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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이야기

고려 강화도천도(江華島遷都, 1232년)

작성자관운|작성시간18.01.29|조회수401 목록 댓글 0


고려 강화도천도(江華島遷都, 1232)

 

 

 

 

 


 

 

고려와 몽골 제국의 전쟁(여몽전쟁) 때 몽골군이 고려에 침입한 1년 후 당시 무신정권 지도자였던 최우가 국권을 유지하기 위해 기존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 강화도의 강도(江都)로 수도를 옮긴 사건이다. 당시 무신정권의 최우는 개경을 지키자고 주장한 김세충의 목을 베고,무신 정권은 강화천도를 결정해버린다.

 

 

 

천도할 당시 6월로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임에도 불구하고 고종과 대신들은 최우의 협박에 못이겨 강화로 비를 맞으며 천도를 하였다. 최우는 녹전차100대를 동원해서 자신의 재산을 강화도에 옮겼다.

 

 

2. 강화도 천도 이후

 

 

강화도 천도 이후 서리였던 이통이 초적과 노비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개경 일대를 약탈하고 개경이 쑥대밭이 된다. 최우는 이들을 토벌하고 강화에 자신의 거처를 짓는다고 군사 수천명을 동원해 개경의 나무를 구해 사용했다. 심지어 정원에 심을 나무도 모두 육지에서 가져오게 한다. 이 건축 과정에서 공사에 투입된 사람들은 얼어죽고 물에 빠져죽는 등 여러가지 일들이 속출하였다.

 

또한 고려가 수도를 섬인 강화도로 옮기니 이에 분노한 몽골이 다시 육지로 환도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강화도의 고려 조정은 이를 무시하고 이는 몽골 2차 침공의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1232(고종 19) 천도 이후 39년 동안 여기서 금속활자(팔만대장경)를 만들기도 하였다.

 

수도 방어를 위해 강화산성, 중성, 외성을 쌓았는데, 궁전 등은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모두 흔적도 없이 무너뜨렸다.

 

 

 

천도(遷都) 문제의 논의

 

고려의 무인 집정자 최우(崔瑀)가 몽골에 대한 항전을 결의하고 강화로 도읍을 옮긴 것은 1232(고종19) 7월의 일이다. 천도(遷都) 문제가 고려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몽골군 철수 직후인 12322월의 일이었고, 천도(遷都) 방침이 확정된 것이 616, 국왕이 강화에 들어간 것이 77일의 일이었다. 논의에서 확정 그리고 시행에 이르기까지는 불과 반년의 기간도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천도(遷都) 문제는 1232(고종19) 220일 재추회의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논의되었고 그것은 5월까지 계속된다. 처음 전목사(典牧司)에서 논의되었던 것이 5월에는 선경전(宣慶殿)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계속된 논의에도 불구하고 결론이 내려지지 못한 채 회의가 계속된 것 같다.

최우가 재추(宰樞)들을 그 집에 모아 천도를 의논하였다. (중략) 야별초지유(夜別抄指諭) 김세충(金世沖)이 문을 밀치고 들어와 힐문하기를 송경(松京)은 태조 이래로 역대를 지켜 내려와 무릇 2백년이 되었다. ()이 견고하며 군사와 양식이 족하니 진실로 마땅히 힘을 합하여 지키어서 호위할 수 있는데 이를 버리고 가면 장차 도읍할 곳이 어디냐하였다.” (<고려사절요> 16 고종196)

 

천도(遷都)반대론의 강력한 대두(擡頭)는 최씨정권을 난감케 했지만, 천도(遷都)론자들은 극적인 방법으로 반대론을 위압해 버렸다. 천도론자들이 야별초지유(夜別抄指諭) 김세충의 처단을 주장하고, 동석한 상장군 김현보(金鉉甫)가 이에 동조하자 최우는 김세충을 참형시킴으로써 중론을 압도해 천도(遷都)책을 결의시켰던 것이다.

 

천도(遷都)결단의 배경

 

몽골의 1차 침략을 계기로 무인정권이 천도(遷都)를 결단하게 되는 배경으로는 다음과 같은 점을 들 수 있다.

첫째, 1219(고종6) 강동성(江東城) 전투로 인한 여몽관계 성립 이후 고려에 보여준 몽골의 고압적 태도와 무례한 행동이 고려의 반몽의식을 자극시킨 점을 들 수 있다. 몽골의 방자한 태도는 애초 고려가 몽골에 대해 가지고 있던 오랑캐 중에서도 가장 흉악한 존재라는 극악한 선입관을 확신시켰고, 그로 말미암은 자존심의 손상은 고려의 반몽의식을 강화시켰던 것이다.

둘째, 몽골의 경제적 요구가 지나치게 과중했다는 점이다. 1219년 여몽관계가 성립된 이후 제구우 살해사건이 있었던 1225(고종12)까지 공물징구(徵求)를 위한 사신이 매년 수차씩 파견되었고 1차 침략 이후에도 막대한 경제적 징구(徵求)가 일방적으로 요구되었던 것이다.

셋째, 몽골의 고려에 대한 요구가 단순한 공물의 징구(徵求)에서 끝나지 않고 군사의 조달 등 인적 자원에까지 미침으로써 고려를 압박했다는 점이다. 1232(고종19) 3월 몽골의 요청에 따라 배 30척과 목수(木手) 3천 명을 파견한 일이 있으며, 이와 함께 몽골은 포선만노(蒲鮮滿奴) 정벌을 위한 고려의 파병을 강요해 왔던 것이다.

집정자 최우가 천도(遷都)를 결단케 되는 배경의 네 번째 상황은 1차 전쟁 이후 몽골이 고려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시켰던 점 때문이라고 생각되는데 그 구체적인 것이 다루가치(達魯花赤)의 설치였다.

 

천도(遷都)를 통한 대몽항전천도(遷都)를 통한 대몽항전

천도(遷都)를 통한 대몽항전

 

고려와의 강화가 성립된 직후 몽골은 고려의 군사적 요지인 북계(北界)의 여러 성에 72인의 다루가치를 설치해 그 지역을 장악했다. 이로 인해 고려는 변경의 방어 거점을 상실해 버렸을 뿐 아니라 다루가치는 개경에 까지 파견되어 고려 정부를 곤혹케 했던 것이다.

1차 전쟁 이후 전개된 이상의 상황들은 몽골과의 화의론이 제기되기 어려운 객관적 여건이 되었고, 또한 몽골의 간섭으로 인한 정치력 약화의 위기감이 최우로 하여금 천도(遷都)를 통한 대몽항전을 결의케 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더해 한 가지 더 덧붙인다면, 몽골의 침략을 받아 수도함락의 위기 가운데서 천도(遷都)를 단행했던 금나라의 선례가 최우로 하여금 더욱 확신 있게 천도(遷都)를 추진케 했으리라는 점이다. 금나라의 경우 1214년 칭기스칸의 침공으로 수도가 포위되자 화의를 체결하고 곧 수도를 북경부근의 중도(中都)로부터 황하(黃河) 남안(南岸)의 변경(汴京, 개봉)으로 옮겨 항전을 계속했던 것이다.

 

강화도의 지리적 조건

 

천도(遷都)지라면 여러 조건 면에서 강화도만한 곳을 달리 찾을 수 없었을 것 같다. 강화도의 지리적 조건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여러 가지로 지적되어 왔지만 이를 종합하면, 첫째 수전(水戰)에 취약한 몽골군의 약점을 이용할 수 있는 섬지역이라는 점, 둘째 육지에 가까우면서도 조석간만 차와 조류 등으로 방어 효과가 크다는 점, 셋째 개경과의 근접성, 넷째 지방과의 연결 및 조운(漕運) 등의 편의성으로 요약된다.

그렇게 고려의 국도(國都)는 개경에서 강화로 옮겨졌고, 강화는 그 후 39년 동안 고려의 전시 수도로서 그 기능을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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