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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이야기

05. 하재일기(荷齋日記)-지규식(池圭植, 1851∼?) 분원공소의 운영

작성자관운|작성시간17.11.30|조회수1,399 목록 댓글 0


05. 하재일기(荷齋日記)-지규식(池圭植, 1851?) 분원공소의 운영

 

 

 

 

 

 

 

공소의 적자 운영과 보존하기 어려운형세


자료에 나오는 공소(貢所)’는 분원공소를 가리키는 것으로, 분원에 관련된 일체의 사무를 총괄하는 기관이며, ‘분원자기공소(分院磁器貢所)’라고도 하였다. 공소는 자기의 번조와 상납판매, 도자기 만드는 흙과 땔나무의 확보, 관련 구성원들의 회합을 주선하는 등 여러 가지 업무를 수행하였다.

공소는 자기의 생산유통에 관련된 도공과 공인 등을 포괄적으로 관할하고 있었지만, 공소 운영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공인들이었다. 그것은 민간 번조를 허용하고 분원공소를 설립하면서 그 업무를 담당할 공인 12명을 임명한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공인이 쓴 본 일기 내용에는 공소와 공방의 업무 구분이 불분명한 경우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공소는 그 조직으로 도중이 있었는데, 공소도중의 조직 체계는 공방도중(貢房都中)과 거의 같았을 것으로 보인다. 자료에는 공소상장(貢所上掌)이라는 직임이 보이고 있다.

공소에 속해 있는 구성원들은 부문별로 별개의 조직을 갖고 있었는데, 공인들은 공방도중을, 도공(陶工)들은 변방도중(邊房都中)을 조직하여 자신들만의 친목과 이익을 도모하였다. 또한 공소와 별개로 그 주변에는 공인들이 모여 회의하고 업무를 처리하는 공방(貢房)이 있었고, 도공(陶工) 등 장졸(匠卒)들의 공간으로 변방(邊房)이 있었다. 공소와 공방변방은 분원의 관리와 자기의 생산 및 납품판매 관련 업무로 상호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각기 독자성을 지니고 있었다.

공소에서는 회원들이 모여 분원 관련 각종 사안을 협의하였으며, 18936월에는 시장(柴場)과 번조(燔造)를 나누어 설치하는 문제를 놓고 난상 토론을 벌였는데, 결국 공소 제원(諸員)을 두 번()으로 나누기로 결정한 바 있었다.

18939월에는 공소에서 산통계(算筒契)를 설립하였으며, 공방과 양수두(兩水頭)분원 등에 관련된 842명이 가입하였다. 산통달걀 금융을 목적으로 조직한 계로서, 정해진 날에 계원들이 모여 돈을 내고 통 속의 계알을 추첨하여 뽑힌 계원에게 다액의 할증금을 주는 것이다. 공소의 산통계에서는 당첨된 원주(元籌)’에게는 400, ‘건동(乾童)’50냥씩으로 정하였으나, 이후 원주는 500냥으로, 건동은 3명으로 수정하였다. 이처럼 산통계 계원의 수가 842명에 달하고, 한 번에 500여 냥 이상씩 지급되었던 것을 보면, 그 규모가 매우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8941월에 이르러 양근읍에서 각종 잡계(?) 명색을 모두 혁파한다는 명목으로 산통계의 문서와 계알[籌卵]을 요구하여 내주었다. 이후 관련자를 체포 구금하자, 공소에서는 사옹원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3월에 다시 산통계의 계알과 통을 다시 만들고, 계를 시작하고 있었다.

공소에서는 설날과 같은 명절과 공소성주[成造] 생일인 5월에 제사를 지내 공소의 안녕과 태평을 빌었다. 공소는 종종 소돼지 등을 잡고 잔치를 베풀어 서로 간의 화목을 도모하였으며, 가끔 성창렬(成昌列)과 같은 전국의 명창을 불러 소리를 듣기도 했다.

이 시기 공소는 운영상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18948공소를 파하기로 결의한 바 있었다. 바로 공소를 파하지는 않았지만 자금 부족으로 파산할 지경에 처하였다. 그것은 상납한 그릇값을 받지 못한 것이 누적되어 수만 냥을 넘어서고 있었고, 각종 물자의 조달과 공급 또한 원활하지 못했으며, 관리와 하인들의 수탈 또한 여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왕실 종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의존적인 구태를 개선하지 못한 분원공소의 운영 체제에 기인한 것이라 하겠다. 결국 분원공소는 부채가 100여만 냥이고, 현재 궐공(闕供)으로 보존하기 어려운 지경에 처하여 쇠락의 길을 걷다가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공방의 조직과 활동

 

 

본 일기는 공인의 기록인 만큼 공방도중의 조직과 활동에 대한 내용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공인은 감생청에서 분원공소를 설립할 당시에는 12명으로 출발하였으나, 가설(加設)이 늘어나 1893년에는 30명에 달하였다. 공인 중에는 가설된 공인을 축출하여 원래대로 12명으로 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사옹원에서 공인 30명을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공인들이 중심이 된 공방도중의 조직을 일기 내용을 토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외에 다른 직임이 더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현재 드러난 구성은 다음과 같다.

 

 

 

대행례(大行禮)

상장(上掌)

하장(下掌)

수행(隨行)

수간역(首看役)

변간역(邊看役)

수상(首庠)

청임(廳任)

 

 

 

대행례는 도중의 업무를 총괄하는 직임으로, 인원은 2명으로 나타나 있다. 189112월에는 김익준(金益俊)과 함동기(咸東基), 18941월에는 이성도(李成道)함장섭(咸章燮)이 대행례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대행례는 서울에 자주 왕래하면서 담당 관리들과 자주 접촉함으로써 분원의 원활한 운영을 꾀하였고, 시장 상인들과도 자주 접촉하여 기명의 판매와 수금에 힘썼다.

상장과 하장은 회계와 문서 작성 등 도중의 실무를 관장하는 직임으로, 글을 잘 알고 수리에 밝은 사람이 지명되었으며, 각각 1명씩 있었다. 189212월에는 상장에 함동희, 하장에 지규식이 지명된 바 있고, 18941월에는 상장과 하장이 그대로 유임되었다. 이들은 각종 거래 관련 회계 문서를 작성하였는데, 연말 연초에는 여러 공인들이 모여 회계 문서를 대조검토하고, 서로 어긋날 경우에는 바로잡았다. 공인 중에는 문서 기록의 정확성에 의문을 품고 상장과 하장의 수를 늘릴 것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업무 관련 각종 공문서를 작성하고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분원 자기의 진상과 시장 판매 또한 관리하고 있었다.

수행은 중앙과의 연락과 진상품 올려 가는 것 등의 임무를 담당하였으며, 189212월에는 함동기(咸東基)가 뽑혀 활동하였는데, 18938월에 야반도주하였다가 18943월에 다시 참여하고 있었다.

간역(看役)은 외읍 사점기(私店器)의 조사 등을 담당하였는데, 189212월 수간역에는 유춘식(柳春植)이기웅(李基雄), 변간역에는 정현도(鄭玄道)변주헌(卞柱憲)이 선출된 바 있었다.

이들 직임은 공방회의에서 회원들의 동의를 얻어 결정되었으며, 임기는 1년이고 연임이 가능하였다. 이 가운데서도 중책인 대행례와 상장하장은 공인 중에서도 책임감 있고 신망을 얻은 자가 뽑힌 것으로 보인다. 이들 공인들은 사옹원당상과 관료는 물론, 재정을 담당한 호조탁지부 등지의 관리들과 안면을 트고 있었고, 관련 서리하인들과도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공방에서는 도중 회원들이 모여 공방의 운영과 회계 처리, 그릇의 진상과 시장 판매 관련 수가(受價), 회원의 영입과 방출 문제 등을 협의 결정하였다. 공방회의에서는 공인이 되려는 사람의 자격을 심사하고 입속 여부를 결정하였다. 18931월에는 천세영(千世榮)이 입속하려 하자, 소입전(所入錢) 7,500냥 중 선생자손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1천 냥을 감하여 6,500냥을 바치도록 하였다. 이를 보면 공인으로 입속하려면 수천 냥의 자본을 지참해야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18928월에는 공인 함장섭(咸章燮)이 그릇 장수와 짜고 외점(外店)의 그릇을 판매한 일이 생기자, 엄중 경계하고 자격을 박탈하는 거방(擧房) 조치를 취하였다. 18936월에는 공인 2명이 사점기(私店器) 단속을 나갔다가 뇌물을 받아 문제가 되자 거방 조치하였다. 그런데 함장섭의 경우 2개월 후 다시 공방에 들어와 활동하고 있고, 이듬해 대행례(大行禮)에 지명되는 것을 보면, 거방은 그렇게 엄격한 벌칙은 아니었던 것 같다.

공방에서는 자신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사점기(私店器)외점기(外店器)의 판매를 경계하였으며, 직접 공인을 파견하여 단속을 벌였다. 공인들은 고양과천광주 등지에 사점기 판매를 금지하는 공문을 보내기도 하였고, 단속 과정에서 그릇 장수들과 마찰이 적지 않았으며, 때로는 폭력으로 비화하기도 하였다. 당시 정부에서는 공소에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 대한 그릇 판매 독점권을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공방에서는 공방성주의 생일인 519일은 물론 수시로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18933월에는 산해진미를 공방 대청에 진설하고 제사를 지내고, 여러 부군당에 제사를 지냈는데, 광대와 무녀를 불러와 밤새 굿을 벌이기도 하였다.

공방에서는 종종 백정을 불러 소를 잡아 고기를 나누어 가졌으며, 때로는 돼지를 잡아 삶아 먹기도 하였고, 쏘가리를 사서 동료들과 함께 식사하기도 하였다.

 

 

 

자기의 진상과 시장 판매

 

 

분원에서 생산되는 각종 그릇과 자기는 왕실 등에 진상되었으며, 한편 상품으로 시장에 판매되고 있었다. 당시 왕실과 각종 행사에 진상되는 그릇은 수백수천 죽에 달하는 엄청난 양이었다. 각종 기명의 진상 내용을 대략 정리해 보면 다음 표와 같다.

 

분원공소에서 진상하는 그릇은 왕실은 물론 동궁가례명례궁 잔치 등 각종 왕실 관련 행사에 사용되었으며, 성균관의 석전대제(釋奠大祭)에도 제공되었고, 대원군이 거처하던 운현궁(雲峴宮)에도 공급되었다. 그 외에 상당수 그릇들이 사옹원당상을 비롯한 관료들과 서리들에게 흘러 들어갔다.

분원에서 왕실과 행사용으로 진상하는 그릇의 양은 매우 많았는데, 18939월에는 5천여 죽()에 달하는 기명의 진상을 요구 받기도 하였다. 이때 이란 10벌을 묶어 이르는 말이니, 5만여 벌의 그릇을 요구한 것이 된다. 이것뿐만 아니라 전후로 진찬용습의소용 등 각종 용도로 끊임없이 그릇 납품을 강요하고 있었다.

당시 분원에서 상납한 그릇의 종류는 일상생활과 제사에 쓰는 그릇을 비롯하여 용을 그린 술동이[龍樽], 그림 그린 항아리[畵缸] 등 고급 자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분원공소가 밀려드는 기명의 진상 요구를 충당하지 못하는 경우, 사옹원은 밤을 새워 구워 바치라.”고 독촉하거나, 때로는 진상 지체를 이유로 관련 공인을 체포해 가기도 하였다.

진상한 그릇의 대금은 정부에서 결정한 고시가격에 따라 지급되었으며, 1884년에 제정된 분원공소절목에도 각 그릇의 진상공가(進上貢價)가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정부의 고시 가격은 시가에 훨씬 못 미치는 낮은 금액으로 설정되어 있었으며, 그나마도 제때 지급하지 않아 공소 운영은 큰 타격을 받았다.

분원공소에서 생산된 자기는 종로 시전과 칠패이현 등지의 시장 상인들에게 넘겨져 시중에서 팔리고 있었으며, 그 외에 부상(負商) 등을 통해 각지에 공급되어 판매되고 있었다. 서울의 상인들은 분원에 내려와 한 번에 10바리, 20바리의 그릇을 가져갔으며, 대금은 어음이나 외상으로 거래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릇의 시중 판매는 현 시가를 반영하여 거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익 창출의 중요한 수단이었으며, 시세를 반영하지 못한 왕실 납품으로 인한 손실을 보전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음과 외상 거래가 많아 운영상 애로를 겪었다.

또한 분원공소 이외에 전국 각지의 사점(私店)외점(外店)에서 생산한 그릇들이 각지에 공급되어 판매되고 있었으므로 분원 제품의 시장 판매도 위협받고 있었다. 그렇지만 왕실 자기를 제조공급한다는 분원의 위상은 독보적이었다. 따라서 분원 자기의 시중 판매는 성황을 이루었고, 이 무렵 분원은 전국 각지에서 모여드는 사기 행상들로 북적였다고 한다. 그러나 왕실 진상 공가의 미수금이 누적되고, 어음과 외상 거래가 증가하면서 분원공소의 어려움은 가중되었다.

 

 

2) 당대의 정세 인식과 현실적 입장

 

 

분원 일대 동학의 치성과 진압 의병의 활동

동학이 일기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9341일로서 동학의 소요에 대한 소문은 아침저녁으로 바뀌어 믿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며칠 후에는 동학의 소요가 점점 치성하여 시장에 쌀이 옥처럼 귀하니 민심이 크게 혼란스럽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는 그 무렵 전개된 동학의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과 그로 인한 민심의 소요를 적은 것이라 하겠다.

18948월에 지규식은 이웃 동네 김 감찰(金監察)로부터 우리 동학 역시 대도(大道)이다. 지금 시운을 보아 우리가 바야흐로 개접(開接)하여 전도하니, 입도(入道)함이 어떠하겠는가?”라는 제안을 받았다. 이에 대해 지규식은 생각해 보겠다는 입장을 취하였지만, 그는 동학에 대해 폐단이 장차 무궁할 것이라는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탄식하였다.

18949월에 이르러 분원과 그 일대에 동학의 바람이 불어닥쳤으며, 동학교도들은 도공 등이 거처하고 있는 분원의 변방(邊房)에 막사를 설치하고 분원 중 수천 명이 일제히 입도(入道)한 연후에 무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위협하였으며, 이에 100여 명이 동학에 가입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동학의 세력이 커지자, 일대의 양반들이 동학교도를 피하여 서울로 상경하는 풍경이 빚어지고 있었다.

9월 말에 정부에서 금령을 내리고 효유하니, 거의 모두 동학을 배반했다고 한다. 이후 11월 일기에 동학농민군에 대한 관군의 승리 소식과 전봉준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내용을 짧게 전하고 있다.

분원 일대 동학교도의 동태에 대한 내용은 일찍부터 경기도 남부 지역에 전파되어 있었던 동학의 세력과 그 영향을 엿볼 수 있으며, 동학농민운동 시기 이 지역 동학교도의 움직임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동학농민운동 시기 분원 일대에 동학이 치성해지자, 동학군을 토벌하기 위한 세칭 의병(義兵)’이 일어나 활동하고 있었다. 1894108일에 양근의병소(楊根義兵所)’분원 이일선(李一先)한보여(韓甫如) 두 사람을 거느리고 대령하라는 전령을 보냈으며, 지체하거나 핑계를 대면 군율(軍律)’로 다스릴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지목된 분원의 두 사람은 아마도 동학에 가입하였거나 분원 사람들에게 동학 가입을 권유한 인물로 보인다.

이때 의병은 양근향약소(楊根鄕約所)에서 주관하고 있었으며, 분원뿐만 아니라 일대 마을에서 병정과 병기군수(軍需)의 보급을 강요하였다. 양근향약소는 각 마을에 총군(銃軍)을 있는 대로 들여보내라는 명령을 하달하였으며, 이에 분원에서도 한 사람을 차출하여 노자를 마련하여 보냈다. 또 병정 지원 요청이 있었으므로 분원 사람들은 모여 모병(募兵)’ 문제를 협의하기도 하였으며, 10월 중순에 이르러 주변 8()에서 1명씩 차출하여 갔다. 양근향약소는 군량을 충당하기 위해 각 동의 부유한 가정으로 하여금 “1/10씩 거두어 군량을 도우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고, 각 마을에 병기(兵器)를 만들어 바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분원공소는 양근향약소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고 따르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정부에 분원의 형세를 보고함으로써 양근향약소로 하여금 분원 주민을 침탈하지 못하도록 조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향약소의 침탈은 계속되고 있었다. ‘의병을 칭탁한 양근향약소는 거리낌 없이 인적물적 협조를 강요하였으며, 각 마을 주민들 또한 향약소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하고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분원 일대 의병은 일본군에게 목격되어 조선정부에 보고되었는데, 분원 부근에 조선인 500여 명이 군집한 것이 목격되었는데, 각기 총과 창칼 등의 무기를 지니고 있다.”는 내용이었으며, 그들은 동학당(東學黨)’으로 오인되었다. 이에 대해 외무대신인 김윤식(金允植)은 그들이 동비(東匪)’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설립한 민단(民團)’일 가능성이 있으며, 민단일 경우에는 보호(保護)’해야 하므로, 토벌하기 전에 반드시 동비인지 민단인지 확인하여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러한 내용들은 동학농민운동 시기 분원 일대 주민들의 동향과 민간의 상호 충돌, 일본군과 정부의 움직임 등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청일전쟁갑오개혁 등 시국에 대한 내용과 인식

일기에는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명분으로 들어와 전쟁으로 치달은 청군(淸軍)일군(日軍)의 동태와 갑오개혁 등 시국에 대한 정보와 소문 등이 기록되어 있고, 실제로 분원 근처를 통과하는 청일군의 형세와 병력도 전하고 있다. 나아가 외국 군대의 진군과 충돌, 정부와 왕실의 대응, 그에 대한 민간의 인식과 동향을 엿볼 수 있는 단서들이 적지 않다.

189462일에는 서울에서 피난하는 사람이 계속 내려왔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 가운데 지규식이 서울에 올라가 묵었던 모교(毛橋)의 식주인(食主人)이 가족을 거느리고 내려와서 집을 얻어 주기도 했다. 이들은 서울에 진입한 청군과 일군의 충돌을 피해 내려온 행렬로 보인다.

63일에는 아산에서 출발한 청군이 분원 앞 점방에 머물다 이튿날 떠났는데, 지규식은 저들은 왜병을 기피하여 지름길로 올라오려고 계획한 것으로 바라보았다. 이어 619일에 일본군 수십 명이 분원 안으로 들어와 삼관정(三觀亭)에서 쉬다가 돌아갔으며, 그 이튿날 수천 명의 일본군이 우천(牛川)에 들어왔다가 1천 명은 우천에 진을 치고 나머지 병력은 광주와 여주로 올라갔다. 이때 일본군은 소나무 기둥을 끌고 와서 전선(電線)을 세우고 삼관정에 전보기(電報機)를 설치하였다.

621일에는 일병 몇천 명이 광화문 밖을 막고 진을 치고 궁성을 포위하였다.”는 소식과 도성 안 백성들의 곡성이 진동한다는 내용, 일본 군사가 4대문을 막고 검문검색을 한다는 서울 소식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622일에는 청병 3만여 명이 남양(南陽)에 하륙하여 들어왔다는 내용을, 626일에는 청군은 수원으로 올라오고 일본군은 수원으로 내려간다는 소식을, 726일에는 왜와 청이 동설령(冬雪嶺)에서 전투하여 왜병 7천 명이 모두 몰살하였다.”는 내용을, 9월에는 청병이 크게 패하여 곧바로 의주로 달아나고, 서울은 옛날처럼 편안하다.”는 소식 등을 기록하고 있다.

청일전쟁과 관련하여 민간에 떠도는 소문을 전하고 있는데, 조정에서 자주국을 만들려고 중국을 배척하고 일본과 암암리에 모여 계책을 꾸민다거나, “중국이 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려고 은밀히 일병으로 하여금 와서 머물게 하여 흔단(?)을 만들어벌이는 전쟁이라는 등의 근거 없는 풍문들이 나돌고 있었다.

이처럼 분원 일대에 진을 치거나 지나가는 청일군을 보고, 전쟁에 관련된 소문 등을 접한 지규식은 소동이 없지 않을 것이니, 거주하는 사람이 어찌 편안히 지낼 수 있겠는가?”라고 우려를 표시하였다.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의 와중에서 진행된 갑오개혁에 대한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189465일에는 일본 사신이 제시한 개혁안 5조목을 전하면서 모두 폐하께서 위임하여 파견한 몇 사람과 회동하여 상의하여 마련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내정의 서치(庶治)와 변법(變法)을 정리하려는 강령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때 주목되는 것은 양근에서 성장한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의 정계 복귀 소식을 접한 후, 주변 양반들과 지규식이 불길한 조짐이라고 걱정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내막은 알 수 없으나, 서로 알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619일에는 서울에서 보내온 글을 보고 “11일 묘당(廟堂)에서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하고 당상관과 낭관을 차정(差定)하라는 전교가 있어 회동하여 상의하였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고종실록611일자 내용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623일에는 일본 병사들이 궁궐을 포위하고 있어 국왕 등 삼전(三殿)이 곤경에 처해 있다는 내용과, 대원군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시행하겠다.”고 했다는 설 등을 소개하고 있다. 628일에는 김홍집이 영의정에 임명된 것을 비롯하여 새로 임명된 내각의 명단을, 그 이튿날에는 궁내부의정부 등 새로운 정부조직과 윤웅렬(尹雄烈)신기선(申箕善) 등이 유배에서 풀려난 내용을, 75일에는 의복제도를 변경한다는 것을, 9월에는 개화의 일은 운현궁에서 주도하여 결단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러한 서울 정가 소식들은 소문의 형태로도 전달되었지만, 서울에서 보내온 정가 소식지인정지(政紙)문적(文蹟)을 직접 보고 기록한 경우도 있어, 일부 내용은 매우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동학농민군의 저항과 청일전쟁갑오개혁의 물결이 한창이던 18948월에 분원과 주변 마을에서는 각 동구(洞口) 요긴한 곳에 돌을 모아 쌓아 두고 뜻밖에 생길 환란에 대비하였으며, 이웃 마을과 서로 도와 환란에 구제하기로 약조하기도 하였다. 당시 불안한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마을 단위로 자위책을 강구한 것으로 보인다.

서양인도 목격되고 있었는데, 18924월 남한산성에서 내려온 서양인 2명이 분원에 이르러 백토(白土) 1석을 사 가지고 다시 남한산성으로 향한 일이 있었다.

당시 어지러운 대내외 정세에 대한 지규식의 입장을 보면, 그는 청군일군의 행렬을 목격하고 일본군이 도성을 일방적으로 통제함으로써 나타나는 참혹한 형상을 전해 들으면서 놀랍고 한탄스럽다.”고 소극적 비판을 표현할 뿐, 일제의 침략적 의도와 속성에 대한 지적과 인식은 거의 드러나 있지 않다. 반면 동학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또한 전주(全州)의 유면호(柳冕鎬)가 올린 시폐(時弊)와 금상(今上)의 부덕함을 진술한 상소를 보고 그 사람됨이 강직하다.”고 평한 것을 보면, 당시의 국왕과 지배층의 정국운영과 불안한 정세에 대해 비판적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3) 다양한 생활 문화 풍속도

 

 

세시 풍속과 통과의례

일기에는 명절과 각 계절의 절기에 행해지는 세시 풍속(歲時風俗)과 사람이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통과의례를 엿볼 수 있는 내용들이 곳곳에 담겨 있다.

설날에는 차례를 지내고 집안과 동네 어른을 찾아가 세배를 올렸으며, 분원공소 운영과 관련된 이웃 마을의 세도가에게 인사를 가기도 했다. 양반가에서는 안주와 음식을 푸짐하게 장만하여 이웃 사람들을 불러 대접하기도 했으며, 분원공소공방에서는 고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새해 첫날에는 내곡(內谷)의 관성제군(關聖帝君)을 배알하고 한 해의 신수를 빌고, 추첨하여 신년 운수를 점치기도 하였다.

정월 대보름에는 다리에 나가 달에 절하고 소원을 빌었으며, 무동(舞童)들은 징과 북소리를 울리면서 여러 동네를 돌아다녔고, 젊은이들은 수일간 기악(妓樂)을 거느리고 노래하고 춤추며 즐겼다. 또 마을 간에 무동놀이를 하다가 승리를 다투어 시비 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입춘(立春)에는 집안 기둥에 붙이는 춘첩자(春帖子)’를 여러 사람들에게 써 주었고, 아이들에게도 춘첩자를 써 보도록 했다.

단오에 남자들은 동네 강에 나가 천렵하기도 하였고, 부녀자들은 승방(僧房)에 가서 놀았는데, 18945월에는 한 부인이 그네를 타다 줄이 끊어져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섣달그믐날에는 온 식구들이 납일약수(臘日藥水)를 마셨으며, 전염병을 물리치기 위해 붉은색으로 천행이과(天行已過)’라는 4글자를 써서 대문 위에 붙이기도 하였다.

연말연시에는 달력과 담배북어고기 등 각종 선물을 주고받았는데, 담배는 12, 북어는 12두름, 꿩고기[生雉]23마리, 돼지다리 1, 갈비 1짝을 주고받았다. 그 외에 소염통메밀양초 등이 선물로 이용되었다.

또한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통과의례와 관혼상제, 각종 애경사에 대한 부조의 풍습을 읽을 수 있는 내용들이 풍부하다.

출산할 때 아들을 낳자 문호가 크게 번창할 모양이라고 기뻐하였으며, 딸을 낳자 비록 아들을 낳은 것만 못하나 순산하였으니 매우 다행스럽다.”고 하였다. 또한 부인이 해산 진통이 있자, 집 안을 깨끗이 하고 세수하고 향을 피우고 주변을 정리하였으며, 불수산(佛手散)을 달여 먹여 출산의 고통을 덜어 주려 했다.

성년식(成年式)이라 할 수 있는 관례(冠禮) 때에는 빈객(賓客)이 상투를 매 주고 관을 씌우고 옷을 입혔으며, 축을 읽고 사당에 고하였다. 지규식은 이웃 마을 김 좌랑 아들의 관례 때 복인(福人)이 되어 상투를 올려 주고, 세 번 관을 갈아 씌우던 삼가(三加)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관례가 끝난 후에는 동네 사람들을 초대하여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대접하였다. 이러한 관례는 간소화된 의식으로서, 예서(禮書)의 법식에 따른 전형적 절차는 아니었다. 또한 관례 다음 날 결혼 날짜를 잡는 것으로 보아 혼례 절차 속에 포함된 간략화한 관례 절차로 보인다.

지규식의 둘째 아들 재구(再龜)의 혼례 절차를 보면, 결혼에 대한 양가 합의가 이루어지자 곧바로 그 이튿날 사주단자를 신부집에 보내고 있다. 이듬해 18일에 신랑의 관례를 행하고, 그 이튿날 19일에 택일(擇日)하였으며, 129일에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예물을 보내는 납폐(納幣)를 행하였다. 그리고 218일에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결혼의 예식을 밟는 전안(奠雁)을 거행하고, 224일에 신부가 시집으로 들어오는 우귀(于歸)를 행하였다. 지규식은 둘째 아들의 혼사를 마무리하고, 바로 이어 셋째 아들 문구의 혼사를 서두르고 있었다.

상례(喪禮) 관련 기록은 꽤 많이 등장하고 있다. 장례 때에는 상가를 찾아 조문하고, 금품과 물품 부조를 하였으며, 때로는 호상(護喪)이 되어 며칠씩 가서 장례 일을 보기도 하였다. 공방의 대행례(大行禮)였던 김익준(金益俊) 모친상은 7일장으로 치러졌는데, 이때는 며칠씩 가서 온종일 호상(護喪)의 일을 맡아 보았다. 친구 정응문(鄭應聞)이 죽었을 때는 5일장으로 치러졌는데, 4일째 되는 날 밤이 깊어서 발인(發靷)하고, 그 이튿날 장사 지내고 있었다.

각종 혼례와 상례제례 등의 애경사에 돈과 물품을 부조하였는데, 당사자와의 관계에 따라 차이가 있겠으나, 대체로 10, 15, 20냥 정도를 건네고 있었다. 당시 쌀 1되에 대략 3233푼 정도였던 점을 감안하면, 부조액은 쌀 36되 정도에 달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예외로 사정이 딱한 경우에는 50냥을 부조하기도 했다. 물품 부조로는 떡 1시루, 1동이, 국수 1박스, 백지, 허파 1, 소염통 1부 등을 보내고 있었다.

 

 

가족 관계 및 이성과의 교제

 

 

일기에는 지규식의 가족 관계 또한 잘 나타나 있다. 지규식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었으며, 부인과 여러 아들딸을 두고 있었다. 형제는 6명 이상이었고, 지규식은 넷째이거나 그 아래에 해당되었다.

홀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곳곳에 드러나 있는데, 어머니가 아프면 인삼양위탕(人蔘養胃湯)사물탕(四物湯)계강환(桂薑丸) 등을 구입하여 복용하도록 하였다.

처가는 남한산성 부근에 있었으며, 처남으로 한시규(韓始奎)가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처는 한()씨임을 알 수 있다. 남한산성 북문 밖 법화동(法華洞)에는 선친의 묘가 있어 명절 때는 그곳으로 성묘를 가곤 하였다.

동생 연식(演植)은 형을 도와 분원 관계 일들을 보고 있었는데, 때때로 문제를 일으켜 형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1892년에는 연식이 800냥의 빚을 끌어 쓰고 갚지 못하여 빚쟁이가 집까지 찾아와 행패를 부렸으며, 1893년에는 무단히 집을 나가 형과 어머니의 애를 태우기도 했다. 1894년에는 다른 사람의 여자와 놀아나다 돈 1천 냥을 낭비하고, 그 돈을 갚지 못하여 의관을 찢기고 무수히 난타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형은 그러한 동생을 물정에 어둡고 마음이 나약하다고 한탄하면서도 동생의 빚 문제 등을 책임지고 뒤치다꺼리해 주고 있었다.

둘째셋째 형수는 함께 살고 있거나 가까이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형은 사망한 것으로 짐작되나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다. 둘째와 셋째 형수가 각각 이천(利川)과 미호(美湖)로 근친(覲親)을 갈 때면 가마꾼을 불러 가마에 태워 보내고, 자신의 아들이나 동생을 딸려 보냈다. 형수들은 한 번 근친을 가면 보통 10일 내지 1개월 이상씩 친정에서 머물다 돌아왔다.

아들로는 둘째 재구(再龜), 셋째 문구(文龜) 등 여러 명이 있었고, 딸도 있었다. 지규식은 아이들 교육에 정성을 다하였는데, 가숙(家塾)을 두거나 서당에 아이들을 보내 교육하였으며, 아이들이 읽을통감(通鑑)등의 책자를 사기도 했다. 또한 글 선생과 함께 아이들 운자에 시를 짓기도 하고, 아이들이 공부를 마치고 베푸는 파접례(罷接禮)에 돈을 내주기도 하였다. 또한 아이들이 공부를 게을리 하면 종아리를 수십 대씩 때리기도 했으며, 기국(技局)에 드나들었다 하여 엄하게 꾸짖기도 했다.

일기에는 지규식과 주변 남성들의 부인 이외 여성들과의 관계와 이야기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어, 가부장적 질서 아래 드러난 남성 중심의 성 문화와 풍속을 엿볼 수 있다.

지규식은 가까운 거리의 장춘헌(長春軒)에 애인을 두고 있었는데, ‘춘헌으로 호칭하고 있었다. 1891년까지만 해도 이인(伊人)’이라 부르는 여성과 매우 가깝게 지냈으나, 189110월 이후에는 장춘헌(長春軒)에 있는 춘헌이라 불리는 여인과 자주 만나고 있었다. 이때 춘헌이라 불린 여인은 난경(蘭卿)’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인과는 다른 여인으로 보이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춘헌과 관련해서는 난경 이외에 난인(蘭人)소난(小蘭) 등의 이름을 가진 여인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같은 사람을 달리 부르는 호칭일 수도 있고, 서로 다른 여인들의 이름일 수도 있다.

지규식은 하루가 멀다 할 정도로 춘헌에 자주 드나들었으며, 밤이 깊도록 정담을 나누곤 하였다. 때로는 하루 종일 죽치고 앉아 이야기를 하였으며, 함께 강변 등으로 놀러 나가기도 했다. 춘헌 이외에도 이인매향(梅香)소선(素仙) 등과도 가끔씩 어울리곤 하였다.

그러나 춘헌은 지규식 이외에 다른 남성들과도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에 지규식은 춘헌에서 이상한 일’, ‘못볼 것을 보고 영원히 절교하기를 수차례 반복하고 있었다. 18928월에는 춘헌이 김가네 버림당한 부인의 독설로 반나절이나 곤욕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공방의 대행례를 지낸 김익준과도 가깝게 지내 그의 애를 태우기도 했다.

지규식은 춘헌에 갈 때마다 돈과 각종 선물 등을 건네었는데, 현금으로는 5, 10, 20냥 등을 수시로 주었고, 그 외 담뱃값땔나무값 등으로 2, 5냥 등을 자주 지급하였다. 물건으로는 모시삼베생명주(生明紬)양항라(洋亢羅)모초단(?) 등의 옷감, 참분 등 화장품, 앵두참외 등 과일류, 정육약병아리소염통 등의 육류, 은귀걸이은장도부채마른신담배담뱃대 등을 선물하고 있었다.

그는 춘헌이 아프다고 하면 약을 지어 보내고, 사물탕이나 인삼을 직접 달여 먹이는 정성을 보였으며, 가엾게 여기고 마음 아파하기도 했다. 한 번은 춘헌이 저녁식사를 걸렀다고 하자, 쌀을 구하기 위해 밤늦게 시중을 돌아다녔으나 구하지 못하자, 자신의 집에서 밥을 갖다 주기도 했다.

일기에는 지규식 이외에도 주변 남성들의 여성 관계도 나타나 있다. 공인으로 짐작되는 이희돈(李熙敦)이라는 자는 1천 냥을 빚내어 창녀[?] 1명을 사서 동거하였는데, 지규식의 동생이 어울려 놀다가 1천 냥을 낭비하여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후 그 여자가 이희돈과 헤어지자, 공인으로 보이는 정문한(鄭文漢)이 거두어 집 안에 두기도 했다. 생원 한 소사(韓少思)는 출산이 가까운 서울 소실을 분원으로 데리고 와 방을 얻어 주었고, 이덕재(李德才)라는 자의 소실 강진실(康津室)은 그와 헤어지고 다른 사람에게 가기도 했다. 오위장 이원유(李元裕)는 소실과 작별하고 넋이 빠지고 창자가 끊어질 듯애통해 하였으며, 공방 대행례였던 김익준은 서울 애인을 춘헌으로 데려와 기거토록 하였다.

 

 

어음사채 등 사금융의 실태와 물가 현황

 

 

일기에는 공적 금융기관이 없었던 이 시기 사금융의 실태를 엿볼 수 있는 내용들이 상당히 많이 수록되어 있다. 그릇의 판매와 유통은 물론 당대의 각종 경제 활동에 있어서 어음과 환표(換標)가 활발하게 이용되고 있었고, 사채 이용 또한 매우 빈번하였으며, 외상 거래도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어음은 음표(音標)와편표(瓦片標) 등으로도 표기되었고, 액수는 몇십 냥몇백 냥몇천 냥 단위의 것들이 많았으며 5천 냥1만 냥15천 냥 등의 고액권 어음도 이용되었다. 또한 지정된 제삼자에게 금전 지급을 요청하던 문서인 환표(換標)도 많이 이용하고 있었는데, 때로는 환표를 받는 사람이 지불을 거절하기도 했다. 환표 또한 많이 이용되었으며, 환간(換簡)이라고도 하였다.

공소분원의 운영 및 개인적 필요에 의한 사채 거래도 매우 빈번하였다. 사채 거래는 조직과 개인, 개인과 개인 간에도 이루어지고 있었고, 지규식을 비롯하여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사채 거래에 얽혀 움직이고 있었다. 돈을 빌리는 액수는 천차만별인데, 수십 냥에서부터 수만 냥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부자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목돈의 이자 놀이를 부탁하기도 하였다.

금전 대부에 있어서 이자는 보통 ‘5푼변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그 기간은 1개월을 단위로 한 것으로 보인다. 때로는 ‘3푼변’, ‘4푼변으로 빌리기도 했고, 5푼 선변에 갑리(甲利)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때 갑리(甲利)란 이자를 곱쳐서 받는 고리대로, 1개월에 10할 이상의 이자를 받기도 했다 한다. 5푼 이자일 경우 1년에 6할의 이자가 붙는 셈인데, 1천 냥을 빚졌을 경우 단순 이자만 계산하여도 1달에 50, 1년에 600냥에 달하여 원금에 육박하는 고리(高利)에 해당하는 것이다. 더구나 복리로 계산하면 그 이자는 더욱 늘어난다.

또한 시변(市邊)장변(場邊)의 금리가 나오고 있는데, 이는 5일장을 기준으로 닷새 동안의 이자를 셈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자율은 나와 있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이율이 높은 고리대금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고금리의 대출이자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으며, 공인 중에는 수천 냥의 빚을 갚지 못하여 공방에서 퇴출되는 사람도 있었고, 부채 이자만 수천 냥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고종 때 발간된대전회통(大典會通)에 의하면, 공채(公債)사채(私債)를 막론하고 이자로 1할 이상을 받는 자는 장 802년간 도형(徒刑)”에 처하고, “사사로이 갑리(甲利)를 받는 자는 장 100”으로 처벌할 것을 규정하여 폭력적 고리(高利)를 규제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갑리와 같은 혹독한 이자율이 존재하고 있었다.

또한 일기에는 서울과 분원 일대에서 각종 생활용품을 구입한 내용이 풍부하게 담겨 있으며, 이를 통해 당대의 생활용품의 구성과 소비문화, 물가 동향 등을 엿볼 수 있다. 지규식이 구입한 물건 중 단위와 가격이 나와 있는 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 표와 같다.

 

주식인 쌀 가격이 큰 변동을 보이고 있는데, 18921되에 31전 정도이던 것이 18938월에는 45전으로 치솟아 무려 43%의 폭등세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1893년 경상도 등지의 흉작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89410월에는 다시 1되에 3냥 정도로 예년 수준을 되찾고 있었다. 콩은 1되에 3냥 정도로 쌀값보다 약간 낮지만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고, 양념으로 쓰이는 참깨는 1되에 475푼으로 쌀값의 1.5배 정도 가격으로 나타나고 있다.

꿩고기[生雉]가 많이 이용되었던 듯, 연말 무렵에는 생치를 구입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며, 그 가격은 1마리에 425푼에 달하고 있었다. 분원은 강변에 위치하고 있었던 만큼 민물고기를 애용했으며, 가끔씩 쏘가리[錦鱗魚]를 샀는데, 1마리에 24냥 정도를 지급하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분원 주변에는 붕어찜과 매운탕 전문점이 밀집되어 있으며, 전국적으로도 유명하다.

가축 가격을 보면, 1마리는 390, 417냥으로 쌀 1314말 정도에 해당되었으며, 돼지는 1마리에 70냥 정도, 암탉은 1마리에 3, 암꿩은 1마리에 35전 정도에 거래되고 있었다.

후추가 1봉지에 45전이었고, 공방 도중에서 사용할 교자(驕子)를 맞추는 데 180냥이 들어갔다. [] 1척은 1,600냥에 거래되고 있었는데, 이는 쌀 4055말 정도에 해당되는 금액이다.

당시 물가에서 주목되는 것은 주식인 쌀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높았다는 점이다. 그만큼 일상생활에서 식료품의 가격 부담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외에 각종 노동에 대한 임금 지불 기사가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소금 5석을 져 들인 품삯으로 65, 돼지 1마리를 잡아 준 삯으로 35전을 지출하고 있었고, 가마꾼에 대한 품삯으로 100, 136냥 등이 지급되었다. 또한 타작하고 김매는 농사일에 대한 임금이 수시로 지불되고 있었으나, 기준이 제시되어 있지 않고 선불(先拂) 등의 내용이 개입되어 있어 정확한 임금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계모임여가 생활 등 다양한 사회상

자료에는 계의 조직과 운영, 독서활쏘기 등 여가 생활, 노비유랑인의 존재, 도문연(到門宴) 등 각종 사회상과 일상사를 엿볼 수 있는 내용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당시 사회에는 금융과 상호부조 등을 목적으로 한 각종 계가 성행하고 있었는데, 본 일기에도 각종 계에 관한 내용이 여러 곳에 나오고 있다. 일기에는 산통계(算筒契)포목계(布木契)초상계(初喪契)조애계(助哀契)사계(射契)월수계(月收契)금석계(金石契) 등이 보이고 있으며, 지규식은 금석계의 행수(行首) 직임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 중 초상계와 조애계는 장례와 상가(喪家) 부조를 목적으로 한 것이라 하겠으며, 사계는 활쏘기를 위해 만든 조직으로 한 번에 24냥의 돈을 내고 있었다.

18922월에 만든 초상계의 경우, 구성원은 종로 상인 조창희(趙昌熙) 21명이었고, 각각 506전씩 출자하기로 하였다. 운영 방식은 본전, 곧 전체 곗돈은 그대로 남겨 두고 이자만 취하여 사용하기로 하였으며, 곗돈 1,050냥을 이원유(李元裕)에게 빚 주기로 하였다. 조애계의 경우에도 본전과 이자를 합한 돈 2,840냥을 공방(貢房)에 빚 놓기도 하였다.

지규식은 한가로운 여가 시간이 나면 짬짬이 책을 읽거나 시를 지었고, 활쏘기바둑 등의 놀이를 하였다.

그는 틈틈이 삼국지(三國志)》ㆍ《까치전등의 소설을 읽고 있었고, 박지원(朴趾源)연암집(燕巖集)과 김천택(金天澤)이 엮은 청구영언(靑丘永言), 남상교(南尙敎)의 것으로 보이는 우촌시집(雨村詩集)등의 시문집을 보거나 초록하여 책자로 만들어 읽었다. 그 외에 중국 청나라 희곡인 도화선(桃花扇)6권을 빌려 보기도 했다.

또한 일기에는 지인들과 어울려 시를 짓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지규식은 홀로 시를 쓰기도 하였지만, 주로 유 초사(柳蕉史)한 소사(韓少思)박광천(朴廣泉)홍 옥포(洪玉圃)조희치(趙希痴)유 지헌((柳芝軒)를 비롯하여 조 진사(趙進士) 형제 등 여러 사람과 어울려 시를 지었다. 그들은 우죽산방(友竹山房)이나 조 진사 서재에 모여 시를 지었으며, 동네 뒷산이나 삼관정(三觀亭) 옛터에 올라가 시를 짓곤 하였다. 그들은 새벽닭이 울 때까지 시를 짓는 경우가 많았으며, 대부분 7언절구(七言絶句) 형식을 띠고 있었다.

사람들은 활터인 사정(射亭)에 모여 활쏘기를 즐기고 시합을 벌였으며, 사계(射契)를 조직하여 비용을 충당하였다. 분원 주위에는 사정이 여러 군데 있었는데, 광복리사정(光福里射亭)퇴촌사정(退村射亭)우천사정(牛川射亭)양류가사정(楊柳街射亭) 등이 드러나 있다. 사정의 회원인 사원(射員)들은 여럿이 모여 해가 질 때까지 활쏘기를 연습하곤 하였으며, 때로는 관례에 따라 남북으로 편을 갈라 활쏘기를 겨루기도 하였다. 이때 활쏘기 시합은 귀천사원(歸川射員)분원사원(分院射員) 등 마을 단위로 구분되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18925월에는 광복리사정에서 각처 사원들이 모여 활쏘기 시합을 하였는데, 화살 수를 잘못 계산한 일이 있어 분원사원과 귀천사원이 모두 활과 화살을 거두어 돌아오기도 하였다. 그러자 사정에서 수없이 사과하고 다시 모일 것을 간곡히 요청하기도 했다.

그는 종종 동료들과 어울려 바둑을 두었으며, 때로는 하루 종일 바둑으로 소일하기도 하였다. 노름의 일종인 골패놀이를 하기도 했다.

18949월에는 서울에 간 동료들이 일본인 묘기 놀이를 구경하고자 하여 진고개[泥峴, 현 충무로]로 몰려가 1인당 1냥씩 내고 기국(技局)에 들어가 묘기를 보았다. 그런데 일행 중 형제가 함께 안경을 잃어버리자 저 기인(技人)이 요술을 부려 훔쳐 간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일기에는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집에 돌아와 베풀던 도문잔치[到門宴] 관련 기록이 꽤 많았다. 조근수(趙近守)함장섭(咸章燮)김진한(金鎭漢)정도경(鄭道京) 등의 도문연이 있었으며, 그때마다 지규식은 10, 15, 20냥의 돈을 부조하였다. 18935월에는 이웃 마을 석촌(石村)의 교관(敎官) 김기정(金沂亭)이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도문연에 쓸 비용으로 1,500냥을 빚 얻어 잔치를 벌였으며, 하루 종일 노래하고 춤추며 놀았다고 한다.

도문잔치와 공소의 행사 때에는 전국의 명창이나 소리꾼 등을 불러 노래를 들었는데, 성창렬(成昌列)과 김만성(金萬成) 등이 초대되었다. 189211월에는 전주의 명창 성창렬(成昌列)을 불러 춘향가를 들었는데 정말 잘 불렀다.”고 하였다. 성창렬은 공소에 23일간 머물렀다 떠났는데, 50냥을 받았다. 바로 그 무렵 쌀 1되에 355푼씩 거래되었으니, 그는 소리의 대가로 쌀 14되 정도를 받은 셈이다.

동내(洞內)에서는 매년 고청신사(高請神祀)’라는 제사를 지냈다. 비용은 여러 동네에서 추렴하여 충당하였는데, 지규식은 매번 25냥씩 내었다. 고청신사 때에는 깃발을 내세우고 육장군(六將軍) 신위를 모시고 산 뒤쪽으로 가서 제사를 지냈으며, 도구를 이용하여 화포(?)를 쏘고, 기악(妓樂)을 불러 종일 노래와 춤을 추었다. 공소에는 육장군 화상(畵像)을 설치하였다.

고청신사를 지내는 날에는 각처에서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성황을 이루었으며, 제사를 지내는 뒷산 언덕 좌우에 음식 장사가 즐비하게 늘어서 장관을 연출하였다. 고청신사는 마을 축제처럼 진행되었고, 그날은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볼거리를 즐겼다.

일기에는 노비의 존재도 나타나 있는데, 18925월에는 장춘헌에 있는 이월(二月)’이라는 여자 노비가 도망하다가 붙잡혀 돌아왔으나, 같은 해 윤6월에 다시 도망가 버렸다.

189212월에는 부모 형제 없이 이리저리 떠도는 19세의 석암회(石岩回)라는 청년을 거두어 집에 두고 사환으로 부린 기록이 있다. 경상도 자인읍(慈仁邑) 출신인 석암회는 분원과 집 안의 잔심부름이나 물건 운반하는 일을 하였다. 그가 임금을 받았는지의 여부와 받았다면 얼마나 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요기하라고 5전을 준 기록은 있다.

18936월에는 죽은 남편이 진 빚을 갚기 위해 찾아온 미망인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지규식은 10여 년 전 춘천에 사는 김중련(金仲連)에게 45냥을 빌려 주었으나, 김씨가 죽은 후 그 일을 잊어버렸다. 그런데 개가한 김씨의 부인이 어린 자식과 함께 찾아와 남편의 부채를 갚겠다고 하였다. 이에 지규식은 본전만 받고, 노자로 15냥을 주고 그릇 23개를 주어 보냈으며, “그 뜻은 칭찬할 만하고 공경스럽다.”고 평가하였다.

이와 같이 일기에는 민간 번조를 허용한 이후 분원공소의 운영과 공인들의 활동, 그릇의 진상과 시장 판매, 자금의 운용과 공가(貢價) 문제 등을 엿볼 수 있는 내용들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이러한 내용들은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 편입된 이후 민영화된 분원공소의 험난한 길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또한 동학과 청일전쟁갑오개혁 등 당대의 복잡한 대내외 정세를 듣거나 직접 경험하면서 느낀 생각과 현실적 입장도 드러나 있으며, 세시 풍속과 통과의례계조직여가 활동 등 당대인의 생활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내용들도 적지 않다. 따라서 본 일기는 분원의 운영과 자금의 융통, 정부와의 관계, 당대의 사회경제적 관습과 문화 및 일상사를 이해할 수 있는 보고(寶庫)라 하겠다.

이후 일기에서는 분원공소의 번자회사(燔磁會社)’로의 전환과 은행 거래, 도공(陶工)의 일본 유학 파견 등 전통적 수공업의 근대적 기업화 노력을 엿볼 수 있으며, 일본러시아 등 외세의 침투와 을미사변단발령의병 등 혼란스러운 시국에 대한 내용이 풍부하게 소개될 것이다. 또한 개인적 직업 변화와 아들의 근대 학교 입학 등 다양한 사회경제적 변화, 전통과 근대의 모습이 맞물린 생활 문화의 변화 양상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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