. 삼귀정의 풍경을 읊은 시로는 계곡(谿谷) 장유의 삼귀정 8경이 대표적이다. 학가산의 맑게 갠 봉우리(鶴嶠晴峯), 마애의 가파른 절벽(馬崖 壁), 마을에 피어나는 연기꽃(縣里煙花), 역동의 찬 소나무(驛洞寒松), 긴 풍산들의 파종하는 모습(長郊觀稼), 낙동강 굽이의 고기잡이(曲渚打魚), 삼복더위의 피서지(三伏避暑), 중추절의 달구경(仲秋翫月)이 그것이다.
삼귀정에 올라 거북바위와 주변 풍광만 구경하고 효심을 돌아보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정자의 진수를 놓치는 셈이다.
장령공의 16세손이 되는 김영한은 삼귀정 중건기에 '아! 누군들 부모가 없는 사람이 있으며, 누군들 떳떳한 본성이 없겠는가. 부모 섬김에 마땅히 효도해야 함은 사람마다 모두 알고 있지만, 부모의 뜻을 받들어 기쁘게 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을 줄 아는 자는 드물다(嗚乎. 孰無父母, 孰無恒性. 事父母當孝, 人皆知之, 而能知養志之爲先者鮮矣)'라는 글을 남기고 있다. 우리 자신의 효심을 반성케 하는 글귀가 아닐 수 없다.
삼귀정 풍광·효행 찬양, 명현들 앞다퉈 詩 남겨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213호인 삼귀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전체에 우물마루를 놓은 건물이다. 삼귀정에는 안동김씨 후손과 명현들이 그 풍광과 효행을 찬양해 읊은 시의 현판들이 지금도 빽빽하게 걸려 있다. 그 중 승지공이 사계절을 읊은 시의 원운(原韻) 4수 중 봄을 읊은 첫 수를 옮긴다.
'봄 기운 낀 만상이 즐겁고 향기로운 때(挾春萬象樂芳時)
사람들 강가의 정자에 기대어 만물과 함께 노니네(人倚江亭與物嬉)
꽃피고 안개 자욱한데 가벼운 향기는 새들을 가두었고(花霧輕薰籠鳥雀)
수초와 부들 왕성하여 고기와 거북을 덮어주네(菰蒲王長蔭魚龜)
연기 피어오르는 먼 포구에는 푸른빛이 수면에 떠있고(煙開遠浦靑浮水)
비내려 물 가득한 앞 시내에 잔물결 불어나 푸르네(雨滿前溪綠漲 )
무료한 날 지는 버들꽃 따라 노니나니(無賴遊緣隨落絮)
가벼이 날리는 저문 바람 끝없이 불어오네(不禁輕 晩風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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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혼 樓亭 .26] 매산 정중기의 영천
임고면 '산수정'
(제자·자문: 養齋 이갑규)
仁·智 겸비 대학자의 학문탐구 열정 서려
퇴계학맥 전승한 영남학파의 巨峯, 백성 괴롭히는 불의에 항거한 '대쪽'
말년에 벼슬 버리고 수행·강학 전념
/글·사진=김신곤 기자 singon@yeongnam.com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영천시 임고면 삼매2리 매산종택 앞 산기슭에 자리잡은 산수정. 매산은 여기서 끊임없이 인과 지를 추구하였다.
"구름 걸린 숲에 오랜 맹세 두었더니(自是雲林有宿盟), 층대 높은 곳에 초갓집 지었노라(層臺高處結茅楹). 우뚝 솟은 청산엔 천년의 빛이요(靑山屹立千年色), 길이 달리는 벽간(碧磵)에는 만리로 흘러가는 물소리로다(碧磵長奔萬里聲). 자연의 물상을 보고 감히 인과 지의 묘한 이치 엿보며(觀象敢竅仁智妙), 난간 열어두고 오로지 높은 곳에서 흘러오는 맑은 물 사랑하노라(開軒偏愛峙流淸). 세간의 영리는 내가 원하는 것 아니니(世間榮利非吾願), 성인의 경전 붙들고 이 생애를 마치려 하노라(好把殘篇了此生)".
영천시 임고면 삼매2리(매곡) 매산종택 서남쪽 산기슭에 자리한 산수정(山水亭)에 오르면 정자위에 걸린 이 산수정 원운(原韻)을 볼 수 있다.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앞에는 작은 시내가 흐르는 이 마을에 들어서면 뒷산 바로 아래에 자리한 매산종택이 맞이한다. 여기서 1㎞ 정도 서남방향 위쪽으로 올라가면 지금부터 300여년 전 매산(梅山) 정중기(鄭重器)(1685(숙종 11년)~1757(영조 33년))가 말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강학을 했던 이 정자를 만날 수 있다.
#산수정은 仁과 智의 표상
매산은 청빈한 벼슬살이를 그만두고 67세 되던 해 자제들과 지우들의 도움으로 겨우 이 정자를 마련한다. 그는 여기서 학문에 대한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면서 죽은 날까지 인(仁)과 지(智)를 추구하였다.
매산은 논어와 주자의 뜻을 취하여 산수정이라는 이름을 짓는다. 그는 평소에 산수를 사랑하여 논어에 '인자는 산을 좋아하고(仁者樂山), 지자는 물을 좋아한다(智者樂水)'는 뜻을 취하여 산수정으로 이름을 걸었다. 또 주자의 시 중에 '내 자신이 인과 지의 마음에 부끄러운데(我慙仁智心), 우연히 스스로 산수를 사랑하도다(偶自愛山水)'라는 구절에서도 그 이름을 취하였다. 이러한 뜻은 매산이 남긴 산수잡영 서문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산을 바라보며 인자의 기상을 구하고 앞 시냇물을 완상(玩賞)하며 지자의 흉금을 상상하였다. 그가 산수의 그윽한 정에 의탁하여 만년을 보내고자 했던 것이 오로지 산수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산수의 기상을 닮고자 하는 마음에 있었던 것이다.
#겹친 불운에도 요동 없이 학문에 전념했던 대 선비
매산은 어린시절 사서(四書)를 배울 때 주해(注解)의 문장까지 달달 외울 정도로 총명하였다. 가정에서 학습하다가 부친 함계(涵溪) 정석달의 지시로 횡계에서 강학하던 훈수(塤) 정만양과 지수() 정규양 형제에게 나아가 수학하였다.
지수는 매산의 재능과 인품을 보고 "국가에서 과거를 통해 선비를 선발하므로 선배들이 과거를 통해 많이 진출하였다. 내외(內外) 경중(輕重)의 분수를 살펴 벼슬길에 나아간다면 스스로를 지키는 데 무슨 해로움이 있겠는가"라며 과거에 응시할 것을 권했다. 그 후 매산은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을 만나 경전을 토론하였다. 이때 병와는 매산이 지은 태극부(太極賦)를 읽어본 후, "내가 경향 각지의 우수한 재사(才士)들을 많이 보아 왔으나 이토록 성숙한 젊은이는 일찍 보지 못했다"라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다시 부친의 명으로 갈암(葛庵) 이현일 문하에 출입하게 되었고 갈암은 그에게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중화(中和)에 관한 학설을 설파해 주었다.
매산의 학문은 나날이 익어가다 학문이 완숙될 때쯤인 31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다.
그러나 그에겐 예상치 못한 가계의 불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35세에 모친이 별세하고 이듬해 천연두가 돌아 부친마저 세상을 하직하고
영천시 임고면 삼매2리에 있는 매산종택 전경.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고택으로 현대 건축가들이 자주 찾고 있다.
만다. 뿐만 아니라 아우와 두 사촌아우까지 천연두에 희생되면서 그는 잇단 충격으로 말미암아 격색증(隔塞症)을 앓게 된다.
그는 이러한 와중에도 횡계에 있던 훈수와 지수선생을 왕래하면서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한편으로 그는 매곡에 한 농막을 꾸며 좌우에 도서를 쌓고 단정히 앉아 독서하면서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43세가 되던 해, 그는 마침내 문과에 합격,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로 벼슬을 시작해 승문원박사, 예조정랑, 사간원정언, 형조참의 등을 역임한다. 퇴계학맥으로 성리설과 예학에 정통했던 그는 조정에서 인조대왕의 능을 옮기는 역사를 할 때 의례제도에 관한 의견을 개진하니 도감을 맡았던 윤순(尹淳)이 동의하였고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또한 매산의 의견을 존중하였다.
#민초를 아끼고 불의에는 항거했던 대쪽
매산은 출행할 때 당시 사대부들이 타는 견여(肩輿:두 사람이 메는 수레)를 일절 타지 않았다. 이는 그가 송나라 때 정자(程子)가 "차마 사람으로 가축의 일을 대신하게 할 수는 없다(不忍以人代畜)"라는 훈계를 거울로 삼았기 때문이다.
병조좌랑시절에 금부내의 총책임을 맡을 때는 관리들을 엄중하게 타일러 죄인들에게 함부로 매질을 못하도록 했고 그들 스스로 깨닫도록 함으로써 금부의 기강이 질서정연하였다. 지방관 시절에는 청검(淸儉)한 생활을 실천하면서 선비들에게 양로(養老)하는 도리를 일깨웠고 향약을 반포하여 풍속을 진작시키는 데 전념하였다.
한 번은 고을에 재판이 있을 때 방백(方伯)이 한 쪽으로 치우친 결판을 내려 관리들만 엄중 문책하자 매산은 직언을 서슴지 않았고 그 부당함을 상부에 올렸다. 이에 방백이 이를 무마하기 위해 만나 의논하자고 청했으나 과감하게 뿌리치고 미련 없이 사표를 제출하고 말았다. 오늘날 권력에 휘둘려 간혹 진실을 호도하는 사법당국의 일처리 관행과는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사직하고 돌아오는 행차에는 오직 낡은 상자 속에 몇 부의 도서만 남아 있었다. 그는 고향에 도착해서는 그 행랑마저 반납하니 모두가 감탄해 마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공주 동천에서 읊은 절구 한 수는 이러하다.
"서성에서 해임되어 필마로 돌아드니(解綏西城匹馬歸), 소슬한 추풍만이 부질없이 옷깃에 불어오네(秋風簫瑟吹衣), 석양에 우연히 강 언덕길 오르니(斜陽偶入江郊路), 백조들 무심히 나를 향해 나는구나(白鳥無心向我飛)."
향리에 돌아온 매산은 다시 사간원정언으로 나가기까지 10년 세월동안 오록서당(梧麓書堂)을 지어 후학양성과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56세가 되던 해 겨울, 20년을 오르내리며 학문에 전념했던 매곡으로 가족과 함께 이사를 했다.
산골짜기에 작은 오두막을 엮어 글방으로 쓰다가 67세 되던 해 여름, 인가의 집을 매입하였지만 살림이 어려워 집은 완성치 못하고 겨우 기거할 수 있는 기초만 얽고 지냈다. 그 뒤 자제와 지우들의 도움으로 이듬해 가을에 3칸 집을 완성하게 된다.
매산은 포은속집을 편찬하였고 훈지록(塤錄)을 수정하였으며 개장비요(改葬備要), 의례편고(疑禮便考), 가례혹문(家禮或問) 등을 출판하였다. 또 손수 상례비요(喪禮備要)를 보완하여 가례집요(家禮輯要)7권3책을 편찬하였다. 퇴계선생이 주자서를 요약한 '주서절요'에 대하여 주석을 다시 엮어 주서절요집해(朱書節要集解) 8권4책을 저술하였다. 그의 시문(詩文)은 매산집 12권6책으로 남아 전한다. 매산은 퇴계학맥으로 갈암 이후 훈수와 지수를 이은 또 한 분의 영남학파의 거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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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혼 樓亭 .25] 정만양 형제의 영천
화북면 '옥간정'
(제자·자문: 養齋 이갑규)
'학문 수양·인재 양성' 영남사림 魂 꽃피워
평생 벼슬 멀리하고 치열한'愼獨 수행' 역사·경학 통달…서당 세워 교육 헌신
'이인좌의 난' 영남 짓밟자 의병 모집해 평정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정만양·규양 형제가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를 양성했던 옥간정.
영천시 화북면 횡계리에는 훈수(塤) 정만양(鄭萬陽)(1664~1730)과 지수() 정규양(鄭葵陽)(1667~1732) 형제가 숙종 42년(1716)에 강학의 장소로 세운 정자 옥간정(玉磵亭)이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다. 현재 훈수의 12세손 종부되는 김시애씨가 늘 마루를 닦아놓아 언제나 앉을 수 있도록 관리하고 있다. 훈수·지수 형제는 고려시대 포은(圃隱) 정몽주의 문손으로 부친 정석주(鄭碩胄)는 진사였고, 조부 정시행(鄭時行)은 무공랑(務功郞)을 지냈다. 증조부 정호인(鄭好仁)은 장현광·손처눌의 문인이며, 대과에 급제하고 관찰사를 역임했다. 고조부 정안번(鄭安藩)은 부사과(副司果)를 지냈고, 5대조 정세아는 강호수(江湖)로 임란 의병장이었으며 6대조 정윤량(鄭允良)은 퇴계 선생의 문인이었다.
#학문 수행과 제자 양성의 터전이던 옥간정
대대로 문장과 도학이 이어진 가문에서 태어난 훈수·지수 형제는 어린 시절 종조부인 학암공(鶴巖公)에게 나아가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맑은 천품과 영특함으로 당세 석학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훈수가 17세 때 학사(學士) 오도일이 좌천되어 울진현감으로 근무할 시절, 사방의 인재들을 모아 시험을 치르게 한 일이 있었다. 그 때 오도일은 훈수의 답안지를 보고 "이 사람은 보통의 시험생이 아니다(此非尋常擧子也)"라며 감탄하였다.
그러나 당시 과거에는 좌절되었고, 한 시험관이 도로상에서 그를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훈수는 뿌리치고 떠난 후 다시는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나라에서 불러도 나가지 않았다. 지수는 23세때 향시에 합격하고, 당시 관리들을 둘러보고는 "오늘의 사대부들은 반드시 훗날 재앙이 있을 것이다(今日搢紳,必有後禍矣)"라 예견하고 더 이상 과거에 응시하는데 뜻을 접었다. 시험의 규정에 의한 공부에만 집착하지 않고 더 큰 학문의 포부가 있었던 것이다.
훈수·지수는 가정에서 전하는 1천여권의 고서를 모조리 독파하고 한 번 읽은 것은 모두 깨달아 체인(體認)이 되었다. 특히 춘추좌전, 국어, 한나라 양웅, 사마천 등을 애독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송나라 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 소옹(邵雍)의 학설을 신봉하였고, 우주의 본체를 태허로 주장한 장재(張載)의 학설을 신봉했다. 장재의 호가 횡거(橫渠)였으므로 화북면 도화동(桃花洞)이던 지명을 횡계(橫溪)로 고쳐 부르고 횡계서당을 건립하니 숙종 27년(1701) 38세 무렵이었다.
횡계서당에는 당시 사방의 영재들이 모여 훈수·지수의 학술을 배우고 인성을 닦았다. 대표적인 제자로 형조참의를 지낸 매산(梅山) 정중기, 영의정을 지낸 귀록(歸鹿) 조현명(趙顯命), 승지를 지낸 명고(鳴皐) 정간 등을 꼽을 수 있다.
제자들 교육은 반드시 과정(課程)을 세워 소학과 주자가례를 우선으로 체득케 한 다음 사서(四書)와 삼경(三經)의 공부에 나아가도록 하였다.
#역사와 경학에 통달했던 당대 유학의 종장
횡계는 풍광이 아름답고 수석(水石)이 빼어난 곳이다. 장횡거의 태허 사상을 심득하여 횡거의 거처 이름인 육유재(六有齋)를 두었고 육유도(六有圖)를 벽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또한 횡계서당 아래 홍류담 위에 태고와(太古窩)란 작은 집을 지어 수행처로 삼았다. 태고와 기문을 보면 '태고와의 주인이 누구인가 금세의 사람이다. 그러나 마음은 태고이다(主窩者誰, 今世人也, 心則太古也)'라고 적고 있다. 천지간 이치의 본성을 보존하려는 수행이 치열했음을 보여준다.
그러한 수행의 면모를 엿보자면, 어느날 밤 강도 수백명이 칼을 들고 쳐들어와 마을을 부수고 짓밟았으나 지수는 의관을 정제하고 단정히 앉아 털끝하나 움직임이 없으니 도둑들은 도리어 두려워 떨며 범접을
사방에서 인재들이 몰려들어 훈수·지수 형제의 학문을 배웠던 횡계서당.
못하고 물러갔다고 한다. 영조 4년(1728)에는 이인좌의 역란이 일어나 영남을 짓밟자 훈수·지수 형제는 분연히 일어나 격문을 돌리고 의병을 모집해 관군과 함께 난을 평정했다. 중국 청나라에 대해서는 북벌론을 주장, 상소문을 쓰기도 하였다.
위로는 상고의 역사와 경학을 두루 박통하지 않음이 없었고, 아래로는 송대의 성리 철학에 확연히 통철하여 당세 유학의 종장으로 추중되었다. 존재(存齋) 이휘일, 갈암(葛庵) 이현일에게 사사하였고 명재(明齋) 윤증, 우담(愚潭) 정시한 등과 예학, 성리학의 논란처를 치열하게 토론했다. 명나라 백사(白沙) 진헌장이 주장한 심설(心說)에 대하여는 그 이론은 불교의 관심법(觀心法)과 일치하므로 유학의 본령이 아님을 '제백사심설후(題白沙心說後)'란 글로 논하여 배척하였다.
제자들이 더욱 불어나 수용이 어려워지자 횡계서당 아래쪽에 옥간정을 짓고 내왕하는 생활 속에서 제자들에게 한치의 광음도 아껴 독서에 전념토록 하며 나라의 인재로 성장할 것을 독려하였다.
훈수·지수는 5남1녀로 6남매였다. 두 남동생이 요절하였고 막내 몽양(夢陽)과 함께 3형제의 우애가 지극하였으며, 특히 훈수·지수 두 형제는 시경 '소아(小雅)-하인사(何人斯)'편에 "백씨가 질나팔을 불거든 중씨는 젓대를 불도다(伯氏吹塤,仲氏吹)"라고 한데서 형제간의 우애를 나타내는 의미로 훈(塤)과 지( )를 택하여 호를 삼았고, 삼례도(三禮圖)를 삼고하여 악기 훈(塤)과 지()를 제작하고 악보를 직접 만들어 형제가 함께 연주하며 우애를 나누었다. 이에 대한 악보와 기록은 훈지록(塤 錄)에 남아 전한다.
저서로는 '이기집설(理氣輯說)' '가례차의(家禮箚疑)' '개장비요(改葬備要)' '의례편고(儀禮便考)' '상지록(尙知錄)' '모현록(慕賢錄)' '심경질의보유(心經質疑補遺)' '계몽해의(啓蒙解疑)' '외국지(外國誌)' '산거일기(山居日記)' 등 100여권에 달한다. 군정(軍政), 전정(田政), 공거(貢擧) 등 30여 분야에 걸쳐 실학을 아우른 많은 저술들이 남아있다.
#신독(愼獨) 수행에 누구보다 치열했던 형제
평생을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므로써 당시 영남 사림의 혼을 달군 족적은 너무나 컸다. 조정에까지 초야의 사림파를 두려워하며 정치기강을 바로세우려 하였던 것은 바로 이러한 학자들의 태산북두같은 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때 관찰사 박문수(朴文秀)가 특별히 덕행으로 천거하였고, 이조판서 송인명(宋寅明), 대사성 조문명(趙文命) 등이 이어 왕에게 추천하여 벼슬을 내렸지만 한번도 응하지 않았다.
훈수·지수는 포은 정몽주 이후 조선 전기 동방오현을 사표로 삼았고, 특히 퇴계 선생의 학설을 신봉하여 학문의 정맥을 삼았다. 심경과 근사록을 신명처럼 받들어 읽었고, 경(敬)을 요체로 마음자리 한 점에도 속임이 없는 신독(愼獨)의 수행을 어느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한 학자였다. 그는 마음을 이렇게 논하였다.
"마음은 살아있는 물건이다. 잠깐 사이에 날기도 하고 잠기기도 하는 것으로, 잡을 수가 없는 물건이다. 그러나 마음 잡는 공부를 잊으면 잃어버리고, 마음을 깨달으려고 성급하게 하면 이삭을 뽑아 올리는 것과 같은 결과가 된다. 모름지기 환히 깨어있어 주인(마음)을 살펴야 한다. 고요히 있을 때는 어두워지지 않도록 하고, 동작할 때는 사물을 따라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하라. 대개 이 일은 다만 마음을 생각함과 생각하지 않음에 있을 뿐이다(心是活物,俄傾之間,乍飛乍淪,把捉不得,忘之則失,助之則.須令惺惺,主人常在照管,靜而無昏,動而無隨往,蓋此事只在着意不着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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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혼 樓亭 .24] 청허재 손엽의 경주
강동면 '수운정'
'학문 탐구·충효 실천' 고절한 선비정신 물씬 (제자·자문: 養齋 이갑규)
"세상 功名은 뜬구름" 벼슬 등지고 군자의 길
임진왜란 발발하자 망우당 등과 구국의 맹약
의병활동 앞장서 왜구 격퇴, 고향 경주 死守
/글·사진=김신곤기자 singon@yeongnam.com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경주시 강동면 양동에 있는 대표적인 정자를 꼽으라면 단연 조선 중종조 명신인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1463∼1529)이 후학 양성을 위하여 지은 관가정(觀稼亭)이다. 그러나 규모면에서 관가정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월성손씨의 꼿꼿한 선비정신이 배어있는 또 다른 정자로 수운정(水雲亭)이 유명하다. 이 수운정은 청허재(淸虛齋) 손엽(孫曄·1544~1600)이 벼슬길에 뜻을 접고 학문 연구를 위하여 선조 15년 (1582)에 건립한 정자이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잠시 관가정과 수운정에 머물렀던 주인공의 가계내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재는 양동의 입향조인 송재(松齋) 손소(孫昭)의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점필재(畢齋) 김종직의 문하생이 되었고 27세 때 대과에 급제, 판서·승지·대사헌·관찰사 등 내외 요직을 두루 역임한 당대의 정치가요 대학자였다. 또한 한 마을에 거주하였고 동방 18현으로 꼽히는 회재(晦齋) 이언적 선생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본래 입향조 송재의 큰 아들인 손백돈(孫伯暾)이 일찍 세상을 하직함에 따라 둘째인 우재가 큰 집으로 들어가 후사를 잇게 되었고 이 우재가 거처하던 곳이 서백당(書百堂)이었다. 그러나 서백당이란 당호는 우재를 따라 큰집으로 옮겨졌고 서백당의 본 건물인 동시에 우재의 구택(舊宅)에는 관가정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월성손씨의 대종가인 서백당에는 입향조 송재의 20세 되는 종부가 고가의 가풍을 잘 지켜가고 있고, 21세 종손인 손성훈·조원길씨 부부가 대구를 내왕하면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수운정은 학문에 대한 열정의 所産
수운정은 바로 우재의 증손자인 청허재가 지은 것이다. 조선시대 무오년(1558) 당시 명종은 경주일대의 우수 인재 발굴을 위해 중앙의 대신을 파견하여 신라옥적(新羅玉笛)이란 제목으로 시를 짓도록 한 시험을 치르게 하였다. 이때 15세에 불과한 청허재의 시(詩)가 고등(高等)으로 선발되었고, 이 후 사마시(司馬試)까지 합격했지만 학문연구에 대한 불타는 열정으로 벼슬길을 마다하고 대과응시에 스스로 뜻을 접었다.
청허재는 이후 오직 성리 철학에 몰두하면서 당대의 석학이던 지산(芝山) 조호익, 귀암(龜巖) 이정, 백담(栢潭) 구봉령, 월천(月川) 조목, 동암(東巖) 이영도, 인재(齋) 최현, 검간(黔澗) 조정, 오봉(梧峯) 신지제, 성재(惺齋) 금란수, 일휴(日休) 금응협, 면진(勉進) 금응훈 등과 도의(道義)로 교제하면서 학문토론과 연구에 몰두할 뿐이었다. 그에게 세상사 공명(功名)의 길은 그저 뜬구름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풍전등화의 나라사정은 그를 조용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청허재가 49세 되던 해인 선조 임진년(1592), 왜구가 침입하여 부산이 함락되고 동래부사 송상현이 순절하였다. 이어 파죽지세로 올라오던 왜구에 의해 양산, 언양, 경주가 함락되자 청허재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에 장대비를 무릅쓰고 가족들을 간신히 피신시켰으나 사태는 갈수록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었다.
그는 신립 장군이 탄금대에서 패배하였고, 선조 임금은 서쪽으로 몽진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에 청허재는 경주 집경전(集慶殿)에 모셔진 태조대왕 어영(御影)을 참봉 정사성과 함께 수운정으로 임시로 모시고 왔다가 예안 이동암 서당으로 옮겼다.
사계절 가운데 한 여름 관가정에서 내려다보는 뜰앞의 꽃과 들판풍경이 가장 일품이다.
또 향교 대성전에 모셔진 오성(五聖), 십철(十哲)과 12위의 위패를 옥산서원으로 옮겨가는 등 역대의 정신적인 상징물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 같은 내용은 청허재가 임진년 4월 왜구 침입 시작부터 갑오년(1594) 3월까지 2년간에 걸쳐 목격하고 겪은 전란의 상황을 적은 '용사일기'를 간추린 것이다. 용사일기는 현재 '청허재선생문집'에 전하고 있다.
#의병활동으로 고향을 사수(死守)한 선비
청허재는 당시의 국난극복을 위해 망우당(忘憂堂) 곽재우, 서애(西厓) 유성룡, 우복(愚伏) 정경세 등과 화왕산에서 모여 구국의 맹약을 맺고 백운(白雲) 권응수 장군을 도와 군량미를 조달하는 등 의병 활동을 하였다.
그는 평소 교분이 두터웠던 경주 부윤 윤인함이 죽음으로 적진에 항전할 것을 맹세하며 가족을 부탁하자 기꺼이 자신의 집을 분가해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도 대대로 국록을 먹은 집으로 의리상 기쁨과 슬픔을 나라와 함께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동생은 죽고 어버이 늙어 형편이 멀리 떠나기 어려우니 어찌해야 할꼬(吾以世祿之家, 休戚義當共之, 而親老弟亡, 勢難遠離, 奈何.)" 라면서 구국과 효를 동시에 실천할 수 없음을 통탄한다.
청허재의 강직한 성품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윤인함은 청허재에게 경주를 지켜달라며 감영연병장(監營鍊兵將)을 맡긴다. 이에 청허재는 윤인함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고 왜군을 막았고, 그 결과 경주의 백성 모두가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다.
나라에서는 그에게 참봉 벼슬을 내렸지만 그의 본뜻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전란이 평정되자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설천(雪川)을 끼고 있는 수운정에서 학문에 정진하다가 조용히 일생을 마친다. 수운정의 수운이란 뜻은 '동도(東都)의 산수가 맑고 운연(雲烟)이 허공에 떠있다는 수청이운허(水淸而雲虛)'라는 뜻을 취하였고, 이를 자신의 호를 삼았다.
수운정은 두 번의 병화(兵火)를 거치면서 당시의 건축물은 보존할 수 없었다. 그 뒤 후손들이 힘을 합쳐서 수운정을 중건한 후 도서를 구비하고 화목(花木)을 심어 청허재의 정신을 지금까지 추모하고 있다.
예조 판서를 지낸 김위(金)가 쓴 수운정 중수기문에는 "청허재는 참으로 어진 군자로 세속의 음식을 먹는 사람이 아닌 듯하다(淸虛子, 眞賢君子, 非煙火食人)"고 하였다. 지산(芝山) 조호익은 그의 묘지명에서 "덕의 광채가 고관대작의 의장과 같고, 도의 맛이 고량의 진미와 같도다(冕乎德輝, 膏粱乎道)"라고 적고 있다. 당대의 명망가인 김위와 지산의 말을 미루어 보아 청허재의 인품과 생활태도가 얼마나 고절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청허재가 임란 중 지금의 포항 죽장에 피란 당시 달 밝은 깊은 산중에서 두견새 슬피 우는 소리를 듣고 윤인혼에게 지어준 시는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다.
촉 땅의 망제소식 아득히 멀고먼데(蜀中消息杳茫茫), 고국의 신하 백성 눈물이 치마에 가득하다(故國臣民淚滿裳), 달 밝고 산 깊은데 두견새 우는 소리 듣자니(月白山深聞杜宇), 돌아감만 못하다고 울어대는 소리 사람의 애를 끊는구나(不如歸去斷人腸).
망제(望帝)의 넋이라 전하는 두견을 몽진해 계신 선조에 비유해 읊은 충절의 시는 길이 만고의 충신들을 감동시켰다.
[한국의 혼 樓亭 .21] 경재 홍로의 군위
부계면 '척서정'
고려와 함께 세상 뜬 대쪽선비 節義 기려
(제자·자문: 養齋 이갑규)
나라 혼란해지자 낙향해 부모 봉양, 스승 정몽주 피살 소식에 의기 상실
병 깊어져 27세 타계…'고려의 백이·숙제'로 추앙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고려의 국운이 쇠할 무렵, 유학의 이념으로 국가를 재건하고자 하는 사류(士類)는 크게 두 갈래가 있었다. 포은(圃隱) 정몽주를 중심으로 고려왕조를 존속시키며 재건을 도모하는 일파가 있었고, 삼봉(三峯) 정도전을 중심으로 새 왕조를 일으켜 재건하고자 하는 일파가 있었다. 양 파는 서로 각축을 벌이다가 포은의 주장이 밀리게 되었다. 그러자 당시 야은(冶隱) 길재는 정계를 떠나버렸고, 포은은 죽음을 택했다. 목은(牧隱) 이색은 조선왕조의 신하가 되지 않는 길을 택했다. 이 세 사람을 세상에서는 삼은(三隱)이라 부른다. 삼은 외에 이들 못지않은 또 한 인물이 있었으니, 포은의 제자로 부림홍씨인 경재(敬齋) 홍로(洪魯:1366~1392)이다. 홍로의 자(字)는 득지(得之)이다.
#경재의 절의정신을 기려 세운 정자
경재는 문하사인(門下舍人:고려 종4품 벼슬로 사인(舍人)으로도 불림)으로 근무하다 나라가 점점 혼란해지자 고향인 부계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병을 핑계로 관직을 사임했다.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로 돌아온 그는 부모 봉양에 정성을 다하면서 다시는 조정에 나갈 뜻이 없었다. 거처하는 곳에 '경재(敬齋)'라는 편액을 걸고 선비의 본업에만 전념했다.
1392년 7월4일(음력)에 병을 얻었으나 어버이 마음을 다치게 할까 염려해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달 17일에는 새벽에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자 가족이 만류했다. 그러나 "내가 밤중 꿈 속에서 태조 왕건을 만났소. 오늘이 돌아갈 날이오"라 하고 관복을 갖추어 입고 사당에 배알한 다음 부친 진사공(進士公) 홍민구 침소에 들어가 절한 뒤 가르침을 받들었다.
그리고 뜨락에 자리를 편 뒤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하고는 "신은 나라와 더불어 함께 망하겠나이다. 죽는 자가 무슨 말을 하겠나이까(臣與國偕亡, 死亦何言)"라는 말만 남기고 자신의 침소에 들어 조용히 운명했다. 그날 오전 사시(巳時)였고, '열혈청년(熱血靑年)'의 꽃다운 나이 27세 때였다.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의 제2석굴암 위쪽 계곡 옆에 자리한 척서정(陟西亭)은 후손들이 경재의 절의정신을 추모하여 지은 정자이다. 조병유가 지은 척서정기문에 의하면, '수산(首山)과 양산(陽山)의 중간 지점에 예전에는 경재를 기리는 사당을 지어 제향을 올렸으나 없어지고, 그 유허지에 척서정을 지어 절의를 추모하고 있다'고 전한다.
현재의 건물은 1800년 후반에 중건된 것이고, 당시에 석학들이 모두 참여해 경재와 관련한 사실을 증언한 기록이 현판 등으로 보존되고 있다. 그리고 척서정에서 100보 쯤 아래에 양산서원(陽山書院)을 지어 경재의 절의와 학덕을 기렸으나 대원군 때 철폐되고, 현재는 양산서당으로 복원되어 있다.
#일찍부터 문장과 덕망으로 추앙받았던 경재
경재의 글로는 가훈(家訓)을 비롯해 시 몇 수가 남아 있다. 경재에 대한 자료로는 경재에 대한 기록을 모은 '경재선생실기'가 전하고 있다. 피자휴(皮子休)가 쓴 행장과 박천우(朴天祐)가 쓴 '추술유사(追述遺事)', 채제공(蔡濟恭)이 쓴 묘갈명 등에 상세한 기록이 전한다.
경재는 7세에 효경(孝經)을 능통하게 읽을 정도로 총명하고 부지런했다. 장성해서는 성리학과 고금의 가례 및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등을 깊이 연구했다. 문장이 날로 늘어나자 목은 이색은 '득지의 문장은 참으로
후학들이 백의·숙제의 절의에 비유한 경재의 지조를 기려 세운 척서정 전경.
경재의 후손 홍여하(洪汝河·1620~74)가 고려사를 요약하고 부분적으로 재구성한 '휘찬려사(彙纂麗史)' 목판. 경재를 기려 세운 양산서당에 보존되어 있다.
콩과 쌀같이 이로운 물건이다(得之之文, 眞菽粟也)'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과거에는 뜻이 없었으나 부친의 권유로 22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25세에 대과에 합격했다. 당시 문장과 덕망으로 추앙을 받았고, 어느 누구도 그를 앞지를 자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포은의 추천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고, 문하사인으로 승진되었다.
당시 사인(舍人) 조박(趙璞)과 좌사의(左司議) 오사충(吳司忠) 등이 상소해 이색과 조민수의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청하자, 상소한 자들의 권세가 두려워 대신들 중 한 마디도 말을 하는 자가 없었다. 사건이 심각해지자 경재는 그들의 죄를 다스림은 정당한 처사가 아님을 극력 변호한 끝에 그 사태는 더 진행되지 못했다.
시국이 갈수록 혼란해지자 병을 핑계로 사임한 뒤 고향에 내려와 독서와 사색으로 일관하며, 정세에 관한 소식은 멀리했다.
마을 이름이 본래는 대식(大食) 혹은 대야(大夜)라 했으나 경재가 대율(大栗:한밤)로 고쳤다. 그리고 작은 서재를 지어 경재라 했다. 그 앞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으니, 중국 동진(東晉)시대에 도연명이 남조(南朝)의 송(宋)나라에서 불러도 벼슬하러 나아가지 않고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와 벗한 고사에 뜻을 의탁한 것이었다.
#후학들이 백이·숙제에 견준 경재의 지조
부친 진사공이 구미 금오산에 낙향해 있는 야은을 찾아 무료함을 달래라고 하자 경재가 "이 노인은 모든 이가 바라보는 명망 있는 분인데 제가 그분께 내왕하면 제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此老 有時望. 與之往還, 是自標也)"라고 하니, 부친은 "네 말이 옳다"고 했다. 이윽고 포은이 피살된 소식을 듣고는 의기를 상실해버렸고, 경재는 그 해 가을에 운명했다.
당시 경재의 부친은 익재(益齋) 이제현, 목은 이색 등과 함께 명망이 높았고, 구재(九齋)의 학문을 전수한 인물이었다. 고려 때 사학(私學)인 구재는 문종 때 최충이 벼슬을 그만둔 뒤 후학 교육을 위해 개설한 사숙(私塾)으로, 당시 국학이 유명무실해 유능한 학생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이런 가정에서 태어난 경재는 당대의 석학들로부터 추중(推重)을 받았으나 뜻을 펴지 못하고 고려왕조와 함께 깨끗이 하직한 것이다.
후세 학자들은 그의 절의를 중국 은나라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주나라에서 벼슬하지 않고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다가 일생을 마친 절의에 견주었다. 그리고 척서정이란 정자 이름도 백이·숙제가 죽으면서 부른 가사에 '저 서산에 오름이여! 고사리를 캐었도다(陟彼西山兮, 採其薇矣)'라고 한 데서 취한 것이다.
◇경재 홍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경재의 시 두 수를 소개한다.
'회포를 쓰다(寫懷)'란 시다.
'일생 동안 충과 의를 마음에 쌓아(平生忠義蘊諸心)/ 나라와 백성에게 은택을 이룰 포부 깊었노라(致澤君民抱負深)/ 만사에 있어 이제는 오랜 계획이 어긋나고 말았으니(萬事于今違宿計)/ 초야로 돌아가 운림에 눕는 것만 못하리라(不如歸去臥雲林).'
다음은 '고요한 가운데 읊조리다(靜中吟)'란 시다.
'버드나무에 해 비쳐 바람 살랑이고(楊柳光風細)/ 연못에는 흐르는 물 잔잔하도다(方塘活水恬)/ 이런 무한한 자연의 진리를(一般無限趣)/ 애오라지 이 가운데서 보노라(聊向此中占).'
[한국의 혼 樓亭 .20] 회재 이언적의 경주
강동면 '영귀정
'
(제자·자문: 養齋 이갑규)
'나라걱정 노심초사' 대학자 충혼 깃들어
24세 대과 급제…'조선 유학 동방오현'추존돼
국방강화·민본정치 주장…불의엔 분연히 항거
/글·사진=김신곤기자 singon@yeongnam.com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회재가 고향에 내려올 때마다 머물렀던 영귀정 전경.
반세동안 세상사에 갇혀 병든 몸 피곤하였는데(半歲塵籠困病軀)
오늘 기꺼이 한 단지 술 이끌고 영귀정에 오르노라(登程今日喜提壺)
강산은 모두가 예전의 평소 그대로 이건만(江山渾是平生舊)
가슴에 쌓인 회포는 왜 옛날과 다름인가(襟抱何曾昔日殊)
'영귀정에 올라(登詠歸亭)'라는 시로, 회재 이언적이 관직 생활 중 고향에 내려와 이 정자에서 읊은 것이다.
#영귀정은 우국충정을 가다듬었던 곳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성종22년)~1553(명종8년))은 한양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면 한때 독락당 계정(溪亭)에서 보내기도 하였지만, 주로 이 영귀정에 올라 우국과 경세의 노심초사하는 심신을 가다듬곤 했다.
현재의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에 자리잡고 있는 영귀정은 그 이름의 의미를 논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공자가 어느 날 제자들에게 "각자 너희들의 뜻을 말해보라"고 하자 모두가 세상에 나가서 벼슬할 뜻을 밝혔다. 그러나 증점(曾點)은 "늦은 봄 날씨 따뜻한 때 봄옷이 다 마련되면 대 여섯 명의 어른과 예닐곱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기수(沂水)에 나가 목욕하고 무우(舞雩)의 제단 터에서 바람 쏘인 다음, 시를 읊조리다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대답했다. 공자는 이에 "나는 증점의 뜻에 동의한다"면서 증점의 활연한 마음을 찬동하였다.
영귀정(詠歸亭)이란 이름은 바로 증점의 답변 마지막 구절인 영이귀(詠而歸)에서 따온 것이다. 또 영귀정으로 들어가는 문을 이호문(二乎門)이라고 한 것은 그의 답변 가운데 욕호기(浴乎沂), 풍호무우(風乎舞雩)의 두 호(乎)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영귀정 발아래로 흐르는 안락강(安樂江)은 그 옛날부터 흐르는 산둥성 곡부(曲阜)의 기수(沂水)를 연상시킨다.
물(勿)자 형국을 이루고 있는 양동마을에는 모두 9개가 넘는 정자가 있다. 그 중 회재의 아우 농재(聾齋) 이언괄(李彦适)이 거처한 심수정(心水亭)은 회재의 영귀정과 함께 두 형제의 정자이다. 두 정자는 건립당시의 원형이 보존되지 못하다가 영귀정은 1800년대 후반에, 심수정은 1917년에 각각 복원되었다.
#이단의 사설을 타파하고 불의에 항거한 대학자
여주(驪州) 이씨인 회재는 성균관 생원 이번(李蕃)과 손소(孫昭)의 딸 손씨 부인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10세 때 부친을 여의었지만 어머니의 훌륭하고 절도 있는 가르침으로 열심히 배우고 익혔으며 장성한 후에는 외삼촌인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에게 나아가 수학하였다. 외삼촌이 외지로 근무지를 옮기면 양산, 김해, 상주 등지로 따라다니면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23세 때 소과에 합격하고 그 이듬해 대과에 급제하였다. 당시 고시관인 모재(慕齋) 김안국은 "왕좌(王佐)의 재(才)를 지녔다"고 회재의 재능을 칭찬하였다. 이후 관직에 종사하면서 학문연구와 국가경영에 혼신을 다하였다.
27세 때 이미 동향선배인 망기당(忘機堂) 조한보에게 태극논변(太極論辨)을 제시할 정도로 당시 유학(儒學)의 본원(本源)을 확연하게 꿰뚫고 있었다. 특히 망기당이 도불이론과 혼동하고
회재의 아우인 농재가 거처했던 심수정. 춘양목으로 지은 수려한 정자와 주변의 아름드리 나무가 일품이다.
있는 부분을 철저히 분석하여 유학의 본 모습을 확인시킨 점은 훗날 퇴계 선생을 크게 감동시켰다. 퇴계는 회재의 행장(行狀)에서 "우리 유학의 도를 천명하였고, 이단의 사설(邪說)을 물리쳤다(闡吾道之本原, 闢異端之邪說)"고 회재를 극찬하였다.
회재는 30세 무렵 입잠(立箴:입지의 잠언)을 지어 "참됨을 쌓고 힘쓰기를 오래하여 성인의 경지에 들기를 기약한다(眞積力久, 期入聖域)"고 굳게 맹세하였다. 회재는 불의를 보면 분연히 항거했으며 성현의 말씀과 진리를 백성들에게 펼쳐 태평성세를 이루고자 하는 의욕이 누구보다 강하였다.
회재는 당시 왕의 사돈인 김안로를 중책에 기용하려하자 김안로를 권모술수를 부리는 소인배임을 직간하다가 결국 파면된다. 그러나 그는 초연히 향리로 돌아와 7년 세월을 보내는 동안 오직 나라 일을 근심할 뿐 자신의 불우함에는 개의치 않았다. 중종 32년 47세 무렵 다시 중용되어 홍문관직제학, 병조참지 등을 지냈다.
55세 때 의정부 좌찬성을 맡고 있을 무렵 조정은 대윤과 소윤의 파당이 형성되어 국론이 양분되었지만 그는 끝까지 소윤의 부정한 처사를 논단하였다. 끝내 을사사화가 일어났고 소윤들은 회재를 회유하기 위하여 윤임을 정죄(定罪)하는 데 공로가 있다는 명목으로 정난공신 여성군(驪城君)으로 봉하였으나, 그는 "공로 없는 훈작을 받는 것은 국가의 기강을 무너뜨리는 것"이라면서 이를 끝내 받지 않았다. 그러자 윤원형 일파는 회재의 관직을 삭탈케 하였다. 이듬해 조정비방문을 붙인 양재역벽서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원죄를 을사사화의 사류들에게 뒤집어 씌웠고 회재가 그 중심인물로 낙인 찍혀 평안도 강계(江界)로 유배되었다. 회재는 명종 8년 63세 되던 11월, 꿈에도 그리던 고향땅을 밟지 못한 채 유배지에서 쓸쓸하게 운명하고 만다.
#조선유학의 큰 별
회재는 조선유학사에서 동방오현(정여창·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으로 추존되는 인물이며,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정여창→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으로 이어지는 도학의 정통을 이은 대학자이며 경세가였다.
회재는 강계 유배지에서 지낸 6년 동안 한시도 쉬지 않고 전대의 학자들이 발견치 못한 이론과 경학의 체계를 집대성하였다.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구인록(求仁錄) 등은 이때 집필된 것들이다. 이들 저술은 유학의 새 지평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퇴계가 이기설을 확립하는 기저(基底)를 마련하였다.
특히 대학장구보유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서인 속대학혹문은 한국유학의 새 지평을 열어준 독창적이고 위대한 업적으로 꼽힌다. 유배생활이 그에겐 인고였고 후학들에겐 영원한 가르침을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기대승은 회재의 신도비명에서 "일시의 욕됨이었으나 만세의 빛이었도다(一時之言后, 萬世之光)"라고 하였다.
그는 또한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를 통해 장수선발을 엄격히 하고 무기를 첨단화할 것을 주장하는 등 국방을 특별히 강조하였고, 맹자에 근거하여 백성들의 형벌을 가볍게 하고 세금을 얇게 거두는 민본정치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외 의례를 정리한 봉선잡록 등의 역저가 있다.
[한국의 혼 樓亭 .19] 충재 권벌의 봉화 닭실 청암정'
(제자·자문: 養齋 이갑규)
수백년 풍상에도 고색창연 '영남 최고 정자
충재, 기묘사화 연루돼 이곳서 15년 은거
빼어난 풍광 벗삼아 학문연구·후진양성
조정 복직 이후도 大義 외치다 끝내 유배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충재 권벌이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했던 청암정 전경. 현재는 보수공사 중이다.
"선공이 닭실에 집터를 점지하여(酉谷先公卜宅寬)/구름 걸린 산 둘러 있고 다시 물굽이 고리처럼 둘러있네(雲山回復水灣環)/외딴 섬에 정자 세워 다리 가로질러 건너도록 하였고(亭開絶嶼橫橋入)/연꽃이 맑은 연못에 비치니 살아있는 그림 구경하는 듯하네(荷映淸池活畵看)/채마밭 가꾸고 나무 심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능했고(稼圃自能非假學)/벼슬길 연모하지 않아 마음에 걸림 없었네(軒裳無慕不相關)/바위 구멍에 웅크린 작은 소나무가(更憐巖穴矮松在)/풍상의 세월 격려하며 암반 위에 늙어가는 모습 더욱 사랑스럽구려(激勵風霜老勢盤)'
퇴계(退溪) 이황이 청암정(靑巖亭)을 읊은 시다. 청암정과 정자의 주인공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내용이다. 퇴계는 충재를 존경도 했지만, 충재의 증조부가 퇴계 외조모의 외조부여서 수시로 인사를 다니는 관계이기도 했다.
#충재가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했던 청암정
봉화에서 제일의 반촌(班村)으로 닭실(酉谷)을 꼽는다. 닭실은 안동권씨 충재(沖齋) 권벌(1478~1548)이 자리잡은 이후 후손들이 400여년간 세거한 명소이다.
충재는 소과를 거쳐 30세에 대과에 합격한 후 요직을 두루 역임하다가 정암(靜菴) 조광조의 개혁정치가 좌절되는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당하였다. 이 때 충재는 지난날 삼척부사로 부임하던 길에서 둘러본 뒤 마음 속에 점지해 두었던 봉화 닭실로 옮겨 살게 되었다. 그 전에는 출생지인 안동 도촌에서 살았다. 충재는 이후 조정에서 다시 부를 때까지 이곳 닭실에서 은거하며 15년 세월을 보냈다. 그는 49세(1526) 무렵에 청암정을 짓고 경학(經學)에 몰두하며 10년 동안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사적명승 제3호로 지정된 청암정은 거북처럼 생긴 암반 위에 춘양목으로 건축한 정자로, 영남 최고의 정자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거북 암반 주위는 연못으로 둘러져 있고, 바로 옆의 종택 뜰에서 정자로 건너가는 돌다리가 더욱 운치를 더해준다. 주위에 심은 노송과 느티나무, 향나무, 단풍나무 등 고목은 수백년 세월을 말해주는 듯 찬란한 풍광을 선사하고 있다.
정자의 마루 위에는 퇴계 이황, 백담(栢潭) 구봉령, 관원(灌園) 박계현, 번암(樊庵) 채제공, 눌은(訥隱) 이광정 등 역대 명현들의 글이 현판으로 늘어서 있다. 남명(南冥) 조식이 쓴 것으로 전하는 청암정 현판과 미수 허목이 쓴 '청암수석(靑巖水石)' 현판이 정자의 품격과 위상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목숨 걸고 공명정대한 국사 집행을 직간한 충재
충재는 15년 동안 닭실에 은거하며 독서하다가 밀양부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 후 한성판윤, 우찬성을 지냈으며, 명종이 어린 나이로 등극해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할 시절에는 원상(院相)이 되어 승정원의 정무를 대직(代直)했다. 당시 문정왕후의 아우인 윤원형의 정당과 인종의 외척인 윤임의 정당으로 대치되어 소위 소윤·대윤의 정치적 갈등이 깊어졌다. 이 문제를 문정왕후가 판결하려고 대신들을 충순당(忠順堂)에 소집해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을 때 충재는 목숨을 걸고 공명정대하게 국사를 집행해야 됨을 직간하였다.
그러나 충재의 직간은 관철되지 못했고, 윤임 일당이 유배되는 을사사화가 발생해 또다시 충재는 파면되었다. 2년 후 부제학 정언곽이 양재역 벽에 이름 없는 조정비방문이 붙었다고 보고한 '양재역벽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을사년 사화의 인물들에게 죄가 씌워져 충재는 또다시 구례로 유배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나라를 위해 공명정대한 대의를 외치다가
미수 허목이 마지막으로 남긴 글씨인 '청암수석'
좌절됨을 안타까워할 뿐, 자신의 불우함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퇴계가 지은 충재의 행장(行狀)을 보면 "압송관이 이르자 공은 기꺼이 길을 나섰다. 진사 금원정(琴元貞)이 충재공의 손을 잡으며 자신도 모르게 실성할 정도로 목놓아 울자 충재공은 웃으며 '나는 그대가 대장부라고 생각했더니 어찌 이러한가. 생사 화복은 하늘의 뜻이네. 하늘의 뜻을 어찌하겠는가(吾以子爲大丈夫矣, 何至是耶. 死生禍福, 天也. 其如天何)'라고 말했다. 충재가 아들 청암(靑巖) 권동보에게 부치는 글에는 '옛날 중국의 범충선공은 나이가 70인데도 만릿길 유배를 갔다. 너 아비의 죄로는 오히려 관대한 처분이다. 또한 내가 국은을 저버려 이에 이르렀으니 내가 죽거든 검소하게 장례지냄이 옳을 것이다(昔范忠宣年七十, 有萬里之行, 汝父之罪甚寬典也. 且吾負思至此, 死卽薄葬可也)'"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평안도 삭주(朔州)로 유배된 충재는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이듬해 명종 3년(1548) 3월에 북녘 땅 삭주에서 71세로 운명했다. 충재는 명종 21년(1567)에 신원돼 모든 관직이 복권되었고, 선조 4년에는 '충정공(忠定公)' 시호가 하사되었다.
#충재와 근사록
충재는 일생 동안 독서를 쉬지 않았다. 특히 '근사록'을 탐독하였으며, 늘 소매 속에 근사록을 넣고 다녔다.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중종이 대신들과 후원에서 상화연(賞花宴)을 열어 취하도록 마시고 파한 뒤 자리를 정리하던 신하 한 사람이 책 한 권을 주워 임금에게 바치니 중종은 "아마 권벌의 옷소매에서 빠졌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돌려주도록 명했다 한다.
충재가 지니고 다니던 근사록은 고려 공민왕 9년(1370)에 간행된 목판본 4책으로, 보물 262호로 지정됐다. 충재 수택본(手澤本)으로 충재유물관에 보관돼 있다. 또한 중종은 초주(初鑄) 갑인자본 근사록 9권3책을 충재가 도승지로 근무할 때 하사했고, 영조는 무인자본 근사록 14권4책을 충재 6세손 권만을 통해 충재 고택에 하사했다. 모두 보물 896호로 지정됐고, 충재유물관에 보관돼 있다.
충재는 장성한 후 하루도 빠짐 없이 일기를 썼다. 지금 전하는 일기로는 한원일기(翰苑日記) 2책, 신창영유단일기(新昌令惟斷日記) 1책, 당후일기(堂後日記) 1책 등 6책이 있다. 이 모두 450년 전 사회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보물 제261호로 지정된 이 일기들도 유물관에 보관돼 있다.
현재 종택 옆에 충재기념관을 신축하는 공사가 진행중이고, 청암정 역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벌이고 있다.
미수 허목은 청암정에 한 번 가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다가, 88세 되는 해 4월에 '청암수석(靑巖水石)' 네 글자를 써놓고 글씨를 보내기도 전에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 달 하순에 운명하니 이 글씨가 미수의 절필(絶筆)로 알려진 것이다. 미수가 후미에 써놓은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청암정은 권충정공의 산수에 있는 옛집이다. 골짜기 수석이 가장 아름다워 절경으로 칭송되고 있다. 내 나이 늙고 길이 멀어 한 번 그 수석간에 노닐지는 못하지만, 항상 그곳의 높은 벼랑 맑은 시내를 그리워하고 있다. 특별히 청암수석 네 자를 큰 글자로 써 보내노니 이 또한 선현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 사실을 기록해 둔다. 8년 초여름 상완에 태령노인은 쓴다(靑岩亭者, 權忠定公山水舊庄. 洞壑水石最佳稱絶景. 僕年老路遠, 不得一遊其間, 懷想常在高壁淸溪, 特書靑岩水石四大字, 亦慕賢之心也. 識之. 八年孟夏上浣台嶺老人書).'
2006-10-16 07:56:08 입력
[한국의 혼 樓亭 .18] 청도 금천면 '만화
정'
(제자·자문: 養齋 이갑규)
임진왜란때 14義士 나서 거병…구국 혼 서려
조선 중기 명유석학 모여서 토론 '학문의 요람' 말기에는 운강 박시묵의 근대화 교육 강학소
/글·사진=김신곤기자 singon@yeongnam.com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화려한 조각과 건축술로 지어진 만화정이 동창강 한쪽 언덕 위에 자리잡고 수려한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에 있는 만화정(萬和亭)은 주변 산수의 아름다운 풍광과 섬세하게 설계된 건축물, 당시 명유들이 예찬한 현판의 시문 등 어느 하나 감탄이 터져 나오지 않는 것이 없다. 이 만화정은 본래 조선중기 성리학자인 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1479~1560)이 건립한 서당의 유허지이며, 소요당의 11세손 되는 박정주(1789~1850)가 분가해 지은 살림집이었다. 이후 그의 아들 운강(雲岡) 박시묵(朴時默)과 운강의 증손자되는 박순병이 건축물을 더 확장하여 정자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만화정은 학문의 요람
만화정은 운강이 현판을 걸고 근대화 교육의 강학소(講學所)로 쓴 유적지인 동시에, 운강의 아들 진계(進溪) 박재형(朴在馨:1838~1900)이 불후의 명저인 해동속소학, 해동속고경중마방 등 38권의 저서를 남긴 학문의 요람이다.
소요당은 사마시에 합격한 후 중종 당시 사산감역, 사재감봉사, 장예원사평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일생을 초야에 묻혀 학문과 저술, 후학양성에 전념한 순수한 사림의 학자였다.
그는 무오사화와 을묘사화를 목격하고는 벼슬길을 단념하고 당시 삼족당(三足堂) 김대유와 함께 청도지역에서 처음으로 운문산 아래에 사창(社倉)을 지어 흉년과 굶주림에 지친 백성들을 위해 환곡법을 시행하는 등 빈민구제사업에 전념했다.
당시 남명(南冥) 조식, 삼족당 김대유, 경재(警齋) 곽순, 송당(松堂) 박영, 청송(聽松) 성수침, 신재(愼齋) 주세붕, 송계(松溪) 신계성 등 국내 굴지의 명유석학들이 소요당을 찾아 학문을 토론하였다. 특히 남명, 삼족당과는 절친한 도의지교(道義之交)를 이루었다. 이 만화정은 바로 이들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구국의 혼이 서린 곳
소요당의 증손자 되는 용암(龍巖) 박숙 당시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밀양박씨의 소요당 손자와 증손자들로 조직된 형제, 숙질, 종반간의 14의사(義士)가 일어났다. 구국의 결사대로 조직된 용암을 비롯한 14의사는 왜적이 부산으로 상륙, 단 10여일 만에 청도까지 밀어닥쳐 청도성이 함락되고 군수가 도주하는 등 나라가 풍전등화에 이르자 바로 이 만화정 앞뜰에서 창의(倡義)하였다. 이들은 여기서 모두 죽음으로 나라를 구할 것을 맹약하는 글을 낭독하고 결의한 후 격문을 살포하고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쳤다.
운강 박시묵은 퇴계학통의 정맥을 이은 정재(定齋) 류치명의 제자이다. 부친이 지은 집을 더 확장하여 만화정(萬和亭)이란 이름을 걸게 된다. 당시 명유로 꼽히는 만귀(晩歸) 이주현, 응와(凝窩) 이원조, 류주목, 허전 등이 만화정 기문을 남겼다.
만화란 뜻의 요지는 본래 운문들판 이름이 만화평(萬花坪)인 것과 관련이 있다. 이 집은 만화평을 굽어보는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이에 운강은 만화(萬花)의 화(花)자가 화(和)와 소리가 같은 점을 착안하여 화(花)자를 화(和)로 바꾸어 만화정(萬和亭)이라 이름지었다. 화(和)의 뜻은 중용에서 '중(中)은 천하의 큰 근본'이고 '화(和)는 천하에 통용되는 도(道)'라고 한 데에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 운강이 만화를 읊은 주옹만영(主翁永)이란 시에는 이러하다.
이 하나의 마음이 화하면 기운도 화한 법(這箇心和氣亦和)
나의 마음과 기운을 화하게 하여야 중화를 이루리라(和吾心氣致中和)
냇물이 사해로 귀의함이 모두 살아 있는 것 같고(川歸四海渾如活)
온산에 꽃 핌은 모두 함께 화의 기운 얻음이라(花發千山共得和)
풍채와
운치는 다 같이 삼대(夏殷周)의 순후한 학풍으로 돌아가리(風韻同歸三代學)
공부는 요컨대 한 덩이 화에 있음이로다(工夫要在一團和)
세간만사 화가 귀한 것이니(世間萬事和爲貴)
일마다 오직 화하면 모든 만사가 다 화하리라(事事惟和卽萬和)
#운강과 진계는 민족교육의 선구자
운강은 조선말 열강의 침략과 서학의 혼란기에 조선의 선비로서 자주적인 근대화교육을 과감히 시행, 고종 9년(1872)에 강학소를 설치하여 전통서원교육을 개혁하였다.
강학 장소는 만화정과 대비정사 등의 건물을 이용하였고 종래 서원에서 한 사람의 스승에게 수업받던 방식을 보완하여 전문분야의 여러 강사를 초청하여 수업을 받도록 하였다.
학생은 자계서원, 남계서원, 명계서원, 선암서원 등에서 추천을 받아 선발하였다. 운강은 이들 서원으로부터 강학소 운영기금을 일부 지원받기도 하였지만 실상은 사재를 털어 전액 장학제도에 의해 후진을 양성하였다.
운강이 설립한 강학소는 학생들에게 학비지원은 물론이고 숙식까지 제공하여 학생들이 학문에만 종사할 수 있도록 제반조건을 갖추었다. 이는 근대화교육 장학제도의 원형이 되었다. 또 강학소 운영조례인 강학소절목(講學所節目)은 근대화교육 운영조례의 근간이 되기도 하였다.
운강은 나라의 운명을 오직 교육에 사활을 걸었다. 또한 퇴계 선생의 언행을 모아 논어 편찬 방식으로 도산지언(陶山至言) 세 권을 엮었고 운창일록 13책, 14의사록 등 민족교육을 자주적으로 할 수 있는 저술에도 힘썼다. 운창일록은 조선말 격변하는 사회변동과 병인양요 당시 사회 사정의 전반을 상술한 일기이다. 지금도 중요한 자료로 분류되고 있다.
운강의 아들 진계 박재형은 부친의 가학을 전승하였고 류치명, 허전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자주적 민족교육에 일생을 바쳤다. 주요저서에 해동속소학, 해동속고경중마방 등 38권의 저서를 남겼다. 만화정에서 일군 전통을 계승한 근대화교육은 훗날 소요당의 이름이 바뀐 선암서원의 전답을 재원으로 하여 신명학교(현재 신지리 금천초등학교의 전신)를 설립, 현대화교육으로 이어졌다.
운강고택과 만화정에서 집필된 해동속소학 목판은 만화정에서 보관해 오다가 관리상 선암서원으로 옮겨졌고 안전을 위해 다시 지금의 안동 국학원으로 옮겨 보관 중이다. 만화정은 운강고택과 함께 운강의 6세손 되는 박성욱씨가 관리하고 있다.
6·25 피란 시절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만화정에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해동속소학
우리나라 선현 언행 발췌, 아동 인성교육 지침서
진계 박재형이 남송 때 주자가 편찬한 아동교육교재인 소학을 이어 순수한 우리나라 선현들의 언행을 발췌하여 모은 것이다. 고대사로부터 조선시대까지 아동들에게 인성교육의 표상이 될 수 있는 대표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른 교육 확립을 위한 입교(立敎), 인간의 윤리도덕을 밝히는 명륜(明倫), 공경으로 몸가짐을 바로 하는 경신(敬身), 옛 사실을 살펴 실증하는 계고(稽考), 선현들의 훌륭한 말씀을 모은 가언(嘉言), 선현들의 훌륭한 실천을 모은 선행(善行) 등 여섯 편으로 편집, 64종의 문헌에서 발췌되었다.
1882년 사본을 비롯하여 1925년까지 목판, 활판 등 5차례에 걸쳐 간행되어 아동교육지침서로 전국에 배포된 필독서였다. 그러나 서구화한 교육제도로 인하여 우리 것은 그동안 책 제목마저 상실해버린 상황이었다. 지금 대구향교 에서 유일하게 가르쳐지고 있다.
한국의 혼 樓亭] 초간 권문해의 예천 용문
면 초간정(17)
(제자·자문: 養齋 이갑규)
공주목사 사임하고 49세에 초당지어 학문 연마
민족의식 깔린 순수 우리 역사·문화서 집필 매진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초간 권문해가 대동운부군옥을 집필한 초간정.
초간정(草澗亭)은 초간(草澗) 권문해(1534~1591)가 공주목사를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와 노년의 수양처로 49세 무렵에 완성한 초당이다. 초간의 종가에서 약 2㎞ 거리인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의 초간정은 본래 이름이 초간정사(草澗精舍)였다. 후대에 누군가가 초간정이란 현판을 걸어 두었으나, 이는 본래 이름의 본뜻을 거스른 것이라고 초간의 종손은 지적한다. 초간 당시에 대사간을 지낸 소고(嘯皐) 박승임(1517~86)이 '초간정사'라 명명하여 직접 써 보냈고, 지금도 그 글씨의 현판이 걸려 있다.
정사(精舍)란 학문에 정진하는 집이란 뜻으로 본래는 유가의 문자였으나, 불가에서 빌려가 쓰면서 불가 문자처럼 되어 버렸다는 주자(朱子)의 설이 있다. 주자는 무이구곡에 세운 자신의 서재를 무이정사로 명명한 바 있다. 초간의 14세 종손인 권영기(權榮基)옹은 초간정은 초간정사로 이름부터 바로 지칭되어야 하며, 초간정은 사적지로서 본래 모습을 복원해 우리의 주체성을 되살리는 교육의 현장으로 일궈야 함을 역설했다. 본래 모습이란 초간 종가에 있는 서고(書庫) 백승각(百承閣: 백세를 이어간다는 뜻으로 주자의 장서각명(藏書閣銘)에서 취해 온 것)과 백승각 옆 연못 등이 30년 전처럼 초간정 옆 원래 자리에 그대로 있던 모습을 말한다. 그리고 복원된 초간정 옆의 건물도 그 구조가 바뀌었고, 위치 또한 본래 있던 암반자리에서 약 10보 왼쪽으로 물러나 앉아있다는 것이다.
#대동운부군옥을 저술한 초간 권문해
초간 권문해는 본관이 예천이다. 종조부인 수헌(睡軒) 권오복, 조부 권오상 이래로 문학과 명절(名節: 명분과 절의)이 끊이지 않았다. 총명한 자질을 타고난 초간은 어린 시절부터 부친 권지로부터 가학을 전수했다. 17세 무렵 부친을 모시고 조부 묘소 곁에 있는 재실에서 글을 읽을 때 총명이 일반 사람보다 넘쳤으며, 역사서를 널리 공부하고 눈에 한 번 스친 것은 모두 기억했다. 인물의 어질고 어리석음, 문장 수준의 높고 낮음에 대해 한 번만 보면 다 알아버렸다고 행장에 전하는 바이다.
이러한 총명으로 향시에 장원으로 합격했고, 아우인 감정공(監正公) 문연(文淵)과 함께 용문사에서 공부하던 24세 무렵에는 침식을 잊을 정도로 혹독하게 파고들어 늘 밤을 밝힐 등잔 기름이 모자랐다고 한다. 당시 신징(信澄)이란 스님이 등잔에 기름이 떨어지면 늘 기름을 갖다 부어주곤 했다. 훗날 초간이 그 스님에게 지어준 시에 '옛날 걸상이 뚫릴 정도로 앉아 학업에 열중하던 날, 스님께 밤마다 모자라는 등잔기름 대게 했던 때가 그립습니다(仍憶昔年穿榻日, 令渠夜夜點燈時)'라고 적고 있다. 23세 때는 한서암(寒棲庵)으로 가서 퇴계 선생에게 수학했고, 27세에 대과에 합격한 후 우부승지, 좌부승지를 역임했다.
초간은 평소 아우 감정공에게 "동방의 풍속이 질박하고 비루하여 문헌이 갖추어져 있지 못하다. 선비들이 중국 역사의 흥망에 대해선 마치 어제의 일같이 되뇌지만,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선 상하 수천 년간의 역사를 아득히 모르기를 태고시절 일같이 여긴다. 이는 눈 앞의 물건도 보지 못하면서 천리 밖의 것을 주시하려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독서하는 여가에 우리나라의 역사와 사적을 널리 살펴 연구하며 우리의 백과사전을 만들 뜻을 일찍부터 품었다.
또한 역사가들이 황당하고 비루한 말로 저술하는 것을 병통으로 여기면서, 자신이 저술을 남겨 야사를 만들려고 했다. 이렇게 해서 평생 벼슬생활 틈틈이 엮은 저술이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20권 20책이다. 민족의식이 짙게 깔린 순수한 우리 문화와 역사를
수록한 대백과사전이 완성된 것이다.
#초간정 내력
초간(草澗)이란 뜻은 종현손(從玄孫)인 선계(仙溪) 권용이 쓴 초간정사 사적과 박손경이 쓴 중수기문에 의하면, 당나라 시인 위응물이 읊은 저주서간( 州西澗)이란 시에 '홀로 물가에 자라는 우거진 풀 사랑하노니(獨憐幽草澗邊生)'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보았다. 또한 당시 그곳 문수(汶水) 주변을 실제 초간이라 불렀고, 초간정을 짓기 전부터도 자신의 호를 초간이라 했다. 사적과 기문에서 덧붙이기를 '송나라 주돈이가 창 앞에 자라는 풀들을 뽑지 않고 그대로 두고서 보며 천지의 기운이 생동하는 모습을 관찰한 뜻과 같다'고 했다.
이 초간정은 불후의 명저인 대동운부군옥 집필이 마무리된 사적지이고, 초간의 아들 죽소공(竹所公) 별이 부친을 이어 최초의 인명사전으로 알려진 해동잡록(海東雜錄) 14권 14책을 집필한 곳이다.
대동운부군옥을 집필했던 본래의 초가삼간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 말았다. 인조 4년에 아들 죽소공이 그 터에 다시 세워 해동잡록을 집필한 초간정사가 또 다시 화재로 소실됐다. 훗날 초간의 현손인 봉의공(鳳儀公)이 힘을 모아 그 유허지에 다시 중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종손 권영기옹이 두 아우 부영·영일씨와 함께 선대의 정신을 이어 정사를 관리하고 있다. 종택으로 옮겨진 백승각에는 보물로 지정된 대동운부군옥 목판과 초간일기가 보관돼 있고, 권영기옹이 이를 수호하고 있다. 놀랍게도 목판이 한 장도 빠짐없이 보관되고 있는 데에는 종손의 말 못할 고충과 노력이 배어 있다.
초간정에는 초간정 주위를 100번 돌면 과거에 합격한다는 전설과 관련된 일화도 전한다. 한 선비가 99번을 돈 뒤 현기증으로 난간 밖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게 되자 그 장모가 도끼를 들고 와 기둥을 찍었다고 한다. 지금도 초간정 낭떠러지 쪽의 한 기둥에는 도끼로 찍힌 흔적이 남아 있다. 그 정도로 문혼이 서린 곳임을 말해준다.
◇대동운부군옥-지리·국호·성씨 등 한자 韻별로 정리 완벽한 '대백과사전'
중국의 원나라 음시부(陰時夫)가 중국의 역사를 106운의 운서(韻書)를 바탕으로 나열한 '운부군옥'이 있다.
대동운부군옥은 초간이 우리나라 역사와 저작물을 운부군옥편찬 방식을 채택하여 편찬한 것이다. 역사와 전적을 전체적으로 일별할 수 있는 대백과사전으로 지리, 국호, 성씨, 인명, 효자, 열녀, 수령, 선명(仙名), 목명(木名), 금수 등으로 분류해 한자의 운별로 정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낙동(洛東)은 동(東)자 운에 찾으면 나온다.
172종의 전적이 참고된 이 역작이 선비 한 사람의 힘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이 놀랍다. 여기에는 이미 없어진 문헌들도 기록이 남아 있다. 대표적으로 신라 수이전이 그렇고, 진주강씨의 시조 강이식(姜以式) 도원수(都元帥)에 대한 고증이 고려사에는 실전되고 없었으나 이 책에는 남아있는 것이 그 예다.
원고 초본을 3부로 만들었는데, 한 부는 학봉 김성일이 임금에게 아뢰어 나라에서 출판하려 했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 뜻을 못 이루고 분실되었다. 그 후 한강 정구가 한 부를 빌려가 분실했다. 마지막 한 부는 초간의 아들 죽소공이 보관했고, 죽소공이 다시 한 부 정서해 전하다가 헌종 2년(1836)에 목판으로 완간되었다.
일제 때는 왜경이 총을 겨누며 탈취해 가려 했으나, 종가에서 죽음으로 맞서자 빼앗아 가지 못했다고 한다. 죽소공의 해동잡록은 보관해 오던 초고를 40여년 전 태학사에서 영인본으로 출판한 적이 있다.
[한국의 혼 樓亭 .16] 근암 류치덕의 구미 해평면 근암정
(제자·자문: 養齋 이갑규)
'세상사 잊고 杜門讀書' 대학자 향학열 물씬
'남이 한 번 읽을 때 백 번을 읽는다' 불굴의 노력…타고난 노둔함 극복 학문 성취…예학·실학 통달
/글·사진=김신곤기자 singon@yeongnam.com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대원군의 글씨를 복각한 근암정 현판.
학문을 하든 수행을 하든 명석한 두뇌와 우수한 자질을 바탕으로 단박에 어느 한 분야의 일가를 이루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소 우둔하더라도 끊임없는 노력과 끈기·시행착오를 통해 어느 한 순간 활연대오(豁然大悟)한 후 최고봉에 이르는 인물도 있다. 후자의 경우 그 인물의 각고의 노력이 더욱 돋보이고 그 학문이나 수행의 힘이 더욱 크게 느껴질 뿐만 아니라 후학들의 사표가 되는 사례를 우리는 종종 본다. 공자의 가장 독실한 제자인 증자가 그러했고 조선말 퇴계의 학맥을 이은 근암 류치덕(柳致德:1823(조선 순조 23년)~81(고종 18년)) 또한 이러한 인물이다. 증자는 공자의 72제자 가운데 재주가 가장 노둔(魯鈍 :재주가 없고 우둔함)했지만 공자의 학문과 사상을 정통으로 전한 인물이었다. 근암 류치덕은 학문을 시작할 무렵에는 역시 증자처럼 노둔했지만 불굴의 노력으로 학문에 대성한 당대의 석학이다. 당시 홍문관 부교리를 지낸 이만규는 근암의 묘갈명에 '노둔함으로 학문을 얻었다(以魯得之)'라고 찬하고 있다.
#근암정은 류치덕의 향학열이 서린 곳
근암정은 류치덕이 말년에 건립하고 강학을 하던 정자이다. 본래는 안동시 임동면 무실 건너편 한들(大坪)에 있었으나, 1987년 임하댐 수몰로 지금의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에 새로 조성된 전주류씨 일가 마을에 옮겨져 있다.
이 근암정의 근(近)은 "높은 곳에 오르는 자는 낮은 데서부터 시작하고, 먼데를 가는 자는 가까운 데서부터 출발한다"는 중용에 있는 뜻을 따 자신의 호와 집 이름을 삼은 것이다. 근암 자신의 학문과 수행 여정을 그대로 반영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근암정의 현판은 대원군이 직접 쓴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복각된 현판이 걸려있고 힘찬 대원군의 글씨는 모처에 따로 보관해 두고 있다. 현재 근암정은 근암고택과 함께 근암의 현손인 류후영씨가 선대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근암의 조부는 진사공 소휴(韶休)이고 아버지는 혼문(渾文)이다. 근암은 어릴 때 매우 더디고 둔했다고 한다. 종조부인 대야(大野) 류건휴옹이 그를 가르치고 이끌어주었으며 다방면으로 학문에 정진하도록 지도하였다. 대야옹이 돌아가시자 족형되는 정재(定齋) 류치명 선생에게 나아가 수학하였다. 정재는 당시 퇴계학통의 정맥을 이은 거유(巨儒)로 당시 유림의 종장(宗匠)이었다. 정재는 손재(損齋)의 제자로 퇴계-학봉 김성일-경당(敬堂) 장흥효-갈암(葛菴) 이현일-밀암(密菴) 이재-대산(大山) 이상정-손재 남한조로 이어지는 학맥을 전수한 인물이다.
근암은 정재 문하에서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수업을 받고 청소와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면서 부지런히 학업에 정진하였다. 정재는 근암의 이러한 학문수행 자세와 근면한 태도를 매우 총애하며 정성을 다해 지도하였다. 근암이 장성하자 당시 대학자인 신암(信庵) 이병하는 중용에 "성인의 도가 높고 커서 천지에 충만하다(峻極于天)"라는 뜻을 빌려 자(字)를 도준(道峻)이라고 지어 원대한 그릇이 되도록 축원하였다. 이때부터 근암은 조용한 방 한칸을 마련한 후 남이 한번 하면 나는 백번을 하고, 남이 열번 하면 나는 천번을 하는, 중용에서 제시한 방법대로 뜻을 세워 혹독하게 글을 읽고 사색하였다.
#스승과 제자간의 끝없는 탐구정신
족질되는 류지호와 함께 척암(拓菴) 김도화의 선친 서재에서 철야독서를 하면서 의심나는 곳을 빠짐없이 기록하여 정재 선생에게 질문하면 정재는 매양 정밀하고 상세한 공부를 하고 있다고 이를 인정해 주었다.
정재는 "학문은 분발하여 모질게 정진하여야 된다"는 경계의 말을 거듭 당부하면서
대원군이 직접 쓴 근암정 글씨. 도난 방지를 위해 다른 곳에 은밀하게 보관중이다.
근암을 채찍질하였고 그는 스승의 뜻을 독실하게 실천하였다.
정재가 호군(護軍)으로 근무할 때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명예회복을 위해 추존(追尊)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대사간 박래만의 탄핵을 받고 나주군 지도(智島)란 섬에 유배되는 처지를 당했다. 스승의 자리가 비어있는 이런 상황에서도 근암은 흔들림 없이 더욱 정신을 가다듬어 학업에 정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의심나는 곳이 있으면 매번 편지로 질문을 하였다.
이에 스승 정재는 "성인(聖人)의 도를 전하는 한줄기 소리울림이 근암으로 인하여 거의 사라지지 않는다"라면서 근암을 북돋우는 답장을 보내곤 하였다.
유배되어 있는 스승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제자의 불타는 향학열과, 이를 갸륵하게 여기면서 제자에게 자상한 가르침을 주는 스승의 변함없는 지도와 격려자세가 감동스럽기 그지없다.
근암은 이렇게 학문을 쌓은 끝에 둔하고 막히는 곳이 활연히 열리기 시작하였고 의심되고 어두웠던 곳이 점점 정밀하고 상세하게 통하여 학문의 대도(大道)를 이루었다.
척암 김도하가 쓴 근암의 행장에는 "당시 총명한 석학들이 아무도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라고 적고 있다. 당시 명유들이 임석한 강회(講會)에서 각종 질문에 막힘없이 답변하니 족부(族父)되는 수정재(壽靜齋)옹이 "이 사람이 독서의 요체를 체득하였구나"라고 감탄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예학과 실학의 대가
근암은 훗날 부친의 상을 마치고는 세상사와 단절하고 두문독서(杜門讀書)로 일생을 보냈다. 심경, 근사록, 주자서, 퇴계서를 탐독·사색하였고 이기설(理氣說),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 태극동정설(太極動靜說) 등에 확고한 지론을 제시하였다.
조선 말기를 산 근암은 당시 사상적으로 서학(西學)이 파고들어 백가의 사설(邪說)이 난무하였지만 이 같은 분위기에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백가서를 두루 통독하고 바른 길을 제시하였으며, 청나라의 고증학과 신문학에 대해서도 명쾌한 답변을 제시해 학문의 중심을 세웠다. 당시 근암과 상호간에 가장 많은 토론을 한 벗으로는 경암(敬菴) 이재목, 서산(西山) 김흥락 등이다.
특히 근암은 예학연구에서 가학(家學)을 계승한 독보적 학통을 견지하였다. 그리하여 국조의 전례(典禮)가 미비한 점을 애석하게 여기다가 역대 예지(禮志)와 국조전헌(國朝典憲) 등 200여종을 정독하고 대대적으로 수집하여 전례고증(典禮攷證) 12책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동암(東庵) 류장원이 편찬한 상변통고(常變通攷) 30권에 대한 속집으로 정밀하고 정확한 교감과 상세한 절목, 다양한 예증이 제시된 것으로 우리나라 예학연구에 아주 필수적인 중요자료로 꼽히고 있다.
근암은 실학에도 밝았다. 청나라를 오가며 야단스럽지 않고 실리적으로 민중의 경제사정과 문제점을 분석하여 그 해결방법을 제시하였다. 실학 저서로는 임려문답(林廬問答) 3책이 있다. 이 책에는 정치, 경제, 문화 등 전반을 언급하면서 토지제도와 구황정책에서 제시한 조세제도, 곡가 안정, 관제의 모순, 병제, 교육제도 등의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이는 조선 후기 누적된 각종 사회적 문제점을 총체적인 안목에서 날카롭게 비판한 것이기도 하다. 그의 문집은 6권이 남아있다. 근암은 학문을 닦아 직접 벼슬길에 나아가는 길보다는 학문을 더욱 깊이 연구하여 치자(治者)나 후세인들의 전범(典範)이 되는, 영원한 법전을 남겨 놓는 길을 택했다. 그는 한평생 진정한 학문의 길을 걸었던 사표가 아닐 수 없다.
[한국의 혼 樓亭 .23] 호수 정세아의 영천
자양면 '강호정'
"나라 못구하면 죽음 뿐" 의병장 구국 魂 서려
(제자·자문: 養齋 이갑규)
임진왜란때 분연히 거병해 왜구 격퇴, '영천대첩' 포상 거절하고 강호에 은거
충의·학덕 기리려 후학들이 정자 세워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임진왜란 의병장 호수 정세아의 충의 정신과 학덕을 기려 세운 강호정에 가을이 완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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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정에 걸린 호수의 詩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산 78에 있는 강호정(경북유형문화재 제71호)은 호수(湖) 정세아(1535~1612)의 학덕과 충의(忠義) 정신을 기려 후학들이 세운 정자이다. 본래는 호수가 선조 32년(1599)에 만년의 강학처로 영천 자양현 노항촌(魯巷村)의 자호천 강 언덕에 자호정사(紫湖精舍)를 세운 것이 시초이다. 세월이 흘러 본래의 자호정사는 무너져버렸고, 조선 정조 경술년(1790)에 후학들이 옛터에다 정사를 다시 복원하였다. 그리고 집 이름을 호수의 자호(自號)를 따라 강호정(江湖亭)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또 다시 2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자 강호정이 있던 자리는 모두 영천 자양댐으로 수몰지역이 되기에 이르렀다. 정부에서 문화재 보존책으로 문화유적들을 옮기는 계획안을 내놓았을 때 자손들과 유림에서 협력하여 병진년(1973)에 자양댐이 내려다 보이는 기룡산 하천(夏泉)의 호수 묘소 아래로 이건해 놓았다. 아울러 호수의 손자되는 호신(好信)이 세운 삼휴정(三休亭)과 또 후손들의 정자 오회당(五懷堂), 사의당(四宜堂) 등도 모두 강호정 뒤편으로 옮겼다.
#의병장으로 분연히 일어난 호수 정세아
호수 정세아의 자(字)는 화숙(和淑)이며 시호는 강의(剛義)이다.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영일을 오천(烏川)이라 부르기도 한다.
명종 13년(1558) 24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의 뜻은 접었다. 양친을 효성으로 모시다가 모친이 별세하자 상례를 지극히 하였고, 부친 참봉공이 만년에 술을 좋아하고 찾는 빈객이 늘 문전을 메웠으나 호수는 힘을 다해 모셨다.
상을 마친 후에는 더욱 벼슬길을 단념하고 항상 고요히 앉아 경전과 역사서를 연구하며 의리를 강구하였다. 날마다 시례(詩禮)로 자제들을 가르침에 있어 엄하게 과정(課程)을 세워 독려하였다. 또한 부친이 세운 용계서사(龍溪書舍)에서 마을의 자제들을 모아 그들의 학업을 지도하고 이끌어주기를 수십년 동안 한결같이 하며 게을리함이 없었다.
임진년(선조 25년) 58세 되던 해 4월13일 왜적이 침입해 동래와 울산, 경주를 연속하여 함락하고 23일 영천군을 함락하였다. 관군의 수장(守將)들은 혼비백산되어 모두 도망가 버리고 왜적은 파죽지세로 서울로 향했다.
팔도가 붕괴되고 선조대왕이 서쪽으로 몽진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자 호수는 비분강개하며 아들 의번(宜藩)에게 "이제 임금이 몽진하셨는데 우리가 어찌 초간에서 살기를 구하겠느냐. 구제하지 못하면 죽음이 있을 뿐이다"고 하자 의번이 응하였고, 마을의 모든 자제들로 의병을 편성했다.
그리고 격문을 돌려 향병(鄕兵)을 소집하니 단 몇 10일 동안에 격문을 읽고 감격하여 일어난 사람들이 900여명에 이르렀다. 이때 종제되는 정대임, 재종제되는 정대인도 창과 활을 잡고 오니 호수는 그들의 손을 잡고 통곡하며 나라 위해 순절할 것을 맹세하였다. 이들은 호수를 의병대장으로 추대해 분격하였고, 이를 도화선으로 포산에서는 망우당(忘憂堂) 곽재우가 일어났고 권응수 장군 또한 이어 일어나 합세했다.
학봉(鶴峯) 김성일이 나라에 올린 장계(狀啓)에는 영천의 진사 정세아 등이 2월 중에 처음으로 결의하여 향병을 일으켰다고
되어 있고, 전후 사정을 상술한 여러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하여 영천이 수복되었고, 경주의 왜적들을 소탕하기 위해 좌절도(左節度) 박진의 병사와 합세하여 아들 의번과 함께 선봉장으로 공격하다가 끝내 아들 의번은 전사하고 말았다. 그를 모시던 하인 억수(億壽)도 의번의 도망가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의번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시신마저 끝내 찾지 못하고 그의 시(詩)를 모아 시총(詩塚)으로 시신의 무덤을 대신함으로써 호수는 전란의 아픔을 누구보다 쓰라리게 겪어야만 했다.
이윽고 명나라 원군이 들어오고 선조가 서울로 돌아오자 호수는 자신이 거느렸던 병사를 조희익(曺希益) 장군에게 귀속시키고 고향인 자양으로 돌아와 자양천 위에 자호정사를 짓고 강호수(江湖)라 자호하며 강호에 은거했다.
훗날 나라에서 영천대첩에 대한 공로 포상을 하려 하자 호수는 "이것은 모든 장병들의 힘에 의한 것이다. 내가 어찌 포상을 받겠는가. 내가 군사를 일으킨 것은 나라의 위급함에 따랐을 뿐이고 공명에 뜻을 둔 것은 아니었다(此諸將士之力也, 吾何有焉. 且起兵, 循國家之急耳, 功名非吾志也)"라고 하며 단호히 거절했고, 공로를 남에게 주었다.
#호수의 청렴결백 정신
당시 체찰사 이원익 대감이 호수의 소문을 듣고 자호정사에 찾아와 호수의 인품에 감격하며 그를 조정에 천거하였다. 이원익의 권유로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직에 한 번 임명된 후 승의랑(承議郞)까지 오른 것이 평생의 관직이었다.
병난으로 인해 피란 온 사족(士族)들이 식량을 구걸할 때마다 의복과 식량을 공급해 주었고, 자신의 살림은 항상 곤궁하고 퇴락하였다고 권두인(權斗寅)이 쓴 행장에 전한다.
또한 숙부 봉사공(奉事公)에게 아들이 없고 따님 한 분이 있었다. 따님이 현감 안제(安霽)에게 시집을 갈 때 토지와 하인들을 넉넉히 주려고 했으나 불행하게도 시댁으로 들어가기 전에 죽었다. 그러나 호수공은 처음 주기로 한 재산을 모두 안씨 집으로 보내니 안씨 집에서는 사양하였다. 그러자 호수는 슬퍼하며 말하기를 "내가 불행하여 우리 누이동생을 잃었는데 내 어찌 차마 그 재산을 소유하겠는가(吾不幸喪吾, 吾又何忍取其財耶)"라며 끝내 안씨 집으로 돌려주었다고 한다.
향풍을 진작시키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임고서원을 복원해 백록동학규를 장려하였고, 당대의 명유였던 지산(芝山) 조호익, 여헌(旅軒) 장현광, 창석(蒼石) 이준, 모당(慕堂) 손처눌 등과 도의(道義)로서 교유했다. 숙종 31년에 향인들이 자양현에 사당을 세워 추모하였고, 호수선생실기에 모든 사적이 전해지고 있다.
장여헌은 호수를 조문한 제문에서 "호수공이 고을에 있을 땐 각박한 자는 부끄러움을 깨달았고 게으른 자는 마음을 일으킬 것을 생각하였다. 선을 행하는 자는 믿는 곳이 있어서 스스로 그치지 아니하였고, 악을 짓는 자는 두려워하는 바가 있어서 감히 방자하지 못하였다(公在鄕閭, 薄夫有恥, 懦夫思作, 爲善者有所恃而不自沮, 爲惡者有所憚而不敢恣)"라고 한 말에서 호수공의 기상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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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혼 樓亭 .14] 예천 호명면 약포
정탁의 읍호정
나라걱정 잠 못드는 老臣의 충정 고이 서려
<제자·자문: 養齋 이갑규>
좌·우의정 두루 거치며 45년간 국가 경영 신명
임진왜란땐 유성룡과 함께 구국의 혼 불태워
/글·사진=김신곤기자 singon@yeongnam.com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읍호정이 내성천의 맑은 물과 강을 끼고 도는 산을 바라보고 앉아 있다.
임진왜란 때 구국의 혼을 불태운 인물 가운데 이 지역 출신으로 청사에 길이 빛나는 분은 서애 유성룡과 약포(藥圃) 정탁(鄭琢·1526~1605)이다.
약포는 부친과 조부가 덕을 숨기고 벼슬을 하지 않은, 이른바 은덕불사(隱德不仕)한 청빈가 출신이었다. 그는 9세에 모친을, 21세에 부친마저 잃은 고단한 처지 속에서도 학문에 정진해 27세 때 생원시에, 33세 때 대과에 급제하여 78세에 관직을 사임할 때까지 45년간 우의정과 좌의정을 두루 거치며 국가경영에 신명을 바쳤다. 서애보다 16세 연상이고 퇴계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약포는 당시 서애, 소재(蘇齋) 노수신과 함께 학문과 경륜의 최고봉인 '영남 3대가(大家)'로 칭송받았다. 중앙고속도로 예천톨게이트에서 호명면 황지리 내성천변을 따라가면 야트막한 산 중턱에 약포가 만년에 머물렀던 읍호정(湖亭)이 나온다. 입덕루(入德樓)와 도정서원(道正書院)이 보이고 오른쪽 강 언덕에 읍호정이 내성천의 맑은 물과 눈부시게 흰 백사장을 향해 앉아있다. 여기가 바로 조선 중기의 대학자요, 경세제국(經世濟國)의 우뚝한 명재상인 약포가 정자를 짓고 생애를 정리한 곳이다. 본래는 76세 무렵 고평의 거처하는 집 서재를 망호재(望湖齋)라 하였고 동쪽 호반에 초당을 엮어 정자를 앉힌 것이 읍호정이었다. 현재의 건물은 1964년에 중건했다.
#읍호정은 구국의 노신이 거처한 곳
'평생의 독서는 늘 시국의 어려움을 구제하길 헤아렸는데(讀書常擬濟時艱), 벼슬살이에 분주하여 얼마나 오랜 세월 보냈던가(奔走紅塵幾暑寒), 왜구의 난리 칠년 동안 한가지의 계책도 내지 못하고(寇亂七年無一策), 도리어 백발이 되어서야 비로소 고향 산에 돌아온 것이 부끄럽도다(還白髮始歸山)'. 읍호정 마루에 들어서면 우회(寓懷: 회포에 부쳐)라는 이 시의 현판이 걸려 있다.
약포는 우의정 때 나이 70이 되어 누차 사임하려 했으나 선조대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제세광민(濟世匡民)을 당부하였다. 78세에 사임하여 고향산천에 돌아와 자신의 임무를 다하지 못했음을 스스로 경책(警責)한 이 시를 보노라면 나라에 대한 끝없는 충정과 그의 겸손에 머리가 숙여질 따름이다.
약포는 만년에 우국의 수심을 안고 내성천에서 배를 저어 고기잡이로 소일을 하며 고향의 민중들을 보살폈다. 낚시하던 어느 날 한 초립동이 큰 소리로 배를 불러 노인의 등에 업혀 배에 올라탄 후 강을 건너면서 "요즘 이곳에 사는 약포대감이 어떻게 소일하고 지내는가" 하고 물었다. 노인은 "예, 이렇게 낚시 하다 길손을 업어 건네주기도 하면서 지냅니다"라고 하자 초립동은 깜짝 놀라면서 대감을 몰라본 죄를 사죄했다. 이는 평소 약포가 얼마나 겸손한 성품인가를 전해주는 유명한 일화이다. 또한 그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대과에 급제했으나 부인 반(潘)씨마저 이를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다가 약포가 사당에 고할 일이 있다고 할 때 비로소 알았다고 한다.
약포는 낙향 때 나라에서 많은 은전(恩典)을 내리려 했지만 국난을 겪은 어려운 시기라며 이를 모두 사양했다. 그는 나라에서 굳이 은전을 주려 하자 낙동강 관리권을 받아와 지금의 고평들을 개간해 이 일대 사람들의 농토 기반을 마련했다고 한다. 그리고 협동자치규약인 고평동계약문(高坪洞契約文)을 만들어 지역 사회풍속을 순화시켰는데, 이것이 예천향약의 근원이 되었다.
읍호정에는 동계(桐溪) 정온이 쓴 기문과 후손인 정희섭이 쓴 중건기가 있고 퇴계 이황, 윤두수, 김응조 등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문화재 도굴범들 때문에 모각을 걸어두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聰明博學했던 당대의 대 선비
약포는 일찍이 8세 때 글을 깨우쳐 능통할 정도로 영민하였다. 13세 때 금사사(金沙寺)에서 함께 공부하고
조선 선조 37년 왕명에 따라 약포의 79세때 모습을 그린 영정(보물 제487호).
약포 정탁이 낙향하여 여생을 정리한 읍호정.
훗날 대사헌을 지낸 백담(栢潭) 구봉령은 "약포는 당시 학질을 앓고 있으면서도 태음력의 계산법인 기삼백(朞三百)을 혼자 풀어내어 음력의 윤달과 윤년의 법칙을 통달했다"고 극찬했다.
그는 삼가현감인 중부(仲父) 정이흥에게 수학했고 훗날 퇴계 문하에 나아가 성리철학의 요체를 체득했다. 진주교목으로 근무할 때는 남명 조식 선생에게 나아가 천길 절벽같이 서있는 기상(壁立千氣像)을 보고 평생의 절개를 세우게 된다. 그는 또한 성리학뿐만 아니라 경학과 천문, 지리, 상수(象數:음양, 복서(卜筮)), 병법에 두루 박통했다. 특히 그가 깊이 연구하여 제시한 고금팔진육화법(古今八陣六花法)은 병법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탁견으로 꼽히고 있다. 그는 중국 사신으로 갔을 때 한 대신이 약포를 보고 "진인군자(眞人君子)로 만민을 구제할 상"이라고 하였고, 작은 체구였지만 총명과 박학으로 기민한 판단을 내릴 때는 중국 대신들도 경탄했다.
약포는 임란 중에는 망우당 곽재우, 김덕령, 박명현, 한백겸, 사명대사, 홍경신, 변홍달 등 30여명의 인재를 발굴하여 천거하는 등 임란 승리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나중에 분조(分朝) 받은 세자를 호종(扈從)할 때는 희천을 지나 설한령(雪寒嶺)에서 풀밭에 자고 비바람 속에서 먹는, 초숙우찬(草宿雨餐) 가운데서도 군사모집과 작전지휘, 의병장 격려 등 국사를 흔들림 없이 처리했고, 면밀히 파악한 시국수습책을 행재소(行在所:임금이 임시로 머문 곳)로 보냈다. 이러한 와중에 당시 상황을 남김없이 기록한 것이 바로 용사일기이다.
약포의 저서는 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과 용사일기, 임진기록, 용사잡록, 약포의 저술을 총괄 정리한 약포 선생 문집 7권4책과 속집 4권2책이 전한다. 용사일기는 임진년과 계사년에 걸친 난중기록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저술은 약포의 셋째아들 청풍자(淸風子) 정윤목이 임진왜란 중 부친을 수행하면서 정리한 것이다.
☞약포의 인품
소신·대의 관철 위해 목숨 걸고 바른말 이순신 생명 구해
약포는 원칙과 대의명분에는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직언했지만, 대범한 성품과 바다처럼 넓은 도량을 가진 대학자였다.
그는 이조참판시절 조정이 부정축재자 윤의중을 형조판서로 임명하자 율곡 이이와 함께 그 부당함을 아뢰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도리어 이조(吏曹)를 문책하려 하자 사임으로 대항하였다. 또 명종 때 문정왕후의 권세를 등에 업고 20년 동안 전횡을 일삼는 윤원형의 부당함을 서슴없이 탄핵하였다.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 시절 향실(香室)에서 숙직을 하고 있을 때 문정왕후가 불공을 드리기 위해 향실에 있는 향을 갖고 오라고 명하자, 약포는 "이 향은 종묘사직에 쓰는 물건입니다" 하고 명을 따르지 않았다. 이에 문정왕후는 진노하여 그를 하옥하라고 명했지만 약포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고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은 전하고 있다.
이순신에게 사형이 구형되었을 때 약포가 목숨을 걸고 구명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순신은 훗날 "나를 추천한 이는 서애요, 나를 구해준 이는 약포"라고 말한 바 있다. 또 명나라에서 원군온 이여송이 임진강에서 왜적에게 패한 책임을 물어 그의 참모인 두사충을 참수하려 하자, 약포는 "전시에 인재를 참수하면 불리하다"며 구명했다. 또 노수신, 이산해, 황정욱, 권율, 김덕령 등을 옥사에서 사면시키거나 감형토록 했다. 그는 이 같이 국가를 우선적으로 생각하였고 인재를 귀하게 여긴 대담하고도 선지적인 인물이었다.
퇴계 문인으로 동인에 속했던 약포는 동서붕당이 첨예하게 대립되고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파당이 지는 정국 속에서도 중립을 취하며 서인의 영수 오음(梧陰) 윤두수와 도의지교(道義之交)가 두터웠다고 연보는 기록하고 있다.
[한국의 혼 樓亭 .13] 구미 해평면 호와
류현시의 '호와정'
"삶은 올곧음" 대쪽같은 선비정신 면면히
(제자·자문: 養齋 이갑규)
퇴계학맥 전승 大문장가…후학양성에도 큰 공헌
벼슬에 연연 않고 초야서 한평생 학문·덕성수양
임하댐 수몰로 안동 무실서 옮겨져 정자 복원
/글·사진=김신곤기자 singon@yeongnam.com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에 있는 호와정 전경.
조선조 500년을 지탱할 수 있었던 원동력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초야에 묻힌 선비들의 대쪽같은 올곧음의 지조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옛 사람들의 학문은 자신의 심성을 갈고 닦아 덕성을 완성함에 전력함으로써 남을 교화시키는 길과 오직 자신의 출세만을 위하여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공부하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논어'에는 전자를 '위기지학(爲己之學)', 후자를 '위인지학(爲人之學)'이라고 하였다. 고인들은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과거공부에 자신의 인생을 걸기도 했지만, 학문의 본질이 과거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면 즉시 초야로 돌아와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면서 자신의 완성과 후진양성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위기지학에 몰두한 선비들은 시대의 정신을 이끄는 사표였다. 상소를 올려 임금을 나무라거나 국정에 대한 타개책을 제시하기도 하였고, 관리들을 질책하면서 사회를 정화하는 큰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호와정은 爲己之學의 본거지
조선중기를 살았던 호와(壺窩) 류현시(柳顯時·1667~1752)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는 생원시에 일등으로 합격했지만 벼슬의 뜻을 접고 안동 박실 호곡(壺谷)으로 돌아와 후학을 가르치며 일생동안 경학을 실천했다. 호와정(壺窩亭)은 바로 그가 일생동안 학문과 수양을 하면서, 한 지역사회의 사표역할을 한 본거지였다.
호와정은 현재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 전주류씨 수남위파의 호와종택과 나란히 앉아있다. 수남위파는 안동 무실 수남에서 박실로 옮겨 400여년을 세거하다가 1987년 임하댐이 수몰되면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호와의 12세손인 류해종씨(77)가 호와의 유덕을 기려 다시금 호와정을 복원하고 현판을 걸었다. 호와정에는 이용구가 지은 호와정기문이 있다. 건물 정면의 '호와정(壺窩亭)'이라는 현판글씨는 근세인물인 김진동이 썼고, 마루 위에 붙어있는 '호와(壺窩)'라는 현판은 죽초(竹肖) 김택진의 글씨다.
호곡에 둥지를 튼 류현시는 자호를 호와라고 지었다. 그의 집 부근에는 푸른 비취색의 자단향(紫檀香) 한 그루가 그늘을 이루고 있었다. 호와는 이 그늘을 향기로운 처마, 즉 향첨(香)이라 명명하고 날마다 그 아래서 시를 읊조렸다. 꽃피는 아침, 달뜨는 저녁(花朝月夕)이 되면 당대의 큰 선비였던 상사공(上舍公) 류헌시, 족질(族姪) 되는 박재(樸齋) 류석두, 재종질 되는 용와(窩) 류승현 등과 함께 학문을 토론하니 당시 선비들은 "하늘의 덕성(德星)이 이들의 일문(一門)에 다모였다"고 칭송했다.
#당대의 文行
호와는 특히 한부의 논어를 애독하였다. 그는 "나는 많은 서적을 탐독하기보다는 논어 한부에서 득력(得力)하였다"고 논어를 통해 힘을 얻고 있음을 스스로 강조하였다.
그는 당시 안동군지 편찬에도 크게 공헌했다. 저술과정에 관청과 서로 거슬리는 문제가 있어도 이에 개의치 않고 공정한 저술에 전력을 다했다. 도훈장(都訓長: 학교의 교관)으로 추대되어서는 학생들을 계도한 공이 컸다. 이에 후임으로 온 고재(顧齋) 이만, 눌은(訥隱) 이광정도 이어가며 호와의 교육방침을 그대로 전승해 따랐다. 조정에서는 호와의 이러한 공로를 인정해 수직(壽職: 80∼90세의 학덕 있는 자에게 내리는 벼슬)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은전을 내려주었고 또한 아버지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까지 삼세(三世)를 추증하여 은전을 내렸다.
호와가 교유한 인물은 당대의 명현이었던 하당(荷塘) 권두인, 창설(蒼雪) 권두경, 밀암(密庵) 이재 등이다. 이들 가운데 하당과 창설은 "호와의 문행(文行)이 우리고을에서 제1인자"라고 칭송하였다.
류해종씨가 대청마루에 앉아 당대의 대선비였던 호와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
논어와 심경, 근사록을 깊이 연구한 호와는 만년에 체득한 경지가 매우 높았다. 그는 일찍이 밀암과 태극(太極)에 대한 요지(要旨)에 대해 논쟁이 붙으면 늘 서로간의 의론이 합치되지 않았다. 그러나 밀암은 훗날 사람들에게 "호와의 설이 맞다"고 하였고, 당대의 학자 김성탁, 조덕린 등도 감탄하였으니 그의 학문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하다. 호와는 또한 일생을 초야에 묻혀 살면서 종일토록 꼿꼿이 앉아 수양에 전념했다.
당시 세인들은 퇴계학맥을 잇는 명현 가운데 상사공과 박재, 용와, 호와 네 명을 지역의 대원로인 호곡사로(壺谷四老)라고 불렀고, 그들의 풍류와 운치는 '세상 밖에서 노닌 분들'이라고 말하였다. 대산(大山) 이광정은 "문장은 후생들의 표본이 되었고 세상의 도를 붙들어 세운 분"이라고 호와를 극찬했다.
#삶은 올곧음이다
그는 마지막 운명을 할 때도 평소의 편안한 안색으로 논어의 '사람의 삶은 곧음이다(人之生也直)'라는 구절을 큰 소리로 암송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임종을 지켜본 노애(蘆厓) 류도원이 쓴 그의 행장에 기록되어 있다.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사람의 도리와 덕성을 수행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 이런 큰 선비가 있었기에 당시 사회는 법보다 예의가 더 중시되고, 예의와 염치를 잃으면 스스로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회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인간의 도리는 내팽개치고 끝없이 자리와 권세를 탐하며 어른이 어른답지 못한 혼란한 세태와는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호와의 학맥은 퇴계학맥 중 학봉 김성일을 연원으로, 당시 영남소수(嶺南疏首)인 백졸암(百拙庵) 류직의 제자이다. 호와의 학문은 아들 박촌(博村) 류택현, 박촌의 고손인 가재(嘉齋) 류치교, 가재의 아들 박라(博羅) 류긍호로 계승되면서 집안의 문학재사(文學才士)가 끊이지 않았다.
박라 류긍호는 호와의 6세손으로 정재(定齋) 류치명의 제자이고 응와(凝窩) 이원조의 생질이며 갈천(葛川) 김희주의 손자사위이다. 그는 문집 4책과 경행일기, 병인란일기, 반중문견록 등을 전하고 있다. 이후에도 만하(萬下) 류연목, 동화(桐華) 류동근 등 문행이 끊이지 않았다. 호와의 저서는 호와집 두 권만 세상에 전한다. 나머지 저서들은 1700년경과 정조연간 등 두 번의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었다.
"어쩔 수 없이 고향 떠나왔지만 先代의 정신 변함없이 지킬 것"
◇호와 12세손 류해종씨
호와의 12세손인 류해종(柳海鍾)씨는 임하댐 수몰지역인 안동무실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선대의 정신을 변함없이 지키고 있는 류씨의 산증인이다.
지금으로부터 19년 전 일가친척들과 함께 이곳에 정착하게 된 연유와 그동안의 삶을 찬찬히 얘기하는 그의 말속에는 간절한 수구초심(首丘初心)이 켜켜이 묻어 있었다.
그는 경북의 여러 곳을 마다하고 굳이 이곳에 정착하게 된 이유에 대해 "퇴계이전에는 선산이 인물의 중심지였다는 점과 70여 호가 함께 살 수 있는 경작지가 있고 배산임수의 지형을 갖고 있는 데다, 안동 임하댐에서 흘러내려오는 낙동강 물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고향과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이곳에 정착한 이후 일가친척 자손 가운데 행정고시 합격자와 박사 몇 명을 배출하는 등 자손들이 번창하고 있다"고 만족해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정착한 지 20년이 다 되어가지만 흉금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어 늘 죽마고우가 그립다"며 고향을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숨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