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의 인문학 열하일기(熱河日記)
"근자에 문풍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박지원의 죄다."
정조는 당시 사대부들의 문풍을 어지럽힌 배후로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지목하고, 연암에게 순정한 고문(古文)체로 글을 지어 올리면 음직을 내리겠다고 회유했다. 그러나 졸지에 어떻게 순수하고 바른 글을 짓겠느냐며, 그것이 더 큰 죄를 짓는 것이라는 핑계를 둘러대면서 연암은 끝내 어떤 반성도, 전향도 거부한다. 일화에서 보듯『열하일기』는 정조의 시대뿐 아니라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는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다양한 사유를 촉발하는, 대단히 위험하고 강렬한 책이다.
살아있는 글
연암 박지원에게 글이란 남을 아프게도 하고 가렵게도 할 수 있는, 한마디로 '살아있는 것'이어야 했다. 따라서 열하일기에는 비장에게 들은 이야기, 하인들과 나눈 대화, 중국 선비들과의 필담 등 온갖 잡다하고 품격 없는 글들이 가득하다. '허생전'이나 '호질'처럼 현실을 풍자한 스토리가 있는가 하면, '호곡장'이나 '일야구도하기'처럼 사유의 깊이를 가늠하게 해주는 작품들도 포진해 있다. 아마도 영민한 정조는 연암의 문체에 함축된 사유의 반시대성을 꿰뚫었던 것 같다.
『열하일기』는 모두 26권 10책으로 『연암집(燕巖集)』에 수록되어 있다. 연암이 44세 때인 1780년(정조 5), 삼종형 명원이 청나라 고종 건륭제의 칠순 잔치 진하사로 북경에 가게 되자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수행하면서 곳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당시 사회 제도와 양반 사회의 모순을 신랄히 비판하는 내용을 독창적이고 사실적인 문체로 담았기 때문에 당시 위정자들에게 심한 배척을 당했다. 저자의 사후 아들 종간(宗侃)이 편집하여 57권 18책의 필사본으로 전하다가 초간본은 김택영에 의해 1900년에 원집이 나오고 1901년에 속집이 나왔다. 이 초간본은 고활자본으로 되어 있고 김택영의 관점에서 문장을 골라 실은 것이다.
연암체(燕巖體)
책의 구성은 크게 2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권부터 7권까지는 여행 경로를 기록했고 8권에서 26권까지는 보고 들은 것을 한 가지씩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 중 '도강록(渡江錄)'은 압록강에서 랴요양(遼陽)에 이르는 15일간의 기록이다. 굴뚝과 구들 등 여염집의 구조와 배, 우물, 가마, 성(城)의 제도 등 배울 만한 것들을 자세히 서술하고, 모든 물건을 이롭게 쓸 수 있어 백성의 생활이 윤택해져야만 덕을 바르게 할 수 있다는 이용후생의 주장을 편 글로 유명하다.
한편 이 안에 실려 있는 단편 소설 『호질』은 중국인의 작품임을 빙자해 공격의 화살을 피하면서, 백이·숙제 사당 참관기와 함께 양반 사회의 모순과 명분론에 대해 강한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은 연경에서부터 열하로 가기까지의 기록으로 연경에 겨우 도착한 사신 일행이 열하로 피서가 있는 황제를 좇아 밤을 새워 달려가는 동안에 겪은 숱한 고생을 현장감 있게 서술하고 있다.
'옥갑야화(玉匣夜話)'는 옥갑이라는 여관에서 비장들과 나눈 여러 이야기를 기록한 것으로,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임을 빙자한 『허생전』을 이에 실어 그 나름의 부국강병책을 역설하고 있다.
이용후생(利用厚生)
그 밖에도 음악, 미술, 건축, 과학, 교통제도까지 그가 보고 듣고 만난 것들에 대한 자세한 서술과 그에 대한 그의 견해를 만날 수 있다. 연암은 이 책을 통해 북학파의 사상을 역설하고 동시에 구태의연한 명분론에 사로잡혀 있는 경직된 사고방식을 효과적으로 풍자하기 위해 사실과 허구의 혼입이라는 복합 구성을 도입했다. 즉 여정과 관련시켜 삽입해놓은 일화들은 보고 들은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필요에 따라 창작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험적 구성은 당시에 이미 연암체라고 일컬어진 정통을 벗어난 문장과 함께 기문(奇文)으로 지목받게 하는 요인이 되어, 정조를 중심으로 하는 수구세력이 일으킨 문체반정의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열하일기의 문체가 정조에 의해 문제가 된 후 정조의 명에 의해 지어올린 '과농소초'·'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는 정통 고문으로 쓴 글로서 이 또한 그의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훌륭한 저작이라 할 수 있다.
연암의 외모에 대해서 그의 아들인 박종채가 『과정록(過庭錄)』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보면, 큰 키에 살이 쪄서 몸집이 매우 컸으며 얼굴은 긴 편이었고, 안색이 몹시 붉었으며 광대뼈가 툭 불거져 나오고 눈에는 쌍꺼풀이 있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현재 남아있는 연암의 초상화와도 거의 일치한다. 또한 그는 목소리가 몹시 커서 그냥 말을 해도 담장 바깥의 한참 떨어진 곳까지 들릴 정도였다고 한다. 원래 자신의 중년모습을 그린 초상화가 한 점 있었지만 연암은 그 초상화가 본래 자신의 모습에 7할도 못 미친다며 없애버리게 했고, 다시 그리자는 아들의 간청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경계인(境界人)
연암과 부딪히는 모든 것들은 살아서 움직인다. 고정된 표상의 말뚝에서 이탈하여 자유롭게 변이하면서 그 무엇의 경계에 서있는 연암, 그래서 연암 열풍을 몰고 온 고미숙은 그를 경계인이라 칭한다. 경계인이란 이방인이라는 의미를 가지기도 하지만 넘나드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고미숙은 후자를 뜻하고자 경계인이라는 용어를 선택했다. 열하일기를 읽다보면 연암의 생각이 들려온다. 연암은 우리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며 다층사고를 하라고 권하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의 가운데에 진리가 있고 도가 있다는 것이 연암의 생각이다.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 열하일기를 통해 오늘의 우리가 배워야 할 연암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연암 박지원의 저서 [열하일기(熱河日記)]에는 그가 요동강을 아홉 번 건너면서 느꼈던
깨달음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살아가면서 어려운 곤경에 처했다 하더라도 실패를 각오한다면 조금도 두려워할 게 없다는 깨달음입니다.
눈과 귀를 막고서라도 오직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필요한 난관에 처했을 때 이 이야기를 떠올리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