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孝寧大君)
경기도 과천시 연주암에 소장되어 있는 초상화. 진본이 아니라 옮겨 그린 그림이지만 조선 전기 인물들 중 초상화가 전해지는 몇 안되는 인물이라 가치가 높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1호.
1396년 1월 6일, 음력 1395년 12월 11일 ~ 1486년 6월 12일, 음력 5월 11일
조선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의 둘째아들. 그러나 요절한 형이 3명이 더 있으니, 태어난 순서대로 하면 다섯째 아들이다. 양녕대군의 동생이고, 세종의 형. 이름은 이보(李補). 본래는 호(祜)였는데 태종에 보로 바꾸었다.
1. 폐 세자 문제
양녕대군이 폐세자될 때 세자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태종은 효령대군이 지나치게 점잖은 성격이었고, 술을 못 마시기 때문에 술 마실 일이 많은 왕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해서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다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효령대군은 술을 입에 대지도 못했지만 세종은 '적당히 마시는' 정도였다고. 당시 태종의 교서를 봐도 '충녕은 술도 적당히 마신다.'고 표현하고 있지, '잘 마신다.'고 표현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것은 영특했던 충녕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는 설이 있다. 애초에 장자냐 아니냐가 가장 중요한 쟁점이었고, 결국 장자를 폐 세자하기로 결정한 상태에서 잘난 셋째 두고 굳이 둘째에게 왕위를 물려줄 필요는 없었으니. 실록에 효령대군이 연회에 참석한 기록도 적지 않게 나오는 걸로 봐서 정말로 술을 못했던 것 같지도 않다.
야사에 의하면 효령대군은 번뇌를 씻기 위해 절에 들어가서 북 가죽이 늘어지도록 북을 쳐댔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효령대군 북 가죽 같다."는 속담이 생겨났다고 한다.
또한 야사에서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이 폐 세자 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자 곧바로 책 펴고 공부하는 척하는 걸로 나온다. 하지만 딱히 정치적 배경도 없는 효령대군이 과연 정말 그러했을지도 의심이 된다.
2. 일화
실록에는 태종이 효령을 두고 "내 말을 들으면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할 뿐이므로, 나와 중궁(中宮)은 효령이 항상 웃는 것만을 보았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임기응변(臨機應變) 이였을지도 모른다.
왕자군 시절에 특별히 사건은 없는 편인데, 태종 10년(1410)에 인녕부(仁寧府) 행수(行首) 이호(李護)가 효령대군에게 청탁하여 호조의 벼슬을 얻었다가, 태종에게 들통이 난 사건이 있다. 태종은 어린아이를 통해(효령대군은 당시 14살) 이름을 얻으려 했으니 죄를 주어야 하지만, 이름을 얻으려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면서 죄를 묻지는 않고 파직만 시켰다.
그밖에 효령대군의 가신, 가노들이 비리를 저질러서 문제가 된 사건이 조금 등장하는데 조선시대 왕자들에게는 매우 흔한 일이다.
3. 불교
불교를 믿어서 여러 차례 법회를 열고 절을 중건했기 때문에, 불교를 이단시하는 유학자 관료들에게 자주 비판을 받았다. 실록의 효령대군 관련 기사는 거의 대부분 법회 주관이나 불사, 절 중건 등을 한 일로 신하들에게 까이는 것.
일부에서는 승려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 승려가 되지는 않았다. 아래 항목을 보자 아들이 7명 손자가 33명 증손자 109명이시다 이 시기를 다룬 코믹 사극 영화인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선 진짜 머리 깎고 출가해서 스님이 된 걸로 나오는데, 그냥 개그요소인 듯. 안 그래도 불교에 심취해서 신하들에게 비판을 많이 받았는데, 머리까지 깎았다가는 정말 큰일 났을 것이다(…). 건국 초 무학대사가 그나마 이성계와 친했기 때문에 조선 초기에 그나마 불교 좋아하는 걸 봐준 거지, 조선은 근본적으로 유교를 떠받들고, 불교를 무시하는 나라였다. 폐위될 정도의 상황이 아닌데 왕자가 스님이 된다면 엄청나게 위험한 일이었을 것이며, 후손까지 스님이 뭔 후손?
그냥 불교에 심취한 거사로 지냈다. 왕자가 출가를 했다면 정말 큰일이라 실록에 실렸어야 하는데 실록에는 그런 기사가 없다. 아니, 있기는 하다. 선조실록에 '효령 역시 가사(袈裟)를 걸치고 불문(佛門)에 몸을 의탁하고 말았다.'는 구절이 있기는 한데, 이는 사관의 평이고 양녕대군 세자 양보설이 같이 실려 있어 사관이 야사를 믿고 썼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살아 있을 때 계유정난이 벌어졌으나, 계유정난을 지지한 양녕대군과는 달리 효령대군 본인은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아서 그냥저냥 넘어갔다. 그나마 당시 왕실에 관여한 것이라면 수양대군과 함께 단종의 왕비를 간택하는 것에 관여하거나, 세조가 즉위한 뒤 양녕대군과 함께 단종에 대해 처벌할 것을 주장한 정도. 이것도 전자는 단지 왕실의 어른으로서 한 일에 가깝고, 후자는 양녕대군의 행동에 묻어간 것. 이 외에는 효령대군이 정계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흔적이 없다.
세조 생전 그 유명한 매월당 김시습의 설법을 듣고 싶었으나 워낙 세조를 싫어하는 김시습(당시에는 머리 밀고 떠돌이 승려로 살아갔다.)이 가지 않으려 하자 효령대군이 설득하여 가게 한 이야기가 있다.
4. 장수
그 당시에 90세까지 장수했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도 엄청나게 오래 살았던 나이지만. 실록에 있는 효령대군 몰기에는 날 좋은 날에는 가족 연회를 열면서, 예순이 넘은 효령대군의 아들들이 아흔이 다 돼 가는 아버지 앞에서 춤을 추었다는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태어난 해인 1396년은 태조 이성계가 즉위한 지 4년째 되는 해이고, 죽은 해인 1486년은 성종의 25년 재위 기간 중 17년째에 해당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고구려 태조왕이 있지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에 효령대군 묘가 방배역 아주 가까이에 있다.
다시 말해서 조선 전기의 왕 9명의 재위기간을 합친 수준으로 오래 살았다. 조선 왕족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이자 전 세계 왕족에서도 이처럼 90대까지 사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자세한 건 실제로 장수한 왕들 항목을 참고하자.
세월이 훨씬 이전, 효령대군보다 무려 2500년 이상 이전에 살던 고대 이집트 파라오인 람세스 2세가 만 90세까지 살았던 경우도 있고 유럽에서도 프로이센 왕이었던 빌헬름 1세가 만 91살을 살았고 유럽 왕족에서 가장 오래 산 필리프 에른스트라는 독일에 있던 호엔로에-발덴부르크-쉴링스퓌어스트의 제후가 만 96살까지 산 경우가 있으며 여담인데 중국도 역사상으로 가장 오래 산 군주가 건륭제로 만 88살, 일본은 히로히토 덴노가 만 87살까지 살았었다. 물론 그들은 군주였고 효령은 아니었지만 그마저도 히로히토는 20세기에 살면서 늘그막에는 수혈까지 하면서 식물인간 상태로까지 끈질기게 목숨을 붙들어놓은 거지만 이 사람은...
당장 이분은 할아버지 태조 5년에 태어나 큰아버지 정종과 아버지 태종의 즉위를 지켜봤고 물론 이때는 어렸기에 기억은 없었을지도.., 이후 동생인 세종대왕, 조카 문종, 종손 단종의 즉위와 그 이후의 수양대군이 벌인 막장 짓을 두 눈으로 봤으며, 이후 예종과 성종의 즉위와 세종대왕의 고손자인 연산군의 탄생까지 지켜보고도 10년을 더 살았다.. 그야말로 조선 초기 역사의 산 증인.
성종 조까지 장수한 덕분에 성종실록에도 효령대군의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종실의 가장 큰 어른인지라 매년 잔치를 베풀고 비단을 하사했다는 기록들로 보아 성종도 굉장히 그를 살핀 듯.
병에 걸렸다는 기록도 있고, 그리 건강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는데 대단히 오래 살았다. 아마 불교식으로 웰빙한 삶을 살아서 그런 듯. 정치판에서 얻는 스트레스만큼은 적은 삶이어서 그랬을 가능성도 많다.
5. 묘지
효령대군은 90세 천수를 다하고 1486년(성종 17) 5월 11일(음력)에 세상을 떠났다. 능은 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부인인 예성부부인과 함께 예장되었고, 묘소 옆에는 청권사(사당)가 있다. 위치는 서울 지하철 2호선 방배역에서 5분 거리에 있다. 이례적으로 서울 그것도 강남 한복판에 묘소가 자리 잡고 있다. 몇 백 년 후를 내다본 효령대군의 선견지명 서울메트로 - 뱅뱅사거리 구간의 도로가 효령로가 된 것도 효령대군묘 덕분이다.
5. 외모
초상화가 전해지는 몇 안 되는 조선 전기 인물 중 하나. 부드러워 보이는 인물됨과는 달리 제법 덩치도 있고 수염도 야성적이다.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의 피를 이어받아서 그런 듯하다. 이 초상화에서 태종이나 세종대왕, 양녕대군의 얼굴도 추측해볼 수 있다. 태종이 일찍 죽은 넷째 아들 성녕대군을 두고 "성녕은 내 아들 중 유일하게 얼굴이 다른 녀석이었다."라고 회상하는 기록이 있으며,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은 얼굴이 너무 닮아서 양녕이 장난을 칠 때 "나 효령이다!"라고 구라를 쳤다는 기록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록들과 태조 이성계, 그리고 조카가 되는 세조의 초상화로 추리해 보면 태종과 세종의 얼굴도 저 초상화와 비슷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즉 덩치 있고 풍채가 당당한 야성적인 스타일.
6. 자손경기도 과천시 연주암에 소장되어 있는 초상화. 진본이 아니라 옮겨 그린 그림이지만 조선 전기 인물들 중 초상화가 전해지는 몇 안 되는 인물이라 가치가 높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1호. 조선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의 둘째아들. 그러나 요절한 형이 3명이 더 있으니, 태어난 순서대로 하면 다섯째 아들이다. 양녕대군의 동생이고, 세종의 형. 이름은 이보(李補). 본래는 호(祜)였는데 태종 때 보로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