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은문(迎恩門)과 모화관(慕華館)
조선 태종 7년인 1407년에 태종이 중국에서 내려오는 사신을 몸소 맞이하기 위하여 세운 문. 현재 영은문 주초가 대한민국 사적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1407년에 조선 태종이 "조금이라도 사대(事大)의 예(禮)를 잃어서는 안되며, 마땅히 왕보다 높여 지성(至誠)으로 천사(天使)를 섬겨야 한다"는 입장에서 조선으로 내려오는 명나라 사신을 위하여 건립한 대형 문이다.
태종이 명나라 사신을 고이 영접하던 모화루(慕華樓)를 세우며 함께 건립한 문으로, 이후 중국 사신이 조칙을 가지고 오면 임금이 친히 모화관까지 나오는 것을 상례로 삼도록 하였다.
대한제국 시기까지 존속하였으나, 이후 중화 사대주의의 대표 상징물이라 하여 허물어버리고 그 옆에 독립문을 세웠다.
대한민국 사적 제33호
조선시대에 중국의 사신을 맞아들이던 모화관 앞에 세웠던 주춧돌이다.
개화기에 우리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다짐하는 의미로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면서 그 기둥을 받치던 밑돌인 주초만 남게 되었다. 모화관은 조선 태종 7년(1407)에 처음 세우고 모화루라 하였는데 그 뒤 세종 12년(1430)에 모화관이라 이름을 바꾸고 그 앞에 상징적인 의미의 홍살문을 세웠다. 중종 32년(1537)에 홍살문보다 격식을 갖춘 형식의 문을 만들고 ‘영조문’이라 하였다가 중종 34년(1539)에는 중국 사신의 건의로 영은문이라 이름을 고쳤으며, 연주문·연은문이라고도 하였다.
중종 때 만들어진 문은 1칸 규모이며 두 개의 긴 주춧돌 위에 원기둥을 세우고 우진각지붕을 얹었는데, 지붕은 청기와로 덮고 각종 동물 모양을 조각한 잡상을 배치하였다. 남아 있는 2개의 주초는 2단의 사각형 받침돌 위에 기둥처럼 길게 세워져 있다. 위에 놓인 받침돌에는 2개씩의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다.
1896년 독립문이 세워지면서 주초만 그 앞에 세워두었는데, 1979년 성산대로 공사로 인해 독립문과 함께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모화관
모화관이 있었던 이 일대를 관전동(館前洞), 관후동(館後洞) 또는 이를 줄여 관동(館洞)이라 하였다.
모화관은 조선시대에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곳이었다. 《궁궐지(宮闕志)》에는 태종 8년(1408)에 개경의 영빈관을 본 따 모화루를 건립하였다고 쓰여 있다. 그 후 세종 12년(1430)에 확장, 개수하여 모화관이라 개칭하였다.
세조 원년(1455)에 왕이 중국 사신을 맞기 위해 모화관에 거동했고, 사신이 귀국시에는 백관들이 이 곳에 나와 전송했다. 한편 세조는 동왕(同王) 12년(1467)에 이시애(李施愛) 난(亂)을 평정하기 위해 떠나는 군사들을 이 곳에서 사열했다. 선조 이후에는 세자가 국왕 대신 이 관에 나가 중국 사신을 맞이했으나 청일전쟁 후 모화관은 폐지되었다.
모화관은 건양(建陽) 원년(1896)에 서재필(徐載弼) 등이 독립문을 세우면서 이 관의 이름을 독립관으로 개칭하고 독립협회에서 이 곳을 사용하면서 《독립신문》을 발행하였다.
전일에 이 관 앞에는 홍살문이 있었고 부근에는 큰 연못이 있었으며 연못가에 쟁반처럼 우거진 큰 소나무 아래에는 10여 보를 거닐 수 있는 넓은 빈터가 있었다.
고려 때 어느 왕이 남경(南京)에 행행(行幸)할 때 이 연못가 언덕의 노송 아래에서 비를 피한 일화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쓰여 있다. 그리하여 이 근처의 지명을 반송방, 반송정이라 칭한 것이다.