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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이야기

05. 서재필(徐載弼, 1864년~1951년)―독립신문(獨立新聞) 발간

작성자관운|작성시간17.02.12|조회수90 목록 댓글 0


05. 서재필(徐載弼, 1864~1951)독립신문(獨立新聞) 발간

 

 

 

 

 

 

대한제국 정부의 고문 겸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개화파정부는 개화인사 중 몇 안되는 지도자인 서재필을 외무부협판으로 기용하려 했으나, 서재필은 보수파와 민씨 척족들로부터의 만약의 방해와 모략에 대비하기 위해 권력의 내부에 들어가기보다는 권력의 외부에서 안전한 미국시민으로 민중을 계몽 하려고 하였다. 그의 포부를 본 박영효는 5천원의 자금을 지원하기로 약속했으나 약속은 박정양 내각이 들어선 뒤에 이행되었다.

 

대신 그는 개화파 정부와 근대화 운동의 한 방편으로 신문의 발간을 합의하고 신문 창간의 자금과 생활비를 지원받아 활동하였다. 자신이 미국인이라는 점과 민씨 내각의 반대를 잘 알던 그는 내각에 입각하는 대신 중추원 고문직으로 계속 돕겠다고 반복하여 개화파 정치인들을 일단 안심시킨다. 신문 창립 비용으로 국고에서 3천원과 정착 자금으로 1,400원 등 4,400원을 받았다.

 

189512월 중순에 그가 귀국한 직후부터 시도했던 신문 간행이 일본에 의해 좌절될 뻔했을 때, 서재필의 상심을 들어주던 유일한 대화 상대는 윤치호였다. 윤치호는 아관파천 직후 신문 간행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던 서재필을 돕고 싶었지만, 이미 민영환을 수행해 러시아에 다녀오라는 고종의 명을 받았기에 도울 수 없었다. 1895년 유길준은 그에게 벼슬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사양하였다. '갑신정변이 민중에 뿌리를 박지 못해서 실패했다'고 느껴 민중 계몽 사업을 하겠다며 조용히 거절했다.

 

귀국 직후부터 신문은 계몽의 한 방법이라는 유길준의 설명을 듣고, 그는 신문 발간을 준비해 왔고, 국내 온건 개화파의 각종 보호와 지원 그리고 정부의 재정지원, 일부 지식인들의 자발적인 성금 모금 등으로 그는 신문을 발간하게 되었다. 유길준은 서재필에게 신문 발간 계획을 위촉하였으며, 아관파천에 의해 정권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마침내 독립신문이 창간될 수 있었다. 그는 내무대신 유길준과 교섭, 5천원의 추가 지원 비용을 얻어내 독립신문을 창간하게 된다. 그는 사회계약론을 소개하며 조정이 인민의 재산과 행복을 지켜주는 조건부로 인민이 조정에 충성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임금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을 당연시 여기던 당시의 백성들은 그가 소개한 사회계약론을 사회를 혼란으로 몰고 갈 괴상한 신사상 정도로 취급하였다.

 

안경 착용과 갈등

독립신문을 창간하려고 하던 때였다. 서재필이 고종황제를 알현하러 궁중으로 들어가는데 안경을 끼고 갔다. 그가 입궐하자 입구에서는 그에게 안경을 벗도록 했다. 그러나 그는 거절했다. 임금 앞에서 안경을 끼면 불경죄로 다스렸던 시대였기 때문이었다. 조선 말기 이후 1920년대 까지만 해도 한국은 어른 앞에서 안경을 끼는 것을 무례한 것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궐앞에 이르러 나인들이 다시 저지하였다. 나인들이 '임금 앞에서는 안경을 쓸 수 없으니 안경을 벗으라'고 했다. 그때 서재필은 '나는 미국시민권을 얻은 외신(外臣)의 신분'이라고 고집하면서 끝내 안경을 벗지 않고 빤들빤들한 안경을 쓴 채 고종을 알현했다.

 

바로 고종을 면담하는 자리에서 그는 절하지 않고, 안경을 쓰고 허리를 꼿꼿이 펴고 팔짱을 낀 채 고종의 물음에 그대로 말대답을 하였는데 이는 임석한 조정 대신들을 경악하게 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서재필의 말대로 그는 '외신'이니까 어쩌지 못하고 애꿎은 통역관만 그 안경 사건을 트집잡아 섬으로 귀양 보냈다. 고종은 그 '안경' 때문에 심기가 대단히 좋지 않았던 것이다. 이범진 등은 이를 계속 소문을 내서 그를 곤경에 빠뜨리려 했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매천 황현 역시 같은 기록을 남겼다.

 

서재필은 미국에 살면서 본국에 있는 본처와 헤어지고 미국여자와 결혼했다. 그는 갑오년에 환국한 뒤 고종을 알현할 때 안경을 쓰고, 궐련(卷煙, 담배의 번역음)을 꼬나물고, 뒷짐을 지고 나타나 외신(外臣, 다른 나라의 신하)을 칭했다. 이에 조정이 온통 분노했다

황현, 매천야록

 

서재필은 시종일관 절 한번 하지 않고 뒷짐진 채 짝다리 짚고, 고종 앞에서 손가락 담배를 피운 채 면대하였다. 이는 착안경 함권연(着眼鏡含卷煙), 칭외신 부수이출(稱外臣 負手而出)이라 하여 당시 조선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그가 서양 도깨비에게 홀려서 정신이상이 됐다는 소문도 유포되었다.

 

서재필은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공사관에 파천해 있는 고종을 찾아가 뵈었다. 이때에도 그는 안경을 끼고 고종을 면담했다. 안경을 끼고 고종을 배알했던 서재필은 친로파로부터 역신이라는 정치적 공격을 받았다. 반면에 독일인 묄렌도르프는 고도의 근시이면서도 (입궐할 때는) 안경을 벗고 배알한 탓에 고종의 환심을 샀다.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 시절의 한글학자 최현배는 "조선민족의 병폐를 가져온 원인으로 온갖 예절이 조선 사람의 생활을 구속했고, 생기를 잃게 했다"며 서재필의 안경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독립신문 발간

 

 

 

1890년대의 서재필

189647일 한국 최초의 신문인 독립신문 (獨立新問)을 순한글과 영어로 인쇄, 발간하였다. 서재필은 정부로부터 창립 자금 4400원을 지원 받아 시작하였다.

 

 

우리는 첫째 편벽되지 아니한고로 무슨 당에도 상관이 없고, 상하귀천을 달리 대접하지 아니하고, 모두 조선 사람으로만 알고 조선만을 위하여 공평히 백성에게 말할 터인데, 우리가 한성 백성만을 위할 게 아니라 조선 전국 백성들을 위하여 무슨 일이든지 대언하려 주려 함.

 

우리가 이 신문을 출판하는 것은 취리(이익을 취함)하려는 것이 아닌고로 값을 매우 헐하도록 하였고 모두 언문으로 쓰기는 남녀, 상하귀천이 모두 보게 하려 함이요, 또 귀절을 떼어 쓰기는 알아보기 쉽게 하도록 함이라. 우리는 바른대로만 신문을 할 터인고로 정부 관원이라고 해도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세상에 그 사람의 행적을 펼 터이요, 사사백성이라도 무법한 짓을 하는 사람은 우리가 찾아내 신문에 설명할 터임

 

서재필이 직접 지은 189647일자 독립신문 창간호 논설

 

독립신문은 주 3회 발행되었다. 한편 그는 독립신문의 필진으로 박영효, 윤치호, 이승만, 유길준, 신채호, 이상재, 박정양, 이완용, 주시경, 박중양 등을 영입했다. 그 중 주시경은 독립신문사 회계사무원 겸 교보원(校補員)으로 임명하여 신문사의 재정과 교열을 담당하게 했다. 또한 언더우드 학당에서 언더우드 목사와 관계가 다소 소원해졌으며 직업이 없어 고민인 김규식을 영입하여 취재기자로 고용하기도 했다. 독립신문을 편집할 때 그는 띄어쓰기를 반영하였다. 후일 189647일의 그의 독립신문 창건을 기념해 후일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195747일을 신문의 날로 지정하였다.

 

그는 독립신문의 논설이며 모든 것은 내가 혼자 원고를 썼다"고 회고하는데, 이보다 전인 윤치호가 1893년 그를 미국에서 만났을 때, "서재필이 모국어 쓰기와 말하기를 거의 잊어 버려 놀랐다"는 기록이 있다. 신문 발간 추진 과정에서 윤치호에게 영어를 한글로 번역하는 번역 업무를 맡아줄 것을 제안하였다.

 

그는 신문을 발행하면서 전문 용어보다는 쉽게 한글로 풀이하도록 했는데, 처음에 300부를 찍었던 독립신문은 이내 발행부수 3,000부가 넘는 신문으로 발전했고, 10여명으로 시작된 독립협회는 이내 4,000명이 넘는 회원을 가진 큰 단체로 발전하면서 국민적 개혁 운동 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지방자치제도 주장

18964월 독립신문 설립 직후 그는 조선도 감사나 수령, 관찰사나 군수, 부윤 등은 주민이 직접 선출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주민이 직접 선출하는 지방관이 황제나 정부에서 임명하는 지방관보다 훨씬 낫고, 훨씬 자기 소신껏 일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415~416일에는 그는 독립신문 사설에도 지방관을 백성들이 직접 선출하게 할 것을 서술하였다.

 

1896년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발행신문인 독립신문이 자치단체장의 주민직선제를 골간으로 한 지방자치제를 주장한 사실이 새롭게 밝혀져 관심을 끌고 있다. 독립신문논설에는 관찰사와 고을 원은 정부의 내각 대신이나 협판(協辦 ·구한말 당시 궁내부와 각 부의 차관급)이 천거할 것이 아니라, 지방 백성이 투표로 뽑아야 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는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다가 1991년에 알려지게 되었다. 19915월 이 내용을 발견한 경북대학교 물리학과 주창호(朱昌護) 교수(54 ·양자역학)독립신문 논설을 쓴 것으로 알려진 徐載弼 박사 과거의 1세기 전에 자치제를 거론했다는 사실을 눈여겨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1980년대 주창호 교수는 한국교회사 관계 자료를 모아 오던 중 19915월 독립신문 논설에서 지자제 주장 대목을 발견했다.

아관파천 전후

 

 

 

독립협회에 모인 민중들

이 부분의 본문은 아관파천입니다.

 

한편 귀국 직후 그는 부패한 외척 출신을 관리로 중용하고 무속인을 신봉했던 고종과 명성황후를 경멸했다. 또한 수구파 대신들의 탐욕과 비리를 거침없이 질타, 지적하는 한편 참정권을 그릇된 것으로만 이해하고, 갑신정변에 부정적이었던 민중들에 대한 혐오와 경멸감을 감추지 않았다. 윤치호에 의하면 서재필은 3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조선 사람을 어린애나 미개인 다루듯이 하여 분노를 느끼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가 미국인이어서 다들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서재필은 매사에 지시하기를 좋아하는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정력적이고 단호하고 기민했다. 원로 대신, 젊은 관료 할 것 없이 마치 버릇없는 애들을 타이르듯 말하거나 다루었으나 이들은 미국의 보호를 받고 있는 그에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

윤치호 일기

 

윤치호, 유길준은 그에게 시정과 자제를 요구했지만 오히려 서재필의 말을 듣고 깊이 공감하는 점을 느끼면서 훈계를 그만둔다. 미국공사관 공사 알렌은 그에게 분노하더라도 겉으로는 웃으며 좀 외교적인 태도를 가지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고국에 체류하는 동안 그는 이상재, 윤치호, 이승만, 남궁억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근대적 시민단체인 독립협회를 만들고 그 첫 사업으로는 독립문 건립 계획을 수립한다. 그는 또 고종에게 청나라로부터의 독립, 자주권을 주장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독립협회의 동지들에게도 조선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민족이며 청나라로부터 독립하여 자주국가를 이루자고 주장하였다. '어서 빨리 청나라와 결별해야 된다. 그게 이 나라가 사는 길이다. 그리고 고루한 중국 서적과 유교 서적은 쓰지 말아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1896211일 고종은 아관파천을 단행한다. 일본은 조선의 유길준, 윤치호가 국민들을 개화한다는 취지로 신문을 제작하는 것으로 보았으나, 반외세, 교육 계몽, 자립, 실력 양성 등을 논설로 내보내는 것을 내심 경계하였다. 아관파천을 단행하는 고종을 보고 그는 조선에 가능성이 없음을 간파하고 단념하게 된다. 민중들은 개화파를 왕실에 저항하는 역적 정도로 취급하였고, 계몽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것과 민중의 냉대에 좌절한다.

 

1896314, 그는 중추원 고문으로 재직 중이면서 신문 담당 부서인 농상공부 임시 고문을 겸하게 되었다. 학부에서는 각급 학교의 학생들에게 신문을 구독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내부에서는 각 지방관청에 구독을 명령함은 물론 우송 상의 혜택까지 부여했다. 아관파천 전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러 있던 상황에서 조선에 대한 경제적·문화적 침투에 한계를 느끼던 러시아는 조선에 군사적·정치적 압력을 확대하면서 만주와 조선에 대한 침략정책을 폈다. 이에 서재필은 러시아의 대한정책과 동아시아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의 기사를 쓰는 한편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러시아 고문단의 철수를 요구했다.

 

 

한글과 영문으로 된 독립신문

 

서재필은 독립신문 창간호에서 신분이 낮은 사람들과 여성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언문'을 공식적인 인쇄 언어로 채택하며 띄어쓰기를 도입한다고 밝혔다. 독립신문을 통해 서재필은 독립된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내부적으로는 교육 확대 및 산업 발전을 강조하였고, 그를 위해 의무 교육 도입, 서양 과학 기술의 도입, 식생활과 위생의 개선에 대한 여러가지 안들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러시아와 일본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느 한 쪽에 의존하면 조선이 위험에 처할 수 있으니, 외부적으로는 중립 외교를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독립협회 법인 도장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일반 민초들이 쉽게 알아보게 하기 위해 한글 단어 사용을 신중히 고려하였고, 국문학자인 주시경을 영입하려 했고, 주시경의 노력에 힘입어 순한글로 간행할 수 있었다.

 

'독립신문'은 근대적 여론 형성의 기틀을 마련했다. 독립신문 창간은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정동구락부, 정동파, 친미파 등으로 불린 영어파 세력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이뤄졌다. 4면 가운데 3면은 한글 전용 '독립신문'으로 편집하고, 마지막 1면은 영문판 'The Independent'로 편집하였다. 189874일자 독립신문에는 영어 교습 광고도 실려 있었다. "대한 사람들이 영어를 배우고자 하나 학교에는 다닐 수 없고, 또 선생이 없어서 못 배우는 이가 많다 하기로, 영국 선비 하나가 특별히 밤이면 몇 시간씩 가르치려 하니, 이 기회를 타서 종용히 영어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은 독립신문사로 와서 물으면 자세한 말을 알지어다."라고 발표했다.

 

서재필은 조선인의 의식부터 개조해야 진정한 독립국으로 발돋움할수 있고, 민권이 존중되는 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설 수 있다고 보았다. 다만 당대에는 민주주의 체제의 등장이 어렵다고 내다봤다. 서재필을 비롯한 개화주의자들은 '독립신문'에서 조선인의 타고난 체형은 동양 인종 가운데 가장 우수하다고 자랑하거나 한때 상것이라고 금기시했던 상민들의 석전(돌 싸움)을 긍정적으로 재조명했다.

 

또한 그는 독립신문에 칼럼을 기고하면서 서구식의 개선된 생활도 보급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18961114일자의 독립신문 칼럼에서 그는 조선사람들의 매너없는 행동을 지적, '남의 집에 갈 때 파, 마늘을 먹고 가는 것은 아니며(실례이며), 남 앞으로 지나갈 때는 용서해 달라고 하고 지나가야 한다'고 했고, 18961010일자에서는 '조선 사람들은 김치와 밥만 먹지 말고 소고기와 브레드도 먹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외부 문명과 외부인에 대해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자세를 버려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한편 일본에서는 독립신문이 반일 사상을 고취한다며 조선 정부에 압력을 놓았다.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독립신문을 일본이 서재필과 필진들을 앞세워서 운영하는 것으로 판단, 조선 정부에 압력을 넣어 독립신문 후원금은 점차 감소, 끊어지게 된다.

 

1897(건양 2) 323일 조선 정부는 조선 정부의 외국인 고문관(顧問官)인 프랑스인 찰스 르 장르드(李善得, Charles William Le Gendre), 그찰스 레이트하우스(具禮, Charles Greathouse), 존 맥레이 브라운(柏卓安, J. McLeavy Brown)와 서재필을 중추원의 헌법개정 자문기관인 중추원 교전소 위원(校典所委員)에 임명했다.

 

그는 독립신문을 통해 국내외의 사정, 고종과 대신들, 조정에서 결정한 사항, 국외의 정세를 한글로 번역하여 보도하고 그 옆면은 영어로 된 기사를 보도했다. 그는 조선 사회의 혼란의 원인을 무능한 탐관오리들과 인맥, 문벌, 연줄로 사람을 선발하는 것을 원인으로 지적했다. 또한 지방관이나 아전 등이 뇌물수수를 한 것이 적발되면 바로 신문에 보도하거나 특별 호외를 내서 사건의 전말을 보도하기도 했다. 그는 매관매직과 인맥, 문벌로 채용된 인사들, 탐관오리들이야 말로 민중의 고혈을 짜는 자들이라며 '매관매직을 하는 탐관오리들은 (이유를 막론하고) 모조리 죽여야 하고, 그 시체를 실은 배도 바다 한 가운데서 침몰시켜야 한다.'며 신랄하게 지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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