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용영(壯勇營)-정조임금의 정치적 기반
장용영 설치와 군사개혁
군사훈련을 위한 동장대(연무대)군사훈련을 위한 동장대(연무대)
정조는 1788년(정조 12년)에 장용영(壯勇營)이라는 새로운 군사조직을 창설했다. 이는 왕조 국가의 무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노론과 외척세력의 위협 속에서 즉위한 정조가 개혁정치를 굳건하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친위군대가 필요했다.
즉위 초 정조는 국왕의 호위군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숙위소를 설치하여, 숙위대장에는 자신의 측근이었던 홍국영을 임명했다.
숙위소는 궁궐을 지키는 일은 물론 도성을 수비하고 점차 오군영까지 총괄하는 최고 군사령부의 역할을 수행했다. 숙위소는 병조나 오위도총부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국왕의 독자적인 직할부대였을 뿐이지만 홍국영의 권력은 숙위소의 위상을 통상적인 국방체계의 상부로 만들었다. 그러나, 숙위소는 홍국영과 더불어 그 정치적 역할을 마감했다. 정조는 1799(정조 3년) 홍국영을 축출하고 숙위소를 혁파했다.
정조는 국왕 호위군 체제를 개혁하여 1782년에 장용위(壯勇衛)를 신설했다. 무예와 통솔력이 뛰어난 무관 30명으로 출발한 장용위는 1787년(정조 11년) 50명으로 그 인원이 보강되면서 장용청(壯勇廳)으로 승격되었고, 그 이듬해인 1788년에 장용영으로 개편되면서 소위 '장용영의 시대'가 열린다.
오위 체제로부터 시작해서 임진왜란 이후 오군영(훈련도감, 총융청, 수어청, 어영총, 금위영) 중심으로 재편된 조선의 군사제도에 새롭게 '장용영'이라는 군사조직을 신설한 것이다.
원래 조선 초기의 군제는 오위 체제였다. 전국적으로 군사조직을 5개로 나누고 그 산하에 지방군을 편제시키는 방식의 오위 체제는 주로 북쪽 국경과 남쪽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군제였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실제 전쟁이 발발하자 기존의 오위 체제가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조선 후기의 국왕들은 실제로 전쟁에 활용할 수 있는 군대조직을 하나씩 만들기 시작하여 5개의 군영이 탄생했고, 특히 인조반정 이후 왕권을 지키는 역할까지 이들 군사조직에게 부여됨으로써 조선의 군제는 오군영 체제로 재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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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오군영마저도 당쟁과 무관할 수 없었다. 이들 군사조직들 또한 특정 정파의 이해관계에 긴밀히 얽혀있고 군령체제는 무질서하게 되었다.
따라서 정조는 개혁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 자신을 지켜줄 별도의 군사조직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정치개혁의 결과 기득권을 상실하게 되는 외척과 권신들은 결코 설득만으로 그동안 누려온 특권을 포기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정조는, 이들 기득권층의 저항을 분쇄할 수 있는 친위 군사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장용영을 신설했던 것이다.
장용영 신설과 더불어 정조는 대대적인 군제개혁에 돌입했다. 우선 정조는 조선 초기의 오위 체제를 복구하고자 했다.
그는 임진왜란 이후 오군영이 설치되면서 '군사조직이 나뉘어졌음(分軍)'을 비판했다.
오군영의 등장과 더불어 군령이 일원화되지 못한 채 모든 군사적 조치가 번잡하게 되었다고 판단한 정조는 병조판서 중심의 통합적인 군령체제를 수립하고자 했다. 이에 정조는 오군영의 독자적 명령체계를 불식하고 전군을 오위 체제로 재편하는 동시에 국왕의 명령을 받아 병조판서가 전군을 지휘할 수 있도록 군제를 개혁했다.
정조는 군사조직의 인사권 문제에 있어서도 병조판서에게 일원화하여 실질적인 임면권을 부여했다.
당시 무관에 대한 인사에 있어서 각 군영대장에게 추천권이 주어졌는데, 정조는 이를 일소했다.
이에 따라 그 동안 군사조직에 대해 실질적인 인사로부터 소외당해 있었던 병조가 인사권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오군영의 대장들이 반발했지만, 정조는 단호하게 대응했다.
정조는 각 군영의 군영대장들이 단일안으로 올리던 인사추천을 3인안으로 올려 실질적으로 병부에서 선택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이후 군영대장들이 각종 편법을 동원하여 인사권을 유지하고자 했지만, 정조는 이를 엄격하게 제지함으로써 인사권은 실질적으로 병조판서에게 귀속되었다. 뿐만 아니라 정조는 당시까지 관례로 되어 왔던 훈련도감 출신자의 포도대장 임용을 금지시켰다.
무예도보통지무예도보통지
훈련도감의 중군(都監中軍)은 자동적으로 금군별장(禁軍別將) 직을 거쳐 포도대장으로 승진했던 관례를 폐지하고 그 인사권을 병조판서에 귀속시킴으로써 군사조직의 인사권을 일원화시켰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정조의 군제개혁은 군대의 조직체계와 명령체계를 단일화함으로써 외적의 침입과 내란에 신속히 대응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미 사회 기강이 무너지고 분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기득권세력이 결집되어 있는 상황에서 총체적인 군제개혁은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왕권을 수호하고 개혁정치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이와 동시에 장용영이라는 친위군사조직을 강화하는 일이 정조에게는 무엇보다도 시급한 과제였다.
장용영은 정조의 관심과 지원 속에서 그 규모가 꾸준히 확대되었고, 1793년(정조 17년)에는 장용내영과 장용외영으로 나뉘었다.
장용내영은 서울에 두고 장용외영은 화성에 두면서 총 병사가 3,450명에 달했다. 이는 당초 목표치였던 5,000명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장용영은 막강한 군사조직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특히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을 호위하고 화성행궁을 수호한다는 취지에서 설립된 장용외영은 계속적으로 개편되었고 마침내 정조 22년에 수원부의 병력을 그 휘하에 흡수하여 오위 체제로 편재됨으로써 조직이 완성되었다.
또 장용영에 설치된 사무국에서는 『무예도보통지』를 완성하는 등 조선의 무예를 진작시키기 위한 사업도 추진했다.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추진한 바 있었던 무술기예를 정리하는 사업을 장용영 내에 설치된 사무국에서 추진하도록 했다.
검서관 이덕무, 박제가 등을 중심으로 장용영 내에서 마침내 무술기예를 24가지로 체계화하는 『무예도보통지』가 완성되었고, 『병학지남(兵學指南)』 등의 병서도 인쇄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장용영의 군사들에게 다양한 새로운 무예를 보급할 수 있었다.
서장대의 장용영 군사서장대의 장용영 군사
장용영의 설치와 강화는 필연적으로 군비 문제를 발생시켰다. 신하들 사이에서는 군비를 이유로 장용영에 대한 반대 의견이 계속적으로 개진되었다.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장령 오익환의 비판으로 잘 나타난다 :
"안으로는 금군(禁軍)과 무예청(武藝廳)이 있고 밖으로는 오영의 장졸이 있어, 빠진 곳 없이 빙 둘러 호위하여 방비가 매우 견고한데, 전하는 무엇 때문에 필요 없는 장용위를 만들어서 경비를 지나치게 허비하는 길을 넓히십니까?"
정조는 장용영에 소요되는 군비 문제를 다른 군영을 축소하거나 병력을 이관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했다. 일차적으로 훈련도감 내의 무예출신과를 장용위로 넘겼으며, 금군의 700의 정액 중에서 100을 장용위로 넘겼으며, 수어청 소속의 둔아병(屯牙兵)을 장용영으로 이관시켰다. 또 병농일치(兵農一致)의 취지에 입각해 둔전(屯田)을 만들어 군비를 충당했으며, 왕실의 돈을 출자하여 각도에 곡식(장용곡)을 쌓아두고 군비에 쓰도록 했다.
이와 같은 정조의 노력으로 장용영은 견실한 군비를 갖춘 군사조직으로 운영되었다. 국왕의 사재를 내어 놓고 금위군의 정번(停番)에서 나온 비용을 충당함으로써 장용영의 군비 확충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장용영의 재정이 탄탄했다는 사실은, 정조 사후에 공노비 혁파에 따른 재정적 결손을 장용영의 군비를 이용해 보충한 것으로 잘 알 수 있다.
순조 초기에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 김씨는
"선왕의 뜻을 계승한다" 는 취지에서 공노비를 해방시켜 주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소요되는 추가로 소요되는 인건비 문제를 "장용영에 명하여 대신 지급하게 하라" 고 지시한 바 있다.
이처럼 장용영을 중심으로 군제개혁을 도모했던 정조의 계획은 무모한 것도 헛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착실히 기반을 다지면서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개혁방안을 모색했고, 또 그것을 실천했다.
결과적으로 국왕 중심의 일사불란한 군제를 확립함으로써 외적의 침입과 내란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자 했던 정조의 군제개혁은 그 빛을 보지 못한 채 세도정치의 와중에서 퇴색되고 말았지만, 그것이 개혁의 의미 자체를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정조가 했던 방식으로 군제개혁을 계속했다면 조선의 운명은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