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 950년)
고려 초기 광종 때 양인이었다가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을 조사하여 다시 양인이 될 수 있도록 조처한 법. 미국 에이브러햄 링컨의 노예해방과 비교했을 때, 반대 세력의 기득권을 약화시켰다는 점에서 유사한 점을 보인다.
가령 조선왕조도 이 영향을 안 받은건 아니다. 고려말 조선초에 부곡민 대폭 축소와 철폐, 과전법 시행으로 권문세족들이나 사찰이 막대한 고리대를 올리거나 대토지화를 통한 토지 강탈로 땅을 뺏기고 경제력이 바닥이 되면 자발적이나 강제적이든 양인들이 자발적으로 노비가 되는 것을 제어했다. 대체적으로 대토지화를 통해 집을 강탈당하여 거주지조차 불명확해지면 노비가 된다. 또한 거주를 제한당한 집단도 천시되고 이때 노비가 되는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토지개혁을 통해 이것을 말끔히 정리했다. 토지개혁을 함과 동시에 중후기 늘어났던 노비의 숫자도 급격히 감소했다. 더욱이 조선도 노비변정도감을 세워 권문세가들로부터 노비가 된 사람들을 가려 본래의 신분으로 되돌렸다. 특히나 숭유억불 정책에 의거하여 절간의 노비를 90% 이상이나 면천을 시켜줬다. 이 작업만 하는데 조선은 무려 몇십년이나 걸렸다.
뿐만 아니라 고려조 내내 노비 다음으로 미천한 신분이자 반은 양민이고 반은 천민인 불안정한 계급을 가지던 향소부곡민들을 향소부곡 축소와 철폐로 준양민에서 본격적으로 양민으로 돌렸다. 고려 광종조차 향소부곡 문제에 관심은 없었다.
2. 내용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수많은 호족들에게 왕씨 성을 내려주거나(사성정책), 자신의 사돈으로 삼는 등 적극적인 호족 포섭 정책을 통하여 후삼국의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문제는 이게 딱 통일때 까지만 좋았다는 것. 29명의 부인들에게서 25명의 아들을 두었던만큼 당장 왕건 본인의 말년 무렵부터 후계구도를 놓고 호족들 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일어나고, 태조의 적장자였음에도 별볼일 없는 외가 탓에 간신히 뒤를 이을 수 있었던 혜종은 왕규의 난에서도 보이듯이 재위기간 내내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에도 급급하다가 요절하고 만다. 혜종을 이은 정종 역시 호족들의 기득권을 뒤흔들기 위하여 북벌을 기치로 내걸며서 서경 천도를 시도했지만 급사 크리.. 그렇지만 정종의 뒤를 이은 동생 광종 역시 포기하지 않고 호족들을 억제하기 위한 시도를 다방면에서 실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 중 하나로 등장한게 바로 노비안검법.
당시 호족은 후삼국들간의 다툼 와중에 포로가 되었거나 빚을 갚지 못한 것과 같은 까닭으로 양인에서 노비가 된 사람들을 많이 소유하였다. 당시 관념상 노비는 재산으로, 호족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이 되었고, 이는 왕권을 위협하는 것이므로 왕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찍어누를 필요가 있었다. 물론 이런 속마음을 대놓고 명분으로 삼을 수는 없었기에 광종이 내건 명분은 신라-고려의 왕조 교체기를 통하여 혼란했던 사회적 신분 질서를 바로잡는다였다. 이를 통해 호족의 세력을 뿌리부터 흔들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요, 양인 계층으로 포섭된 해방 노비들은 세금을 내게 됐으므로 그야말로 일석이조.
3. 호족의 반응
당연히 호족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광종의 부인 대목왕후 황보씨까지도 이 법에 반대했을 지경이니... 그렇지만 광종의 의지가 너무나 굳건했던 탓에 끝내 폐지되지 않았으나, 나중에 30년쯤 지나자 성종 때 최승로의 건의(시무 28조)를 받아들여 노비환천법을 만들어서 양인이 된 자들을 다시 노비로 돌려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