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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이야기

01. 서계 박세당(西溪 朴世堂, 1629~1703) 실학자

작성자관운|작성시간16.12.16|조회수185 목록 댓글 0


01. 서계 박세당(西溪 朴世堂, 1629~1703) 실학자

 

 

 

 



 

박세당(朴世堂, 1629년 음력 810~1703년 음력 821)은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문신으로 소론의 지도자 중 한사람이다. 서인이 김익훈, 김석주 등의 역모 무고 이후 노론, 소론으로 갈라서자 소론을 택했다. 농촌생활 중 박물학(博物學)의 영향을 받기도 했고, 농업 서적인 색경 등을 저술하기도 했다.

 

이경석의 행장을 찬하면서 송시열을 불상인이라 비판한 일로 사문난적 제3호로 몰리고, 그가 지은 비석은 땅에 매몰되고 사변록 등의 저서들은 수난을 겪게 된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계긍(季肯), 호는 서계(西溪), 잠수(潛叟서계초수(西溪樵叟)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남사무의 문인.

 

 

생애 초기

 

서계 박세당은 1629(인조7) 음력 810일 아버지의 부임지인 전라남도 남원부 관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의정부좌참찬 박동선(朴東善)이며 아버지는 이조참판 박정(朴炡)이다. 어머니는 관찰사 윤안국(尹安國)의 딸인 양주윤씨(楊州尹氏)이다.

 

1629년 아버지의 임지인 전라도 남원부 관아에서 출생, 당대의 명문가였으나 박세당이 4살 때 부친이 병사한 이후로 가세가 기울어 10세가 되어서야 글을 배울 수 있었다. 17세 때 의령 남씨 남일성(南一星)의 딸이자 남구만(南九萬)의 누이와 결혼하여 태유(泰維)와 태보(泰輔), 태한(泰翰) 세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소년 시절 고모부인 교관 남사무에게 글을 배운 뒤 처남 남구만, 처숙부 남인성(南仁星)등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는 데 힘썼다.

 

또한 같은 서인이자 온건파 소론이었던 박세채 역시 그의 일족이었다. 4살 때 아버지가 병사하였고 7살 때에는 큰 형인 박세규(朴世圭)마저 요절하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였다. 연이어 병자호란이 발생하면서 피난 중 재산을 잃고, 조모·모친·두 형과 함께 강원도 원주·충청북도 청풍·경상북도 안동을 전전하며 피난생활을 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형편이 어려워 청주·천안 등지로 옮겨다니며 곤궁한 생활을 영위하였다.

 

관료 생활

 

 

박세당의 문과 급제 교지

1660(현종 1) 32세의 나이로 증광 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이후 예조좌랑, 병조좌랑, 사간원정언, 병조정랑, 사헌부지평, 홍문관교리, 홍문관교리 겸 경연시독관 등의 삼사의 요직을 역임한 뒤 함경북도병마평사로 나가기도 했다.

 

1664년 황해도 암행어사로 나갔다. 1667년 이조좌랑이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장형(杖刑)을 받았다. 그 해 동지사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94년 갑술옥사에 승지가 되고 공조판서를 거쳐 1700(숙종 26) 음력 8월엔 이조판서직이 내려졌다

 

박세당은 소론 출신으로 노론계의 송시열과 대립 관계였다. 이러한 연유로 노론에게 여러 번 비난을 받자 정치에 뜻을 버리고 경기도 양주 석천동으로 물러나 농사를 지으면서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몰두했다.

 

탄핵과 유배

 

 

우암 송시열

1702(숙종 28) 이경석(李景奭)의 비문을 지은 것이 계기가 되어 정치적인 박해를 받게 되었다. 비문 속에는 송시열의 인품이 이경석의 인품보다 못하다는 내용이 있어, 노론에게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삭탈관직 당하고 옥과(玉果)로 유배되었다. 일설에는 1703(숙종 29)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하여 주자학적인 학풍을 비판하고 독자적인 견해를 발표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사문난적으로 몰렸다고 한다.

 

 

윤증

(그는 윤증에게 출사를 권유했으나 윤증은 끝내 거절한다.)

비난의 포문은 홍계적(洪啓迪:1680-1722)이 유생 108명과 함께 열었다. 이들은 박세당의 글이 성인을 업신여겼으며 정인(正人)을 욕했다고 단정한 뒤, 이경석 비문과 사변록을 거두어 불태움과 동시에 엄중한 벌을 내려달라고 청했다. 이에 대해 국왕의 조치는 신속하여 즉시 삭탈관직과 함께 문 밖에 내치게 했고 유신(儒臣)들에게 조목조목 따져 잘못을 지적한 글을 올리게 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그는 사서(四書) 는 물론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 , 장자(莊子) 의 연구를 통해 주자학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또한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훼손된 공맹(孔孟)의 본뜻을 밝힌다는 입장에서 사변록(思辨錄) 을 저술하였다. 이러한 학문 태도로 인해 그는 주자학에 경도된 당시의 지배세력으로부터 여러 차례 비난을 받았다.

 

석방과 사망

 

노론 김창흡 등이 가장 먼저 팔을 걷고 서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박세당의 제자인 수찬 이탄(李坦)과 이인엽(李仁燁) 등이 구명소를 올려 반박했다. 이탄은 후일 서계의 연보를 작성한 사람이며 이인엽은 상소로 서계가 유배에서 풀려날 수 있도록 한 이다. 그는 소론파의 거두였던 윤증, 같은 반남 박씨인 박세채(朴世采), 처숙부 남이성(南二星), 처남 남구만(南九萬) 등과 교유하였고, 우참찬 이덕수(李德壽), 함경감사 이탄(李坦), 좌의정 조태억(趙泰億) 등의 제자를 양성하였다.

 

박세당의 제자인 수찬 이탄(李坦이인엽(李寅燁) 등의 소청으로 석천동으로 돌아왔으나 귀환한 지 3개월 만에 죽었다.

 

그의 학문과 행적에 대한 논란은 사후에도 계속되어 1722년에 문절(文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가 1723(경종 3) 문정(文貞)으로 개시되었다.

 

 

학문적 태도는 귀납적 방법론(하학이상달, 下學而上達)과 실용적 경향성이 특징이다. 귀납적 방법론은 그의 저작인 사변록신주도덕경(新註道德經), 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등에 잘 나타나 있으며, 실용적 경향성은 농사 방법에 대해 논한 색경(穡經)에서 잘 드러난다. 주자성리학 밖의 일체 학문에 대해 이단시하던 당시 상황에서 도덕경이나 남화경을 주석한 것에서부터 벌써 그의 학문의 독자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더욱이 그는 사변록에서 사서(四書)에 대한 주자의 주석을 고쳐 쓰며 특히 대학중용에 이르러서는 그 장구(章句)의 편차마저 뜯어 고치는 과감성을 보이고 있다. 한마디로 박세당은 고루하고 진부한 전통에 대항한 비판적 지식인이자 올곧은 선비였으며, 또한 당대 최고의 반열에 오를 만한 뛰어난 학자였다.

 

 

삭탈관직되어 유배형에 처해진 그가 이인엽(李寅燁)이 상소하여 풀려나 석천동 정침에서 임종한 것은 그나마 천행이다. 숙종 실록에 박세당과 관련된 글이 115, 사변록 글이 18건에 달하며, 숙종29년에만 10여 건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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