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묘소도감의궤(思悼世子墓所都監儀軌)
1762년(영조 38)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가 세상을 떠난 후 묘소를 조성할 때의 과정과 절차를 기록한 책이다.
사도세자는 조선 21대 왕인 영조(英祖)의 둘째 아들로, 이름이 선(愃), 자가 윤관(允寬), 호가 의재(毅齋)이며, 어머니가 영빈 이씨(暎嬪 李氏)이다. 1728년(영조 4) 영조의 맏아들인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요절한 지 수년 후인 1735년(영조 11)에 창경궁 집복헌(集福軒)에서 태어나 바로 원자에 책봉되었고, 이듬해인 1736년(영조 12) 세자로 책봉되었다. 1744년(영조 20) 10세 되던 해에 영풍부원군(永豐府院君) 홍봉한(洪鳳漢)의 딸과 혼인하였다. 1749년(영조 25) 영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하였지만 영조의 기대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였다. 세자 자신의 정신질환과 대리청정 기간 동안 세자의 정치적 입장을 두고 여러 정파의 이해가 엇갈리며 왕위 계승이 정쟁화 되어간 점, 영조의 후궁 문숙원의 왕자 출산 가능성으로 인한 주변인들의 암투가 격화되는 가운데 영조와 세자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1762년 나경언(羅景彦)이 세자의 비행을 거론하고 세자를 둘러싼 신하들의 역모를 고발하고 세자의 친모인 영빈까지 세자의 실행을 인정하자, 영조는 세자를 폐서인하고 자결을 명하였으나 세자가 이를 듣지 않자 뒤주 속에 가두었다. 8일 후인 윤5월 21일 세자는 창덕궁 휘령전(徽寧殿) 앞 마당의 뒤주 속에서 28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을 임오년에 일어난 비극이라 하여 ‘임오화변(壬午禍變)’이라고 부른다. 세자가 세상을 떠난 직후 영조는 다시 세자의 위호를 회복하고,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예장을 위해 세 도감을 설치하고, 홍봉한을 예장도감 도제조로, 신회(申晦)와 김상복(金相福)을 빈전도감 당상으로, 이이장(李彝章)과 심수(沈鏽)를 묘소도감 당상으로 삼아 장례를 치르도록 했으나, 묘소의 조성이나 장례 등급을 보통의 세자 장례에 비해서 간소하게 하였다. 묘소도감이 설치된 후 약 2개월 간 공사가 진행되었고, 1752년 7월 23일에 양주 배봉산 갑좌의 언덕에서 장례를 치루었다. 영조는 장례에 직접 참석하여 반우(返虞)하는 우주(虞主)에 제하였고, 이렇게 함으로써 “다른 날 신주를 묻어버리는 논의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묘소와 사당의 명칭은 동일하게 ‘수은(垂恩)’이라고 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 정조(正祖)는 사도세자에게 ‘장헌(莊獻)’이라는 존호(尊號)를 올리고, 수은묘는 영우원(永祐園)으로, 사당인 수은묘(垂恩廟)는 경모궁(景慕宮)으로 승격시켰다. 이후 1779년(정조 3) 사당을 관리하는 궁관을 새로 정하고 묘소를 수호하는 원관(園官)의 위격도 상향 조정하였다. 또 1789년(정조 13)에는 영우원을 수원 화성부로 옮기고 현륭원(顯隆園)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묘소의 규모도 대리청정(代理聽政) 했던 세자의 위상을 고려하여 한층 성대하게 조성하였다. 고종 대인 1899년(광무 3)에는 장헌세자를 장조(莊祖)로 추존하여 부묘했고, 같은 해 다시 의황제(懿皇帝)로 추존하였고 현륭원도 융릉(隆陵)으로 격상되었다.
『사도세자묘소도감의궤(思悼世子墓所都監儀軌)』는 상하 2책으로 제작되었지만, 이 의궤는 이 중 하책만 남아 있는 영본이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오대산에 분상하였던 의궤가 완질로 남아 있어 전책의 구성을 확인할 수 있다. 하책에는 조성소(造成所)부터 노야소(爐冶所), 대부석소(大浮石所), 보토소(補土所), 소부석소(小浮石所), 수석소(輸石所), 별공작(別工作), 분장흥고(分長興庫), 번와소(燔瓦所)까지 묘소도감에 설치되었던 각소의 작업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수록되었다. 우선 조성소는 묘소의 정자각(丁字閣)과 옹가(甕家) 등의 축조를 담당하였다. 조성소에서 만든 정가각과 옹가의 도설이 상책에 수록되어 있는데, 본서에서는 확인할 수 없다. 조성소에서 오간 문서들은 품목질(稟目秩), 이문질(移文秩), 내관질(來關秩), 감결질(甘結秩), 소화질(燒火秩), 실입질(實入秩), 용환질(用還秩), 공장질(工匠秩)로 나누어 분류 수록하였다. 품목질은 조성소를 운영할 때 필요한 물품과 인원을 도감에 요청하는 문서들을 수록하였고, 이문질에는 호조, 병조, 혼궁도감 등에 보낸 협조 공문들을 모았다. 내관질에는 장생전, 예장도감 등에서 조성소의 이문에 회답하여 보낸 문서들을 모았고, 감결질은 조성소에서 보낸 지시 공문을 수록하였다. 소화질은 장례가 끝낸 후 조성소에서 태워버린 물품의 종류와 수량을 기록하였다. 이하 각소의궤 구성 또한 대동소이하다. 노야소는 묘소를 조성할 때 필요한 각종 철물을 제작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대부석소는 묘소에 설치되는 각종 석물, 석함, 곡장 등의 제작을, 소부석소에서는 정자각, 전사청, 재실 등 묘소 주변 부속 건물에 들어가는 석물의 제작을 담당하였다. 산릉이나 묘소를 조성할 때 가장 규모가 크고 힘이 많이 들어가는 공사는 석물을 옮기는 부석소 일이어서 관련 기록도 상세하다. 별공작은 각소에서 필요로 하는 비품을 마련하는 일, 분장흥고는 각종 깔개류와 우비 등을 준비하는 일, 번와소는 기와, 벽돌 등을 제작하는 일, 수석소는 석물을 운반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내용의 수록 형식은 모두 조성소의 경우와 유사하며, 각종 공장(工匠)의 명단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의궤의 마지막 장에는 의궤 편찬을 관장한 관원들의 관직(官職), 성(姓), 수결(手決) 등이 있다.
이 의궤는 사도세자의 묘소 조성에 대해 기록한 4건의 의궤 중 가장 정성스레 제작된 어람용 의궤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어람용 의궤 외에 춘추관, 예조, 오대산 분상용 의궤가 제작되었으나 현재는 오대산 분상건(〈奎 13607〉)만 완질로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전한다. 상책이 결실되어 도화서 화원이 섬세하게 그린 채색 도설을 확인할 수 없는 점이 아쉽지만, 붉은 인찰선에 서사관이 쓴 단정한 글씨로 정성스럽게 제작된 어람용 의궤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사도세자의 수은묘는 당시 정치적 이유로 훙서한 세자의 묘소라는 이유로, 매우 간략하게 조성되었지만, 이후 사도세자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면서 묘소의 규모와 위상에 큰 변화가 있었다. 사도세자에 대한 기억의 방식의 변화 및 조선 후기 궁원제와 관련한 연구에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