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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이야기

진흥왕(眞興王, 526년∼576년, 재위: 540년∼576년)

작성자관운|작성시간17.02.26|조회수71 목록 댓글 0


진흥왕(眞興王, 526576, 재위: 540576)

 

 

 


 

 

진흥왕(眞興王, 526576, 재위: 540576)은 신라의 제24대 임금이다. 성은 김()이고 이름은 삼맥종(三麥宗) 또는 심맥부(深麥夫)이다. 불교 승려로서의 법명은 법운(法雲)이다. 법흥왕의 동생이며 지증왕의 아들인 입종 갈문왕(立宗 葛文王) 구진(仇珍)과 법흥왕의 딸 식도부인(息道夫人, 지소태후)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법흥왕은 진흥왕에게 큰아버지이자 외조부가 된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이를 토대로 신라는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팽창은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2대 생산력을 소유하게 되어, 백제를 억누르고 고구려의 남진 세력을 막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천만(仁川灣)에서 수·(隨唐)과 직통하여 이들과 연맹 관계를 맺게 되어 삼국의 정립을 보았다. 이는 이후 신라가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진흥왕 때는 신라의 전성기였으며, 정복 군주로 불렸다. 고구려의 영토였던 원산만까지 진출한 흔적은 마운령비에서 알 수 있다.

 

5407월부터 5768월까지 재위하는 동안 5407월부터 이듬해 5413월까지 법흥왕의 왕후인 보도태후가 섭정(수렴청정)하였고 5413월부터 5513월까지 어머니 지소태후가 섭정(수렴청정)하였으며 5513월부터 5593월까지 친정하였고 5593월부터 이듬해 5633월까지 상대등 구해공이 대리청정하였으며 5633월부터 57512월까지 다시 친정하였고 57512월부터 이듬해 5763월까지 왕후인 사도왕후 박씨가 대리청정(수렴청정)하였으며 5763월부터 같은 해 5764월까지 미실궁주가 잠시 1개월간 대리청정, 이후 5764월부터 5768월 붕어할 때까지 둘째아들 김사륜(훗날 진지왕)이 태자 신분으로 대리청정하였다.

 

 

 

 

삼국사기에는 534년생 반면에 삼국유사에는 526년생으로 나와있다. 여러가지 역사적 기록을 대립해서 살펴볼때 삼국유사의 기록이 사실로 여겨진다. 15세 때였던 540년 신라 법흥왕의 붕어로 왕이 되었는데, 540년부터 이듬해 541년까지 법흥왕의 왕후인 보도태후가 섭정을 하였고 541년부터 551년까지 어머니인 지소태후가 섭정을 하였으며 그 후 551년부터 친정하였다. 544, 흥륜사를 창건하였다. 이듬해 이사부의 건의에 따라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551,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고쳤고 팔관회를 두었다. 대가야 사람인 우륵으로 하여금 신라에 악을 보급하게 하였다. 553, 황룡사를 창건했다. 568년에 연호를 태창(太昌)으로 바꾸었으며, 572년에 다시 홍제(鴻濟)로 바꾸었다. 576, 원화(源花) 제도를 만들어 남모와 준정의 두 여인으로 하여금 300여명의 무리를 거느리게 했으나, 곧 두 여인이 서로 시기하다 남모가 죽는 일이 발생하자 원화를 폐하고 화랑(花郞)을 제창하여 고구려, 백제 정벌의 원동력을 이루게 하였다. 말년에는 법운(法雲)이라는 법명으로 중이 되었다고 하며, 왕비인 사도왕후 또한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576(진흥왕 37), 51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그가 죽자 신라의 왕위는 태자 동륜이 572년에 죽었기 때문에 차남인 사륜(진지왕)이 승계하였다.

 

영토 확장

 

진흥왕은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548년 정월에 고구려 양원왕이 예()와 모의하여 백제의 한강 북쪽(한북, 漢北)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였다.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은 백제의 성왕은 사신을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 왕은 장군 주진(朱珍)에게 명령하여 갑옷 입은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떠나게 하였다. 주진이 밤낮으로 길을 가서 독산성 아래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와 한 번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한강 상류 유역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551) . 신라는 10개의 군을 얻고 백제는 6개의 군을 얻었다. 신라는 함경남도, 함경 북도에 진출하여 순수비을 세웠는데, 고구려는 돌궐과의 전쟁으로 신라의 영토 확장에 대응할 수 없었다. 이때 백제는 신라에게 연합하여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자고 제의하였고, 고구려는 경기도, 황해도, 한반도 북서부등 진흥왕이 새로 개척한 땅을 신라 땅으로 용인해 주는 대신 고구려 수도 평양성으로 진군하지 말것을 제의하였다. 진흥왕은 백제의 제의을 거절하고 고구려의 제의을 받아들였다. 신라는 경기도, 황해도, 한반도 북서부로 영토을 확장하고 백제로 진군하였으나, 백제가 화해를 시도하여 진군을 멈추었다. 5537, 진흥왕은 백제의 한강 유역을 침략하여 여러 성을 빼았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武力)을 군주로 삼았다. 이로써 신라는 백제가 점령하였던 한강 하류 지역을 탈취하여 백제를 포위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팽창은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2대 생산력을 소유하게 되어, 백제를 억누르고 고구려의 남진 세력을 막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천만(仁川灣)에서 수·(隨唐)과 직통하여 이들과 연맹 관계를 맺게 되어 삼국의 정립을 보았다. 같은해, 음력 10월에 백제의 왕녀가 진흥왕에게 시집 왔다. 한편, 이듬해 백제 성왕은 한강을 빼앗긴 것을 분하게 여겨 신라를 침공하였으나, 신라가 이를 크게 격파하였고, 백제 성왕은 신라 병사에게 죽임을 당하였다.(554). 백제는 남하하여 충청남도 부여로 후퇴하였다. 562, 가을 7월에 백제가 변방의 백성을 침략하였으므로 왕이 군사를 내어 막아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같은 해, 사다함의 공으로 대가야를 복속하였고 군대를 강화하였다. 또한 새로 개척한 땅에 순수비를 세웠는데, 현재까지 4개의 순수비(창녕 · 북한산 · 황초령 · 마운령)가 전해진다.

 

 

 

564,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565, 북제의 무성황제(武成皇帝)가 조서(詔書)를 내려, 진흥왕을 사지절(使持節) 동이교위(東夷校尉)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 ()나라에서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을 보내 예방하고, 불교 경론(經論) 17백여 권을 보내주었다. 566, 567, 568, 570, 571년에 신라는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572,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는 신라 진흥왕이 재위 기간 중 영토 확장 사업을 하면서, 그 확장된 곳을 돌아보면서(순수(巡狩)) 세운 비석을 가리킨다. 현재 북한산비, 황초령비, 마운령비, 창녕비가 남아 있다.

 

 

진흥왕 순수비로 555년에 세워진 북한산비는 조선 후기의 금석학자인 김정희에 의해 고증되었다. 특히 북한산비는 신라의 한강 하류 진출을 밝혀 주는 비문으로 밝혀졌고 561년에 세워진 창녕비는 신라의 대가야 정복 사실을 증명하는 순수비로 568년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황초령비, 마운령비는 신라의 함흥지방 진출을 밝혀 주는 비문으로 최남선이 조사하였다.

북한산비 -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황초령비 -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마운령비 -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

창녕비 -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배경

 

진흥왕은 정복 전쟁으로 새로 편입한 지역에 기념비를 세웠다. 비석이 세워진 순서를 따라가면 진흥왕의 영토 정복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550년 남한강 상류의 단양에는 단양 적성비를 세웠다. 555년 한강 하류에 북한산비를 세웠다.

 

당시 남한강 유역은 고구려 땅이었고, 중원 고구려비가 근처에 있었다. 진흥왕은 영토를 넓히고 국경 지역을 돌아보며 기념비를 세웠다. 그 뒤 여러 지역에 순수비(巡狩碑)을 세웠는데 순수비는 임금이 돌아본 곳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으로 순수는 왕이 자기 영토를 둘러보는 것을 말한다.

 

대가야를 정복한 뒤, 561년 낙동강 유역에는 창녕비를 세웠다. 함경도 지역에는 황초령비(568)와 마운령비(568)를 세웠다. 모두 정복 사업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가운데 신라가 한강을 차지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은 단양 적성비와 북한산비이다. 단양 적성비는 5세기에 장수왕이 세웠던 중원 고구려비와 매우 가까운 지역에 있다. 서울 근처의 북한산에 세워진 북한산비는 한강을 차지했다는 확실한 증거물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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